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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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책을 2년이 지나서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욘 포세 열광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하긴, 바로 다음해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나라 작가 한강이 상을 받았으니 그 파도에 주저앉아 버린 게 당연하기는 하다. <아침 그리고 저녁>이 두 번째 읽은 포세의 책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속으로 이렇게 속삭였다. “포세 씨, 우리 다시 만나지 맙시다.” 속삭임, 속삭임.

  “ㅆㄴㄹ 소설.”

  잊으셨을 거다. ‘ㅆㄴㄹ’이 뭔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설이라는 뜻. 나, 이거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근데 완전히 ㅆㄴㄹ이니 어찌 또 만날 수 있으리.

  재미없느냐고? 아니, 재미없지는 않다.

  별 감흥이 없느냐고? 감흥이 있을 수도 있고, 감동 먹을 사람들은 감동 먹을 만하다.

  다 좋은데, 딱 하나, “ㅆㄴㄹ 소설”이어서 싫을 뿐.


  분위기도 익숙하다. 노르웨이 피오르 해역에 떠 있는 외딴 작은 섬에서의 출생이 아침. 피오르 만을 끼고 형성된 도시에서의 죽음이 저녁. 출생과 죽음, 아침과 저녁의 주인공은 요한네스.

  오래 전. 약 80년쯤 전에 노르웨이 피오르 해역 멀리 작고 외딴 홀멘섬에서 마르타가 진통을 하고 있다. 마르타와 어부 남편 올라이 사이에는 이제 곧 사춘기를 맞을 딸 마그다가 있고 이후 임신을 하지 못했다. 부부는 마그다가 어여쁘고 총명해 굳이 국영수 학원에 보내지 않더라도 담임선생의 칭찬이 대단해 딸 하나로 충분하고, 하느님의 축북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때는 20세기 초. 피오르 해역의 어부들은 어선에 절대 여자를 태우지 않았다. 액운이 닥칠 수도 있어서. 그렇게 믿었다. 1970년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택시 운전수들이 재수 없다고 새벽 첫 손님으로 여자를 태우지 않았던 것과 비슷하다. 다른 이유는 하나도 없고 자기 배를 물려받을 아들 하나가 없는 게 많이는 아니고 조금 섭섭했던 올라이한테 늦게라도 마르타가 임신을 한 게 얼마나 좋았는지. 이번에는 틀림없이 아들일 거야. 아들이 나오면 내 아버지의 이름 ‘요한네스’를 물려줘야지.

  올라이는 오래 전에 이 올멘섬을 샀다. 장가도 들지 않았고, 고기 잡아 파는 젊은 어부가 벌면 얼마나 벌었을까? 자신의 모든 돈을 다 긁어 섬을 샀다고 해도 얼마 안 되는 돈이었을 터이니 작고 험하고 외진 섬이겠지. 올라이는 바람이 제일 약하게 부는 따듯한 만의 중턱을 골라 자기 손으로 집을 짓고, 보트하우스와 부속 건물도 지었다. 물론 형들과 이웃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자기가 섬을 개척하고 집을 지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만큼. 그래서 섬과 집과 배와 아내와 딸에 대해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보태 이제 마르타가 진통을 하고, 올라이는 늙은 산파 안나가 지시하는 대로 물을 끓여 방 앞에 대령하는 장면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이어서 본격적인 마르타의 진통과 분만이 이어진다. 포세의 특유한 문장. 같은 단어나 구절을 반복해 리듬감과 호소력까지 담아 독자가 훅 빠지게 만든다. 이 장면이 끝날 때까지 포세는 줄을 바꾸지 않고 계속 진술한다. 마침표도 없다. 아마 실수로 한두 번 찍은 것처럼 보이는 마침표 말고는 그 작고 새까만 점을 독자는 구경할 수 없다. 누구 생각나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장은 저 뒤, 아주 먼 먼 뒤로 가면 그래도 마침표 하나는 찍혀 있다. 근데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에는 끝까지 작고 까만 점이 없다. 하지만 줄, 행은 띄어 있다. 다만 마침표만 없을 뿐. 이렇게.


  그래그래. 마르타가 말한다

  이 아이는 요한네스라고 부를 거야,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올라이가 말한다

  그래, 요한네스라고 부르자, 마르타가 말한다 (p.26)


  이러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고? 작지 않은 글씨체의 널럴한 편집을 보태 본문을 무려 135쪽까지 끌고 갈 수 있는 분량을 만들 수 있다. 크러스너호르커이처럼 마침표 없고 행 구분도 하지 않으면 편집을 아무리 풍성풍성하게 해도 1백쪽 미만에서 끝낼 수 있을 걸?

  하여간 이렇게 요한네스가 피오르 해역의 작고 외딴 홀멘섬에서 출생했다. 아침. 1부.


  이어지는 2부, 저녁. 요한네스의 아빠 올라이, 엄마 마르타, 누나 마그다. 다 죽었다. 마그다는 어른이 되기도 전에 갔다. 가족 모두 어떻게 갔는지는 설명도 없다. 그냥 갔다. 요한네스, 그동안 에르나와 결혼해 일곱 아이를 두고, 몇 명인지도 모르는 손주들의 재롱도 넘치게 받았다. 아이가 다섯 생기자 도무지 작은 홀맨섬에서 살 수 없어 피오르 해역에 접한 마을로 이사했다. 전에 읽은 포세의 <보트하우스>에서 본 그 동네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프로데 그뤼텐의 책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는 더 어울린다. 심지어 내용도 비슷하다. <닐스 비크…>를 그대로 <아침…>에 옮겨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정말이다.

  <닐스 비크…>는 주인공이자 선한 연락선 선장 닐스 비크가 죽는 날 하루 이야기이고, <아침…>은 새벽에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자다가 곱게 죽은 노인 요한네스의 귀신이 제일 친한 친구 페터스의 귀신을 만나 저승으로 안내를 받기까지 이야기라는 게 다른 뿐이지 어차피 똑 같은 ㅆㄴㄹ 소설. 분위기, 장소 같은 게 모두 판박이. 피오르 출신 작가들은 그 동네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책임감이라도 있는 걸까?

  뭐 이런 말 하지 말자. 내가 싫으면 안 읽으면 되는 것이지, 좋게, 공감하며, 심지어 감동 먹어가며 읽은 독자도 있을 터이니 괜히 떠들어 좋을 게 없다. 다만, 포세 씨, 우리 더 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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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6-01-27 0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절교를!
ㅋㅋㅋㅋ

Falstaff 2026-01-27 14:40   좋아요 1 | URL
좀 매정했습니까? ㅋㅋㅋ

잠자냥 2026-01-27 1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만, 포세 씨, 나도 더불어 더 보지 말자!
ㅋㅋㅋㅋㅋㅋ
욘 표세 지겨워서 노벨상 이후 아무리 책이 더 나와도 저는 안 읽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폴님의 손절이 반가워요.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6-01-27 14:41   좋아요 1 | URL
두 권 읽었으면 성의 표시는 충분히 한 걸로 쳐도 괜찮겠습지요? ㅋㅋㅋㅋ

페넬로페 2026-01-27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닐스 비크에서도 부인 이름이 마르타 아닌가요?
그곳의 피요르드는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요즘 왠지 죽음에 대한 책은 다 좋고 숭고합니다 ㅎㅎ

Falstaff 2026-01-27 14:43   좋아요 1 | URL
옙. 마르타 맞습니다. 오스트리아 이북 지역에 특히 마르타가 많더라고요.
이 동네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톱 랭킹에 오르기 바로 직전까지 세계 자살률 1등 먹었던 지라 유독 죽음과 관련한 작품이 많을 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농담입니다. ㅎㅎ
 
물은 끓고, 영원에 가까워진다
윤해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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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해서는 2017년에 소설집 《코러스크로노스》의 독후감을 업로드하고 3년 터울로 2020년, 2023년에 이어 2026년, 네 번째 독후감을 쓴다. 네 권이면 과작寡作 스타일의 작가치고 그나마 많이 읽은 편이다. 그만큼 《코러스크로노스》가 좋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물은 끓고, 영원에 가까워진다》에서 끓는 물과 가까워진 영혼을 구경하기는 쉽지 않다. 윤해서는 10년 동안 더욱 오리무중이 되었으며, 이미지를 가능한 한 꼬불치려 안달하는 것 같고, 여전히 문장의 음악성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전 만큼은 아니다. 아이고, 세상에. 이러는 사이 윤해서, 벌써 마흔여섯 살이 되어 버렸네, 아, 세월이란.

  더욱 놀라운 건 일곱 편의 단편소설에서 적어도 두 편에서는 우리나라 작가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또는 쓸 만한 흔한 마음 서림/아림의 작품이었다. 좋게 말해서 그렇다는 거고, 나쁘게 말하자면 문제의 두 작품, 즉 <우리의 눈이 마주친다면>과 <변성>은 2류 발라드 뽕짝이라는 말씀. 즉 전혀 윤해서 같지 않아서, 윤해서한테 결코 바라지 않던 글이라는 거였고, 그래서 폭싹 실망했다는 뜻이다. 다른 작가가 썼다면 이리 혹독하게 말하지 않겠지만, 10년 가까운 시간동안 주목해온 윤해서라서 그렇다. 물론 내가 소설과 문학에 대해 쥐똥도 모르면서 책 좀 읽는다고 딜레탕트 흉내만 내는 허접한 독자라는 건 알지만, 딜레탕트 아마추어도 책 읽는 감정이 있고 소감도 있으니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뭐 그러고 보니 윤해서가 퐁당퐁당이기는 했다. 좋았다가, 실망했다가 다시 좋아졌으니 이제 또 실망할 차례인가보지 뭐. 이렇게 스스로 위안하고 다시 3년 후를 기약해보겠다. 어쩌면 3년 후 정도가 마지막 윤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작품 때문이 아니라 시력이 별로 받쳐주지 못할 거 같아서 그렇다. 물론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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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웃음소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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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나보코프 책으로 여덟 권째 읽는 건데, 이렇게 말하는 게 유감스럽지만, 제일 별로였다. 시그리드 누네즈의 말에 따르면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으로 유럽과 아메리카 일부 독자 사이에서 12세 소녀 돌로리스, 애칭 롤리타를 성적으로 학대하는 험버트에 반대하여 어떤 나보코프도 더 이상 읽기를 거부한 일도 있었다는데, 그건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거니까 나더러 자신들의 운동에 뜻을 보태라는 말만 하지 않으면 내가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상관하지도 않을 것이다. No more Nabukov, 이해할 수 있다. 근데 이 책을 읽고 <롤리타> 때문에, 더하기 이 책 <어둠 속의 웃음소리>의 번다한 상업주의와 상투성 때문에 No more Nabukov를 주장하고 싶은 심정이다.

  나부코프는 뭐하러 이런 책을 썼을까? 뭐긴 뭐야, 돈 때문이지.

  1899년에 러시아 귀족 집안의 자재로 태어나 10대 시절까지 손가락에 물 한 번 묻힐 필요 없이 살다가 볼셰비키 혁명을 피해 유럽으로 날아가서 지나간 과거 시절에 비하면 죽을 똥을 지릴 정도로 아이고 내 팔자야, 고생하며 살았겠지. 근데 유럽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본격적인 고난의 행군을 하던 때였다. 아마도, 정확한 게 아니라 내 짐작으로 말하자면, 극소수의 부르주아가 아니고 대부분의 유럽인에 비하면 그나마 먹고 살기가 그리 빡빡한 편은 아니었을 듯하다.

  그러다가 러시아 어로 소설을 쓰고 그게 또 잘 팔려 그나마 돈을 좀 벌었다 한들, 그게 만족스러웠겠느냐고. 1932년에 베를린에서 살던 나보코프는 러시아 이민자들이 러시아 이민자들을 위하여 만드는 잡지에 러시아어로 쓴 소설 한 편을 연재하고, 1936년에 원고를 팔아 영국에서도 원래 제목 <카메라 옵스큐라>로 출판한다. 이어서 1938년에는 미국에서도 출간하게 되는데, 이때 나보코프는 자기 작품을 스스로 번역한 <어둠 속의 웃음소리>를 자기 이름으로 낸다. 이때 나보코프가 딱 돈이 궁했던 시기였다고 역자 정영목은 말한다. 돈이 궁하니, 당시에도 소설보다는 영화의 판돈이 어마어마하게 큰 시절이어서, 나보코프가 작품의 제목이야 어떻게 됐든 간에 번역을 할 당시부터 애초에 이 작품을 영화화하고 싶었다는데 그냥 김치국물만 벌컥벌컥 자신 꼴이 되어버리고 만다. 책도 안 팔리고. 뭐 인생이 그렇지.

  1938년의 유럽은 사람 살 곳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1940년에 미국에 도착한 나보코프는 본격적으로 영어로 소설을 쓰고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는데, <어둠 속의 웃음소리>가 영화화되어 크게 히트를 했다면, 아마도 나보코프는 이후의 명작 소설을 생산하는 대신 평생 그렇고 그런 영화 시나리오를 긁적이다, 돈이야 많이 벌었겠지만 문학사에 크게 이름을 올리는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인생 살면서 다 좋은 건 없잖아.


  근데, 여태까지 했던 이야기를 좀 뒤집는 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이 재미없는 건 아니다. 웃기지? 난데없이 이상한 말을 해서. 다시 보시면 나는 이 책이 여태 읽은 총 여덟 권의 나보코프 가운데 제일 ‘별로’라고 했지 재미가 있다, 없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할리우드 인간들이 영화로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도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스토리 라인이 미국적이지 않고 다분히 유럽적이라서 그랬단다. 정영목의 해설을 믿는다면. 어차피 그 양반도 미국사람이 영어로 한 말을 인용한 거겠지만.

  곧바로 작품의 주인공 알베르트 알비누스를 소개하자. 미술평론가이자 그림 전문가. 일찌감치 숟가락 놓은 아버지가 제대로 된 자금관리와 다방면의 대박 치는 투자를 해 놓아 덕분에 무지무지한 예금계좌, 토지와 건물과 별장 같은 부동산, 그리고 르네상스 이전부터 뻑적지근하게 이름을 날린 화가들이 그린 다수의 진품과 다수의 가짜 명화들까지 뭐 하나 모자란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돈보다는 ‘뭔가 재미난 일’을 골라 하기 마련이어서, 명화를 이용한 영화 제작안을 짜 여러 영화사에 보내기도 했건만 그때마다 정중한 거절의 회신을 받을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21세기가 아닌 1930년대의 이런 남자들의 특징. 차분하고 행실 좋은 쪽으로 잘 생겼다는 느낌을 주는 외모. 군살도 없지만 그렇다고 근육이 울퉁불퉁하지도 않은 몸. 따라서 크게 완력이 있지도 않은 그저 도련님. 점점 자라 대가리가 굵어지고 다른 것도 굵어지면서 세 번 연애를 했는데, 첫째가 나이든 칙칙한 부인과의 지루한 간통이었으며, 두번째가 라인강변에서 만난 교수부인이었고, 세번째가 결혼 직전 베를린의 못생긴 얼굴에 여위고 따분한 여자였다. 이후에 부유한 집안의 어여쁜 엘리자베트를 사랑해 결혼했지만 전형적인 규방규수인 아내는 그가 갈망하다 지쳐버린 전율을 결코 남편한테 주지 못했다. 웃겼어. “갈망하다 지쳐버린 전율”이 뭐야? 그걸 가지고 있는 여자가 세상에 있어? 아니, 있겠지. 내가 하는 말은 1년 이상 갖고 있을 수 있는 여자 말이지. 하여간 나보코프는 그 염병할 전율을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만드는 상실감, 황금빛 하늘을 배경으로 멀리 외따로 서 있는 나무, 교량 안쪽의 굽은 곳으로 퍼지는 빛의 파문, 절대로 포착할 수 없는 것”이라 설명하는데, 이게 무슨 말이지, 무슨 뜻인지 나는 모르겠다. 나보코프는 이후 “갈망하다 지쳐버린 전율”을 15년 동안 찾아나섰다가 예상치도 못한 “님펫” 롤리타를 만나 평소 원대로 돈과 명성을 손아귀에 거머쥐게 된다.


  하루는 시내에 약속이 있어 외출을 했는데, 카페에 도착하니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빨리 온 거다. 시간을 죽이기 위하여 근처에 있는 영화관에 들른 알비누스. 당시엔 영화 상영 중에도 표만 사면 영화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화면을 제외하고 딱 하나 켜져 있는 전등이라고는 비상구 안내등 밖에 없어서 대개 여성 직원이 손전등을 가지고 어둠 속에서 새로 입장한 손님을 좌석까지 안내해주었다. 영화 보다가도 담배를 뻑뻑 피우던 시절이니 이딴 건 아무것도 아니지.

  근데 알비누스를 안내해준 안내원 소녀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창백하고 음침하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나이는 열여덟쯤? 보는 것만 가지고도 아팠단다. 어디가 아팠을까? 그건 모르겠다. 책에 안 나온다. 한 눈에 홀딱 반한 알비누스는 사흘이 지나 다시 영화관에 갔고, 세번째 들렀을 때 소녀에게 웃어주겠다고 결심을 했지만 실제로는 가슴이 너무 쿵쾅거려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전형적인 찌질이 도련님. 너무 얌전하게 자란 티가 벅벅 난다. 한편으로는 “다 소용없어. 지금 행복한데 나한테 뭐가 더 필요해? 어둠 속에서 미끄러져 다니는 그것…. 그 아름다운 목을 눌러버리고 싶어. 뭐 어차피 죽어버린 거나 다름없지. 다시는 가지 않을 거니까.”라고 마음먹지만 안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녀의 이름은 마르고트 페터스. 중하층 또는 그 아래 계급 가족의 1남1녀 가운데 둘째. 부모는 마르고트가 얼른 자라 자기 먹을 걸 스스로 벌어 집에서 나가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열여섯 살 때 겨울날, 레반돕스키 부인 댁의 아파트에 딸린 작은 하녀방으로 옮겼는데, 하녀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곳에서 지내며 훗날 레반돕스키 부인을 포주로 섬기라는 뜻이었다. 결국 머지않아 밀러라는 이름의 남자한테 (결과적으로)순정을 바치고(어떤 순정인지는 안 알려드림), 밀러와 헤어진 다음엔 노인과 몇몇 남자를 거친 후에 영화관 안내원으로 잠깐 일했던 거였다.

  그러니 지금 나이가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세상살이를 알만큼 알고, 겪을만큼 겪은, 닳고 닳은 팜 파탈이었던 것이지. 원래의 꿈은 화가들의 누드 모델을 거쳐 은막에 데뷔하여 스타가 되는 거였는데, 모델을 하면서 영화계 입문을 위해 조금이라도 영화를 알고 싶어서 들어간 거라고. 이 아가씨한테 우리의 알비누스가 걸려버렸던 거였다. 걸려도 아주 되게 걸렸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옛날에 독일 베를린에 알비누스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부유하고, 품위 있고, 행복했다. 하지만 어느 날 어린 애인 때문에 아내를 버렸다. 그는 사랑했으나, 사랑받지는 못했다. 결국 그의 삶은 참담하게 끝이 났다.”


  이 한 문단만 읽으면 책은 사실 끝났다고 봐도 별 무리 없음, 쾅쾅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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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1-23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3개 좋습니다. 좋아요~~ㅎㅎ
이 책을 구입하려다가 말았는데,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ㅎㅎ
나보코프는 <롤리타>와 <절망> 정도면 충분할 듯합니다..^^

Falstaff 2026-01-23 16:06   좋아요 0 | URL
ㅋㅋㅋ 근데 나보코프가 이렇게 3별 짜리도 있고 뭐 그래서 더 좋은 거 아닌가 싶어요!
두 작품 외에 하나만 더 추가, <<창백한 불꽃>도 아이쿠 여지없이 뒤통수 한 방 갈기더군요.
 
암전들
저스틴 토레스 지음, 송섬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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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생 저스틴 토레스. 푸에르토리코(부계) 반, 이탈리아 1/4, 아일랜드 1/4 (모계)혈통으로 뉴욕에서 출생했다. 이 가계는 토레스의 작품 속에 계속 노출되고 있는 것 같다. <암전들>에서의 화자 ‘나’도 푸에리토리코 출신이다. 대학원 정도 수준의 창작 스쿨인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에서 소설창작으로 석사를 하고 스탠퍼드의 창작 펠로우십에서 2년간 더 공부 또는 창작을 배웠다는데 뭐 중요한 거 아니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면 된다. 지금은 UCLA에서 영문학 부교수를 하며 글을 쓴단다. 이제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지만, 동성애자로 커밍아웃을 했다고.


  이 작품에서 제일 눈에 가는 건, 1946년에 출간한 동성애자들의 삶과 욕망에 관한 증언을 모은 책 <성적 변종들>이 실재하며, 독자가 몇 페이지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까지는 그리 특정적이 아니지만, 문제는, 텍스트가 검은 줄로 죽죽 그어져 전체 문장을 다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줄을 그은 사람이 목적으로 한 한두 단어들이 이어져 한 메시지를 만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34쪽에 사진으로 찍힌 (당연히 우리말 번역이니 출판사에서 다시 편집했겠지만) <성적 변종들>의 “동성애 사례” 섹션. 무려 한 페이지에 서른 행이 담았으나 검은 줄이 그어지지 않아 읽을 수 있는 부분만 인용하면 이러하다.


  “호세는 느꼈다 / 호세의 욕망들은 / 호세를 소외시키고 / 호세는 스스로를 해방할 것이다 / 호세는 매력적인 젊은이 / 나긋나긋한 육체 / 라틴계 혈통 / 남자들도 호세에게 구애했다. 어디로 가든 남자들이 그를 (쫓아다녔다) / 호세는 제 정신이 아니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호세를 유예) / 호세는 동성애자들에게 추방당했다 / “세상이 미쳐간다.” 호세는 / 그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낫다”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늙은 후안은 검은 줄이 죽죽 그어진 부분을 일종의 암전, blackout이라고 하고, 암전들 사이에 남은 파편들이 모이면 ‘시 또는 관찰’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면 34쪽의 서른 행에서 암전을 피해 살아남은 위 인용은 시일까, 관찰일까? 시일 수도 있고 관찰일 수도 있겠지.

  두번째로, 작품 속에 사진(또는 그림, 특히 회화 작품)이 많이 실려 있다. 책 속에 사진을 싣는 것이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남성들의 완전한 나신과 여성의 적나라한 외음부 사진을 그대로 드러내는 건 이 책에서 처음 봤다. 야하지도 않고 눈길을 두 번 끌지도 않는다. 당연하지. 의과대학에서 사용했던 교과서의 도판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니.


  이런 구조가 <암전들>을 색다르게 읽히게 하겠지만 사실 내용은 별로 새롭지 않다. 스물일곱 살 먹은 푸에르토리코 계 뉴욕 출신 미국청년 ‘나’가 대도시에서 직업, 학위, 혈통 등 모든 것을 다 잃고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서쪽의 소도시 팰리스로 떠나면서 작품은 시작한다. 팰리스. 궁전. 한때는 궁전 같았겠지만 지금은 사막 변두리에 황량하게 버려진 황폐한 건물. 이 속에 해골처럼 앙상한 몸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후안 게이라는 노인이 있어, 그가 생을 마칠 때까지 간병인 노릇을 하러 가는 길이다.

  ‘나’가 열일곱 살이던 약 10년 전에 18일 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다. 저런 몸을 한 인간이 내 미래의 모습일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던 ‘나’는 노년의 인간을 향한 경멸을 숨기지 않았었다. 이들이 만난 곳은 당시에 ‘정신병원’이라 부르던 구치장소. ‘나’는 몇 달 지나면 18세가 될 것이라 청소년 시설로 보내기에는 너무 성숙하다는 이유로 편법을 써 성인 수용시설로 보내졌다. 여기서 후안 게이를 만난 것. 그를 본 첫인상은 늙어서 부서질 것 같다는 느낌으로 기억한다.

  후안은 수십년 동안 시설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몇 차례. ‘나’가 그를 보았을 당시 그는 전기치료요볍에 의존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켄 키지가 쓴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읽어보면 전기치료 요법을 강하게 받으면 뇌신경이 죽어 거의 백치 상태가 되던데, 후안은 그 정도는 아니고 40대가 되자 그만 리비도에서 풀려나는 후유증을 겪었다. 리비도야말로 후안에게 남은 최후의 방어수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환자들에 비해 몹시 내성적이고 나이가 훨씬 많았으며, 참 점잖은 노인이었다. 이에 비해 ‘나’는 아무도 모르는 동네 출신의 10대 소년이었고.

  ‘나’와 후안이 정신병원에 강제수용된 이유는 정신병이었다. 정신병의 일종인 동성애자라는 병명으로. 당시에 동성애는 전복적이며 변종적인 문화가 만든 하나의 병적 유산이었다. 숱한 정신의학과 의과학자들과 심리학자 등은 우생학적 입장에서, 동성애라는 질병을 치유하는 방법이나 약물을 알기 위하여 다양한 시도를 했던 모양이다.


  시절을 저 앞으로 넘기면 두 여성이 있다. 앨리너 바인스와 헬렌 라이트먼. 1927년에 둘이 만난다. 이 해에 후안도 태어났다. 앨리너와 헬렌은 짧게 연애했고, 비밀스럽게 결혼했다. 이들은 잠시동안 라이트먼이라는 성姓을 사용했다가 급진적인 이름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려 각기 제냐 게이와 잰 게이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들 동성부부는 카리브해와 중남미를 여행하며 함께 어린이 책을 썼는데 이때 푸에르토리코의 수도 산후안에서 길을 잃은 소년을 만나 자신들의 호적으로 입양했다. 섬의 진짜 부모는 뉴욕에 사는 친척에게 보내기로 했다가 하여간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들의 양아들이 되었다.

  후안의 부모 또는 모모 가운데 잰 또는 얀, 또는 헬렌. 이 은총의 어머니가 1930년대에 동성애자 수백명과 인터뷰하고, 그들의 진술을 모아 두 권의 책, 한 권의 제목은 ‘남자’ 다른 한 권의 제목은 당연히 ‘여자’인 책을 준비한 것이 <성의 변종들: 동성애 패턴 연구>. 그러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연구 및/또는 출판을 계속 진행하기가 어려워져 책은 1940년대에 겨우 나올 수 있었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제냐와 잰 게이 부부가 후안의 양어머니들로 계속 지내기는 쉽지 않았을 터. 머지않아 파양을 하고 후안은 뉴욕의 친척 집으로 들어가, 교육을 받았고, 자랐으며, 동성애자로 성장하는 바람에 자신의 이름을 양어머니들의 이름을 따 ‘후안 게이’라고 고쳤다.

  후안이 <성적 변종들>을 발견한 곳은 이곳, 팰리스의 로비, 계단 발치에 내놓은 안 쓰는 물건이 담긴 종이상자 안에서였다. 상자 날개에 “이제 전 당신 겁니다”라고 쓰인 종이박스. 박스보다 이 문장의 캠피함campiness 때문에 후안이 쿡쿡 웃으며 이 문장을 쓴 사람의 외로운 영혼이 그려져 상자를 열었고, 책을 발견했던 거였다. 책은 검정색으로 죽죽 그어져 원문을 일아 볼 수 없었다.


  이제 거의 다 온 셈이다.

  ‘나’가 후안의 죽음을 지키기 위하여 팰리스에 도착해 그를 만나고, 후안과 ‘나’의 첫만남을 회상한다. 이어 ‘나’의 27년 동안의 삶에 대한 보고가 있을 것이며, 후안의 삶도 밝혀져야 하리라.

  그리고 어쩌면 제일 중요한 작업. 한때 엘리너와 헬렌이라고 불렸던 여성들의 삶과 헬렌의 책 <성적 변종들>이 나오게 된 배경을 그려야 할 것이며, 현재의 ‘나’와 후안의 죽음으로 작품은 끝을 맺을 것이다.

  퀴어 소설을 은근히 많이 읽었다. 최근에도 엊그제 타이완의 천쉐를 읽었는데 이틀만에 또 퀴어 소설의 독후감을 쓰니 조금 야릇한 생각이 든다. 동성애자들이 비율로 치면 이성애자들보다 다른 장르는 모르겠고 소설을 (훨씬)더 많이 쓰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제는 퀴어 소설 읽는 눈도 높아져 ‘퀴어’라는 장르 때문에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가 쉽지 않다. 저스틴 토레스는 그럼에도 독특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서사보다 구성 방식이 더 눈에 띄지만 스토리라인도 매력있다. 사실과 허구가 적절하게 섞여 독자에게 조금의 헛갈림을 주는 매력.

  그래도 퀴어 소설 가운데 나는 엘런 홀링허스트가 아직까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좋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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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1-22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야하지도 않고 눈길을 두 번 끌지도 않는다˝ ㅋㅋㅋㅋ 저도 딱 한 번만 봤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맞습니다. 이 책은 구성이 독특해서 새롭지 내용은 여느 퀴어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근데 그 구성이 한몫하죠...
갑자기 앨런 홀링허스트으로 대동단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인간 참 잘 쓰긴 해요. 인정! 퀴어소설에서 최고봉급?

Falstaff 2026-01-22 20:41   좋아요 0 | URL
소문보다는 먹을 건 그리 많지 않았던 잔치음식.... 같았습지요. ㅋㅋㅋ
이쪽은 홀링허스트 따라가기가 쉽지 않을 거구먼요. 뭘 알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만일 그런 게 있다면 기초 근육을 워낙 빵빵하게 다져놓았지 않나 싶어서 말입죠.
 
헛간, 불태우다 쏜살 문고
윌리엄 포크너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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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크너의 단편집은 한 두 권 읽었는데, 독후감을 써놓지 않은 모양이다. 쓰긴 썼는데 술 한 잔 마시고 들여다보니 마음에 차지 않아 싹 지워 버렸든지. 뭐 그렇게 사는 거지. 찌질한 독후감 하나 써놓고도 그게 부끄러워 나중에 없애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세상에 그리도 많은 책이 나오는 이유는 뭘까? 책을 내는 순간에는 자기가 쓴 것이 특별하고, 기발하고, 명문장으로만 채운 거 같아서 그걸 책이라는 하드웨어까지 갖추어 시장에 내보낸다. 그러면 어깨가 으쓱거리고, 친구 모임에 가면 생맥주 한 조끼 크게 한 모금 하면서, 이번에 내가 책을 냈는데 조금 부끄럽군, 하며 가오도 잡을 수 있겠지.

  문제는 그후에 온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가 써 놓은 것이 조금씩, 처음엔 아주 조금씩, 그러다가 가속도가 붙어 점점 화끈거린다 싶고, 그것 참 못난 글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건 내 경우이겠지만, 이러면 나는 서슴지 않고 과거로 돌아가 내가 쓴 독후감을 지워버린다. 그걸 읽은 분들의 댓글도 달리고 몇 분은 공감 표시도 누르셨지만 아마도 여태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라 믿으면서. 내가 사용하는 SNS에서는 이게 가능하다. 근데 책으로 만들어 소량이지만 돈을 주고 사서 읽은 독자가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책에 실린 활자는 죽어도 지워지지 않으니까. 끝까지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야 하나? 아니면 정말로 끝까지 자기가 쓴 소위 ‘작품’이 명작이라고 오해하면서 죽어야 해?

  윌리엄 포크너를 읽으며, 그의 작품을 읽고 쓴 독후감을 언제 한 번 삭제해버린 기억을 떠올렸으며, 글을 쓰는 일의 엄정함이랄까 줄타기랄까를 생각하게 됐고, 이미 쓴 글의 부끄러움까지 생각이 연장되어, 만일 책을 낸다면, 자기가 쓴 결과물이 윌리엄 포크너와 경쟁할 수 있을 정도라고 자부심을 가질 정도라면 책을 내도 괜찮겠다, 즉, 카프카나 포크너, 발자크를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작가가 될 꿈을 꾸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라는 몽상까지 했다.

  실제로 1950년 이후에 글을 쓰기 시작한 세상의 거의 모든 소설가에게 강한 영향력을 끼친 작가들 가운데 포크너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근데 그의 작품을 읽고 독후감을 쓰기가 만만하겠어? 지금 이 책에 관해 한 마디도 못하면서 버벅거리고 있는 중이다.


  소설집 《헛간, 불태우다》에는 다섯 단편소설과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이 들어 있다.

  다섯 작품 모두 포크너의 영토인 요크나파토파 커미티, 제퍼슨 시 인근이 무대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지역주의 작가라서 자신의 문학적 영토 요크나파토파 안에 마치 구약성서의 여러 도시들이 들어 있거나 구약에 쓰인 일들이 벌어지는데 그게 결국 사랑이나 연민 또는 희생 등과 연결이 된다는 걸, 단 한 권의 포크너를 읽었을 뿐인 독자라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편소설집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단편 속에 그가 쓴 장편소설의 등장인물이 다시 등장해 조연을 맡는다. 같은 영토 거주민이라서 얼마든지 다시 만날 수 있는 개연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포크너가 기억하거나 들은 이야기들 속의 기간이 대강 미국내전과 1차 세계대전, 그리고 2차 세계대전까지. 《헛간, 불태우다》에서는 내전과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남자들과, 참전군인이 해야 했던 남성의 일을 한 강한 여성, 그리고 약간명의 흑인이 등장한다. 법적으로 완전히 해방되었지만, 여전히 법적으로 차별을 당했던 흑인. 여성이 함부로 오해해 흑인의 범죄를 고발하면, 진짜 그 흑인이 범죄를 저질렀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백인 여성이 한 말을 유일한 진실로 확정하고, 아무런 법적 판결 단계를 생략한 채 주민들에 의한 즉결 처분을 하는 것이 가능하고, 가능해야 했던 시절이다. 이 즉결처분이 가능했던 여러 요인 가운데 하나가 날은 9월이건만 비가 내리지 않아 건조한 먼지만 횡행하는 제퍼슨 시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불쾌지수 수치에 짓눌리는 사람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있는 귀향 군인들. 검둥이 하나 정도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정상인 남부연합 출신 내전 참전자들. 즉결처분에 반대하지만 이들을 결국 말리지 못한 한 명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앞에 실린 <가뭄이 든 9월>.


  젊은 시절 말 중개일을 해, 말을 관리하거나, 다른 소유주가 있는 말을 훔쳐 자기 말인 양 꾸며 팔아버리는 일에 통달한 아버지도 등장한다. 이 단편의 제목이 표제 <헛간, 불태우다>.

  소작인 애브너 스놉스씨의 돼지가 해리스 씨의 옥수수 밭에 들어갔다. 돼지가 밭에 들어가면 상당한 피해를 끼친다. 해리스는 마음이 언짢았지만 이웃 스놉스에게 돼지를 돌려주었다. 근데 그게 다시 밭에 들어왔고, 이번에는 돼지와 함께 돼지 움막을 지으라고 철조망까지 넉넉하게 보태주었다. 그럼에도 돼지가 다시 해리스 씨의 옥수수 밭을 침공해버렸다. 이번에는 화가 난 해리스 씨가 돼지를 자기 돼지 우리에 감금하고 직접 스놉스 씨의 오두막에 찾아왔다. 그랬더니 돼지 움막을 만들 때 쓰라고 보내준 철조망이 마당 구석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걸 보았다. 더 화가 났다. 그래서 자기네 돼지 우리 사용료 1달러를 보내면 애브너의 돼지를 돌려주겠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이날 저녁에 해리스 씨네 집에 처음 보는 검둥이가 1달러를 가지고 와서 돼지를 받고 돌아갔다. 가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장작이랑 건초는 불에 잘 탄다고 전하라고 하더군요.”

  장작과 건초, 소와 말, 양 같은 가축과 농기구 같은 모든 건 큰 목재 건물에 넣어 두는데 그걸 헛간이라 부른다. 대륙 농가의 헛간을 우리나라 농가의 작은 헛간과 비슷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이 헛간에 불이 났다. 바로 그날 밤에. 해리스 씨가 헐레벌떡, 어떻게 해서 가축들은 모두 대피시켜 목숨을 건졌지만 나머지는 모두, 홀랑 타버렸다. 재만 남았다. 아무리 마음 좋은 해리스 씨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근데 애브너 스놉스는 백인이다. 마음 같았으면 주민들 모아 죽여버리고 싶었겠지만, 치안판사에게 고발을 해 제퍼슨 시에서 제일 큰 가게에 임시 재판장을 꾸려 애브너의 막내 아들 커널 사토리스이 증언했어도 판사와 해리스 씨는 아무런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앞뒤 정황으로 보아 애브너와 그의 맏아들이 불을 지른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증거도 없으며, 불을 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뭐라 할 말도 없다. 그리하여 판결하기를:

  “스놉스, 당신 혐의를 입증할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충고 한 마디 해야겠소. 이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마시오.”

  애브너 스놉스는 대답한다. “나도 그럴 생각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사는 마을엔 살고 싶지 않아서요.”

  그리고 뒤로 돌아 30년 전에 훔친 말을 타고 가다가 남부 연방 헌병대 초병이 쏜 총에 발 뒤꿈치를 맞은 부상 후유증으로 뻣뻣한 걸음을 걸으며 임시법정 복도를 빠져 나갔다.

  임시법정 앞, 그러니까 가게 앞 광장 주변에 세워둔 마차 속에는 엄마와 이모, 두 명의 뚱뚱한 누나가 타고 있었고, 거기까지 걸어가는 동안 몇몇 소년들은 스놉스의 막내아들 사토리스한테 돌을 던지며 “헛간에 불을 지른 놈”이라고 욕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버지 애브너는 아들을 마차에 태우고 그길로 제퍼슨 시를 떠난다. 이미 이런 판결이 날 줄 알고 얼마 되지 않는 살림살이를 다 싣고 떠날 준비를 다 해둔 터였다. 이렇게 해서 단편의 앞부분이 끝난다.

  뒷부분은 2~3일 후에 도착한 요크나파토파의 다른 시골지역. 흰색으로 페인트칠한 저택. 지주댁인 드스페인 소령을 찾아오기 전에 작은 판자집에 이미 식구를 다 내려놓고 화자인 막내 사토리스만 데리고 지주를 찾아간 길. 대문 앞에 말이 방금 싸 놓은 똥무더기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걸 피하지 않고 그냥 밟고 지나간다. 저택의 현관까지 가서 문을 열어준 흑인을 무시하고 장화에 묻은 말똥도 닦지 않은 채 그대로 응접실까지 진출하는 애브너. 2층에서 드스페인 부인이 내려와 프랑스에서 직수입한 양탄자를 말똥 밟은 발로 짓이기고 있는 애브너를 보고 경악,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옆에 섰던 흑인 하인은 이 사태가 결코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듯 창백한 얼굴로 변명하기에 급급하며 애브너를 집 밖으로 몰아낸다.

  이튿날, 드스페인 소령이 직접 양탄자를 말아 말에 싣고 애브너를 찾아온다. 이어서, 게으른 누나 두 명이 세탁한 양탄자를 다시 돌려주고,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한 소령은 100달러의 보상금을 요구하는데, 지금은 돈이 없을 터이니 가을 탈곡하고나서 옥수수 550kg으로 갚으라 한다.

  그래서 애브너 스놉스 씨는 또 한 번 헛간에 불을 지를 수 있을까? 기회가 오긴 온 것 같은데. 여러 정황을 보면 이 가족의 가장 애브너 스놉스 씨는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의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사이코패스 쪽에 조금 더 가깝지만 직접적인 폭력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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