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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속삭임 ㅣ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도메니코 스타르노네 지음, 나윤덕 옮김 / 마르코폴로 / 202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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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니코 스타르노네의 책이 우리나라에 상륙한 건 어쩌면 우리나라에 넓은 팬덤을 가지고 있는 줌파 라히리가 이이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해서 미국 시장에 소개한 것이 계기가 된 것일 수 있다, 라고 들었다. 스타르노네의 책을 직접 읽어보면 라히리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우리말 번역서를 읽을 수 있었을 거라고 믿을 만큼 독특한 작가이다. 이이는 주특기로 가족이나, 가족과 비슷한 친밀한 사람들, 구성원들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세상에 중요하고 복잡한 일이 무진장 많겠지만 어느 곳에서나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다 그렇거니 하고 무심하게 지나치는, 참으로 다양하기 그지없는 가까운 사람들끼리 상처 주고, 상처받는 일. 문제는 내가 상처받는 건 귀신같이 빨리, 민감하고 유별나게 알아차리지만, 상처주는 일은 그게 왜 상처가 되는 말, 태도, 행위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 그래서 그게 당하는 사람한테 일종의 가벼운 폭력인지 꿈에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하던 짓 계속, 한 번, 두 번, 세 번… n번. 상대는 그때마다 가슴과 뇌와, 특히 전두엽에 무수하게 실금이 가, 어느 날 드디어 와장창창, 전두엽이고 심장이고 간에 폭발하는 현상을 우리는 뭐라고 한다? 파탄이라고도 하고, 이혼이라고도 하고, 가출 또는 독립이라고도 하건만, 상처를 주고받은 당사자는 여전히 도대체 어떻게 이 단계까지 왔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알고는 있었어도 정말로 파투가 날 줄은 몰랐거나, 아니면 설마 저것이 나 없이 살 수 있겠어, 오만방자했던 것이었겠지. 부모자식 사이에도 그렇고, 부부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니 뭐 하러 입 아프게 그걸 말로 해 그냥 그런 것이지. 연인관계도 그렇고, 형제자매 사이도 이하동문이다.
이런 걸 도메니코 스타르노네는 기가 막히게 포착한다. 가뜩이나 21세기 초장부터 우리나라 출판계에 새롭게 블루칩으로 떠오른 이탈리아 소설 가운데서도, 내 취향으로만 말하자면, 이이만큼 우리 주변 찌질한 인간들의 집합인 가족들의 내밀해서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를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꺼내 독자가 앉은 자리 바로 옆에 놓아두고 시침 뚝 떼는 작가는 드물다. 그렇다고 이이의 이야기가 202X년의 동아시아 끝자락에 있는 우리나라 가족들의 이야기하고 비슷하다는 건 아니다. 아무래도 문화의 차이가 있고, 의식 수준과 생활패턴이 다른 사람들 이야기라서, 오호, 이 사람들은 그때부터 이렇게 살았구나, 흥미로울 수 있겠지만, 그러나 시간과 장소를 떠나 이들의 삶에 호흡을 같이 해 읽어가면서 등장인물의 행위와 생각에 동의하는 거야 설마 다를 수 있으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이기에 서두가 기냐고? 좋다. 시작해보겠다.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지만 피에트로 발레가 화자 ‘나’로 등장하는 1부의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다. 피에트로 발레는 나폴리에서 전기 기사로 일하는 아버지와 주부 엄마 사이의 네 남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나 가족의 희망을 등에 짊어지고 유년, 소년, 청소년, 청년 시절을 보냈다. 이번에 읽은 책이 기껏 세번째 스타르노네의 작품이지만, 공통점이 있으니, 주인공의 고향이 나폴리, 주로 살고 있는 곳이 로마, 가끔 나폴리에 전처와 함께 사는 아이들 만나러 가든지, 자식의 단기 여행 기간 동안 손주 봐주러 가든지, 하여간 가끔 고향에 발길을 한다는 거. 이 책에서는 피에트로의 고향이 나폴리이고 피에트로의 아내 나디아가 박사학위를 받기 위하여 공부하는 대학이 나폴리에 있기는 하지만 중요하지 않다는 점도 있다. 앗, 지금은 나디아가 나올 시간이 아니다.
피에트로가 그리 특출난 실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네 형제 가운데 그래도 공부 좀 잘한 유일한 자식이라서 그랬던 듯하다. 키도 크고, 잘 생기고, 어른들이 보기에 싹수가 있고 뭐 그래서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거였다. 근데 사실을 알고 보면 좀 비극적이다. 피에트로가 보기에도 형제 가운데 그나마 공부에 소질이 있는 건 자기 혼자인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공부를 좀 하는 것뿐이지 그쪽 방면으로는 열심히 해봐야 될 성싶지가 않다. 그냥 좀 하는 것과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루는 건 엄연히 차이가 나는데, 워낙 학문과 거리가 먼 집안 출신이라 피에트로 정도면 적어도 나폴리 수재급이라 여기는 분위기가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 없었다. 재빨리 알아챈 피에트로는 소년기,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특급 모범청소년 모드를 유지하기로 결심했다. 이 결과 피에트로는 매사에, 자기가 특출나지 않으니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매사에 적극적이고 전념을 다하는, 열심히, 열심히, 열쒸미 하는 것이 몸에 배게 되었고, 특히 남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하여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았다. 이렇게 좀 세월이 지나니까 그냥 보통으로 사는데도 저절로 남들 보기에 매사 성실한 모범청년이 저절로 된 거였다. 물론 보이는 것과 피가 혈관에서 벌떡벌떡 뛰는 젊은이의 진짜 모습하고는 차이가 나겠지만.
하여간 공부 잘하고 성실한 청소년 피에트로는 좋은 대학 국문과에 진학했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계속 공부할 재질도, 돈도 부족해서 졸업과 함께 로마의 한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임용되어 오랜 세월이 지나 정년을 맞을 때까지 교편을 잡게 되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하자면, 교편敎鞭, 이게 시대에 뒤떨어진 단어다. 가르침의 회초리. 정확하게 말하자면 말 안 듣거나 가르쳐 줘도 알아듣지 못하면 알아들을 때까지 뒤지게 패도 괜찮은 채찍을 말한다. 근데 요즘에 학생이 말귀를 못 알아듣거나 버르장머리 없는 짓을 한다고 채찍은커녕 30센티미터 대나무자, 회초리, 지시봉, 대걸레자루, 곡괭이자루, 야구방망이로 두드려 패도 괜찮은 겨? 우리 또래 교사들이야 취미생활로 아이들 차려 시켜놓고 원투 스트레이트, 어퍼컷, 훅, 뒤돌려차기를 밥 먹듯이 했지만 요즘에 교편 함부로 휘둘렀다가는 해고통지서와 함께 덤으로 콩밥까지 먹는다.
이제 교사가 되었으니, 발레 선생께서는 일찌감치 터득한 지혜, 자기는 죽어도 특급교사가 되지 못할 푼수임을 충분히 감안해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 말 그대로 전념을 다하기 시작했다. 다른 선생들은 전부 교탁에 앉아 수업을 진행했지만 발레 선생께서는 단 한 번도, 단 일초도 의자에 앉지 않고 서서, 수업시간 내내 집중한 상태로 학생들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상의 것을 전해주기 위해, 말 그대로, 몸바쳤다. 얼만큼이냐 하면, 학생들도 알 정도로. 아오, 저 선생은 비록 무슨 말을 하는지 내가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진짜로 열심히 가르쳐주려고 하는구나, 이리 인정할 수밖에 없게. 이 학교에 누구보다 총명하고, 로마 교외지역에서 30년에 한 명 나올까말까 할 수준의 똑똑한 지능을 가지고 있는 ‘테레사’라는 1학년 학생이 있었는데, 가난한 집안의 준천재급 학생들이 항용 그러하듯 성격이 좀 삐딱해 가자미 눈알을 하고 있었음에도, 피에트로 발레 선생을 향해서는 슬금슬금 존경심이 솟구치더라는 거였다. 그럴수록 담임이기도 한 발레 선생에게 가능한 한 대답하기 어려운 짓궂은 질문만 쏟아대고, 그럴 때마다 선생은 또 선생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다 하는 것처럼) 설명을 하려 하는 걸 어찌 몰라라 하겠느냐는 말이지. 세상에 참. 이런 담임-학생 관계가 고등학교 3년 내내 이어진다.
테레사가 빛나는 졸업장을 타고, 로마 최고의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해, 피에트로는 당연히 기억 속에 그런 똑똑한 아이가 있었지, 수준의 추억으로 남았건만, 졸업하고 1년쯤이 지난 오후에 테레사한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선생님, 저 테레사예요. 진작에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이제야 안부 여쭈어서 죄송해요, 호호호. 오늘 시간 있으세요? 그냥 저녁이나 한 번 했으면 좋겠어요, 어쩌구저쩌구. 이렇게 1년 만에 약속을 하고 학교 앞에 서 있으니 테레사가 은빛나는 모터사이클을 붕붕거리면서 몰고 와 헬멧을 씌워주고 뒷자리에 피에트로를 앉히고는 냅다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그리고 조금 후, 고개를 뒤로 제친 테레사는 난데없이 피에트로 선생의 목을 오른팔로 감싸더니 다짜고짜 뜨겁고, 축축하고, 깊숙한 키스를 퍼부었으며, 이때부터 3년 동안 둘은 격렬하고, 뒤틀리고, 폭발적이고, 위험한 연애를 펼친 거디었던 거디었다.
뜨겁고 강한 두 사람의 연애. 어찌 잘 될 수 있을까? 당연히 옆에서 보기에도 아슬아슬하게 무려 3년 동안 지속하더니 이제 남은 건 서로 잘, 좋은 모습으로 헤어지는 일인 것 같았다. 서로 그런 단계임을 알았다. 이때 테레사가 제의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만일 들통이 난다면 영원히 매장될 만한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기로. 이런 격렬하고 위험한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둘은 될 수 있는 대로 이별을 미루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겠지. 그리하여 먼저 테레사가 피에트로에게, 그리고 피에트로 역시 테레사에게 만일 다른 사람이 알게 되고, 그것이 사회 일반에게 퍼진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비밀을 이야기한다.
피에트로는 확실히 그랬다. 치명적인 잘못을 테레사에게 말했다. 테레사는? 그렇게 했는지, 아니면 거짓말을 하나 지어 이야기했는지 작품이 끝날 때까지 독자는 모른다. 그리고 며칠 후, 이들은 서로에게 낯설기만 한 점잖은 태도로 서로의 앞날에 행운을 빌며 안녕을 고한다.
세월이 흐른다. 무정하게 흐른다. 테레사는 과학적 두뇌에 드디어 꽃이 만발하게 피어 전액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위스콘신 대학으로 공부하러 떠나고, 이어서 MIT, 하버드 등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나이가 들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의 반열에 오른다. 피에트로는 역시 성실하게 교육자의 길을 걷다가 이탈리아 교육계의 문제점을 담은 에세이집 두 권을 내면서 교육계의 스타로 등극해 일년 365일 바쁘게 전 국토를 종단하면서 사인회와 강연회, 세미나에 참여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건 같은 학교 대수학 교사였던 나디아와 결혼 후 이야기로, 나디아는 나폴리의 한 대학에서 자리를 얻기 위해 공을 들이다가 실패하고, 맏딸 엠마, 그 밑으로 아들 둘을 낳고 키우느라 죽을 똥을 싼다.
도메니코 스타르노네가 항용 그러하듯이 피에트로 입장에서 본 80평생이 1부를 이룬다면 2부는 피에트로와 나디아의 맏이 엠마가 본 부모, 3부는 피에트로의 첫 애인 테레사가 여든 살이 되었을 때 피에트로가 교육관련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일이 생겨 그 자리에서 연설하기 위하여 정말 오랜만에 로마로 가기 전에, 그리고 로마에 가서, 테레사가 본 일, 생각한 것 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당연히 테레사가 화자로 등장하는 3부에, 하도 이탈리아 교육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 지루했던 독자로 하여금 눈이 초롱초롱해지게 만드는 반전이 등장하건만, 그건 내가 말해줄 수 없지.
하여간 재미있는 작가이고 작품이다. 아직 스타르노네의 책을 읽지 않으신 분은, 명작까지는 아니니까 가뜩이나 어려운 시절에 지갑을 여시라 말은 쉽게 못하겠다. 그래도 이탈리아 소설이 블루칩인 건 아실 터이니 비교적 저렴한 책값으로 즐거운 하루 이틀을 보내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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