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리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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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처음 나왔을 때 한눈에 척 보고 희망도서 신청을 하려다가 아무래도 너무 올드 패션인 거 같아서 참았었다. 근데 책방 독자 서평도 괜찮고, 마침 도서관 서가에도 꽂혀 있기에 망설이지 않고 읽었다. 그리고 조금 고민.


  책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 전쟁 끝난 날이 언제라고? 그래. 1918년 11월 11일, 빼빼로 데이. 책의 초판이 1920년이니까 실제로 작품의 시간적 공간은 1918년 겨울부터 19년까지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이래서 고민이 생긴다. 다만 이건 전적으로 잘못된 세월에 청춘을 소비한 내 경우에 국한하는 것이니까 다른 독자들과는 관계가 없다는 점을 말해야겠다. 무슨 고민인가 하면:


  작품의 주인공은 49세의 과부 레오니 롱발. 애칭 레아 롱발.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시절에 행복한 사교계 이력을 끝마쳤다. 질서와 아름다운 속옷과 레이스 달린 비단 잠옷, 그리고 잘 숙성된 와인을 곁들인 공들인 요리를 좋아한다. 여사님의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하우스와인은 파리의 극히 제한된 계층만 홀짝거릴 수 있는 명품으로 알려질 정도. 눈치로 보아하니 19세기까지 토지를 매개로 한 부르주아, 즉 영주 정도의 계급이었다가 세월이 흘러 부동산을 정리하고 대부분 채권과 증권에 투자하여 배당금과 이자, 그리고 증권 가격 상승에 따른 차액으로 전혀 노동할 필요 없는 최고위층 부르주아이다.

  여사님의 애인은 벌써 6년 동안 연애를 하고 있는데 지금 나이가 스물넷. 작품 뒤로 가면 여사님은 쉰, ‘셰리’ 즉 귀염둥이, 자기, 여보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셰리’라고 불리는 당대 최고 미남 프레드 플루도 플루 집안의 외동아들인데 이 집도 애초에 부자가 아니었던 적이 한 번도 없는 최고 중의 최고 부르주아 집안이다. 심지어 자작이 플루 집안의 식객으로 머물고 남작도 이 사람들한테 껌벅 죽는 정도. 이 프레드, 즉 셰리가 남자 주인공을 맡았다. 셰리는 생긴 건 번드르르 하다. 어려서부터 가정부들이 돌려가며 키워 당연히 응석받이로 자라 이날 이때까지 세상만사 안하무인, 버르장머리 없는 청년으로 살았다. 일찍이 열일곱 살 때부터 금리생활자로 등극했는데, 공부를 못해 바칼로레아에 합격하지는 못했어도 셈 머리가 대단해서 마필, 보석, 자동차 등을 수집하고 두둑한 용돈을 써 댔지만 두 명의 자가용 운전수들의 장부를 꼼꼼히 살펴 운행거리와 연료비를 비교하며 닦달을 하는 등 좀스러운 부자의 면모를 과시했다.


  전쟁 끝나고 바로 직후의 파리를 무대로 했으면서도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셰리>에서는 시민들 가운데 아주, 아주 극소수만 차지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사랑만 열나 묘사하고 있다. 작품은 레아의 침실에서 벌거벗은 셰리가 아침부터 응석부리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이어서 며칠 안 지나 결혼식 전날 다시 레아의 침실에 들르고, 결혼을 하고, 마흔아홉 살 레아 롱발 여사는 이에 상심해 남부 유럽 각지로 여행을 떠나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셰리는 신혼생활에 당연히 있는 불편함과 레아를 향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앞에서 말한 가문의 식객인 자작이 머무는 호텔로 가서 몇 달 동안 방황하고, 뭐 이렇고 저렇고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 타령만 한다. 그러니까 일부 독자들이 주장하는 문학 속의 삶의 모습을 완전히 증발시킨 작품이어서 읽으면서 상당히 불편했다는 말이다.

  다시 한번 더 강조한다. 이런 작품을 읽을 때면 꼭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한다고 굳세게 배워서 그렇다. 카뮈가 쓴 <이방인>을 감동 깊게 읽었다는 것이 중요 죄목이었던 시절에 재수 없이 젊은 시절을 보낸 일단의 무리들은 대강 그러할 걸? 정오의 태양이 눈부시게 빛난다는 이유로 알제리의 식민지 청년을 권총을 쏴서 죽인다? 그걸 감명 깊게 읽었다고?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냐? 이런 시절이었다. 나도 하필이면 딱 그때, 지랄났다고 딱 그때 청춘시절을 보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였느냐 하면,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를 쓴 백범사상연구소 소장이자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를 쓴 백기완 선생. 지금 말은 이렇게 해도 당시 청년한테 이런 충고가 얼마나 새롭고, 획기적이고, 따당, 쇠망치로 대갈빡 한 대 맞은 것 같았는지. 눈이 다 번쩍 띄어지더라니까. 92년이던가,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이 양반한테 투표까지 했다는 거 아냐.

  이제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세월도 알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 알 거 같아서, 이까짓 소설책 한 권 읽으면서 구태여 그리 생각하지 않는 편이 여러모로 바람직하다는 건 충분히 이해를 하는 시절이 왔건만, 콜레트의 <셰리>는 사실 너무하기는 너무 했다. 일반 시민들은 전후 망가진 경제, 사회 속에서 하루하루 지내기가 무지하게 팍팍한 시절이었을 텐데, 등장인물은 부르주아, 귀족, 사교계 늙은 퇴물들, 일년 365일 로얄스위트룸에서 묵으며 유럽, 아메리카를 여행할 수 있는 이야기만 한다. 아주 넌덜이가 나더라고.

  그거 보면 공화국 프랑스도 참 오른쪽으로 멀리 간 거 같다. 콜레트가 1954년에 죽었을 때 프랑스 역사상 여자로는 처음으로 국장을 치뤄주었다잖아? 어떻게 봐도 자유, 평등, 박애하고는 거리가 좀 있는 양반 같은데 말씀이야.



  * 3별 반 정도가 마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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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 - 또 다른 삶으로 가는 여정 윤곽 3부작
레이첼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한길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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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이 세 번째 읽는 커스크로 읽은 책마다 페미니즘적 작품이라는 소개문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읽기로는 그냥 삶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인데 굳이 페미니즘을 입에 올리는 것을 보니, 요즘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로 광고를 하면 책 판매에 도움이 되는 모양이라고 짐작했던 것이 기억난다. <환승>도 비슷하다. 결혼을 하고 아들 둘 낳은 여성이 이혼하고 아들들과 함께 살다가 사정이 생겨 사실상 거주가 가능하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 지역자치회 소유 부동산을 구입해, 두세 주 동안 내부수리에 들어간다. 이 기간 동안 아들들은 아빠한테 보내고, 특히 아랫집에 사는 고약한 늙은 부부를 위시하여 몇몇 사람을 만나고 몇몇 문제도 생기는데 그런 몇몇을 소개하는 것이 이 책이다. 특정 사건 또는 인물, ‘특정’이라고 해도 살면서 얼마든지 마주칠 수 있는 유별나지 않은 사건 또는 인물 이야기에서 따른 사건 또는 인물로, 이 사건 또는 인물에서 또다른 사건 또는 인물로 옮기는 것을 레이첼 커스크는 “환승transit”라고 썼다.

  내 경우엔 이 책이 레이첼 커스크의 “환승 3부작” 가운데 첫번째 책인 줄 알고 골라 읽었다. 근데 다 읽고 독후감을 쓰려 책 소개 같은 걸 훑어보니 이런, “윤곽 3부작” 가운데 두번째 책이란다. 맞다. 뉴욕 타임즈가 “21세기 최고의 책 100” 가운데 열네 번 째로 꼽은 것이 <환승>이 아니라 <윤곽Outline>이었네 그려.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다음에 읽을 레이첼은 <윤곽>으로 하면 되지 뭐.


  제일 먼저 소개하는 에피소드는 주인공이자 화자 ‘나’에게 점성술사가 보낸 메일 이야기이다. 흠. 점성술사, 즉 점쟁이의 예언이라고? 소설작법 7장 2절에 보면 “점쟁이와 노파의 예언은 언제나 들어맞는다. 특히 불운이나 불행에 관한 예언은 더욱 그러하다.”라고 쓰여 있는 건 몇 번 이야기했다. 그러니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오기도 전에 이거 뭐 시작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읽어야겠군, 긴장하게 만든다.

  점성술사가 보낸 메일은 말한다. ‘나’와 관련한 천궁에 아주 중요한 뭔가가 곧 통과할 예정인데, 그것이 ‘나’의 앞날에 아주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지금 ‘나’는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고 지금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다가올 일에도 희망을 가질 수 없어 힘들어하게 될 것임을 직감하고 있단다. 아울러 보태기를, ‘나’가 고통스러워하며 몇몇 질문을 떠올렸지만 아마도 아직 답을 찾지 못했을 거라니, 이게 얼마나 맞는 말인지.

  이 과정을 무난하게 헤쳐 나가려면 방법이 있는데 그건 아래 칸을 클릭하면 가르쳐 주겠다, 다만 소정의 요금을 내야 한다, 해서 화자 ‘나’는 기꺼이 많지 않은 돈을 지불하기로 결정했단다. 당연히 메일이 주장하는 바는 화자 ‘나’ 한 명에게만 적용되는 현상이 아니라 현대를 살고 있는 거의 모든 도시 인류가 겪는 공통의 현상이고, 아마도 이 메일을 받은 영어권의 무수한 영어 사용자들 역시 마찬가지 현상이며 따라서 똑 같은 해법을 제시하고 있을 것이다. 이걸 알면서도 ‘나’는 돈을 지불한다. 당장 집 사는 일을 결정해야 하는 복잡하고 어렵고 정신 사나운 일이 기다리고 있어서.


  런던은 서울만큼 그럴까, 그랬을까 싶기는 하지만 부동산 열풍에 휩싸여 있어서 런던과 이웃한 위성 도시에 적당한 집을 구입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던 때였던 모양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집을 구입할 수 있는 자금은 한정되어 있다. 부동산 중개인이 조언한다. 양식 있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의 허름한 집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불안한 동네의 좋은 집보다 훨씬 바람직하다고. 맞는 말이다. 특히 런던과 위성도시 같이 다양한 인종이 살고 치안이 불안정한 곳에서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 둘을 키우려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고른 집이 위에서 말한 형편없는 상태의 지역자치회가 소유한 집. 전에 살던 사람은 가나 출신의 아프리칸 영국인으로 딸과 아들을 의사와 변호사로 키워 이제 자기들 책임을 벗어나 아름다운 가나로 돌아가 여생을 마칠 계획이다. 아랫집 노부부는 40여 년 전에 입주한 터줏대감으로 자치회와 직접 계약한 유일한 세대이기도 하다. 집 수리를 위하여 방문한 건축업자가 내부를 둘러보더니 말한다. 고생을 자초했다고. 집안에 벌레가 가득할 거란다. 겉으로 보기에는 주변 다른 집과 똑같이 보이는 회색 벽돌로 지은 아담한 빅토리아식 3층집이건만 내부는 거의 폐허 상태로 차마 독후감에 옮기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게다가 사사건건 기고만장해 악담과 욕설을 쏟아내는 아랫집 고약한 늙은이들까지. 이래서 만나는 사람이 건축업자, 아마 인테리어 업자일 텐데 역자 김현우는 건축업자라고 옮기기를 고집한다. 그리고 아랫집 부부.


  길을 가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남자 제러드를 발견한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15년 전, 아파트 꼭대기 층 그의 집에서 1년 남짓 동거했던 남자. 이날 지나치고 며칠 후에 초등학교 교복을 입은 어린 여자애와 손잡고 있을 때 다시 만난다. 그의 여덟 살 먹은 딸 클라라. 길가에 빅토리아풍 집들이 모인,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의 거주지역에서. 제러드는 몇 년째 클라라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학부모 역할을 수행한다. 이제는 엄마들과 친한 사이가 되었지만 처음에 아기 엄마들 모임에서 여자들이 자기에게 적대적이라 놀랐다고 한다. 캐나다 사람인 아내 다이앤은 일이 많은 사람이라 엄마 역할에 무관심하고, 엄마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반감을 드러낸다.

  이제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다이앤은 남편인 한 남자로 하여금 ①다른 사람을 돌보는 법, ②책임감을 가지는 법, 그리고 ③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고 그것을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제러드가 육아를 전담하게 한 것이라고 믿는다.

  이건 비평가들이 레이첼 커스크에게 페미니스트 작가라는 타이틀을 줄 수 있게 하는 다분히 여성주의적 시각에서의 돌봄, 책임감과 관계를 말한다. ‘남성’은 돌봄, 책임감, 관계가 결여된 인간을 가리키는 단어라는 뜻? 설마 아니겠지. 남자들은 이 책에서 말하는,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체득하기를 바라는 여성적 돌봄, 책임감, 관계와 상당히 거리가 있는 다른 의미에서 돌봄, 책임감, 관계의 형성과 유지 방법이 있다. 커스크의 이 책은 이런 남성성에 관해서는 침묵한다. 뭐 좋다. 그럴 수 있다. 의견 차이이고 커스크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비난할 생각은 없다. 조금 아쉽기는 해도.

  다만 남성이 여성의 이런 성향을 익히는 것이 매우 힘들지만, 여성이 남성의 돌봄, 책임감, 관계를 익히는 것도 매우 어렵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화자 ‘나’는 사람들을 만난다. 다음에는 염색하러 간 미용실의 주인 남자 데일과 수습 미용사, 그리고 10대 초반의 소년 고객과 아이의 어머니. 그러면 점성술사의 예언은 어떻게 된 거냐고? 소설작법 7장 2절? 놀랍게도 이 책 속에서 7장 2절은 적용되지 않는다. 다만 저 뒤쪽으로 가면 ‘나’가 점성술사의 메일을 한 번 더 거론하기는 해도.

  내가 그간 읽은 커스크의 작품과 사실 그리 특별하게 구별되는 작품은 아니다. <어느 도시 아가씨의 아주 우아한 시골생활>에서는 말 그대로 도시 아가씨가 아닌, 아직 이혼수속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도시 유부녀’가 갑자기 좋은 직장 때려치우고 시골 마을로 내려가 오페어로 입주해 가정부가 되는 이야기이며, <브레드쇼 가족 변주곡>은 아내가 대학 학과장이 되자 남편이 직장을 그만 두고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고 남는 시간에 피아노 연주를 즐기는 또는 몰두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환승> 중에서 제러드 이야기는 이미 전에 한 번 써먹은 적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도 커스크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독자에게 즐거움까지 줄 수준이다. 아쉬운 건 이런 옴니버스 식 모음은 읽고나서 얼마 되지 않아 금방 휘발되는 수가 많다는 것. 이 책은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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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영혼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9
정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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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찬. 한국전쟁 휴전서류에 서명도 하지 않았던 1953년,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 그나마 모든 전쟁물자와 구호물품이 쏟아져 들어오던 항구도시 부산에서 출생해 부산고등학교, 서울대 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해 월간지 기자로 활동하면서 소설을 쓴다. 1983년에 등단한 후 계속 정진해 1992년 소설집 《완전한 영혼》을 내니 그의 나이 서른아홉.

  우여곡절의 시기를 살았다. 유소년기 시절의 부패하고 무능했던 이승만을 거쳐 1992년까지 한 시절도 빠짐없이 정치군인이 지배하던 오오 대한민국, 우리 대한민국을 관통했다. 꼬박 40년을. 대학시절에는 유신반대를 외치며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도피하고, 검거되어 고문 끝에 동지들의 이름과 숨은 곳을 발설한 후 제법 길게 감옥에 갇힌 사람들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을 것이고, 작가보다 선배들의 경우에 1970년 평화시장 봉제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에 큰 빚을 진 것처럼, 정찬은 1980년 광주민주항쟁 피해자들에게 큰 빚을 지고 산다는 부채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소년시절 이후 30년간 한 번도 빠짐없이 정치군인에 의한 군부독재 속에서 호흡하던 작가는 월간 “신동아”를 발간하는 신문사 기자로 자신의 젊은 시절에 독재정권의 정보, 수사기관이 민간인 운동가들을 어떻게 탄압하고 고문했는지, 이에 대한 넓고 자세한 자료를 확보하고 열람하는 데 유리했을 것이다. 여기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소년이었다는 배고픔의 기억과, 부패한 사회 속에서도 점점 커지기 시작하는 경제규모가 점점 천민자본주의를 향해 맹렬하게 발진하는 모습도 목격하였을 것이니, 다른 건 몰라도, 고생은 했겠지만, 작가로의 소위 “문학적 재산”은 다른 세대보다 제법 빵빵했으리라.


  이 시대를 산 사람들은 비교적 편했다. 무조건 정부를 비판하면 곧바로 정의를 편드는 쪽에 선 것 같은 기분을 가질 수 있었으니. 사실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긴급조치 9호에 의하여 정부나 대통령을 비난하는 말을 딱 한 번 했다는 죄목으로 무거운 벌을 받아 감옥에 갇힐 수 있었으니. 몇 번 말한 적 있듯이 나 또한 교사 한 명이 수업시간에 붙들려 나가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런 세월이었다.

  정찬 앞에 드디어 변화의 시기가 왔다. 1987년 선거. 시민저항으로 얻은 전두환 정권의 백기는 6.29 선언으로 이어져 오랜 세월을 거쳐 드디어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한 기회가 온 것. 기억난다. 나는 선거권이 있었으나 그동안 한 번도 투표하지 않았다. 대통령을 내 손으로 직접 뽑을 때까지 모든 선거를 보이콧하고 있었던 거다. 정찬처럼 나 역시 1987년 선거에 모든 초점을 맞추었다. 유력 후보는 여당에서 노태우 후보, 갈라진 야당에서 김대중, 김영삼 후보. 나는 절망했다. 둘 중에 한 명만 나와라, 누가 됐든 찍겠다, 했는데 둘 다 나왔다. 그래서 이번 선거 역시 또다시 보이콧해버리고 말았다. 이건 내 경우이고 정찬은 당연한 선거 결과에 깊이 절망했던 거 같다.

  그래서 이이의 작품 속에는 민주화 운동 당시 정권에 의해 당한 고문, 고문이 인간성에 얼마나 심각한 상흔을 남기는지에 관한 이야기, 광주민주운동 당시 살아남은 피해자의 삶과, 관동지진 당시 현장에 있었던 1909년생 소년이 무정부주의자에서 일본 고문 기술자의 유일한 제자가 되는 과정과 이후에 관한 이야기 같은 것을 썼다.

  그리하여 인상깊었던 작품은 미친 20세기를 관통해 지나온 늙고 은퇴한 고문기술자가 그의 일본인 고문 스승의 죽음을 맞아 과거를 회상하고 장례식에 참가하고, 다시 돌아와 소회를 밝히는 중편소설 <얼음의 집>이었다. 하지만 가장 흥미롭게 읽은 건 <얼음의 집>에 비하면 소품이랄 수 있는 <패랭이 꽃>.

  <패랭이 꽃>에서는 어린 아들과 용산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안양을 거쳐 당시 우리나라 유일의 협궤열차인 수인선을 타고 가다가 다시 버스로 바닷길을 달려 갈 수 있었던 오이도로 향하는 이야기이다.

  수인선 타 보셨나? 수원에서 아침 열차를 타면 왼쪽으로 끝도 없는 염전과 작은 포구가 줄지어 늘어서고, 생물 생선과 해산물, 해초 등이 든 세피아 색 다라를 들고 멀지 않은 시장으로 향하는 아주머니들. 어전, 야목, 고잔, 사리, 군자역을 지나 한 시간 너머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역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인천 송도역에 닿는다. 40년도 넘었다. 멀리 놀러 갔다가 후배들을 데리고 수원에 들러 이름을 잊은 극장에서 심야영화, 실비아 크리스텔이 타이틀 롤을 한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단체관람한 후 수원역으로 걸어가 해장국 한 그릇씩 먹인 다음 수인선 경험도 시켜주던 나. 이만하면 괜찮은 휴학생 선배였던 것도 같은데….

  책을 읽는 것도 책 속에 독자의 경험이 들어 있으면 더 가깝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패랭이 꽃>이 제일 좋았다. 하지만 작가의 기억과 기대와는 달리 이미 다 개발해 갯가라고 해도 건조한 먼지와 플라스틱 폐품과 문짝 떨어진 쓰레기 냉장고만 나뒹구는 오이도. 그리고 보태지는 화자 ‘나’의 어린 시절 기억. 그 속에 단 하나 남은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는 아마도 전후 산으로 도피한 파르티잔. 살면서 계속된 경찰의 방문과, 누에 물레를 돌려 생활을 꾸리던 어머니, 그리고 기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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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에 봄은 지고 더봄 중국문학 전집 13
거페이 지음, 유소영 옮김 / 더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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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페이의 “강남 3부작”이 이로써 막을 내렸다. <복사꽃 그대 얼굴>, <산하는 잠들고>에 이어 <강남에 봄은 지고>까지 3권 1,580쪽의 끝장까지 왔다. 창장(長江) 남쪽 ‘푸지’라는 작은 마을 은퇴 관리의 딸 슈미와 엄마의 연인 장자위안과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화자서(花家舍)라는 이름의 유토피아 비슷한 화적떼 집단까지의 방랑과 윤간에 의한 출산으로 얻은 아들 탄궁다譚功達.

  2대 주인공 탄궁다는 무대를 작은 마을 푸지에서 더 큰 도시 메이청 현으로 옮긴다. 벌써 탄궁다는 마흔이 넘은 숫총각, 요새 말로 모태 솔로 현장님이다. 하이틴이 된 탄궁다는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고 해방군대에 들어가 온갖 중요하고 거친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이루어 영웅의 이름으로 고향 푸지를 아우르는 메이청의 현장에 취임했다. 현의 감옥에서 생을 마친 엄마를 닮아 유토피아를 찾기 보다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신념으로 메이청 인근에 각종 대형 공사를 벌였다. 가장 중요한 것이 창장에서 물길을 만들어 공업과 농업 용수로 사용하겠다는 것. 이 과정에 주민들 사이에 시위가 생겼고 목수 왕씨가 군중에 떠밀려 보에서 떨어져 물에 빠져 죽는 일이 벌어진다. 훗날 탄궁다는 이때 죽은 목수의 아들 하나 딸린 과부 장진판張金芳과 결혼해 아들 탄돤우譚端午를 낳지만 이때는 탄궁다가 죄를 지어 멀고 먼 화자서로 처벌 성 원격지 배치를 받아 아들 돤우는 장진판이 키운다. 이제 왕년에 불에 타 사라진 유토피아 화자서는 공산주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 운영하는 공산주의식 유토피아로 다시 태어났지만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은 유토피아가 될 수 없는 법이라 탄궁다는 염증을 느끼고 메이청으로 돌아온다. 젊은 연인 야오페이페이도 살인의 죄를 짓고 메이청 현 부근 몇 백리를 방랑하다 생을 끝내고.


  이제 대단원에 이른 3대 주인공 탄돤우.

  상하이의 대학에서 중문학을 전공하고, 그의 학업 수준을 아까워한 교수의 추천으로 베이징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이 와중에 천안문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보이며, 숱하게 많은 학생, 시민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어떤 식으로든지 탄돤우 역시 조금은 그러했다. 체포와 고문, 처벌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피해 고향인 메이청의 인근도시 허푸로 갔다. 허푸에는 함께 공부를 하고 시 쓰는 흉내도 내며 훗날 허푸 석간지를 간행하는 신문사에서 근무하는 쉬지스를 만나 그의 계획을 따라 낡은 절temple인 초안사로 소풍을 가기로 한다.

  이날이 하필 추석이었다. 벌쭘하니 남자들만 가기 뭐해 쉬지스가 여학생 두 명을 부른다. 평소 자신을 흠모하는 눈치를 보였던 슈룽秀蓉과 다른 통통한 여학생. 쉬지스가 시장에 가서 좋은 토종닭 한 마리를 사 손에 들고 찾은 멀지 않은 호젓한 장소 초안사. 소풍은 대체로 즐거웠으며 낡아 거의 황폐한 절의 부엌에서 요리한 토종닭도 맛이 괜찮았는데, 그러다가 땅거미가 질 무렵, 쉬지스는 통통한 여학생을 데리고 슬쩍 사라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부러 둘만 남겨두고 시내에 가서 영화관에 들어갔고, 당시 젊은 중국인들이 흔하게 그랬는지는 몰라도 쉬지스가 컴컴한 영화관에서 아가씨의 몸을 주물럭거리려다가 대차게 귀싸대기를 얻어 맞은 다음 보름 정도 경찰서 유치장에서 구류를 살고 나왔다.

  겨우 열아홉 살인 슈룽은 돤우와 저녁을 먹으며 긴 젓가락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매사 소극적이고 사색에 잠기는 버릇이 있는 돤우도 남자인지라 이미 어두워진 밤, 인적 없는 산사의 절 관리인의 방에 자신과 슈룽 둘 밖에 없으며, 관리인은 며칠 동안 절에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들어 은근히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상대 여학생들에게는 난진에서 데뷔도 하고 좋은 평을 받고 있는 젊은 시인이라 알려진 돤우는 시쳇말로 ‘먹고 들어가는’ 아우라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마른 몸에 몸가짐 역시 조신한 슈룽의 손에서 나무 젓가락을 휙 잡아 빼내 손바닥에 상처를 입힌 돤우는 곧바로 슈룽의 머리를 감싸 키스를 했고, 잠깐 격렬히 고갯짓을 하던 슈룽도 잠시 후 다소곳이 그를 받아주어 함께 관리인의 침대에 오른다. 그리고 잠시 후. 즉, 할 거 다 한 다음에 슈룽은 말한다.

  “이제 난 당신 사람이예요.”

  이게 3부작의 마지막 작품 <강남에 봄은 지고>의 첫 문장이다.


  1부에서 돤우의 할머니 슈미는 사랑하는 장자위안의 시신이 창장변의 갈대숲에서 발견된 후 방랑을 떠나 화적떼 소굴인 화자서에서 두목들 몇 명에게 윤간을 당해 아이를 낳고, 슈미의 아들 탄궁다는 사랑하는 젊은 애인 야오페이페이와 오직 순정한 사랑만 하다가 다소 야만적인 과부 장진판이 덮치는 바람에 결혼을 하고 탄돤우를 낳는다. 이들의 손자이자 아들 돤우는 자신은 사랑하지 않지만 하여간 인연을 맺었다고 생각하는 19세 여성 슈룽과 관계를 가졌고, 슈룽은 처음부터 이제 자기는 돤우의 여자라고 선언한다.

  땀에 젖은 빨간 라운드 셔츠만 한 장 입은 슈룽과 밤벌레 우는 야심한 시간에 초은사 경내를 산보하는 돤우. 그는 절대로 슈룽을 사랑하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것. 돤우가 보기에 슈룽은 자신과 전혀 맞지 않는다. 밝은 달 아래 풀밭을 보고도 시 귀절 하나 떠올리지 못하고, 달빛을 보면서도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를 연상하지도 못하는 일천한 소양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겨우 한 번 했을 뿐인데 슈룽은 결혼 생활에 대한 동경에 가득 차 있어서 집과 정원, 가구, 그리고 신혼여행은 티베트로 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더니 춥다고 한다. 한가위 야심한 시간, 밤이슬 내릴 때 맨몸에 라운드 티셔츠 하나만 입었으니 감기가 든 거다. 열이 오소소 돋는 슈룽. 방으로 돌아온 이들. 그가 지나친 요구를 해도 슈룽은 언제나 “마음대로 해요.”라고 말한다.

  밤이 깊어질수록 열이 나는 슈룽. 돤우는 깊게 키스를 해보고 자기 마음대로 한기와 피로로 인한 감기라고 진단한다. 사실 돤우는 새벽 다섯 시 반 열차를 타고 상하이로 돌아가야 한다. 수중에 땡전 한 푼 없는 것을 확인한 돤우는 슈룽이 깊은 잠에 빠진 걸 확인하고 슈룽의 주머니에 든 돈을 탈탈 털어 절을 나섰다. 돈 속에는 돤우의 상하이 주소를 써준 쪽지까지 들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발견한다.

  슈룽은 눈을 떴을 때 당연히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돤우의 가방을 비롯해 그의 소지품도 하나 없었다. 약을 사러 갔나? 슈룽은 기다린다. 오래 기다린다. 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안개비. 그러다가 가랑비. 시간이 더 지나니까 장대비가 쏟아진다. 감기 기운은 가실 줄 모르고 열도 내리지 않는다. 오래 기다린 슈룽. 이제 더 머물 수 없다. 무엇보다 위험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의를 입고, 바지와 점퍼를 입고서야 바지 속에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걸 알았다. 돤우 씨는 어디 갔을까? 슈룽은 초은사에서 나와 처음엔 내리막 비포장길을 걷고, 길이 넓어지자 아스팔트 포장길을 걷는다. 지나는 차도 없다. 아주 없지는 않다. 얼마나 걸었을까, 차가 한 대 슈룽 앞에 선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가 바라본다. 슈룽은 그대로 걷는다. 남자의 차는 슈룽의 30미터쯤 뒤에서 슈룽과 같은 속도로 따라온다. 십분, 이십분 지나 다시 슈룽의 옆으로 다가온 남자와 차. 차문이 열리더니 그가 말한다. “이제는 안전할 거 같지? 그만 타지 그래.”

  남자는 경찰시험에 합격해 연수원에서 연수를 끝내고 나오는 참이었다. 그는 슈룽을 인근 병원에 데려가 입원시키고 링거 주사를 맞게 한다. 입이 거칠지만 하는 행동은 헌신적이다. 탕옌성. 그와 알고 지내기 시작한다. 남녀관계라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습해진다. 이들도 당연히 그랬고, 임신중절을 한 번 했으며, 당연히 결혼을 염두에 둔다. 그렇게 시간이 간다. 단돤우는 그날 왜 나를 떠났을까?


  베이징에서 석사학위를 마친 탄돤우에게 교수가 선택을 요구한다. 자기가 추천해주는 국책연구소에 들어가든지 박사과정을 밟으라고. 돤우는 박사를 지원한다. 사실 2안을 선택하는 건 지도교수의 의견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돤우는 박사 지원에서 탈락한다. 그리고 다른 교수들 여러명이 보고 있는 가운데 노골적으로 지도교수를 비아냥거리고 거친 욕설을 퍼붓는다. 학교에서 완전하게 떠나겠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다. 이후 상하이로 돌아와 시인 생활을 하건만 제대로 살 수 없는 건 베이징이나 상하이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몇 년을 비실거리다가 그나마 먹고 살기 위하여 허푸로 돌아온 탄돤우. 그는 정부에서 발행하는 지방지 사무소에서 박봉을 받으며 사는 편집인으로 만족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백화점 귀금속 판매점 앞을 지나다가 한 여자를 본 것 같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거울에 비친 여자를 본 것이고, 건장한 남자 옆에서 아마 틀림없이 결혼반지를 고르고 있던 여자도 거울을 통해 탄돤우를 마주 보았다는 걸 알았다. 돤우는 얼른 자리를 떴다. 슈룽은 그날 자기와의 살림을 위하여 남자가 구입한 긴 골목 끝의 아늑한 집에서 약혼자 탕옌성에게 파혼해야 함을 말하고, 탕옌성 역시 별 말없이 수긍한다.

  며칠 후, 슈룽은 탄돤우와 결혼한다.

  탄돤우는 이제 도색 관광지가 된 화자서에 가고, 슈룽은 앞 편의 여자 주인공이 그랬듯이 방랑을 하지만 꿈에도 그리던 티베트에는 도착하지 못한다. 삶이 이들 사이에서 멀어갈 때, 그때는…, 차마 말해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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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6-30 15: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페이 강남 3부작 완독을 축하드립니다. 쉽지 않은 여정이셨을텐데 비록 남의 나라라도 이렇게 꼼꼼하게 읽어 주는 독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작가는 뿌듯해 할 것 같아요. 저도 좀 진득하게 읽는 작가가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ㅋ

Falstaff 2025-07-01 05:43   좋아요 1 | URL
3부작 다 읽어야겠다, 마음 먹고 일곱달 반이나 걸렸는 걸요. ㅎㅎㅎ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만 이 3부작 보다는 <봄바람을 기다리며>가 훨씬 좋았습니다. <봄바람...> 때문에 거페이 좀 읽어야겠다 싶었었거든요. ㅋㅋ
 
소중한 저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6
제럴드 머네인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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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지 않았던 머네인의 <평원>을 읽으면서 내내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의 책 <밤 끝으로의 여행>이 머리속을 배회했었던 것처럼, 작품집 《소중한 저주》를 읽는 중에는 의식이 흐르는 쪽으로 사유를 멈추지 않았던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곤혹스러웠던 <율리시즈>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꺼내 읽는 듯한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피네간의 경야>와 더 비슷한데 끝까지 읽지 못해서 모르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제럴드 머네인을 읽겠다고 마음먹으면 먼저 《소중한 저주》를 읽은 후에 <평원>을 펼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작가의 작품 스타일과 어떤 방식으로 픽션을 전개하는지 작지 않은 힌트를 얻을 수 있고, 그 만큼 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단편 열두 편을 실은 작품집. 머네인은 자신의 책을 “산문 픽션집”이라 해야 만족할 듯하다. 그는 소설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대신 ‘픽션’이라고만 했다. 기존의 소설이라는 스토리 위주의 양식을 지양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산문 예술형식을 기존에 쓰는 단어인 픽션이라고 칭한다. 그의 세계관은 그리하여 정치와 경제, 사회적 인간들 간의 유기적 움직임에 있지 않고, 자신과 주위의 자연 그리고 사색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용하는 뇌활동에 국한한다. 지리적으로 보면 실제로는 오스트레일리아(이하 “호주”)의 빅토리아 주, 멜버른 시에 속하지는 않지만 영향권에 있는 멜버른과 위성 도시,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사색의 경계인 깁슬랜드와 ‘헬베티아’라고 하는 자신의 세계.

  등장인물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굳이 ‘아무렇게나 이름을 붙여도 상관없는 누구’로 지칭한다. 특히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양인과 다르다. 새벽이 오기 전에 내 이름을 알아내면 목을 내 놓겠소. 공주 투란도트에게 이렇게 약속하고, 근사한 아리아 <아무도 잠 못 이루리>를 뽑는 테너 칼라프 왕자처럼. 나머지는 전부 그와 그녀로 표기하는데, 그와 그녀가 숱한 빈도로 등장해도 독자가 질리지 않는 이유는 “그가, 즉 주인공이” 또는 “그가, 즉 그녀의 남자친구가” 이런 식으로 보충해 설명을 해주어 독자가 도대체 ‘그’가 누구를 지칭하는 지 조금도 헛갈리지 않게 읽을 수 있으며, 심지어 우리말이지만 읽으면서 약간의 리듬감을 갖게 해주기도 한다.

  작품 속에서 1인칭 화자로 등장하건, 3인칭 ‘그’로 나오건 간에 1인칭 화자와 작가 시점의 그는 전부 작가인 것이 틀림없고, 소설이라기보다 산문으로 쓴 픽션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만큼 작품 속 스토리 역시 작가가 기억하는 한에서 머네인의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가 영국에서 배를 타고 호주로 이주한 시절부터 현재까지 직접 보거나 누구한테 들었거나, 확실한 기억이라고 주장하지는 못하지만 어렴풋한 어린시절의 음각화처럼 새겨져 있는 희미한 필름에 국한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반응을 한다거나, 어떻게 생각을 했을 거라는 표현 역시 없다. 그건 화자 또는 작가가 알 수 없는 영역의 것이니까.

  정리해보면, 물리적 지리는 최대 빅토리아 주, 중간 정도로 멜버른 시를 둘러싼 몇 개의 위성도시, 작게는 책이 잔뜩 쌓여 있는 제럴드 머네인의 집 서재. 시간은 듣거나 보거나 유년 시절의 어렴풋한 기억에 의거한 할아버지 시절부터 현재까지. 사색의 공간은 자신이 만든 (아마도 빅토리아 주보다는 조금 작을) 깁슬랜드 숲과 크기를 알 수 없는 자신만의 영토인 헬베티아.


  작가가 그림에는 별로 소질도 없고 관심도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특정 세부 모습 하나를 평생 가슴에 담게 되는데, B.W. 리더가 그린 <2월> 속 ‘길 옆에 물이 찬 특정한 바퀴자국의 이미지’이다. 부언을 하면 비가 오고 얼마 되지 않은 시골길에 마차가 지나가 땅이 팬 바퀴자국에 물이 고인 장면이다. 실제로 바퀴자국에 다가가 내려다보면 고인 물에 비친 맑은 하늘도, 우연히 동네 여자 아이와 함께 있었다면 아이의 콧잔등에 조밀하게 박인 깨소금 같은 주근깨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작가가 주인공으로 삼은 그의 가슴에 평생 남아 있었다. 이 바퀴자국은 그를 따라다니며 어떨 때는 치마와 양말, 신발을 가방에 넣은 채 어둑한 길을 따라 맨발로 댄스파티에 가는 소녀의 발에 밟혀 생각지도 못한 거머리가 소녀의 발등에 달라붙기도 한다. 주인공인 그는 B.W.리더의 그림을 감명 깊게 보았지만 미술평론 잡지에서는 “칭찬할 만한 요소가 거의 없는 풍경화”라고 혹평을 해 놓았던 것을 기억한다. 세월이 흘러 50대 초반이 된 주인공인 그는 <그 깁슬랜드 숲에서>라는 그림을 보게 되고, 이 그림에 나오는 길이 바퀴자국의 이미지와 연결이 되는데, 길과 바퀴자국과 깁슬랜드라는 지명이 또 40여 년 전 보고 여태 보지 못했던 특정 이미지와 연결이 된다.

  일곱 살 때 누군가 소박한 외국우표 수집 앨범을 물려준 적이 있다. 많지는 않지만 세계각국에서 만든 우표가 망라되어 주인공인 그를 우표를 만든 나라가 어디 있는지 지도책을 찾게 만들었는데, 이 나라들 가운데 헬베티아Helvetia라는 나라 이름이 있었다. 각주를 보면 “로마 제국에 정복되기 전 현 스위스 지역…(중략)…스위스 연방국을 의인화한 여성의 이름이기도 하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아직 어린 주인공인 그는 헬베티아가 어느 나라를 말하는지, 이미 망해버린 나라인지, 아니면 “높은 깃이 달린 옷을 입고 풍성하고 색이 짙은 머리칼을 가지고 표정에 슬픔이 살짝 깃들어 있는 남자”가 사는 숨겨진 나라인지 알 도리가 없다. 그리하여 헬베티아는 점점, 40년이 지나도록 (물론 나중에 헬베티아가 스위스 연방의 다른 이름인 줄 알게 되어도) 자신이 속한 자신만의 나라로 기능한다.


  중∙단편이 열두 편 실렸다고 했는데, 사실 작품을 중∙단편으로 구분하는 것도 머네인이 바라는 건 아닐 것이다. 그저 산문 픽션 열두 편. 이렇게 써야 마땅할 듯. 열두 편 모두 독립적이지만 서로 연동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모두 ‘픽션’이니까 어떤 픽션에서는 슬하에 1남1녀, 어떤 픽션에서는 슬하에 2남을 두기도 한다. 그러나 영국에서 호주로 이민 온 가족. 처음엔 농지로 개간한다는 조건으로 평야에 넓은 땅을 불하 받고 대출도 얻어 집도 지었지만 가혹한 호주의 자연에 굴복하여 개간을 포기하고 빅토리아 주 변두리의 작은 도시로 옮겼다가 세대가 바뀌면서 맬버른의 동서남북 위성도시로 또다시 옮겨 사는 가족의 일원인 것은 공통점이다. 주인공인 그는 모든 작품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시간만 나면 책을 읽었는데 집에 책을 읽는 사람이 없어서 늘 몇 권의 책을 헤지도록 읽고 또 읽었다는 것.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시험에도 합격했으나 진학 대신 취업을 선택해 책을 사서 읽기 시작하고, 초등학교 교사도 하고, 글도 쓰고, 결혼도 하고, 대학 과정을 밟고, 단과대학에서 픽션창작을 십수년 강의하다 전업작가의 길을 선택해 집안살림을 도맡아 하고 등등 제럴드 머네인의 개인사와 별로 다르지 않은 환경을 유지한다. 그러니 그의 픽션은 모두 자신의 서재에서 오로지 기억과 상상에 의존해 펼친 의식의 확장 과정이라고 단언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말한다. “자신이 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주제는 자신의 마음이며, 그의 글이 출판으로 적합하다고 판단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헬타비아인 방식으로만 쓸 수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다.”고.(p.362~3) 다만, 내가 기껏해봐야 딜레탕트라는 점만 잊지 마시라.

  이 책의 테마는 몇 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축약하기는 하지만 자체로는 한 인간이 평생 추구한 거대한 사고. 그건 가족사와 책, 그리고 호주의 자연으로의 평야와 산. 가족사는 빼자. 가족사 없는 사람은 있기는 있지만 거의 없으니. 그럼 책, 책으로 대표하는 소위 문학과 주인공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개간하려고 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만 호주의 평야. 이 거칠고 광활한 평야는 주인공인 그 또는 주인공인 제럴드 머네인이 평생을 건 문학과 다르지 않다. 독자는 이 점을 오래지 않아 알게 된다. 책 또는 글쓰기와 읽기에 대한 사색. 자연과 평야에 대한 태생적 숙고. 이것들이 서로 연결이 되어, 틀림없이 책이 가득한 서재 책상에 앉아 손에 턱을 괴고 생각에 빠진 상태에서 서로 흘렀을 것이라서, 독자는,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하여간 나는 고생스럽게 읽었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한번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딱 그 책을 다시 편 듯한 느낌. 그러나 놀랍기도 하지. 그새 세월이 흘렀나 보다. 제럴드 머네인이 결코 프루스트보다 읽기 쉽지 않건만 이제는 진도가 나간다. 적어도 읽히는데, 그것도 흥미롭게 읽힌다. 다만 읽는 속도가 문제. 그러나 이제 남아도는 것이 돈하고 시간밖에 없는 시절이라 그까짓 것, 천천히 읽어 여유로워 오히려 좋다. 하루 일곱 시간 읽어서 겨우 백 쪽을 넘기는 찬찬한 독서. 나도 머네인의 사색을 따라 급하지 않게 몇 십 년을 훌쩍 넘어다니며 순한 시간 여행도 하고, 시간 속 작은 장치들이 서로 졸졸 흘러가는 것을 내려다보는 것이 이렇게 즐거워질 지 몰랐다. 이게 다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드디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을 때가 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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