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생책

 인터넷 친구가 어느 날, 내게 있어 어떤 것이 인생책이며, 어떤 문장이 인생문장이냐고 물었다. 흠. 인생책. 인생책이란 것이 머리 속에 도사리고 있다가 단박에 나오지 않더라. LDT, 레르몬토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로 이어지는 러시아 작가들, 이에 못지 않는 영어, 프랑스어, 독어권 거장들. 세르반테스를 필두로 라틴 아메리카까지 아우르는 스페인, 포르투갈 언어권 작품들. 게다가 인생책, 자신이 여태까지 살면서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이란 뜻 비슷하리라 생각하는데, 그건 때에 따라, 처한 상황에 따라 변하기도 하리라. 철조망 있지? 그걸 왼쪽 관자놀이로 집어넣어 오른쪽 관자놀이로 뺀 다음 누군가가 양쪽을 두 손으로 잡고 뱅뱅 돌리는 것 같은 기분. 철조망? 철조망, 하면 생각나는 작품이 있으신가? 철조망에 눈알이 걸린 채로 죽어간 인간, 누혜. 그를 만들어낸 작가 장용학. 아주 예전에 신구문화사라는 출판사가 있어(검색해보니까 지금도 있다!), <현대한국문학전집>을 내놓았고 그 가운데 네 번째 책이 "장용학"이다. 1965년 출간. 모두 스물 몇 권의 책으로 되어 있으며 소설과 시를 망라했다. 이 책을 생각하면 슬프다. 집안이 거덜이 나 가족 해체를 당하는 와중에 친척집 지하 창고에 맡겨둔 정음사 세계문학전집과 이 신구문화사 전집은 10년이 넘는 세월을 당해 심하게 손상되어 기어이 버려야 하는 상황에 처했는데, 이 가운데 "최인훈"과 "장용학" 두 권만큼은 절대 버릴 수 없었다. 쥐똥을 까맣게 뒤집어 쓴 지하실에서 발견한 장용학. 바싹 말라 순식간에 바스스 헤질 것 같은 책을, 스카치 테이프로 붙혀가며, 그 후 네 번을 더 읽었다. <원형의 전설>. 인생책을 찾는 일. 그건 내 가슴 속에 묻어버려 이젠 더 이상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거의 아문 상처를 다시 내보이는 일이었다는 걸 미쳐 몰랐다.

 

 

 책에는 <원형의 전설>과 중편 <비인탄생>, <역성서설>, 단편 <요한시집>, <현대의 야>, <상립신화>가 실려있으며, 여태까지 발표한 모든 장용학 평론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고 일컬어지는 김현의 해설 <에피메니드의 역설>이 들어있다. 한자를 배우지 않으신 분들은 이 책을 읽을 생각조차 못할 것이다. 조사를 뺀 나머지 거의 모든 단어가 한자로 되어 있어서. 이후 두산출판에서 같은 목차로 완전히 한글로 바꿔 출간한 적이 있는데, 희한도 하지, 난 도무지 읽지 못하겠어서 술친구 줘버렸다. 몇 번 이야기한 가톨릭 환자 증세가 농후한 술친구. 그이는 무지하게 재미있게 잘 읽었단다.
 장용학은 환자였다. 무학여고 국어교사로 정년퇴직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97년이던가, 문학잡지에 마지막 인터뷰가 실렸다. 자신이 아직도 작가, 소설가로 불리는 걸 싫어했다. 이제 글을 쓰지 못하는데 무슨 작가며 소설가인가.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2. 인생문장
 숱한 문장 가운데 하나를 고른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불행하고 희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더 불행하다." 젊은 시절의 정호승이 쓴 시에 나온다. 이젠 비록 시 쓰는 기계에서 고치에서 실 뽑듯 비슷한 시를 가공 생산하는 업자지만, 젊은 시절 괜찮은 서정시인이었다. 이거? 아니. "이미 죽어버린 내 몸뚱이 위로 누군가 유유히 오줌을 갈기고 떠나갔어." 최승자의 처녀시집 <이 시대의 사랑>에서 나온 문장인데 꽤 근사하다. 이거? 이것도 아니다.
 대학에 입학했다. 당연하게 서클, 요즘엔 동아리라고 불리는 서클에 가입을 했다. 내가 활동하던 서클 바로 옆에 "철학연구회"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아 개방공간을 캐비닛으로 분리를 하고 지내던 시절이었다. 모두 가난한 시절이었다. 요새 학생들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철학연구회 캐비닛에, 이후 몇 십 년이 지나 이젠 내 카톡 소개말에도 적혀 있게되는 인생문장이, 멋진 그림과 함께 쓰여 있었다.
 "진로眞露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정말이라니까. 보실랴?

 


3. 꼴값하는 영숙이
 영숙아, 어쩌려고.... 얘가 드디어 미쳤다. 그제 아침 변기 위에서 알았다. 염병할 계간지 '창피'가 영숙이의 중편소설을 실었단다. 창피도 미쳤다. 정말 개잡종들이다. 영숙이는 누차 얘기했듯이 데뷔작부터 플롯 표절로 시작해 오랜 세월 꾸준하게, 도전정신에 충만해 글 도둑질을 해 온 도둑년이다. 내 말이 비약이나 아마추어의 선입견이라고 생각하면 나무위키에서 검색해보시라. 어마어마하다. 근데 워낙 책이 잘 팔리는, 당연히 문학성 여부는 제쳐두자, 나는 영숙이가 쓴 <기차는 일곱시 반에 떠나네>이후 돈 아까워 절대 얘를 위해 돈을 쓰지 않았으니까, 하여튼 책이 잘 팔리니 백낙천, 글씨 잘 보세요, 낙청이가 아니고 낙천입니다, 낙천, 백낙천이 의붓딸을 삼았는지 어땠는지, 늙은 몸을 이끌고 맨발로 뛰어나와서, 세상 사람들아, 내 위대한 허명을 걸고 말하노니, 영숙이가 어떤 영숙인데 글도둑질을 하겠느냐, 절대 아니다, 라고 했으며, 애초에 그가 발행인이었던 출판사 창피 역시 그게 '문자적 유사성'이지 어떻게 표절이냐고 대한민국 국민과 독자를 정말로 우습게 본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언젠가 영숙이가 다시 나팔을 불며 "푸르스름한 말 한 필"(요한묵시록 6장 8절에서 인용) 위에 타고 등장할 것이다, 라며 걱정 비슷하게 했었는데, 이것 봐라, 이것 봐. 얘가 사람이야? 창피가 당대 지식인들이 모인 출판사야? 이 상녀러 연놈들이 지금 뭐 하는 짓인지, 뭐 애초에 이럴 줄 알았지만, 막상 당하니까 정말 우습고 가소롭다. 이러니 내가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문학작품에 정이 가겠어, 안 가겠어? 영숙이 얘도 이젠 나이도 먹고 했는데, 나이는 항문으로 먹었는지 아직도 철없고, 얌전하지만 버르장머리라곤 아예 없는 열두 살짜리 털도 안 난 아이 같으면 어쩌겠느냔 말이지. 이게 투정 아냐? 뭐라? 작가더러 글 쓰지 말라면 죽으란 얘기냐고? 아니다. 쓰던 말던 관심이 없지만 죽지는 말아라. 써. 안 쓰면 죽을 거 같다며? 그럼 써. 그리고 자비 출판해서 아는 사람끼리 돌려봐. 무대에는 나오지 말라는 얘기다. 어려운 말로 이런 걸 뭐라 그러는 줄 알아? 자숙自肅이란 거다. 죽을 때까지 자숙하라고. 영숙아, 넌 애초에 작가가 아니었어.

 근데 영숙이가 정말 영숙이는 아닌 거 같다고요? 맞습니다. 영숙이 아닙니다. 본래 이름이 있었습죠. 얘가 몹씨 좋지 않은 일을 했거든요. 우리말 문법에 이런 경우에 적용되는 기가 막힌 현상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힘든데요,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초성자음 부끄럼 탈락'이라고. 그래서 이름이 '영숙'이로 바뀐 겁니다.

 

 

4, <분례기>에 관한 슬픈 이야기

 

 <분례기>에, 읽은 다음에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정신지체 부부가 등장한다. 정신지체자도 자신이 약간 모자르지만 비장애인과 똑같이 희로애락을 느끼며 인생을 산다. 그래 부부 사이에 아이가 하나 생기는데 산통이 너무 커서 엄마가 아이를 보기만 하면 눌러 죽이려고 하는 거다. 그래 시어머니가 아이를 키우기에 이르는데, 문제는 퉁퉁 붓는 젖. 아이에게 젖을 먹이지 않으면 젖이 딱딱해지면서 고통스러운 유방통을 겪는다고 한다. 그래 이걸 짜주어야 하건만 어떻게? 이때 같은 정신지체 장애인인 남편이 아이 대신 젖을 쭉쭉 빨아먹는다. 근데 암만해도 밍밍하고 좀 느끼할 거 같지? 남편도 딱 그렇다. 그래 젖을 다 빨아먹은 다음에 충청도 예산 사투리로 아내에게 한 마디 한다.
 "짐치."
 표준어로 하면 '김치'. 이게 구개음화되어 '짐치'로 발음하는 것. 젖을 먹어 느끼한 입을 김치 한 조각 먹어 말끔하게 입가심 하는 장면. 이 얼마나 재미있는가. 그래 이 이야기를 마누라쟁이한테 해주었겠다! 이게 사달. 내 마누라, 가는 곳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문제의 이 남편이라는 듯이 마구 해댄 거다. 어쩐지 마누라하고 친한 여자들 나 보면 싱글싱글 쪼개는 게 이상하다 했더니, 이런 일이. 하이고 나 참. 쪽팔려 내가 사는 작은 도시에 함부로 나다니지 못한다.
 여기까지면 뭐 그러려니 할 수도 (없지만 굳이 이야기 하자면) 있지만, 작은 아이도 그게 나 젊은 시절 내가 저질렀던 만행인줄로 확신하고, 엄마 말씀이니까 분명히 사실일 거야, 자기 애인한테, 지금은 물론 엑스 걸프렌드지만, 고스란히 다 말해줬단다. 밥 먹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밥알을 튀어가며 길길이 뛰었다. 아니라고, 그건 방영웅이란 소설가가 쓴 <분례기>에서 나오는 일화라고. 네 엄마한테 물어보라고. 아이가 엄마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니까, 염병할 마누라가 배시시 웃으며, 그게 사실은, 이러더라.
 <분례기> 초판본도 역시 친척 지하실에서 전사해버리고 만다. 그래 새 책을 한 권 구하려 오래 알아봤다가 이제 한 권 발견했다. 6월이나 7월에 읽을 거 같다. 아 썅. 이 책 찍은 데가 출판사 '창피'다. 이 출판사가 환장하겠는 건, 맘에 들지 않으면 안 읽으면 그만인데, 도무지 읽지 않을 수도 없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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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5-30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전 장용학 책은 ‘책세상‘에서 나온 <요한시집> 밖에 없는데, 저 한자투성이 장용학 책은 정말 탐나네요. 탐난다고 그 한자를 읽을 자신은 없습니다만. ㅋㅋㅋ

그나저나 영숙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백낙천ㅋㅋㅋ 창피 ㅋㅋㅋㅋㅋㅋㅋ 분노를 웃음으로 승화하셨군요. ㅋㅋㅋㅋ

Falstaff 2019-05-30 15:20   좋아요 0 | URL
ㅋㅋㅋ 웃으면서 읽으셨다니 저도 좋습니다.
저 한자투성이 신구문화사 전집의 ˝최인훈˝ 편에 실린 <광장>도 디테일이 문지에서 나온 것하고 좀 다릅니다. 이래저래 굉장히 귀한 전집으로 변신해서 신구문화사의 대표적 과거 업적으로 승격했더군요. 최악의 보관상태라서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생각날 때마다 아주 절통입니다.

syo 2019-05-30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세로쓰기다..... 사진에서 굉장한 위엄이 느껴집니다.

요며칠 영숙이 사건에 관한 많은 글들을 읽었지만, 그 글들은 이제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초성자음 부끄럼 탈락‘이라니. 으아아아아아아아(‘으하하하하하하‘의 초성자음 포복절도 탈락)

Falstaff 2019-05-31 09:33   좋아요 0 | URL
게다가 두 줄 세로쓰기랍니다. 그래 두껍지 않은 책에 많은 분량을 실을 수 있던 것이지요. 글씨가 너무 작아 이젠 읽지 못해요. ㅠㅠ

ㅎㅎㅎ 재미있으셨나봅니다. 고맙습니다.
 

 

 

 3개월에 한 번 씩 이런 추천 비슷한 글을 올리는데, 올해 첫 3개월은, 허허허, 경사로 좀 바빴습니다. 정초부터 아이 이름 하나를 지어 주었고, 이달 말에는 큰애 잔치를 무사히 치뤘습니다. 그래 이래저래 바쁜 관계로 아무래도 읽은 책이 많지 않습니다. 권 수로 55권, 편 수로 51편을 읽었군요. 이 가운데 서재 친구와 하필이면 제 알라딘 서재에서 걸음을 쉬어가시는 분들께 추천할 만한 책을 골라봤습니다. 순서는 제가 읽은 날짜 순입니다. 조금이나마 읽는 분들의 독서생활에 도움이 되면 보람이겠습니다.



1. 윌리엄 스타이런, <소피의 선택>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여인 소피와 광기어린 천재를 지닌 유대인 남자 네이선. 둘의 광적인 사랑은 깊숙한 비밀을 은폐하는 '필연적 거짓'의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사랑조차 절망. 그만큼 절대적인 사랑은 날이 갈수록 더욱 깊은 우울과 체념과, 이젠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은폐해온 진실을 짊어져야 하는데, 결국 이들 사랑의 종착점은 어디일까.



2. 조르주 페렉,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동네 양아치 형의 외모를 가진 유대인 작가 조르주 페렉이 입심을 다 해서 만든 한 편의 큰 구라. 70명의 부자가 가진 것보다 더 큰 부를 소유한 독일 출신 미국 이민자 헤르만 라프케. 그가 미국의 독일 주간German Week을 위해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배경을 빼곡 채운 자신의 콜렉션을 보란 듯이 과시하기에 이른다. 위대한 컬렉션들은 관객들에게 은밀한 합창을 들려주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3. 세르게이 도브라토프, <여행 가방>

 

소비에트에서 쫓기듯 망명길에 오를 당시 세관에서는 세 개의 여행 가방만 허락할 뿐이었음에도, 작가는 겨우 하나의 가방밖엔 챙길 것이 없었다. 하여간 미국에 도착해 어언 20년 가까이 흘러 새로 생긴 말썽쟁이 아들이 벌을 받느라 벽장 속 가방 위에 앉아 있는 바람에, 드디어 처음 열어보게 된 것. 속에는 소련 시절에 애지중지 했던 몇 가지 물건들이 들어 있고 이들마다 독특한 풍자와 허풍과 객기가 반짝거리는데.



4. 치누아 아체베, <사바나의 개미 언덕>

 

영국이 물러가 해방이 됐다고 해도 진정한 피식민은 끝나지 않은 것. 대책없이 주어진 해방을 맞은 아프리카 가상국에서 벌어지는 해방의 후유증과 반half식민의 상징적 체제인 독재 정권의 등장. 지식인들은 독재에 저항하거나 빌붙어야 하고, 인민들은 누백년 이어온 자신들의 정서와 독재 정권의 이해에 따라 갈등을 맞아야 하는데, 이걸 신생국가의 성장통이라고 가비얍게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아체베의 팬이라면 놓치지 않아야 할 책.



5.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이 책이 아동들을 위한 동화라고? 천만의 말씀. 이 여행기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실체에 대한 신랄한 풍자다. 소인국과 대인국, 도덕적인 말horse들의 나라 등 네 번의 행해를 하면서 걸리버는 두 페이지에 한 번씩 영국과 유럽의 문화와 정치체제와 귀족들의 이면을 날카롭게 헤쳐가며 비틀어버린다. 다만 18세기 소설이라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조금 지루할 수도 있을 터.



6. 쥘리앵 그린, <잔해>

 

소심한 인간의 저 깊숙한 형질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키가 크고 건장하며 잘생긴 필리프. 결혼 첫날 밤의 침상에서 갑자기 높은 소리로 홍소를 쏟아내더니 딸꾹질을 시작하는 아내. 이후 아들을 낳고 부터는 전혀 한 자리에 든 적이 없는 건조한 부부. 이들 사이에 끼어든 한 명의 여인이 있으니 처형.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부유한 남자의 찌질함도 때론 소설의 매력적인 소재가 되기도 한다.



7. 니코스 카잔자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드디어 출간한 그리스어 직역. 세 번째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 주인공 조르바가 60대 노인이어서 그런가, 이 책은 나이가 들어 읽으면 더욱 좋다는 결론. 스스로 조르바의 팬이었던 고 이윤기 선생도 결국 못보고 갔지만 직역한 유재원 번역본이 나왔다는데 만족하리라 믿는다. 여태까지는 읽어보지 못한 프롤로그가 붙어 있는 것도 신기했다. 앞으로 그리스어-불어-영어-한국어 번역의 이윤기 본 <그리스인 조르바>는 잊으시라.



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이 책 역시 조주호에 의한 스페인어 직역이 나왔다. 만연체 문장을 될 수 있는대로 문장 본래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번역한 것이, 나는 진짜 좋던데, 일부 독자들에겐 해독상 어려움을 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나는 이 책으로 <백년의 고독>이 정말로 빼어난 명작이란 확실한 동감을 표할 수 있었다. 마르케스가 만든 필생의 고향 마꼰도에서 벌어지는 부엔디아 일가 이야기, 정말 재미있다.



9. 존 파울즈, <만티사>

 

재미있다가 한 순간의 변주로 철학적 사변으로 넘어가는 소설. 주인공 마일스 씨는 자기가 마일스 그린인지 마일스 데이비스인지도 모를 기억상실증에 빠져 있는 환자. 놀랍게도 기억을 관장하는 뇌기관이 생식을 담당하는 중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구라를 침으로 해서 소설의 전반부는 여간한 강심장이 아니라면 내놓고 읽기 힘들게 만드는데, 후반으로 가면? 상황 역전. 쉽게 읽히지도 않아 자신의 무지몽매를 한탄할 수도 있으니 주의할 일.



10. V.S 나이폴, <도착의 수수께끼>

나이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 작품. 그저 서인도 제도의 작은 섬 출신으로 별 재미없는 성장소설 쓰다가 운좋게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물인줄 알았다가, 화들짝 놀랐다. <미겔 스트리트>를 떠나 이제 코스모폴리탄 영국의 런던에 도착해 학교를 다니고, 글을 쓰고, 필명을 얻어 이제 스톤 헨지가 바라다보이는 시골에 정처를 정할 때까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글쓰기를 시도하는데, 자연을 바라보고 묘사하는 것을 감상하는 일이 이렇게 즐거울 수가 있을까.



11. 다니엘 페낙, <산문팔이 소녀>

 

솔직히 다른 작품에 비해 좀 떨어지는 품질이다. 당연 내 생각으로. 하지만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한 건 재미있다는 면. 일찍이 <몸의 일기>를 통해 청소년 시절부터 늙어 명이 다할 때까지 자신의 몸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일기형식으로 쓴 전작을 생각하고 읽었다가 갑자기 프랑스판 누아르 소설을 읽게 되어 당황스러웠는데, 아이고, 당연히 억지와 무리가 뒤따르지만 정말 재미있어 그런 거 다 용서가 되는 거, 이거 이해하시겠지?



12. 호르헤 볼피, <클링조르를 찾아서>

 

가상의 수학자 구스타프 링스를 등장시켜 20세기 중반의 유럽에서 벌어진 과학과 수학의 발전,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진행되던 핵폭탄 제조 과정을 둘러싼 미스테리를 설명하게 구성된 첩보 소설. 링스 박사가 나치에 의하여 반역죄를 적용받아 분명히 사형 선고를 받을 찰나, 연합군의 폭격으로 건물 지붕이 무너지며 벽돌이 떨어지면서 판사의 해골을 쪼개는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인물. 이제 원자탄 기술이 소련 연방으로 전해지려는 위험천만의 시절에 진짜 스파이는 누구일까. 궁리하지 마시라. 읽기 전엔 절대 알 수 없을 터이니.



13. 리처드 포드, <독립 기념일>

 

지난 삼 개월 동안 제일 재미있게 읽은 책. 전처와 전처의 남편이 자기 아이들 둘과 살고, 자신은 일정 기간에 한 번의 만남만 허락되는 이혼남 프랭크 배스컴. 이이가 독립기념일 연휴를 맞아 문제아 맏아들 폴과 함께 농구, 야구 명예의 전당을 찾아 길을 떠나는데, 당연히 우여곡절이 있어 재미있는 장편소설 한 편을 쓸만한 이야기 거리가 생긴다. 아들 폴로 말하자면 부적응증이 심해 매사 삐딱한 전형적 반항기 청소년.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아들의 험난한 연휴 보내기란?



14. 아리엘 도르프만, <블레이크 씨의 특별한 심리치료법>

 

친환경 기업정신과 윤리경영을 모토로 한 거대기업의 회장 블레이크 씨. 이이한테 난데없이 닥친 불면증. 이를 다스리기 위해 심리치료를 선택하는데, 있는 게 돈이니, 한 가정에 온갖 소형 CCTV를 설치해 가족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관찰할 수 있는 관음과, 돈을 매개로 해서 해당 가족의 행운과 불행을 조절할 수 있는 가히 신적 인간으로 등극하는 블레이크 씨. 무엇보다 역자 김영미가 번역한 한국어 문장에 대한 기억이 특별했던 책.



15. 미셸 오스트, <밤의 노예>

 

책 읽기를 마칠 때까지 절대 뒷표지에 쓰인 출판사 책소개를 읽지 마시라. 그것만 피해가면 당신은 참 좋은 소설 한 편을 감상할 수 있으리니. 내가 간직했던 우상, 책의 주인공 필립에게는 자신의 아버지인데, 우상이라 함은 그냥 내버려두고 마음 속에서만 자꾸 확장을 하게 해주어야지, 정말로 우상을 찾아 실체를 발견하면 누구든지 일정량의 우러름이 깎일 수밖에 없을 것. 이런 것이 재미있는 일화와 함께 등장해 재미를 더욱 배가시킨다.



16.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보이노비치, <병사 이반 촌킨의 삶과 이상한 모험>

 

붉은 군대의 제대 말년, 그러나 지독한 고문관 이반 촌킨. 그가 시골 한 구석에 불시착한 1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하던 고물 복엽 비행기를 지키라는 보초의 명령을 받고 도착한 자리 바로 옆에는 숫처녀 뉴라 벨라쇼바가 혼자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으니, 이미 배경부터 교통사고가 예약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당시 붉은 군대와 농민들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었는가 하는 촌철살인적 농담과 재담들. 후회하지 않으리.



17. 너대니얼 호손, <일곱 박공의 집>

 

욕심많은 유력가가 원래부터 터를 잡고 살던 목수를 마법사로 몰아 종교재판 끝에 목매달아 죽이고 집터와 샘을 빼앗아 그 자리에 박공이 일곱 개에 달하는 지역의 랜드 마크 저택을 지으니 바로 일곱 박공의 집. 목수는 죽어가며 신은 저자에게 피를 마시게 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고, 유력가는 의자에 앉은 채로 넓은 넥타이에 많을 피를 쏟은 채 죽어 있는 상태로 발견된다. 두 집안에 오랜 세월을 걸쳐 내려온 저주와 복수. 이것은 어떻게 해소가 될지.



18. 허먼 멜빌, <허먼 맬빌 : 선원, 빌리 버드 외 6편>

 

양심적인 단편선. 다른 출판사에서 찍었으면 족히 세 권의 얇은 단행본으로 만들었을 듯. 총 일곱 편의 중단편이 들어 있다. <바틀비>와 <선원, 빌리 버드>를 읽기 위해 샀다가, 그것들은 물론이고 <꼬끼오, 혹은 고귀한 수탉 베네벤티노>도 재미있게 읽었다. 인류 문화유산으로 남을 <모비딕>을 쓴 작가가 중단편에서도 이리 흥미로운 시도를 했었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19. 주나 반스, <나이트 우드>

 

여성 퀴어 소설. 아마 레드클리프 홀의 <고독한 우물> 이후 8년만에 발간한 두 번째 여성 퀴어일 듯.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간 동성애도 이제 새로운 소재가 되지 못하니 새삼스레 그런 방면에 관심을 둘 필요 없고, 딱 하나, 예스럽고 화려한 문장에 방점을 두어 감상하는 것도 매우 좋은 독서법이 될 것. 독자는 이 작품 역시 젊은 역자 이예원의 노고에 감탄하게 되리라.



20.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개선문>

 

40년이 넘어 재독한 인생책.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1년을 파리를 무대로 독일 출신 의사 라비크와 삼류 여배우 조앙 마두의 사랑과 복수를 그린 작품. 작가 스스로 나치의 등장과 더불어 망명길에 올라야 해서 라비크의 묘사가 더욱 충실해질 수 있었을 터. 역시 반전문학 하면 레마르크. 이제 그의 또다른 망명소설 하나를 보관함에 두고 있으니 늦어도 6월엔 읽을 거 같다. 안개낀 11월의 새벽, 파리 센 강의 우울.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개선문>을 읽을 이유가 되리라.



21. 트루먼 커포티, <풀잎 하프>

 

반나절이면 계산 다 될 짧은 장편. 그럼에도 성장소설이 품고 있는 아스라함을 어찌 이리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어린 나이에 천애 고아가 된 '나'와 두 명의 당숙아주머니들. 이들과 함께 사는 늙은 흑인 하녀 캐스린. 이야기가 확장됨에 따라 등장하는 아들 둘로부터 소외당한 홀아비 옛 지역 판사, 어려서부터 정신 이상인 어머니에게 혹독한 훈육을 받고 자란 젊은 가장. 이들이 서로 연대하여 서로를 위무하고 어려움의 시절을 관통하며 성장하는 광경이 사람의 가슴을 띵,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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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19-04-01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라는 상투적은 댓글이지만, 진심이랍니다. ^^

Falstaff 2019-04-01 10:5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좋은 표현을 많은 사람들이 쓰니 ‘상투적‘이 됐겠지요. ^^

싱클레어 2019-05-12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만간 민음사패밀리데이에 가서 담아 올 쇼핑 목록을 적고 있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레마르크 소설은 저도 정말정말 좋아하는데 <개선문>은 이번에 이벤트로 받았습니다. 치누아 아체베의 작품도 좋아하는데 <사바나의 개미 언덕>, <소피의 선택>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Falstaff 2019-05-13 09:15   좋아요 0 | URL
책 선택에 도움이 되면 저도 참 즐겁겠습니다. ^^
 

 

 

* 한때 대기발령 받은 적 있었습니다. 나이 먹었다고 그만 두라고 하더라고요. 싫다고 했더니 대기발령. 그때 시간이 남아 돌아 꽁트 몇 개 써봤습니다. 그 중에 하나 소개합니다. 원래 한 번 써놓으면 그걸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라네요.

 

 

 

쌕쌕이 날다

 

 

 

 주둔하고 있는 군인과 그들을 면회 온 사람들한테 전적으로 의지하여 그나마 생계를 이어간다고 해도 그리 큰 까탈을 잡히지 않을 주정면 토하리에서 토상리로 올라가는 251번 지방도로 버스 정류장 앞. 그리 위생적으로 보이지 않는 울산상회 점주 박여사로 말하자면, 동네 하사관하고 눈이 맞아 첫 딸을 배 안에 넣고 스무살에 혼인을 한 뒤 연년생으로 2남 1녀를 슬하에 두고 한참 재미나게 살기 시작하려는 찰라, 한 겨울 동계훈련 나갔던 서방이 오발사고로 저 세상으로 가는 바람에 스물여섯 어린 나이의 청상이 되었던 것인데, 서방 세상 등진 댓가로 받은 위로금과 달마다 꼬박꼬박 국가에서 나오는 연금 모아놓은 것을 한 번에 사기 당한 다음에야 세상이란 것이 과부 혼자 살기에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조금 손톱을 세워 그 많은 세월을 지독하게 견디며 2남1녀 모두 성가해 내보내고 환갑이 넘은 이날 이때까지 굳세게 혼자 살고 있는 터였다. 홀아비 삼년에 이가 서 말이고 과부 삼년에 은이 서 말이라는 말이 허튼 것이 아니어서 박여사를 보아하니 아직도 달마다 국가에서 나오는 연금만으로도 그까짓 구멍가게가 아니더라도 실컷 먹고 살만하겠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동네 여자들 남자들한테 쪽방 하나를 내어 심심풀이 고스톱을 쳐보라며 은근히 권하다가 자연스럽게 소위 말하는 고리를 뜯기 시작했다. 고리라고 함은, 고스톱 한 판 마다 딴 사람에게 일종의 방 사용료로 딴 돈의 일정비율을 정해 거두는 것을 말하거니와 고스톱 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결국 고리를 받는 사람만 돈을 따게 되어 있는 것은 자명하겠다.
 그것 말고도 하는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급한 동네 사람들한테 돈을 꿔주고 월 2부에서 3부의 이자를 받는 것으로 토하리 사람치고 여사에게 돈 한 번 꾸어보지 않은 치가 없을 정도라 동네에서 알부자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황영감 너도 알지? 그 영감이 글쎄 먹고 떨어지겠다는 거야. 쭈그렁 바가지 같은 게 감히 내 돈을 떼먹으려고? 나 참 같지 않아서. 공동묘지에서 여우 해골 파먹는 소리하고 자빠졌다니깐. 내 오늘 찾아가서 아예 결단을 낼 거야, 결단을.”
 아침 댓바람부터 시집 가 아들 딸 낳고 잘 사는 딸한테 시외전화를 넣은 박여사의 목소리가 통화 내용하고 비교해 볼 때 평소처럼 그리 결기를 뿜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 뿐.
 “어느 오살을 한 작자가 그래, 그래, 그래, 하필이면 그걸 훔쳐가, 가져갈 것이 따로 있지 말야. 이거 원 남사스러워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냔말야.”
 갑자기 무려 두 옥타브는 좋이 넘을 목청으로 길길이 뛰기 시작하는 박여사의 이마에 돋은 힘줄과 높은 음정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뭔가 사달이 나도 큰 사달이 난 것 같긴 했지만, 이 광경을 여사를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과연 사람이 저토록 순간적으로 감정 폭이 돌변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음직하다. 그러더니 다시 목소리가 잦아드는 거였다.
 “그저께야. 영식이 엄마 있잖아, 그게 어디서 주워 왔는지 한 열 개를 가져왔다니까. 그래. 응. 응. 아 그렇다니까. 에라, 내가 보긴 뭘 봐. 얘 봐라? 이것아 내가 그런 거 팠으면 어떻게 이날 이때까지 수절하면서 살 수 있겠냐? 철 좀 들어라. 그래, 그렇다니까, 쌕쌕이.”
 말을 요약하면 이틀 전 고스톱 치러 온 영식이 엄마가 포르노 비디오테이프를 열 개 정도 가져왔다가 두고 갔는데, 정말인지 아닌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여사의 말에 의하면, 여사가 관심이 없어 문턱 돈 통 옆에다 그냥 쌓아 둔 것이 화근으로 오늘 아침에 일어나보니 집에 도둑이 들었고, 늙은 과부 혼자 사는 구멍가게에 훔쳐갈 게 없는 건 당연한 이치로 잃어버린 것이 없는 것 또한 당연하다 하겠으나 하필이면 빈 돈 통 옆에 두었던 포르노 테이프를 몽땅 가져가 버린 거였다.
 “응. 응. 하, 참 열불이 나도 이런 열불이 있니? 그 도둑놈이 가게 앞에 지나가면서 날 힐끗 쳐다보며 그럴 거 아냐. 에이그, 늙은 과부가 오죽했으면 이런 걸 이렇게 많이 싸두고 볼까, 불쌍하다, 불쌍해.
 나 참 아주 미쳐버린다니까. 응. 응. 너도 생각 좀 해봐라. 뭐라? 이 작것아, 내가 어떻게 신고를 하니? 지서 가서 순사들한테 그러라고? 우리집에서 쌕쌕이 훔쳐갔어요.
 에라. 이걸 딸이라고 전화를 건 내가 미쳤지. 잔소리 더 하지 말고 끊어. 끊으라니깐.“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은 박여사가 일단 한숨을 한 번 푹 쉬고 나서 가게 밖을 한번 휘둘러 보았다. 혹시 아는가, 딸하고 전화하면서 제풀에 겨워 소리소리 지르며 딸한테 쏟아놓은 넋두리를 들었는지. 진짜였다. 하필이면 테이프만 훔쳐간 도둑놈이 가게 앞을 지나가거나, 하다못해 라면 한 봉지라도 사는 시늉을 하며 가게에 들어와 자신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짐작할 때보다 얼굴이 더 홧홧했던 기억은 쉰둘에 맞은 폐경기 때뿐이었다.
 황영감, 이때 딱 황영감이 떠올랐다. 내 이 영감탱이를 그냥 둘 줄 알아? 천만 만만의 말씀이야. 애기 똥구멍에 붙은 보리쌀을 떼먹지 내 돈을 떼먹으려고? 허.

 

 황영감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그로 말할 것 같으면 나이 서른에 이 토하리로 흘러 들어와 처음엔 이장집 머슴을 사는가 했더니 사람이 얼마나 착실하고 열심인지 이장이 자기 딸을 선뜻 건네줘 촌에서는 나름대로 개천에서 용이 난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말이 과거형인 이유는, 장인이 세상 뜨자마자 건축업 사업을 합네, 하고 처갓집 논이며 밭이며를 몽땅 내다 팔아 깨끗하게 말아먹고는 성격마저 변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가 그랬는데 그동안 아닌 척을 했던 것인지는 몰라도 쉰 김치 안주로 막걸리 마시고 마누라 패는 걸 인생 최대의 낙으로 삼은 종자인데 더 이상 그 취미를 즐길 수 없게 됐으니 칠십이 넘은 마누라가 그만 덜컥 위에 암종이 생겨 도청 소재지 병원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애초부터 박여사가 황영감 같은 종자한테 돈을 빌려줄 리가 없었건만 그래도 한 동네서 낳고 자라 어렸을 적부터 언니, 언니 하며 같이 놀던 동무라 홍여사 병원비를 칭하는데야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인줄 뻔히 알고서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였다. 제까짓 것이 병원비는 무슨 병원비. 술 주사 있는 서방한테 날이면 날마다 매타작을 당하면서도 자식 농사 하나 잘 지어 대처에서 큰 회사 높은 자리에 있다는 아들들이 병원비를 댈 것이라는 것쯤은 여사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바이었거늘.
 오늘 새벽 댓바람부터 황당하기도 하고 더할 나위 없이 창피하기도 한 국면에서 갑자기 황영감한테 초점이 과장되게 집중된 것 때문에 박여사를 탓할 수는 없으리라. 여사는 겉옷을 대충 입고 가게 미닫이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은 뒤 야물딱지게 자물쇠를 걸었다. 오른 팔 하나 만을 휘척휘척 거리면서 장군 같은 발걸음으로 황영감 집 문을 넘어선 박여사.

 

 “계슈? 계세요?”
 하지만 마당 저편에선 아무 소리가 없다. 이 집 숟가락이 몇 개인가 마저 꿰고 있는 박여사가 방문 앞까지 왔을 때 방 안에선 이상 야릇한 소리가 들리다 다시 잦아졌다. 그 때 스스르 열리는 미닫이 창호지 문. 황영감이었다.
 “왠일이슈?”
 “몰라서 물어본데? 돈 받으러 왔수.”
 “일단 들어오슈.”
 “이 영감이 미쳤나, 영감 혼자 냄새나는 방에 쳐박혀 있는데 들어오라니 어디서 배워먹은 본새야, 본새는.”
 “글세 들어와 보라니까.”
 황영감이 창호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순간, 왼쪽 바람벽에 바짝 달라붙은 텔레비전 화면엔 망측하게도 소위 쌕쌕이였다. 히쭉 입꼬리를 올리는 황영감.
 “그려, 들어와. 왜이래 나도 남자야. 그 긴 세월, 오죽하면 이런 걸 다 보고 그랬을까? 에휴 짠하기도 하지.”

 

 박여사는 순식간에 상황정리를 해내버렸다. 그러니까 밤도둑이 들어와 포르노 비디오테이프를 훔쳐간 것이 아니라 어제 밤 고스톱 판에서 개평이나 뜯어 막걸리나 마실까 하던 황영감이 가져간 거였다. 갑작스럽게 여사의 뒷목이 뻑뻑해졌다.
 “에이 드럽게 늙은 놈아, 내가 그딴 걸 보던 말던 니가 뭔 상관이야. 막말로 네가 나한테 각좆 하나를 깍아줘봤어, 뭘했어? 남이 쌕쌕이를 보던 말던 당신이 왜 참견이냐고? 마누란 오늘 낼 하는데 집구석에서 그딴 거나 보고 있는 천하의 망종이 어디서 발광이야 발광이.”
 침을 튀며 일갈하는 여사 앞에서 황영감은 바지춤에 손을 슬쩍 질러 넣으며 은근하게 말했다.
 “왜? 더 크게 떠들지 않고. 동네방네 다 알게 말야. 수절 청상과부가 이날 이때까지 저런 거 보면서 달래온 거라고.”
 여사의 말문이 탁, 하고 막혀버렸다.
 “에이 드런 영감같으니라고. 그래, 내 돈 잘 먹고 잘 살아라.”
 우리의 박여사, 찬 바람이 쌩하게 돌게끔 치마꼬리를 획 잡아돌리며 그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날 이후 황영감이 아주 가끔 지청구를 무지하게 받으면서도 천하의 박여사에게 용돈 깨나 받아 썼다는데 확인된 바는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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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3-16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드물게 올라온 주말 글이군요! ㅎㅎ 게다가 콩트! 대기발령 그 암울한(?) 현실을 웃음으로 승화하셨군요. ㅋㅋㅋㅋㅋ
한 편의 구성진 판소리를 보는 듯했습니다. ㅎㅎㅎ
그나저나 ‘주정면 토하리에서 토상리‘는 폴스타프 님이 사시는 동네 아닙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19-03-16 10:49   좋아요 1 | URL
ㅋㅋㅋ 읽기 재미 있으셨습니까. 회사 작것들이 몰랐지요, 혼자서는 더 잘 노는 사람들도 개중엔 있다는 걸요.
동네 이름이야 그냥 아무렇게나 지은 겁니다만, 내용이 너무 구태스러워서요. ㅎㅎ

쎄인트saint 2019-03-16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밋게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19-03-16 13:54   좋아요 1 | URL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붕붕툐툐 2019-03-16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재미있어요~ 포르노를 쌕쌕이라고 하나봐요~

Falstaff 2019-03-16 22:07   좋아요 0 | URL
ㅎㅎㅎ 20세기 군 부대 주변 마을을 배경으로 했습니다. 한때는 그걸 썍쌕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저도 기쁩니다. ㅋㅋ

2019-03-16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17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을
 지난 1월 1일. 서른 살이 된 큰 아이가 집에 들렀다. 어미가 끓여준 떡만둣국을 맛나게 먹더라. 소위 말하는 엄마 손 맛? 웃겨. 내 입엔 이게 떡만둣국이냐?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새해 벽두부터 쌍코피 터질 필요가 없어 그냥 조용히 넘어갔다. 하여간 잘 먹더니 시원하게 물 한 컵을 들이켠 다음 하는 말이, 아버지, 할 말이 있는데. 앞니를 빼고 인공 이를 심었더니 영 칠칠치 못하게 자꾸 음식을 흘린다. 아무래도 내 이가 아니라서 그런 모양이다. 그래 휴지로 식탁 앞에 떨어진 떡국 찌꺼기를 닦고 있던 내가 무심하게 곧바로 이를 받았다. 물론 완전한 농담이었다. 왜, 임신했니?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이 ‘응.’ 속으로는 염통이 뚝, 떨어지는 느낌. 그러나 쪽팔리게 그런 거 갖고 티 낼 수 있나. 그래 또 물었다. 몇 주? 이제 겨우 두 주 됐단다. 작년 8월에 청혼을 하고 승낙을 받고, 요새 아이들 영악해서 신부가 한 살 많아 지들 생각에 소위 노산인가 싶어 둘이 손잡고 산부인과 갔더니 의사 하는 말이 여자는 전혀 문제없는데, 남자 쪽 정자의 운동성이 정상 바로 아래쪽이라고, 이제부터라도 결혼할 관계라면 피임을 하지 말라고 권하더란다. 그래 넉 달 만에 아이가 생긴 것. 나는 계속 맛대가리 하나도 없는 떡만둣국을 입에 떠 넣으며 (아무리 유명한 주방장이 조리를 했더라도 그 상황에서 내가 맛을 알겠어?) 소주 한 잔을 꿀꺽 마셨다. 매년 1월 1일 아침 떡국을 먹을 때 아이들이 따라주는 소주 한 잔씩 마시는 건 벌써 이십년이 넘는 내가 만든 일종의 ‘아름다운’ 가풍이자 미풍양속이다. 혼인이 두 집안 사이의 행사에서 그냥 한 쌍의 삶으로 바뀐 지 이미 오래. 그래라. 아이 이름은 내 벌써 지어놓은 거 알지? 아들이건 딸이건 관계없이 그냥 ‘하을’이라 해라. 노을 하, 새 을. 한문으로 쓰면 霞乙. 글씨가 작아 잘 안 보이시지? 크게 쓰면 이렇다.
 霞乙
 무슨 뜻이냐고? 그림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할아비 권한으로 첫 아이 이름은 내가 짓는다. 둘째는 외할아버지가 짓든지, 네가 직접 짓든지 그건 너 좋을 대로 해라. 맏이 이름은 양보 않겠다. 라고 도장 찍었다. 아, 무식한 마누라. 하필이면 이름으로 노을이 뭐냐, 새벽이면 새벽이지. 그리고 갑이 좋지, 왜 을이냐. 요 지랄을 한다. 그런 생각이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이름이 ‘귀복’이게? 귀할 귀, 복 복. 혹은 요샛말로 ‘대박’이? 왜, 아예 ‘예수’라고 하지. 그건 서른세 살까지밖에 못 살까봐 안 된단다. 하여튼 새해 아침에 난 손주가 생겼음을 알았고, 아이에게 ‘하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여태까지 지내온 새해 첫날 가운데 제일 좋은 선물을 받았다. 그래 다른 해엔 소주 한 병이었는데 올해엔 두 병 마시고 아침부터 고꾸라져 잤다.




서재
 내 취미는 책 읽고, 음악 듣고. 책 읽은 느낌을 독후감으로 쓰고, 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알라딘 서재에 업로드 하는 일. 근데 더 즐거운 취미, 내가 아는 최고의 취미여서, 이미 약한 중독 증상까지 보이는 건 바로 알코올 흡수하기. 예를 들어 2019년 1월, 나는 스무 권의 책을 읽었고, 서른 병의 소주를 마셨다. 위스키 한 병, 와인 한 병, 맥주가 글쎄 한 5천 밀리리터쯤, 중국 백주가 한 병. 이런 건 세지도 않는다. 오직 소주 서른 병. 그러니 내 일상생활이란 것이 책을 읽지 않으면 술에 취해 있다. 이쯤에서 서재 친구들의 양해를 구해야 한다. 소위 말하는 서재 운영, 또는 서재 생활을 잘 하고 있지 못해서. 나는 다른 분들의 서재에 자주 방문하지 못한다. 더구나 댓글을 다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읽다가 주둥이가 근지러워 참지 못할 정도가 돼야 그냥 한 마디 하는 수준이다.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로 벌써 몇 년을 버티는지 모르겠다. 서재 친구들을 자주 방문하고, 함께 웃고, 떠들고, 이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이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1월에 읽은 책 스무 권. 이렇게 세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얇은 책도 있고, 두꺼운 책도 있으니. 페이지 수로 한 달에 6,501쪽이다. 다른 해보다 한 800쪽 이상 적게 읽은 편이다. 해가 갈수록 책을 읽는 것도 알코올의 방해를 심하게 받는다. 서재 친구분들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정독하는 것 같은데 독서량도 어마어마하고, 그분들이 쓰는 건 나같이 독후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서평’이다. 하긴 책 읽고 느낌을 적는 수준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사는 내가 (훨씬)더 행복한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내 능력으로는 읽고, 독후감 쓰고, 술 마시고, 기분나면 음악 듣고, 이런 몇 가지만 가지고도 다른 여유가 없다. 그러니 친구분들, 내가 자주 방문하지도 않고, 댓글도 없을 수밖에 없는 걸, 조금만 더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상품권
 내 지갑 속엔 신세계 상품권과 SK 상품권이 합해서 50만원어치가 있다. 다 회사에서 받은 거다. 백만 원어치 상품권 한 장 사려면 얼마나 드는 줄 아시나? 딱 백만 원 든다. 안 깎아준다. 곧바로 현금만큼의 구매력을 가지고 있는 (유사)유가증권이니 깎아줄 이유가 없다. 그래 상품권은 협력회사가 발주회사에 가져다 바치는 뇌물로 작용한다. 현금 준 건 아니니까. 나도 한 때는 많이 받아봤다. 20세기에. 그땐 의례 명절마다 총력을 다해 상품권을 수집해서 팀장한테 가져다 바치면, 팀장이 이를 수거해 다른 부서에 할당을 하고, 우리 부서원들에겐 조금 더 많이 주고, 뭐 그래서 일종의 직장 에티켓 정도로 치부되고는 했다. 물론 이제 시대가 변해 그런 거 전혀 없다. (다른 회사는 모르겠다.) 문제는 (예를 들어) 신세계 상품권으로 뭐든지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난 상품권으로 책을 좀 더 사고 싶은데 아무리 뒤져봐도 신세계 상품권으로 인터넷 서점에선 단 한 권의 책을 살 수가 없다.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왜 상품권을 주지? 어차피 그것도 전 직원에게 일정 액수에 해당하는 금액의 복리후생비 계정과목으로 주기 때문에 소득세를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려면 차라리 돈을 주지 왜 상품권이냐고. 어제 집에 가서 지갑의 상품권 다섯 장을 뽑아 마누라 브래지어 속에 쑥 집어넣어 줬다. 에이그, 쭈그렁바가지 같으니라고. 상품권 50만 원어치 받고 헤헤 웃는 마누라 뽕 브라 속에 그럴 듯한 건 아무 것도 없더라.



한라봉과 낑깡
 그제 일인데 아이들한테 카톡이 왔다. 큰 아이, 작은 아이 다. 엄마가 한라봉을 한 박스씩 보내줬는데 새콤달콤하고 시원한 게 그리 맛이 있다고. 어미한테는 며느리(후보)한테도 카톡이 왔단다. 맛있다고, 잘 먹겠다고, 아기는 잘 크고 있다고. 어쨌거나. 아참. 이 이야기 나왔으니 상견례 얘기도 해볼까. 한식집에서 상견례를 했다. 사돈이 나보다 한 살 위인데, 내가 생일이 빨라 같은 학년으로 학교를 다녔다. 이리저리 따져보니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는 초등학교를 졸업했단다. 딱 나만큼의 머리숱, 딱 나만큼의 흰 수염, 딱 나만큼의 덩지. 근데 모든 운동을 다 잘한단다. 그이는 덩지가 다 근육이고, 난 이 덩지가 전부 지방이다. 그거 하나 차이가 난다. 그래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예단은 무슨 예단, 우리 그런 거 없기로 합시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아이들 예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저희들 결혼반지 줬습니다. 그걸 다시 세팅을 하든지 그냥 쓰든지 지들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양식 결혼 하면서 폐백이란 것도 그거 웃긴 겁니다. 우린 폐백 안 할 겁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이리저리 설왕설래, 하면서, 소주병을 기울였는데, 참이슬도 그냥 참이슬이 아니고 뚜껑 색깔이 빨간 진한 도수의 소주를 둘이서 여섯 병 깠다. 아, 그 영감. 술 참 장하게 하더라. 하마터면 골로 보내려다가 내가 골로 갈 뻔했다. 역시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라 세긴 세다. 한라봉으로 돌아와, 카톡을 보니 흠, 오늘 집에 가면 나도 한라봉 맛을 볼 수 있겠군. 이랬다. 그거 뭐 먹으나 마나 무슨 특별한 거 있나. 있으면 먹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지. 그렇지? 근데, 아니더라. 집에 갔더니, 없다. 마누라가 아이들한테 한 박스씩 보내고, 나한텐 딱 두 개, 뭘 주느냐 하면, 낑깡 두 알을 주더라. 그림 한 번 보자.

 

 

왼쪽이 한라봉. 가운데가 귤. 오른쪽이 낑깡. 내가 가운데 ‘귤’ 수준이었으면 그래도 좀 덜 했을 텐데 (여기서, 정말? 이라고 묻지 마시라) 애들한텐 한라봉 먹으라 하고, 한라봉 사 줄 돈 벌어다준 나는 낑깡 두 알 먹으라고? 이게 마누라야, 웬수야. 이러니 내 알코올 섭취량이 늘겠어, 안 늘겠어. 생각들 해보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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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1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팔스타프님 설명절 잘 보내시고 손주가 생기신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하을이 이름 이쁘네요 ㅎㅎ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Falstaff 2019-02-01 10:46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벨루치 님도 즐거운 설 연휴 보내세요. 복도 많이 받으시고, 돈도 많이 버세요. ^^

카알벨루치 2019-02-01 10:55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감사합니다~

잠자냥 2019-02-01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을이 이름 참 예쁘네요. 딸, 아들 다 어울릴 이름이고요- 폴스타프 님 독후감도 재미나지만 이런 소소한 글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설연휴, 소주와 책과 함께 즐겁게 보내시고요.

Falstaff 2019-02-01 12:37   좋아요 0 | URL
하하하, 고맙습니다.
여기가 책 가게 서재라 이런 잡글 올리기가 부담이 되는 건 사실입지요. 그래도 이번엔 용감하게 한 번 써봤습니다.
연휴 잘 보내세요. 집에 계시지 말고, 일단 떠나셔요!!!! ㅋㅋㅋ

syo 2019-02-01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노을 사진보다 하을이가 훨씬 더 어여쁜 아이로 태어날거예요!! 축하드립니다 ㅎㅎㅎㅎ

Falstaff 2019-02-01 12:37   좋아요 0 | URL
아이고, 고맙습니다.
사이오님도 축하드릴 일이 곧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hnine 2019-02-01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팔스타프님 이렇게 글을 재미있게 잘 쓰시는군요. 단숨에 읽었습니다.
하을이란 이름은 어떻게 지으셨는지 궁금해요.
사모님께서는 혹시 그나마 낑깡도 못드시고 다 가족들 주신건 아닐지. 가재는 게 편이라고 여기서 또 사모님 편을 들고 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3=3=3

Falstaff 2019-02-01 12:39   좋아요 0 | URL
윽. 재미 있으셨습니까. 고맙습니다.
‘하을‘은 그냥 떠오른 겁니다. 어느 날 멍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떠오른 이름.
전에도 그런 이름이 하나 있었습니다. ‘담원‘ 딸 낳으면 담원이라고 지으려 했더니 둘째도 아들이 나와서 조카딸한테 준 이름입니다.
마누라는 타파 통에 낑깡 가득 담아 스카이 캐슬 보면서 그걸 한 통 다 먹던걸요!!! ㅋㅋ

coolcat329 2019-07-2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늦었지만 손주 축하드립니다. 이름도 참 좋구요... 이런 글도 쓰시는지 이제 알았는데 너무 재밌습니다. ㅋ야심한 밤이라 두 번 입을 틀어 막았네요.

Falstaff 2019-07-25 09:12   좋아요 1 | URL
잘 읽으셨다니 기쁩니다. 벌써 시간이 흘러 다음 달 말쯤엔 손녀딸이 나온다네요.
^^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스물여덟 살에 쓴 아체베가 연이어 힘을 줘 서른 살에 <더 이상 평안은 없다>를 쓰더니 서른네 살에 <신의 화살>로 이른바 아프리카 삼부작을 완성한다. 이 세 권의 책 전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됐다.

 

 

 

 

 이후 아체베는 피 식민을 경험한 제3세계 출신 대표선수로 전 지구의 문학 판에 식민, 반식민 논쟁의 불을 붙인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그나마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관심을 두었다고 여겨지고 있던 조지프 콘래드조차 아체베의 칼날보다 더 날카롭게 벼른 붓 끝에 의해 거덜이 나고 만다. <암흑의 핵심>, <로드 짐> 같은 것들이야말로 근본적으로 식민의식을 기반으로 한 인종차별적 작품이라고 일갈을 해버렸으니.

 

 

 

 물론 전적으로 이런 영향 때문은 아니겠지만, 아체베의 아프리카 삼부작이 나오고 약 10여년이 지난 후에 백낙청이 그의 명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에서 피 식민 문학으로 아체베를 소개하고 있다.

 

 

(이젠 몇 번의 중판을 거쳐 오른 쪽 그림의 두 권으로 판매하고 있다.)

 

 이게 내가 나이지리아라는 나라의, 치누아 아체베라는 작가에 관해 처음으로 들은 정보였다. 78년에 나온 백낙청의 저서가 지금도 여전히 책꽂이에 꽂혀 있지만 그거 꺼내 확인하려면 푸닥거리를 한 번 해야 할 만큼 깊숙이 묻혀있어 위에서 한 발언이 정확하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서른여섯 살, 1966년에 또 다른 장편 <민중의 사람>을 쓴 후에는 단편소설과, 시, 아동문학만 집필하다가 1987년에 ‘마지막 장편소설’로 발간한 책이 바로 <사바나의 개미 언덕>이란다.
 아프리카 삼부작에서는 피 식민지 아프리카에서 식민모국인 백인들에 의해 와해되는 원주민들의 문화와 삶과, 영혼의 피폐를 원주민의 삶의 모습과 함께 잘 그려냈다면, <사바나의 개미 언덕>에선 식민 상태가 끝나고 식민모국이 임의대로 그어놓은 경계선에 따라 복잡하게 구성된 서아프리카의 가상 국가 ‘캉안’에서 벌어지는 식민 후유증, 끊임없이 벌어지는 군사 쿠데타와 장기집권, 독재, 부정부패, 경찰국가화 경향에 대해, 그리고 결론으로 아프리카가 나가야 할 화해의 궁극적 방식을 주장하고 있다. 내가 읽어본 한계 안에서 말하자면 그의 역작 아프리카 삼부작과 정말로 잘 어울리는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쉽게 얘기해 우리나라 역시 경험한 식민통치 후 반식민(半植民) 상태의 제3세계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발생한 독재와 군사 쿠데타 속 지식인들의 양심적 저항의 모습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씀. 식민 시대의 반식민(反植民) 주제가 식민 후의 반식민(半植民)으로 넘어가는 건 전 지구적으로 자연스럽다는 뜻. 유사한 작품으로 응구기와 티옹오의 <피의 꽃잎들>과 <십자가 위의 악마>, 에스키아 음파렐레의 <2번가에서>, 벤 오크리의 <굶주린 길>, 심지어 라틴 아메리카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쓴 일련의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예를 들려면 수도 없이 많다. 사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의 70년대 호스티스 소설 이후 무더기로 쏟아진 작품들도 비슷하니까.

 

 

 

 

 이야기가 또 삼천포로 흐르는 걸 막기 위해 다시 언급을 하자면, 식민에 반대하는 반(反)식민 문학을 거친 아체베가 독립 후 절반쯤 식민 상태인 반(半)식민을 넘어 진정한 아프리카의 독립을 모색한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이후 나이지리아에는 특히 주목할 만한 여성 작가가 한 명 혜성같이 등장하는데, 바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에서 출간한 흥미진진한 <아메리카나>의 해설에서, '치누아 아체베의 21세기의 딸'이란 명예스러운 이름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이이의 비빌 언덕은, 이미 대영제국에서 아메리카로 넘어간 다음이다. 21세기로 넘어온 아프리카의 작가들은 이제는 피부색과 빈부의 격차, 지역, 그리고 무엇보다 성적 차별에서의 해방을 외치고 있다. 이들 제3 세계로의 아프리카 문학은 앞으로도 주목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다만 알라 알와스아니를 필두로 하는 사하라 이북 지역의 아프리카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어떻게 쓰다보니 이렇게 됐는데, 나는 민음사와 아무 관계도 없는 인간이다. 우연히 그 회사 책을 많이 인용하게 됐다.)


 어떻게 쓰다 보니 건방지게 아는 척을 너무 많이 한 거 같다. 여태까지 쓴 거 그냥 이것저것 읽으면서 저절로 품게 된 ‘개똥철학’, 아니, '개똥문학' 범주를 넘지 않는 수준이라 괜히 기억하실 필요 없다. 이제 책의 스토리로 넘어가보자.
 해방 후 독립한 서아프리카의 가상 국가 캉안에 쿠데타로 집권해 대통령 자리를 꿰찬 '샘'이란 작자가 이웃국가들의 절대 독재자들, 아민, 보카사, 무가베 등한테 배운 바가 있어 자기도 평생 대통령을 해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 국민투표를 하게 됐는데, 남부 열대우림 지역은 별 거 없는데, 북쪽 건조한 사바나 지역이 조금 문제라, 투표를 앞두고 우물 파는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네마다 낯선 사람들이 몰려와 지금 우두머리가 영원히 통치할 수 있도록 투표하는 데 동의하라고 요구했지만 (우두머리 자신은 영원히 통치하기를 원하지 않는데 그렇게 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단 말이요.) 지역 대표 촌로는 그 말에 속임수가 있다는 걸 깨닫고 이리 묻는다.
 “누가 우두머리에 강요합니까?”
 “국민들이요.”
 “국민이라면 우리를 뜻하나요?”
 대답을 못하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만 있던 낯선 이를 보고 간계가 있다는 걸 안 촌로는 그냥 고맙다는 말만 전해 그들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동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두머리는 양식 있는 사람이라 영원히 지배하기를 원하지 않소. 심지어 남자가 여자와 결혼할 때에도 영원히 결혼하는 건 아닙니다. 언젠가 둘 중 한 명이 죽을 것이고 그러면 결혼 관계는 끝나지요. 그래서 우리 마을 사람들과 난 동의하지 않겠다고 답했습니다.” (216~217쪽 요약해 다시 씀.)
 때는 바야흐로 전 아프리카의 사막화가 진행되기 시작하던 초기. 이젠 문제의 사바나 지역 아바존에는 도무지 건기가 끝나지 않는 시절을 맞는다. 때 맞춰 정부는 여태까지 시공하고 있던 우물 굴착을 중도에서 뚝 끊어버려 아바존 지역에선 농사나 목축은커녕 마실 물도 부족한 상태에 이른다. 원래는 이 지역을 방문해 표를 좀 얻어 볼까 했던 대통령도 관계자의 보고를 듣고 방문을 취소해버린다. 당장 우물을 파야 하는 아바존 사람들은, 힘 있는 대통령이 오지 않겠다고 하니 당연히 약자인 지역민들이 우두머리를 찾아가 부탁해야 하는 법이라 대표단 여섯 명을 수도로 파견을 하는데, 아마 아무도 몰랐을 거다. 이 파견단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에 택시 운전수, 마약공급자, 강도, 깡패, 좀도둑, 실업자, 양아치 등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수 천 명의 아바존 출신자들이 모두 모여 대통령궁 앞에서 알현을 부탁하는 걸 보고, 이들이 지금 나더러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건가, 겁을 덜컥 먹은 대통령이, 이들과 같은 지역 출신이며, 대통령과 중학교, 고등학교 때 친한 동기동창이었고 심지어 영국 유학도 함께한 현재 신문사 편집장으로, 매사에 대통령의 의견을 거스르는 사설만 써재끼는 아켐을 납치, 숙청해버린다. 쥐도 새도 모르게.
 원래부터 가상 국가 캉안에 형제처럼 친한 삼총사가 있었으니, 이들이 나중에 자라 공부 못했던 순서로, 샘은 대통령이 되고, 크리스는 공보처 장관이 됐으며, 하켐이 신문사 편집장 자리에 머물렀는데, 하켐이 야밤에 수갑을 찬 채 끌려가 분명 고문을 받고 죽었다는 걸 알고, 이미 자신에 대한 샘의 우정도 종을 쳤다는 것을 인식한 크리스는, 이제 완전한 독재자가 되기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대통령 샘을 피해 잠수를 타기로 결정한다. 자 어떻게 됐을까. 원래부터 스토리 전부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는 내가 여기서 크리스가 체포되어 죽기 바로 전에 샘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오고 화해하면서 평생 자기가 죽인 하켐을 애도하며 살아간다고 한다면 그게 사실일까, 거짓말일까.
 이 책의 스토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를 숨겼다. 하나는 아바존의 촌로가 수도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경구. 표범과 거북이 이야기. 그리고 이야기의 결말. 아무리 졸라도 이 두 가지는, 안 알려줌. 좋은 책이니 직접 읽어보시라고 권하는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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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1-15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헌책방에 가서리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를 찾아 보았는데 없더군요.
영어책으로는 있던데...

<아메리카나>는 그렇게 갠춘하다고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실종되어 버렸
습니다.

벤 오크리의 책도 어렵사리 구해 놓기는
하였으나 역시 읽지는 못했더라는.

<싸바나의 개미 언덕> 왠지 제목이 훈훈
합니다. 시간 내서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Falstaff 2019-01-15 12:35   좋아요 0 | URL
옙.
제가 읽기로는 아체베의 ‘아프리카 삼부작‘보다 더 재미 있더라고요.
<아메리카나> 어찌 됐는지는, ㅋㅋㅋ, 안타깝기보다 상황이 웃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