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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61
박지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1월
평점 :
과테말라 고사리
말을 타고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을 그릴 수 없어서 바깥은 없었다.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안을 그렸다. 안을 크게 그렸더니 안은 더 넓어졌구나. 이렇게 넓어진 안에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사라진 사람들. 그날 밤
어디론가 사라진 사람들. 사라진 그들은 과테말라 고사리를 찾아 떠나갔다고 했다. 과테말라 고사리라니, 그게 다 뭐야. 그런 건 없을지도 몰라.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절정처럼. 녹색 들판을 뛰어가는 절정처럼. 과테말라 고사리. 뜻없는 뜻 같은 건 더 이상 말하기 싫지만.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과테말라 고사리. 과테말라에 가면 과테말라 커피를 마실 거예요. 과테말라에 가면 과테말라 노래를 부를 거예요. 봄바람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세요. 아래로 너무 아래로 내려가진 마세요. 과테말라 고사리. 과테말라에 가면 과테말라 고사리가 있을까요. 과테말라
고사리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나요. 말을 타고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을 그릴 수 없어서 바깥은 없었다.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안을 그렸다.
안을 과감하게 그렸더니 안은 더 선명해졌구나. 과테말라 고사리처럼 무작정 선명해졌구나. 바깥이 생기기도 전에 안은 자꾸만 넓어진다. 이렇게
자꾸자꾸 넓어진다. 터져버리겠어요. 그래도 하염없이 과테말라 고사리. 네모를 그리면 네모가 되고 세모를 그리면 세모가 되고 동그라미를 그리면
동그라미가 되는. 과테말라 고사리. 바깥 없는 바깥에서. 자꾸만 넓어지는 안에서. 그것은 숲처럼 거대해져요. 숲의 거인은 유일한 과테말라
고사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말을 타고 바깥으로 나갔다. 눈이 깊어진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0513/pimg_7774821971419533.jpg)
한때 이 친구를 닮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아마도 성격상으로겠지...
이 시를 읽으면서 난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을 생각했다. 읽는 책, 혹은 읽어야 할 책의 수가 점점 쌓이다보니 책을 평가할 때
나의 자연스러운 기준은 새로운 느낌이 있느냐 없느냐에 갈린다. 아주 거창하게 무언가를 표절했다고 하기엔 좀 뭣하지만 내가 어디에서 본 것만
같은(혹은 정확하게 이건 어떤 책의 어떤 구절과 비슷하다 생각되는) 구절을 볼 때 처음 페이지를 펼쳤던 그 감각이 둔해지는 건 어쩔 수 없더라.
그런 점을 생각해볼 때 이 시집은 정말 대단하다. 이 시의 평론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분의 시는 단순히 단어를 나열하고 반복하는 것만이
아니다. 전의 시에서 보았던 이 시의 단어는 변함이 없이 하얀 바탕에 검은 글자, 같은 글씨체로 쓰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는 자신이 모르는 어딘가로 훌쩍(특히 숲으로) 떠나가고 싶은 시인의 소망을 암시하는지도 모르겠다.
암스테르담, 그리고 위의 시에 나오는 과테말라같은 지명이 시집 마지막 부분으로 향할 수록 자주 등장한다. (그러고보니 시집 처음엔 아예
핑크문이라던가 하는, 지구 자체와 거리가 먼 우주 행성들이 많이 등장하는
듯하다.)
불현듯 시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분명 박지혜 시인은 이준규
시인과 부부라고 들었다. 그리고 이준규 시인은 내가 언뜻 그의 시 하나를 봤던 적이 있는데, 단어를 거의 무차별적으로 나열하는 사람이었다. 분명
박지혜 시인도 남편에 의해 무슨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녀의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런
남편이 '초월'할까봐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먼저 '초월'해 버릴까봐 두려운 것일까. 나는 그녀의 시에서 그녀의 남편을 느꼈고, 마치
남의 일이 아닌 듯 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읽었다. 사랑할수록 불안해지는 법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