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전쟁 만인시인선 27
제이슨 지음 / 만인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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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악마주의자의 찬송가집

공룡의 화석화된 고환

와플 성직

당신이 시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면 헤비메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헤비메탈인데 왜 이녀석이 생각나는 걸까...

 

 테이블 전쟁이란 시의 배경은 방송으로 자세하게 이야기했으니 생략하도록 하겠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요새 심히 기분이 좋지 않은 일들이 하루에 한 번 꼴로 발생했다. 나에게 직접적으로 해가 되지는 않지만 어쨌던 유쾌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 결과 축 처진 상태에서 오랜만에 내 전공인 영어영문학과와 관련된 시를 읽고 만감이 교차했다. 그는 영어의 아름다움, 영시와 영문소설의 컨텐츠가 주는 그 특유의 고즈넉함을 영어공부로밖에 해석하지 못하는 한국사회를 조롱하고 있었다. 영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취업하고 나서도 영어를 대학에서처럼 많이 사용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드라마나 음악도 일본어로 듣고 있으니 말이다. 마블이 영화관을 장악하는 걸 꼴불견으로 생각하여 영미영화도 요샌 잘 안 본다. 하지만 다 변명이겠지.

 오랜만에 폭발하여 집에서 싸움을 했다. 간신히 화해했지만 생각해보니 그렇게 간단한 일들은 아니었다. 테이블에 놓인 스타벅스 컵과 맥도날드 포장지처럼 여러 주제가 뒤죽박죽 엉켜있었다. 돈 문제, 그로 인해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건강, 살림의 부담, 그로 인해 오는 열등감. 내 결함을 무조건 사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도 분명 문제가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잘못을 단지 개인적인 문제로만 치부하고 그 사람을 멀리하며 미워하는 태도에도 문제는 있을 터이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분리되어 싸우고 점점 고립되며 마침내는 1인 가구가 많아질 수밖에 없으며 땅덩어리는 원룸과 고시텔로 터지겠지. 그리고 그 일은 사회적 문제가 된다. 그로 인해 이상 같은 시인이 태어날 수도 있고 이상에게 영향을 받은 시인이 태어날 수도 있지만 비극은 비극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나. 이상의 시에는 슬픔과 비탄과 자신에 대한 조롱이 가득 차 있어서, 보는 사람을 너무나 슬프게 한다. 자신만의 충격적인 경험과 같은 틀에 갖혀 랭보같은 시인들이 넘쳐나고 모두가 각자의 시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그게 단지 '요즘 시인들'만의 잘못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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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 문학의전당 시인선 121
홍순영 지음 / 문학의전당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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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는 연옥을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존재의 상태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연옥 영혼은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리는 천국에 이르기를 고대하면서 잔벌을 씻고 있는 영혼을 말한다. 그들은 스스로 구원될 수 없어서 이승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기도만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연옥 영혼을 구하는 방법은 미사와 묵주 기도와 화살 기도의 은혜가 크다'고 단언했다.

 

 

 

간단한 시를 읽기 위해 책을 펼쳤는데 오랜만에 내 종교에 관련된 책을 보게 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내 동네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강릉에 계셨다고 하니 반가웠다.

 

 이 책이 발간된지 10년이 지났지만 왠지 아직도 강릉에서 솔올 성당 다니시면서 가톨릭문우회에서 글을 쓰고 계실 듯하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솔직한 글쓰기와 남을 걱정하는 착한 마음씨를 보면서 저절로 웃음이 났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마냥 칭찬만 하긴 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첫째로, 아무리 부모님이 편찮으신 이후로 강릉에 내려가서 소박한 생활을 하다 참회하면서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그 분들이 연옥에 계실 거라 단정짓는다는 점이다. 그 분들이 지옥에 계실지 연옥에 계실지 천국에 계실지는 홍순영 씨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단테처럼 산 채로 저승에 떨어져서 아는 사람을 찾아 헤메지 않는 한 말이다. 게다가 그들의 영혼이 머물 장소를 하느님이 정하신다고 할 때엔 특히 더하다.

 


 이충희 씨의 고고한 모습을 학에 비유한 시를 지었다는 점도 그녀의 글이 모자란 이유를 더한다. 우리의 눈에는 백조가 우아하고 도도해 보이지만 그들은 살기 위해 물 밑으로 물을 잔뜩 헤집으며 먹을 것을 찾는다. 이는 그녀가 온전한 자연의 시각에 머물기를 거부한다는 의미이며, 시인의 눈으로 사물을 느긋하게 오래 관찰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수필이던 시던 소설이던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의 숙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충희 씨를 찬양하는 글을 써서 이충희 씨 본인에게 보여주는 행위는 성급하고 어리석었다.

 


 마지막으로 광화문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녀의 글솜씨에 한계가 있음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누구나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생각할 수는 있으며, 그것이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에서 사람들이 여흥을 즐기기 위해 모인 일과 제 16대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사람들이 모인 일은 그 목적과 성격들이 엄연히 달랐다. 그러나 자신의 훌륭했던 과거에 사로잡힌 그녀는 단지 그 둘을 '자신의 과거와는 다른 사건'으로만 치부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녀는 세월호 사건 같은 안타까운 일들에 충분히 유감을 표시하겠지만, 유가족들의 '시위를' 도와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괜히 광화문에서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한 게 아니다. 그녀는 위험한 일에 나서길 꺼리고 있으며, 성당에서 하는 일 외에 모든 참여를 폭력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지. 어렸을 때 그 구절을 읽었을 때는 의문이 들었는데, 과연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글이 솔직한 만큼, 가난한 사람들의 분노와 왜곡된 감정에 깊이 들어가지 않으려는 그녀의 성격이 다 드러나 보인다. 안타까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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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좋아했던 것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2
미야모토 테루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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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고. 대단해. 세계에서 하나뿐인 A라는 볼록이 세계에서 하나뿐인 A라는 오목 안으로 쏙 들어간 기분."

 

 

 4월구라가 간혹 암이라는 분들이 있는데.
내용 비슷한 순정소설 <배를 타라>에서는 남주가 여주 임신시켜놓고 우물쭈물 하다가 여자 뺏기고,
헬조선 중앙대 음대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 
저게 사실 암 축에 속하나...? 싶기도 하다.
걍 좋은 이별이지.

 

 일단 배경이 암이라는 말부터 하고 싶다. 캐릭터 자체가 워낙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약간 신경질적이지만 쿨해보이는 남자 주인공이었는데... 관계가 진행될수록 점점 질척해지는 느낌이다. 그러면서 마지막엔 '그녀가 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연애감정이었을 뿐이며, 내가 한 사랑은 사랑같은 느낌이었다.'라고 주장한다. '남자와 여자가 쌍으로 마음이 멀어졌을 수 있다'라는 사장님의 충고는 말끔히 씹어드신 채 말이다. 그렇게 주장을 했으면 단호히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끊던가 해야 하는데, 그녀가 바람을 피던 상대와 거의 결혼하기 직전까지 같이 살면서 섹스까지 한다. 결국 주인공 남자가 집을 모두 비워버렸을 때 찾아온 주인공 여자도 어지간하긴 하지만 말이다. 결국 주인공 남자는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와 배우자도 적극적으로 찾아다니고, 무엇보다 아파트로 인해 인연을 맺던 친구 네 명하고도 친하게 사귄다. 하지만 여자친구였던 아이코는 결국 결혼한 사람과 같이 소말리아로 가버린다. 갑자기 봉사활동에 푹 빠져버렸을 수도 있지만, 주인공이 여전히 그녀의 거짓말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새삼 거짓말이라거나 쿨함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주인공은 사랑이 무엇인지, 거짓말과 침묵의 차이가 뭔지 겉으로 보면 매우 명확하게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자신이 아직도 품고 있는 '짝사랑'조차 사랑이라고 결론을 내지 못한다. 그가 사랑하는 그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의 행복을 빌며 곱게 돌려보내는 방법을 택한다. 차라리 나쁜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저주하기라도 하면 관계를 쉽게 끊을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자꾸 헛소리만 하는 주인공이 안타깝다. 생각해보면 남자 주인공이 잘못한 일이라고는 초반에 여자 주인공의 공황장애 상태에 대해 짜증을 낸 것밖에 더 하나. 그 분노도 그녀에 대한 극도의 걱정에서 초래된 상태일 수 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돈을 주기 위해 돈을 빌렸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남자 주인공은 돈이 거의 다 떨어져 독립 생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위기 상에선 절대 도움이 되지 않을 친구들만 늘었다. (아이코는 아마 죽을 때까지 돈을 갚지 않을 것이다. 해외로 튀었으니까!) 아마 이래서 친구가 없고 앞으로도 없겠지만(...) 난 저런 상황이면 차라리 아이코와 알고 지내는 요코와 당나귀 모두와 인연을 끊고 지낼지도 모르겠다. 
 
 돈은 원래 그냥 주는 거지 빌려주는 게 아니랬다. 여러분도 안 갚아도 괜찮은 게 아니면 절대 남한테 돈 빌려주지 마라. 그리고 현실 세계에선 남자나 여자나 츳코미는 완전 매력 없다. 차라리 짜증나면 짜증난다고 솔직히 말하자. 남한테 훈계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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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문학과지성 시인선 461
박지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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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고사리

말을 타고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을 그릴 수 없어서 바깥은 없었다.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안을 그렸다. 안을 크게 그렸더니 안은 더 넓어졌구나. 이렇게 넓어진 안에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사라진 사람들. 그날 밤 어디론가 사라진 사람들. 사라진 그들은 과테말라 고사리를 찾아 떠나갔다고 했다. 과테말라 고사리라니, 그게 다 뭐야. 그런 건 없을지도 몰라.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절정처럼. 녹색 들판을 뛰어가는 절정처럼. 과테말라 고사리. 뜻없는 뜻 같은 건 더 이상 말하기 싫지만.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과테말라 고사리. 과테말라에 가면 과테말라 커피를 마실 거예요. 과테말라에 가면 과테말라 노래를 부를 거예요. 봄바람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세요. 아래로 너무 아래로 내려가진 마세요. 과테말라 고사리. 과테말라에 가면 과테말라 고사리가 있을까요. 과테말라 고사리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나요. 말을 타고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을 그릴 수 없어서 바깥은 없었다.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안을 그렸다. 안을 과감하게 그렸더니 안은 더 선명해졌구나. 과테말라 고사리처럼 무작정 선명해졌구나. 바깥이 생기기도 전에 안은 자꾸만 넓어진다. 이렇게 자꾸자꾸 넓어진다. 터져버리겠어요. 그래도 하염없이 과테말라 고사리. 네모를 그리면 네모가 되고 세모를 그리면 세모가 되고 동그라미를 그리면 동그라미가 되는. 과테말라 고사리. 바깥 없는 바깥에서. 자꾸만 넓어지는 안에서. 그것은 숲처럼 거대해져요. 숲의 거인은 유일한 과테말라 고사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말을 타고 바깥으로 나갔다. 눈이 깊어진다.

 

 

  

한때 이 친구를 닮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아마도 성격상으로겠지...

 

 이 시를 읽으면서 난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을 생각했다. 읽는 책, 혹은 읽어야 할 책의 수가 점점 쌓이다보니 책을 평가할 때 나의 자연스러운 기준은 새로운 느낌이 있느냐 없느냐에 갈린다. 아주 거창하게 무언가를 표절했다고 하기엔 좀 뭣하지만 내가 어디에서 본 것만 같은(혹은 정확하게 이건 어떤 책의 어떤 구절과 비슷하다 생각되는) 구절을 볼 때 처음 페이지를 펼쳤던 그 감각이 둔해지는 건 어쩔 수 없더라. 그런 점을 생각해볼 때 이 시집은 정말 대단하다. 이 시의 평론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분의 시는 단순히 단어를 나열하고 반복하는 것만이 아니다. 전의 시에서 보았던 이 시의 단어는 변함이 없이 하얀 바탕에 검은 글자, 같은 글씨체로 쓰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는 자신이 모르는 어딘가로 훌쩍(특히 숲으로) 떠나가고 싶은 시인의 소망을 암시하는지도 모르겠다. 암스테르담, 그리고 위의 시에 나오는 과테말라같은 지명이 시집 마지막 부분으로 향할 수록 자주 등장한다. (그러고보니 시집 처음엔 아예 핑크문이라던가 하는, 지구 자체와 거리가 먼 우주 행성들이 많이 등장하는 듯하다.) 
 
 불현듯 시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분명 박지혜 시인은 이준규 시인과 부부라고 들었다. 그리고 이준규 시인은 내가 언뜻 그의 시 하나를 봤던 적이 있는데, 단어를 거의 무차별적으로 나열하는 사람이었다. 분명 박지혜 시인도 남편에 의해 무슨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녀의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런 남편이 '초월'할까봐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먼저 '초월'해 버릴까봐 두려운 것일까. 나는 그녀의 시에서 그녀의 남편을 느꼈고, 마치 남의 일이 아닌 듯 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읽었다. 사랑할수록 불안해지는 법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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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시편
고은 지음 / 창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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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너의 오피니언은

옳은 말인가

왜 나의 오피니언은

너보다 더 옳은 말인가 

왜 너의 댓글은

쓰레기보다 더

쓰레기인가

왜 나의 댓글은

욕설보다 더

욕설인가

올데갈데없는 날 갑상선 이상

 

 

 

책속의 한줄 앱은 문제가 많다. 

우선 책 글만 올리라고 만든 앱이고 다른 일상 글은 올리는 게 금지되어 있는데

 정직하게 책 글만 올리면 소통을 왜 안 하냐면서

방명록에서 진상글 뿌려서 심기를 심히 불쾌하게 만드는 인간들이 많다는 점이다.

물론, 난 내 기분을 불쾌하게 만드는 인간들은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으므로 즉시 신고를 때리지만

그래봤자 내 상한 기분은 해결되지 않고 그 인간들도 경고만 받고 끝날 것이라 생각된다.

 나도 오늘 폭발해서 그래 소통 한 번 해보자 하고 명대사와 방송한다는 일상글을 올리고 방송 사이트를 띄웠다. 테스와 이 무제시편이라는 시집 두 군데에. 그런데 무제시편은 누군가가 신고했는지 글이 금방 지워지고, 테스 글은 남았다. 왜지...? 토마스 하디보다 고은 시인이 더 유명하다는 건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고은 시인이란 사람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든다. 끊임없이 자신의 '정치적인 의견'을 피력하면서도 자신은 정치나 이데올로기를 매우 싫어한다고 한다. 평론가들에게는 뭔가 다른 심오한 의미가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만, 내가 보기엔 대중에게 잘 보이기 위해 깔끔한 척 하려고 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4.19에 대해 그렇게 눈물섞인 시를 지었으면서도 현재는 극단적으로 돌아서서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김지하도 그보다 자주 이름이 오르지 않아서 아마도 애가 타지 않을까 싶은데, 고은은 과연 어떠할까 싶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지리멸렬한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는데 다른 시에서도 이러시는지는 모르겠다만 영 마음에 들질 않는다. 하지만 바다에 관련한 시는 상당히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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