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퀴엠 서양문학의 향기 6
지나이다 기삐우스 지음, 석영중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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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 비애! 당신의 입술에
영원히 감도는 여운, 아, 정열!
비애! 비애! 영원한 시험,
보다 확실한 올가미.

나는 비애에 젖어
멋쟁이 청년들과 입 맞추고
너는 비애에 젖어
밤이면 다른 여자의 손을 잡는다.

비애-슬픔, 비애-슬픔,
빵과 함께 먹고 물과 함께 마신다.
너의 초원에는 한줄기 슬픈 풀잎이 있다
러시아여.

 

 

작별, 이별에 대한 시가 굉장히 많아서 인상적이었다. 아무리 시가 일기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는 해도 혁명가로 살아간 그녀들의 사랑과 헤어짐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적나라하게 문학에 드러날 줄은 몰랐다. 어느 영미시보다도 훨씬 감동적이었고 읽은 후에도 오랫동안 여운을 자아냈다.

 

 좌파들이 잘 모르는데 스탈린은 사람을 대거 감옥에 가두거나 총살한 것도 모잘라 문화를 말살하는 깡패로 사실상 유명했다. 이 시집에서 보다시피 수많은 여성시인들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음을 고발하고 있는데, 높으신 분들은 그녀들이 마녀라느니 반은 창녀고 반은 수녀라느니하는 식으로 조롱한다. 특히 내가 분개한 건 마리나 쯔베따예바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이다. 위의 비애!라는 시를 쓴 시인이다.

 

특히 빠스쩨르나끄는 모든 러시아 시인 중에서 그녀를 가장 높이 평가하여, 비록 그녀가 "온갖 종류의 히스테리를 압축된 형태로 구비하고 있고" 따라서 "그런 여자와 결혼할 것은 꿈도 꿀 수 없지만" 재능의 측면에서는 "보통 남자가 그녀의 천재성을 십분의 일만 가져도 시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다" 라고 썼다.- <레퀴엠> p. 142

 

 충격적인 건 저 평을 쓴 인간이 10년 이상 그녀와 서신왕래를 한 친구며, 마리나는 이미 유부녀라는 사실이다. '친구'에 대해 저딴 식으로 추근거리면서 모욕을 주니 마리나가 이름을 남겼을 때 넌 듣보잡이 된거다 멍청아.

 

 

최근 프로듀스 101이 한창 논란에 시달리고 있다. 

 

 

 아프리카던 팟캐스트던 개인 방송이던 무엇이던 간에 돈 벌려 너무 의식하지 않는 게 좋은 거 같다. 이전에 어느 팟캐스트 방송에선 돈 벌겠다고 인디밴드 홍보하다가 보컬을 게스트로 초대했는데 진행자 세명 다 음악에 대해 완전 무지한 거 다 들통난 적이 있다. 한 명은 게다가 힙합 욕했다가 완전 처발려서 고성내면서 씩씩대고. 실은 그 방송 듣고 그 프로그램에 더 이상 나가는 게 쪽팔려서 게스트 역할 때려쳤는데 그 분은 아직도 그 방송 계속 하고 있나 모르겠음. 아프리카에선 아이돌이 방송하면서 책 홍보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근데 워낙 잔지식이 없어서 스토리만 적어온 듯하고 사람들의 반응이 저조하니 겁을 먹은 듯 계속 책 홍보를 진행하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방송 주제에 대한 사랑과 철저한 준비가 기반으로 깔려 있어야 뭘 할 수가 있다. 후자 이야기 말인데, 저 방송은 어떤 남자애가 추천했었다. 굉장히 자기 중심적인데다 마초이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인간의 말은 하나도 안 듣는데 지지리 돈 관리도 못하는 인간이었음. 나중에 손엔 금빛가루같은 거 묻히고 삐끼같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 거 아닐까 두렵다. 음...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났네.

 아무튼 유명세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자신들의 시를 '성숙한 포도주'라고 비유하며 꿋꿋이 책상에 앉아 펜을 든 이 당돌한 여성들의 시는 고금에 널리 읽히는 고전시가 됨으로서 세상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집에 나온 네 명 중 셋은 불행한 삶을 살았다. 물론 모스끄바의 콘서트홀에 검은 슬랙스에 하이힐을 신고 등장하여 자작시를 낭송한 벨라 아흐마둘리나는 정말 대단한 여자다. 그러나 씁쓸한 게 이 여자는 정치와 관련된 글은 하나도 안 쓰고 자연, 사랑, 이별을 표명했다는데... 예술관에 대해 뭐라고 하고 싶진 않지만 뭐랄까 '천상여자'답네. 그래서 골치아픈 생각하기 싫어하는 청중에게 환호받은 거 아닐까? 그러다 결국 얼굴에 주름이 생겼단 이유로 인기도가 점점 하락하게 되다니, 이런 비참한 삶들이 또 어디있단 말인가. 아무리 마음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 무덤을 너무 크게 만들고 있는 거 아닌가 싶다. 미모뿐만 아니라 예술에서 천재로 선택받기를 원했지만 단 한번도 후자로 사회에서 선택받은 적 없는 여성들. 골방에 갖힌 미친 여자들. 그들의 절규가 과연 언제까지 히스테리로 치부될 수 있을까?

 

 

* 어떤 레즈비언 분이 퀴어문학같다고 의견을 제시하여 이 시가 담긴 레퀴엠 시집을 퀴어 목록에 넣는다. 예전에도 올린 시지만 다시 한번 올려본다. 잘 읽어보시길.

우리는 헤어지는 법을...

안나 아흐마또바

우리는 헤어지는 법을 모릅니다
어깨를 나란히 정처 없이 걸어갑니다
해는 벌써 저무는데
당신은 생각에 잠겨 있고 나는 침묵합니다.

성당에 들어가 장례미사와
세례식과 혼배성사를 구경하고
서로에게 얼굴을 돌린 채 나옵니다...
어째서 우리는 그들처럼 살 수 없을까요?

묘지에 들어가 가볍게 한숨을 쉬고
짓밟힌 눈 위에 함께 앉읍시다
당신은 눈 위에 막대기로 그립니다
우리가 영원히 함께 살 큰 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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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나무 숲
권여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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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생리란 여자 노릇이라기보다 여자 노릇의 실패한 흔적이지만 어쨌든 여자만이 실패할 수 있는 노릇이다.

 

 

 

뭐든지 그냥 스치듯이 지나가면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곳에 깊이 들어가지 않는 걸 나는 제일 좋아한다. 그러길 잘했다고 불현듯 소름돋게 느끼는 때가 많다. 인간관계라던가 종교라던가 학교라던가 전애인이라던가.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사실 목줄이 매여있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일종의 발버둥을 치고 있는게 아닐까.

 난 해외여행을 하지 않는다.

 

 

 내 안에는 내가 너무도 많아서...

 

 이응준 씨가 소설로 호러 시를 썼다면 권여선 씨는 소설로 에세이를 쓰는 듯한 느낌을 준다.
 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문장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가슴에 큥 박히는? 그런 짧은 문장을 하나 내주고 스토리를 전개한다.

 가볍게 보면 좋긴 좋은데 이런 사람이 소설집이 아닌 장편소설도 썼다니 도대체 어떻게 썼을지 감이 안 잡힌다. 처음 팔도기획에선 가볍고 약간 몽환적인 스토리로 접근하더니 은반지에서 갑자기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소녀의 기도로 갑자기 충격적인 고어를 쾅 때려버리더니 진짜 진짜 좋아해에서 잔잔한 추억같은 회상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막 나가는 인물들과 그로 인해 희생당하는 인물들이 많이 그려져 있지만 소설가는 어디까지나 귀퉁이에서 이 둘을 관망하는 제3자 같은 느낌이다. 단편 소설집인데도 그런 화자를 최소 3명 이상은 본 듯하다. 그러면서도 자기 주장이 강해서 비린 맛은 죽어도 싫어하고, 조금만 주의가 흐트러지면 입술을 고집스럽게 꽉 깨물어버리며 조금도 상냥스러운 표정을 지을 줄 모르는 20대 후반의 소녀. 65년생이라는데 어쩜 이렇게 지금 시대의 청춘들 모습을 잘 담아냈는지 경탄스럽다.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모습이 머리에서 지워질 줄 몰랐다. 아마 이 책이 쓰여지고 소설가가 고등학생 시절과 대학시절을 하나하나 거론하기 시작했을 때, 동창들이 다소 놀라워했으리라 생각된다. 한편으로는 그렇게나 시간이 지났으니 이런 극단적인 이야기를 담담히 꺼낼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 남자들은 다 잡은 물고기가 있으면 도망갈 궁리밖에 하지 못하나 싶어 씁쓸하기도 했다. 자신이 버림받는 건 몹시 싫어하고 남이 자신과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데엔 예민한 주제에, 자신이 남을 나몰라라 내팽개치고 바람핀 데 대해서 무신경한 건 남녀 모두에게 포함되지만. 어딘가 떠나고 싶다고 지겹도록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판을 차려주면 끝내 가지 못한다. 기억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 사람은 소나무가 될 수 없고 바다가 될 수 없고 꽃이 될 수 없다. 간신히 쥐새끼 신세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다행일까.

 오랜만에 이번엔 소설 끝에 있는 평론을 읽지 않았다. 그만큼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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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 너머 - 함석헌저작집 23 함석헌 저작집 23
함석헌 지음 / 한길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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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여중에서

태백산 줄기줄기 흐르는 맑은 정기
엉키어 피어나온 동래의 고운 딸아
네 몸은 그 봉우리에 비할 듯이 높더냐

동해의 푸른 물결 흔드는 요람 속에
꿈꾸며 자라나는 동래의 맑은 딸아
네 맘은 그 바다 끝 견줄 듯이 넓더냐

금정의 깊은 바닥 뚫고서 솟는 샘의
뜨거움 늘 마시는 동래의 젊은 딸아
네 가슴 그 더운 샘을 웃을듯이 덥더냐

 

 

 

 함석헌이 시를 쓰는 줄은 몰랐다. 이제서야 그의 명문장을 본다.

 

 높고 넓고 뜨겁게 살라는 교훈적인 문장들은 하나도 꼰대스럽지 않았다. 고향도 잃고 집도 없고 일도 없이 가난한 그의 일상이 고스란히 시에 박혀있었다. 말 그대로 뼈에 익은 그의 체험이 거기에 낱낱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그가 탓하는 건 오로지 가식적인 인간들 뿐이었다. 그는 하느님 앞에 생선 꼬리밖에 남지 않은, 보따리 밖에 남지 않은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은 역사와 정치의 진창에서 피 흘리며 뒹굴었노라 하는 자신감이 생생했다. 그래서 흰 손이라는 시를 써서 신을 화자로 둔 뒤 아무 피를 묻힐 줄 모르는 비겁한 종교인들을 비웃었다. 분노하는 신이 개구쟁이 신이 되어서. 그는 찬송가 따위는 천상의 음악에 비길 데가 없다는 둥 인간 세상을 통렬히 비판한다. 원철 스님이 연쇄살인마를 부모처럼 사랑하라 했다면, 함석헌은 독자에게 언제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는지를 따진다. '너'에겐 모두가 다 원수인데 친구나 애인이나 동반자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와 가정이 감옥이라 했다. 대학이 사람을 박제하는 곳이라고 한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들으면 까무라칠 말이지만 요즘 사람들에게는 제법 귀에 쏙쏙 들어가는 말들이다. 역시 천재는 시대를 앞서나가는 법이다.

 감옥에서 아들이 나오고 시가 나온다는 그의 말을 생각해본다. 나는 해외여행을 즐긴다는 사람들을 영 내켜하지 않는다. 알바노조의 어떤 대표급 분이 처음으로 미국을 갔다는데 코웃음만 나왔다. 어차피 다른 나라를 가도 결국 우리는 지구라는 감옥 속에 있다. 우주를 나가더라도 은하라는 감옥 속에 있다. 유라는 감옥 속에 존재한다. 과학이 발전했다지만 인간같은 타지도 못할 썩은 쓰레기의 복제판이나 만들 줄 알지 신의 세계인 무는 아직 밝혀지지도 않았다. 자기네들이 전쟁이다 공사를 짓는다 하여 무너뜨린 문명을, 자연을 아직도 복구시킬 줄 모른다. 이런 세상에서 그는 아들을 낳으라고, 시를 지으라고 주문한다. 아들은 나라에 바쳐 불에 태운 뒤 에밀레종을 만들고, 시는 지어서 영혼에게 양식으로 먹여 키우라고 한다. 아들에 대한 묘사는 제법 그럴싸했지만, 영혼을 살찌워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론은 어중간하게 나왔다. 이에 대해선 순서가 바뀌었는데, 함석헌은 이 지구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신곡과 실낙원은 비록 상상에서 그러했지만, 아무튼 온 세상을 불태웠다. 영혼을 뎁혀서 불을 일으키자. 자연발화시키자. 아들이던 시던 몽땅 불태워서 이 부조리한 세상을 파멸시키자. 그게 그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을까. 우리 후손들은 그걸 실천하고 있나? 그저 땅바닥에 있는 쓰레기를 주워먹으려고 눈이 튀어나오게 코가 닳도록 얼굴을 벅벅 갈으며 하루를 연명하고 있지 않나? 거지로 살더라도 정신은 올발라야 하는 법이다. 근데 우리는 지금 개만도 못한 죽음을 눈앞에 목도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지켜보고만 있다.

 

구의역 사고 추모 행사가 열린 8일 저녁, 행사를 지켜본 사람들은 김 씨의 사연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김 씨의 컵라면에 집중하는 만큼 김 씨가 외주 용역 직원으로 싼 값에 위험한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와 본질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는 정부와 기업에 대한 문제 제기엔 인색한 것 역시 사실이다. 추모 행사를 지켜보던 한 여성은 김 씨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면서도 비정규직, 외주 용역만 위험한 일에 투입되는 현실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묻자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답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대기업에 들어간 직원들이 '그런 일'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냐"는 말도 덧붙였다.- <워커스 no. 14> p. 21


 

 개X 같은 인간이다. 니 자식 새끼가 꼭 공부 열심히 해서 대기업에 들어간 다음 3년 안에 희망퇴직 당해서 '그런 일' 하면서 컵라면 먹기도 벅찬 삶을 살아봐야 정신차리지?

 당신이 열심히 살아봤다고? 캡사이신 물대포 맞아봤나? 경찰에 연행되어 봤나? 감옥에서 자살하면 안 된다고 브래지어 강제로 벗겨져봤나? 집회 나갔다고 연단에 올라 바른 말 좀 해봤다고 벌금 받아봤나? 먹고 살겠다고 일 하다가 죽어 봤나? 대체 뭘 열심히 해봤나. 아, 사람들 마음 짓밟기? 일터에서 경쟁자 쫓아내기? 나 혼자 먹고 살겠다고 도망가고 집에서 쳐박혀 자위하기?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실업자들에게 똥물 끼얹기? 이 쭈글쭈글하고 썩어빠진 노인들아, 대체 언제 정신 차릴래? 대기업에 들어가 흰 손으로 산 도련님 아가씨들은 하늘의 진정 높으신 분들에게 멸시당하고 지옥으로 쳐박힐 것이다.

 모두들 머리를 벽에 박고 반성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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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백과사전 - 명언으로 만나는 사기 백서
왕서우보 지음, 한정선 옮김 / 휘닉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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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라의 귀공자인 당신이 지금 공무에 충실하지 않고 법령을 무시하면 결국 국가의 법령이 무력해지고, 그렇게 되면 제후들이 출병해 침략해올 것입니다. 제후들이 출병해 조나라를 침략하면 당신의 부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당신과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공무에 충실하고 법을 지켜 모든 백성을 공평하게 대한다면, 나라가 강대해지고 조 씨 정권도 더욱 안정될 것입니다. 당신은 조나라의 귀족으로서 백성들을 무시할 수 있습니까?"

 

 

 위의 구절은 다스리는 사람, 즉 보스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행실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사실 인간관계에 대한 대목이 가장 많이 나온다.

 

 천하 사람들이 대체로 시장에서 교역하듯 돈을 보고 교제를 한다는 것, 부귀와 영화를 과시하려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지만 속으로는 나쁜 인간이 있다는 것, 좋은 말을 쓰게 듣고 재물을 주고받는 걸 최고로 치는 소인들이 있다는 것 등등. 이 책을 보면 정말 친구를 가려서 사귀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배우자나 동거자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어머니가 성당의 모임에 나가는 걸 좋아하시는데, 그쪽에서 사귀는 친구 한 분이 암 초기로 판정되셨다고 한다. 무려 지름 30cm 정도의 암덩어리라서 큰 병원을 가야 한다. 몇번 본 적은 없지만 굉장히 신경질적인 사람이기도 해서, 고기를 잘 먹지 않는 등 건강을 챙기려 노력하시는 분이었다. 그런 분이 뜻밖에도 그동안 병을 키우고 계셨으니 어머니는 상당히 놀란 듯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또한 인간관계에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쓰는 사람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배우자와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어서 납득하는 분위기이기도 했다. 최고의 스트레스 해소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인간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라고 어느 페친이 이야기했었다. 나도 사실 공감이 간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애초에 인간관계때문에 병까지 얻느니 차라리 나와 맞는 사람, 내가 존경하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혜안을 길러야 하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물론 자기수양도 중요할 것이다. 항우처럼 자만하지 않고 유방처럼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되 한신을 끊어낼 때처럼 냉정하게 행동하는 소양을 길러야 한다. 그런 능력도 없다면 혼자 살면서 모든 사람에게 욕을 먹는 게 도둑놈이 도둑질을 하는 것처럼 자기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니 차라리 낫지 않을까? 나는 백로인데 세상 천지에 까마귀 떼 뿐이라면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 있는게 종족을 보전하는 길일 것이다. '백로'라는 나의 존재는 손상되지 않기 때문.

 보통 한신은 토사구팽당한 불쌍한 존재로 나오는데, 이 책은 한신에 대한 대중적인 평가를 떼어내고 한신이 역모를 꾸몄던 부분을 실음으로서 그에 대해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고사성어, 명문장, 명문장이 생겨난 배경, 고사성어를 적용시킬만한 역사적 사례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시간적 배치를 아예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역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 봐야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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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요시 다쓰지 시선집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34
미요시 다쓰지 지음, 오석윤 옮김 / 소화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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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모든 역사는 마음에 두지 않고 잊혀지고, 사람들은 오로지 변함없는 습관에 따라서, 그들의 조상과 같은 형태의 밥그릇으로 같은 노란 음식물을 먹고, 들에 같은 씨를 뿌리고, 몸에 같은 옷을 걸치고, 머리에 상투같은 관을 물려주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법규이기나 한 것처럼, 그들은 늘 나태하고, 아무 때고 수면을 탐하고, 꿈의 틈새에 일어나서는, 두터운 가슴을 펴고, 꿀꺽꿀꺽 목구멍에서 소리를 내며 다량의 물을 다 마셔 버리는 것이다. 기류가 몹시 건조하기 때문에.

 

 

글로벌 시대인 만큼 요새 우리나라 문화를 바라보고 향유하는 외국인들이 증가하고 있다. 그것을 단순히 한류라고 말하는 걸 나는 거부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문화를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외국인들이 훨씬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다룬 입국이라는 시집에서만 봐도 남북의 분단을 상당히 아쉬워하고 있으며 서울의 냉랭한 익명적인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미요시 다쓰지는 전반적으로 우리나라가 시를 좋아하는 나라이며 정서적인 데에 높은 평가를 하고 있지만, 위에서처럼 예리한 시선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내년이면 대선인데 비단 우리나라 사람들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흥미로이 지켜보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역사를 잊고 독재자 박정희의 딸까지 대통령으로 뽑은 이 치욕스런 나라에서 이제 어떤 변함없는 습관이 어떤 인간을 대통령으로 뽑을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지.

사실 이 시집이 맘에 든 이유는 '이리'라는 시 때문이다. 그는 '모든 남자는 다 늑대다' 따위의 시시껄렁한 일반화를 하지 않는다. '저잣거리에서 그런 것들을 본 적이 있다'라고 꿈에서 이야기할 뿐이다. 그리고 말줄임표를 써서 부끄러움의 여운을 남기고 있다. '나도 남자지만 남자들은 이 세상에서 전부 없어졌음 좋겠어' 따위의 극단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신중함과 막힘없이 유려한 단어 때문에 나는 그의 시를 선호한다. 물론 경치를 표현한 시들도 굉장히 좋으니 꼭 읽어보길 바란다. 개미가 죽은 나비를 개미굴까지 들고 가는 게 꼭 요트타는 모습 같다고 표현한다거나, 책이 새처럼 종잇장을 파닥거린다 따위의 묘사을 하는데 이런 비유는 이후 일본 문학계에서 많이 쓰였다. 후자는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된 '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소설에 쓰여있어서 친숙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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