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닿으면 현악기로 떠는 바다
고성기 지음 / 북하우스 / 200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겨울 은행나무

순수, 그 말까지
짐이 되어 벗어버린

알몸, 원죄 없음이
저토록 떳떳한걸

등에 진
삶도 겨운데
외투까지 껴입나

나이 들면 아이처럼
철없이 순수해져

한 그루 은행으로
겨울을 날 법한데

뿌리가
깊지 못하여
기다림도 모르나

 

 

성숙한 인간을 좋아하는 취향 때문에 항상 자매가 같이 있으면 연상 쪽을 선택하게 되듯이, 이 시집에서도 솔직히 시집살이나 사모곡같은 오래된 시가 더 좋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 연작시들은 시인이 정리했을망정 시인이 생각하여 쓴 내용은 아닐테니 심사숙고한 결과 그가 창작한 시 중 그나마 마음에 드는 겨울 은행나무를 골랐다. 끝에서 나오는 서평에서 여러번 지적하듯이 깊이가 우러나오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연대 보증을 잘못 서서 삶을 계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뇌하는 가장이라거나 생활 속에서 우러나오는 구절이 많이 나오니 처음 나오는 시들을 한 번 쭉 훑어보는 것도 옛날 생각나고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그 뿐이다. 왜 그럴까 계속 생각해 봤다. 아마도 잡초밭에 장미가 나면 장미도 뽑힌다고 시에서 말하고 있지만 내심으론 옳은 것만을 추구하는 시인의 정신 때문에 상상력에 한계가 온 게 아닐까 생각한다. 요가에 대한 이야기를 연작시로 쓴 데서 그게 잘 드러난다. 굉장히 요가를 성실히 했구나라는 생각은 드는데, 거기에서 끝난다. 지각을 했다거나, 선생님이 어느 부분에서 도저히 터무니없는 지적을 했다거나 하는 사소한 투덜거림도 없다. 시인은 착해서는 안 된다는 어떤 분의 말이 생각난다. 확실히 시를 짓고 시조문화를 살려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는 느낌은 나는데, 단지 그 뿐이다. 도저히 시에서 유려함이라던가 기발함이라던가 번뜩이는 재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를 아포리즘의 과잉 사태라고 해도 될까.

 딱히 이 분이 나이가 들어서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게, 시집살이 4탄에서는 만약 시집갈 때 억새밭으로 가라고 한다. 그러면 손을 베여서 되돌아올테니, 어머니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맨발로라도 날듯이 달려가는 며느리의 발걸음에서 유머와 애환이 동시에 느껴진다. 분명 이 시가 시인의 시보다 나이가 더 들었는데 지금도 통하는 재미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식물의 인문학 - 숲이 인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박중환 지음 / 한길사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곧이어 후끈한 온기와 썩은 달걀 냄새가 덮쳤고, 이내 정신을 잃었습니다. (...) 기후학자들은 왜 1980년대 들어 갑자기 가스 분출이 집중되는지 궁금했습니다. 지진대의 요동은 그 이전에도 수없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가스 분출이 연중 가장 더운 8월에 집중된 점을 감안하여, 지구온난화에 의한 기온 상승 때문인지 의심합니다. (...) 그런데 화학공학 전공자인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그레고리 라이스킨 교수가 해저 메탄가스의 대폭발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 그런데 2004년 인도네시아에서 무려 50만 명 이상의 인명을 앗아가는 쓰나미가 발생하자, 라이스킨 교수의 경고가 새삼 부각되었습니다. (...) 영구동토층에 갇힌 메탄은 결빙되는데 이것을 메탄하이드레이트라고 합니다. 한국의 동해 해저 동토층에서 발견된, 이른바 '불타는 얼음'이 이것입니다. (...) 한반도의 해안도 잠기게 됩니다.

 

 

 

 

이전에 애니메이션이나 일러스트에서 별을 그리는 일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니 꽃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한창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며 캐릭터 그리기에 몰두했을 때만 해도 캐릭터 뒤에 꽃이 만발한 모습이 일반적이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카드캡터 사쿠라의 사쿠라 일러스트가 있다. 물론 이름이 벚꽃이니 그럴만 하지만 변신소녀 복장마다 다른 종류의 꽃을 그림으로서 사쿠라의 소박하고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을 마음껏 돋보이게 했다. 하지만 요샌 점점 캐릭터의 등교길마저 삭막해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물이 부족해서 시원한 걸 찾고 싶어 그런지 샤워라거나 온천이라거나 해수욕은 많이 나오지만.. 지구온난화 현상도 모자라서 그림까지 이렇게 삭막해지고 있다니 슬픈 일이다. 게다가 일본의 재해로 인해 만화가가 피해를 입는 일도 자주 등장하니 온화할 그림을 그릴 관심도 기력도 없는 게 아닐까. 이런 현상들을 '옛날엔 좋았는데 요즘은 왜 이럴까'라는 문장 하나로만 끝낸다면 분명 그 사람은 세상에 관심이 없는 문제를 떠나서 문화와 예술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된다. 심지어 현실과 거리가 먼 SF나 판타지같은 책이 유행하더라도 그것 또한 현실의 각박함 등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매우 불편한 책이긴 하지만, 확실히 환경 파괴에 관한 논란과 그 해결 방법의 모든 중심이 정치에 있음을 알려주는 책이다. 비록 이명박 정부가 4대강을 다 썩히고 박정희의 대기업 위주 정책이 결과적으로는 우리나라와 해외에까지 어마어마한 환경재해를 초래했다는 점을 말하지 않았으며, 감히 대기업을 식물과 연관시켜 찬양하려 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하긴 그런 거라도 없었으면 정치 혐오가 만발한 이 판국에 누가 이 책을 봤을까 싶다.

 예를 들어 위의 글은 부산의 가스 냄새에 대한 내 추측을 훌륭하게 요약했다. 실제 니오스 호수 사건으로 인해 이 '대멸종 가설'은 생겨났지만 학계와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해 묻혔다. 그러니 우리나라 정부가 아무리 원인을 밝히려 해도 '밝혀지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 아무리 보수적인 사람이라도 시골로 내려가서 식물을 벗하고 살다보면 저절로 진보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걸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메탄은 매립폐기물과 농축산업에서도 나온다. 하지만 지구의 바다에 묻혀있는 양을 생각해보라. 이것들은 온난화의 핵폭탄이라 불린다. 방해가 되는 것들을 치워버리고 사막지대를 녹화시키고 그에 관련된 효율적인 정책을 쓰지 않으면 2025년에 전자산업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특이점으로 인해 완전인공지능이 나오기도 전에 지구가 쑥대밭이 될 것이다. 내가 컴퓨터를 해야 되니 원전을 돌려야된다? 그따위가 현실이 아니라 사흘 간 부산에 가스 냄새가 난 게 현실이다. 딱히 부산의 문제만이 아니라 '부산 때문에' 우리나라에 지진과 방사능 분출과 쓰나미가 세트로 일어날 수 있다. 즉시 고층건물 건설에 제재를 가하고, 우리 서민층이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미세먼지 경고 집어치고 곧바로 대기업의 에너지 남발을 갈아엎어야 하며, 세계 평화에 아무 도움 안 되는 사드 때려치고 대기오염의 근본적 원인인 중국과 대화를 시도해 사막에 효율적으로 녹화정책을 취해야 하며, 4대강에 있는 쓰레기들 다 때려부셔서 민물고기와 강의 생명들을 살려야 한다. 이 모든 과정엔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야 하니 심지어 구조조정으로 인한 실업자 문제도 해결된다. 모든 답은 식물을 효율적으로 살리는 데 있다. 우리가 다음 해에 진실로 뽑아야 하는 대통령 후보는 최정상에 오를 때 그런 정책들을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이정하 지음 / 푸른숲 / 200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대에게 가자

가자, 밤열차라도 타고.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수 년 간 떠돌던 바람,
여지껏 내 삶을 흔들던 바람보다도 더 빨리,
어둠보다도 더 은밀하고 자연스럽게.

가자, 밤열차라도 타고.
차창가에 어리는 외로움이나 쓸쓸함,
다 스치고 난 후에야
그것들도 내 삶의 한 부분이었구나,
솔직히 인정하며.

가자, 밤열차라도 타고.
올 때가 지났는데도 오지 않으면
내가 먼저 찾아 나서자.
더 이상 기다리고만 있지 말고
두 팔 걷어부치고 대문을 나서자.

막차가 떠났으면 걸어서라도 가자.
늘 내 가슴 속 깊은 곳
연분홍 불빛으로 피어나는 그대에게.
가서, 기다림은 이제 더 이상
내 사랑의 방법이 아님을 자신 있게 말하자.
내 방황의 끝, 그대에게 가자.

 

 

아마도 3호선 버터플라이라는 인디 밴드가 부른 노래 가사일거라 생각하는데 대충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오랜만에 어떤 동네로 돌아와 자주 갔던 어떤 가게로 갔었는데 그 가게는 문을 닫았더라고 한다. 매우 아쉽고 결국 이 동네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는구나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자신의 모습도 이 동네에 있을 때와는 아주 다르게 변해있었다고. 

 이 시를 계속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이 시인은 자신을 떠난 사람을 찾으러 갈 수는 있지만 자신을 만났던 적과는 달리 변해있는 그 사람을 만나기가 두려워서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거라 한다. 하지만 그의 마음도 어쨌던 '네가 만나지 않겠다면 내가 만나러 가겠다'에서 '네 변한 모습을 보기가 싫다'로 변했다. 그러나 그 결심조차 단지 논리정연한 이론상에서일 뿐일 듯하다. 무대 위만 계속 쳐다보고 있다면 현실 세계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대를 생각하다가 전화를 할까 싶어서 핸드폰만 들고서 밝아진 화면을 한동안 빤히 쳐다볼 수 있다. 그 때 우리는 핸드폰의 그 빛 속에서 그대를 연상할 수 있다. 혹은 꿈에서 시덥지도 않던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손을 잡고 걸었던 그 때의 그대를 볼 수도 있다. 사람은 잠을 자야하며 너무 깊이 잠들지 않는다면 반드시 꿈을 꾼다. 행운일 수도 불행일 수도 있는 꿈의 요소. 그 꿈을 하잘것 없는 미신이라 치부하며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있고, 그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SNS 같은데다가 한 줄로라도 글을 남기는 사람이 있다. 이정하는 그 중 후자가 아닐까 생각되는 바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가 만났던 인연이 그를 아주 감성적으로 적셔주었고, 꿈을 꿔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사람으로 변모시켰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마음 안에 추억을 담아두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기다림만이 사랑의 방식은 아니듯이, 기억을 자꾸 꺼내는 것이 반드시 마음을 무감각하게 하는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다. 아마 그것은 '다른 사람을 만나라'라는 이성적인 충고를 애써 외면하는 가슴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쩌면 네가 눈부신 이유는 단순히 너를 바라보는 나의 눈에 눈물이 맺혀서 시야가 가려진 탓에 그리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성적이지 못한 게 반드시 나쁠까? 이정하의 시는 사랑에 미친 사람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오류들을 바라보고 손을 뻗어 쓰다듬으로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어떤 연애개론서가 이 고매한 슬픔에 츳코미를 걸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국과 지옥의 결혼 민음사 세계시인선 46
윌리엄 블레이크 지음, 김종철 옮김 / 민음사 / 1990년 10월
평점 :
품절


Anguries of Innocence

W. Blake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A robin redbreast in a cage
Puts all Heaven in a rage.
A dog starv'd at his Master's Gate
Predicts the ruin of the State......
Each outcry of the hunted hare
A fibre from the brain does tear.
A skylark wounded in the wing,
A cherubim does cease to sing......
Every wolf's and lion's howl
Raises from Hell a human soul.
The wild deer, wandering here and there,
Keeps the human soul from care.
The lamb misused breeds public strife,
and yet forgives the butcher's knife......
It is right it should be so;
Man was made for the joy and woe;
And when this we rightly know,
Thro' the world we safely go.
Joy and woe are woven fine,
A clothing for the soul divine;
Under every grief and pine
Runs a joy with silken twine.
The babe is more than swaddling-bands;
Throughout all these human lands
Tools were made, and born were hands,
Every farmer understands......
He who doubts from what he sees
Will ne'er believe, do what you please.
If the sun and moon should doubt,
They'd immediately go out.
To be in a passion you good may do,
But no good if a passion is in you.
The whore and gambler, by the state
Licensed, build that nation's fate.
The harlot's cry from street to street
Shall weave Old England's winding-sheetㅡ.

순수의 전도

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
천국을 온통 분노케 하며,
주인집 문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
쫓기는 토끼의 울음소리는
우리의 머리를 찢는다
종달새가 날개에 상처를 입으면
아기천사는 노래를 멈추고......
모든 늑대와 사자의 울부짖음은
인간의 영혼을 지옥으로부터 건져올린다.
여기저기를 헤메는 들사슴은
근심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해방시켜 준다.
학대받는 양은 전쟁을 낳지만,
그러나 그는 백정의 칼을 용서한다ㅡ
그렇게 되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인간은 기쁨과 비탄을 위해 태어났으며
우리가 이것을 올바르게 알 때,
우리는 세상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
기쁨과 비탄은 훌륭하게 직조되어
신성한 영혼에는 안성맞춤의 옷,
모든 슬픔과 기쁨 밑으로는
비단으로 엮어진 기쁨이 흐른다
아기는 강보 이상의 것,
이 모든 인간의 땅을 두루 통해서
도구는 만들어지고, 우리의 손은 태어나는 것임을
모든 농부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보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그대가 무엇을 하건, 그것을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해와 달이 의심을 한다면
그들은 곧 사라져버릴 것이다.
열정 속에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열정이 그대 속에 있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국가의 면허를 받은 매음부와 도박꾼은
바로 그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 거리 저 거리에서 들려오는 창부의 흐느낌은
늙은 영국의 수의를 짤 것이다......

 

 

  

역시나 블로그에다가 메갈을 지지(?)하는 글을 썼더니 블로그를 방문하는 사람이 줄었다. 뭐 상관없다. 나도 제1여당의 꼬봉이며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나 그들의 편인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네이버가 싫다. 이놈의 블로그때문에 곤란을 먹은 게 두 번인데, 하나는 여기에 올린 음악 때문에 벌금을 빼먹힌 사건, 또 하나는 해킹 걸려서 내 대학시절 썼던 모든 논문들과 레포트들을 다 날려먹은 사건이다. 사실 시간이 많이 지나고나니 블로그는 리뷰를 정돈하고 저장하는 창고가 된 느낌이다. 꽤나 훌륭한 임시저장같은 기능이 있으니 그럴 리는 없다 생각하지만 그런 역할도 없어지면 미련없이 블로그 떠날 생각도 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한 여성이 너무나 어이없이 죽었다. 그 일을 계기로 하여 메갈이 거의 처음으로 옳은 소리를 하였고 그로 인해 사회가 혼란해지고 급기야는 여태까지 잘 먹고 잘 사는 권력자가 메갈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기계적 좌파'라 지적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아무래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이론을 지지하는 듯하지만, 윌리엄 블레이크는 그닥 이런 현상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성서의 힘을 빌어 용기있게 소수자의 편에 서야 한다고 발언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천사를 고지식하게 그리며 악마의 발언을 일리있게 받아들이고 있다. 세상의 균형을 이룩하려면 우선 나 하나만이라도 한 편으로 치우쳐야 하며, 그것도 사람이 별로 없는 곳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나는 처음 볼 때부터 그의 시를 꽤 흥미있게 받아들였으며, 윌리엄 블레이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 되었다. 지금도 그 순위를 바꾸게 한 다른 시인이 없다.

 요새 한 시인의 불명예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다. 팝콘먹으며 구경하다 이런 글을 봤다.
 "우리 애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이러더라.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우웨엑.
 난 만일 애가 있다면 세상과 싸우라고 하고 싶은데, 내가 너무 많이 당한 걸 생각하면 그 짐을 애한테 또 지게 하고 싶진 않다. 그 문인의 자식 분은 대체 어릴 때부터 학교와 집안 싸움에 얼마나 치였기에 그렇게 해탈한 걸까? 요즘 세상은 경험만 중시하지 순수는 그닥 중시하지 못하고, 정의만 찾느라 부정의에 빠진 사람들의 자초지종을 잘 듣지 못하는 듯하다. 지나치게 불균형하고 기운이 모순되어 있으며, 무슨 기상천외한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분위기가 매일매일 가속되고 있다. 세상은 계속 발전하고 있는 게 아니라, 계속 파멸로 치닫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어떻든 간에 지금 여기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과 같이 앞으로 걸어나갈 테지만, 나는 두렵다.

 P. S 그러고보니 블레이크가 트러슬러에게 보낸 편지에선 이랬다.
 "어떤 것이 도덕적인 그림인가에 대한 당신의 견해와 나의 그것이 너무나 어긋나는 것이어서 당신이 나의 예술적 방법에 화를 내시게 된 것에 대해서 나로서는 매우 큰 유감입니다."
 니 눈에 어장관리처럼 보여서 죄송합니다.
 시급 최하로 받는데다 부모님에게 절반은 드리며 사는데 감히 집에서 처덕처덕 기어나와서 더치페이할 때 커피값밖에 낼 수 없어 죄송합니다.
 니가 쏘맥마실 때 나는 맥주 마셔서 죄송합니다.
 수준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퍽 유감스럽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 시인선 375
류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홍길동전

지 에미 이름도 모르는 꼴통 새끼!

군대 훈련소에서 처음
호적등본에 박힌 법적, 어머니 이름을 알았는데
아버지가 아버지가,
스물세 살 아들과 숨바꼭질하자는 것 같아서
우히히,
웃음이 나왔고 군댓말로
좆나게 맞았다

바햐므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는 세월이
느릿느릿 나를 데리고 흘러갔다

 

내가 이 시를 인상깊은 구절로 추천하는 이유는 그의 시가 날것이며 도통 어렵지 않은 시이면서도 진솔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썼음을 나타내보이기 위해서다.

 

<너무 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자신이 썼음을 <너무 깊은 사랑>이라는 시에서도 나타내고 있고 그는 TV에서 농담조로 '저작권을 붙였으면 좋았을 거'라고 했지만 그 시 안에서 그는 퍽이나 진지하다. 여성이 남성을 죽이고, 남성이 여성을 버리는 과정을 거기서 그는 자못 유머스럽게 묘사하려고 하며, 그로 인해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는 걸 숨기려 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 너무나 세상에 상처를 받다보니 방어적으로 터득한 기술임이 역력하다. 또한 역사저널이 상당히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상당히 마른 체격의 꺽다리 류근이 점잖게 앉아있지만, 술냄새 풀풀 풍기며 마구 날뛰고 절규해대는 이 시집을 보면 동일인물이 맞나하는 생각마저 든다. 시인의 말대로 우리는 이 세상을 견디기 위해서만 태어난 건 아닐진대.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일찍 철이 들어 아직 철들지 않은 척 바보인 척하는 연기를 해야 하는 걸까? 시인의 현란한 욕설과 유머감각에 웃음을 짓다가도 왠지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생각나서 잠시 숙연해지는 것이다.

그는 성적 농담도 많이 하지만 수준도 있다. 특히 구멍경이라는 시에서는 남자들에게 애꿎은 여성들 괴롭히지 말고 차라리 자기 자신의 '구멍'에 박아넣으라는 엄청난 충고를 우회해서 날린다. 성평등을 이룩하시려는 것인지 '바람피는 내 여자'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이 나온다. 하지만 그 여성을 욕하기보다는 왠지 그 여성을 거쳐간 남성들을 비꼬는 태도를 보인다. 상당히 아름다움에 대한 추종이 확고하시던데 여성은 일단 무조건 아름다우니 비판에서 제외하시는 걸까? 어쩌면 아름다움을 '여성'으로 비유했으며, 그녀를 거쳐간 많은 남성들의 정체는 '학자를 꿈꾸며 잘난 체하는 사람들' 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자신의 이야기를 20년 동안이나 떠안고 있는 건 못할 짓이다. 그러나 그 동안 그의 상처도 예술로, 인간 세계로, 삼라 만상의 이치로 승화된 듯하다. 그리고 저질 포르노도 아닌 저질 신파극도 아닌 시집이 탄생하였다. TV에서 "모든 남자들은 자신 혼자서 남자로 남겨진 모습을 꿈꾸게 된다"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혼자서 이 생에엔 오지도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기에 죽을 때까지 청춘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시인은 이를 진정한 지옥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애인과 헤어지고 온 남편을 위로해주는 아내와 새로운 만남을 격려하는 아이들처럼 우리 독자는 그 말이 진짜인지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혼자서 남자로 남겨진다는 말은 어쨌던 미래 만나는 사람들이 당연히 여자들임을 전제하는 게 아니겠는가! 어떤 인터뷰에서 시인에게 '실제로 집에서 그래요?'라고 물어보던데, 굉장히 무례한 질문이라 생각한다. 프라이버시라기보단 작품의 질을 낮추고 예술가를 무시한다고 할까.

생존법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한다 가령 내 친구 청명 한의원 엄익희 원장이 약 먹는 동안 술 먹지 마세요, 하면 짬뽕 국물에 소주 마시고 대학로 마리안느 가서 2차로 흑맥주 마신다 술 마실 때 옛날 애인이 제발 안주 좀 먹어가면서 마셔, 라고 말하는 순간 안주 접시가 보이지 않는 이적을 경험하고 할렐루야, 아내가 새벽 기도 가자고 하는 날부터 새벽에 귀가한다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한다 하라는 대로만 하면 여기가 인쇄소 식자공 작업장도 아니고 하라는 대로만 하면 내 인생이 내 인생인가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다 보면 나는 반짝이는 외로움과 자주 만나게 되고 길의 맨 가장자리로만 걷게 되고 그래도 먹고살기 위해 직장은 자주 바뀌고 봄에 집에서 출근했는데 갑자기 해고 통지서 받은 오후에 눈발이 흩날리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한다 하라는 대로만 하는 놈들은 오징어 꽁치 고등어 멸치 들처럼 삽시간에 한 그물에 잡혀들게 된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한번 생각해보라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는 오징어 꽁치 고등어 멸치가 대오를 이탈해 제멋대로 쏘다니는 편이 그나마 그 무지막지한 그물에 일망타진되는 수모를 조금이나마 면할 수 있지 않겠나 누가 나를 세상에 던져두고 하라는 대로만 하라고 충고 충언 충심으로 권고하는지 나는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할 때마다 지느러미가 솟아나고 하필이면 사람이 되고 싶었던 벰 베라 베로 요괴인간 삼형제가 생각나고 금방 고단해져서 텔레비전 끄고 어서 애국가 부르고 물구나무서러 가고 싶다
 

  

아주 낯선 이름도 아니고 궁금해서 검색해봤는데 70년대 애니메이션이라고 한다. 모습이 굉장히 컬트적이다. Dirty harry 부른 고릴라즈가 떠오르기도 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