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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입술 ㅣ 시인동네 시인선 17
정훈교 지음 / 시인동네 / 2014년 8월
평점 :
적ㅡ작약
오래 바람에 머물러본 당신, 붉은 꽃잎마다 떨어지지 않는 기록들이군요 5월 흘림체로 바람을
앓는 중이군요 물결에 닿은 당신 이야기가 사방으로 번지는군요 옛 음성에서 누군가를 품은 뿌리였다가 옛 신화에서 파에온 당신이었다가 플라스틱 화분
속 짝사랑이었다가 오늘 깨뜨리지 못한 속내이기도 한 당신, 봉분 아래 꽃그늘이 더욱 환하군요
투덜투덜 여인숙을 전전하는 빗소리에
우두둑 당신이 떨어집니다 작약의 발목이 하얗게 봉분을 넘고 있군요 뿌리내린 또 한 계절을 유물론으로 채우는 당신, 울음으로 피었다가 망국으로
지는 꽃들의 전설을 지금 기록 중이군요 5월 신부의 부케였다가 생리통의 뿌리였다가 혼동의 난장이었다가 지는 붉은 꽃들의 저 무수한 잔치 정작
쓰지 못한 문장들이 주저앉는 중이군요 당신이기 전에 당신,이 버린 최후의 불립문자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0906/pimg_7774821971486122.jpg)
등 뒤 목덜미에 있다는 점도 그렇고, 붉은 색을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쿄카인 머리를 붉은
색으로 만든 것도 그렇고, 일단 피도 붉은 색이니까.) 파문도 나오고 어쩜 그렇게 죠죠를 생각나게 하는지 모를 시집이었다.
시집을 소리내어 읽다보니 알게 된 사실인데, 실수를 하거나 혀가 꼬여버리는 대목은 어딘가 문법상에서 맞지 않으며, 시인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의도한 부분이다. 이 시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형이 매우 복잡하게 꼬이기 때문에 문장의 끝부분에 유달리 주목하면서 읽어야 했다. 이는 또한
대를 타고 내려오면서 흡혈귀를 퇴치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죠죠들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들도 조상이 갑자기 튀어나온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어서...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유전에 영향을 미친다는 4번 염색체나, 계속 길을 걷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내용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제대로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시인의 과거사를 마구 배배꼬고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이야기한 뒤, 그를 받아들이며 인류의 문제로 넓혀가는 듯했다.
어머니가 한 이야기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고생을 어렸을 때부터 너무 많이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힘든 줄도 모른다고. 그러나 난 그 사람이
지식과 공감력이 딸려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책을 많이 읽었다면 소설책도 읽었을 것이고, 세상 사는 이야기에 마음을 열게 되어 진작에 내 세계관이
우물 속 개구리였음을 깨닫고 다시는 고생의 경중을 잴 수 없게 될 텐데 말이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자기계발 책을 좀 읽으라면서 자기계발 책에서
읽은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여 이야기했던 친구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그 친구는 아마 자기계발 책을 쓴 인간이 자주
의견이 바뀐다는 사실을 모르는 멍청이였거나, 아님 그 사람을 간접적으로 비웃으면서 자신을 드높이려는 콧대 높은 인간이었겠지. 여하튼 여러모로 이
시인은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을 많이 쌓은 인물임엔 틀림없다. 물론 세상의 모든 약자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씨를 절제하기 위해 수학과 화학 공식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 점이 존경스럽다고 생각한다.
저문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읽다,
수면을 등지고 내게로 옵니다 돌의 무게가 파문의 크기로 옮겨붙는 순간입니다 당신의 고요가
깨어나는, 강가에 서서
아직은 수평인 파문에게 물수제비를 띄웁니다
당신을 펼치자마자 강의 배꼽이 출렁이고 노을이
자지러집니다 파문마저 이내 수평으로 재우는 당신의 수심을 헤아려봅니다 한 획으로 갈음될 수 없는 비릿한 그 무엇이 꾸역꾸역
솟구칩니다
바람이 깨지고 물의 이마가 깨지고 붉은 노을이 깨지고 어둑한 파문이 채 가시지 않는 강가에 나와 당신에게 거룩한 나를
띄웁니다 물결로 채워진 페이지가 쌓이고 나면
당신, 어느 날엔 비스듬히 빗겨간 물결들을 읽을 테지요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0906/pimg_7774821971486123.jpg)
파문이다.
말이 필요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