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음으로 문학동네 시인선 64
주원익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키프로스

새벽 거미의 붉은 눈
속에 흘러가는
구름

바닷가 교회
예배당을 흘러가는 파도 소리

성화 속에는 피가 흐르고
문지기는
덧문을 닫는다

태양의 언덕 입맞춤의 꽃봉오리

사랑하는 이름이 있어
낙원을 두고
낙하한다

청록색 바다
장미 향기를 따라간다

흰빛을 벗어두고

 

 

검은 바탕에 흰 빛, 새빨간 장미와 핏빛 향, 서늘한 감각에 모래처럼 까끌까끌한 맛.

 이 책은 오감을 선명히 느끼게 한다. 하지만 시집은 짧은 글들의 모음집이고, 이렇게 집요하게 특정한 느낌을 고집하는 시를 쓰는 건 쉽지 않다. 천재가 아닌 이상에야 한 시집을 이룰만한 시들을 한번에 주르륵 써내려갈 수는 없을 테고, 아마도 어떤 시상에 대한 고찰을 오랫동안 거듭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시엔 주님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드러나는데, 확실히 종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끈덕지게 심상을 가슴 속에 품을 수 없을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현대미술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서울역이란 시처럼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한 글들도 여럿 있었는데, 거기에서 시인이 말하려하는 교훈은 파괴의 긍정이었다. 주어를 생략하고 동사와 목적어의 위치를 이리저리 바꾸어도 의미는 전혀 변하지 않는 걸 보면서 새삼 우리말의 유연함을 실감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원근법을 따지지 않아도 제법 그럴싸한 동양화같기도 하다.

어떤 사람이 언어만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물어본 적이 있다. 확실히 그림 등의 예술을 쓸데없는 오락으로 보았던 플라톤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무적의 과학이라고 생각했던 철학도 결국 교양을 많이 쌓으려는 유별난 사람들이나 공부하는 과목으로 전락했다. 아무리 중요한 이론을 담고 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별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먼 미래의 후손들도 과학에 대해서 그렇게 평가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철학도 과학도 시대의 잔재로 남고 오래 남게 되는 건 새로운 트렌드를 떠올리는 인간의 사고 그 자체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사고의 기본은 인간의 오감으로 인해 우리 안에 남는 이미지 뿐이다. 그리고 사고의 표현이란 그 이미지를 몇몇 근육을 움직여서 행위로서 드러내는 것이고. 간단히 정리하면 언어는 결과, 이미지는 과정이라고 할까. 과정 없이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거의 전무하기는 하다. 그리고 이는 내가 최근에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이미지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이 시집은 의사소통과 그 과정에 대해 철학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세상에 드문 시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봄, 파르티잔
서정춘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도마뱀붙이

슬픈 문둥이 시인 한하운이 잘게 잘게 뛰어다닌 도마뱀을 보았다면 그의 떨어져나간 발가락을 도마뱀 피붙이로 분류했을 것이다

 

 

  

굉장히 짧은 시라서 당황스러웠다. 그 어떤 시인의 추천사도 쓰여져 있지 않았고 그 어떤 평론도 쓰여져 있지 않았으며 맨 처음에 시인의 말엔 뜬금없이 칸딘스키와 매화 이야기가 나오며 종이 한장한장이 굉장히 굵고 튼튼한 그런 시였다. 그러나 책 자체는 굉장히 얇았고 당연히 시도 그렇게 많이 들어있는 편은 아니었다. (보통 시집은 시 한 편이 한 쪽을 전부 차지하니까.) 시도 단 세 줄로 사물과 자연을 표현한 게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이 시집이 시인들 내부에서는 일대 혁명을 가져온 듯하다.

 확실히 이 시집의 내부에서 그나마 중편 스토리라 할 수 있는 도마뱀 이야기는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50년대의 추억이라던가 꽃같은 자연을 읊다가 난데없이 고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특히 도마뱀을 잡아서 요리하려고 도마에 올려놓고 썰고 있던 아내의 손가락이 잘려서 도마뱀꼬리처럼 다시 재생하길 꿈꾼다던가, 손가락 내부에서 발가락이 생기고 열 손가락이 또 생겨서 피아노를 친다는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영락없이 이 시의 주제가 서정시나 하이쿠인 줄 알았던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감각적인 묘사를 모조리 뱀에 관련한 비유에 때려박음으로서 그쪽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더라도 이응이라던가 다른 서정시도 상당히 좋았기에 어리둥절해지는 것이다. 아무튼 굉장히 범상치 않은 시임엔 틀림없다.

 혹시 시인이 시집에 시만 담음으로서 시만으로 승부를 보려고 했다면, 무모한 도전이라거나 좋은 승부수였다고 칭찬하기보다는 오히려 공략집에 나올만큼 정확하고 더이상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당연한 순번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군더더기가 없다 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는 시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정갈한 맛이 나는 연두색 시집이었다.

 나병시인 한하운이 실제로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는데 그가 유명한 시 보리피리를 썼다는 게 더 충격이었다. 그래서 그에 관련한 시를 가장 인상깊은 글귀에 올려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싱고,라고 불렀다 창비시선 378
신미나 지음 / 창비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연애 중에서

반지를 빼서 주머니에 넣는다
약지에
흰 띠가 남아 있다

 

 

  

겉으로 훑어보기엔 마치 한 편의 힐링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하지만 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비극과 가난의 고어스러운 끔찍함과 동네에서 퍼지는 소문의 잔인함이 들어있다. 특히 생쌀 씹는 소리 등 귀신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괴기스러움과 신비함을 한층 더한다. 마치 요괴물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굳이 시인은 그 귀신들을 퇴치하려 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살아있었던 시절을 추적하는 듯한 1인칭의 과거회상은 귀신의 뒤를 쫓는 것만 같다. 그 와중에 먹는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나오며 오감을 자극한다. 듣기엔 상당히 조잡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 모든 걸 시인이 한 쪽 혹은 한두줄로 축약해서 쓰기 때문에 복잡하거나 어렵진 않다. 본인은 하이쿠 읽는 듯한 기분으로 가볍게 읽었다. 물론 시인의 삶이 녹록치 않았지만, 그녀가 정미네라는 시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거의 모든 가난한 여성들이 차별도 더 당하고 그런 불행한 일들을 겪게 될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대체 왜 시골 살던 아버지들은 그리 어머니들을 못살게 굴었을까? 아무리 가난하고 힘이 없다고 하여 자신의 옆에 있어주는 인생의 동반자를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될 일인데 말이다. 어쨌던 시인이 시골 남자들에 대해서 분개하거나 충격을 받지 않고 무난하게 풀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이야기가 연속으로 풀려나가서 보는 사람을 식은땀 나게 하는 책이었지만.

 여기서 쓰이는 단어 싱고는 시인 본인이 만들었다고 한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한 말은 생략하지만 시인의 녹록치 않은 삶이 묻어나 있다. 슬픈 일이 일어날 때를 일컫는다는데, 속도는 빠르지 않고 느긋하고 나른하게 발음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골똘히 생각하며 그 단어를 시에 표현해내고 있다. 그러다 가끔 유부초밥 옆에 있는 생강을 쳐다보며 생강 생강 거리기도 하며 말이다. 뒷표지에 있는 김사인의 추천사가 유독 기억 속에 박힌다. 세상의 모든 우유부단함을 감싸고 보호하려는 듯한 말이었다.

 

손쉬운 양자택일은 정신의 나태함일 뿐 답이 아닌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또 하나의 입술 시인동네 시인선 17
정훈교 지음 / 시인동네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적ㅡ작약

오래 바람에 머물러본 당신, 붉은 꽃잎마다 떨어지지 않는 기록들이군요 5월 흘림체로 바람을 앓는 중이군요 물결에 닿은 당신 이야기가 사방으로 번지는군요 옛 음성에서 누군가를 품은 뿌리였다가 옛 신화에서 파에온 당신이었다가 플라스틱 화분 속 짝사랑이었다가 오늘 깨뜨리지 못한 속내이기도 한 당신, 봉분 아래 꽃그늘이 더욱 환하군요

투덜투덜 여인숙을 전전하는 빗소리에 우두둑 당신이 떨어집니다 작약의 발목이 하얗게 봉분을 넘고 있군요 뿌리내린 또 한 계절을 유물론으로 채우는 당신, 울음으로 피었다가 망국으로 지는 꽃들의 전설을 지금 기록 중이군요 5월 신부의 부케였다가 생리통의 뿌리였다가 혼동의 난장이었다가 지는 붉은 꽃들의 저 무수한 잔치 정작 쓰지 못한 문장들이 주저앉는 중이군요 당신이기 전에 당신,이 버린 최후의 불립문자

 

 

 등 뒤 목덜미에 있다는 점도 그렇고, 붉은 색을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쿄카인 머리를 붉은 색으로 만든 것도 그렇고, 일단 피도 붉은 색이니까.) 파문도 나오고 어쩜 그렇게 죠죠를 생각나게 하는지 모를 시집이었다.

 시집을 소리내어 읽다보니 알게 된 사실인데, 실수를 하거나 혀가 꼬여버리는 대목은 어딘가 문법상에서 맞지 않으며, 시인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의도한 부분이다. 이 시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형이 매우 복잡하게 꼬이기 때문에 문장의 끝부분에 유달리 주목하면서 읽어야 했다. 이는 또한 대를 타고 내려오면서 흡혈귀를 퇴치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죠죠들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들도 조상이 갑자기 튀어나온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어서...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유전에 영향을 미친다는 4번 염색체나, 계속 길을 걷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내용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제대로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시인의 과거사를 마구 배배꼬고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이야기한 뒤, 그를 받아들이며 인류의 문제로 넓혀가는 듯했다. 어머니가 한 이야기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고생을 어렸을 때부터 너무 많이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힘든 줄도 모른다고. 그러나 난 그 사람이 지식과 공감력이 딸려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책을 많이 읽었다면 소설책도 읽었을 것이고, 세상 사는 이야기에 마음을 열게 되어 진작에 내 세계관이 우물 속 개구리였음을 깨닫고 다시는 고생의 경중을 잴 수 없게 될 텐데 말이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자기계발 책을 좀 읽으라면서 자기계발 책에서 읽은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여 이야기했던 친구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그 친구는 아마 자기계발 책을 쓴 인간이 자주 의견이 바뀐다는 사실을 모르는 멍청이였거나, 아님 그 사람을 간접적으로 비웃으면서 자신을 드높이려는 콧대 높은 인간이었겠지. 여하튼 여러모로 이 시인은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을 많이 쌓은 인물임엔 틀림없다. 물론 세상의 모든 약자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씨를 절제하기 위해 수학과 화학 공식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 점이 존경스럽다고 생각한다.

 

저문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읽다,

수면을 등지고 내게로 옵니다 돌의 무게가 파문의 크기로 옮겨붙는 순간입니다 당신의 고요가 깨어나는, 강가에 서서

아직은 수평인 파문에게 물수제비를 띄웁니다

당신을 펼치자마자 강의 배꼽이 출렁이고 노을이 자지러집니다 파문마저 이내 수평으로 재우는 당신의 수심을 헤아려봅니다 한 획으로 갈음될 수 없는 비릿한 그 무엇이 꾸역꾸역 솟구칩니다

바람이 깨지고 물의 이마가 깨지고 붉은 노을이 깨지고 어둑한 파문이 채 가시지 않는 강가에 나와 당신에게 거룩한 나를 띄웁니다 물결로 채워진 페이지가 쌓이고 나면

당신, 어느 날엔 비스듬히 빗겨간 물결들을 읽을 테지요

 

 

  

파문이다.
말이 필요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깃발, 나부끼는 그리움 - 청마 유치환 탄생 100주년 기념 시그림집
유치환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원경

저 다행한 죽음의 하늘나라 그 편에서도
나는 내가 부재한 이곳 먼 지상을 잊을 수 없으리라.
여기서 살던 인생이 더러는 쓰고 괴로웠을지라도
그것은 끝내 인간을 인간이 버림으로 말미암은 벌.

우러러 성곽 같이 지켜 선 늙은 산악의 주름주름
깃들인 마을이며 질펀한 들이며를 물들여
사과꽃 피고 들국화 하늘대는 맑은 계절의 지샘과
허허로이 휘황한 무한을 전전표백하므로 입는 진한 빛의 흑백과
또한 순정과 죄악이 홍역처럼 번져 익는 인생의 뒷골목과ㅡ

나는 인간이었고
거기서 인생으로 차지 되기 마련인 세월이었으므로
설령 그날 천주의 곁에서 질탕한 환락의 누림을 입는다손 치더라도
나는 내가 살던 이 먼 지상은 한시인들 잊을 수는 없으리라.

 

  

유치환의 시는 사랑의 힘에 대해서 힘껏 노래하는 시였다. 유치환의 바위라는 시를 교과서에서 처음 봤을 때 나는 바위처럼 살고 싶다고, 바위처럼 단단해서 어느 누가 상처를 입혀도 결코 아프지 않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그 시를 읽으니 나는 그저 이리저리 휩쓸려 지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바위처럼 단단해지면 어떤 사람의 폭력에도 상처를 받지 않으나, 이는 어떤 사람이 나에게 폭력을 가하는 의도를 떠나서, 사람이 아니라 폭력 자체를 싫어하는 성격이 먼저 되어야 할 일이었다.

 

 짧은 시이지만 그 시 속에 함축된 바위의 의미는 그렇게나 깊었다. 유치환이 병든 아내를 사랑으로 안타깝게 지켜보는 모습, 즉 그의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자는 목표가 굳건해지는 모습을 보고 그의 마음 속에 있는 바위 또한 단단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어릴 적이었다고는 하나 시인의 의도를 단단히 오해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시인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을만큼 착해지려면 사랑해야 한다고 한다. 물론 그가 이야기하는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사람의 행패는 심해지고 이에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의 원한은 깊어지고 있다. 시에서도 '홧김에' 밥달라고 보채는 아이를 목졸라 살해하는 어머니가 나오는데, 요새는 세상이 각박해져서 그런 가정을 안타까워하기는 커녕 비난하기에 바쁘다. 우리는 언제쯤 사랑을 줄 만한 사람을 만나 사랑할 수 있을까.

 유치환에 대한 다방면의 모습을 많이 만나게 되서 기쁘기도 했지만 시집에 실린 그림들이 예상치 못한 수준으로 아름다웠다. 시를 소리내어 읽으면서 귀를 즐거이 할 수 있는 한편 눈으로 즐길 수 있으니 꼭 한번 사서 읽을만한 시집이라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