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
김용택 지음,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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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를 지키자.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나의 길을 간다.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면 그 어떤 일에도 미련 없이 도도해질 수 있다. 비굴할 일을 하지 말자. 비겁함을 보일 일을 벌이지 말자. 내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내 영혼을 다치게 하지 말자.
일말의 가치도 없는 것들이 판을 친다. 이제 그런 것들에게 지지 않는다. 그런 것들에게 질 나이가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권위와 품격을 갖추고 사람의 본래 품성을 지키는 일이 우리 시대엔 큰일이다. 내게 이익이 돌아올 일이 생겼을 때 더 조심하라. 바른 길, 인간의 길을 가라. 그 길을 벗어나지 말라. 내가 가고자 하는 일을 닦아라. 그 일에 더 신경을 쓰라. 마음을 아끼고, 다듬고, 새벽 흙처럼 갈아엎어라. 갈 길을 편안하게 골라라. 다 버리고 빈 몸으로 서라.

 

  

처음 서점 일을 시작했을 땐 그렇게 매장 안을 뛰어노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수근대는 소리를 듣고 겨우 사건의 진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놀이터에 모래를 없애고 어른들이 멋대로 말랑말랑한 시멘트를 깔 때부터 아이들은 자신들의 놀이 공간을 빼앗겼다고 느낀 것이다. 이에 맞춰서 아이들의 시간과 돈을 빼앗는 현란한 게임들이 나오고, 조금이라도 애를 햇볕에 내놓고 싶은 엄마와 장을 나가면 만화책과 스티커와 완구 등 갖가지 굿즈들이 그들의 마음을 빼앗는다. 게임을 가로막는 여성부를 보면서 어쩌면 그들은 두번째로 자신들의 놀이 공간을 빼앗긴다고 생각하고, 더는 빼앗길 수 없다고 분노하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게 무차별적인 공격과 근거 없는 비난들로 이어져, 결국 페미니즘과 생명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되고...

 

 김용택은 시골 학교 선생으로 살면서 이 글을 썼다. 그는 아이들에게 항상 용서를 빈다고 하면서, 그게 선생님의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오락실에서 버릇 없게 구는 아이를 돌려가면서 패는 게 참교육이라는 말이 나돌면서, 어느새 체벌이 참된 해결책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드는 무식한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더 무섭고 걱정되는 일은 '철밥통 공무원이 되었으니 이제 무난하게 가는 일만 남았다'라고 생각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생들이 훨씬 늘었다는 것이다. 체벌을 하던 하지 않던 잘못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잘못 처신한 선대로서 후손들에게 상황을 알려주고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안 된다. 나는 선생의 역할이 일단 청문회에 선 대변인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들이 차마 알려주지 못하는 일을 알려주는 것이다. 물론 그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아동을 보호해주고, 마음껏 뛰놀 수 있게 해줘야 한다. 학교폭력을 당하면, 수업을 하다가 재난을 당하면 아이들은 제일 먼저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어 있다. 그 사람들이 아니면 대체 아이들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단 말인가? 최근에는 아수나로같은 청소년 운동권도 있다고 하지만 그들이 손을 뻗치지 못하는 지역이 훨씬 더 많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도 한계가 있다.

 이번에 경주에서 지진이 났을 때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학교에 감금시켰다는 이야기는 잘 들었다. 경주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아직도 수업을 하고 있다는 뉴스에서 네티즌의 댓글이 분분하다. 휴교를 하라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 대부분은 선생님에 대한 불신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페이스북에서 친구를 잃은 학생이 담벼락에서 울면서 부르짖는 소리를 듣는다. "대학이 목숨보다 중요합니까?" 이는 우연찮게도 팟캐스트 청정구역에서 이동형이 울분에 찬 조소로 내뱉은 멘트다. 아이들은 지진이 나자 자신의 권력과 명예와 밥줄 유지가 중요한 선생님보다 네티즌들을 더 믿고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네티즌들도 어른이고, 이름을 갖추지 않은 그들은 때로는 너무나 비열하고 본능적이다.

  

내일 지진이 크게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러다 애들 다 죽는다. 선생들아. 정신 좀 차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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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여성학
김태선 외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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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원고)는 국립대 화학과의 기기 담당 유급조교이고, B(피고 1)는 같은 과 교수로서 사실상 A에 대하여 지휘 감독관계에 있었다. (...) A는 불쾌하고 곤혹스러운 느낌이 들어 이와 같은 성적 언동을 거부하거나 피해오다가 재임용에서 탈락한 뒤, B와 B의 사용자인 대한민국(피고 2)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대한민국에 대하여는 B에 대한 사용자로서 불법행위책임에 기한 손해배상을 청구함과 동시에, A의 사용자로서 고용계약상의 채무불이행에 기한 손해배상도 함께 청구하였다.

 

  

은혼에서 나온 대사이다. 물론 저 성희롱을 당한 카구라라는 캐릭터가 보통 남자 이상의 체력을 가진 괴력의 인물이라 저 말을 할 남자를 한 주먹에 때려눕히고(...) 히지타카라는 인물은 "방금 그건 정말로 잘못된 말이다"라고 말하긴 하지만, 일본은 저 정도의 여성차별 정도는 흔하게 당하고 산다고 은혼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요새 우리나라 남자들이 일본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는데, 타고난 성별을 이유로 심한 말들을 일상적으로 들으며 자라는 사람들이 어떤 심성을 가지고 있을지 한 번 생각해볼 만한 일일 것이다. 중국인이 술병으로 우리나라 사람을 쳐서 화제가 되었는데, 그들은 화가 나면 술병을 가지고 싸우는 게 흔한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기 위해선 남자의 정자가 필요하긴 하지만 여자는 난자와 자궁과 기타 수많은 것을 제공해야한다. 게다가 뱃속에 품을 때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기도 하고. 물론 임산부를 배려해줘야 진정한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임산부는 임산부이기 이전에 100% 여성이다. 그러니 여성에 대한 배려는 임산부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여성들이 아이를 낳기를 싫어하는 건 나라의 기본이 되먹지 않아서다. 무엇보다 요즘은 아무리 가난해도 피씨방에 가서 인터넷 검색만 하면 피임법이야 쉽사리 찾을 수 있는데, 어떤 높으신 목사님은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아이를 많이 낳는다는 망언을 했다고 했다. 더욱 아이를 낳기 싫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누구나 콘돔을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만 19세 이하는 콘돔을 살 수가 없다. 즉 미성년자는 피임을 할 수가 없다. (질외사정은 제대로 된 피임법이 아니다.) 더욱 소름끼치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책이 그렇게 어려웠던 건 아니었다. 심지어 처음 부분에서는 왠지 한국말이 서툴렀는데 마치 아주머니들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듯해서 소박하고 정겨운 면도 있었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고 특히 성매매 선불금에 대한 개념에서 좀 어려움을 느꼈다. 정리를 해보면 이렇다.

 다수: 불법이지만 선금을 준 업주가 불법을 더 크게 저질렀다는 등등의 이유로 선금을 지급한 것 자체를 말도 안 되는 민법상 거래로 보고 업주의 사기죄로 봄.

 소수: 업주나 점원이나 애초에 둘다 불법을 저질렀으므로 반반씩 내라 혹은 점원이 선금 받고 이상한 데다가 돈 쓰면 점원의 사기죄 성립으로 봄.

 팟캐스트 방송에서 몸 파는 일도 정신을 파는 일처럼 마지못해 하는 일이니 직장으로 생각하고 불법화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데 상당히 불편한 말이다.

 일단 첫번째로 성매매는 몸과 마음의 소모가 극도로 심한 극한직업이다. 솔직히 보수가 많을 수밖에 없는 직종. 애초에 다른 어떤 직종하고 그 수고를 비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두번째로 중개인에게 선불금을 받고 일하기 때문에 여러 트러블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합법화에 대한 의견이 개진된다면 이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한 합법화가 되어야 한다. 현재는 선불금이 불법이기 때문에 재판에 올라가면 선불금에 대한 개념 자체가 사라지고, 받은 사람의 차지가 된다. 여기서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해서 책을 읽는 데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업주는 점원이 금방 도망가는 거 잡아야 하니 돈으로 묶으려고 선불금 하고, 점원은 사채위기 직전에 선불금을 잡고, 여가부 왈 "선불금은 안 갚아도 되는거니 알아서들 해결해라."라고 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탤런트 엄태웅을 성폭행으로 고소한 사람이 선불금을 세 곳에서 떼먹었다는 이유로 구속된 상태였다고 한다. 번 마더퍼커 번!!! 아니 차라리 힘이 없다고 솔직히 말을 해 선불금을 사기죄로 때려서 다 해결되면 조폭과 용역이 왜 있는데?!?!

 성매매를 좋아서 하던 마지못해 하던 합법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최근에 두드러지고 있다. 애초에 강제로 성매매를 하고 있는 여성을 도우려면 성매매 불법화를 할게 아니라 보호시설과 교육수준이 발전해야 한다.

 이 책처럼 페미니즘의 종류에 대해 요점을 쏙쏙 뽑아 정리하는 경우가 정말 드물다. 요새 페미니즘이 갑자기 관심을 끌기 시작하니 완전 에세이에 가까운 책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한다.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해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강력 추천하는 책이다. 그러나 양성평등에 대한 이야기는 기대하지 마라. 유기동물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수두룩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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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 공동체 - 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200
손미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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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럼틀

좀, 앉을게
구둣발로 들어왔다
여기 좀 있을게
네 속에

창백한 애인이 피아노를 친다
어쩌면 이것이 절정일 수 있겠다
고개 돌리면 입 댈 수 있는 거리

우린 몰래 무릎을 열고
긴 관 속을 헤매고 다녔지
조용히 바라보았어
떠다니는 해파리들
망토를 걸치고 뛰어넘어
다른 곳으로
다른 곳으로

몸을 말아 넣으면
미끄러운 것에 눌리는 꿈을 꾼다
천천히 굴러떨어져
손잡이도 없는
네 속에

그만 좀, 앉을게
이제
나도 너의 살점인데

 

 이전에 팟캐스트 방송을 하면서 웹툰을 연재하는 여성 분을 만난 적이 있다. 자신이 10년 정도를 사귀다가 결혼상대가 아닌 것 같아서 헤어진 남자 분이 있고, 그걸 배경테마로 해서 자신이 결혼상대를 찾기 위해 맞선을 가는 등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나도 5년 사귀다 헤어진 전남친이 있고 헤어질 때 그 녀석 험담을 한 번 심하게 한 적은 있지만, 내심 그 분의 이야기가 듣기 거북했다. 솔직한 이야기를 하는 건 좋지만 아무리 그래도 결혼까지 하다가 헤어진 사람인데 '결혼할 대상이 아니어서 헤어졌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상대방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 상대방이야말로 '아, 헤어져서 잘 됐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주변 사람 중에서 처음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부모에 대한 험담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 불편해서 나도 곧바로 그 사람을 예의없이 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인지 내가 예의없다고 지적질하더라 ㅋㅋㅋ 아무리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고는 해도 20대 초반의 나이면 벌써 몇몇은 결혼도 하지 않았나? 그런 분이 복지 쪽 일자리를 알아본다는 데서 컬쳐쇼크였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뭐냐면, 남에 대한 험담을 받아주던 비판하던 무슨 말을 해도 '자기비하'로 얼버무린다는 거다.

 솔직히 내가 듣기엔 이렇게 들린다. 내 인생은 어차피 사회가 부모가 상사가 전애인이 조종하고 있어. 나는 책도 안 읽고(내가 책 빌려줄 테니 읽어볼래?) 머리도 안 좋고(머리가 안 좋은데 용케 백수는 아니네?) 대학도 잘 못 들어가서(나 대학교 들어갈 땐 중년층이나 할아버지 할머니도 많더라?) 이렇게 살고 있어. 손뼉치며 박장대소할 일이다. 정작 힘든 일이 있는 사람들은 이 시인처럼 제대로 육하원칙으로 표현할 줄도 모른다. 집에서 그동안 해왔던 게임과 그동안 봐왔던 고어 영화들이 집에서 혼자 마시는 술기운에 뒤죽박죽으로 섞여서 시편으로 정리된다. 힘든 일이 어느 정도 줄어들 때가 되어서야, 자신의 부끄러운 일들을 숨겨가면서 에둘러 가면서 간접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손미 씨가 쓰는 시의 불편함은 마치 그녀가 현재 진행형으로 불행을 겪는 것 같은 데서 온다. 글에서 생피를 흘리는 사람들이 사정을 캐물어보면 부끄럽다는 듯 씩 웃으면서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괜찮다고 얼버무린다. 하지만 그들의 글은 허언증이 아닌 듯이 들리는 것이다. 다 지나갔지만, 괜찮지만, 당신이 아파트 앞에 서 있다면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죽더라도 당신이 나를 잊지 않게 하고 싶다는 마지막 부분의 시는 그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 걸핏하면 '다 지나가리라'를 기도문처럼 중얼거리는 녀석과는 다르게 말이다. 슬픔을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는 시인이 멋있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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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 민음의 시 209
윤의섭 지음 / 민음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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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중에서

마야의 달력

달력에 표시된 동그라미의 의미는 결국 떠오르지 않았다
이날은 누구의 생일도 아니고 기일도 아니고 약속일도 기념일도
아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숫자 없으면 좋을 날짜 휴일 휴가
공연일 상연일 동창일 동호회일 검진일 월급일 아니다
인쇄 실수든가 종말일이든가 둘 중 하나는 아니다
올해 달력도 아니다

비본

그런 책이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숨겨 놓은 또 다른 예언서이거나 원상결의 저자가 남긴 참서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긴 했지만 누가 썼는지 중요하진 않다 내용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우주의 탄생과 인류의 멸족에 관한 신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기록도 믿을 것은 못되었다 가을바람이 지나가자 나무들은 한시름 내려놓듯 잎을 떨구었다 문득 그 책이 펼쳐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가 되었고 정해진 일이라는 것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 잔인하게도 책장이 덮일때까지 예년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단풍 구경을 하고 열매를 걷고 첫눈을 기다린다 이날 그녀는 갈비뼈처럼 잎맥이 선명한 낙엽을 끝장놀이에 꽂는다 그 페이지부터 기원전과 기원후가 갈라진다 책에는 문자가 쓰여 있었지만 아무도 읽을 수 없었다

 

  

이전에 있음으로 시집에 리뷰를 남기면서 생각하는 데 대한 첫 단계로 이미지가 중요함을 이야기했다. 물론 난 미술에도 관심이 있고 특히 추상화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그랬으면 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나는 한 번 무언가에 빠지면 걷잡을 수 없는 타입이다. 하지만 텍스트를 매우 좋아하는, 야동보다는 동인지 만화를 좋아하고 동인지 만화보단 야설을 좋아하고 특히 스토리와 대사를 매우 눈여겨보는 나로선 이 시집이 더 좋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말이다. 연인의 죽음이나 이별을 겪은 자들에게 세상은 하나의 묵시록이며 이 세상의 온갖 색깔도 그 심상을 담을 수 없으리라. 말 그대로 흑백, 빛과 어둠 밖에 없고 모든 현란함을 거부하는 그 감정을 시인은 담아내었다. 아마도 시집 제목인 묵시록에 해당할 것이라 생각되는, 시 10편으로 엮인 맨 처음의 시리즈는 심지어 숫자만 쓰여져 있다. 하지만 강제로 연관을 지으려 한다면 나름대로의 스토리텔링이 완성된다. 시집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시들이 연인보다는 어머니와의 이별을 암시한다는 듯한 이야기가 연어의 여행을 설명함으로서 나오지만, 사람은 보고 싶은 것을 본다고 하지 않는가. 연인과 헤어진 사람이 이 시집을 붙잡고 펑펑 운대도 이상하지 않을 시들이다.

 

 

  

나도 이 시집을 보면서 에반게리온이란 애니메이션의 신지와 아스카 커플을 생각했다. 애니 공식 커플이면서 팬들 모두가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고, 만난지 얼마 안 된데다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도 안 했으면서 마치 결혼한지 10년 이상은 된 듯 권태 냄새를 풀풀 풍기며 티격태격하는 그 커플 말이다.

 

 시들이 굉장히 읽기 쉬우면서도 그 안에 담긴 사랑이 너무나 절박해서 서대경처럼 젊은 시인이 이 시를 쓴 줄 알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세상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니힐리즘과 피로가 전반적으로 퍼져 있어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면이 있었다. 그런데 묵시록 말고도 생각보다 그가 쓴 시집이 많아서 돌연 아연해졌다. 이 시집에서도 약간 오컬트라던가 고딕호러같은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는데, 아예 이름이 마계인 시집도 있었다. 조만간 또 구입해서 읽게 될지도(...) 오컬트 너무 좋아하는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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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 문학과지성 시인선 302
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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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 모르는 망종들처럼
우루루 쿠당탕 한밤의 집중 호우로 몰려들어
열댓 가구 옹기종기 마을 깡그리
부숴놓고 떠나간 자리, 막돼먹은 저 홍수가
절개지의 사태 멋대로 끌고 와서
문전옥답까지 온통 자갈밭으로 갈아엎은 건
순리도 치수도 모르는 어느 호래자식
산의 큰 뿌리 마구 잘라댄 난개발 탓이리

 

 

  

엄마와 가볍게 다투었다. 잘 생각해보면 나는 돈이 없으니 긴축 정책을 쓰니 집안에 줄 돈을 배분하는 시간이 늦추어진다는 내용으로, 엄마는 돈 얘기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굉장히 '섭섭하게' 느껴진다는 내용으로 싸운 것 같다. 결국 엄마의 승리로 용돈을 받자마자 집안에 줄 돈을 어떻게든 떼어내기로 했다. 나는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 직원들에게 주스를 사주느냐 박카스를 사주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었다. 결국 이번 달에도 또 직원들에게 박카스를 사주게 되고, 난 다시 있는대로 욕을 먹겠지. 3년간 똑같은 내용으로 한 소리만 계속 들으니 차라리 엄마에게 바가지 긁히는 것보단 되려 정겹게 들린다. 

 전반적으로 환경오염이 극심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끼치는 피해에 대해선 걱정이 심하지만 이 시인은 청년들이 겪는 이런 '사소한' 고민에 대해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꽃이 바닥으로 떨어지듯이 한 번 나락으로 떨어져봐야 인생을 안다는데 마치 빚이 있어야 파이팅을 하고 가난해야 아이를 씀풍씀풍 낳는다는 요즘 노인들의 망발이 떠오른다. 내가 가난한 시절에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게 딱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사람들이 부당한 일에 민감해지고 항의를 할 줄 안다는 점이다. 한 시에서 그는 봄에 꽃이 피는게 길러준 자연에 대한 빚잔치고, 벌나비가 찾아드는게 마치 유곽의 장면 같다고 한다. 솔직히 아무리 이해하려 해봐도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비유가 너무 천박하다. 무조건 야한 단어를 쓰면 서정주나 마광수처럼 잘 쓰게 될 줄 아나 보지? 이 시를 쓴 시인도 미친 것 같지만 이 시를 제일 좋은 시라고 제일 처음 추천하는 평론가도 그렇고 이 책을 읽어보라고 추천하는 팟캐스트 방송도 다 미친 것 같다. 요즘 문인들이 포켓몬고 등의 유행에 대해, 어린 것들의 덕질 문화에 대해 이유없는 반항을 해대는 걸 보면서 글 쓰는 사람이라 해서 다들 올바르게 살진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었다. 물론 인간에겐 누구에게나 단점이 있다. 하지만 자신들이 좋아한다는 시집에 어떤 시가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당연히 그에 대한 솔직한 비판을 제기할 줄도 모르면서, 힘없고 유명하지 않다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세는 글러먹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국내의 문학이 잘 팔리지 않는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게, 독자들을 무시하는데 그들의 작품이 잘 팔릴까? 아니, 그리고 자신이 하노이 국민이라도 되어 봤나, 가해자 우리나라를 용서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나? 대우에서 라운지를 세운 게 우리나라를 하노이가 용서해준 증거라고? 다들 돈 벌고 살려고 굴욕적인 일을 버티고 사는 거지, 오버가 너무 심하시다.

 아무튼 강은교의 시와는 다르게 보기 싫은 시집이었다. 전에 내가 좋아하는 어떤 시인이 나이가 든 뒤 새로 낸 시집을 보고서도 오만 정이 다 떨어졌었는데... 나이가 들고 나면 그렇게 젊은 사람들에게 훈계를 하고 싶은가 보다. 자신이 젊은 시절 어떻게 살았는가를 좀 진실에 입각해서 생각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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