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백석 시그림집
백석 지음, 곽효환 엮음, 김덕기 외 그림 / 교보문고(단행본)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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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일 중에서

밭머리에도 복사꽃 피였다 새악시도 피였다 새악시 복사꽃이다 복사꽃 새악시다 어데서 송아지 매ㅡ하고 운다 골갯 논두렁에서 미나리 밟고 서서 운다 복사나무 아래 가 흙장난하고 놀지 왜 우노 자개밭둑에 엄지 어데 안 가고 누웠다 아릇동리선가 말 웃는 소리 무서운가 아릇동리 망아지 네 소리 무서울라 담모도리 바윗잔등에 다람쥐 해바라기하다 조은다 토끼잠 한잠 자고 나서 세수한다 흰구름 건넌산으로 가는 길에 복사꽃 바라노라 섰다

 

  

결국 이 시는 에반게리온의 신지와도 연결되며 우리나라의 대부분 교육받았으나 정치와는 그닥 연결되고 싶지 않은(신지도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어가면서도 무서운 로봇을 타고 싸우기를 거부했다.) 남성들과도 연결된다.

 

  백석은 자신이 너무나도 일찍 고향과 떨어져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상적인 여인을 찾아서 고향을 다시 개척할 마음을 품었으나 그 여인은 자신의 절친에게 시집을 가서 아이까지 낳고 잘 산다. (그래서 프로포즈할 땐 친구를 데리고 가면 안 된다.) 아내가 있음에도 그는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그 여인을 잊지 못하며, 백석을 사랑하던 기생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버리고 북한으로 가서 양치기를 하다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이상적인 고향은 그래서 이상적인 여인까지 더불어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의 여인은 놀랍게도 아이를 둔 유부녀나 아주 어린아이 시절의 무당 할머니로 자주 등장한다. (아주 바람직한 취향을 갖고 있다!) 다소 나이를 먹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시에 등장하는 그녀들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할 말을 잊게 만든다. 복사꽃 그녀이자 그녀 복사꽃인 것이다.

 

 

  

 그런데 그를 소개해야 할 현실의 시인들은 백석의 시에 나오는 옛날 먹거리나 백석 시인의 연애 스토리에 빠져서 한 가지 요소를 잊어먹은 것 같다. 백석은 마주치는 모든 여성들을 힐금힐금 눈여겨보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말하고 기다리는 나타샤는 파주라거나 강원도같은 (혹은 더 북쪽에 위치해 있는) 고향의 정서에 어울리는 대한민국의 모든 여성일 수 있다. 그러나 비극적인 점은 어느 하나 그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납치해서라도 여성을 하나라도 데려오고 싶은 절박한 심정을 노래하지만 모두들 신여성이 되어서 돈이 있는 남성을 따르기 시작하거나 집안의 강요로 돈 있는 집안의 노예가 되었다. 백석의 후기 시로 굳이 갈 필요 없이 통영이라는 시에서부터 그 절망은 표현되어있다.

 

 

  

이는 요즘의 남성들과 연계되어 있는 것 같다. 산책하고 있는 그녀가 데리고 있는 개가 이쁘다는 테마로 말을 걸어봤자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무시할 뿐이다. (이는 오늘 내가 겪은 실제 사례다.) 첫눈에 반했다고 말을 해도 두려워하며 종종걸음으로 달아나거나 소리를 지른다. (이도 또한 작년에 내가 겪은 실제 사례다.)

 이도저도 다 서러운데 출근길 퇴근길 만원인 지하철에서 손 한번 잘못 간수하면 여자들에게 뺨 맞을 위험이 있으니 두 손 다 손잡이를 굳게 잡아야 한다. 철없는 백석은 모두가 조국과 민족을 구하기 위해 기나긴 싸움을 하는 동안 돈 없고 여자 없는 설움을 토한다. 사실 이게 보통 대한민국 남자들의 현실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백석은 얼굴도 잘생긴데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신사이다. 고향타령을 할 망정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 이왕 찌질한 남자가 될거라면 모두들 백석을 본받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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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리홀 문학과지성 시인선 453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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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꼬리 달린 중에서

눈보라를 채집하는 시기가 오면 남편은 오랫동안 집을 비워야 했네 남편은 혼자 사는 아내야말로 긴 꼬리를 지녀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네 아내의 꼬리는 낮밤 길어지지 않고 남편은 눈보라를 짊어지고 돌아왔네 아내의 꼬리는 남편의 마음을 수축하게 했네 아내는 맞았고 눈보라는 흩날렸네 아내는 맞았고 눈보라는 흩날렸네 아내는 맞았고 마지막으로 눈이 흩날렸네 붉은무덤개미 떼들이 눈먼 아내를 찾아왔네 남편은 뒤늦게 요절했네 꼬리야 꼬리야 길어져라 아내는 주문을 외우네 꼬리야 꼬리야 길어져라 아내는 긴 꼬리를 가져야 살아 있고 싶네

 

 

 

사랑을 하고 있었다. 아픔을 겪었다. 지금 다른 사람을 사귀고 있던 아니던 간에 그 아픔은 마음 속에 담겨 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평생 그 사람 옆에 있고 싶다. 죽여서라도 곁에 두고 싶다. 이 사람하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그 사랑하는 기분이 되고 싶다. 하루하루 안드로이드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다시 이야기하자. 나는 게이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에 국경도 없다는데, 뭐가 나쁘단 말인가. 첫사랑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다. 하지만 내가 사랑했던 그 첫사랑은 나를 강간하고 내 입에 자신의 성기를 강제로 집어넣은 코치다. 그는 천사처럼 웃으며 나를 짓밟는다. 이 안타까운 죄악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무리해서라도 이 시집의 주제를 통일하자면 이 정도다.

 

시집에서는 수많은 꼰대들이 등장한다. 남성의 땀내를 흘리며 농구를 잘하지만 호모를 싫어해서 성폭행으로 그들을 짓누르고 싶어하는 꼰대. 광산에서만 일해서 바깥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불쌍한 꼰대. 호모들의 인권을 보장하자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내부에서는 성추행을 즐겨 하기로 동네방네 소문이 쫙 난 운동권 꼰대. 남자아이들을 패다가 결국 사디스트에 눈이 떠버린 운동코치형 꼰대.

 

 방송 매체에서 그들을 아름답다고 띄워서 그랬던 원래부터 화자가 매저의 성질이 있어서 그랬던 어쨌던 간에 그는 그들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바그너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그가 꼰대라는 사실이 꽤 충격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이다. 그는 탄호이저라는 캐릭터를 빌려(그도 땀내 꽤 나는 기사이다.) 사랑의 본질은 쾌락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한때 BL소설 계에서 "러브스토리의 시작이 대부분 강간이라니 너무 충격적이다."라는 논란이 있었고, 강간한 공은 물론이고 공의 밑에 눌려 쾌락을 느낀 수의 윤리에 대한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다. 글쎄. 매우 윤리적인 그들의 주장대로 그런 식으로 동성애자가 된 일이 흔히 겪을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점점 대중화되기 시작할수록 캐릭터가 처벌을 받고, 그로 인해 작가들이 자기 검열을 하기 시작했으며 한때 인터넷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퀴어문학은 사실상 사장되었다. 나는 그게 너무 짜증이 났었다. 제발 사랑은 사랑으로 작품은 작품으로만 봐줄 수 없겠니? 김현은 그런 나의 심정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반전이랄까, 좀 아쉽다고 할까. 화자는 진지하게 카세트테이프 음악이 사라졌으니 사랑도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놈의 R.E.M은 참 많은 사람들을 홀렸구나 싶다. 덕후라면서 응용한 애니메이션도 은하철도 구구구라던가 땅물바람 같은 것들이니 참 애잔할 노릇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왜 이제서야 이런 시집을 내놓았느냐는 것이다. 음악을 (외국락, 외국포크 일색으로) 편식하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난한 장정일 씨의 시집이 생각나기도 했다.
 

 
P. S 시집을 읽고나니 난데없이 파나소닉 CD플레이어를 사고 싶어졌다. 고딩때 마의 안에다 이어폰 집어넣어서 수업시간에 아무로 나미에랑 벅틱이랑 몰래 듣고 정말 개꿀이었는데. 파는 데 요새 없나요? 국전에서 중고로 살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 각주를 위로 달면 어떨까요?라고 질문하셨던 낭만서점 팟캐스트 진행자 중 한 명, 재주소년 보컬 분이 생각나서 이 시의 제목 부분의 각주를 맨 위로 올렸다. 이 시집엔 각주가 상당히 많은데 무시할 수도 없어 난감했다. 통째로 사진을 찍는다면 모를까 인터넷에 적어서 불펌할래야 할 수가 없는 시들 같다.

 

 

지금은 유명한 이야기지만 사실 메텔은 어지자지다.

 

* 인간들의 우주 장례식을 위해 개발된 메텔사의 1세대 장의 열차. 비둘기의 몸통을 본떠 만든 차량과 비둘기 울음을 닮은 기적 소리 탓에 비둘기호로 더 자주 불렸다.

은하철도 구구구 중에서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모든 안드로이드들의 작동이 끝났다. 우주 장례식 시뮬레이션이 꺼졌다. 달밤은 더 달밤이 되었다. 장례식이 끝나길 기다리던 샘 빌은 G버튼을 눌러 지구의 문을 열었다. 유효기간이 지난 안드로이드들을 싣고 비둘기호는 불타는 지구를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 안드로이드들을 폐기하기 위해 세워진 대형 화장로. 안드로이드들의 출생, 거주, 이주 행성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시집에서 자꾸 섹드립이 난무하니까 주먹쥔 사진만 봐도 이상한 생각이 든다(...) 차칸... 생각...

 

* 본 픽션은 로라 헨리의 논픽션 소설을 써라, 소설을, 소설 캐비지 여사의 제 신발 좀 찾아주세요. 슬리퍼예요, 푸른 슬리퍼의 전체를 재구성하여 지운 것임을 밝힌다.

소설을 써라, 소설을, 소설 캐비지 여자의 제 신발 좀 찾아주세요. 슬리퍼예요, 푸른 슬리퍼 중에서

사람들은 이번 역은 이번 역에서 고개를 앞으로 뒤로 꺾었다. 삶은 환승역을 향해 갔다. 캐비지 여사는 지난 날, 우리 생애의 전부가 되어주었던 것들을 생각했다. 땅불바람물마음 다섯 가지 힘을 하나로 모으면, 그렇지만 캐비지 여사는 다시 한 번 큰소리를 삼켰다. 조용히 하자. 조용히 말해야 해. 우리는 공중도덕을 교육받았다. 우리는 매를 벌었다. 제 신발 좀 찾아주세요. 슬리퍼에요, 푸른 슬리퍼라는 말, 문이 열렸다. 스마트하게 밀려 나가는 사람들을 따라 캐비지 여사는 데굴데굴 문밖으로 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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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듯 가볍게 - 상처를 이해하고 자기를 끌어안게 하는 심리여행
김도인 지음 / 웨일북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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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신의 성공담을 가지고 자기처럼 성공하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스승이 아니라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한 수집품을 모으는 사람일 뿐입니다.

 

 

결국 기질은 타고 났으니 어딜 가서도 남은 이런 취급을 받지만 나는 저런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걸 성인이 되었을 때서야 알게 되었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남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것밖에 없다. 물론, 내가 변한다고 해서 남이나 환경이 변화될 거라는 기대가 있다면 버리는 게 좋다. 물론, 상황이 급격히 안 좋아질 때는 그냥 그 상황을 벗어나는 게 좋다. 하지만 만약 그 장소가 돈을 버는 곳이라면 그냥 말을 섞지 마라. 침묵하고 무시하기만 해도 그 환경을 반 정도는 벗어날 수 있다. 대신 누가 무슨 말을 걸면 그 말에 귀를 기울일 것. 이 책의 핵심은 그거다. 솔직히 난 다 겪어본 일이라서 그냥 호흡명상에만 집중해서 책을 보고 나머지는 다 패스했다.

 

 5년 만난 사람이 인연이 아니란 걸 알았을 때, 당했다는 느낌이 났지만 두마디 하고 풀었다. 솔직히 한마디면 끝낼 일이었지만(...) 그리고 어떤 사람과 진정으로 같이 살 환경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 그 사람을 찼는데, 그 사람이 슬픔에 차 있어도 나는 위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일을 겪을 때 유산소 운동은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몸에 무리가 올 수 있으니 호흡명상같은 휴식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고 본다. 세상의 좋은 점이 있는데, 그 좋은 점이 너무 약하거나 어떤 사람들이 그 점을 보지 못하니 이끌어내는 게 진보이지 않을까? 진정한 인생선배는 자신의 실패를 이야기하지도 않고, 자신의 성공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선 소크라테스가 참으로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물건 판매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고객이 진정 찾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 물건이 있는 위치를 말해주면 끝인 것이다. 더 이상의 말은 잔소리가 된다. 이제까지 자기계발의 한계였던 꼰대성을 탈피하려는 데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세상엔 학대 말고도 심리전문가에게 반드시 상담을 받아야 할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성희롱같은 건 가해자를 찾아가서 소통하기가 몹시 힘든 일이고 특히 재현할수록 악화된다는 특징이 있다. 나는 인사이드 무비 자체를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본다. 우리가 당하는 부당한 일들은 대부분 정치사회와 관련되어 있어서 개인이 해결하기 힘들다. 정 심리 상담을 받고 싶다면 지방이 아니라 수도권의 유명한 전문가를 찾아가라는 의견도 제시되는 판이다. 절대 혼자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런 책이 유행하다니, 아무리 개인성을 강조하는 시대이고 혼밥혼술이 판을 친다 해도 이건 아니다.

 이루려 했는데 이루지 못한 일을 죽음명상으로 떠올리라는 말을 듣고 사과를 떠올렸다. 확실히 연애경력을 떠올릴 때 나와 이전에 연애했던 애들을 남녀노소 모두 내가 차버렸다는 전무후무한 기록이 있는지라, 뭔가 그들에게 상처를 줬다는 기분이 든달까. 근데 이건 뭘 얻는다기보다는 버리는 데에 더 가까운 거 같기도 하다. 그 외에 뭔갈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애초에 이루지 못할 때 모든 미련을 다 내팽개치기 때문이다.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리기도 하다.

 제발 이 책이 정신분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 책은 자기계발이다. 이 책을 읽고 심리적이라고 떠벌리는 건 무식을 공공연하게 만천하에 드러내는 짓이며 마치 원숭이도 이해하는 시리즈를 보고 와 자본론 봤다라고 하는거랑 비슷하달까 그런 것이다. 이 책을 보고나서 정신분석에 흥미를 느끼고 이 책에서 소개하는 서적들을 본다면 좋다. 그러나 이 책을 보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말해두는데, 여기서 소개하는 책 중 주역 하나라도 건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냥 시간낭비한 거다. (다행이랄지 저자는 자신이 읽은 책의 정보를 본문에서 상세히 나열하고 있다.) 이 책은 지금 정신분석을 뭉개버린 데 지나지 않으니 제발 여기에서 나오는 그대로 어디다 얘기하고 다니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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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주해 이육사 시전집 원전주해 시전집 총서 1
이육사.박현수 지음 / 예옥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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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후

모든 별들이 비취계단을 나리고 풍악소리 바루 조수처럼 부푸러 오르던 그밤 우리는 바다의 전당을 떠났다

가을 꽃을 하직하는 나비모냥 떨어져선 다시 가까이 되돌아 보곤 또 멀어지던 흰 날개우엔 볕ㅅ살도 따겁더라

머나먼 기억은 끝없는 나그네의 시름속에 자라나는 너를 간직하고 너도 나를 아껴 항상 단조한 물껼에 익었다

그러나 물껼은 흔들려 끝끝내 보이지 않고 나조차 계절풍의 넋이 가치 휩쓸려 정치못 일곱 바다에 밀렸거늘

너는 무삼일로 사막의 공주같아 연지찍은 붉은 입술을 내 근심에 표백된 돛대에 거느뇨 오ㅡ안타가운 신월

때론 너를 불러 꿈마다 눈덮인 내 섬속 투명한 영락으로 세운 집안에 머리 푼 알몸을 황금 항쇄 족쇄로 매여 두고

귀ㅅ밤에 우는 구슬과 사슬 끊는 소리 들으며 나는 일홈도 모를 꽃밭에 물을 뿌리며 머ㅡㄴ 다음 날을 빌었더니

꽃들이 피면 향기에 취한 나는 잠든 틈을 타 너는 온갖 화판을 따서 날개를 붙이고 그만 어데로 날러 갔더냐

지금 놀이 나려 선창이 고향의 하늘보다 둥글거늘 검은 망토를 두르기는 지나간 세기의 상장같애 슬프지 않은가

차라리 그 고은 손에 흰 수건을 날리렴 허무의 분수령에 앞날의 기빨을 걸고 너와 나와는 또 흐르자 부끄럽게 흐르자

페이지 :

 

 

 

이육사 시 두편에서 명백히 썸타다 헤어진 여성이 있는 거 같은데, 행동은 고양이요 눈은 마노같다길래 타카기가 생각났다. 크. 뺨에 고양이 수염 달아보고 싶다.

 

 축구, 야구 등 외국에서 들어오는 운동들을 번거롭다 비판하며 장치기를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경기종목으로 추천하는 걸 보면 확실히 이육사가 오래 전 시대의 시인이라는 게 느껴졌다. 시를 다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산문을 읽고나서 난데없이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독립운동가로서 그가 겪은 험난하고 고독한 현실에 대한 그의 묘사가 지금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다. 물론 총은 고사하고 물대포만 나와도 일순간 몸이 굳는 우리가 총기를 다루는 실력도 천부적이라는 이육사 같은 독립운동가에게는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서 세상을 한탄하고 기회주의자들을 몹시 싫어하며 특히 '연애 포기'를 매우 안타까워하는 그를 보면 특히나 노동당 쪽이나 노조에 계신 몇몇 청년들이 떠오른다. (역시 사회주의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을 숨길 수가 없나 보다.) 이별을 읊는 그의 연애시에선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일본에게 감시를 받고 쫓기고 대부분의 일생을 감옥에서 보내면서도 사랑을 하고 싶어서 시간을 쪼개는, 남자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었다. 항상 음침한 자신을 비하하고 있지만, 좋은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시 써야지 민중가요 작곡해야지 영화 시나리오 지어야지 노래를 불러대면서도 정작 라이브에서는 고음불가라 퇴짜를 맞는, 밉지 않은 한량으로 그럭저럭 젊은 시절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시대의 평범한, 홍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젊은이로 말이다. 그 시대엔 마노처럼 취급받고 작품을 쓰면 여러 평론가가 해석에 뛰어드는 그런 이육사 시인이 그렇게 될 수 있다니 왠지 복잡한 마음이 든다. 결국 똑똑하고 잘난 젊은이들이 넘쳐서 여차저차 하다보니 청년들의 취업난이 형성된 건가 싶기도 하고.

 더 읽고 싶었는데 짬짬이 쓰셔서 그런지 시는 40편 정도가 담겨 있었다. 그것도 조사가 진행되면서 이육사 시라고 밝혀진 게 더 늘어났다고 함. 읽을수록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쉬운 시였다. 의외로 스토리성이 짙다고 할까. 진솔한 성격이셔서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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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시 100선 - 소중한 사람과 함께 읽는
윌리엄 B. 예이츠 외 지음, 김옥림 옮김 / 미래북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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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만큼

젠 브레이

가끔씩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답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만큼
그대가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라고요.

이것은 그대의 사랑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대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안한 생각이 떠오를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대에게 나를 안고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매달리는 것뿐이랍니다.

 

 

타입문 세계에서 능욕당한 3인방이라는데 곰곰히 따져보면 이분들 다 임자있는 남자에게 모든 걸 바쳤다가 죽도밥도 안 된다.

 

 이 책에선 첫사랑에 대한 추억을 소중히 하라는데 그 녀석이 나한테서 돈 뜯어간 기억밖에 나질 않는 걸 보면 나도 참 어지간히 이기적인 애인가 보다. 잠깐 스쳐지나간 사람들도 기억을 못하는 걸 보면 그냥 인간관계에 소홀한 게 연애에서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최근에 깨진 연애도 그 남자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과 도저히 잘 지낼 자신이 없는 케이스이다보니 더더욱 그렇다. 마을 주민과 이웃 사촌간의 관계란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사람 간의 거리를 두라는 책이 유행을 타고 있던데 난 거리를 두는 건 확실히 잘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족이나 나와 친한 친구들은 아직도 사람을 너무 좋아하지 말고 거리를 두라고 한다.

 도대체 뭘 어쩌라는 소리인지 이해를 못했다가 저 시구절을 보고서야 알았다. 헤어지고 나서 몇 년 정도 시간이 지난 Y가 생각났다. 유달리 내 말귀를 못 알아듣던 녀석을 나는 바꾸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그 녀석이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계속 확인하려 했던 것 같다. 나한테 연애 마지막 때 쯤 '내가 홍등가를 가서 성관계를 하고 오면 어떨 거 같냐' 라는 말을 던져서 나에게 헤어지자는 답을 거의 즉시 받게 되었는데, 그렇게 못된 말을 했던 건 내심 그런 나에게 질려서겠지. 그러나 미련은 없다. 어차피 결혼을 하면 사랑'했던 전날의 추억' 속에서 살아갈 텐데, 험난한 세상에서 그 정도 유혹도 못 이긴다면 앞으로의 미래 설계도 메챠쿠챠가 아니겠는가. 아무튼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겐 걱정말라고 해주고 싶다. 난 항상 사람들과 이별할 때가 익숙하지 않아 곧잘 울지만, 그만큼 훌훌 털고 일어나는 시기가 짧고 회복도 빠르니까.

 주변에서 실연의 상처에 시달리며 사는 남자들을 보면 괜히 뜨끔한 건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심지어 성폭력 대책위 내부에서 사랑싸움했다가 온갖 소문에 시달려 진보진영 자체에서 퇴출된 케이스도 봤다. 여자들이 교육도 잘 받았는데 사회까지 어려워져 남자를 보는 눈이 높아진 데 대해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상처받지 않는 사랑을 하려면 그에 관련한 자격이 필요하다. 코에 콤플렉스가 있지만 언변이 유창한 시라노가 남을 통해 고백을 하지 않고 직접 고백했더라면, 그의 생각처럼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연애도 사람 관계라 맺고 끊음에 대해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사랑할 때 최소한의 에티켓을 지키고 전부를 바쳐 목숨을 희생할 각오가 없다면, 나에게 온 세상의 전부여야 하는 그 사람의 사랑도 얻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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