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저택
펄 벅 지음, 이선혜 옮김 / 길산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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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의 서평으로는 참으로 보기 힘든 별 다섯개짜리이다. 플러스 1점까지 아낌없이 추가해버리고 싶었으나 본인이 선호하는 소설의 분위기에 비하면 좀 답답한 기분이 들어서 조용히 빼버렸다. 대지 3부작을 읽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펄 벅의 소설에서 단연 주목받는 건 캐릭터이다. 인물묘사에 아낌없이 종이를 투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훈성은 잊지 않고 넣는다. 평범한 사람의 삶 속에서 휴머니즘을 찾는 그녀의 정신은 이 소설에서 나오는 안드레 신부를 닮았다. 아니면 안드레 신부가 그녀를 닮은 건지? 

 줄거리는 우 부인을 주축으로 흘러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는 여자의 방식으로 시골 안 부유한 저택 안에서 실권(?)을 쥐고 살고 있는 여인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저택도 좁게 느껴지고, 결국 40살 생일을 맞아 남편의 방에서 떨어져 나가기로 결심한다. 가끔씩 그녀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우 부인'이 이름으로 혼동될 정도로 뜨문뜨문 나타난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런 스토리는 가부장제 세계에서는 어느 땅덩어리에서나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워낙 뛰어난 펄벅의 글솜씨로 인해 얼굴이 좀 다듬어진 중국 사모님의 이야기조차 첨예하고 아름답게 표현된다. 참으로 마법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까지 줄거리를 듣고 나면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읽은 독자분들은 보통 '인형의 집'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책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소설의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마저 가부장제 속에서 그닥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펄벅은 여성주의자보다는 오히려 인류박애주의자에 가깝다. 또한 남녀노소가 다 좋아하는 사랑이야기가 더 있다. 안드레 신부와의 사랑이야기에서 육체적인 사랑, 집착 등등을 기대하고 읽으신다면 분명 실망하리라. 그러나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기대하고 읽은 분들이라면 분명 이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에서 숨어있는 광기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 비교적 평화롭게 끝난 소설이지만, 난 아래의 글귀 속에서 문득 '죽은 왕녀의 파반느'를 떠올렸다. 

 '그녀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아무런 의무가 없으며 단지 사랑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면 사랑마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물론 강 부인과 달리 좋은 몸매를 유지하고 유모와 달리 침착하게 집안의 일을 정리해가는 우 부인의 모습도 놀랍긴 하다만, 약간 삐딱하게 꼬여있는 본인의 시선으로는 아니꼬운 여자였다. 시대의 속박을 벗어나 자유를 찾기를 바라면서도 내심으로는 가정이 자기에게 끌려오기를 바라고, 강 부인과 추밍을 위하는 척 하지만 결국은 그들을 자신의 이중적 인생 속에 끌여들여 희생시켰다. 그녀의 미모와 세견된 모습은 하인의 각별한 희생이 있기에 가능했다. 딱히 그녀의 부를 언급하고 싶진 않다. 어차피 한 사람이 제대로 살려면 몇몇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하니까. 문제는 우 부인이 그녀가 그녀에게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데에 있다. 아무튼, 아름답지만 숨막히는 삶 속에서 우 부인은 드디어 사랑을 만난다. 

 안드레 신부와 우 부인의 사랑은 우 부인의 결벽만큼이나 지독히 영적이었다. 처음엔 우정으로 넘어갈 뻔했지만 지나치게 서로를 멀리하는 그들이 안쓰러움을 넘어 소름끼쳤다. 시선조차 서로 섞이지 않는 그들의 만남에 오한이 절로 느껴졌다. 아직 20대도 벗어나지 못한 나로서는 육신을 초월한 사랑을 이해할 레벨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더 놀라운 점은 우 부인의 성장이다. 인생에서 겪을 일은 다 겪은 중년대 여인도 사랑을 하게 되면 성숙해지는 것일까. 아니, '아이낳는 기계'에서 '인간'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분명 성숙과는 다르다. 어떤 말로 그 숭고함을 표현해야 할까. 펄 벅만큼의 실력도 되지 않는 나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겠다. 

 책 줄거리만 보고 단순히 슬픈 소설이 될 것이라 결론지었던 나의 성급함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또한 내가 경험하고 있는 사랑이 영적인 사랑일지 생각해보는 순간이었다. 문득 노라가 집을 나간 후에 육체적인 사랑이 아닌 영적인 사랑을 만났을지 궁금해진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기초 조건은 결국 사랑이기 때문에. 나도 노라도, 우 부인만큼 멋진 여인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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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포 2
라파엘 아발로스 지음, 신윤경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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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반지의 제왕' 등 장황한 구성이나 보통 판타지에서 자주 묘사되는 격렬한 전투를 기대한다면 틀림없이 실망할 것이라고 못을 박겠다. 화려한 액션과 반전을 생각하고 책을 들춰봤던 본인도 뒤통수 맞은 격이 되어버렸다. 쓸모없는 기대는 실망을 불러오게 된다는 세상의 법칙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달까. 말 그대로 이 책의 반전은 반전이 있을 법한데 반전이 없다는 점이다. 살리에티의 정체와 템플기사단 전투의 떡밥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본인으로서는 그 떡밥이 반전으로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흥미진진한 전개였다. 템플기사단과 현자들, 수많은 에너그램과 기호들에 절묘하게 숨겨져 있는 의미들은 중세 연금술 시대에 미쳐있는 독자들을 열광하게 할 것이다. 특히 그림들을 직접 책에 붙여놓은 점은 나름 흥미가 있었다. 소년 그림포와 같이 에너그램을 추리하는 과정이 의외로 재미있었다. 몇 개는 맞추기도 했지만 결국 다음 장을 들춰볼 때까지 맞추지 못한 에너그램들도 있었다. 말하면 스포일러가 되므로 이 쯤에서 이야기는 이쯤 생략하기로 하고. 

 1권에서 그림포가 묵게 되는 수도원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 생생해서 인상에 깊이 남았다. 기사단에 대한 환멸로 인해 40년을 수도원 서기로 종사하는 늙은 수사에 대한 이야기, 작지만 여러가지 비밀들이 숨겨져 있는 수도원 건물,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서 명상만 하는 수사에 대한 이야기들은 본인이 상당히 좋아하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꽤나 세심한 묘사설명 덕분에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그려가면서 읽는 게 가능했다. 좀 더 어둡고 묵직한 이야기였다면 더 재미있게 읽었을 것이다. 살리에티와 마상시합에 대한 이야기보다 더 좋은 걸 보면 내가 그닥 전투적인 소설엔 땡기지 않는지도? 

 2권에서는 너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을까 잔뜩 긴장했지만, 일단 책이 얇은 만큼 핵심인물이 많지 않아서 안심이었다. 덕분에 인물들을 탐구할 시간은 대폭 줄어들었고, 작가가 설정한 여러가지 그림과 기호들이 돋보인다. 이쯤에서부터 에너그램과 수수께끼가 엄청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너무나 재미있어서 그림포 일행의 모험담이 뭉텅뭉텅 생략되어 나가는 게 안타까울 정도이다. 하긴 여기서 에너그램을 더 만들어 달라고 조르면 불쌍한 작가의 뇌가 터져나오겠지... 아이도르 빌비쿰의 책에서 발견한 글을 그림포가 회상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감동의 한 장면이었다. 아마 이 글을 쓰는 작가에게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책을 다 끝냈다는 안도감이랄까(?) 개인이 머리를 짜내면서 개발해냈다고 가정하면 나름 기발한 에너그램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성배도 안 나온 기사도 이야기이지만, 전투도 간략하게 등장하는 짧은 판타지책이지만, 해피엔딩을 짐작할 수 있는 전형적인 선남선녀 이야기가 살짝 거슬리지만, 본인은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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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펜 이야기 - 운명을 디자인하는 여자 이희자
이희자 지음 / 살림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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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루펜은 음식물을 건조시켜 비료 혹은 연료로 만드는 우리나라의 음식물 처리기이다. 처음 루펜을 본 계기는 '신동엽의 러브하우스'라는 프로그램이 제공해주었다. 기계의 디자인과 성능에 놀랐고, 그리고 그런 기계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해주는 사장님에게 막연한 감동을 느꼈다. 이희자 씨가 책 속에서 솔직하게 반전(?)을 제시해주셨지만, 멋있는 방송 안에서 멋있게 자신의 발명품을 홍보한 그녀의 기백에 감탄했다. 홈쇼핑에서 무심코 보고 지나간 루펜에서도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이희자씨의 발명품 루펜에 대한 솔직담백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다. 사진만 많이 붙여놓는다면 루펜 광고집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루펜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처음 책을 접했을 땐 이 점이 마음에 안 들어 눈살을 찌푸렸었으나, 중간쯤 읽어가면서 그녀가 얼마나 이 발명품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인생에 대한 상징물이 저런 멋진 발명품이라면 부러워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구도 쓸모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막의 모래로 벽돌을 만들었다는 프롤로그를 보면 살짝 질투심이 들기까지 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한 그녀의 독백은 무한한 자신감과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고객에게 허리를 숙이지만 자존심과 의지만큼은 꺾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 그런데 그 모습은 놀랍게도 재벌 집안 음식상을 1인용 식탁에서 다인용 식탁으로 바꾸어 설거지감을 대폭 줄여놓은 모습과 대등한 비중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그녀는 주부로 살면서 경영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말한다. 그 뿐인가. 처음 부분부터 남편과 만난 이야기, 사주팔자이야기,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떡하니 등장한다. 물론 미국에서는 이런 구성의 책들이 이미 수차례 출판되었지만, 우리나라의 몇몇 고지식한 남성들 중에서는 이 책을 비웃는 사람들도 간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 대목에서 그녀의 철저한 고집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글에서 쓴 대로 자신의 여성성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성이란 줄곧 단점과 수치의 개념이었다. 남성다운 패션이 여성정치계나 여성기업계에서 유행하기 시작했고, 아직도 여성성을 숨기려는 여성들이 있다. 그러나 요새는 남자도 모성기업을 만들어나가는 시대이다. 여기서 여성들이 제대로 된 여성성을 살리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여성으로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결국 이 책은 대한민국의 여성으로 태어난 이상 남성들이 갖지 못한 감각으로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좀 과장스럽게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훗날 우리나라의 여성 성공담의 중심을 차지하고, 시대가 직장의 예술성과 양성성을 더욱 강조하면 할 수록 이 책은 기업가들의 베스트셀러이자 필독서로 자리잡을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여담을 약간 적어보겠다. 본인은 일하기를 좋아한다. 집보다는 밖으로 나다니길 좋아하고 돈쓰기보다는 돈벌기가 더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이 책의 흠집을 잡는다면 본인은 빛더미에 나앉은 어려운 시기에 호텔에서 오렌지주스를 사는 그녀의 모습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라면박스들을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돈으로 스트레스받는 아이들을 위한 건강식을 더 세심하게 챙겨줄 수는 없었을까? 그러나 그 대목에서 주부로서 배운 침착함과 여유가 느껴진 것은 사실이다. 문득 IMF때 술에 만취한 채 집에 들어오시는 아버지를 이부자리 펴고 조용히 맞아주시는 어머니가 떠올랐다. 자주 욱하는 성격을 지니신 어머니가 보여주시는 의외의 모습이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에 여쭈어보니 당신께서 쓰러지거나 미쳐버린다면 집안이 무너진다 생각하고 버티셨단다. 결국 우리 가족은 그 시기를 버텨내고 지금까지 화목하게 지내고 있다. 집안을 지켜낸 어머니의 그 단호한 눈빛을 글쓴이 또한 가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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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양장)
이경자 지음 / 사계절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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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양양이 고향이라는 작가의 말에 문득 동질감과 경외심이 솟구쳐오르는 걸 느꼈다. 보통 강원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은 비교적 얼마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작가와 시인들을 배출한 고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도 그럴 것이 깊은 첩첩산골로 대표되는 그 고장은 역사를 유독 중요시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 딱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본인도 고등학교 시절 단체로 소풍나갔을 때 '북쪽 여자아이들이 더 이쁘네 어쩌네' 속닥거리는 어른들을 많이 본 적이 있다. 그것도 인터넷 시대가 활짝 열린 2000년도에. 휴전이라는 평화에 길들여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강원도는 피서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동네가 되버렸다. 그 고장 출신마저도 강원도 출신이라고 공공연히 드러내길 꺼리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휴전 특유의 긴장감때문에 오히려 더욱 강원도에 대해 알기를 꺼려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본인은 여자라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최전방에 나가본 군인이라면 내 말을 잘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고속도로를 따라 군사지역을 구분하는 철조망들이 쭈욱 늘어서 있고, 길거리는 휴가나온 군인들로 바글거린다. 제법 한적한 바다로 가다 운이 좋으면 포병대대의 사격훈련을 구경할 수도 있는 곳이다. 북한과의 전쟁은 우리나라의 상처이자, 일상이자, 우리나라가 맞닥뜨린 현실이다. 굳이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잠수함 사건을 거론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강원도는 전쟁의 긴장감과 아픔을 그대로 품고 있는 고장이다. 아니, 그 자체가 일상이기에 아픔도 없다. '순이'에 나온 어른들의 행동에서 나타나듯이 밥먹고 살기 급급한 사람들에게 전쟁은 그저 생계의 전환일 뿐이다. 순이의 할머니에게 전쟁은 그저 각자 남한군과 북한군으로 나눠진 아들들의 죽음뿐이다. 이 소설은 6. 25 전쟁의 옳고 그름을 멋대로 재보지 않는다. 그저 양양사투리처럼 덤덤하고 묵묵히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국사교과서엔 설명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신화이다. 눈 앞에 생생히 어른거리는 50년대의 삶 속에서 우리나라가 전쟁국가임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이 책의 무엇보다 훌륭한 점은 할머니-어머니-순이 순으로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삶을 다각도로 조명했다는 점이다. 제사를 지낼 때 철이와 순이가 겪는 차별대우 장면은 우리나라 사대정신이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정신적 부담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여실히 담아낸다.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폭력까지 휘두르지만 사실 자신들의 무기력함을 숨기려 할 뿐인 남성들. 그 욕설과 주먹과 발길질을 감당해내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해내고 그 속에서 자부심과 만족감을 느끼는 여성들. 누가 나쁘고 누가 착한지 따지지 않는다. 누가 착하고 누가 불행한지 알 수 없다. 남성들은 이 책을 읽고서도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많을 것이다. 사대주의와 세대차이와 극단적으로 다른 의견 속에서 순이할머니와 순이어머니가 두 눈에 독기를 품고 싸우면서도 문득 서로를 보며 웃는 이유를 아마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으리라. 전세계의 사람들이 모르고, 남성들이 모르고, 심지어 우리나라 여성들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교감을 '순이'는 멋드러지게 표현했다. 

 땅을 깊이 파면 천국이 나온다는 영이의 말에서 유독 가슴이 아팠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가르쳐준 사회의 존재에 대해서 명확히 시사하는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결국 교회에 갔을 때 본능적으로 할머니를 보고 싶어한 순이의 예감은 적중하리라. 그러나 자신이 익힌 문자를 통해 어린시절 그토록 믿고 경외했던 천국과 미국이 자신을 배반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소설 속 그녀는 아직 6살 철모르는 소녀이기에. 이 책을 보는 여성들은 소설 속에 자신의 소녀시절을 두고 오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설빔을 입은 순이의 모습을 담아낸 겉표지 의외에 어떤 일러스트도 실려있지 않다. 오직 문자에 의존한 채, 머릿속으로 강원도의 순박한 이미지를 끌어내야 하는, 그러나 가시처럼 군데군데 달려와 박히는 현실을 이해해야 하는, 어른들의 동화인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들춰보면서 아무리 갑갑하더라도 소설 속 순이는 행복하고 순수한 채로 두자. 우리는 순이와 달리 순수하지만은 않은 현실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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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명저 사회학30선
다케우치 요우 지음, 최선임 옮김 / 지식여행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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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책이 도착했을 땐 기대보다 두께가 적고 글씨도 커서 약간 실망했다. 게다가 자신이 읽은 책을 소개하는 내용의 책은 개인적으로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내 흥미와 다른 글들도 많고, 책 소개를 읽는 것보다는 직접 원본읽기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해본 결과, 이 책을 선택한 보람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일단 사회학이 철학만큼이나 어렵다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뿐더러, 유독 사회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주저하는 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회학은 대학에서의 내 전공하고 거리가 멀다. (영어영문학과는 여전히 사회의 은어와는 몇 광년 떨어진 고어를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순수 사회학관련 책은 전혀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요즘 게오르그 짐멜과 미셸 푸코와 마샬 맥루한 등의 이론에 흥미가 생기다보니 사회학을 접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다케우치 씨는 내 독서 취향과 어느정도 비슷한 편인가보다. 몇몇 마음에 드는 사회학 책들은 눈으로 찜했다가 직접 도서관에서 찾아냈다. 지금은 내가 읽을 책 목록에 고이 정리해 둔 상태. 기회가 되면 반드시 읽으리라. 결국 내 책 욕심이 이 책을 부담없이 읽게 하는 데 도움이 된 셈이다. 

 솔직히 말해 소장할만한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다. 그러나 장점은 많았다. 우선 여러 사회학 책들의 원본을 직접 인용하면서 설명했기에 대강 그 책의 내용과 출판계기가 된 사회배경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오타쿠'라는 일본 특유의 사회현상과 '어쩐지, 크리스털'이라는 소설 등 여러가지 유행했던 것들을 사회학과 연관시켜 설명한 점이 가장 인상깊었다. 대학교수답게 이론 정리를 깔끔하게 해줘서 이해하기도 제법 쉬운 편이다. 

 다른 저자가 쓴 책들을 쓴다고 해서 이 책의 저자에게서 교훈을 아주 찾아볼 수 없는 건 아니다. 첫째로, 진보와 보수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사회를 냉정히 바라보고 앞일을 미리 예측하지 않는다는 사회학자로서의 원칙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아무리 사회를 평가할 때 자신의 관점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하지만 요즈음 진중권 씨 등 사회에 대해 글을 쓰는 교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탐구하는 사람으로서의 냉정한 정신이 많이 모자라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저자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일까. 짐멜의 소개에서 글쓴이의 이 의견은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짐멜은 '자본주의의 매혹'이라는 책에서도 한 번 접하고 이 책에서 다시 접하게 된 학자이다. 똑같이 '사회론'이라는 책을 거론하고 있으면서 의견이 다른 게 흥미로웠다. 전자는 짐멜이 자본주의로 기울었다는 증거라고 평하고 있는데, 후자는 냉혹한 '형식사회학'이라고 평하는 것이다. 왠지 '사회론'은 상당히 어려운 책일 것 같아 원본을 보고 싶은 맘이 들지 않았는데 이런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서 마음이 바뀌었다. 다시 복학해서 학교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있게 되면 이 책을 제일 먼저 찾아보리라. 결국 '세계명저 사회학 30전'은 책을 읽도록 부추겨주는 본래 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둘째로, 일상 속에서 신비를 찾는다는 저자의 말에 매혹되었다. 이 점은 인생 속에서 신비를 찾는 철학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철학은 심리학 다음으로 본인이 좋아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끌리는 점이 몇 가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지마다 둘러진 선홍색 컬러테두리가 아깝다는 생각을 자꾸 했다면 지나친 참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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