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버린다.  

 

매화는 잎이 없는 마른 가지로 꽃을 피운다. 나무가 몸속의 꽃을 밖으로 밀어내서, 꽃은 품어져 나오듯이 피어난다. 매화는 피어서 군집을 이룬다. 꽃핀 매화숲은 구름처럼 보인다. 이 꽃구름은 그 경계선이 흔들리는 봄의 대기 속에서 풀어져있다. 그래서 매화의 구름은 혼곤하고 몽롱하다. 이것은 신기루다.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散華)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배꽃과 복사꽃과 벚꽃이 다 이와 같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 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봄은 숨어 있던 운명의 모습들을 가차없이 드러내보이고, 거기에 마음이 부대끼는 사람들은 봄빛 속에서 몸이 파리하게 마른다. 봄에 몸이 마르는 슬픔이 춘수(春瘦)다. 

 

- 김훈 『자전거 여행』「꽃피는 해안선, 여수 돌산도 향일암」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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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4-18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이 책을 다시 읽어봐야 겠어요. 제가 좀전 보고 온 꽃이 매화였군요.

Seong 2010-04-19 08:23   좋아요 0 | URL
저도 꽃구경 좀 해야 하는데... 책으로만 꽃구경을 하고 있어요..
ㅠㅠ

L.SHIN 2010-04-18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버린다"
- 아! 눈물처럼 후드득이라니, 그렇다면 꽃송이가 통째로 떨어질까요?
상상을 하니 왠지 애달픕니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 며칠 전에 친구 따라 아침에 산을 갔다가 저 산수유를 보았습니다.
표현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여기에 나와있는 말들을 그 꽃들 앞에서 읊으면 그야말로
풍월을 읊는 선비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반해버렸습니다.(웃음)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 맞아요. 청초하게 도도하게 피었던 목련은 늘 끝이 이쁘지 않죠.
그러나 이 표현을 보고나자, 아- 하고 탄식하게 됩니다.

어찌 이렇게 표현력이 옛날 선비 같나 했더니 작가가 김훈이군요.
나는 그의 소설 [칼]을 사놓기만 하고 아직도 안 읽었는데. 이 책, 담고 맙니다.

Seong 2010-04-19 08:27   좋아요 0 | URL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목련이 떠올라서 이 책을 다시 열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땐 지난한 사유와 문체에 질려 정말 힘겹게 읽었는데, 이런 글이 쉽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

계절을 타는 게 분명합니다. 가을보단 덜 하겠지만. ^.^;

L.SHIN 2010-04-19 09:00   좋아요 0 | URL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인데,
우리가 봄이나 가을을 타는 것은..
생명이 다시 피어오르는 봄에, 우리 인체의 세포들이 그 자연의 역동적인
흐름과 조화를 이루고 싶어 들썩들썩 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과,
생명이 다시 조용히 땅으로 들어가는 가을에는, 우리 영혼이 침묵의 시간으로
들어갈 때의 그 서운함을 느끼는 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이처럼 자신만의 깨달음은 늘, 예상치 못 했던 순간에 찾아오곤 하죠(웃음)
토메님 덕분입니다.^^

Seong 2010-04-19 11:43   좋아요 0 | URL
캬~ 우문현답입니다. ^.^;

카스피 2010-04-19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아름다운 봄꽃들이네요.근데 올해 제가 본 봄꽃은 목련,개나리,벚꽃 뿐이더군요^^

Seong 2010-04-21 08:38   좋아요 0 | URL
저도 그정도 본 것 같아요. 아니, 더 많은 꽃을 본 것 같은데 이름은 잘 모르겠어요.

그동안 이름 조차 모르고 스쳐지나간 사람들, 꽃들을 얼마일지 잠시 생각이 들었습니다. ^.^;
 
집 나온 남자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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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소포모어 징크스를 극복하지 못한 아쉬움. 재미는 있었지만 조금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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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둘러싼 욕망 그리고 파멸
블랙 달리아 - The Black Dahlia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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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블랙 달리아>는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실패작입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해도 이러한 평가는 불가피합니다. 물론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기는 합니다. 이 영화가 정말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의도한 최종 편집본인지, 아니면 스튜디오의 강권에 밀려 편집한 버전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가편집본을 보고 원작자인 제임스 엘로이가 만족을 표했다지만, 영화의 러닝타임이 121분이라는 점이 이 영화의 최종 편집이 스튜디오의 강권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에 참석한 것과 크레딧에 감독의 이름을 빼지 않은점으로 미루어봐서 감독의 최종 편집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사후평가는 의미없는 일이지요. 영화감독은 언제나 결과물로만 평가받는 존재니까요. 

   영화의 화자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드와이트 버키 블레이커트(조쉬 하트넷)입니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잔혹하고, 끈적거리며, 복잡하기까지 합니다. 주인공 버키와 리 블랜처트(아론 에크하트)가 파트너가 된 경위부터, 리의 여자친구 케이(스칼렛 요한슨)의 이야기가 펼쳐지다가, 흑인 유아 강간범 주니어 내시에 대한 사건을 수사하던 중 두동강이 난 여자 시체가 발견되는 범죄- 일명 '블랙 달리아' 사건 -가 발생합니다. 리는 (15살에 납치되어 강간당하고 토막살해된 여동생에 대한 죄책감으로) 이 사건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버키는 수사를 하던 중 죽은 여자와 '거의 같은' 모습을 한 매들린(힐러리 스웽크)을 발견하고, 그녀의 혐의를 숨겨주고 그녀와 섹스를 합니다. 그런 와중에 그들이 손을 놓고 있었던 주니어 내시가 범죄를 저지르고, 리는 케이와 관련된 일로 죽고 '블랙 달리아' 사건은 지지부진해집니다. 

  

 

   '사건은 왜 이리 많이 벌어지고, 등장인물들은 왜 이리 많은가' 불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 기본 설정은 원작에서 가져온 것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소설은 더 많은 사건과 더 많은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게다가 한 번 스쳐지나는 기능적인 사건/인물이 아니라,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연관이 있지요. 골치아픈 구성입니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수많은 가지들을 다 쳐내고, 주인공 세 사람과 희생자 엘리자베스 쇼트, 그리고 용의자 매들린의 이야기에 중점을 둡니다. 하지만, 이렇게 가지를 쳐도, 워낙에 방대한 사건이라 이야기는 하다 만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마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이 영화에 관심이 간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을 겁니다. "죽은 여자와 닮은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존경하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Vertigo)>을 떠오르게 하는 설정이죠.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블랙 달리아>를 자신만의 <현기증>으로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버키가 엘리자베스 쇼트에 서서히 빠지기 시작하는 장면은 원작과는 다르게 보여줍니다. 버키는 엘리자베스의 오디션 필름을 보면서 서서히 그녀에게 빠지기 시작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영화 속의 등장인물에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다가 엘리자베스를 흉내낸 매들린을 만나게 되고, 그는 매들린에게 빠지게 됩니다. 문제는, 엘리자베스와 매들린이 전혀 닮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버키가 매들린에게 빠진다는 설정이 심정적으로 다가가지 못합니다. 너무 억지스러워요. 

   아무리 실패작이라 하더라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영화답게 '명장면'이 있습니다. 전작들과 다른 점이라면, 이 명장면들은 철저하게 인물의 심리나 사건 전개에 복속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버키와 케이의 대화와, 매들린이 버키에게 가족들을 소개시키는 장면은 롱테이크로 찍었는데, 인물들의 심리상태와 비정상적인 분위기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주니어 내시 건으로 잠복하고 있는 버키와 리의 공간과 '블랙 달리아' 시체가 발견된 공간을 한 번에 보여주는 롱테이크 역시, 이 두 사건이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가장 명장면이라면, 리가 죽는 장면을 들 수 있습니다. 빛과 그림자, 불과 얼음, 아버지와 딸, 친구와 연인, 삶과 죽음, 시간(屍姦)과 근친상간이 한데 어우러진 기막힌 씬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을 한 번에 느끼기 쉽지 않다는 점이지요. 영화 자체로 느끼기에도 힘들 뿐더러, 반볷해서 감상했을 때, 그리고 적극적으로 영화에 뛰어들었을 때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영화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도저도 아닌 범작이 될 뿐이지요.  

 

 

   영화는 너무 많은 설명을 제거했습니다. 리가 왜 그렇게 블랙 달리아 사건에 집착하는지, 왜 그렇게 신경증적인 모습이 되었는지, 버키는 왜 매들린이 엘리자베스와 닮았다고 생각하는지, 최소한 이 정도의 물음표만 제거했더라도 영화는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블랙 달리아'사건은 그 자체로 맥거핀입니다. 영화의 캐릭터들은 이 끔찍한 사건을 수사하지만, 모두들 자신의 욕망을 해결하는데 쓰지요. '블랙 달리아'를 이용해 돈을 요구하고, 섹스도 하며, 질투와 살인 등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몰락에 관한 드라마지요. 하지만, '블랙 달리아' 사건은 너무 강렬한 사건이지요. 이 끔찍한 사건은 영화 전체를 지배합니다. 그래서 다르게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관객이 궁금한 것은 "누가 어떻게 죽였냐"이지, "왜 그녀는 죽었는가"가 아니기 때문이죠. 

 

   <블랙 달리아>는 이래저래 아쉬움이 많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평범한 감독의 걸작보다 비범한 감독의 실패작이 더 흥미롭다는 속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영화입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았지만, 그렇기에 원래 붙어있던 살의 모양을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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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권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 진시황과 이사 - 고독한 권력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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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권 작가의 『한(漢)나라 이야기』는 제목대로 중국 역사를 다룬 책이다. "왜 하필 지금 한나라인가?"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저자 서문에 친절히 밝혔으니, 여기에서는 책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책 제목은 『한나라 이야기』지만, 책은 진시황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왜 진시황부터인가?'에 대한 대답은 자세히 내놓고 있지 않지만, 봉건제처럼, 친인척에게 땅과 군사를 나누어 대륙을 통치하는 것이 아닌, 단 한 사람의 '절대권력'으로 통일 중국을 통치한 것이 진시황이기 때문이 아닐까. 시황제의 군현제를 반면교사로 삼아 한은 군국제를, 당(唐)은 3성 6부제를, 송(宋)은 2성 6부제를 통치제도로 삼았으니, 한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풀자면, 당연 통일 진나라, 그리고 그 진의 황제에 대한 이야기부터 풀어나가야 했을 것이다.

   『한나라 이야기』는 『십자군 이야기』와는 달리 시원시원한 구성으로 가독성을 높였다. 한 페이지에 3컷 이상을 나누지 않는 구성, 하단에 각 페이지에 대한 각주, 그리고 한 장(章)마다 자세한 내용 설명을 겯들여 꽤나 유용한 '학습' 만화를 선보였다. 게다가 그 독특한 화풍은 이 만화를 더 특별한 자리에 올려놓았다. 우리의 유전자에 저장된 그 흔한 동양인의 묘사가 아닌, 이국적인 모습의 등장인물들은 지금까지 고정관념으로 자리잡아온 중국 역사를 새로운 시선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게다가 시황제의 얼짱각도 포즈는 얼마나 아찔하며, 예의를 갖춘 진중한 성격과 그 안에 감추어둔 매의 눈빛을 표현한 그림은 '김태권'이라는 작가가 컨텐츠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작가가 아닌, 뛰어난 '만화가'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게 한다. 

   그러나, 김태권 작가도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있으니, 바로 고우영 작가의 『십팔사략(十八史略)』이다. 김태권 작가는 사마천의 『사기』를 순진하게 믿지 않고 끊임없이 회의하며 만화를 진행한다. 때문에 그당시 역사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생각할 여지는 제공하지만, 만화 자체로만 본다면 삐걱거리는 구성이다. 그에 반해 고우영 작가는 『사기』에 실린 내용을 의심없이 수용했다. 고우영 작가의 『십팔사략』은 그야말로 종횡무진 질주한다. 여불위의 드라마틱한 성공이야기, 진시황의 고뇌와 인륜을 저버린 피의 숙청, 이사와 조고의 음모 등 엄청난 힘으로 읽는이를 압도한다. 만화적인 면에서 본다면 『한나라 이야기』의 패배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단순히 재미를 쫓는 독서가 아닌, 만화라는 접하기 쉬운 매체로 한나라와 동아시아를 돌아보는 깊은 독서를 원한다면, 『한나라 이야기』를 추천한다.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우리를 둘러싼 현실 또한 반영한 우리의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다. 이번에는 전 10권이 모두 완간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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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0-04-16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10권 모두 완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고우영 작가의 책은 보지 못했는데, 이 기회에 한 번 읽어볼까 합니다. 김태권씨는 확실히 자기 색깔이 있는 것 같아, 늘 기대가 됩니다. 그나저나 십자군 이야기는 포기한걸까요?^^

Seong 2010-04-17 08:10   좋아요 0 | URL
『십팔사략』은 정말 끝내주죠. @.@ 특히 달기와 여태후 이야기는 아직도 오금이 덜덜덜.... 에구구... 『한나라 이야기』리뷰하면서 『십팔사략』이야기만 한 것 같네요. 신간평가관리자님께 혼날 듯. >,.<

외국소설/예술MD 2010-04-16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우영 십팔사략은 서사의 진행이라는 측면에서는 전무후무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옵니다. 한나라 이야기와는 지향점이 다른 것 같아요. 둘 다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

아 리플을 단 것은.. 십자군 이야기 때문인데요. 기존 출간된 십자군의 개정판과 추후 시리즈가 연내 출간 예정이라고 합니다. 김태권 작가 블로그에서 확인한 내용입니다.

Seong 2010-04-17 08:11   좋아요 0 | URL
『한나라 이야기』얘기는 정작 많이 하지않고, 다른 부수적인 이야기만 한 것 같아요. 반성 중... >,.<

그나저나 『십자군 이야기』가 나온다니 반가운 소식이군요! @.@
 
집 나온 남자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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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세포 소녀>와 수위를 다투는 악명 높은 영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을 연출한 이하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집 나온 남자들>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유쾌합니다. 물론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이 마냥 킬킬거리며 웃을 수 없는, 무언가 불편한 것이 있었듯이, <집 나온 남자들> 역시 마냥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아쉬운 점은, <여교수...>에서는 그 불편함을 끝까지 유지하는 감독의 뚝심이 보였던 반면, <집 나온 남자들>에서는 너무 쉽게 대중과 타협한 점입니다. 

   멋진 외모와 지적인 모습의 음악평론가 성희(지진희)는 라디오 생방송 중 아내와의 이혼을 통보합니다. 방송이 끝나고 그는 친구(이자 아내의 옛 애인인) 동민(양익준)과 강릉으로 가출을 합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보니, 자신이 생방송으로 이혼을 통보한 하루 전 날, 아내가 먼저 이혼을 통보하고 가출을 했다는 것을 압니다. 분노한 성희는 아내를 찾으러 돌아다닙니다. 아내를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성희는 자신이 아내를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존재 자체를 몰랐던 아내의 오빠(이문식)가 성희와 동민 앞에 등장합니다. 이들 셋은 합심해서 성희의 아내를 찾습니다.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는 성희의 모습은 지적이고 신사같습니다. 하지만, 친구 동민과 만나자마자 그는 입에 욕을 달고 다닙니다. 게다가 성격은 불같고, 자기 중심적이지요. 부자(1억은 그에게 있어서 얼마 아닌 돈입니다)이지만, 친구는 동민 혼자입니다. 그런 성격에 친구가 있을리 없지요. 성희가 아내를 찾는 이유도 자신의 자존심이 상해서입니다. <집 나온 남자들>은 이 미숙한 남자의 성장담입니다. 아내를 찾으러 다니면서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을 돌아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성희와 동민의 여정은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연상시킵니다. 『오뒷세이아』가 아내 페넬로페에게 돌아가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인 것 처럼, <집 나온 남자들> 역시 아내를 찾아다니는 이야기입니다. 성희는 오뒷세우스처럼 아내를 찾기 전까진 집에 가지 못합니다. 성희와 오뒷세우스에게 아내는 집과 같으니까요. 오뒷세우스가 수많은 여정을 거치듯, 성희도 여러 여정을 거칩니다. 술집을 차린 예언자(점쟁이, 김여진)에게 신탁을 받기도 하고, 세이렌(김양숙, 옥지영)의 노래에 취해 위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아내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내의 손목에 칼자국이 있었다는 것도, 아내가 돈이 필요해 다단계에 빠졌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이해심이 부족하고, 당신은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아내의 편지에 있는 말을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이런식으로 성희는 조금씩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내의 오빠인 유곽(이문식)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조금씩 흔들립니다. 한국 영화의 고질적 병폐인 신파가 들어오기 시작하지요. 물론 신파 자체가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신파'가 영화의 분위기와 주제에 잘 부합하느냐지요. 제 생각엔 아닌 것 같습니다. 영화의 갑작스런 신파는 지금까지의 유쾌한 소동을 무효로 만들었거든요. 물론 이 영화에 나오는 신파는 '질질 짜는' 신파와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갑작스러운 반성은 영화의 방향이 너무 틀어졌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아내의 편지와 결말 그리고 에필로그는 사족에 가깝습니다. 굳이 아내의 가출에 대해 설명을 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이 듭니다. 시나리오 상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결말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사건의 봉합은 '작가(writer)'적인 관점에서는 꼭 필요한 법이니까요. 하지만, 영화적인 리듬에서는 아닌 것 같아요. 결말부는 그냥 설명을 하지 않았으면, 영화적으로 더 괜찮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 짧은 기간에 성희가 아내를 이해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내의 말대로 "이해력의 향상"만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 같습니다. 

   성희 역의 지진희 씨의 연기는, 솔직히 많이 아쉽습니다. 아무리봐도 지진희 씨는 양아치 역할이 안어울리는 것 같아요. <여교수...>에서도 비슷한 역할이었지만, 그래도 그 역할은 자신을 점잖은 사람으로 포장한 역할이라 괜찮았는데, 양아치 역은 그에게 맞지 않는 옷같은 불편함이 있습니다. 동민 역의 양익준 씨와 유곽 역의 이문식 씨는 딱 그들에게서 기대할 만한 역할과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김여진 씨와 옥지영 씨의 과장된 연기 또한 인상적이었고요. 하지만, 성희의 아내 역은... 이 역은 연기의 문제라기 보다는 영화의 분위기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전혀 다른 영화가 되었으니까요. 

   수요일,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5명의 관객과 영화를 봤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상영관에서 이 영화를 내렸겠지요. 만감이 교차하는 아쉬운 영화입니다. 이하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을 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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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4-15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우 관객이 5명이였다구요? 속상하네요. 극장엔 잘 가지도 않으면서...ㅠ
지진희는 저도 좋아하는 배운데 로버트 레드포드처럼 반듯한 이미지라 안 어울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요.
요즘 TV에도 나오더만, 하도 조선왕실 울거먹어 식상해서 안 보게 되더라구요.
제가 좋아하는 정진영도 나오는데...ㅜ

Seong 2010-04-16 09:42   좋아요 0 | URL
너무 반듯해서 좀 안어울리는 것 같아요. <수>에서 냉철하고 터프한 역은 그런대로 어울렸는데, 양아치는 영... 텅 비어보인다고나 할까... 좀 많이 아쉬웠어요. 이번에 맡은 숙종도 좀 비슷하다는 얘기가 있어서... 궁금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