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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명사와 잃어버린 기억을 다시 세우는 영화.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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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 - The God 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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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재상영을 놓친다면 땅을 치고 후회할 영화!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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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5-24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꼭 봐야겠군요. 불끈!

Seong 2010-05-25 09:36   좋아요 0 | URL
저도 한 번 더 볼까 생각중입니다. ^.^;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5월 3주

<13일의 금요일>시리즈와 함께 1980년대 공포영화를 양분해온 <나이트메어> 시리즈는 B무비인 동시에 평론가들의 사랑을 받아온 영화입니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꿈’이라는 소재를 다루었기 때문이었죠. 현대 과학으로도 철인들의 사상으로도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꿈은 당연히 예술가들의 단골 소재가 되었습니다. 특히 영화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데이빗 린치같이 무의식의 불안한 세계로 침잠한 경우도 있었고, 홍상수같이 이야기의 구조와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리게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나이트메어> 시리즈는 예술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들이 프랜차이즈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의 매력적인 살인마 프레디 크루거 때문입니다.  

이번에 리메이크해서 개봉한 <나이트메어>는 원작과는 다른 노선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원작의 스토리는 그대로 가져와 이벤트 무비와 리메이크 사이에서 길을 잃은 경우입니다. 원작의 팬으로서도 아쉽고, 장르영화의 팬으로서도 아쉬운 결과물입니다.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지금까지 나온 나이트메어 시리즈를 한 번 훑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나이트메어>는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오리지널의 아우라가 있습니다. 소재주의로 끝날 수 있었던 이 영화가 9편씩이나 만들어진 것을 보면 사람들의 무의식적이고 원초적인 감성을 건드리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해더 랑겐켐프의 신선함, 조니 뎁의 풋풋함, 그리고 존 색슨의 인상적인 모습, 그리고 잊지 못할 로버트 잉글런드. 악몽은 이제 고전과 추억이 된 듯합니다.   

 

잭 숄더 감독의 <나이트메어 2: 프레디의 복수>는 원작의 설정에서 비껴간 작품입니다. 원작에서 프레디는 꿈에서 살인을 자행하는 인물이었지만, 2편에서 그는 세상으로 나오려합니다. 게다가 전편 주인공 낸시가 살던 집 엘름 가 1428번지는 프레디라는 귀신들린 집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미티빌> 시리즈를 관통하고 퀴어 정서와 프레디 크루거까지 아우르려는 감독의 야심은 존경할 만합니다. 물론 안타까움과 애틋함이 섞인 존경이었지만요...^^ 이 영화의 희생자들은 모두 남자들이며, 특히 체육 교사인 슈나이더의 죽음은 정말 충격적입니다(프레디의 분노의 볼기짝! 물에 적신 수건으로 맞아보신 분들은 그 고통을 이해하실 듯...). 특히 영화의 엔드 크레디트에 흘러나오는 빙 크로스비의 「Did You Ever See A Dream Walking?」을 듣고 있으면, 이 영화가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에 도달했던 경지에 오르길 원했던 영화임을 깨닫게 되어 숙연함을 느끼게 합니다. 이 영화에서 매혹적이었던 장면은, 프레디가 불에 타 죽었던 공장이 등장한다는 점과 파티중인 10대 아이들 앞에서 서 있는 장면입니다. 프레디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서 있던 장면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습니다.  

 

<나이트메어 3>은 잠시 옆길로 빠진 시리즈를 다시 원래 자리로 데려온 영화입니다. 장르적인 쾌감은 많이 줄었지만, 후속편이면서 시리즈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은 놀랍습니다. 프레디는 다시 꿈의 세계로 돌아갔고, 그의 목표는 엘름 가의 아이들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엘름 가의 마지막 아이들과 프레디의 싸움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눈에 익은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패트리샤 아퀘트와 로렌스 피시번이 그들입니다. 그리고 헤더 랑켄캠프와 존 색슨이 다시 등장해 1편과의 연관성을 강조했습니다. 음악은 안젤로 바달라멘티가 맡았으나, 그렇게 인상적인 스코어는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부터 프레디는 꿈으로 아이들을 유혹하기 시작합니다. 꿈을 꾸지 않는 약, 힙노실의 등장과 프레디의 출생의 비밀도 등장합니다. 게다가 크리스틴은 자신의 꿈속으로 다른 이들을 불러들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모로 흥미진진한 작품입니다.  

 

레니 할린이 감독한 <나이트메어 4>는 공포보다는 액션에 치중한 영화입니다. 프레디의 등장은 거의 액션 영화의 악당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서움보다는, 드디어 싸움이 벌어진다는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영화입니다. 3편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부활한 프레디에게 죽고, 크리스틴은 자신의 능력을 새 친구 앨리스에게 전해주고(!) 죽습니다. 앨리스는 독특한 능력이 있었는데, 그녀는 꿈을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가까운 친구들이 죽으면서 그녀는 친구들의 능력을 하나씩 흡수합니다. 드디어 무림의 고수가 된 앨리스는 프레디 크루거의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 결투를 벌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극장에서 스크린으로 빨려 들어가는 앨리스의 모습입니다. 영화보다 잠들지 말라는 감독의 메시지일까요? ^.^; 참고로 이 영화에 대해 가장 잊히지 않는 평이 있는데 바로 이렇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레니 할린의 네 번째 악몽은 시리즈 중의 최고이며, 공포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과 이데올로기 비평의 격전지이다. 그래서 이 네 번째 이야기를 보면서 왼손에 알뛰세를 오른손에는 라깡을, 그리고 보들리야르를 머리에 베고 누워 구경하는 것은 흥미진진할 것이다.『키노(No. 17)』" 이것 참...  

 

스티븐 홉킨스 감독의 <나이트메어 5>는 싱글맘의 공포를 다루는 수작입니다. 전편의 앨리스는 마찬가지로 전편에서 살아남은 댄과 사랑에 빠져 댄의 아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한 프레디가 태아의 꿈을 이용해 댄을 죽이고 다른 친구들도 죽이기 시작합니다. 죽은 아들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댄의 부모는 앨리스에게 아이를 빼앗으려고 하고, 프레디 역시 살인 욕구를 위해 앨리스의 아이를 필요로 합니다. 태아에 대한 '욕망'을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다룬 장르 영화가 있을까요? 아이들만 살해한 프레디가 태아에게 접근하는 설정도 으스스하지만 무엇보다 프레디의 살해 장면이 기발합니다. 댄은 마블 코믹스의 고스트 라이더로 분하게 해서 죽이더니, 코믹스에 빠져 있는 친구에게는 DC코믹스의 ‘슈퍼맨’으로 분해 살해합니다. 프레디의 인용은 갈수록 풍부해지고 유머까지 늘어납니다.  

 

레이첼 탈라레이 감독의 <나이트메어 6>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영화입니다. 프레디의 성장담이라니요. 무슨 <프레디 라이징>도 아니고... 게다가 그는 가정도 있는 착실한 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딸은 왜 그리 패륜적인지... 이 영화는 정말로 시리즈 마지막 편으로 기획됐을 것입니다. 스프링우드의 아이들이 다 죽은 프레디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 아이들을 살해할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절반은 성공하지만, 절반은 실패하지요. 프레디는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그는 이제 예술가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살해방식은 고딕 미술을 넘어 팝 아트와 아방가르드까지 가까이 왔습니다. 살인을 예술로 승화시키다니!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시리즈를 상쇄할 수는 없습니다. 매력적인 3-D 씨퀀스도 존재하지만, 이미 시리즈는 힘이 다 빠진 상태입니다. 마지막 엔드 크레디트에 올라오는 프레디의 활약상을 보고 있노라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뉴 나이트메어>는 시리즈를 탄생시킨 웨스 크레이븐의 진정한 속편이자 마지막 편입니다. 그는 시리즈가 다 막을 내리고 나서야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물론 그는 <영혼의 목걸이>로 (조금 더 현실적인) 프레디 크루거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이번에 그는 자신이 창조해낸 프레디 크루거를 확실히 끝장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명으로 등장하고 영화와 현실을 뒤섞는 방식으로 말이죠. 때문에 이 영화는 시리즈 중 가장 지루한 영화가 됐습니다. 1시간 30분 동안 영화는 별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대신 영화라는 예술이 어떻게 현실을 잠식하는지 천천히 보여줍니다. 말 그대로 공포라는 장르영화가 예술이 된 순간입니다. 이 영화는 웨스 크레이븐의 명성을 높여주기는 했지만, 장르 영화의 팬들에게서는 정말 악몽 같은 영화로 남아있습니다.  

 

우인태 감독의 <프레디 vs. 제이슨>은 <나이트메어>시리즈를 사랑하는 저로서도 솔직히 당황스런 영화입니다. 그저 제이슨과 프레디가 한 영화에서 만났다는 것에 대해 위안을 삼아야 할까요? 그래도 이번 리메이크에 비하면 이 영화가 훨씬 원작의 세계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편에 등장했던 양이라던가, 웨스틴 힐 정신병원이라던가. 원작의 팬들이라면 반가워할 장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하지만 <13일의 금요일>을 좋아하지 않는 저로서는 제이슨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조금 지루함을 느꼈습니다. 물론 <나이트메어>를 싫어하는 분들은 저와 반대의 이유로 지루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설정은 "우리는 깨어 있을 수도 잠들어 있을 수도 없어"라는 대사와 프레디가 제이슨의 악몽으로 들어가는 장면이었습니다. 물론 <나이트메어>와 <13일의 금요일> 테마를 반씩 섞은 테마곡 또한 말 그대로 죽여줬지요! 

 

사무엘 바이어(Samuel Bayer)가 감독(했다고 하지만, 제작자 마이클 베이의 입김이 더 크게 작용한 게 분명)한 2010년의 <나이트메어(A Nightmare on Elm Street)>는 이벤트 무비와 리메이크 무비의 사이에 있는 작품입니다. <나이트메어>시리즈를 알고 있는 팬들에게는 향수를, 몰랐던 관객들에게는 고전의 투박함을 현재 기술력의 세련함으로 포장해 새로운 영화를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한 영화입니다. 팬심을 제거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야기해도, 제게 <나이트메어>는 60% 정도 아쉬운 영화입니다. 영화의 스타 프레디 크루거는 원래 설정대로 아동 학대 성추행 범에 유머가 없는 싸이코패스가 됐습니다. 음향 효과는 멋지지만 스토리는 한숨이 나오고 특수효과는 지루합니다.  

가장 아쉬운 것은 영화의 이야기가 별 개연성 없이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원작에서 아이들이 죽는 이유는 그들 부모의 잘못 때문이었죠(이 무서운 연좌제의 공포라니). 그런데 리메이크는 오직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그 수많은 아이들을 살해합니다. 리메이크의 프레디 크루거는 원작의 프레디 크루거와는 하등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씬 시티(Sin City)>의 노란 녀석(that yellow bastard)과 흡사합니다. 

이래저래 원작의 팬인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지만, 즐길만한 영화였습니다. 어차피 공포 영화는 항상 쓰레기 취급을 받기 마련이니까요.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이 말해줄 것입니다. 그때까지 악몽은 계속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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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 - The God 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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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개봉한지 40여년에 가까운 작품을 굳이 이곳에서까지 비평적인 접근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게다가 전 비평가도 아니니까요). 저는 이 자리에서 <대부>에 대한 소소한 추억과 지난 18일 알라딘에서 초대한 시사회에서 스크린에서 본 <대부>에 대한 체험만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제게 <대부>는 어떤 각인된 한 추억에 가깝습니다. 전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적도 없었고, 비디오로도 빌려본 적도 없었으며, DVD를 구매하지도 않았습니다. 전 이 영화를 오직 브라운관에서만 봤었습니다. MBC에서 한 세 번 정도 봤던 것 같습니다. 아마 초등학생 때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같이 지내고 있는 막내 삼촌이 “정말 끝내주는 영화”라며 저를 강제로 보여주다시피 했었습니다. 

물론 무슨 내용인지도 몰랐죠. 초등생이 이해하기엔 너무나 방대한 인물들이 나왔으니까요. 게다가 생김새는 왜 그렇게 비슷하게 보이는지. 다들 양복을 입고 각진 얼굴에 눈을 부릅뜨며 이야기를 하는데, 미국엔 다 저런 사람들만 있는가보다 생각을 했었더랬습니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침대가 피투성이인 영화업자의 비명, 장남 소니(제임스 칸)이 벌집이 되는 장면, 대부 돈 비토 콜레오네(말론 브란도)가 과수원에서 쓰러지는 장면, 마이클(알 파치노)의 차가 폭발해 부인 아폴로니아(시모네타 스테파넬리)가 죽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 세례식 장면과 학살 장면이 교차 편집된 장면들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 죽는 장면들이군요. ㅡ.ㅡ;;; 

아무리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하더라도 <대부>는 초등학생이 보기에 지루한 영화였습니다. 초등학생의 세상은 <스타워즈>의 세상이었지 그런 재미없고 무서운 세상은 아니었으니까요. 게다가 새벽 1시에야 끝나는 영화를 억지로 견뎌서 봐야한 반발심 때문에 전 <대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때 <대부 3> 개봉이 전 세계적인 이슈를 불러일으켰지만, 전 그저 그랬습니다. 중학교 때만 하더라도 세상은 아직 괜찮은 곳이(라 생각했)었거든요. 

그리고 거의 20여년 만에, 리마스터링한 <대부>를 다시 봤습니다. 아니, 처음 봤다고 해야 정확할 것 같습니다. 전 정말 저 영화가 내가 봤던 그 영화가 맞나 싶었습니다. (세월의 힘을 견뎌낸 고전을) 다시 찍은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복원력과 해상도는 영화를 보는 내내 저를 압도했습니다. 말론 브란도의 씰룩 거리는 표정과 작은 몸짓은 저를 숨막히게 했고, 평범한 시민에서 패밀리의 대부로 변해가는 알 파치노의 모습에선 각성한 피터 파거의 모습을 본 것처럼 깜짝 놀랐습니다. 

모든 것을 ‘비즈니스’로 바라보는 냉철함과 심지어 가족마저 속이는 간교함 엄청난 영향력의 가부장주의와 폭력과 권력의 순환 혹은 내리물림. <대부>는 보는 내내 숨이 막힙니다. 등장인물만 해도 엄청난 이 거대한 대서사시를 코폴라는 마치 모든 장면이 다이너마이트인양 숨 쉴 틈 없이 직조합니다. 게다가 이후 거의 모든 느와르 영화에서 영향을 받았을 고든 윌리스의 카메라와 니노 로타의 애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음악은 정말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립니다.  

<대부>를 스크린에서 보는 것은 정말 다른 경험일 것입니다. 추억의 영화가 아니라, 처음 보는 것 같은 느낌일 것입니다. 이것은 이번 리마스터링을 제안한 스필버그의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I'm going to make him an offer he can't refuse)”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말대로 절대 거절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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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5-20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저는 <대부1>은 확실히 본 기억이 나는데 2,3편은 봤는지가
분명하지가 않아요. 일정만 아니었으면 무조건 신청했을 텐데 못 봐서 아쉽더라구요.ㅠ

Seong 2010-05-21 07:41   좋아요 0 | URL
다음주에 개봉하니까 꼭 보셔요. 저도 이 정도까지는 아닐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새로운 영화였습니다. @.@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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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여름날의 강가. 한 무리의 아이들이 강가에서 놀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강가에서 떠내려 오는 무언가를 발견합니다. 그 무언가는 교복을 입은 여학생의 시체입니다. 카메라는 알 수 없는 시체를 계속 주시합니다. 그리고 옆에 뜨는 타이틀 <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여학생의 시(屍)로 시작해 주인공 미자(윤정희)의 시(詩)로 끝납니다. 

시(詩)는 많은 일반 독자들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문학 장르입니다. 소설이나 수필처럼 이야기를 풀어쓰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잔가지들을 제거한 언어의 정수만을 골라 시인이 바라본 세상 전반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시를 감상하고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시인이 바라본 시각에 심정적으로 동의한다는 제스처입니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도 않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기엔 너무 많은 것을 신경 써야하니까요. 김용탁 시인(김용택)이 술자리에서 이야기 한, “시가 죽어버린 시대, 시를 아무도 읽지 않는 시대”는 바로 그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소통이 부재한 시대를 이야기합니다. 

시(詩)를 쓴다는 것은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see, watch)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 바라보는 것(look at)입니다. 김용탁 시인은 사과를 보여주며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 사과를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렇게 보기도 하고, 그늘진 면은 어떤지, 얼마나 많은 햇살을 머금었는지 생각도 해보고, 한 입 베어 물어 먹어보기도 하고. 이렇게 수많은 방법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우리 눈에 비치는 세상이 아닌, 그 세상의 이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65세, 아니 66세인 할머니 미자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습니다. 치매라 알려진 그 병은 처음에는 명사를 잃어버리고 다음에는 동사를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최근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나중에는 거의 원체험의 기억만 남는 병입니다. 갈수록 어린애가 되어 가는 것이죠. 세상의 운동성을 개념이라는 틀로 한정시킨 명사의 부재, 그리고 오랜 생활로 묻어온 생활의 때가 서서히 벗겨지면서 미자는 거의 날것 순수한 시각으로 지금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15세 소녀를 생각합니다. 미자는 순수함의 세계로 회귀해 순수한 아이들을 처음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세상은 순수함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은 나빠지고 있지만, 아직 윤리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윤리는 절대적인 윤리가 아닌, 아주 작은 범위의 윤리입니다. 여학생의 죽음을 둘러싼 학교 측의 윤리, 자식들의 잘못을 감싸주는 부모들의 윤리, 남은 자식을 키워야하는 극빈층 부모의 윤리가 있습니다. 이 윤리는 서로간의 이해관계와 맞아 떨어져 사건은 언뜻 잘 해결되는 것 같습니다. 사건이 잘 ‘합의’된 날, 미자는 물어봅니다. “이제 정말 끝인가요?” 죽은 여자아이의 억울함은 해결되지 않고 합의란 틀로 덮어버렸는데, 도대체 무엇이 해결된 것일까요? 어찌됐든, 미자는 자신의 윤리를 실천합니다. 그녀는 보호자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냅니다. 하지만, 이 작은 윤리는 진정한 윤리가 아닙니다. 그녀의 손자는 짐승이 아닌, 사랑스런 손자니까요. 그렇기에 미자는 더 큰 결단을 내립니다. 미자가 시를 배우지 않았다면, 알츠하이머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자는 학교에 찾아가 사건이 벌어진 과학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미자는 죽은 소녀가 투신한 남한강 다리 위에 가 봅니다. 그녀가 떨어진 강가에 가서 그녀의 죽음을 바라봅니다. 소녀의 눈물같은 비에 흠뻑 젖은 미자는 간병인(이자 파출부)일을 하는 강 노인(김희라)의 “죽기 전 한 번 소원”을 들어줍니다. 소녀의 죽음을 바라본 그녀는 죽음의 절실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의아했지만, 동시에 인상적인 장면인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수강생들은 각자의 아름다웠던 기억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억은 아름다움과 슬픔, 행복과 불행이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을 복기하는 순간에도 우리의 감정은 딱 나눠지지 않은 복합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물며 우리가 사는 세상 또한 복합적이죠.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세상의 이면을 바라봄과 동시에 그만큼 순수해져야 한다는 것을 이창동 감독은 미자를 통해 역설하고 있습니다. 

예, 역설입니다. 이창동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 메시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생각할 여지를 주기 보다는 가르칩니다. 그의 영화에서 종종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그가 우리의 불편한 점을 들추어낸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가 영화를 진행하는 방식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가르침은 소중합니다. 그의 교훈은 지금 이 세상에서 정말로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메시지가 중시될수록 영화적인 진행은 그만큼 진부합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다 예상이 되니까요. 진지함 보다는 진부함. 보편적이라기보다는 진부함. 영화감상이 아닌 고등학교 윤리 수업을 보충시간을 포함해 연속 두 시간을 들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은 계속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질 것이고, 윤리 선생님의 역할을 그만큼 더 중요해질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의 수업은 다른 어설픈 선생님 수업보다 훨씬 훌륭합니다. 그리고 저도 계속 그의 수업을 들을 생각입니다.  

 

 

 

*덧붙임: 

영화의 오프닝은 임상수 감독의 <하녀>와 영화에서 시(詩)에 대한 이야기는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와 영화의 마지막 미자(와 희진)의 시낭송은 고레에다 히로카츠 감독의 <공기인형(空氣人形)>에서 노조미(배두나)의 시낭송과 비교해볼만합니다. 그러고보니 모두 2010년에 개봉한 영화들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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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5-20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할 부분이 많은 리뷰입니다. 'Tomek'님이 메시지라 표현한 걸 저는 관념성이라 이해하고 싶은데요. <오아시스> 이후로 이창동의 관념성이 강화된 듯한 인상입니다. 자연스레 영화적 장치도 많아졌다는 생각이구요. 그 장치들을 고민하고 해석하다 보면 그게 영화를 보는 이들에겐 말씀하신 메시지 혹은 가르침으로 다가오는 것 같구요. 이창동의 초기작이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려 노력했다면 <오아시스> 후로는 이창동이 사건과 인물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이 많아진 것 같구요. 물론 그게 반가울 수도 있고 싫을 수도 있겠지요. 저는 전자지만요.

Seong 2010-05-20 11:19   좋아요 0 | URL
파고세운닥나무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오아시스> 이후로 영화적 '재미'가 그만큼 사라진 것이 아쉬워서 툴툴거린 것 같습니다. 진부했지만 그래도 경청할만한 이야기였으니까요. 그래도 초기작들에서 보인 영화적 재미가 가끔 그립습니다. ^.^;
고맙습니다.

novio 2010-05-21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까 하고 고민했는데, 이 글을 읽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

Seong 2010-05-23 10:17   좋아요 0 | URL
생각보다 흥행이 되지 않는 것 같아요. 대부분의 극장에서 내린 것 같아 아쉽습니다. 칸에서 상받아 좀 더 흥행했으면 좋겠어요.

고맙습니다. ^.^;

2010-05-21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3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