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모리스 - I Love You Phillip Mor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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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피카라와 존 레쿼가 각본과 감독을 맡고 짐 캐리와 유안 맥그리거가 주연을 맡은 <필립 모리스(I Love You Phillip Morris)>는 가능한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봐야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 혹시나 관심이 생겼다면, 절대로 TV에서 방영하는 스포일러 프로그램이나, 인터넷의 정보 홍수를 차단하고 필히 영화를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이런 표현이 식상해졌지만, 이 영화는 각 장면이 다이너마이트인양 쉴 새 없이 보는 이의 웃음과 눈물을 쏟아 붓게 만듭니다. 특정 정서상 거부감을 느끼는 영화일 수도 있으나, 유안 맥그리거의 빠져들 듯한 파란 눈을 바라보는 순간, 그런 감정은 봄눈 녹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 영화는 정보를 알면 알수록 그만큼의 재미가 반감되는 영화입니다. 그러니 모든 리뷰나 40자평 따윈 치워버리고, 무조건 영화를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리뷰 끝.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스크롤을 내리신 분들이라면, 영화 자체보다는 영화에 관한 글을 더 궁금히 여기시는 분들이시겠지요. 그러면 영화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필립 모리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스필버그 감독의 <캐치 미 이프 유 캔>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 영화 초반에 떡하니 자막을 박아놓아 영화의 재미가 상승했듯이, <필립 모리스> 역시 동일한 방법으로 진행합니다. 영화의 처음은 병상에 누워 있는 스티븐 러셀(짐 캐리)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스티븐은 친모를 찾아다닙니다. 결국 그는 친모를 만나지만, 친모는 그를 거부하지요. 여기까지는 뻔해 보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 초반부부터 의외의 선회를 하곤 합니다. 결혼해서 귀여운 딸까지 있는 스티븐은 게이입니다. 영화는 아내와의 미적지근한 섹스와 다른 남자와의 화끈한 섹스를 보여주면서 보는 이를 거의 패닉상태에 빠뜨리게 합니다. 그는 화려한 게이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보험사기를 치다가 감옥에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운명적인 사랑 필립 모리스(유안 맥그리거)를 만납니다. 영화는 이들의 사랑을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절절하게 보여줍니다.   

 

 

짐 캐리의 게이 연기는 지나치게 양식적입니다. 그는 <케이블 가이>에서 잠깐 보여줬던 프레디 머큐리의 연기를 거의 그대로 반복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우리가 할리우드 영화에서 봐왔던 게이를 연기합니다. 지금이 90년대라면 이런 묘사는 웃음을 불러일으키겠지만, 이미 수많은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게이 영화들을 봐온 관객의 입장에서는 조금은 불편하게도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런 불편함을 상쇄시키는 것이 바로 필립 모리스 역의 유안 맥그리거입니다. 유안은 정극영화에 어울리는 톤으로 필립 모리스를 연기합니다. 그가 때론 사랑스럽게, 때론 애처롭게 스티븐을 바라볼 때면, 코미디는 멜로의 영역으로 넘어옵니다. 스티븐의 부고 소식에 무너지며 꺽꺽 쏟아지는 울음을 참아내는 모습은 내용을 다 알고 본 저도 눈물을 흘릴 정도로 슬프고 애처로웠습니다. 이 영화는 짐 캐리의 평범한 코미디 영화로 흐를 수도 있었지만, 그 반대편에 유안 맥그리거가 훌륭히 중심을 잡아주어 충분히 균형감 있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비교를 비교로서 허락한다면, <밀양>의 전도연과 송강호의 관계랄까?)   

 

영화는 게이라는 소재보다는 '사랑'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스티븐이 보험사기를 쳤던 것도, 후에 필립과 같이 살면서 사기를 치는 것도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족한 것 없이 행복하게 잘 살게 해주고 싶은 마음. 하지만, 필립은 말합니다. "내가 필요한 것은 이런 물질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야. 당신만 있으면 돼." 감옥에 있으면서도 스티븐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필립을 만나러 탈옥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당신이 필요하다는 필립의 그 말을 위해서. 사랑을 위해서. To Die For.  

 

 

* 덧붙임:  

1. 영화 개봉일이 6월 24일에서 7월 1일로 변경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월드컵의 영향인 듯 합니다. 

2. 2006년 필립 모리스는 석방되고, 스티븐 러셀은 144년형을 받고 하루 23시간 독방에 감금되는 형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스티븐은 필립 만나기 위해 매번 13일의 금요일에 탈옥을 시도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필립 모리스가 13일의 금요일에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3. 실제 필립 모리스가 이 영화에 까메오 출연을 했습니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에 나옵니다. 

 

4. 파고세운닥나무 님께서도 언급하신 다른 '모리스' 영화도 있습니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문예영화 <모리스>가 있지요. 풋풋한 휴 그랜트를 만날 수 있는 영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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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화 필립모리스_김명민을 능가한 짐캐리의 체중감량까지도 모두 리얼이다!!!
    from 완득이네 골방 2010-06-25 13:10 
    [영화 필립모리스 2010.07.01 개봉예정] 운좋게 시사회표를 양도 받아서 보게 된 영화였다. 주인공 짐캐리와 이완 맥그리거... 영화가 무슨 내용이든 재미가 어떻든 무조건 봐야할 것만 같았던 이 영화는 놀랍게도 100% 실화라고 포스터에 떡하니 적혀있다. 하지만... 주인공이 짐캐리이고 그렇다면 코미디 영화일듯한데 100% 실화라는 표현은 어떤 다른 의미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졌다. 한 아이의 아버지이며 경찰관으로 있었던 주인공 스티븐은 죽을..
 
 
stella.K 2010-06-24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이안 맥그리거라고 했는데 지금은 유안으로 바뀐 모양이죠?
동성애 영화는 저로선 아직...ㅠ

Seong 2010-06-24 15:42   좋아요 0 | URL
아직 표기는 '이완'으로 되어 있는데, 본국에서는 '유안'이라고 발음을 하기에 유안으로 표기했습니다. 외국인들의 이름은 어떻게 표기해야 맞는 것인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가능하면 그 나라에서 불리는 대로 표기해야 맞지 않을까 생각해서요. 그렇지 않으면, 성룡이나 주윤발 처럼, 우리식으로 굳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냥 소리나는대로 표기했습니다. :)

동성애 영화지만 굉장히 재미있으니 두 눈 딱 감고 한 번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

stella.K 2010-06-25 10:47   좋아요 0 | URL
두 눈 딱 감고...?
그럼 영화를 어케 봐요.ㅋㅋㅋ

파고세운닥나무 2010-06-24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가 E.M.포스터의 <모리스>와는 관련이 없죠? <모리스>도 동성애를 다룬 소설인데요. 그저 동명이인일 뿐이겠죠?

Seong 2010-06-24 16:19   좋아요 0 | URL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 합니다. E.M. 포스터와는 아무 관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

파고세운닥나무 2010-06-24 15:58   좋아요 0 | URL
네^^: 시대도 다르고 말이죠.
묘하게도 이름이 같아서요......

Seong 2010-06-24 18:52   좋아요 0 | URL
아, 이거 영화로도 봤어요. 휴 그랜트가 주연했던 영화! 제임스 아이보리가 만든 시대극이었죠! :)

파고세운닥나무 2010-06-25 09:57   좋아요 0 | URL
영화에 대해서 정말 많이 아시네요.
헨리 나웬이란 신부이자 기독교 작가가 있는데요. 이 분이 실은 동성애자였다고 해요. 평생 그 사실을 숨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구와 어느 날 영화 <모리스>를 보다가 보는 내내 펑펑 울었다고 해요. 친구가 의아해 했는데, 동성애자란 걸 알게 되었죠. 자신이 지닌 신분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성적 취향 때문에 이 분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김두식 교수의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2010-06-24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5 0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쁜 놈이 더 잘 잔다 - A Good Night Sleep for the B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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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철 감독의 <나쁜놈이 더 잘잔다>에는 진짜 나쁜 놈들만 나옵니다. 이 영화에는 관객이 심정적으로 기댈만한 인물들이 단 한명도 없습니다. 안타까움이나 동정 같은 감상은 이 영화에 개입 될 여지가 없습니다. 그가 그린 세상은 윤리가 개입할 수 없는 약육강식의 세계니까요. 영화는 평범한 사람의 내면이 어떻게 텅 비어지는가를 보여줍니다.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가 인간이 만들어낸 윤리의 잣대를 넘어선 초월성에 대한 질문이었다면, 권영철 감독은 우리를 둘러싼 시스템에 대해 질문합니다.  

영화는 피투성이가 된 주인공이 돈가방을 챙기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플래시백. 감옥에 간 아버지의 빚을 떠안은 윤성(김흥수)은 어떻게든 동생들을 데리고 한국을 뜰 생각을 합니다. 윤성의 동생 혜경(조안)은 연예계에 데뷔할 요령으로 학교 일진들에게 계속 접근합니다. 윤성의 친구 종길(오태경)은 아마추어 포르노에 출연하며 근근이 해결사 노릇도 하는 양아치입니다. 그리고 종길의 친구 영조(서장원)는 연예 기획자를 사칭하며 멋모르는 여학생들에게 접근합니다. 그는 여자라면 엄마뻘부터 어린 동생뻘까지 가리지 않고 잡니다. 이들은 언제나 한탕을 꿈꾸며 삽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윤성은 도박 사기로 갚아야 할 빚을 모두 날리자 종길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윤성과 종길과 영조는 포르노 영화감독이자 장물애비인 이 감독에게 총을 구하고, 이들은 윤성이 사기를 당한 하우스를 털고 내친김에 시골 신협까지 텁니다. 각자 돈을 나눈 뒤, 윤성은 빚을 갚습니다. 그리고 은행 강도 사건 수사도 흐지부지 되어 모든 것이 잘 해결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윤성의 강도 행각이 들통 나면서, 혜경이 영조를 만나게 되면서 사건은 꼬여가기 시작합니다.   

 

오프닝을 제외한 도입부에서, 윤성은 그저 평범한 20대 청년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부채를 떠안고, 사채업자들의 협박 전화를 견뎌가며 동생들을 먹이며 살아갑니다. 취객을 상대로 한 강도짓이나, 포르노 출연과 같은 유혹이 그에게 다가오지만, 그는 거부합니다. 인간으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아직은 남아있는 것이죠. 반면, 윤성과 종길은 영화에 등장할 때부터 나쁜 놈으로 나옵니다. 이들에게 윤리는 힘과 돈입니다. 물론 이들이 처음부터 모태악인은 아니었을 겁니다. 세상이 그들을 조금씩 선을 넘게 했을 것이고, 이들은 자신들이 어디까지 왔는지 모를 뿐입니다. 

이들을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은, 이 감독, 그리고 이 감독 위에 있는 영화 제작자(기주봉 씨의 특별 출연!)입니다. 이들은 어른으로써 조금의 주저함이나 양심도 없이 세 명, 아니 네 명의 젊은이들을 감자탕 등뼈 빨아대듯이 쪽쪽 빨아댑니다. 윤성 또한 아버지의 빛을 떠안은 경우고, 그런 그를 사기 치는 인물들은 모두 어른들입니다. 그가 정상적인 건강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를 둘러싼 상황은 그에게 나쁜 짓을 강요하고, 그는 점점 나빠집니다. 그는 자기는 망가지더라도 자신의 마지막 보루인 가족만은 지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동생들도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쁜놈이 더 잘잔다>는 할 수 있는 일이란 나쁜 일 밖에 남지 않아 결국 나쁜 놈이 될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의 자멸극입니다. 

  

권영철 감독이 바라보는 세상은 나쁜 놈들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우린 이런 세상에 이렇게 삽니다. 뛰어난 영어 실력, 전문가 뺨치는 사진술, 월등한 체력, 기성세대들이 전문가라 칭하는 능력을 지금의 젊은이들은 (웬만큼)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구직난이라는 이유로) 이 세상에 편입되지 못합니다. 기성세대들은 이 뛰어난 인재들을 통솔하기 위해 모두들 늑대로 만들어 서로 싸우게 하고 상처 입힌 다음에야 아주 조금 썩은 고기를 생색내어 나누어 줍니다. 자기화 시키는 것이죠. 미친 세상을 살아가려면 미쳐야 하듯이, 나쁜 세상을 살아가려면 나빠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이 세상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살아야죠. 이미 오래전에 인간으로서의 위엄과 가치는 돈과 힘이라는 절대 권력에 흡수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오랫동안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이 영화의 진정한 나쁜 놈은, 바로 우리가 살고, 우리가 만든 이 세상입니다. 전체로서의 세상은 이렇게 사회의 끄트머리에 기대어 살고 있는 이런 후줄근한 인생들 몇 명 없어졌다고 해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체로서의 나는 오늘 밤에도 내일 밤에도 어제와 같은 숙면을 취할 것입니다.  

  

 

*덧붙임:  

1. 영화의 착착 들러붙는 대사와 흥미로운 상황 설정은 정말 뛰어났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말 할 것도 없고요. 게다가 총 한 자루로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연출도 정말 뛰어났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초반에 쓰인 관습적인 음악이 좀 아쉽습니다.  

2. 가편집본이 3시간이 넘는다고 합니다. 감독판을 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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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06-23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은 놈은 발 뻗고 자고 때린 놈은 움추리고(?) 잔다는 말과 대립되는 제목일 수 있겠군요.
선과 악의 차이.
나쁜 놈을 양산하는 것은 결국 사회겠지요.
정의되지 않은 사회,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이용당하느냐 이용하느냐의 차이에 선과 악이 나누어지면 결국 이용당하는 입장에서는 험악하고 살아가기 고통스러운 사회가 되겠지요.
사람들이 만나서 인격적으로 대접받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며 살아가는 유토피아같은 사회.
과연 가능할까요?

Seong 2010-06-24 09:05   좋아요 0 | URL
모두가 평등하고 인격적으로 대하는 유토피아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은 얼마나 다른 사람을 서로 인정하고 같이 살아가는 게 아닐까... 그런 게 유토피아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요즘들어 발생하는 강력범죄들을 보면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살고 선을 그어 지냈으면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전형적인 보수주의자의 생각이죠. 저도 나이가 들어가나봐요...

pjy 2010-06-23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워들은 말 있는데 느낌상 비슷한듯..
부패를 근절할 수 없다면 좀 더 부패의 기회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이래서 점점 다 나쁜 놈이 되는거겠죠ㅡㅡ;

Seong 2010-06-24 09:07   좋아요 0 | URL
결국 나쁜놈들만 남게 되면, 그 안에서 또 좋은놈과 나쁜놈이 갈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윤리란 절대적인 게 아니라 상대적인 게 아닐런지...
:)

Mephistopheles 2010-06-24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제목 심하게 공감합니다.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발 뻗고 못잔다..이건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Seong 2010-06-24 15:44   좋아요 0 | URL
그래서 윤리와 도덕, 법이 필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나쁜 놈들은 저런 것 없이도 잘 사니까요.
 

 

 
        〈TWIN PEAKS〉
        시즌 2 
        에피소드 8 (16)
        타이틀 Drive with a Dead Girl
        각본 Scott Frost 
        감독 Caleb Deschanel
        방영일 1990
년 11월 17일 
 

 

   
 

        <시즌 2 지난회 보기>
       
9. May the Giant Be with You
        10. Coma
        11. The Man Behind Glass 
        12. Laura's Secret Diary 
        13. The Orchid's Curse 
        14. Demons  
        15. Lonely Souls

 
   

 

 

 

1. 이야기  

로라 파머의 살인 혐의로 구류중인 벤자민 혼은 동생이자 변호사인 제리 혼을 통해 혐의를 벗어나려 하지만, 상황은 벤자민에게 좋지 않게 흘러간다. 데일은 벤자민이 범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해리 보안관은 벤자민을 구속한다. 밥의 악령이 쓰여 있는 리랜드는 매디의 시체를 골프 가방에 넣고 돌아다니며, 벤자민을 범인으로 몰아넣을 증거를 흘리고 다닌다.  

피트는 벤자민을 찾아와 캐서린의 음성을 들려준다. 그녀는 로라가 죽은 날 벤자민의 알리바이를 입증해주는 대신 유령숲 개발권과 제재소를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한편, 바비는 리오의 구두 속에서 발견한 테이프에 벤자민과 리오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것을 알아내고 협박 편지를 보낼 준비를 한다.  

노마 제닝스의 엄마 비비안이 찾아온다. 그녀는 새 남편 어니와 신혼여행 중이다. 행크는 어니가 자신과 같은 감옥에 있었던 것을 알아채고 그를 이용할 계획을 짠다.  

그날 밤, 매들린 퍼거슨의 시체가 발견된다.  









 

 

2. 딜레마  

데이빗 린치와 마크 프로스트는 ABC의 압력에 못 이겨 결국 밥의 실체를 공개했다. 밥의 등장은 대부분의 시청자들을 경악하게 했으며, 등장에 이어 새로운 살인까지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 충격은 굉장했다. 게다가 TV는 물론, 주류 영화에서도 금기시 되는 수많은 이미지들이 실체를 입게 되었으니, 그 충격의 여파는 엄청났다. 그런데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밥의 정체를 드러냄으로써 수많은 시청자들의 궁금증은 해결됐지만, 시청자들의 궁금증은 다른 문제로 옮겨갔다. "리랜드는 언제 어떻게 잡힐 것인가?"  

이 문제는 데이빗과 마크를 딜레마에 빠지게 했다. 지금까지는 밥의 정체를 숨겼기 때문에, 트윈 픽스의 모든 사람들이 혐의가 있었기에 드라마를 진행할 수 있었지만, 이제 사람들은 리랜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리랜드가 빨리 사라지지 않으면, 시청자들은 오로지 리랜드에게만 집중할 것이고, 지금까지 데이빗과 마크가 공들여 이끌어온 수많은 캐릭터들은 그들의 생명력을 잃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리랜드를 시리즈에서 아웃시키면, 드라마는 지금까지의 동력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누가 로라 파머를 죽였는가?"라는 질문은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시리즈를 이끈 열쇳말이기도 때문이다.  

결국 데이빗과 마크는 로라 파머에 대한 사건을 종결하고 새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결정이 <트윈 픽스>는 물론, 그들 자신에게도 어떤 영향을 끼칠줄은 알지 못했다.  





 

 

3. 보안  

드라마에서는 지난 회에서 밥의 실체를 보여주었지만, 미리 완성된 스크립트에서는 밥의 실체를 숨겨야 했었다. 때문에 시즌 2의 7번 째 에피소드 스크립트에서는 밥을 벤자민 혼으로 묘사 했었고, 이번 8회에서는 빅 에드 헐리로, 다음 9회에서는 다시 벤자민 혼을 밥으로 묘사했었다.  

빅 에드가 범인? 말도 안 돼! 

 

물론 다른 설정으로 접근했을 수도 있다. 밥은 영혼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몸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그러니까 어쩌면, 트윈 픽스의 주민들은 모두들 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후에 이런 설정으로 접근하기도 했으나, 아쉽게도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결국 <트윈 픽스>에서 밥은 리랜드 파머로, 마이크는 필립 제라드로 고착화되고, 데이빗 린치는 극장판 <트윈 픽스>로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펼치려 했으나, 시리즈 마지막 에피소드와 같이 닫힌 느낌의 열린 결말로 끝을 맺었다.  

 

 

4. 정상과 비정상 혹은 이성과 비이성  

데일의 수사 방식은 이제 확실히 정상인의 범주를 훌쩍 뛰어 넘었다. 그는 물리적인 증거 대신 마이크의 직감만을 믿는다. 데일도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알고 있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다. 그는 수사 기록에 자신의 심정을 남긴다.  

다이앤, 지금은 오전 10시, 그레이트 노던 호텔이야. 지금까지 외팔이 사내와 함께 호텔 방에 있었어. 아니 어쩌면 필립 제라드일지도 모르지. 다른 시대, 다른 문화권이었다면, 이 사내는 예언자나 무당... 어쩌면 지도자일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 이 세계에서는 신발 외판원이자 사회의 음지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지.   

 

해리 보안관은 여러 가지 정황과 물증으로 벤자민 혼이 로라 파머의 범인임을 확신하고 그를 구속한다. 데일은 벤자민이 범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벤자민을 풀어주라고 이야기하지만, 해리는 더 이상 이런 비이성적인 수사방식을 참지 못한다.  

이봐요, 쿠퍼, 난 당신의 수사를 매번 도와주려고 노력했고, 항상 당신 옆에 있었어요. 하지만 거인이라든지, 난쟁이, 꿈, 돌 던져서 범인 알아내기, 티베트 같은 이야기는 이제 충분해요. 누군가가 범행을 저질렀으면, 범인을 가두는 게 내 일이에요. 그리고 내 양심상 범인이 확실한 사람을 감옥에서 나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난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우리의 상식으로는 해리 트루먼 보안관의 말이 옳게 들린다. 하지만 트윈 픽스는 우리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마을이다. 우리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으로 트윈 픽스를 둘러싼 숲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혹시 그 반대라면? 숲의 시선으로 트윈 픽스를 바라본다면?  

 

 

5. 아버지와 딸  

벤자민이 로라 파머를 죽인 범인이라는 혐의는 해롤드 스미스의 집에서 발견된 로라의 일기장 때문이다. 대부분이 찢어졌지만, 중요한 부분이 발견 됐다. 벤자민 혼에 대한 언급이다.  

"난 벤 혼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해. 난 벤 혼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를 세상에 밝히고 말거야." 

하지만, 로라는 벤자민 혼에 대해 이야기를 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로라는 벤자민이 애꾸눈 잭을 운영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은 벤자민 혼 본인의 평판은 물론, 그의 가족에게까지 위협이 되는 사실이다. 제 3자가 보기에도 벤자민이 로라를 죽일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하지만, 벤자민은 로라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딸인 오드리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과 질투로 인륜을 저버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데일을 위해 아버지를 신고했다. 사랑의 상실, 질투, 또 다른 사랑의 갈구. 로라 파머는 어쩌면 아프로디테의 화신일지도 모른다.  

 

 

6. 기억할만한 지나침  



매디가 살해된 로라의 집은 <아미티빌 호러>의 귀신들린 집을 연상시킨다. 실제 살인 사건과 기이한 심령 현상은 그 자체로 으스스한 기운을 불러일으킨다. 

 

로라 파머의 살인범이라는 워낙에 엄청난 사실이 밝혀진 터라, 이전에 촘촘하게 직조한 이야기들(장 르노, 윈덤 얼)은 모두 미루어졌다. 그 중 음식 평론가인 엠티 웬츠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는데, 이번 회에서 엠티 웬츠는 비비안임을 친절히 알려준다. 아마도 더 이상의 미스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동안 쌓아온 미스터리를 너무 한 순간에 풀어버리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이때부터 <트윈 픽스>는 어느 정도 자포자기의 순간을 보여준다.  

 

앤디는 루시에게 자신이 루시의 임신 사실을 알고 화를 냈던 이유는 자신이 아이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었지만, 재검사 결과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자신도 루시가 밴 아이의 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를 듣는 루시의 표정이 가관이다.  

 

오드리: 내가 말한 것 때문에 아빠가 체포됐나요?
쿠퍼: 조금은.
오드리: 제가 도움을 드린 셈이네요.
쿠퍼: 그래요.
오드리: 난 아빠가 단지 날 사랑해주길 바랐어요.
쿠퍼: 아버진 당신을 사랑해요.
오드리: 아니에요, 아빤 날 부끄러워해요.
쿠퍼: 그렇지 않아...
오드리: 말씀드릴 게 있어요. 그때, 내가 애꾸눈 잭에 있었을 때, 난 절대로 아무 일도...
쿠퍼: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다 알고 있으니까.
오드리: 그래도...
쿠퍼: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 다 알고 있어요.  

오드리가 데일을 찾아와 아버지에 관한 일과 애꾸눈 잭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스크립트 상에서는 오드리와 데일의 로맨스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화면에서 보이는 상황은 무언가 어정쩡한 모습인데, 오드리 혼 역의 셔릴린 펜과 데일 쿠퍼 역의 카일 맥라클란이 둘의 로맨스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배우들의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데일 쿠퍼라는 캐릭터의 성격에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마크 프로스트를 비롯한 작가들은 로라 파머의 사건이 해결된 후 오드리와 데일의 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했으나, 배우들의 거부로 다른 플롯을 작성해야 했다.  

 

 

7. 덧붙임  

a. 대부분 사실에 기초하여 썼고, 개개의 세부사항은 사실에 부합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사실의 전후부분이 바뀐 경우도 있습니다.  

b. 콘텐츠 중 캡처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해당 저작권사에게 있습니다.  

c. References
- 『Lynch on Lynch, Revised Edition』 크리스 로들리, Faber & Faber
- 『데이빗 린치의 빨간방』 데이빗 린치, 곽한주 옮김, 그책
- 『TWIN PEAKS #2.008』 스크립트, 4th Revisions
- 〈Twin Peaks: Definite Gold Box Edition〉 Lynch/Frost Productions, CBS DVD, Paramount Home Entertainment
-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
- IMDB http://www.i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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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만자 2018-01-16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배우들의 거부가 아니라 다나 역할의 배우가 카일과 사귀고 있어서 반대했다고 하더군요
 

『다세포소녀』는 B급 달궁(채정택)의 온라인 연재만화로 시작했습니다. 딴지일보에서도 연재했던 기억이 있는데, 무쓸모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성(性)에 대한 이야기를 매회 풀었습니다. 교복 입은 고등학생과 한계를 넘어서는 수위 때문에 변태만화라는 오명도 들었지만, 명랑만화와 순정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의 필력 때문에 연재 당시 엄청난 열광을 이끌어냈던 만화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차용한 이재용 감독이 만든 <다세포소녀>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만화에서는 다 가능했던 이야기들이 배우들의 연기로 육신화하면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로 변질됐던 것이죠. 이재용 감독은 그동안 작업했던 로맨스라는 장르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다세포 소녀>를 선택했지만, 영화는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김옥빈)의 로맨스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장편 영화라는 함정이 있습니다. 원작은 에피소드별로 진행이 되지만, 장편 영화는 기승전결의 내러티브가 필요한 법이죠.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억지 결말식의 이무기(?!)의 등장은 이 영화를 더욱 기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반면에, 극장판과 거의 같이 작업을 시도한 시리즈 <다세포소녀>는 원작의 흥취를 담으면서 시리즈의 매력을 흠뻑 맛보게 한 작품입니다. 원작의 인물과 상황을 차용하지만, 그 해석은 신선하고 각 에피소드별로 장르를 달리해 "골라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며칠 전 <다세포소녀> 시리즈를 보던 중 반가운 얼굴이 눈에 띄었습니다. <똥파리>, <집나온 남자들>의 배우(이자 감독)인 양익준 씨의 모습이었죠. 물론 고등학생(!) 역입니다. 지금 본다면 뜨악한 설정이었겠지만, 당시엔 무명이라 어느 정도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우선호 감독의 <뽀르노의 추억> 에피소드는 말 그대로 학창시절의 포르노테이프에 대한 수다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담론으로 가득한 무쓸모 고등학교에서 공부만 하는 열남(양익준)은 이런 이야기들에서 제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열남은 포르노테이프에 대한 잊지 못할 추억이 있습니다. 

  

열남이 어렸을 때, 열남의 아버지(박광정)는 장롱 속에 무엇인가를 숨겨놓고 있습니다. 열남은 장롱 속을 궁금해 하지만, 열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열남은 손재주가 좋은(?) 친구를 데려와 장롱을 열어봅니다. 그 안에는 엄청난 양의 비디오테이프가 있었고, 열남은 더 이상 장롱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열남은 친구들과 돈을 모아 세운상가에 가서 포르노를 살 계획을 합니다. 마침 아이들에게 접근하는 어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른이 열남이 아버지입니다.   







 

 

<뽀르노의 추억>은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반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대부분(?) 경험해봤음직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뻔한 이야기가 울림을 갖는 이유는 지금은 사라진 포르노‘테이프’, 세운상가, 그리고 연기자 박광정 씨에 대한 회한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선호 감독은 지금은 모두 사라져버린 존재들에 대한 강한 회한을 학창시절의 포르노테이프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선호 감독은 세운상가가 철거될 줄은, 박광정 씨가 유명을 달리할 줄은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옵니다. 종묘를 앞에 두고 세운상가 계단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은 모두 사라진 풍경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련하고 애틋한, 상처뿐인 풍경.   







 

이제 포르노테이프라는 물리적 저장매체는 야동이라는 파일로 존재합니다. 세운상가는 철거되었고 그 자리엔 공원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하지만 아들에게 욕구(포르노테이프)와 돈을 조달하는 아버지의 자리는 다른 것이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곳은 처음부터 빈자리로 남아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그 자리를 채워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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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6-22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폐암이었죠.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비굴함과 섬찟함을 함께 보여주는 보기 드문 배우였는데. 종종 드라마나 영화의 조연의 모습을 보며 저 배역에 박광정씨였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Seong 2010-06-23 05:31   좋아요 0 | URL
생각할 때마다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ㅠㅠ
 
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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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이야기꾼(절대 폄하하는 말이 아니다) 스티븐 킹의 일생에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 때문은 아니더라도, 장르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리처드 매드슨은 언젠가는 꼭 한 번 겪어야할 고전의 반열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스스로 전설이 된)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를 2010년의 시선으로 읽는 것은 솔직히 아주 맥 빠지는 일이다. 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매체를 달리한 영화와 음악에서까지 원작의 영혼을 강탈한 수많은 아류들을 섭렵한 후에 다시 원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결말을 다 알고 보는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보다 더 지루한 법이다. 하지만, 그런 지루함을 감수하고 원전으로 돌아가는 까닭은, 다른 아류에는 없는 태초의 아이디어가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에 혼자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와 전설로만 존재했던 흡혈귀들의 이야기를 서로 한데 섞어 현실적인 이야기로 끌어나가는 작가의 실력은 책장의 첫 부분부터 강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보통 이런 비정상적인 이야기들은 사실적이지 못하고 어느 정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어서 쉽게 몰입하기 어려운데, 리처드 매드슨은 환상적인 요소를 과학적인 분석으로 돌려놓아 생생한 분위기를 간직했다.  

(핵전쟁 후라는) 묵시록적 배경에 (흡혈귀라는) 두려운 소재를 섞어 놓았지만, 소설의 정조는 혼자 살아남은 사람의 쓸쓸함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중간에 등장하는 강아지에 대한 에피소드는 읽는 이의 절창을 뜯어낼 정도로 가장 뭉클한 순간이다. 대화 없이 강아지에 대한 행동의 묘사만으로 이런 숭고한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분명 그가 천부적인 작가임을 방증하는 것임에 다름없다.  

리처드 매드슨은 『나는 전설이다』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구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지금은 워낙에 많이 다루어 위력이 많이 줄었지만, 이 소설이 나온 1950년대에는 상당히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을 것 같다. "나만이 정상이고 나와 다른 사람은 비정상"이란 기준은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본 서구사회의 오랜 정신이다. 하지만 이 관계는 어느 순간 역전당하고 정상과 비정상이란 구분은 무의미해지는 상태에 이른다. 리처드 매드슨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보다 20여년 앞서 이야기를 꺼낸 셈이다. (물론 비약이다.)  

황금가지에서 출간한 『나는 전설이다』에는 「나는 전설이다」말고도 다양한 단편들이 수록 되어 있다. 이 단편들 또한 흥미진진한데, 주인공의 망상을 다룬 작품부터 흑마술, 귀신 들린 인형, 귀신 들린 집, 무의식의 환영,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 기괴한 장례식 등을 다룬 각각의 단편들은 강렬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에 수록된 중단편들은 이미 영혼을 강탈당한 작품들이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라도 기시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친숙한 작품들이지만, 아류들에는 없는 '그 무엇'이 담겨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고전을 찾아 읽는 게 아닐까. 『나는 전설이다』는 충분히 고전의 반열에 오를 자격이 있는 소설이다.  

 

 

*덧붙임: 

원문을 접하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번역이 거칠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군요. 매끈한 문체가 좀 뭉개진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가장 아쉬운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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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6-21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책은 영화로도 유명한데 지금까지 3편정도 영화화 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Seong 2010-06-22 09:02   좋아요 0 | URL
윌 스미스 주연한 영화만 봤는데, 마지막은 정말 깨더군요! "전설"을 "희생"으로 만들어버린 할리우드의 안전한 성서귀의라 할까.. ㅠㅠ

L.SHIN 2010-06-21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원작을 접하지 않고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로 처음 만났었습니다. 2007년이었던가.
혼자 심야 영화를 보고 차를 끌고 돌아가는 길에 느껴진 그 감동을 잊을 수 없었어요.
나는 그가 개를 잃고 DVD 대여점 안에서 여자 마네킹한테 Say Hello to me 하고 울 때
가장 뭉클하더군요. 인간은 단 하루도 혼자 살 수 없는 거겠죠.

아, 리처드의 [줄어드는 남자] 읽어보셨나요? 그것도 신선하던데 말입니다.(웃음)

Seong 2010-06-22 09:04   좋아요 0 | URL
영화에서 가장 애틋한 장면이었던 것 같아요. <캐스트 어웨이>에서 미리 사용했기 때문에 그 감동은 조금 반감되었지만... ㅠㅠ

『줄어드는 남자』는 L.SHIN 님 말 듣고 구매하려고 했는데, 조영학 씨 번역이라 조금 망설이고 있습니다. 번역서를 읽자니 답답하고, 원서를 읽자니 실력이 모자르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