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N PEAKS〉
        시즌 2 
        에피소드 9 (17)
        타이틀 Arbitrary Law
        각본 Mark Frost & Harley Peyton & Robert Engels
        감독 Tim Hunter
        방영일 1990
년 12월 1일 
 

 

   
 

        <시즌 2 지난회 보기>
       
9. May the Giant Be with You
        10. Coma
        11. The Man Behind Glass 
        12. Laura's Secret Diary 
        13. The Orchid's Curse 
        14. Demons  
        15. Lonely Souls
        16. Drive with a Dead Girl

 
   

 

 

 

1. 이야기  

메들린 퍼거슨의 죽음이 로라 파머를 죽인 살인범의 동일 소행이란 것이 밝혀지지만, 사건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벤자민 혼이 유치장에 있을 때 벌어진 것으로 판명되어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벤자민 혼은 로라가 죽던 날 알리바이를 입증받기 위해 캐서린에게 유령숲 개발권과 제재소를 모두 넘기지만, 캐서린은 알리바이를 입증하지 않는다.  

다나는 무료 급식을 배달해준 트레먼드 부인을 데일 쿠퍼와 함께 찾아가 보지만, 트레먼드 부인은 몇 년 전에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대신 해롤드가 죽기 전에 보낸 편지를 받는데, 그 안에는 로라가 죽기 전에 쓴 일기가 들어 있었다. 일기장에서 로라는 데일과 같은 꿈을 꾸었으며, 데일에게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혔다.  

데일은 그만의 방법으로 로라를 죽인 범인을 알아내고 그를 유치장에 가둔다. 유치장에 갇히자 밥은 그 존재를 드러내고, 테레사 뱅크스, 로라 파머, 매들린 퍼거슨의 살인 혐의를 인정한다. 그는 지금은 숙주의 몸을 떠나지만, 조만간 살인을 하겠다고 예고한다.   







 

 

2. 도망자  

밥의 실체를 드러낸 데이빗과 마크는 더 이상 이야기를 끌지 않고 바로 결말로 이끌어간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끝난다는 의미다. 데이빗은 종종 <트윈 픽스>를 TV 드라마 <도망자(The Fugitive)>와 비교했었다. <트윈 픽스>의 밥은 <도망자>의 외팔이 사내와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다. <도망자>에서 리처드는 매 회 자신의 부인을 죽인 외팔이 사내를 추적하면서 새로운 사건을 겪는다. 사건이 해결되면 외팔이 사내는 사라지고, 그는 또 추적을 한다. 외팔이 사내가 잡히면 드라마는 끝나는 것이다.  

오리지널 TV 드라마 <도망자>의 외팔이

 

하지만 그들은 이 드라마를 끝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로라 파머 혹은 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트윈 픽스에 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이빗과 마크는 로라 파머와 살인범에 관한 이야기를 이쯤에서 정리하고, 밥과 마이크가 온 다른 세계(Another Place)에 대한 이야기로 드라마를 선회하기로 한다.  

 

 

3. 퍼즐  

의미 없는 상상이지만, 데이빗 린치가 이 에피소드를 감독했더라면 원래의 스크립트와 얼마나 달라져있을까 생각해본다. 아마도 지금까지 던져진 모든 미스터리는 열린 채로 두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번 에피소드의 감독인 팀 헌터는 세 명의 작가가 쓴 스크립트의 내용을 그대로 따랐다. 세 명의 작가들(시리즈의 크리에이터인 마크 프로스트, 드라마의 제작자인 할리 피튼, 전체 이야기를 관리하는 로버트 엥겔스)은 지금까지 드라마에서 언급됐던 미스터리를 모두 설명한다. 지금까지 쌓아온 미스터리가 모두 휘발되는 느낌이 들어 아쉬운 면도 있지만, 데이빗이 감독한 마지막 에피소드에 대한 반응을 생각해보면 괜찮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정답이나 설명이 필요한 법이니까.  

 

3-1. J'ai une ame solitaire (I'm a lonely soul)  

시즌 2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트레먼드 부인의 손자가 읊었던 이 알 수 없었던 불어 문구는 "나는 외로운 영혼"이라는 뜻으로 해롤드 스미스의 유서에서도 발견되었다. 트레먼드 부인은 다나를 해롤드 스미스에게 연결시켜 주었고 이 문구는 다나와 데일이 로라가 죽기 전날의 일기를 발견하게 한다.   







 

3-2. 빨간방  

로라의 일기장에서 로라는 데일이 꾼 꿈과 같은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녀는 밥이 마이크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꿈에서 데일을 마이크로 착각하고 데일에게 범인이 누구인지를 이야기했다. 데일과 로라는 같은 꿈을 꾸었다.   



 

3-3. 반지  

시즌 2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거인은 자신이 현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데일의 반지를 가져갔다. 데일이 범인을 알아내자 거인은 다시 찾아와 데일에게 반지를 건네준다.  





 

3-4. 난쟁이  

"자네가 좋아하는 껌이 다시 유행을 탈거야." 이 말은 시즌 1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난쟁이가 데일에게 했던 말이다. 이 의미 없는 말이 밥을 검거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딸이 죽고 나서 리랜드는 아무 곳에서나 춤을 추었는데, 빨간방의 난쟁이 역시 춤을 추었다.  







 

3-5. 살인예고  

시즌 1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밥은 데일의 꿈에 나와서 "또 다시 살인을 저지를 것을 약속하지"라고 살인을 예고했다. 밥의 영혼에 잠식당한 리랜드 역시 똑같은 말을 한다. 밥의 머리카락은 회색이고, 살인을 저지른 리랜드 역시 머리가 하얗게 탈색됐다.    



 

 

4. Magic  

범인을 잡기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썼던 데일은 마지막으로 모든 용의자들을 한데 불러 모아 즉흥적인 방식(Arbitrary Law)으로 범인을 색출한다.  

"이틀 전, 한 젊은 여인이 로라 파머와 똑같은 방식으로 살해되었습니다. 난 이 방 안에 살인자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연방수사관으로써, 난 풀기 어려운 질문들에 대한 간단한 대답을 찾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로라 파머의 살인범을 추적하면서, 난 FBI의 수사 방식, 추리, 티베트식 방법, 직관, 운 등을 사용했어요. 하지만 지금 난 새로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지칭할 말이 생각나지 않으니, '마술'이라고 하죠." 

 

용의자 혹은 우연히 이곳에 오게 된 사람은 벤자민 혼, 리랜드 파머, 바비 브릭스, 리오 존슨, 브릭스 소령, 최고령 웨이터, 그리고 빅 에드 헐리다. 빅 에드를 제외하고는 모두 직간접적으로 로라 파머의 죽음 혹은 초자연적인 현상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다. 빅 에드가 이 자리에 오게 된 이유는, 밥의 실체에 대한 보안 때문이다. 빅 에드는 지난 회 스크립터에서 밥의 악령이 쓰인 존재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결자해지 차원에서 출연하지 않았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5. 저주  

제임스와 다나는 매들린이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찾아가서 작별인사를 하지 않았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매들린이 사는 미줄라가 트윈 픽스에서 가깝기 때문이었지만, 실은 제임스와 매들린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이었다. 매들린이 트윈 픽스를 떠나는 이유도 실은 제임스 때문이다. 제임스와 다나는 매들린을 만나 작별인사를 건네는 대신에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사이에 매들린을 죽임을 당한다. 이들은 로라와 매들린(더 나아가서는 해롤드 스미스까지)의 죽음이 모두 자기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나: 무슨 말이야? 우리 때문이라는 거야?
제임스: 우린 이러면 안 돼. 이건 옳지 않아.
다나: 그럼 우리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 그럼 우리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
제임스: 난 떠나야해. 난 떠날 거야.
다나: 제임스, 가지마.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
제임스: 우리랑 상관없어. 그렇지? 아무것도 우리랑 상관없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고통 받더라도 우리만 행복하다면 아무 상관없지.
다나: 제임스, 가지마. 날 두고 가지마.
  

결국 제임스는 모든 게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고 트윈 픽스를 떠난다. 완전한 시즌 아웃이지만, 제임스는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제임스의 재등장은 드라마의 흐름에 커다란 패착을 끌고 온다.  



 

 

6. 전대사(全大赦)  

모든 범행을 자백한 리랜드 아니 밥은 자살을 시도한다. 결국 밥의 영혼은 떠나가고 제정신이 든 리랜드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으며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죽어가는 리랜드를 품에 보듬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데일 쿠퍼의 모습은 수사관의 행동이라기보다는 카톨릭 신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리랜드를 천국으로 인도하며, 딸 로라에게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다. 리랜드의 영혼은 로라의 영혼을 만났다. 그런데 리랜드와 로라가 있는 곳은 어디일까?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천국(Heaven)인 것 같지만, 이들은 다른 곳에 머물러 있다. 천국도 지옥도 아닌 이 새로운 공간은 다음 회에서 인디언인 호크 보안관보가 설명한다.   



 

위로부터 <트윈 픽스>, 맨 아래 <엑소시스트(The Exocist)> 

  

 

7. 오멘  

사건을 정리를 하자면 이렇다. 악령 밥은 리랜드의 몸에 들어가 그를 조종했다. 그리고 밥은 리랜드의 몸을 빌려 테레사 뱅크스를 살해하고, 리랜드의 딸 로라 파머를 강간하고 살해했다. 그리고 로라 파머를 떠올리게 하는 사촌 매들린 퍼거슨도 살해했다. 숙주의 정체가 밝혀지자 밥은 리랜드를 죽이고 다른 영혼을 찾아 떠났다. 이 이야기를 뒤집어보면 이렇다. 리랜드 파머는 정신이상(혹은 이중인격)을 빙자하여 수년간 자신의 딸을 강간하고 딸과 비슷한 여자들을 살해했다.  

이 이야기는 리처드 도너 감독의 <오멘(The Omen)>에서 한 이야기와 같은 구조다. 쏜 대사는 태어난 아들이 죽자 아이를 입양하는데, 이 아이가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고 제거하려하지만 실패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뒤집어보면 이렇게 볼 수 있다. 쏜 대사의 아들이 죽어 입양을 했는데, 주변에서 벌어지는 나쁜 일들이 입양한 아이 때문이라 생각하고 정신 착란으로 아들을 죽이려 했지만 다행히 실패한다. 이 이야기는 관점을 달리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악령을 믿지 않고 증거를 우선한 해리 트루먼 보안관도 이 같은 사실에 적잖이 당황한다. 그런 해리에게 데일이 이야기한다.  

트루먼: 난 이 숲에서 평생을 살아왔어요. 난 이상한 이야기들을 수도 없이 들었고, 수도 없이 봤어요. 하지만 이번 사건은 너무 벗어났어요. 도저히 믿기 힘들군요.
쿠퍼: 그러면 자기 친딸을 강간하고 살해한 사람이 있다는 걸 믿는 게 쉬운가요? 그게 더 받아들이기 편한가요?
  

어쩌면 밥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행(罪)을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다. 악의 조종과 자신의 의지가 적당히 뒤섞인 그런 형태로, 밥은 또 다른 악행을 저지를 것이다. 우리는 테레사 뱅크스와 로라 파머 그리고 매들린 퍼거슨을 살해한 밥을 찾았을 뿐이다. 악은 이제 또 다른 악을 꿈꾼다.  

 

 

8. 기억할만한 지나침  

"굉장한 변장이야, 캐서린." 

일본인 기업가 토지무라로 변장한 캐서린 마르텔이 처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벤자민 혼이다. 그녀는 벤자민에게 복수할 생각을 가지고도 있었지만, 벤자민이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는지 떠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벤자민은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전까지 전혀 알아채지 못하지만, 남편 피트 마르텔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봤다. 아마도 이런 요소들이 그녀를 더욱 독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 아무래도 그랬던 것 같아. 피츠버그에서처럼 말이야, 그렇지, 쿠퍼?" 

밥은 이미 수년 전 데일 쿠퍼와 파트너 윈덤 얼과 관련한 사건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시즌 1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 데일이 언급한,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와도 관련이 있다. 밥은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신봉하는 데일 쿠퍼와 실존하는 증거를 신봉하는 해리 트루먼의 모습은 <엑스 파일>의 멀더와 스컬리의 관계로 발전한다.  

 

 

9. 덧붙임  

a. 대부분 사실에 기초하여 썼고, 개개의 세부사항은 사실에 부합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사실의 전후부분이 바뀐 경우도 있습니다.  

b. 콘텐츠 중 캡처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해당 저작권사에게 있습니다.  

c. References
- 『Lynch on Lynch, Revised Edition』 크리스 로들리, Faber & Faber
- 『데이빗 린치의 빨간방』 데이빗 린치, 곽한주 옮김, 그책
- 『TWIN PEAKS #2.009』 스크립트, 4th Revisions
- 〈Twin Peaks: Definite Gold Box Edition〉 Lynch/Frost Productions, CBS DVD, Paramount Home Entertainment
-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
- IMDB http://www.i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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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6-30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충격적인(그때 당시) 시리즈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Seong 2010-07-01 08:23   좋아요 0 | URL
저도 마지막 회는 볼 때마다 소름이... 스크립트에서는 분명 분위기가 '다음 회에서 계속'이었는데, 결과물은 '이제 끝'하는 느낌이어서 더 당혹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스플라이스 - Splic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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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빈센조 나탈리 감독의 영화 <스플라이스>는 인간이 창조한 생명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약회사의 과학자 커플 클라이브(에드리언 브로디)와 엘사(사라 폴리)는 난치병 치료용 단백질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여러 종류의 생명체에서 DNA를 뽑아 결합(스플라이스)시킨 후 진저와 프레드라는 단백질 덩어리 생명체를 만들어내는데 성공을 합니다. 성공에 고무된 클라이브와 엘사는 인간의 DNA를 결합시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냅니다. 인간도 동물도 아닌 새로운 생명체를 이들 커플은 '드렌'이라는 이름을 짓고 마치 자식 같이 정성껏 키웁니다. 그러나 드렌이 자라면서 클라이브와 엘사 사이에 알 수 없는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고, 결국 이들은 드렌을 제거하기로 결정합니다. 

 

<스플라이스>는 4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이야기는 서로 섞여 있는 게 아니라 단선적으로 진행이 됩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행되면, 턴을 하는 방식입니다. 다종의 유전자가 결합된 이야기답게, 영화는 다양한 이야기를 결합시켜 진행합니다.  

첫 번째는 오만한 창조주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실험을 하면서 윤리 보다는 호기심에 더 관심을 둡니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회사의 성공, 그리고 자신들의 성공입니다.  

두 번째는 아이를 거부하는 젊은 부부들의 이야기입니다. 엘사는 아이를 낳기를 거부합니다. 과학자로서 모든 상황을 통제해온 그녀에게 아이는 감당 못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아이가 아닌 (말을 잘 듣는) 애완동물입니다. 드렌이 보통의 포유류 같이 기본적인 지능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있어서 축복으로 여겨집니다.  

세 번째는 사춘기를 맞이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드렌은 엄청난 성장 속도를 보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세 성인의 육체에 버금가는 성장을 합니다. 하지만 급격한 신체의 변화와 유아에 가까운 지능은 종종 드렌이 분노에 빠지게 합니다. 우리 역시 사춘기를 맞이했을 때, 아이에서 어른으로의 과도기를 겪을 때, 알 수 없는 분노와 흥분을 겪었듯이 드렌 역시 이런 감정을 겪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부모가 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클라이브와 엘사가 평상시에 하는 대화를 들어보면 절반이 욕입니다. 이들은 입에 "Fuck!"를 달고 삽니다. 물론 직장에서는 안 그러지요. 집에서, 아이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이들은 서로 헐뜯고 비난합니다. 결국 집안 꼴은 엉망이 되고, 드렌은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쉽게 말해 아동학대죠. 하지만 클라이브와 엘사는 드렌을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드렌은 인간이나 자식이 아닌, 만들어진 괴물일 뿐이니까요. 결국 이런 오해와 몰이해는 네 번째 이야기에서 커다란 비극을 불러일으킵니다.  

저는 이 영화를 굉장히 어정쩡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비슷한 소재인 <스피시즈>와 같은 장르적인 쾌감도 없을뿐더러, 상당히 불쾌한 느낌만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영화의 중심은 새로이 창조된 생명체 드렌이지만, 드렌은 엘사의 말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존재로 나옵니다. 그저 이해할 수 없는 멋진 비주얼을 가진 독특한 생명체로서만 존재기에 관객들은 감정에 기대어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이야기의 톤이 바뀌는 바람에 캐릭터의 일관성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클라이브와 엘사의 행동은 각 이야기 안에서는 납득할만한 행동을 하지만, 전체로서의 이야기로 보자면, 전혀 다른 행동을 하는 인물들로 보입니다. 이것은 영화보다는 드라마에 가까운 이야기 구조입니다. <스플라이스>는 4부작 미니시리즈를 거칠게 편집해 극장에서 상영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부정적인 평으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대해 글을 쓴 것은 드렌이라는 크리처(혹은 신인류) 때문입니다. 조류, 어류, 파충류, 갑각류 등의 특징이 살아 있는 드렌의 모습은 화면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특히 영화의 중반부와 마지막에 보이는 드렌의 날개는 황홀함과 공포를 함께 불러일으키는, 숨을 멎게 하는 명장면입니다. 하지만, 비주얼만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스플라이스>는 분명 더 밀고 나갈 수 있는 영화였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가능성이 가능성으로만 머무르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아쉬운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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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랜드 엠파이어 - Inland Empir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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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영화는 결국 이야기입니다. 감독이 실험영화처럼 내러티브를 의도적으로 배제시킨다 하더라도, 이미지와 사운드의 나열만으로 영화를 꾸민다 하더라도, 잘 짜인 단선적인 이야기의 편집 순서를 엉망으로 붙인다 하더라도, 결국 관객은 그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시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한 번에 감상해야하는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데이빗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를 감상하는 것은 정말 새로운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작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불친절한 이야기의 잉여 부분을 영화의 초반과 후반에 넣어 관객들이 스스로 다양한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게 했다면, <인랜드 엠파이어>는 그 잉여 자체가 내러티브의 한 주축이 되어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얇게 펼쳐진 교집합과 여집합의 이야기였다면, <인랜드 엠파이어>는 꾹꾹 눌러 담은 다층으로 중첩되는 이야기입니다.

<인랜드 엠파이어>에는 굉장히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하기 전에, 데이빗 린치는 서로 상반된 이미지와 사운드를 들려줍니다. 화면은 레코드가 플레이되는 장면인데, 소리는 라디오 방송의 DJ 멘트가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연속되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흘러나옵니다. 폴란드어로 진행되는 창녀와 한 남자의 이야기, 그리고 호텔방에서 TV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한 여자, 그리고 토끼들이 벌이는 시트콤, 입구에 들어가고 싶은 폴란드어를 하는 '악령'의 이야기들이 모두 나온 후에야 이 영화의 중심 내러티브인 여배우 니키(로라 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니키는 <슬픈 내일의 환희>라는 영화에 출연합니다. 그런데 촬영에 들어가기 전, 감독(제레미 아이언스)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슬픈 내일의 환희>는 폴란드 영화 <47>의 리메이크인데, 원작은 영화가 완성되기 전에 주연배우들이 살해당해서 공개되지 못하고 사장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니키는 영화를 촬영하면서 영화 속의 현실과 영화 속의 영화를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영화와 현실이 서로 섞이기 시작하는 것이죠.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다분히 평면적인 내러티브를 취했다면, <인랜드 엠파이어>는 3차원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니키/수잔의 관점으로만 이해하면 해결하지 못하는 잉여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너무나 많은 부분이 이야기와 상관없는 부분으로 여겨지게 되어 영화 자체가 (의미 없는 쇼트들의 연속으로)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러니 관객들은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앞부분의 잉여들을 스스로 덧붙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구조가 <멀홀랜드 드라이브>처럼 앞뒤로 짜 맞추는 게 아니라 앞뒤 위아래로 짜 맞춰야 합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주연배우를 중심으로 한 역할 바꾸기 놀이였다면, <인랜드 엠파이어>는 이 역할 바꾸기 놀이에 (존재하지 않는) 원본과 리메이크의 관계까지 탐색한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평면성이 아닌 이야기의 입체성. 데이빗 린치는 (보이는) 이미지로서의 3-D가 아닌, (이야기) 구조로서의 3-D영화를 만든 셈입니다.

물론 굳이 영화를 이렇게까지 힘들게 볼 필요가 있는가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데이빗 린치는 아무 생각(혹은 비판) 없이 영화를 보는 것을 경계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는 것은 다른 이의 인생을 간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영화를 바라보는 것은 다른 이의 인생을 단지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영화가 진행된 지 140분이 지나서 영화 속 영화의 수잔(로라 던)이 하는 말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날 내가 일어나자마자 보게 되는 건 어제 있었던 일이라는 거죠. 꼭 내일을 생각하려고 애쓰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오늘이란 건 스쳐 지나가죠. 아들이 죽고 나서 힘든 시기를 보냈어요. 내 주변의 일들이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 나와 아무 상관없는 듯 지냈어요. 그냥 바라만 보면서... 극장에서 영화를 보듯이... 영화가 끝나 불이 켜지기 전까지 말이죠. 난 멍하니 앉아 의아해 하는 거예요. 어쩌다 이렇게 됐지?"

데이빗 린치가 일반적인 극영화의 문법을 벗어나 거의 실험영화에 가깝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디지털 비디오(DV) 때문입니다. 그는 디지털 비디오를 접하고 나서 "다시는 필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필름은 너무나 많은 인원이 필요하고 물리적 연속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디지털은 이런 제약이 없습니다. 데이빗은 매일 시나리오를 써가며, 소수의 인원으로 퀼트를 완성해 나가듯이 영화를 찍었습니다. 마치 꿈을 꾸듯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엮어가면서.

그가 만든 <인랜드 엠파이어>는 분명 새로운 형식의 영화입니다. 너무나 한심한 단선적인 이야기들이 범람하는 영화들 사이에서 데이빗 린치의 영화들은 확실히 인상적입니다. 데이빗 린치는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이라는 최신의 장비로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21세기의 영화는 <아바타>가 아니라, 이미 <인랜드 엠파이어>에서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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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6-28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정말요? 솔직히 전 아바타 별로였답니다.
데이빗 린치가 작품성은 앞서 간다고 보여집니다.
좀 끌리긴 하네요.^^

Seong 2010-06-29 08:39   좋아요 0 | URL
제임스 카메론이 대중에게 보이기위한 영화를 만든다면, 데이빗 린치는 대중이 따라오길 바라는 영화를 만드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호불호가 너무나 확실히 갈리긴 하지만, 그 꿈같은 이미지와 사운드는 정말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고유한 문체인 것 같습니다. :)
 
나쁜 놈이 더 잘 잔다 - A Good Night Sleep for the Ba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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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세상을 살아가는 나쁜 우리들. 권영철 감독의 나쁘지만(!) 흥미로운 데뷔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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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나 영화를 보고 내가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지역은 대부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미국에 가게 된다면 이상한 사람들과 악령들로 넘쳐나는 마을 트윈 픽스(드라마 <트윈 픽스>)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사람들이 가득한 스프링필드(<심슨 가족>이 사는 바로 그 마을)를 꼭 한 번 들러보고 싶고, 일본에 간다면 소용돌이로 가득 찬 쿠로우즈 마을(이토 준지 『소용돌이』)에 꼭 한 번 들러보고 싶지만, 차라리 아틀란티스 제국이나 버뮤다 삼각지대로 가는 게 훨씬 더 실현가능성이 큰 것 같다. 물론 현실에 존재하는 곳이 있기는 하다. 파리의 퐁네프다리랄지(레오스 카락스 <퐁네프의 연인들>), 홍콩 중경 거리에 있는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왕가위 <중경삼림>) 같은 곳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지만, 지금은 영화에서 느꼈던 아우라는 모두 사라지고 생경한 모습만이 남아 있다. 이 잔인한 예술가들은 단순한 배경에서도 정수라 불리는 것들을 다 뽑아내고 껍데기만 남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공간이 존재한다. 어쩌면 그 반대일수도 있다. 평범한 일상을 특별한 감정을 이입하게 해서 바라보게 한 후, 일상은 사라지고 그 특별했던 느낌만이 남는 경험. 소설이나 영화에서 다룬 공간은 함부로 찾아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지금까지 작품을 통해 쌓아온 나(와 작가)의 감정을 부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경험은 꼭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은 것 같다. 책을 읽고, 그 배경이 된 곳을 가 보았더니 진짜로 그와 비슷한 감흥을 느꼈던 일이 있었으니까. 바로 신경숙 작가가 「깊은 숨을 쉴 때마다」에서 묘사한 제주도, 성산포가 그렇다.  

이 책을 읽었던 때는, 군대 시절, 아마 1999년 가을 혹은 겨울이라고 생각한다. 군대, 특히 소대에 있는 책장은 정말이지 별 희귀한 책들이 모여 있기 마련인데, 90% 이상은 쓰레기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참혹했다. 그나마 가장 많이 읽힌 베스트셀러가 이현세 작가의 『까치병장』과 같은 정훈만화였으니, 상황이 어떤지는 대충 감이 올 것이다. 그래도 그 빈약한 책장 안에 보석 같은 작품이 있었으니,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과 신경숙 작가의 「깊은 숨을 쉴 때마다」가 그랬다. 특히 「깊은 숨을 쉴 때마다」는 80여 페이지에 불과한 이 단편은 이상하게도 읽는 내내 울컥하는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제대할 때 무례하게도 이 두 권을 몰래 가져오는 범죄를 저질렀다. 미안하다, 전우들이여. 대신 그대들의 뜨거운 청춘을 식혀줄 도미시마 다께오의 불후의 명작 『여인추억』 시리즈를 대신 서가에 꽂아놓았으니 그렇게 불만은 없었으리라 본다.  

이 책을 들고 제주도에 간 것은 제대 후 그해 겨울이었다. 당시 나는 5년간의 지독하고도 일방적인 짝사랑을 해왔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감정이 사랑이 아닌 집착임을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내 안의 정제되지 않은 감정들이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그 때, 나는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라는 말을 남기고 홀로 겨울 여행을 떠났다. 그 때 생각으로는 멋진 결말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쪽팔린 일이 아닐 수 없다. S야, 네가 끝까지 날 상처 입히지 않게 배려한 것은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지만, 가끔은 네가 조금 일찍 내게 야멸치게 굴었다면 너에 대한 내 집착이 조금은 일찍 사그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하곤 해. 뭐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니.  

「깊은 숨을 쉴 때마다」는 신경숙 작가의 자전 소설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녀는 소설의 힘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쓴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처음은 제주 공항에서 시작한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작가는 성수기가 다 지난 초가을에 이곳 제주도에 왔다. 뚜렷한 목적은 없고, 추석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녀에게 가족은 굴레, 희생, 사랑, 증오가 뒤섞인 존재들이다. 잠시 가족을 피하기 위해 온 이곳 제주도에서, 그녀는 가족은 물론이고 지금껏 흘려보낸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  

그녀가 먼저 간 곳은 협재다. 원래는 함덕에 가려 했으나, 택시 운전사의 만류로 협재에 간다. 그리고 그녀는 협재의 아름다운 풍경에 흠뻑 젓는다. 협재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그토록 고운 모래를 본 적이 없고, 바닷물은 남태평양의 보석 빛을 듬뿍 머금었다. 신경숙 작가도 그 풍경에 흠뻑 취했음에 틀림없다. “얼마나 상쾌했던지 멀리 해안식당에서 내놓은 흰 비치의자 등에 쓰여 있는 카스라는 맥주 이름까지 친구 이름 같았다.” 난 아직까지 풍경에 관한 이만한 상찬을 읽어 본 적이 없는 듯하다.  

그녀가 성산에 머무는 이유는 그곳에 여자가 안전히 머물 수 있는 숙소가 있었을 뿐, 다른 이유는 없다. 그 우연이 이끌어준 성산에서 그녀는 우연히 두 여자를 만난다. 한 명은 그녀와 같은 호텔에 머무는 여인이고, 다른 하나는 호텔 맞은편의 집에 사는 말라깽이 소녀이다. 호텔에 투숙한 여인은 쌍둥이 동생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상태고, 말라깽이 소녀는 신장병으로 두 달에 한 번씩 피를 간다. 이들은 서로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준다. 나 역시 이런 우연을 바라며 성산에 갔었다. 하지만 나를 기다린 것은 그런 낭만적인 우연이 아닌, 쓸쓸한 적막뿐이었다. 봄과 여름의 성산은 활기차고, 가을의 성산은 고즈넉하지만, 겨울의 성산은 쓸쓸했다. 차가운 바람과 비가 몰아치는 우중충함.  

소설의 그녀는 성산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목초지와 군인들의 초소, 주민들만 이용하는 일출봉의 뒷길과 성산 초등학교, 호텔 뒤편의 당근 밭과 말라깽이 소녀의 집, 그리고 유도화가 핀 제성장과 피아노 교습소까지. 그곳은 저자가 묘사한 그대로 있었다. 감히 하이퍼 리얼리즘이라 부를 수 있는 저자의 묘사는 마치 내가 그 장소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곳을 그대로 답사해 본 셈이다. 솔직히, 난 신경숙 작가의 소설을 읽지 않는다. 『바이올렛』을 읽은 이후, 그 지독한 심리묘사에 지쳐 감히 다른 소설을 읽지 못한다. 마치 『식스티 나인』으로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시작한 독자처럼. 하지만 그 지독했던 『바이올렛』에서도 내 마음을 흔든 부분은 세종문화회관 뒷길을 묘사한 부분이었다. 신경숙 작가는 공간을 묘사하는 것으로 등장인물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 그 공간을 따라 돌아다니면서 난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녀에게서 위로 받고 있었다.  

“내가 잊고 있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가끔 사람의 일이 물길같이 느껴진다. 산꼭대기에서 같이 흘러내려 오지만 굽이굽이마다의 샛길에서 헤어지고, 한번 헤어져 흐르기 시작하면, 다시 만나기는 어려운 곳으로, 서로 모르는 곳으로 흘러가는 물길.” 소설의 그녀가 제주도 성산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해 보인다. 물길이 모여 흐르기 시작하면, 종국에 도착하는 곳은 바다다. 그녀는 일출봉에 올라 바다를 바라본다. 한번 헤어지면 다시는 만나기 어려운 물길은 결국 이곳 바다에서 만난다. 피하고 상처 입었던 가족 간의 관계는 이곳 성산에서 봉합된다. 모든 것을 끌어안는 바다, 속죄와 관용의 바다. 혹은 다시 태어나게 하는 바다.  

그녀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소설로 쓴다. 깊은 숨을 한 번 머금고. 그녀의 깊은 숨은 생에 대한 의지다. 상처로 얼룩진 그녀의 인생은 치유 받지는 못했지만, 다시 세상을 바라보며 살 용기를 얻었다. 하지만, 그 용기는 얼마나 힘든 것인가. 그녀는 오늘도 마음을 다잡고, 깊은 숨을 쉬며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마찬가지로, 치기 어렸던 기억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이 내 삶의 한 부분임을 기꺼이 인정하며, 힘들 때 마다 깊은 숨을 쉬며 마음을 다잡고 살아갈 것이다. 부정하지 말고, 그 자체를 끌어안고 살아가기. 이게 신경숙 작가가, 성산의 겨울 바다가 내게, 그해 겨울에 들려준 이야기였고, 난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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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6-29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이벤트 잊고 있었네요.
이책 하도 오래 전에 읽어 기억이 안나는데
배경이 제주도 성산이었군요.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쓰라는 말이 있듯이
이것에 가장 충실한 작가가 아닌가 싶어요.
저도 만일 소설을 쓴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구요.흐흐

Seong 2010-06-29 14:04   좋아요 0 | URL
stella09 님의 소설을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