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마저도 긍정하는 주호민의 힘
짬 시즌 2 - 예비역들의 수다
주호민 글.그림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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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에게, 아니 군필자들에게 있어 군대란 기억은 거의 대부분이 악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난 분명 전역을 했는데 전상상의 실수로 다시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는 절망적인 통보와 우여곡절 끝에 다시 군대에 가니 그 지옥 같던 선임들이 날 기다리고 있더라는 꿈은, 정말이지 아마 대부분 꿔봤을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시대와 공간과 사람이 전부 다른 개별적인 경험이 어떻게 똑같은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는지.  

원경험에서 2차로 각색된 군대 이야기는 대부분 비장하거나, 악몽이거나, 슬픈 이야기였다. 간혹 <동작그만>, <쫄병수첩> 등과 같이 코미디의 소재로도 쓰였지만, 그것은 고참의 시선으로 바라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군대는, 고참일 때는 (그나마) 추억거리가 있다. 그러나 쫄병일 때는 온 세상이 지옥이다.  

주호민 작가는 그의 데뷔작인 『짬』에서 이전과는 다른 군대 이야기를 펼쳤다. 군대 이야기가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런데 그는 달랐다. 그는 처음으로 군대를 추억했다. 군대라는 시스템을 추억한 게 아니라, 군대에서 겪은 사람들과 그들 사이에 벌어진 일을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짬』이 이룬 성취는 군대에서 겪은 시절을 공포, 폭력, 위선, 불합리한 명령 등으로 얼룩진 끔찍한 기억으로 다룬 게 아니라, 젊은 시절 겪었던, '새로 만난 사람들과의 특별한 경험'이라는 신선한 시각으로 바라본 것이다. 따듯하고 가슴 훈훈한 군대이야기라니! 일면 모순적으로 들리는 이 말을 주호민 작가는 정말이지 훌륭하게 만들어냈다.  

그가 『짬』에서 다룬 내용은 '좋은 기억들'을 (적당히) 윤색한 것이다. 물론 그라고 왜 군대생활이 훈훈하기만 했겠는가.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는지 그는 『짬 시즌2』라는 제목으로 다시 군대 이야기를 그렸다. 이번엔 연대기적 회고록 형식이 아닌, 에피소드 형식으로 그(와 그의 친구들)의 기억을 채웠다.  

여전히 재미있고 가슴 따뜻한 이야기가 담겨있지만, 군대 내 폭력행위라던가 부당 행위, 사회에서 만난 친한 친구의 배신(?) 등의 어두운 이야기도 담겨 있다. 특별한 점이라면, 아무리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를 하더라도 작가 본연의 필체인 따스함은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천성이 그렇지 않은가 감히 미루어 짐작해본다. 그만큼 그의 만화는 따스함이 있다. 이런 가교가 있었기에 88만원 세대의 비루한 일상을 따스하게 그릴 수 있었고(『무한동력』)을 완성하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성찰과 반성의 영역(『신과 함께』)까지 끌어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짬 시즌2』는 이전 그리고 이후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쉬어가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작품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주호민 작가는 언제나 ‘주호민스러운’ 재미있고 따스한 작품을 그리니까. 그가 바라보는 죽음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진행될지, 여전히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볼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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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1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1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7월 2주

 

며칠 전에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하얀 리본>을 봤습니다. 이 영화는 인디포럼 월례비행에서 본 정재훈 감독의 <호수길>처럼 보는 순간 극도의 인내를 요하는 힘든 영화지만, 보고 난 후에야 정말 엄청난 영화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즉각적인 반응에 휘둘리는 것이 아닌, 온전히 경험하고 나서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어렴풋이 깨닫게 하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1913년 오스트리아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을의 의사가 외진을 다녀오는 길에 낙마하는 사고를 겪습니다. 누군가가 길에 줄을 묶어 놓아 일부러 사고를 일으킨 것이죠. 증거가 없어 사건은 흐지부지 되어가는 와중에 소작농 부인이 사고로 죽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마을을 지배하는 남작의 관할지에서 벌어진 사건이지만, 사건은 부인의 잘못으로 처리됩니다. 그 후 남작의 아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되고, 마을은 공포에 떨게 됩니다.  

<하얀 리본>은 몇 줄로 이야기를 설명할 수 없는 영화입니다. 제가 낑낑대며 쓴 줄거리는 영화를 1/10도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얀 리본>은 몇 명의 주인공에 집중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마을을 둘러싼 불길한 기운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평화로운 한적한 시골마을은 불길함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엄격한 목사는 잔인한 방법으로 자식들을 통제합니다. 인자한 의사는 자신의 딸과 근친상간의 관계이고, 마을의 산파와 밀회를 갖습니다. 아이들은 이상한 비밀을 지닌 듯 무리를 짓고 다니고, 그 중 한 명은 꿈속에서 다음 희생자를 봅니다. 이것은 언뜻 <트윈 픽스>의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마크 프로스트와 데이빗 린치가 창조해낸 가상의 마을 트윈 픽스 또한 같은 이야기를 다룹니다. 차이가 있다면, 데이빗 린치는 이 이야기들을 '불길하게 드러냅니다.' 사운드는 뒤틀려 있고, 화면은 어두우며 인물들은 하나같이 기괴합니다. 외부인인 데일 쿠퍼가 마을에 들어가 사건을 해결하지만, 결국엔 그도 그 마을의 일원이 됩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착한 데일은 '검은 오두막'에 잡혀 있고, 나쁜 데일이 트윈 픽스에 있게 되죠. 데이빗 린치는 트윈 픽스의 미스터리를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에게 '밥(BOB)'이라는 악의 형상을 보여주었습니다. <트윈 픽스>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볼지, 아니면, 숲에 거주하는 악의 소행으로 볼지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미카엘 하네케의 방식은 다릅니다. 그는 이 기괴한 이야기에 감정이 개입할 수 없도록 흑백으로 찍었습니다. 음악도 영화 속에서 연주되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한 곡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흥미로운 이야기의 살을 다 발라내고 뼈만 남겼습니다. 그럼으로써 그가 다루는 것은 (저 너머에 있는 이상한 힘이 아닌) 반복되는 폭력의 순환입니다.  

<하얀 리본>의 작은 마을은 계급 사회입니다. 남작이 지배하고 부르주아 계급인 목사와 성직자가 있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작농으로 살고 있지요. 계급을 막론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폭력은 시스템에서 벗어나려는 아이들을 다루는 방법입니다. 새장 안에 갇혀 길들여진 새는 자유를 모르기 때문에 새장을 벗어나 살 수 없습니다. 어른들은 폭력으로 아이들을 제어하고 협박하며 자신의 시스템 안에 길들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행동을 모방하기 마련입니다. 폭력으로 점철된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시스템을 만들고, 그 시스템에 복속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어른들의 방식으로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이 지나치도록 무서운 폭력의 순환! 속하지 못하면 내치는 전체주의의 발로! 작은 마을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새 국가와 시대에 대한 이야기로 바뀝니다. 일련의 죽음들 속에서,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황태자의 죽음으로 끝나는 영화는 묘한 울림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될 테니까요. 

 

자신들만의 공고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빌리지>가 있습니다. 끔찍한 사회를 견디지 못해 문명 세계의 모든 기억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건국해 살아가는 어른들은 옆 마을(바깥세상)에 관한 아이들의 호기심을 말끔히 지워버립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공포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미신의 시대에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는 엄청난 법이니까요. 어른들의 편리로 아이들은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새장에 갇힌 새처럼 갇혀 지냅니다. 결국 모든 비밀이 밝혀지지만,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눈이 먼 소녀입니다. 그녀는 마을로 돌아가 그녀가 겪은 일을 자신의 상상력에 기대어 이야기 할 것이고, 그렇게 마을은 하나의 시스템으로 공고히 다져질 것입니다.  

<하얀 리본>의 하얀 리본은 정직과 순수를 의미합니다. 목사는 저녁 식사 시간을 지키지 않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매질을 하며 하얀 리본을 매게 한 후, 이 하얀 리본을 보면서 정직과 순수를 떠올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은 강제로 맨 하얀 리본을 통해 배웠습니다. 마을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폭력, 위선, 시기, 절망, 분노가 바로 아이들에게는 하얀 리본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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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7-0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캐이블에서 해줬던 스티븐 킹 원작의 살렘스 롯(뱀파이어 빌리지)도 분위기 하나 만큼은 끝내주더군요.

Seong 2010-07-10 07:11   좋아요 0 | URL
전 살렘스 롯하고 옥수수밭의 아이들하고 자꾸 헷갈려요... ㅠㅠ 저한테 뭔가 문제가 있는 듯...
 
[활동 종료] 6기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시간은 쉼 없이 흘러 어느덧 2010년도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5기에 이어서 6기 신간 평가단에 참여해 좋은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화양연화(花樣年華)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나름 행운이었고 아름다운 순간이었습니다. 5기 때는 (힘겨운) 직장 생활과 병행해 책을 허겁지겁 읽어 아쉬움이 많았던지라, 6기 때는 편안한 마음으로 찬찬히 읽을 작정을 했었습니다. 시간이 그만큼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꽉 짜인 일상에서 헐거운 일상으로 자리 이동 중, 알 수 없는 무력감이 찾아와, 근 한 달 넘게 책을 읽지 않고 지냈습니다. 서재도 거의 방치하고 지내는 수준이었고, 짧은 기간 (나름) 많이 사귀었던 알라디너 분들과도 소원해졌지요. 5월 중순 부터는 조금 나아졌지만, 그 기간 동안은 제대로 책을 읽지 않고, 활동도 하지 않은 무책임한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기 전에 5기와 6기 신간평가단을 지원할 때 어떤 마음으로 지원했는지 살펴봤습니다. "서평단을 지원하는 첫 번째 이유는 꾸준히 서평을 올려서 나태한 제 자신을 다잡는 기회로 삼고 싶어서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동안 제 입맛에만 맞는 편식한 독서에서 벗어나보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좋은 신간을 발견하면, 알라디너들께 소개해 주고 싶은, 발견의 기쁨을 같이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에세이, 과학, 잠언 등으로 묶인 죽음에 관한 성찰입니다. 이 책은 어느 카테고리에 분류해야할지 망설임을 불러일으킵니다. 나쁘게 보자면, 죽음이란 주제를 진중하게 풀지 못하고 이 얘기 저 얘기 끌어다 쓴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죽음에 대해 여러 담론을 끌고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 긍정적인 모습에 한 표 던집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이야기의 톤이 시시때때로 바뀌어 당황스러웠지만, 다 읽고 나니, 죽음이라는 주제에 어울리는 글쓰기인 것 같습니다. 때로는 감성적으로, 때로는 이성적으로 접근한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필연적인 이야기니까요.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는 『십자군 이야기』로 유명(혹은 오명)한 김태권 작가의 학습만화입니다. 아직 서양의 중세 이야기를 다 풀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발간한 이 '동아시아' 프로젝트를 처음 접했을 때는 반가움보다는 일말의 불안감이 컸습니다. 도대체 언제 끝낼 것인가? "이번만큼은 믿어 달라"는 작가의 말도 있으니, 한 번 더 믿어봐야겠지요.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는 『사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렸지만, 우리가 익숙해하는, 소위 '설(說)'에 반하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사마천이 역사적 사실과 소문을 한데 담아, 독자가 취사선택할 수 있게 했다면, 김태권 작가는 소문은 덜어내고 오직 역사적 사실만을 유추하며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그렇기에 조금은 딱딱한 느낌도 없지 않지만, 역사와 인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작가님! 이번에는 꼭 완간하시기 바랍니다.  

『플레이, 즐거움의 발견』은 일만하고 놀 줄 모르는, 노는 것은 음주와 쇼핑 정도 밖에 모르는 불쌍한 우리들을 위한 책입니다. 세상은 이만큼 진화했는데, 아직도 6~70년대 제조업의 기적을 바라는 높으신 분들은 무조건 야근에 책상에 앉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데에 쓰이기도 하죠. 이 책은 당연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노는 것은 시간을 버리는 게 아니라, 일을 더 창의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놀이의 반대말은 일이 아니라 우울함"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괴롭게 직장에 메여 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인생은 고통이지만, 우리는 매 순간 즐거워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꿈꾸는 20대, 사기史記에 길을 묻다』는 자기 계발서입니다. 다른 계발서와 다른 점이라면, 『사기』에서 이야기를 끌어온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책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는 이야기의 교훈을 도식적으로 분류한 것에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읽는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를 지엽적으로 푼 것에 대한 반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에 수록된 '이야기'의 재미는 굉장했습니다. '쉽게 풀어 쓴 사기'라 해도 좋을 만큼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 준 책이었습니다.  

『한국영화 최고의 10경』의 저자 김소영 씨는 교수이자 평론가이고 영화감독입니다. 그녀는 정성일, 허문영 씨와 함께 영화에 대한 독특한 사유를 풀어놓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씨네 21>에는 이들의 글이 정기적으로 실렸지요. 책에서 그녀가 이야기하는 한국 영화의 절반가량은 저 같은 사람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작품들이라, 텍스트로만 만나야 하기에 아쉬움이 큰 편이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경관은 한 번쯤 따라 갈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단순한 가이드가 아닌, 친절하고 사려 깊은 소개는 영화, 특히 '한국' 영화는 시공간을 어떻게 경유하고 견뎌왔는지에 대한 사색을 전해줍니다.  

『디오니소스의 철학』은 술과 철학이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면서도 의외로 잘 어울리는 두 주제를 잘 버무렸습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게 읽을 수는 없는 책이었습니다. 적은 분량에 고대부터 근대까지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상을 술과 연관 지어 이야기하기 때문에, 철학사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쉽게 따라가기 어려운 책입니다. 책을 읽으면서도 취한 느낌이 든 것처럼 밀려드는 정보와 사유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시도만큼은 신선했다고 생각합니다.  

『영단어 인문학 산책』은 우리가 흔히 쓰는 영어 단어의 유래를 들어 서양사의 역사와 문화, 사상 등을 이야기합니다. 이 책은 영단어 외우기 비법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시험에 나오는 영단어를 설명하지도 않지요. 이택광 교수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영어를 시험으로 바라보지 않고, 문화로 대합니다. 그렇기에 그가 이야기하는 영어 단어에 관한 이야기는 재미있고 흥미롭습니다. ‘언어는 문화’라는 기본 명제를 가장 잘 설명하고, 그만큼 쉽게 읽히는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는 다분히 전투적입니다. 2010년 한국에서 불온하게 소비되는 '좌파'라는 단어와 순수 학문으로의 기능을 잃은 '인문학'을 접붙인 것만 보더라도 이 책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사망선고를 받은 마르크스를 시작으로, 이택광 교수는 지금 2010년 인문학이 한국 사회에 어떻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지를,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틀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역시 읽는데 만만치 않은 책이었습니다. 읽기는 했는데, 제대로 읽었는지 회의하게 만들었지요. 하지만, 다 죽었다고 생각한 인문학의 효용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각기 언급한 철학자들의 먼지 묻은 서적을 다시 꺼내어 들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제게는 중요한 책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은 회화와 음악을 인문학적인 접근이 아닌, 저자 개인의 감상으로 접근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당황스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전혀 다른 부분으로 예술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조금 과하게 풀어 놓아서 그 거부감이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회화와 미술은 창조자의 감정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결과물입니다. 저자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자신을 드러내며 회화와 음악을 이야기한 것이겠지요.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그녀의 접근 방법은 참신합니다.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는 시민을 위한 민주주의 특강 강연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멋대로 부제를 단다면, '이명박 프리즘'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리영희 선생님, 죄송합니다), MB 정권 시대를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부터, 토건 공화국이라고 불러도 좋을 대통령의 '삽질 마인드'까지 지금 대한민국에 드러나 있는 모든 문제점을 다루었습니다. 때로는 실소를 불러일으키고, 때로는 분노와 좌절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 모든 현상을 평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대안까지 제시하는 것에 감동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그냥 실천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그것도 거창한 실천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이야기합니다. 민주주의란 그렇게, 작지만, 개인이 움직여 큰 물결을 만들어 내는 것임을 이 책은 이야기합니다.  

『우울의 심리학』은 우울증에 관해 이야기입니다. 우울증이란 게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질병인지를 이야기하고, 그 무시무시한 우울증에 벗어나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우울증이라는 게 워낙에 개인별 특성이 강하기 때문에, 이런 일반적인 방법이 통할까 궁금해 했었는데, 저자는 일반적인 치료법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우울증을 극복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우울증을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위로와도 같은 책입니다. 물론 저자가 겪은 우울증의 진폭은 좀 큰 편이지만, 그녀의 위로는 어설픈 심리 치료보다 훨씬 위안이 됩니다.  

『착한 여자는 왜 살찔까』는 비만과 성격의 상관관계를 탐구한 책입니다. 비만에 대한 너무 일반적인 접근이 아닐까 생각도 했지만, 이 책은 비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한, 착한 성격을 가진 여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착한 그녀들은 가족, 친구, 직장 동료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그녀들의 삶은 거의 성직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의 대부분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고나면, 자신을 위한 시간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한 뒤 고스란히 남는 스트레스. 부족한 시간과 스트레스는 먹을 것으로 귀결됩니다. 착한 여자들이 살이 찌는 이유는 그녀들이 (적당히) 이기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남을 위한 삶은 그만 살고,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세상에는 음식 보다 더 재미있고 즐거운 것들이 훨씬 많으니까요.  

 

7기에도 지원하고 싶었지만, 7월 말에 있을 이사 때문에 지원을 못했습니다. 기회가 허락된다면 8기에 다시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신간평가단의 책 읽기는 항상 긴장과 비판과 즐거움이 수반되니까요. 그동안 좋은 책 보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한 구절  

롱펠로는 여동생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너를 불러온 것을 보니 내가 정말로 아픈가보구나.'

전 여동생하고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서로 쌓기만 하고 터뜨리지 않아 결국엔 터져버리고 말았지요. 우리는 한동안 거의 말을 지내지 않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에 쓰인 명사들이 임종 직전에 남긴 말들을 읽으면서, 유난히 이 글귀에 마음이 아렸던 것은 동생에 대한 아마도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아련함과 애틋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지금은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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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0-07-09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짝짝!!!!!
신간평가단에 참여하면서 즐거웠던 일들 중 하나는 Tomek님 리뷰 읽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아직 끝내지 못한 리뷰가 2권이나 있어서(엉~엉~) 빨리 끝내야...

Seong 2010-07-09 13:0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이럴줄 알았으면 잘 썼어야 했는데 성격대로 너무 설렁설렁해서 아쉬움이 도네요...
굿바이님은 7기 지원하셨나요? 좋은 글 기다리겠습니다. :D

2010-07-09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0 0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라딘신간평가단 2010-07-10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많으셨습니다. Tomek님. Tomek님 덕분에 든든했답니다. ^-^
설렁설렁이라뇨, 무엇보다 정성스러운 페이퍼, 잘 읽었고, 고맙습니다.

저 위에 굿바이님은 7기 지원을 하지 않으셨답니다. 참 아쉬운 일이죠 ㅜ_ㅜ
그리고 Tomek님의 베스트 다섯권이, 저는 진심으로 궁금하니다. 하하.
이사 잘 하시고요. ^-^ 그간 정말 고마웠습니다.
마지막 페이퍼 잘 읽고 갑니다.

Seong 2010-07-10 07:1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지나고나니 자꾸 아쉬움만 남아요... 좀 잘 할걸...

전 모든 책이 베스트여서 다섯 권을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5기 때도 그랬고요. 그렇지 않으면 다른 책들에게 미안해서... :D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수고 많으셨고요. 7기 때도 잘 부탁드려요.
 
하얀 리본 - The White Ribb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초반의 지루함을 견딘다면, 영화가 끝날 때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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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부터 6월까지 알라딘 신간평가단 인문 B팀에서 활동하면서 읽은 책들 목록입니다. 5기와 마찬가지로 12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6기 결산은 다른 페이퍼에서 하기로 하고, 마이리스트에는 인문 B팀에서 읽은 책을 나열하겠습니다.


1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데이비드 실즈 지음, 김명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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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어떻게 이야기해야할까? 인문서적으로 묶여있지만, 저자 자신의 에세이로도 볼 수 있고, 명사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잠언들을 모은 책으로도 볼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굳이 이렇게까지 번잡스럽게 글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책을 덮으면서 그런 생각을 말끔히 지웠다. 기억나지 않은 삶의 처음과 아직 경험하지 않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이정도의 번잡스러움은 필요하지 않을까?
디오니소스의 철학
마시모 도나 지음, 김희정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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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술이란 독특한 음료이다. 제아무리 이성적인 삶을 단련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술에 취하면 풀어지기 마련이다. 그런 이성의 무장해제, 감정의 고양은 술자리를 즐겁게 하기도 하지만, 술자리를 망치기도 마련이다. 철인들의 생각도 별로 다를 바 없어서, 술 취함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철인들도 있는 반면, 술 취함을 죄악으로 바라본 철인들도 있다. 마시모 도나는 고대 철학부터 현대 철학까지 술과 관련한 인용을 모조리 찾아내어, 철인의 사상과 삶과 술의 상관관계를 밝힌다.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진시황과 이사 - 고독한 권력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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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은 『한나라 이야기』지만, 책은 진시황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왜 진시황부터인가?'에 대한 대답은 자세히 내놓고 있지 않지만, 봉건제처럼, 친인척에게 땅과 군사를 나누어 대륙을 통치하는 것이 아닌, 단 한 사람의 '절대권력'으로 통일 중국을 통치한 것이 진시황이기 때문이 아닐까. 시황제의 군현제를 반면교사로 삼아 한은 군국제를, 당(唐)은 3성 6부제를, 송(宋)은 2성 6부제를 통치제도로 삼았으니, 한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풀자면, 당연 통일 진나라, 그리고 그 진의 황제에 대한 이야기부터 풀어나가야 했을 것이다.
한국영화 최고의 10경- 영화평론가 김소영이 발견한
김소영 지음 / 현실문화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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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평한 영화들 중, 절반 정도는 봤지만, 절반 정도는 보지 못했고, 쉽게 볼 수도 없는 영화들이다. 하지만, 그가 이야기한 영토 안에서 우리는 이 책을 지도삼아 길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길은 원래 구불구불하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것이다. 길을 떠나는 자만이 여행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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