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MOVIE 썸머페스타 - 하나비 (8.12~9.1)
남쪽으로 튀어! - South Boun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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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모리타 요시미츠 감독의 <남쪽으로 튀어(サウスバウンド)>는 오쿠다 히데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전 (부끄럽게도) 이 작가의 소설을 아직 한 편도 읽지 못해 원작소설과 영화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감독의 전작인 <마미야 형제>와 <검은집>의 경우를 본다면, 아마도 원작의 장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다소 밋밋한 각색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봅니다. 확실히 영화는 조금 늘어지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그 자체로 꽤 인상적입니다.  

한 가족이 있습니다. 초등생 6학년 지로(타나베 슈토)는 운동권이었던 아버지(토요카와 에츠시), 역시 운동권이었던 어머니(아마미 유키), 그래픽 디자이너인 누나(키타가와 에이코), 그리고 귀여운 동생 모모코(마츠모토 리나)가 바로 그렇습니다. 지로는 항상 세상의 불의를 참지 못하고 딴죽을 거는 아버지가 영 마땅찮습니다. 그러다 지로와 친구들을 괴롭히는 상급생을 지로가 거의 죽일 뻔한 사건이 발생하자, 이들 가족은 이 기회에 도심을 벗어나 오키나와에서도 최남단인 이리오모떼로 이사를 갑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주거지를 얻고, 농사를 지으며 이들 가족은 한적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때, 도쿄의 건설업체 직원들이 집을 비우라는 통지를 합니다. 이 자리는 요양원이 들어올 자리이고, 이 땅은 건설사 소유라는 이유 때문이지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투쟁에 들어갑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국가라는 체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영화 초반, 아버지 이치로는 국민 연금 납부를 거부하면서 "차라리 일본 국민임을 포기하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영화는 어른들의 세계를 다루지 않습니다. 굳이 다룰 필요가 없지요. 어른들은 정의가 아닌 이익을 추구하는 1차원적인 집단이니까요. 대신 영화는 초등학생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안의 작은 세계에서도 (어른들의 세계처럼)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야기합니다. 왜 우리 같이 선량한 아이들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그들은 국가의 의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국가라는 존재는 약한 개개인의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그렇기에 법률과 치안이 있으며, 국민들은 세금을 납부하지만, 지금 국가는 우리를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지로는 스스로 정의를 실천합니다.  

 

이리오모떼로 가서 가족들은 국가의 간섭에서 벗어난 평화로운 생활을 누립니다. 무능해보였던 아버지는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아이들은 새로운 친구들과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냅니다. 하지만 이곳에도 엉뚱한 공권력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리오모떼의 땅은 이리오모떼 사람들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은 도쿄의 건설회사 소유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익을 위해 경찰을 비롯한 엄청난 공권력이 이곳에 투입됩니다. 아무리 바리케이드를 쳤어도 개인의 싸움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입니다. 애초 질 싸움이 뻔하지만, 아버지는 옳은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맞섭니다. 그리고 멋진 반격! 아마 포클레인과의 일 대 일 대결 장면은 영화로서도, 그리고 영화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모습으로도 볼 수 있는 인상적인 장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다만, 아무리 유쾌하고 즐겁게 마무리를 지어도, 결국엔 패배에 관한 이야기임을 밝혀야겠습니다. 제목에 (남쪽으로) '간다'나 '가자'가 아니라 '튀어'라는 동사를 쓴 것은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소설은 어떤 느낌일지는 잘 모르겠으나, 활자가 영화라는 매체로 물화가 되면서 조금 더 현실적인 느낌을 갖게 되었다고 할까요? 하지만, 이 영화를 가족의 관점이 아닌, 주인공 지로의 관점에서 본다면, 멋진 성장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로는 '정의=이익'이라는 공식에서 벗어나, 부모에게서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직접 온 몸으로 배웠으니까요. 부디 지로는 나중에 어딘가로 튀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덧붙임:  

익스트림무비 시사회 당첨으로 8월 9일 18시 아리랑시네센터 3관에서 관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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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8-10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으로 읽었을때는 굉장히 재밌었던 기억이 납니다^^
선입견이 대단했는지 이게 일본작가의 이야기란 말이지~이러면서 곱씹었던,, 결국 말씀대로 튀어야만 하는 현실에 마지막에 쫌 거시해지지요~

Seong 2010-08-11 08:55   좋아요 0 | URL
책표지의 일러스트가 별로 맘에 들지 않아서(고작 이런 이유로!) 피해가곤 했었는데, 영화를 보니까 관심이 생기더군요. 이번 기회에 읽어볼 생각입니다. :D

stella.K 2010-08-10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언제 이걸 상영했었단 말입니까?
선전하는 것도 못 봤는데...ㅜ
저는 이 작품은 아니지만 다른 작품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제 기억력이 새인 관계로 그게 뭔지 기억에 없어요.
근데 암튼 별로라고 생각해 더 이상 읽지 않고 있는데
영화는 왠지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Seong 2010-08-11 08:57   좋아요 0 | URL
내일부터 J무비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상영되는 것 같아요. 저는 운좋게 월요일에 시사회에서 봤습니다. 영화는 일본 영화 특유의 조용한 정조여서 조금 지루한 면도 있기는 하지만, 전 꽤 괜찮게 봤습니다. :D
 
테이킹 우드스탁 - Taking Woodstock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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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상영


낙원과 이상향에 대한 달콤쌉사름한 백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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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루 - Living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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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절망 그리고 희망.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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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땀을 닦는다. 처음엔 더위에 흘린 땀이라 생각했지만, 아니다. 더위로 흘리는 땀은 외부의 열기를 이기지 못해 몸속에서 밀어내는 땀이다. 내보내려는 힘과 남아있으려는 힘이 서로 부딪히는 치열한 전투. 언제나 지는 쪽은 인간의 나약한 육체 쪽이다. 닦아내려 손을 대면 언제나 뜨듯하고 끈적인다. 마치 날선 칼날이 나약한 몸에 구멍을 내어 몸 밖으로 쏟아지는 피처럼. 하지만, 이번에 흘린 땀은 식어있었다. 몸의 긴장이 풀려 저 스스로 흘러나온 물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이번에 출간된 김영하 작가의 단편집 제목은 이 책에 수록된 네 번째 단편 「밀회」에서,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92쪽 위에서 13번째에서 15번째 줄에 걸쳐있는 혹은 밑에서 6번째에서 8번째 행에 걸쳐있는 문장의 한 구절을 따온 것이다. 처음에 이 제목을 접했을 때는. 마치 김경주 시인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를 따라한 치기어린 겉멋이라 생각했었다.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선 책을 읽어야하고, 꼼꼼히 읽은 독자들만이 알아챌 수 있는, 작가가 독자에게 베풀 수 있는 멋진 은혜(혹은 선물).  

흐릿한 눈으로, 침대에 몸을 파묻고 한 편 한 편 심드렁하게 읽던 중, 서울의 온도가 35도에 가깝게 다가간다는 아나운서의 끈적끈적한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들은 지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 난 까닭 없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소설집의 거의 끝을 향해가고 있는 「퀴즈쇼」에서였을 것이다.  

이번 단편집에 수록된 「퀴즈쇼」는 2007년에 출간한 장편 『퀴즈쇼』와 다르면서도 같은 작품이다. 단편 「퀴즈쇼」의 기본 골격은 장편 『퀴즈쇼』의 민수와 지원의 이야기를 조금 변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읽고 있는 어느 순간, 나와는 상관없을 거라 생각한 공포가 순식간에 내게 범람했다. 살인, 그리고 죽음.  

여주인공 은이의 부모와 오빠는 한순간에 유명을 달리했다. 어느 한 연쇄살인범이 "방범창을 장도리로 뜯고 안으로 들어"가 은이의 부모를 장도리로 내리쳐 죽이고, 오빠는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유유히 사라진 사건이 발생했다. 후에 그 연쇄살인범이 잡혔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했다. "차를 몰고 돌아다니다가 문득 영감이 떠오르면 차에서 내려 자신에게 영감을 준 집으로 들어"가 살인을 저질렀다. 물론 우리가 살면서 연쇄살인범을 만날 확률은 "0.0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논리의 세계"에서나 벌어질 일이다. "현실세계"는 다르다. 우리가 살면서 한강다리가 무너질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나? 백화점이 무너질 것이라 생각한 적은? 한창 일하고 있는 건물에 비행기가 부딪힐 것이라 생각한 적은? <추격자>의 개미슈퍼 아줌마는 무식해서 그렇게 죽었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 비극은 우리에게는 "놀라운 행운"이 된다. 김영하는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저 멀리 있는 공포를 슬그머니 우리의 일상 곁에 놓아둔다. 그는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낸다. 그리고 소설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시제를 살짝 바꿔 묻는다. 정말 그렇게 안녕할 거라 확신하세요? 당신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악몽을 꿨다. 하늘에 불꽃이 일어나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던 지난 새벽에, 나는 보고 말았다. 노란색 우비를 입고 4층 빌라를 올라 방충망을 뜯어내고 들어와 내가 누워있는 침대 앞에 선 한 사내의 모습을. 가위에 눌렸다. 소리를 질렀지만 목구멍 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사내는 (칼이 아닌) 긴 송곳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혼신의 힘을 다해 거의 터진 목소리에, 놀란 아내가 잠을 깨웠다. 밖엔 비바람이 몰아쳤고 난 멍하니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에 수록된 단편 소설들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로봇」, 「여행」, 「악어」, 「밀회」, 「명예살인」, 「마코토」, 「아이스크림」, 「조」, 「바다이야기 1」, 「바다이야기 2」, 「퀴즈쇼」, 「오늘의 커피」, 「약속」. 각각의 이야기들은 제각기 다른 빛을 뿜고 있었지만, 감히 규정된 흐름으로 엮어본다면, 그것은 상실과 공포다. 그가 다룬 상실과 공포는 일상과 밀접하기도 하지만 때론 멀리 떨어져있기도 하다. 그의 소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일상과는 멀리 떨어진 사건들이다. 일반인들이라면 신문에서나 접할 수 있는, 0.01% 정도나 겪을 수 있는 일들이다. 하지만, 그 사건을 겪는 이들은, 0.01%의 특별한 사람들이 아닌, 바로 우리들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확실히, 동생이 사고를 당해 회사 사장에게 돈을 빌릴 확률은, 프랑크푸르트에서 헤어진 옛 애인을 만날 일은, 내 얼굴 때문에 회사 매출이 오를 일은, 국문학 박사과정의 일본인을 만날 확률은, 기름 맛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확률은, 일하는 매장에서 엄청난 물건을 도둑질을 할 일은, 연쇄살인범을 만날 일은, 주먹다짐으로 다른 사람의 코뼈를 부러뜨릴 일은, 다짜고짜 돈을 빌려달라는 여자를 만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돈을 갚지 못해 사장에게 몸으로 때우는 사람은,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은, 매출 때문에 죽는 사람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온전히 오해해 감정의 골을 수습하지 못하는 사람은, 일 때문에 기름 맛 나는 아이스크림을 앉은 자리에서 4개나 먹어치우는 사람은, 타락한 사람은, 죽은 부모의 돈을 부러워하는 개새끼들은, 그래서 내 코뼈를 순순히 대주는 사람은, 집나간 아내를 찾는 사람은 우리 주위에서 (쉽지는 않겠지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거나, 우리들은 희극적 혹은 비극적 혹은 그 둘이 섞인 채로 살아간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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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1주

2010년 7월 29일 새로 개봉한 두 편의 영화에서 우리는 누군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왠지 익숙한 인물이 출연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영화를 책임지는 주연은 아니었지만,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솔트>에서, 이안 감독의 <테이킹 우드스탁>에서, 주인공을 (어떤 방식으로든) 받쳐주는 든든한 인물을 맡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리에브 슈라이버(Liev Schreiber)입니다.  

그는 잘 생긴 얼굴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몸매가 잘 빠진 것도 아닙니다. 명연을 펼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거의 20여 년간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살아남았습니다. 가히 할리우드의 미스터리라 할 만합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그가 얼마나 끊임없이 작품에 출연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영화를 어느 정도 책임을 질 수 있는 배우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연도 몇 편 맡았지만, 오히려 조연을 맡은 작품들에서 더 많은 빛을 발하는 배우입니다. 이것은 연기력의 문제라기보다는 배우의 성향인 것 같아 보입니다. 그는 영화 전체를 통제하기 보다는 영화를 조율하는 인물에 더 적합해 보입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스크림>시리즈에서였습니다. 시드니 어머니의 애인인 코튼 위어리 역은 1편에서는 그저 소비되는 단역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2편에서 그의 존재감은 갑작스레 커집니다. 그의 첫 등장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 마치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습을 동시에 담고 있는 듯한 모습.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서스펜스의 열쇠를 지닌 인물로 남아 영화를 이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배우로 인식한 영화는 <RKO 281>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그는 무려 오손 웰즈의 역을 맡습니다. 24살의 오손 웰즈가 스튜디오의 전권으로 그의 데뷔작이자 주연작인 영화 <시민 케인>은 미디어 제왕 윌리엄 허스트의 일생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영화의 주인공 케인은 윌리엄 허스트의 모습뿐 아니라 오손 웰즈 자신의 모습 또한 담겨 있습니다. 한 편의 영화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예술가의 탐욕스러움과, 온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미디어 재벌의 탐욕스러움은 케인이라는 인물에 정확히 겹칩니다. 리에브 슈라이버는 이 탐욕스러우면서 동시에 열정적이고 때로는 무모하며, 언뜻 광기까지 비추는 오손 웰즈를 훌륭히 표현했습니다. 물론 존 말코비치와 제임스 크롬웰이라는 명배우들이 그를 받쳐준 것도 큰 위안이 되었겠지만요. 이 영화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복잡한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키게 합니다.    

 

 

리에브 슈라이버의 모습은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를테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던가...)을 떠올리게 할 만큼 야성적이지만, 그의 음성은 매력적인 중저음입니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모습 때문에 그는 항상 이중적인 역할을 맡아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햄릿2000>에서 그는 레어티스 역을 맡아 셰익스피어 인물에 도전합니다. 레어티스는 극의 초반과 후반에만 나오는 조역이지만, 그가 등장할 때마다 영화는 이상한 분위기에 휩싸입니다. 레어티스가 떠나기 전, 오필리아와 대화하는 장면은 음란함을 느낍니다. 그가 햄릿과 결투를 하는 장면은 죽은 누이와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모습입니다. 리에브가 연기하는 레어티스의 연기 때문에 <햄릿 2000>은 근친상간으로 얼룩진 비극으로 그려집니다. 마이클 알메레이다 감독이 어떤 의도로 『햄릿』의 인물들을 21세기의 뉴욕으로 불러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 음란한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은 레어티스와 오필리아 그리고 클라디우스와 거트루드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리에브 슈라이더의 주연 작품은 2006년에 리메이크된 <오멘>입니다. 그는 (감히!) 원작에서 그레고리 펙이 맡았던 로버트 쏜역을 맡습니다. 이 영화는 원작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이지 지루한 영화입니다. 고전적 의미의 리메이크를 그대로 수행해 영화는 원작을 거의 답습하기 때문이지요. 이 영화는 조금 삐뚤게 보면 꽤 흥미롭습니다. 이 영화의 젊은 부부 로버트 쏜과 캐서린 쏜을 맡은 배우는 리에브 슈라이버와 줄리아 스타일스입니다. 줄리아 스타일스는 <햄릿 2000>에서 오필리아 역을 맡았습니다. 그러니까, <햄릿 2000>에서 레어티스와 오필리아가 결혼을 해 <오멘>에서 자식을 낳았더니, 그게 악마의 자식이더라는 식의 경망스러운 상상. 이런 상상에 기대서야 영화를 견딜 수 있을 만큼, <오멘>은 리에브 슈라이버가 원톱으로 극을 이끌기에는 너무 힘에 부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테이킹 우드스탁>에서는 여장남자인 빌마역을 맡았습니다. 그의 역할은 주인공 엘리엇 부모의 보디가드입니다. 그는 이 영화에서 억눌려있는 엘리엇의 자아를 끌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엘리엇은 게이이지만, 그의 부모 때문에 드는 성정체성을 숨기며 살아왔습니다. 부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사회 분위기가 게이를 탄압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지요. 엘리엇은 너무도 스스럼없이 다니는 빌마의 모습을 때론 신기하게, 때론 부러움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어느 날 엘리엇이 빌마에게 묻습니다. "이렇게 (게이임을 밝히고) 살아도 괜찮아요?" 빌마가 대답합니다. "언제까지나 숨기고 살 순 없잖아? 자신에게 솔직해져." 이 영화에서 리에브의 출연분량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의 말로 인해, 그리고 우드스탁이라는 대축제의 분위기로, 그는 자신에게, 가족에게 솔직해질 용기를 얻습니다.    

 

 

<솔트>에 대해선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이 영화는 안젤리나 졸리의 원톱 주연 영화니까요. 졸리를 제외한 그 외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받쳐주는 역할입니다. 그녀를 지원하거나 배신하거나 하는 역할들. 리에브 슈라이버가 맡은 테드 윈터 역 역시 그렇습니다. 딱 기대할 만큼의 이야기 전개와 딱 예상만큼의 반전. 좀 더 양념을 쳤으면 더 흥미로운 영화가 될 수 있었지만, 영화는 레서피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할리우드의 대형 배우들을 제외하고 20여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꾸준히 영화에 출연한 배우는 리에브가 거의 유일합니다. 어느 정도는 소비되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는 자신의 연기를 펼치는 이 할리우드의 곡예사의 앞길이 어떨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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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8-07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대단하셔요!
솔트는 정말 졸리를 위한 영화여요.
토멕님 설명 읽으니까 정리가 되는군요.
그런데 제가 욕해주고 싶은 건, 이런 허리우드 액션 영화에서 자주 보여주는
자기 정체를 속이고 속여 관객으로 하여금 '너 이런 줄 알았지?'하는
얄팍한 뒤통수치기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이젠 그거에 그닥 박수칠 사람도 없는데
지네들끼리 놀아먹고 뭐가 그리도 좋은지...쩝.

사실 이거 제 페이퍼에 써야하는 건데
그동안 제가 허리우드 욕을 좀 많이해서
자제하려다 여기서 딱 걸렸네요. 이해하셔요.ㅜ

Seong 2010-08-07 15:05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제작비가 많이 드니까 그런 것 같아요. 안전하게 가는 거죠. 답답하긴 하지만, 뭐라 욕은 못하겠더군요. 왜냐하면, 저도 제 돈으로 어딘가에 투자할 때는 이보다 더 보수적이 되거든요. 물론 문화를 투자대상으로 보는 것은 천박한 발상이라 여기지만요... 자본을 손에 든 사람들의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stella09 님의 좀 더 큰 일갈 바랍니다! :D

굿바이 2010-08-07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에브 슈라이버는 저도 참 좋아하는 배우랍니다. 잘생긴건 모르겠는데, 양볼에 사탕을 문듯한 그 뚱함이 야성미를 좀 중화시켜주는 것 같아서 더 좋았습니다. 뭐랄까 알면 더 알고 싶은 그런....^^
<햄릿 2000>에서의 그 암울한 느낌은 참 오래 머리속에 남더라구요. 최근에 나온 영화는 보지 못했는데, 여기서 만나니 또 즐겁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D

Seong 2010-08-09 08:42   좋아요 0 | URL
굿바이 님도 리에브를 아시는군요! @.@
정말 반갑습니다. :D

루체오페르 2010-08-09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보니 누군지 알겠네요. 토멕님의 배우에 대한 애정어린 글 잘 봤습니다.^^

Seong 2010-08-10 08:37   좋아요 0 | URL
^^; 아니예요. 그저 관심이 있을뿐, 애정을 표현하기엔 제가 너무 부족하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