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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 컬렉션 박스세트 (4disc) - 고려장, 충녀, 육체의 약속, 이어도
김기영 감독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흔히 얘기하는 옛날 '한국' 영화들은 구리다. 연기는 물론이고 촬영, 조명, 미술, 음악... 참으로 천편일률 적으로 유치했다. 이야기는 또 얼마나 한심하고 인물들은 왜 그렇게 전형적인지. 물론 유신시대에 영화사 통폐합과 외화 쿼터제, 문예영화 등이 한국 영화계의 발전을 막았다고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 때 한국영화는 상당히 구렸다.
그런 시대에서 활동한 김기영 감독은 거의 UFO같은 존재다. 이야기의 소재도 그렇고, 소품의 활용이나 세트 미술같은 것을 보면, 이게 정말 그 당시의 한국영화가 맞는지 의심하게 되고 그 의심이 경탄으로 바뀐다. 특히 등장인물들을 극한 상황에 몰아 넣어 가식, 위선, 체면 등 인간임을 나타내는 그 모든 포장을 제거하고 인간 본성만 남은 모습을 철저하게 관찰자의 시점으로 냉정하게 바라보는 모습은 지금 보아도 덜덜 떨리게 만든다.
그는 약 30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지금 세상에 남아 있는 작품은 (아쉽게도) 22편이다. 그 중 <고려장>, <충녀>, <육체의 약속>, <이어도> 4편이 이 DVD 세트에 담겼다.
1961년에 제작한 <고려장>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고려장 설화를 그린 영화다. 그렇다고 <전설의 고향>류의 영화라고 미리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 영화는 정말 '처절하게' 생존의 법칙을 다룬다. 먹고 사는 생존 앞에선 인간이 만들어낸 삼강오륜이 필요가 없어진다. 배고픔 앞에선 부모, 자식의 관계, 즉 가족은 내가 먹을 것을 빼앗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자신(과 처)의 생존을 위해서 고려장터에 어머니를 버리는 아들. 물론 원해서 올라갔지만 막상 죽음이 닥치니 더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어머니. 절대로 놓치지 말고 두 눈 부릅 뜨고 지켜보아야할 영화다.
1972년에 제작한 <충녀>에는 익숙한 배우들이 나온다. 윤여정, 남궁원 두 배우가 주연으로 나오고 이대근, 사미자가 조연으로 잠깐 비친다. 본처와 첩이 서로 남편을 차지하려는 내용인데, 이 내용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실이 더 놀랍다(첩이라니! 이 무슨 조선시대스러운 단어인지..). 기이한 대사와 황당한 전개. 출산의 기대와 악몽. 두 여자들 사이에 낀 무(기)력한 가장. 영화는 일반인이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을 훌쩍 뛰어 넘는다.
1976년에 제작한 <육체의 약속>은 이만희 감독의 <만추> 리메이크다. 이만희 감독의 <만추>는 프린트가 유실돼서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영화지만, 어렸을 때 김수용 감독의 <만추>를 본 기억이 있다. 가슴 절절한 멜로드라마도 김기영 감독이 찍으면 정말 기괴하게 변한다. 또 변주되는 주제. 인간이란 무엇인가? <고려장>이 '인간 본성'을 (잔인한 방법으로) 물어보았다면, <육체의 약속에서>는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영화다. 그리고 김기영은 그것을 '약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약속을 지키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기 때문이다.
1977년에 제작한 <이어도>는 문예영화로 기획된 영화다. 문예영화는 흥행에 상관없이 정부 당국자들의 눈에만 띄면 성공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외화 쿼터제 때문) 상업적인 면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고, 영화적 실험을 할 수 있는 감독들의 장이 될 수 있었다. (그런 경우는 임권택 감독뿐이었고 대다수의 경우는 대충 만드는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시기가 한국영화의 암흑기라 불린다) 2000년대 들어서야 지구 온난화가 이슈화 되기 시작했는데 개발독재시대인 70년대에 환경문제를 거론하는 것도 놀랍지만, 삼대가 바다에 빠져 죽는다는 운명론적 이야기와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기이함과 무속신앙이 이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더 괴이하게 만든다. 특히 박정자, 이화시의 연기는 정말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보는 것은 특별한 체험이다. 그의 영화 중 이제 고작 6편만이 DVD로 출시되었다. 이제 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이제 DVD 밖에 없다. 영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 인간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제발이지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