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글감옥 - 조정래 작가생활 40년 자전에세이
조정래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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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제목만으로 80점 먹고 들어간다. '황홀'한 글'감옥'이라니..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이면서도 지난 40여년의 작가 생활을 여실히 드러내는 제목이란 말인가. 작가 조정래는 정말 타고난 글꾼이 아닐까 싶다. 

   거칠게 말해 이 책에는 그의 생애가 들어있다. 이 책이 '유서'니 '자서전'이니 하는 말들은 괜시리하는 말들이 아니다. 그 역시 수많은 소설에서 풀어왔지만, 중심적이지는 않고 이야기를 전개시키기에 기능적으로 사용했던 그의 생애들이 이 에세이에서는 자세히 풀어져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에 와닿았던 이야기들은, 박현채 선생에 관한 일화, 국가보안법 기소, 그리고 영화 <태백산맥>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세가지 일들은 그가 20여년간 '자의로' 갇혀있던 '글감옥'에서 투옥(?) 중이었던 상황에서 발생한 일이라 더 각별히 느껴졌던 것 같다. 

   박현채 선생에 대한 글을 읽을 때는 마치 내가 다시 [태백산맥]을 읽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 시대를 겪은 인물이 품고있는 그 한의 내밀함이 소설 전체를 압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박현채 선생과 조정래 선생. 1988년 겨울 지리산 임걸령에서. (출처: 시사IN)

   국가보안법 기소는 거의 10여년을 끌었다는 사실에 내 자신이 부끄러워짐을 느꼈다. 내가 그 사실을 안 것은 내가 [태백산맥]을 힘겹게 다 읽고 난 고 2때였다. 당시 국어선생님께서 "전두환, 노태우때도 아무 얘기 없던 소설이 왜 문민정부에서 문제가 되는 거야!'하고 한탄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난 그 사실을 곧 잊어버렸다.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전까지만해도 대한민국의 매커니즘이 이렇게 복잡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그렇게 간단히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사건이 11년이 지난 2005년에서야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는 사실에 난 그간 얼마나 안일하게 세상을 살아온 것인지 반성했다. 결국 세상은 변한 것이 없고 그대로이다. 다만 국가의 근본을 이루는 '백성들의 힘'이 강해지고 실천력이 늘어났다는 데 희망을 둔다.  

 극우 단체의 전화 테러가 극성을 부린 1994년과 1996년에 작가가 남긴 유서 두 편 (출처: 시사IN)

   임권택 감독의 영화 <태백산맥>에 대한 평가는 솔직한 마음으로는 조금 안타깝다. 물론 나도 고2때 그 영화를 극장에서 (몰래) 보고 실망을 했다. 소설에서 느꼈던 그 뜨거운 감정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년 전 DVD를 구입해 다시 봤을 때는 어떤 다른 감흥을 받았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조정래의 것이고, 임권택의 <태백산맥>은 임권택의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같은 '지옥'을 경험했음에도, 그 경험은 그들 각자의 삶에 다르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옳고, 임권택의 <태백산맥>은 틀렸다'는 평가는 잘못됐다고 본다. 분노와 열정의 시선과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본 그들 두 작품을 껴안는 것이 그 시대를 겪어보지 못한 '우리들'이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런지.  

 

영화 [태백산맥] 김범우와 염상구

   책에는 이 외에도 작가가 밝힌 수많은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게 얽혀있다.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3부작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친절한 'book commentary'로 읽힐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해방 이후'부터(조정래 작가는 일제시대에 태어났지만-1943년 생-, 만 4살 이전의 체험은 무효라 생각한다) '현재'까지 살아온 우리 아버지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덧붙임 

더 관심이 있으신 분은 시사IN과의 인터뷰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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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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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의 노래>를 읽고나서 처음 든 느낌은 황량함과 묵묵함이다. 그가 묘사하는 16세기의 조선은 죽음 그 자체다. 바다위에 떠오르는 목 없는 시체들, 죽은듯 살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조선 수군의 모습은비참하다 못해 그저 덧없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은 일상을 살아가듯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나간다.  

   <칼의 노래>에는 전장의 긴박함이 없다. 인물들은 그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간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터에서 배에 들러붙어 있는 적군 병사들을 대낫으로 '걷어내는' 모습이나 살아남은 자에게 때마다 찾아오는 끼니를 견뎌내야 하는 모습은 본질적으로 삶을 견뎌내는 모습이다.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살아가는 모습은 지금 현재의 우리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이런 모습은 이순신이 처해있는 상황때문일지 모른다. 전쟁 중 혁혁한 성과를 거둔 이순신은 임금에게 죽음을 당할뻔 하다가 일본해군의 승리로 가까스로 '죽음이 잠시 미루어진다.' 그를 죽이려는 적들덕분에 그는 살 수 있었고, 그가 목숨을 바쳐 구하려는 대상은 그를 죽이려는 자이다. 이 얼마나 모순된 상황인가. 살기 위해선 죽을 수 밖에 없고 죽으려해도 살 수 밖에 없는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 종묘와 사직이라는 관념을 지켜내기 위해 이 땅의 수많은 백성과 병사라는 실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는 고통과 분노와 울분을 목구멍 아래로 꾹꾹 누르며 하루 하루를 견디어내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순신을 다룬 매체는 굉장히 많았지만, 인간 이순신의 고뇌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은 이 <칼의 노래>가 처음이었나 싶다. 감정의 울림이나 사건의 긴박함 없이도 이 긴 소설을 한달음에 읽을 수 있게 한 것은 아마도 김훈의 필력이 아닐까 싶다. 역사에 박제되어 있던 이순신이라는 성역을 인간으로 묘사한 김훈의 공로는 나코스 카잔차키스의 공로와 맞먹는 것이라 생각한다.  

   <칼의 노래는> <최후의 유혹>에 걸맞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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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철 2010-01-08 0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소년만 읽어보았는데요. 기회되면 꼭 읽어보아야겠습니다~ ^^*

Seong 2010-01-08 10:16   좋아요 0 | URL
저는 청소년판을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원작하고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웬만하면) 청소년판보다는 원작을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
 
글래디에이터 (2disc)
리들리 스코트 감독, 러셀 크로우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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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래디에이터>를 처음 봤을 때의 황당함을 아직 잊지 못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화는 막시무스가 자신의 정체를 젊은 황제에게 드러냈을 때 끝났어야 했다. 그게 이 영화에 더 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영화는 이야기를 질질 끌면서 기어이 황제 코모두스와 막시무스를 콜로세움에서 싸우게 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끌었어야 했을까"하고 생각을 하다가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감상하게 되었다. 그때 리들리 스콧이 왜 이 이야기를 질질 끌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드러난 주인공은 막시무스이지만, 이 영화의 심정적 주인공은 코모두스 이다. 첫 등장에서 알 수 있듯이 코모두스는 인간적으로 끌리는 면이 하나도 없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즐기고 누릴 뿐이다. 하지만 나는 두번째 이 영화를 보면서 코모두스에게 심정적으로 끌리게 되었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죽인다.' (이장면에서는 <블레이드 러너>의 '로이 베티'가 생각났다. 자신의 부모에게 인정을 받아보지 못한 아들들은 그 느낌이 어떨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세상이 황량해지는 경험을 지금껏 난 잊어본적이 없다.) 그는 하나 남은 자신의 혈육에게도 배신을 당한다. 결국 코모두스에게 남은 것은 외로움과 분노뿐이고 그 삐둘어진 분노가 막시무스를 향하게 되었다.  

   막시무스는 너무도 이상적인 주인공이다. 단지 자신의 가족에 대한 복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랑과 정치적 셈까지 고려하는 징글징글한 인물이다. 어쩌면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그 바탕은 더할나위없이 이상적인 인물보다는, 모든 것을 가졌으나 실은 아무것도 누릴 수 없는 콤플렉스 덩어리의 불안전한 인물에게 빠져드는 것은 이 영화를 보는 나 자신이 그만큼 불완전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인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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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하면서(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홍상수 감독, 고현정 외 출연 / 프리지엠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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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한국에서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것은 과감한 결단이다. 홍상수라는 이름은 박찬욱, 봉준호와 같이 브랜드화 되어있지만, 그들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사람들에게 여겨진다. 즉 따분하고 고리타분한 '예술영화'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느낄 수 있다. 극 중 구경남의 말대로 홍상수의 영화에는 "예쁜 화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홍상수의 영화에는 일반적인 영화에는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반추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홍상수의 영화를 (도중에 끊지 않고 끝까지 견뎌서) 보고 나면 대개 두 가지 반응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낄낄거리던가, 혹은 불쾌하던가. 그런데 이 두가지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낄낄거리는 것은 홍상수 영화에 나왔던 인물들의 행태를 보고 '나도 그랬어'하면서 동조하는 것이고, 불쾌한 것은 '아.. 저거 왜 들춰내는 거야'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홍상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치졸한 인성을 철저하게 영화에서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삶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도 특별한 것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TV나 다른 영화에서 보여주는 포장술을 걷어낸 각자의 인생은 얼마나 비루한 것인가.  

   홍상수는 그런 포장지를 다 걷어내고 인간 본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월한 수컷이고자 증명하는 남자들, 찝찝한 상황에서 혼자서 벗어나고자하는 치졸함, 감정의 기복, 자존심을 위한 말싸움 등 우리가 인생에서 당하고 행하는 모든 일들이 그의 영화에 다 나와있다. 즉,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것은 <올드보이> 이우진의 말처럼, "인생을 통째로 복습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홍상수의 영화가 [인간극장]과 같은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그는 영화적 형식을 끊임없이 찾고 있으며 각 영화마다 다르게 구성해왔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는 4명의 등장인물을 각각 주인공처럼, 마치 4편의 단편영화처럼 찍었고, <강원도의 힘>에서는 하나의 이야기를 앞, 뒤가 아닌 화자의 시선으로 나누어 찍었고, <오! 수정>에서는 하나의 이야기를 추억하는 각자의 기억에 따라 서로 다르게 찍었고, <생활의 발견>에서는 같은 이야기를 주체와 객체를 서로 바꿔 다른 공간에서 반복되는 이야기처럼 찍었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는 세명의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다가 중간에 두명의 주인공이 사라지고 혼자남은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끌어갔고, <극장전>에서는 영화속 영화와 영화속 현실을 찍었고, <해변의 여인>에서는 결코 만날 것 같지 않던 두 여자들이 한자리에 서로 만나는 '마술'을 보여주었고 <밤과 낮>에서는 처음으로 편년체 형식을 썼으나 여주인공의 과거와 미래가 걸쳐있는 전인미답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만큼 홍상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을 찾아서 '영화적'으로 보여주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마치 지금까지의 모든 홍상수 영화의 집합체이다. 이제 그는 각 영화에서 개별적으로 다루던 기억과의 싸움을 그의 전 영화로 확장시킨 것 같은 느낌일 정도로 전작들의 등장인물들이 했던 상황과 대사가 무차별적으로 쏟아져나온다. 그렇다고 힘든 영화는 아니다. 초기작에서 보여주었던 위악스러움은 많이 사라졌고, 살벌한 유머도 많이 유해지만, 그래도 홍상수는 홍상수다. 계속 지속되어왔던 '죽음'이라는 테마는 그게 진심이든, 그냥 한 말이든 이번에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것은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하루하루를 떼우며 살아가는 것이라면, 굳이 홍상수의 영화를 찾아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살아가는 것이라면, 홍상수의 영화를 꼭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의 영화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진 않지만, 생각할 시간을 준다. 요즘 같은 세상속에서 사색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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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 컬렉션 박스세트 (4disc) - 고려장, 충녀, 육체의 약속, 이어도
김기영 감독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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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얘기하는 옛날 '한국' 영화들은 구리다. 연기는 물론이고 촬영, 조명, 미술, 음악... 참으로 천편일률 적으로 유치했다. 이야기는 또 얼마나 한심하고 인물들은 왜 그렇게 전형적인지. 물론 유신시대에 영화사 통폐합과 외화 쿼터제, 문예영화 등이 한국 영화계의 발전을 막았다고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 때 한국영화는 상당히 구렸다. 

   그런 시대에서 활동한 김기영 감독은 거의 UFO같은 존재다. 이야기의 소재도 그렇고, 소품의 활용이나 세트 미술같은 것을 보면, 이게 정말 그 당시의 한국영화가 맞는지 의심하게 되고 그 의심이 경탄으로 바뀐다. 특히 등장인물들을 극한 상황에 몰아 넣어 가식, 위선, 체면 등  인간임을 나타내는 그 모든 포장을 제거하고 인간 본성만 남은 모습을 철저하게 관찰자의 시점으로 냉정하게 바라보는 모습은 지금 보아도 덜덜 떨리게 만든다. 

   그는 약 30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지금 세상에 남아 있는 작품은 (아쉽게도) 22편이다. 그 중 <고려장>, <충녀>, <육체의 약속>, <이어도> 4편이 이 DVD 세트에 담겼다.  

   1961년에 제작한 <고려장>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고려장 설화를 그린 영화다. 그렇다고 <전설의 고향>류의 영화라고 미리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 영화는 정말 '처절하게' 생존의 법칙을 다룬다. 먹고 사는 생존 앞에선 인간이 만들어낸 삼강오륜이 필요가 없어진다. 배고픔 앞에선 부모, 자식의 관계, 즉 가족은 내가 먹을 것을 빼앗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자신(과 처)의 생존을 위해서 고려장터에 어머니를 버리는 아들. 물론 원해서 올라갔지만 막상 죽음이 닥치니 더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어머니. 절대로 놓치지 말고 두 눈 부릅 뜨고 지켜보아야할 영화다.  

   1972년에 제작한 <충녀>에는 익숙한 배우들이 나온다. 윤여정, 남궁원 두 배우가 주연으로 나오고 이대근, 사미자가 조연으로 잠깐 비친다. 본처와 첩이 서로 남편을 차지하려는 내용인데, 이 내용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실이 더 놀랍다(첩이라니! 이 무슨 조선시대스러운 단어인지..). 기이한 대사와 황당한 전개. 출산의 기대와 악몽. 두 여자들 사이에 낀 무(기)력한 가장. 영화는 일반인이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을 훌쩍 뛰어 넘는다.  

   1976년에 제작한 <육체의 약속>은 이만희 감독의 <만추> 리메이크다. 이만희 감독의 <만추>는 프린트가 유실돼서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영화지만, 어렸을 때 김수용 감독의 <만추>를 본 기억이 있다. 가슴 절절한 멜로드라마도 김기영 감독이 찍으면 정말 기괴하게 변한다. 또 변주되는 주제. 인간이란 무엇인가?  <고려장>이 '인간 본성'을 (잔인한 방법으로) 물어보았다면, <육체의 약속에서>는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영화다. 그리고 김기영은 그것을 '약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약속을 지키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기 때문이다.  

   1977년에 제작한 <이어도>는 문예영화로 기획된 영화다. 문예영화는 흥행에 상관없이 정부 당국자들의 눈에만 띄면 성공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외화 쿼터제 때문) 상업적인 면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고, 영화적 실험을 할 수 있는 감독들의 장이 될 수 있었다. (그런 경우는 임권택 감독뿐이었고 대다수의 경우는 대충 만드는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시기가 한국영화의 암흑기라 불린다) 2000년대 들어서야 지구 온난화가 이슈화 되기 시작했는데 개발독재시대인 70년대에 환경문제를 거론하는 것도 놀랍지만, 삼대가 바다에 빠져 죽는다는 운명론적 이야기와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기이함과 무속신앙이 이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더 괴이하게 만든다. 특히 박정자, 이화시의 연기는 정말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보는 것은 특별한 체험이다. 그의 영화 중 이제 고작 6편만이 DVD로 출시되었다. 이제 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이제 DVD 밖에 없다. 영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 인간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제발이지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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