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 - Michael Jackson’s This is i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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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처음엔 신파일 것이라 생각했다. 생전의 마이클을 추억하고 울먹이는 지인들의 모습이 나오고 그의 장례식 장면이 나오며 플래시백 형식으로 리허설 장면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사후에 급조되어 만들어진 영상물이니 그럴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각오를 단단히 하고 극장에 갔다.  

   그러나 영화는 그렇지 않았다. 

   영화는 『THIS IS IT』콘서트에 참여하는 스태프들의 인터뷰로 시작한다. 어린시절부터 자신의 우상이었던 마이클 잭슨과 함께 공연에 참가한다는 사실에 다들 눈물을 글썽이고 벅찬 마음을 가누지 못해 어쩔줄 모르는 모습을 영화는 천천히 보여준다. 그리고 시작되는 마이클 잭슨의 리허설.

   지금껏 우리가 접한 마이클 잭슨의 공연 모습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주의자'의 모습이었다. 마이클 잭슨과 댄서들과 밴드들과 스태프들이 하나가 되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무대.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그 완벽한 공연을 위해 그들이 얼마나 수많은 수행착오를 겪는지를 보여준다. 중간 중간 밴드, 댄서 혹은 그 외의 상황들로 엇박자가 날때마다 마이클 잭슨은 말한다. "괜찮아. 이래서 리허설이 필요한 거야." 처음으로 공개되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에 이제는 더이상 그가 없다는 사실에 괜시리 더 슬퍼진다.   

   모든 곡이 인상적이었지만, 4~50년대 느와르 필름을 인용한 「Smooth Criminal」과 3-D를 활용한 「Thriller」는 리허설 장면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그 엄청난 물량공세와 자로 잰듯한 군무. 이미 가수로서 이룰 것을 다 이룬 사람이 궁극의 엔터테인먼트를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고 노력하는 모습은 그저 '감동'이라는 말밖에 생각이 안든다. 

   개인적으로 울컥했던 장면은 그가 「I'll be there」를 부를 때였다. 성인이 되고 나서 <잭슨 5>시절의 노래를 부른 모습을 처음 봐서 그런 것일 수도 있으나, 6세의 미성과 50세의 목소리가 오버랩됨을 느끼면서, '아, 이젠 더 이상 저 목소리를 들을 수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거렸다.

   지금에서야 이런 가정은 부질없겠지만, 만약 이 공연이 성사되었다면, 정말 엄청난 공연이 되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THIS IS IT!(바로 이거야!)"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THIS IS IT(이게 끝이야)"이 된 기막힌 아이러니.  

 

   10월 마지막날 씨너스 이수 1관 17시 50분에 약 10명정도의 사람들과 관람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다른 재미있는 영화들을 포기하고 기어이 이 리허설 공연을 선택한 사람들을 보며 괜한 연대감이 들기도 했고. 다들 크레딧이 완전히 올라갈 때까지 끝까지 남아있었다. 극장에 불이 켜지고 나자 누군가 나직하게 내뱉는 한마디. "아쉽다." 이처럼 그 상황을 잘 묘사하는 적합한 단어가 더 있을까?

   나도 그에게 인사를 해야겠다. 영화 속 마이클이 했던 것처럼. "God bless you, Michael." 

 

 

 

<SET LIST>  

1. Wanna Be Startin' Somethin'
2. Speechless
3. Jam
4. They Don't Care About Us (with snippet of "HIStory")
5. Bad (with snippet of "Mind Is The Magic")
6. Human Nature
7. Smooth Criminal
8. The Way You Make Me Feel
9. I Want You Back
10. The Love You Save 
11. I'll Be There
12. Shake Your Body (Down to the Ground)
13. I Just Can't Stop Loving You
14. Thriller (with snippet of "Threatened")
15. Beat It
16. Black or White
17. Earth Song
18. Billie Jean
19. Man in the Mirror
20. This Is It
21. Heal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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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oco79 2010-01-22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is is it. 그의 목소리는 한마디로 soulful. 극장관람시기를 놓치고 며칠전 dvd로 봤었는데, review보니 영화 다시 보고 듣고싶어졌어!

2010-01-22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3 1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5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커피  

   일요일 아침에 커피 한 잔. 일주일에 한 번 즐기는 호사다. 주말엔 특별히 알람에 의지하지 않는데도 평상시보다 일찍 일어나게 된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둑어둑한 하늘을 뒤에 두고,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머그컵에 가득 커피를 내린다. (이럴거면 도대체 왜 에스프레소 머신을 산건지..) 정장바지에 벨트를 두르는 대신 편안한 추리닝 바지를 입었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일에서 해방되었다는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낀다. 해가 고개를 내밀기 직전의 하늘과 차가운 공기, 그리고 따스한 커피 한 잔. 어쩌면 세상은 살아갈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 라디오 북클럽 

  

   일요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이유 중 하나는 MBC에서 방송하는 라디오 북클럽 때문이기도 하다. 이 프로그램의 열혈 청취자는 아니나, 징진 감독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기대어 책을 듣는 기분이 좋기때문에 찾아 듣고는 한다. 다시듣기 서비스도 제공되지만, 신기하게도 이 프로그램은 일요일 아침 7시, 즉 그 방송시간에 듣지 않으면 흥취가 떨어진다. 마치 일요일 아침을 선점이라도 했듯이.  

   오늘은 발레리나 김주원씨가 나와  <음악가와 연인들>이라는 책을 소개해주었다. 내밀한 예술가들의 삶. 만일 그들의 삶이 괴팍하고 용서받지 못할 행동으로 점철되었는데 그들의 작품이 아름답고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면, 우리는 그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삶과 예술을 분리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방송은 흥미로운 내용으로 진행되었으나, 혼자서 괜시리 이런 생각까지 해보았다. 조용한 아침은 적막한 밤처럼 사색(혹은 망상)의 공간을 제공하는가 보다.  

   김주원씨와 짧은 만남을 가진 후, 장진 감독이 읽어준 책은 김영하 작가의 <오빠가 돌아왔다>였다. 낄낄거리며 읽은 책이었는데 장진 감독의 차분한 목소리로 들으니 더욱 재미있었다. 지현우가 주연으로 캐스팅된 영화얘기도 있었는데 어떻게 진행됐는지 궁금하다. 

 

3. 그리고 어김없이 돌아오는 끼니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 새 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 없었다. 

- 김훈 <칼의 노래>에서- 

   밥을 먹는 것은 시간을 견디어 내는 힘을 얻는 것. 밥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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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뷰 

   이벤트에 혹해서 사흘동안 6편의 리뷰를 써나갔다. 그 중 이벤트 관련 리뷰는 4편, 나머지는 구매관련 리뷰였다.  

   리뷰라는 것은 어느정도 내 속에서, 글을 읽은 만큼의 시간을 들여 치열하게 고민을하고 생각을 해서, 내 안에서 곰삭아야 나오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너무 쉽게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0대도 아닌데 이런 치기어린 글을 올려도 되는지 반성한다.  

   그래도 이런 기회가 있어 그동안 내 머리속에서 묵혀두었던 생각을 꺼내볼 기회가 있는 것에 고마워해야겠지. 여유가 있으면 엉켜있는 생각들을 지금보다 더 잘 풀 수 있겠지만, 한정된 시간에 빨리 풀어놓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구한테 보여주는 글이 아닌, 내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신중히, 열심히 쓰자. 

 

2. This is it.  

   10월 마지막 날, 마이클 잭슨의 마지막 공연을 보러 간다. 2009년. 언론의 편견으로 오해를 받은 두 사람이 죽었다. 삶에 대한 태도와 인식에 대한 반성.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그저 보이는 것만 보고 그 너머는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그들의 죽음은 세상 사람들에게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지만, 실제로 그 이상의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오늘, 그 중 한명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특별한 작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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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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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 Meninas(궁녀들), 부분> 디에고 벨라스케스 作 (1656년)

   에스파냐의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여러 작품을 남겼으나, 그중 유명한 것은 왕녀 마르가리타를 그린 작품들이다. 위 그림은 마르그리타 공주와 그 주위에 궁녀들이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공주 주변에는 '세상의 모든 빛이 집중된 것 같이' 빛나고 있다. 반면에 오른쪽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일그러진 표정을 한 여자 난쟁이 궁녀가 있다. 여자 난쟁이의 뚱뚱한 몸과 일그러진 표정은 어린 마르가르타 공주와 비교되어 더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그림의 주인공은 마르그리타 공주이지만 벨라스케스는 이 작품의 제목을 <Les Meninas(궁녀/시녀들)>라 지었다. 첫번째 아이러니. 혹은 비교대상을 더욱 부각시켜 드러내고자 했던 것을 더 빛나게 한 예술가의 잔인함.

   마르그리타 공주는 15세에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 1세와 결혼했으나 22세가 되던 해 넷째 아이의 출산 도중 사망했다. 후에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벨라스케스의 그림과 마르그리타 공주의 비극적 삶에 영감을 얻어 피아노 독주곡을 작곡했으며 후에 관현학곡으로 편곡했다. 그게 바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다. 파반느는 궁중무곡을 가리키는 단어다. 죽은 왕녀인 마르가르타를 기리는 곡이었으면 조곡이 되어야 할텐데 무곡이라 명했다. 그리고 곡은 무곡임에도 불구하고 서정적이고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무곡이라 하기엔 제목의 '죽은 왕녀'라는 제목의 중압감이 느껴지고, 조곡이라기엔 꽤나 서정적이고 애잔한 곡. 두번째 아이러니.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역시 이런 아이러니에서 시작한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한 남자 이야기.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일까? 이거 자기 기만 아닌가? 대한민국 일반 평균치의 남자들이 어떤 존재인데... 얼마전 방영한 [재밌는 TV 롤러코스터] [남녀탐구생활]에서 밝힌 남자의 연령별 이상형을 보면 다음과 같다. 

▲ 남자의 나이대별 이상형
10대 남자의 이상형 : 예쁜 여자예요.
20대 남자의 이상형 : 예쁜 여자예요.
30대 남자의 이상형 : 예쁜 여자예요.
40대 남자의 이상형 : 예쁜 여자예요.
50대 남자의 이상형 : 예쁜 여자예요.
60대 남자의 이상형 : 예쁜 여자예요. 

   이런 게 남자다... 하지만 박민규는 시침 뚝 떼고 이 말도 안돼는 러브스토리를 진행한다. 그것도 정극으로. 첫 장(章)을 읽었을 때 난 박민규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글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12월 겨울의 눈내린 교외.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는 두 남녀. 만남. 헤어짐. 그리고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여기까지 읽었을 때 난 박민규가 '작심하고' 러브스토리를 쓰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두 번째 장부터 박민규의 우스꽝스럽지만 슬픈 우리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두 주인공은 사랑을 한다.  

   이 소설에서 박민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추의 굳어진 관습을 무력화시킨다. 아름다움이 시선을 끌듯 추함도 시선을 끈다. 그 둘은 양극단에 위치해있지만, 본질적으로 통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과 추함은 나이가 들면서 묻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우리는 유한적인 아름다움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박민규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빛을 조금씩 더 얻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처럼. 세상의 빛을 받고 있는 저 마르그리트 공주처럼. 그 옆에 있는 추한 궁녀처럼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의 빛을 받으면 무엇이 남는데? 

   우리의 삶은 '와와'와 '쯧쯧'에 지탱되어 왔다. 조금만 잘하면 '와와', 조금만 잘못하면 '쯧쯧.' 성장기때에만 이러는 줄 알았는데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명문대를 나오면 '와와' 그렇지 않으면 '쯧쯧.' 대기업에 다니면 '와와', 그렇지 않으면 '쯧쯧'. 연봉이 시원하면 '와와' 그렇지 않으면 '쯧쯧.' 이토록 남들이 정해놓고 남들의 '와와'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는 모습이 '이상적이고 바른' 롤모델로 정해져있는 2009년에 박민규는 "그렇게 아둥바둥 살 필요 있어? '와와'소리 안 들으면 어때? '쯧쯧' 소리 좀 들으면 어때? 네가 행복하면 그만이지. 자, 내 얘기 한 번 들어봐봐."라고 슬며시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난 실제로 그 선동에 넘어갔었다. 작년에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고 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 직장에 다니고 있다. 연봉이나 복지는 저번 회사보다 확실히 떨어지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나와 가족을 위한 시간을 보장받는다. 똑똑하게 살지는 않지만 행복하게는 살고 있다. 그리고 박민규는 내 이런 선택을 존중하기라도 하듯 이번 소설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 2009년은 (<삼미...>를 발표한) 1998년보다 점점 더 황폐해지고 있다. 국가는 부유해지고 있으나 개인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지고 있다. 이런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은 '사랑'뿐이다. 비록 그 사랑이 '슬픈 해피엔딩'일 지라도. 

   사랑이 있으면, 사랑을 하면, 비록 상처받을지라도 이 힘든 세상을 '같이'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덧붙임 

1. 박민규 작가의 인용은 점점 더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지구영웅전설>에서는 마블코믹스의 히어로들을,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는초창기 프로야구를, <핑퐁>에서는 인터넷 덧글과 엘엘쿨제이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는 벨라스케스, 라벨, 비틀즈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사가 대중문화에서 순수예술쪽으로 넓어지는 것 같으나, 그의 글을 읽으면, 이런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것 같습니다. '순수'문학과 문학의 구분이 무의미한 것 처럼요.

2. 뒤의 Writer's Cut을 처음 읽었을 때는 '사족'이라 생각했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왠지 슬퍼지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제 '해피엔딩'은 소설에서나 기대해야 하는 것일까요?  

3. 지금껏 박민규 작가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만 글을 써 왔습니다. 팬의 입장에서는 그가 쓴 3인칭 관찰자 시점의 글을 읽어보고 싶은 바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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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화화 되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난 반댈세.
    from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2009-11-27 09:32 
    0.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영화화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영화화 된다고 한다. 감독은 수백편의 CF를 제작한 오민호 감독이고 영화 제작사 아이디어 팩토리에서 제작을 한다고 밝혔다. (기사보기 클릭)      좀 더 기사를 살펴보자면 이렇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여자의 이야기 &
 
 
 
삼국지 세트 - 전10권 삼국지 (민음사)
나관중 지음, 이문열 엮음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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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게 삼국지는 책이나 글이 아닌 어떤 매체로서의 인상이 강하다. 그만큼 여러 경로로 삼국지를 접했기 때문이다. 

   처음 삼국지를 접한 것은 박홍근 작가가 글을 쓰고 신동우 화백이 그림을 그린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삼국지』였다. 당시 초등학생이 읽기에 엄청난 분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을 다 본 것은 신동우 화백의 그림때문이었다.(그렇다. 난 이당시 읽지는 않고 그림과 글자를 봤을 뿐이었다. 아무리 그림이 많을지라도 16권의 소설은 초등학생에게는 벅차다) 페이지마다 있는 그 그림이 없었더라면, 난 아마 그 책을 포기했을 것이다.  

   두번째로 접한 것은 1990년 MBC에서 신년특집으로 한 삼국지 애니메이션이었다. 블루 아이 섀도우를 바른 제갈공명, 꽃미남 유비, 금발머리의 조조(여기까진 그렇다 치자..), 조조를 연모하는 '여장수' 우금(응?), 닌자 부대를 이끄는 허저(뭐라?), 미니스커트(!)를 입은채 글라이더를 타고 날아다니는 여화(헉!!), 그리고 장엄한 결말은 유비와 조조의 일기토 대결(WTF!!). 말이 삼국지이지 삼국지의 인물들을 제멋대로 각색한 작품이었으나,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나와 같은 어린이들에게는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후에 3편으로 나눈 비디오 테이프를 교보문고 음반코너에서 기어이 사고 말았다.) 

   세번째로 접한 것은 같은해 여름에 개봉한 중국 영화 『삼국지』였다. 중학생 시절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손을 잡고 국도극장에서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그당시 14살 중학생의 눈으로 볼때에도 영화는 참으로 허접했다. 한정된 러닝타임 안에 수많은 인물과 사건을 다루려니 캐릭터는 캐리커쳐가 됐으며, 스토리는 요약 이상은 아니었다. 2시간 30분 가량의 영화였으나, 이야기는 적벽대전까지밖에 다루질 못한 것도 미완성인 느낌이 들어 실망이 컸었다. 

   그리고 그 해 『이문열 삼국지』를 읽었다. 

   이전까지 읽(고 보았)었던 삼국지가 어린 마음에도 유치하다고 느꼈었더라면, 『이문열 삼국지』는 달랐다. 『이문열 삼국지』를 읽는 순간, 문장에 품격과 힘이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이전까지 임정진 류의 하이틴 소설들만 읽었으니 그 충격은 더했다.(그렇다고 그당시 하이틴 소설이 수준이 낮다는 말은 아니다. 난 단지 '필력'에 대해 이야기한 것 뿐이다.) 지금까지 '이미지'로만 익혔던 삼국지를 활자를 통해 머리속에서 재구성할때의 희열은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어쩌면 난 처음으로 『이문열 삼국지』를 통해서 글을 읽는 방법과 즐거움을 익혔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머릿속에서 기억으로 존재해있던 이미지와 단순한 개념(유비-착한놈/조조-나쁜놈)으로 이루어진 캐릭터가 처음으로 피와 살을 가진 존재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작가 이문열의 힘이고 공이다. 평면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원작 소설속의 등장인물들이 고뇌하는 모습과 컴플렉스를 드러내는 모습을 작가 이문열은 본인의 역량을 바탕으로 풀어놓았다. 그것만으로 500여년전의 옛소설이 21세기에 걸맞는 현대소설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껏 이런 삼국지를 본적도 없었고, 독자들은 그에 걸맞는 대접을 해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 말해 『이문열 삼국지』이지 『삼국지』는 아니다. 정본이 아닌 원형이판평역본이다. 안타깝지만, 『이문열 삼국지』는 『황석영 삼국지』『본삼국지』의 대열이 아닌, 『고우영 삼국지』『창천항로』의 위치에 서 있을 각색 삼국지이다.(『황석영 삼국지』 또한 갖은 오역으로 유명하지만, 여기선 작가의 의견을 빼고 정본에 가깝게 번역했다는 데 의의를 두어 이렇게 분류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문열 삼국지』를 정본으로 여기고 있다. 이미 엄청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책이지만, 아닌 것은 아니기에 언급해 봤다. 예를 들어, 도스또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기에 어렵다고 누군가가 읽기 쉽고 재밌게 각 인물들에게 살을 붙이고 그 해석을 단 작품을 낸다면, 그 책을 읽은 사람은 과연 도스또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숱한 오류(이것은 이미 『본삼국지』의 저자 리동혁이 쓴 『삼국지가 울고있네』에서 충분히 밝혔다)와 아전인수격 평역(6권 적벽대전에서 제갈량과 관우에 대한 고우영의 해석 -책에서는 '누군가'의 해석이라고 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고우영의 해석이다. 『고우영 삼국지』를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을 정사를 끌고와서 비웃고는 본인은 8권 관우의 죽음에서 그 해석을 차용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소설이여, 역사가 되어라!'식의 평역은 이 외에도 굉장히 많다)은 이 장쾌한 문체로 이루어진 소설의 수준을 끌어내리고 있어서 심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정본 삼국지가 몸에는 좋으나 맛은 없는 '웰빙음식'이라면, 『이문열 삼국지』는 조미료가 듬뿍 들어간, 자극적이고 맛은 있으나 건강에는 좋지 않은 '불량식품'이다. 물론 몸에 좋은 음식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으나, 때로는 불량식품에 끌리는 게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치켜세우기도 하고 깍아내리기도 했으나, 『이문열 삼국지』는 내게 있어 처음 활자로 접한 『삼국지』였다. 문체의 마력에 흠뻑 빠져, 나중에 『황석영 삼국지』『본삼국지』를 읽을 때 굉장히 힘들게 읽었었다. 정본을 읽어보면, 작가 이문열의 필력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작가 이문열의 필력을 느끼고 싶으면 『이문열 삼국지』를, 그렇지 않고 1800여년간의 시간을 견디어 낸 역사, 전설, 신앙, 민중들의 바람을 책으로 엮은 고전 『삼국지』를 읽고 싶으면 다른 판본을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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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창천항로』작가적 상상력, 그 뛰어난 구라의 향연장
    from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2009-12-22 10:46 
       『삼국지』만큼 수많은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또 수많은 작가들이 각색한 작품은 없다고 본다. 독자들이 『삼국지』를 읽는 이유는 수없이 많겠지만, 작가들이 『삼국지』를 각색하는 이유는 아마도 단 한가지인 듯 싶다.     흔히 말하기를 『삼국지』는 세푼의 허구와 일곱푼의 진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저 '세푼의 허구'가 작가들의 상상력을 불러 일으킨 것 아니었을까. 20세기 말에 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