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훈, 독자와의 만남] 잘 다녀왔습니다.
리뷰의 허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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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김훈의 문장은 냉엄하고 엄정하다. 1인칭 시점의 글이건, 3인칭 시점의 글이건 간에, 그는 냉엄하고 엄정한 관찰자의 시점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기본 조건이야말로 그가 기자시절부터 단련해 온,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일 것이다.
그런 그도 피곤했던 것일까? 늘 세상과의 거리를 두고 있던 그의 시선이 『개』에서는 더할나위 없이 아름답고 아련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인간이 아닌 개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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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개에 대한 관심이 생겨 도감을 찾아보니, 개의 시각과 청각, 후각이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다면, 개가 느끼는 것은 인간이 느끼는 것 이상의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삶의 뛰어난 원형질을 지닌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그 삶의 뛰어난 원형질을 지닌 개가 되어 이 세상을 바라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삶은 삶을 삶 자체로 느끼지 못합니다. 글자, 매체,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 사이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우리의 삶을 차단합니다. 우리가 우리 몸으로 직접 개입하고 느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개는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개를 통해 우리에게 부당하게 개입하는 것에서 벗어나 세상을 직접 느끼는 것을 집필 의도로 삼았었는데, 그게 잘 표현됐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작가 김훈, 독자와의 대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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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대로 우리는 삶을 삶 자체로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하루 하루 살면서 겪는 현상이나 느낌을 개념화된 언어로 정리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느끼거나 (혹은) 뒤쳐진다고 느낀다. 이것은 실체가 없는 불안함이고, 대상이 없는 뒤쳐짐이다. 늘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안심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개는 그렇지 않다. 개에게는 언어가 없다. 개는 온 몸으로, 모든 감각으로 세상을 익힌다. 개 발바닥에 있는 굳은살의 정도가 개가 느끼고, 경험한 세상을 나타낸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현의 노래』를 통해 인간 삶에 대해, 역사에 대해, 민족과 국가에 대해, 예술에 대해 고민한 김훈은 더 큰 인간 삶의 원형질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바로 그 '개'를 주인공으로, 그 '개'가 바라본 세상을 '개'의 시선으로 글을 썼다. 그가 '개'가 된 덕분에, 그는 인간으로서 지닌 냉엄하고 엄정한 시선 대신 감각만으로 느끼는 따스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덕분에 소설은 다른 소설들과 달리 아름다운 문장으로 넘쳐난다.
소설은 4부로 나뉘어 있다. 1부에서는 '보리'와 그의 형제들, 어미 개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을 키우는 할아버지, 할머니, 댐 때문에 곧 수몰될 그들의 고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2부에서는 새로 이사간 어촌 마을의 일상, 3부에서는 '보리' 주인과의 끈끈한 정과 다른 개들과의 만남, 4부에서는 '소멸'에 대해 이야기한다.
개는 인간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혹은 할 수 없다). 개는 인간과는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경험한다. 개의 삶은 인간의 윤리나 지식으로 재단될 수 없다. 개는 체념하지 않고, 묵묵히 살아간다. 김훈은 어쩌면 개의 삶에서 인간 삶의 최정점을 보았는지 모른다. 인간을 속박하는 것에서 벗어나 인간 삶을 삶 그대로 느끼는 긍정적인 삶.
어쩌면 김훈은 다시는 이런 류의 소설을 쓰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개』이후, 그는 『강산무진』, 『남한산성』,『공무도하』의 무력감과 허무함에 진득히 빠진 '어찌할 수 없는' 인간 세계로 돌아왔다. 아마도 이 소설은 그의 독자와 작가 스스로에게 준 작은 '위로'일런지도...
쓰지 않고 혼자만 간직하려 했으나, 소설의 잔향이 계속 남아 있어 다른 책을 읽기 힘들다. 간직한 느낌을 끄집어내어 '보리'에게 작별을 고한다.
인간의 마을마다 서럽고 용맹한 개들이 살아남아서 짖고 또 짖으리. 개들아 죽지 마라.
*덧붙임
이 책을 읽고 나서 갑자기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이 떠올랐습니다. 영화속에서도 '보리'와 같은 진돗개가 나오지요. 허문영 영화평론가가 『해변의 여인』을 평할 때, 이 개에 대해 언급을 했었습니다. 같이 읽어볼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조금 옮겨 봅니다. 전문을 읽으실 분들은 아래 제목을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홍상수식 구원의 기적 <해변의 여인>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 2006.09.20
하얀 진돗개가 잘 차려입은 부부와 함께 봄의 해변을 거닐고 있다. 남자가 얼굴 나이에 비해 머리숱이 적고 둘 다 우울한 말투를 지녔으며 해변의 여행객들이 돌이를 예뻐하는 걸 귀찮아하는 기색이긴 하지만 부부는 기품이 있어 보인다. 해변에는 고즈넉한 평화가 깃들어 있고, 오후의 햇살은 화사하며, 개의 털은 햇살로 더욱 새하얗다. 그러나 개는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알지 못한다. 그의 이름은 ‘돌이’다.
돌이는 해변에서 한번 더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 뒤, 부부에 의해 버려진다. 돌이를 내버려두고 기품있던 부부가 낡은 프라이드 승용차를 타고 떠나버리자, 버림받은 돌이는 프라이드 뒤를 있는 힘을 다해 아스팔트길을 따라 달려간다. 며칠 뒤, 돌이는 펜션 종업원이자 펜션 주인의 조카에 이끌려 다시 해변에 나타난다. “삼촌이 키우기로 했다”고 그는 말한다. 여행객이 “차라리 잘됐다”고 말한다.
홍상수의 일곱 번째 영화 <해변의 여인>은 개의 영화는 아니지만, 어쨌든 이 개가 중요한 영화다. 돌이는 자주 나오진 않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역정을 겪는다. 인간들이 모텔과 횟집과 해변에서 짝짓기 수작을 벌이고 있는 동안, 그는 주인과 함께 우아하게 해변의 걷다가 다음날 주인에게 버려져 생사의 갈림길에 섰고 며칠 뒤 새로운 주인을 만나 다시 평화를 찾는다. 그 사이에 그의 이름은 ‘돌이’에서 ‘똘이’ 혹은 ‘똘’로 오인돼 불렸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새 주인에게 ‘바다’로 명명된다.
돌이는 인간의 서사를 옹호하거나 보충하기 위해 혹은 비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와 있는 게 아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시간을 살고 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누가 주인 행세를 하든 그는 살아간다. 우리는 그 개를 알지 못한다. 진돗개이긴 하지만(주인은 “진돗개라서 이발하지 않는다”고 이상하게 말한다), 그가 순종인지 잡종인지, 어떤 짝을 만나왔는지, 게다가 수컷인지 암컷인지도 알지 못한다(돌이는 대개 수컷의 이름이지만 바다는 대개 암컷의 이름이다). 또 그의 전 주인이 부유한지 가난한지 혹은 병들었는지 건강한지 알지 못하며, 주인 부부가 그를 왜 버렸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위험한 아스팔트길을 달리다가 어떻게 바다로 돌아왔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죽음 같은 시간을 거쳐 다시 바다로 와 있다. 개가 자신의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의 시간이 홍상수 영화에서 마련된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중략)
“바람은 딴 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김수영, <절망>) 온다. 그것이 기적이다. 그 기적은 누구도 모르게 돌이가 바다로 돌아왔을 때 이미 이루어졌고, 돌이는 이미 바다가 되어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홍상수 영화는 그렇게 넓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