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환상의 뒤섞임, 그 안에서 살아가기
"근데 사실 세계의 어떤 작품이건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영화가 허술해 보여요. 왜냐하면 활자는 디테일을 꼼꼼히 담아낼 수 있는데, 영화는 뭉텅뭉텅 이미지로 보여주어야 하니까요. 거꾸로 영화를 보고 원작을 보면 굉장히 지루해요. 이미지를 보며 감정을 이미 느꼈는데 활자로 일일이 그걸 묘사하고 있으니까 뻔해 보이는 거죠. 장르별 특색이라고 봐야죠."
-「송해성, 공지영의 대담」중에서, 『씨네21』 571호 -
공지영 작가의 저 말은 소설 『퀴즈쇼』와 뮤지컬 『퀴즈쇼』에도 관련한다. 뮤지컬도 영화와 마찬가지로 한정된 시간안에 이미지를 나열하고 그 순간에 감정을 고양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활자는 음미할 시간이 있지만, 이미지는 (순간적으로) 반응해야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실패한 것이다) 바로 그 차이가 두 매채간에 존재하는 안타까운 '사이'일 것이다.
소설 『퀴즈쇼』는 "오딧세이가 된 기분이야"라는 주인공 민수의 대사처럼, 거대한 서사시로 읽힌다. 마치 운명의 여신들이 더이상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민수의 운명을 직조해놓고, 민수는 나쁜 꿈을 꾸는 것 처럼 스멀스멀 더이상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빠져나올 수도 없는 선택을 (계속) 하게 된다. 현실의 시간으로 치면 약 두 달간의 일이지만, 감정의 강도는 마치 인간의 일생을 견딘듯한 느낌이었다. 소설 『퀴즈쇼』는 감정의 "서사시"인 셈이다.
뮤지컬 『퀴즈쇼』는 이 (대책없는 분량의) 소설을 별다른 각색없이 원작에 충실하게 만들었다. 뮤지컬은 상영시간에 맞추어 1부와 2부로 나누었다. 1부는 민수가 외할머니 '최여사'의 죽음으로 집에서 쫓겨나고 고시원에 생활하면서 옆방녀 '숙희'와 사랑하는 그녀 '지원'을 만나는 이야기까지 담았고 2부는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을 담았다. 뮤지컬에서 1부와 2부의 러닝타임은 각 1시간 정도로 동일했는데, 소설에서의 분량은 1부가 2/3, 2부가 1/3 정도다. 적절하게 끊고 강조했지만, 문제는 무리한 1부에 있다.
1부는 민수의 여자친구였던 빛나와 친구 정환의 이야기와 민수가 TV 퀴즈쇼에 출연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소설의 거의 모든 이야기를 집어넣었다. 무대는 최여사의 장례식, 고시원, 인터넷 퀴즈방, 면접장소, 편의점, 홍대 놀이터, 지원의 방으로 나누었고, 이 안에 소설에서 방사형으로 진행되었던 민수의 개인사, 88만원 세대의 일상의 비루함, 부모 없는 고아의 비애, 민수와 숙희와의 관계, 민수와 지원과의 관계가 숨이 찰 정도로 빠르게 나열된다. 소설을 읽고 간 사람들이야 이 내용을 알고 있으니 이 숨가쁜 서사를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처음 뮤지컬을 접한 관객들에게는 벅차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히려 과감하게 각색을 해서 내용을 좀 더 단선적으로 만드는 게 관객이 감정이입을 하는데 더 용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빛나'의 부재가 아쉬웠다. 소설에서 빛나는 민수를 가장 냉정하게 평가하고 사랑보다는 '계산'과 '평가'가 앞선 현실세계의 여자였다(그렇기에 민수가 회사에 들어가서 제일 처음 떠올린 사람이 지원이 아닌 빛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민수에게 있어 잔혹한 '악몽'같은 존재인 그녀가 무대에서 어떻게 형상화될지 궁금했었는데 볼 수 없어 유감이다.
이제까지 싫은 소리만 했는데, 사실 뮤지컬 『퀴즈쇼』는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은 경우이다. 일단 인터넷 퀴즈방은 어떻게 묘사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었는데, 무대에 구현된 것을 보고 무릎을 쳤었다. 기발하고 스피디한데도 무대에 집중할 수 있는 기발한 연출이었다. 숙희와 지현을 동등하게 배분한 것도, 그리고 1부의 마지막, 지금껏 민수가 겪었던 모든 인물들이 '기어나와' 민수를 선택의 '막장'으로 밀어붙이는 묘사도 뛰어났다. 책에서는 점층적으로 쌓여가는 감정으로 스산함을 느꼈었다면, 뮤지컬에서는 한번에 폭발하는 강력한 감정을 선사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뮤지컬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2부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활자로 묘사되어 상상으로만 존재했던 회사와 회사의 인물들, 퀴즈대결이 눈앞에서 형상화된 모습은 상당히 근사했다. 정신없이 벌어지는 '훈련'과 '퀴즈대결'을, 마치 '군무'와도 같이 춤을 추듯 움직이는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은 뮤지컬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소설과 뮤지컬의 결정적인 차이는 민수가 회사를 나오는 장면에 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굳이 밝히지 않겠지만, '인생은 퀴즈쇼다'라는 명제에서 소설이 '쇼'에 방점이 있었다면, 뮤지컬은 '퀴즈'에 방점이 있다. 그 차이는 민수가 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사유의 순간보다는 즉각적인 감정을 끌어내야 하는 매체의 특성상 잘 각색했다는 생각이다.
인물들의 묘사는 좀 아쉬운 면이 있다. 원래 김영하의 인물들이 가벼운 듯 보여도 특유의 복잡다단함으로 쉽게 단정짓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뮤지컬에서는 그들의 단면만을 본 느낌이었다. 이것 또한 매채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대신 '유리'의 묘사만큼은 확실히 뛰어났다. 물론 그런 정신나간 인물을 묘사하는 건 캐리커처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하지만. ^^;
오늘 1월 2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뮤지컬 『퀴즈쇼』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다음 번에 재공연할 때는 내용을 조금 빼서 소설을 모르는 관객들이 훨씬 더 쉽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신시 컴퍼니 여러분들. 좋은 공연 만드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좋은 기회를 주신 문학동네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 덧붙임
뮤지컬 중에서 가장 반가웠던 장면은 MUSE의 「unintended」가 흘러나올 때 였습니다. 소설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던 부분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