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시 시작해요."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1월 3주

   <페어러브>는 (이미 알려진대로) 형만(안성기)과 남은(이하나)의 사랑이야기다. 단, 이들의 관계는 (조금 혹은 매우) 특별한데, 남은은 형만의 친구 딸이다. 굳이 유교권 국가의 특성이 아니더라도, 동서고금을 통틀어 이런 사랑은 본인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둘러싼 주변에서도 납득하기가 힘들다. 이들의 사랑은 수 많은 난관에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1. Fair Love (공평한 사랑) 

   형만은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지만 끊임없이 반문하고 회의한다. 그의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과는 조금 특별하게 흘러간다. 상대가 친구의 '딸'이기 때문이다. 형만은 이것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끊임없이 반문한다. "내가 이래도 되나?" 형만이 사랑에 빠지기 위해선 일단 자기 자신부터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그 후엔 그의 주변사람들의 분노와 비야냥을 설득해야 한다. "사실이냐? / 야! 이건 아니지. / 늙으막에 딸같은 여자애랑 연애하려니 고생이 많네." 그리고 마지막엔 남은마저 설득해야 한다. "이젠 아저씨 말고 오빠라고 부르는 게 어때?

   기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보여지는 그들의 사랑은 우리가 해왔고 봐왔던 사랑과 다르지 않다. 그저 그들이 처한 상황이 특별하기 때문에 그들(이라기 보단 형만)은 사랑 말고 윤리적인 판단까지 고려해야만 했다. 숱하게 고민하다 내뱉는 형만의 한마디, "에잇! 내가 뭐 죄짓는 것도 아니고. 그저 처녀총각이 만나 연애한다는 건데, 내가 왜 이래야해?" 맞는 말이다. 그들의 사랑은 사랑이다. 특별한 것 없는 일반적인 사랑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사랑이다. 페어 러브. 

 

 

1-1.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상처를 주는 사랑 

   <정사>의 사랑은 윤리적인 틀 안에선 불륜의 범주에 해당한다. 잘나가는 건축가와 결혼해 10살난 아들을 둔 서현(이미숙)이 그녀의 동생과 곧 결혼할 우인(이정재)를 만나서 한순간에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는 애틋하다기 보다는 안타깝다. 이들의 사랑은 설득의 대상이 너무나 많다. 서현의 남편, 아들, 그녀의 동생,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포기할 수 없는 안락한 생활 등.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이루어 놓은 세상을 포기하지 않은 채, 밀회를 즐기는 것 뿐이다. 하지만, 비밀은 영원할 수 없고 사랑엔 댓가가 따른다. 

   서현의 남편(송영창)은 이 일을 무마하려고 한다. 허상으로 채워진 안락한 부르주아의 세계를 깨뜨리기엔 그의 자존심은 허약하다. 하지만 서현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한다. 아들의 체육대회. 아들을 응원하러 간 서현이 우인을 보고 학교 과학실에서 정사를 벌인다. 그때 갑작스럽게 보여지는, 두리번거리며 엄마를 찾는 아이의 모습. 책임과 윤리 사이에 부유하는 서현의 사랑은 정말이지 안타깝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상처는 공평하지 않다.  

 

2. Fair Love (공정한 사랑) 

   영화 초반부. 형만이 남은의 집에 찾아갔을 때 남은이 이야기한다. "참 이상해요. 아빠가 돌아가실 때는 별로 울지 않았는데, 기르던 고양이가 죽었을 때는 시도때도 없이 계속 울었어요. 전 나쁜앤가 봐요." 그러자 형만의 말, "원래 내가 받은 사랑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내가 준 사랑은 기억에 많이 남는 법이거든. 그래서 부모가 죽었을 때 보다, 자식이 죽었을 때, 부모가 더 슬피 우는 것이지.

   덜 사랑하는 자가 '연애'라는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글을 어디에선가 읽은 것 같다. 맞는 말이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사랑은 늘 50:50으로 공정한 법은 아니다. 처음에는 50:50으로 사랑했다 하더라도 시간과 감정의 마모로 인해 그 양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양이 달라지면 종내는 파국을 맞기도 한다. 

   형만과 남은 역시 50:50의 사랑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을 둘러싼 수 많은 상황들과 그들 자신의 세계관의 충돌로 다른 사랑들과 똑같은 위기를 맞게 된다. 기계를 다루는 일이라면 모르겠으나, 사람을 다루는 일은 처음인 형만에게, 이런 위기는 힘이 든다. 하지만, 그런 위기는 사랑을 겪게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으레 겪는 것이기 마련이다. 다만 극복하느냐, 포기하느냐의 갈림길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어느 누가 더 주거나 덜 받은 것이 아닌, 서로 (공평하게) 사랑했다. "우리 이제 다시 시작해요."라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의 삶에 깊숙히 개입하고 영향을 주었다. 휘풀어진 그들의 삶은 '다시 시작'해서 하나의 완전한 사랑이 될 것이다. 사랑은 서로에게 공정한 것이다. 페어 러브. 

 

2-1.  기억에 머무는 사랑, 가슴에 머무는 사랑 

   하지만 아무리 다시 시작한다 하더라도, 그간의 상처를 봉합할 수 있을까? 그럴바엔 아예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은 그런 상상을 실제로 스크린에 그려냈다. 

   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은 사랑에 빠졌지만, 날이 지날수록 권태기에 빠지고 그들의 사랑에 위기가 찾아온다. 그래서 그들은 이별을 하고 서로의 기억을 지우기로 합의한다. 클레멘타인과 사랑했던 기억을 하나씩 지우면서,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결국 기억은 지워지고 그는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을 지웠다고 해서, 그 사람을 완전히 잊을 수 있을까? 머리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몸은 기억할 것이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다면, 그들은 알 수 없는 호감에 멈출 것이고, 또다시 사랑에 빠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효기간이 있는 사랑에 대한 공포감을 클레멘타인은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은 언젠가 내게 실망을 할 것이고, 우린 서로에게 싫증을 느낄 것이고, 둘이 만나도 전혀 새롭지 않으며 어색한 침묵만이 계속해서 흐를거에요." 그러자 조엘의 대사. "(그런 생각따윈 잊어버리고 지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순간을) 즐겨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면, 설사 서로에 대한 기억이 지워진다 하더라도 우리의 가슴은 상대방을 알아볼 것이다. 단, 어느 누구의 일방적인 사랑이 아닌, 공평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할 것이다. 

 

3. 다시 <페어 러브> 

   이번주에도 시놉시스만으로도 사랑스럽고, 벌써 입소문이 심심치않게 돌고 있는 개봉영화들이 즐비하지만, 저번주에 이어 이번주에도 같은 영화를 소개했다. 간만에 이렇게 사랑스런 영화는 오랜만인 것 같기도하고, 완성도나 재미면에 있어서도 빠지지 않는데도, 상영관 수 축소와 교차상영의 비애로 아마도 이번주가 지나면 거의 상영관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한 <페어 러브>가 너무 안타깝다. 그저 이 블로그에 올리는 글을 누군가 읽고, 이 글을 퍼가서 다른 블로그나 게시판에 올려 입소문이 나, 이 영화가 조금 더 많은 관객들을 만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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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01-2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감상을 하셨군요.
꼭 보고 싶어지는 영화입니다.

Seong 2010-01-21 10:26   좋아요 0 | URL
토요일에 한 번 더 볼 예정입니다. 거의 모든 상영관에서 내렸고 남은 상영관마저 교차상영이네요.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고맙습니다. ^.^;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의 삶과 문학
박해현.성석제.이광호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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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한 편의 시집을 내고 만 28세에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요절'한 한 사내의 삶은 결국 신화가 되었다. 기형도의 극적인 삶(처절한 가난, 풍에 쓰러져 식물같은 아버지, 신춘문예 등단, 일간지 기자, 20대에 죽음 등)은 그의 염세적인 시와 맞물려 이제는 그 누구도 폄하하지 못할 거대한 하나의 세계로 자리잡았다. 

   이 책은 기형도 사후 20년을 맞이해, 점점 더 단단해지는 '기형도'라는 신화를 깨뜨리고 있다. 그는 신화속의 인물이 아니고, 그저 섬세한 인간이었다. 책은 기형도의 시를 하나의 텍스트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가족, 학생, 기자, 시인 등 그의 삶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추억을 털어놓아 그를 인간적인 모습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그가 발표한 시가 한국 문단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분석/평가하기도 한다.  

   그가 요절한지 20년이 지났지만, 그의 신화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두터워져 갔다. 이 책은 만신전에 오른 그를 다시 인간의 자리, 시인의 자리에 내려놓는 작업이다. 어쩌면 이런 작업을 기형도 자신이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도 인간이었기에. 불안한 20대 청춘이었기에. 너무나도 나약하고 섬세한 사람이었기에.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노래 부르는 것을, 시를 쓰는 것을 좋아했고, "경악! 경악!", "아, 절망! 절망!"이라는 짧은 단발마적인 단어들을 입에 달고 생활했던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그는 어떤 작품을 발표했을까? 이런 부질없는 상상 또한 안타까움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만... 

   그의 시(詩)대로, 그의 삶은 책이 되었다. 이 책은 기형도의 삶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물론 그가 살아있었더라면, 대부분 검은 페이지로 만들었겠지만서도. 하지만, 그를 읽은 사람이라면, 결코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 「오래된 書籍」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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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무역,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거래>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공정무역,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거래 - 공정무역 따라 돌아본 13개 나라 공정한 사람들과의 4년간의 기록
박창순 외 지음 / 시대의창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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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 『공정무역,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거래』는 제목처럼 어렵거나 딱딱한 책이 아니다. 책을 펼치기 전에는 이해 못할 어려운 단어가 행간에 포진해 있을 것 같고, (적어도 내게는 쥐약인) 경영/무역 용어가 난립하는 게 아닐까 상당히 고민했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진 생각이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책은 인문서적이라기 보다는 거의 에세이에 가깝다. 이 책은 공정무역에 관심을 가진 박창순, 육정희 부부가 공정무역국을 취재한 내용을 기술한 책이다. 책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공정무역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기 보다는, 저자들도 잘 모르는 '공정무역'을 직접 취재하고 몸으로 부딪혀서 알게 된 내용을 재미있게 서술했다. 제목만 보고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조금 모자란 700여페이지에 기술된 공정무역에 대한 내용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공정무역이란 단지 착한 소비가 아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정신이다. 많이 가진 자가 덜 가진 자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거래다." 책은 이 정의가, 공정무역 생산국에서는 어떻게 행해지는지, 공정무역 소비국에서는 어떻게 행해지는지를 꼼꼼히 기록한다. 

   공정무역은 단순한 기부행위가 아니다. 품질이 떨어지는 상품을 원조의 목적으로 구매하는 것이 아니다. 인도, 네팔, 필리핀, 가나, 스리랑카, 파키스탄의 생산자들은 소비자들이 당당한 상품으로 구매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거지가 아니다. 소비자들이 정당한 가격으로 그들의 물건을 산다면, 현재의 불평등한 구조가 많이 개선될 것이다. 

   물론 이 공정무역 자체가 지구상의 모든 불평등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정무역이 이 모든 불평등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첫 번째 단추가 될 것은 확실하다. 공정무역은 단순한 소비활동이 아닌, 환경과 인권이 포함된 '사회 활동'이기 때문이다.

   공정무역에 대한 지식만을 원한다면, 굳이 이 책을 구입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은 리뷰에 언급한 내용이 각 국가별로 반복해서 나온다. 더구나 이 책은 다른 책에 비해 판형도 크고 종이도 두껍다. 침대에 누워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책상에 앉아 하나하나 차근차근 각 나라의 사례를 읽으며 우리의 모습을 뒤돌아볼 기회를 주는 책이다. 

   그것마저도 귀찮다면, 적어도 이들 상호명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두레생협연합회, 아름다운가게, YMCA 전국연합, (주)페어트레이드 코리아, ICOOP 한국생협연합회, 공정무역 가게 울림. 이들 회사/단체는 한국에서 공정무역 제품을 판매하는 곳이다. 지금 한국에 들어오는 공정무역 물품은 극히 제한적이지만, 이들 제품을 소비하는 것만으로도 공정무역을 실천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적극적인 지지는 자신의 지갑을 여는 것이다. 우리의 소비행위가 아프리카나 인도의 누군가에게 긍정적 영향도, 부정적 영향도 끼칠 수 있다. 지구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존재들이다.

   마지막으로 네덜란드 막스 하벨라르 재단의 프란스 신부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리뷰를 마친다. 

   
 

하지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비자들이 제품을 사는 것은 투표와도 같습니다. 소비자들은 자신의 소비 태도에 따라서 가까운 세상 혹은 먼 미래가 결정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덧붙임 

1. p30에서 아일랜드 그룹 '시구르 로스'는 '시규어 로스'가 맞습니다.  

2. 제목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은 (당연하게도) 김연수 작가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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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러브 - The Fair Lov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누구에게나 사랑은 제가끔, 특별하게 존재한다. 아무리 평탄한 사랑을 한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의 사랑은 항상 특별하게 기억(혹은 윤색)된다. 그 이유는, 사랑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관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페어러브>는 이보다 조금 더 특별한 관계에서 시작한다. '친구의 딸'이라는 관계와 약 25년간의 나이차이. "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사랑에 빠졌을까?", "이들은 주변의 시선을 무릅쓰고 사랑을 지킬 수 있었을까?" 영화를 보기 전에 머리솟에 맴돌던 질문들은 영화를 보고 난 후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기 보다는 생각이 무력화 된 경우다. 이 영화는 '사랑'이 아닌,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형만(안성기)은 카메라 수리공이다. 그는 나이 50이 넘을 때까지 연애는 커녕, 믿었던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조그마한 작업실에서 줄곧 고장난 카메라를 수리하는 일을 해왔다. 그러던 어느날 형만에게 사기를 친 친구가 죽기 전에 형만에게 자신의 딸 남은(이하나)을 돌봐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마지못해 친구의 유언을 수락한 형만은 약속대로 가끔 남은을 찾아간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그렇듯이 그들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형만은 작은 작업실 안에서 카메라 부품을 만진 채 50여년을 살아왔다. 그 작은 공간은 그에게 있어서 전부이고, 그는 그 안에 침잠해 있다. 남은이 형만과 사귀게 된 후, 남은은 형만에게 말한다. "사진 수리는 그만하고 작가가 되어보는 게 어때요?" 그러자 형만이 남은에게 하는 말, "인생이 그리 만만한 게 아니야. 다 자기가 조금씩 잘 하는 걸로 세상에 맞춰 사는 거지. 넌 뭐 대단한 줄 아니?" 이 말은 전형적인 기성 세대의 말이다. 자신의 가능성을 믿기 보다는 세상에 자신을 맞추어 가는 것. 그게 형만이 살아온 인생이다. 아마도 형만이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도 젊었을 때는 작가의 꿈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벽과 세월에 마모되어 그저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맞춰 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런 그가 '젊은' 남은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는 그를 둘러 싼 단단한 껍찔을 깨뜨릴 계기를 얻는다.    

 

남은과 형만

 

   <페어러브>를 형만과 남은의 '사랑'이야기로 바라보기에는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다. 영화에서 형만의 캐릭터는 이해하기 쉽게 그린 반면, 남은의 캐릭터는 '애매모호'하게 그렸다. 왜 그녀는 형만을 사랑하게 됐는지, 왜 그녀는 자기 또래의 아이들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지, 어떻게 그녀는 형만이 자신을 찾아 올 줄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남은은 설명하지 않는다(혹은 감독은 알려주지 않는다) 신기한 건 남은의 캐릭터가 애매모호하더라도, 영화는 삐끄덕거리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계속 나아간다는 점이다. 배우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이 생략한 부분을 감싸안는 힘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영화의 중간 장면이 반복된다. 형만이 남은과 그의 친구/동료들과 서해안에 놀러가서 회를 먹는 장면. 갑자기 형만이 일어나서 카메라로 구름을 찍는다. 그러자 친한 동료의 야유. "형이 뭐 스타글리치야? 맨날 구름사진만 찍게." 스타글리치는 사진과 회화를 분리하는 운동에 앞장 섰던 '작가'다. 남은은 그가 작가가 되길 원했다. 매일 조그만 작업실에 틀어박혀 되지도 않는 돈벌이를 하기 보다는, 형만이 진짜로 좋아하는 일을 하기를 바랐던 남은. 구름을 찍는 형만을 바라보며 남은은 이야기한다. "우리 다시 시작해요. 우리 다시 시작해요. 우리 다시 시작해요." 이 말은 우리의 '사랑'을 다시 시작하자는 말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인생'을, '삶'을 다시 시작하자는 말이기도 하다. 형만과 남은의 사랑은 그들의 인생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되었다.   

 

   "우리 다시 시작해요." 같이 시작하자는 말만큼 든든한 말은 없다. 형만은 다시 시작할 것이다. 두려워 할 필요 없다. 갑자기 등장한 신연식 감독의 말처럼 "결과는 오십 대 오십" 이니까.

  

 

*덧붙임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 하나. 형만이 친구인 강 목사에게 성경에도 사랑에 관한 구절이 있냐고 묻자 강 목사가 얘기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 4~7절)"  

형만이 이 구절을 읽고 이야기하죠. "뭐가 이렇게 어려워?" 그러자 강 목사의 대답. "그래, 어렵고 힘들어. 남들 다 힘들게 산다. (사랑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는) 너나 쉽게 살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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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설 원작 영화 아닙니다. 영화 원작 소설입니다.
    from 내가 읽은 책과 세상 2010-01-18 12:02 
       이번주 개봉영화 중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하고 있는 작품이라면 단연, <페어 러브>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두 배우, 안성기 씨와 이하나 씨가 주연이라는 말에 진즉부터 기대하고 있었던 영화였다. 그런데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알려진 내용은 다소 파격적이다. 친구의 딸, 아빠의 친구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굳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롤리타(Lolita)>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마무라 쇼
  2. 사랑, 누구에게나 공평한 그리고 서로에게 공정한
    from 내가 읽은 책과 세상 2010-01-20 11:30 
       <페어러브>는 (이미 알려진대로) 형만(안성기)과 남은(이하나)의 사랑이야기다. 단, 이들의 관계는 (조금 혹은 매우) 특별한데, 남은은 형만의 친구 딸이다. 굳이 유교권 국가의 특성이 아니더라도, 동서고금을 통틀어 이런 사랑은 본인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둘러싼 주변에서도 납득하기가 힘들다. 이들의 사랑은 수 많은 난관에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1. Fair Love (공평한 사랑)
  3. 『페어러브』영화와 소설, 그 이야기의 원형
    from 내가 읽은 책과 세상 2010-01-24 00:29 
       "근데 사실 세계의 어떤 작품이건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영화가 허술해 보여요. 왜냐하면 활자는 디테일을 꼼꼼히 담아낼 수 있는데, 영화는 뭉텅뭉텅 이미지로 보여주어야 하니까요. 거꾸로 영화를 보고 원작을 보면 굉장히 지루해요. 이미지를 보며 감정을 이미 느꼈는데 활자로 일일이 그걸 묘사하고 있으니까 뻔해 보이는 거죠. 장르별 특색이라고 봐야죠."    -공지영,「송해성, 공지영의 대담」 중
 
 
novio 2010-01-20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시작을 중심으로 이 영화에 대해 쓰셨네요. 그러고보니 새로운 시작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다시 시작해야죠^^

Seong 2010-01-21 09:19   좋아요 0 | URL
영화를 보고 나서도 계속 남는 말이 "우리 이제 다시 시작해요"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를 둘러싼 지금 상황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고맙습니다. ^.^

프레이야 2010-01-21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꼭 보고 싶어요. 새로운 시작, 설렘이네요.

Seong 2010-01-21 13:10   좋아요 0 | URL
꼭 보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아직까지 설레입니다.

고맙습니다. ^.^;
 
페어러브 - The Fair Lov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잠을 자려 자리에 누웠는데도 계속 떠오르는 영화 생각에 빙그레 웃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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