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을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할지 막막하다. 김연수 작가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내가 지금껏 접해온 소설이 아니었다. 소설의 시점은 엉켜있고, 앞부분에서 살짝 언급했던 이야기들이 아예 한 장(章)을 통해 이야기하는가 하면, 아직 언급하지 않은 사실을 마치 다 알고 있는 사실인양 능청맞게 기술해서 읽는이를 계속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마치 소설 전체를 대구법을 사용한 것처럼.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선 독서 중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확인하는 '번거로움'이 필요하고, 언급한 사실이 기술되기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수동적 읽기가 아닌 적극적인 독서를 요한다. 김연수는 왜 이런 방법을 선택했을까? 

   책을 읽는 동안에는, 이런 서술이 소설을 있어 보이게 하는 겉멋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겉멋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세대와 세계가 겹쳐지는, 우리가 느끼지만 알지 못하는 거대한 '우연'을 이야기 하는데 이 정도의 품은 팔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는 1991년을 살아가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이다. 소설은 '나'와 애인 '정민'의 이야기로 진행되지 않는다. '나'의 이야기에서 '정민'의 이야기로, 정민의 이야기에서 정민의 삼촌의 이야기로, 삼촌의 이야기에서 이길용/강시우의 이야기와 그의 일본인 애인 레이,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독일인 헬무트 베르크의 이야기로 그야말로 종횡무진을 한다. 마치 세헤라자데라가 이야기하는 '아라비안 나이트(千一夜話)'처럼.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모두들 우연한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이다. 정민의 삼촌의 내셔널 지오그라피를 헌책방에서 구하지 않았더라면, 이길용이 광주에서 야바위를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길용의 비디오를 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 소설은 이야기를 진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연한 사건에 휘말려 특별한 삶을 살게된 이들의 이야기를.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 두 번 태어난 사람들이다. 정민의 삼촌은 갑작스런 죽음과 갑작스런 폭행으로 세로운 세상을 만난 경우다. 정민은 그런 삼촌의 자살로 꿈 속에서 깨어났다. 이길용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다. 그는 '두 번 태어났다.' 한기복의 분신을 통해 - 더 정확히는 이상희를 만나고 나서 - 한 번, 다른 한번은 안기부를 통해서. 이들은 모두 우연한 사건을 통해 새로 태어나게 되었고, 새로 태어난 이들은 또 다른 의미로 세상에 영향을 주고 이 모든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어느 하나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 이 세상은, 아니 우주는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셈이다.  

   일제시대와 남북분단 그리고 독재와 광주와 민주화 운동. 이 모든 것은 한국에서만 일어난 개인적인 사건이 아닌 전 세계사적으로 촘촘히 얽힌 거대한 우연과도 같은 것이다. 운명같은 이 거대한 우연을 초라한 개인은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김연수는 그걸 표현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소설에서 언급한 칼 세이건 이야기처럼, 칼 세이건이 보낸 지구의 메시지는 우주 저 편의 또다른 칼 세이건(지구의 칼 세이건 처럼 외계 지적 생명체를 믿는 외계인)만이 듣게 될 것이다. '나'는 비로소 할아버지의 메시지인 '입체 누드 사진'과 태워버린 '비망록'을 수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난 '나'는 새로 메시지를 보낸다. '나'의 그 메시지는 지금 소설을 막 읽은 '내'가 될 것이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우리는 '모두인 동시에 하나'다. 누군가 라디오의 전파를 잡아주기를 바라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주파수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로드
영화
평점 :
상영종료


   2009년엔 두 편의 '재난'에 관한 영화가 개봉됐었다. 상반기엔 『노잉(Knowing)』, 하반기엔 『2012』. 두 영화의 완성도는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종말의 순간을 대비하는 영화다. 『노잉』은 이미 예정된 종말에 대한 인간의 무력감을, 『2012』는 그 무력감 앞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인간의 아웅다웅을 그렸다. 자포자기의 무력함은 사람을 자학적으로 만든다. 그 두 영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감을 조롱하듯, 엄청난 자연재해 스펙터클을 관객에게 선사했다. 글자 그대로 '죄의식을 동반한 즐거움(Guilty Pleasure)'. 그런면에서 존 힐코트 감독의 『더 로드(The Road)』는 참으로 심심한 영화다. 이 영화는 '재난'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재난 '이후'를 그렸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세계가 잿더미로 변했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명체가 자취를 감추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살아 남은 사람들 역시 음식이 부족해 식인을 한다. 이런 세상에 살아남은 아버지(비고 모르테슨)와 아들(코디 스미스 맥피)은 남쪽으로 간다. 영화는 그들이 남쪽으로 가는 동안 겪는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이 영화를 홍보하면서 가장 많이 언급 하는 이름은 원작의 저자인 코맥 매카시이다. 소설을 읽지 않아, '감히 성서와 비교된다는 원작'이 얼마나 굉장한 걸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니 그 상찬이 괜한 말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앞서 『셜록 홈즈』리뷰에서도 얘기했지만) 영상은 활자를 이길 수 없다. 깊이있는 원작을 표면에 부유하는 영상이 똑같이 표현할 길은 없다. 원작이 있는 영화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그 분위기이다. 잿더미로 변한 세계. (먹을 수 있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고, 나무들마저 스스로 쓰러지는 황폐한 세계. 푸른 바다마저도 잿빛으로 물든 종말 이후의 세상. 그런 점에서 영화는 그 분위기를 잘 표현했다. 목 매단 시체를 별다른 동요없이 바라보는 어린 아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이런 세상을 오래 겪어왔음을 알 수 있다. '나쁜 사람들(식인을 하는 사람들)'을 대비해 자살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아버지의 모습 또한 끔찍한 생존의 한 방식이다(산채로 잡히면 강간 당하는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잡혀 먹힐테니까). 

   살기 위해 인간임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 악다구니들 속에서 인간으로써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아들 역시 힘이 들어 자살을 꿈꾸지만(!), 아버지는 견뎌내자고 한다.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불씨를 옮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불씨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불씨는 자주 흔들린다. 음식 앞에서, 생존 앞에서, 혈육 앞에서. 아버지는 이기적이 되어간다. 희망은 이기적인 마음에선 꿈꿀 수 없다.   

 

 

 

   영화에선 기적같은 순간이 있다. 작은 깡통안에서 딱정벌레가 날아가는 모습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 기적을 바라본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듯, 스스로 치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사람들은 서로 믿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른다. 아직 기적은 인간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아니, 기적이 인간을 찾아왔는데, 인간은 그걸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인류에게 있어 최대의 재난은 인류 자신인 셈이다.

   영화의 마지막, 아들은 불씨를 꺼뜨리지 않을 수 있을까? 불씨는 홀로 있을 땐 한없이 약한 존재이지만, 그 불씨가 모이면 횃불이 된다. 부디 '그들'이 횃불을 꺼뜨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덧붙임 

1. 영화제에 별 관심은 없지만, 이 영화는 2010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LA 컨피덴셜』이 될 확률이 농후합니다. 커티스 핸슨 감독의 『LA 컨피덴셜』은 1997년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 중에 하나였으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에 침몰했었죠. 올해 아카데미 역시 (그때 그!)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에 몰빵할 것 같습니다.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말이 생각납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만들어진 해에 당신의 최고작을 만들지 말라." 

2.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an)』가 개봉할 때는 매카시 얘기는 하나도 없더니 『더 로드』개봉할 때는 온통 매카시 얘기 뿐입니다. 한국의 독서 인구가 늘어났다기 보다는 홍보에 감독이나 배우에 비빌 구석이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어쨌든 소설은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호인 2010-01-11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의 원작 작가의 내면까지 꼼꼼히 알려주셔서 영화를 보고난 느낌이 드네요. 2012는 보았습니다만 노잉은 감상하질 못했네요. 자연의 대재앙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초라함과 허무함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Tomek 2010-01-12 08:50   좋아요 0 | URL
제가 쓴 글은 영화의 반에 반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꽤 울림이 큰 영화이니 기회 있으면 꼭 보셨으면 해요. 책은 호평이 많더라고요. 책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고맙습니다. ^.^
 
더 로드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스펙터클 없는 재난영화. 진정한 재난은 인간이 만들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셜록 홈즈 - Sherlock Holme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우도할계(牛刀割鷄). 특출난 인재들이 평범한 사건을 해결하니, 영화가 원만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셜록 홈즈 - Sherlock Holme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0. 숙취 

   신년회때문에 술에 진탕 빠진채 날을 넘기고 겨우 집에 들어왔다. 눈을 뜨니 아침 7시. 머리는 숙취에 띵하고 속은 메슥거리는 상황. 이럴 때 집에 있으면 하루종일 반사상태로 누워있으며 괴로워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에, 하여 움직이기로 했다. 해장국 대신에 영화로 속을 풀리라. 아내와 같이 보려했으나 아내는 어제 내 뒤치닥거리때문에 피곤하다며 혼자 보라고 한다. 아내의 TTL카드를 챙기고 홀로 극장에 가 영화를 봤다.   

 

1.19세기말 런던

   원작이 있는 영화를 볼 때 내가 기대하는 것은 딱 하나이다. 얼마만큼 그 분위기를 잘 표현했는가. 이야기의 밀도는 물론 캐릭터의 깊이 또한 영화는 활자를 따를 수 없다. 재현보다는 각색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영화는 활자로 질질 끌다시피 하는 시대 묘사를 화면으로 보여주고 느낄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런면에서 내가 『셜록 홈즈』에 기대한 것은 캐릭터도, 추리도 아닌, 19세기 말(영화에선 타워 브리지가 거의 완성 직전이었던 걸로 보아 1890년 전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참 산업혁명이 일어난 지저분한 런던의 분위기였다. 안개와 공장의 매연이 가득찬, 잦은 비가 내리며 하수구로 썩은 물이 흐르는 그 지옥같은 풍경. 물론 이런 거리묘사는 소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지만, 영화에서는 충분히 구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블랙우드경이 벌이는 그 초자연적인 공포는 세기말과 런던의 지옥같은 분위기와 겹쳐져 더 그럴싸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런던은 너무나 깨끗하고 게다가 맑기까지 하다.  

 

1-1. 19세기말의 런던을 느낄 수 있는 영화

 

   데이빗 린치 감독의 『엘리펀트 맨(The Elephant Man)』. 미국의 감독들에게 유럽의 이미지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것처럼 깨끗하고 정돈된 이미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데이빗 린치는 19세기 말의 영국을 공장의 매연과 증기가 뿜어져나오는 지저분한 거리, 그리고 그 주변에는 갈고리에 매달린 돼지고기를 썰어 파는 생경한 곳으로 묘사했다. 그런 지옥도에서 희귀병을 앓고 있는 존 메릭의 절규 "난 동물이 아니에요! 난 사람이라고요!(I'm not an animal! I'm a human being!)"라고 외치는 것은 감동을 넘어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 

   또 다른 영화로는 팀 버튼 감독의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Sweeney Todd: The Demon Barber Of Fleet Street)』가 있다. 권력자의 음욕으로 부인과 아이를 잃고 복수심만 남은 스위니 토드. 그의 복수극 역시 지옥에서 행해져야만 한다. 팀 버튼이 그리는 런던은 '시체'와 '식인'이 가족을 잃은 한 가장의 복수심으로 한데 버무러진 지옥이다. 살이 발라진 희생자들의 피와 시취는 런던의 하수구를 흐른다. 영화는 시종일관 창백하고 음울하며 어둡다. 

 

2. 셜록 홈즈와 왓슨 

   영화를 보고 신촌역을 지나 이대쪽으로 걸어올라왔다. 여전히 골치는 아프고 빈속에 힘이 겨워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와 머핀을 시켰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근처에 있는 Take-Out 잡지를 꺼냈다. <씨네21 736호>. 『셜록 홈즈』에 대한 글이 있다. 대충 훓어보다가 김연수 작가가 쓴 글에서 멈췄다. 긴 글을 감히 한 줄로 줄여서 표현한다면 이렇다. '나의 셜록은 이렇지 않아!'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은(비록 전권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입장에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글이었다. 내가 책에서 읽은 셜록 홈즈 역시, 몸 보다는 머리로, 직감보다는 증거로 행동하는 '중후한' 캐릭터였으니까.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닥 불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하는 셜록 홈즈가 지나치게 '알 파치노'스러워 보여 그렇지, 매사에 잘난척하고, 자신감 넘치지만 사랑 앞에선 한없이 조심해지는 멋진 캐릭터였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서는 거의 내레이터에 불과했던 나약한 왓슨 또한, 단순한 조력자가 아닌, 파트너의 위치로 격상되었다(심지어 왓슨이 홈즈의 면상을 한 대 치기도 한다). 아이린의 등장은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홈즈의 책상에 그녀의 사진이 있는 것(아마 「보헤미아 왕국의 스캔들」에서 받았을!!), 그리고 그녀가 홈즈의 최대의 숙적(이자 2편의 악당으로 내정된) 모리아티 교수와 관련이 있는 것이 영화를 보는 동안 찾을 수 있었던 즐거움이었다. 대신에 악당 블랙우드 경은 카리스마가 부족해 아쉬웠고(히치콕 감독의 말을 인용하자면, "악당은 주인공보다 매력적이어야 한다"),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너무 뻔했다. 

          

   오히려 이 영화를 코난 도일 원작과 비교하기보다는 셜록 홈즈의 사후(?)에 붐처럼 출간되었던 안작소설(pastische)의 한 갈래라고 생각하는 게 더 편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국내에 출판된 미치 컬린의 『셜록 홈즈의 마지막 날들』, 칼렙 카의 『셜록 홈즈 이탈리아인 비서관』, 존 딕슨 카와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이 지은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에 이은 가이 리치의 『셜록 홈즈 영상소설』!!

 

2-1. 셜록 홈즈 파스타시

   21세기의 셜록 홈즈가 (김연수 작가의 표현을 빌려) '성룡'이라면, 80년대의 셜록 홈즈는 '인디아나 존스'였다. 베리 레빈슨 감독의 『피라미드의 공포(Young Sherlock Holmes)』는 '만일 왓슨과 홈즈가 학창시절에 만났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오직 팬픽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이야기를 실제로 스크린에 옮겼다. 어린 시절 풋풋한 홈즈와 왓슨의 활약은 그당시 인기있었던 『구니스』와 『인디아나존스』의 영향력 아래 있어서 셜록 홈즈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겐 황망함을 안겨준 경우였을 것이다. 난 이 영화를 『영 셜록 홈즈』란 제목으로 86년엔가 봤는데(당연 비짜 비디오) 국내 개봉은 그보다 한참 늦었고, 제목도 셜록 홈즈와는 상관없는『피라미드의 공포』로 개봉했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은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튀어나온 기사의 살인 장면! 가히 충격이었다. 한가지 특별한 것은 홈즈의 첫사랑 엘리자베스가 죽는다는 사실. 물론 엘리자베스는 영화에서 가공된 인물이지만, 이런 아픔때문에 후에 홈즈가 사랑도 결혼도 없이 홀로 사는 게 아닐까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런데 써놓고 보니 제임스 본드 이야기같기도 하다. 하긴 인디아나 존스는 루카스와 스필버그의 007 이야기이기도 하니 얼추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의 7080 세대들에게 셜록홈즈, 왓슨, 모리아티 교수 그리고 허드슨 부인의 이미지를 완전히 각인시킨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기획한 『명탐정 번개(名探偵ホームズ)』일 것이다. 『루팡 3세』, 『미래소년 코난』등에서 보인 삼각 구도를 셜록 홈즈, 허드슨 부인, 모리아티 교수로 펼쳐놓은 것도 신선했고, 미야자키 감독 특유의 액션 활극 또한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뛰어났다. 추리물은 아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해석이 신선했던 작품이다. 

 

3. 감독 

   그런데 왜 하필 가이 리치가 감독했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더 재밌게 더 전복적으로 그릴 수 있는 영화가 너무 안전하게 그려진 느낌은 그의 연이은 실패 때문은 아니었을까? 속편은 좀 더 나가길 바랄 뿐이다.   

 

 

4. 그리고 집 

   추운날 일찍 일어나 돌아다니니 술이 깨긴 커녕 외려 피곤하다. 들어와서 씻고 바로 잠들다. 

 

5. 덧붙임 

   리뷰에도 알라딘 상품 넣기 기능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갖다 붙이기 하려니 정말 힘드네요.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10-01-11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은딸이랑 작년연말에 봤어요.
홈즈, 상상을 깨고 좀 낯설었어요.
악당이 영 불쾌했구요. 호감가는 악당이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
저도 했습니다. 과학과 종교의 대립으로 가는 구도나 선악의 구도나
참 많이 다루어진 것들이라 식상했어요.^^
영화는 그저그랬지만, 정성들여 쓰신 리뷰엔 추천!

Tomek 2010-01-12 08:53   좋아요 0 | URL
지적하신대로 과학과 종교의 대립으로 가는 구도나 선악의 구도가 지금까지 영화에서 너무 많이 다루어진 것이라 식상하긴 했지요. 정성스레 빚은 캐릭터에 비해서 이야기와 악당은 좀 김이 빠지는 경우였죠.
하지만 「바스커빌 가의 개」에서도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에 이성으로 대처하고 추리하는 모습이 각인되어서 그런지 저는 꽤 나름 재밌었어요. 아님 술기운이었나?
추천 고맙습니다! ^.^

개미탐험가 2010-01-12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어렸을 때 홈즈 시리즈를 보았을 때의 기억으로는, 홈즈는 권투도 잘하고 힘도 세고 싸움하기 좋아하는 약간 액션 이미지가 있었거든요.. 총 싸움과 격투기로 범인을 잡기도 하고요.. 그래서 새로 나온 홈즈 영화가 이상할 것 같지는 않았는데.. 실제로 영화를 보면 어떨지 궁금하네요..

자리에 느긋하게 앉아서 머리로 추리하는 쪽은 포와르나 미스 마플 정도?? 아닐까요? ^^

Tomek 2010-01-13 13:43   좋아요 0 | URL
예. 물론 펜싱과 권투와 바이올린 연주도 잘 한다고 소설에 언급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권투는 거의 K-1 수준이고, 액션은 거의 '아크로바틱'한 모습에 홈즈를 대입하기는 조금... 홈즈의 캐릭터에 '지나친 과장법'을 썼다고 생각하시면 편할 것 같습니다. 기회있으시면 감상 하시길 바랍니다. ^.^
저 역시 홈즈를 안락의자 탐정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셜록키언들이 본다면 '신성모독'이라 생각할 만한 점이 꽤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