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홀랜드 드라이브 - Mulholland D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 들어가며 

   이런 영화가 있다. 초반 5분만 보더라도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맺을지가 훤히 보이는 영화가 있는 반면, 몇 번을 보더라도 처음 본 것처럼 새롭고, 중간에 이야기의 끈을 놓치게 하는 영화가 있다. 전자는 인생을 갉아먹히는 듯한 불쾌한 느낌이 드는 반면, 후자는 인생이 뭔가 의미있고 풍요롭게 느껴지는 힘이 있다. 누구에게나 영화는 제각각이지만, 내게는 그렇다. 그리고 그 후자의 영화에는 데이빗 린치의 영화가 포함되어 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이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에 대해 이야기 해본다면, 난 이 영화를 2003년에 비디오 테이프로 처음 봤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데이빗 린치를 좋아하지 않았기도 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게 도대체 뭔가" 싶을 정도로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에 영화의 결말을 2분 남겨두고 비디오를 껐다. 물론 그 당시엔 영화가 2분 남았는지도 몰랐을 정도로 '식겁'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2007년 잡지 <FILM 2.0> 정기구독 경품으로 이 영화를 받아 다시 감상했고, 2009년에 다시 한 번, 그리고 2010년 2월 17일 (마침내) 극장에서 스크린으로 봤다.  

   총 4번을 봤지만, 여전히 정리가 안 되는 영화다. 그렇다고 그냥 '의미 없음'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많은 단서(clue)들이 뒤죽박죽 난무하며 "제발 나를 해석해줘"라고 이야기하는 희안한 영화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냥 의식의 흐름에 맞겨야 하는 영화를 무리하게 해석하려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의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도전해 볼만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 감히 글을 써본다. 

 

 

2. 파일럿(Pilot) 

   이 영화의 시작은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다. <트윈 픽스(Twin Peaks)>로 데이빗과 애증의 관계에 있는 ABC TV가 무슨 생각에선지(아마도 <트윈 픽스>의 영광을 다시 한 번?) 데이빗에게 TV 드라마를 맡겼다. 데이빗은 나오미 와츠(Naomi Watts)와 로라 엘레나 헤링(Laura Elena Harring)을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그만의 독특한 드라마를 찍었다. 결말은 다음 편의 연결을 위해 당연히 '열린 결말'이었다. 그런데 ABC 중역들이 이 파일럿을 보고(데이빗의 말에 따르면, 일요일 새벽 6시, 집에서 골프를 하면서 VCR로 봤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도통 알 수 없다"며 여러 트집을 잡았고(그 중 하나는 여주인공인 나오미와 로라의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데이빗은 그들의 요구에 맞추어 약 300여개의 편집본을 만들었지만(그는 그 300여개의 테이프가 편집의 리듬을 무시한 부끄러운 결과물이라 했다) 결국엔 방송되지 못하고 폐기처분 당했다. 

   그렇게 잊혀졌던 작품이었는데, 어느날 밤, 우연히 '아름다운' 이야기가 떠오른 데이빗은 자신이 찍어놓은 이 파일럿에 이 이야기를 접목해 한 편의 영화로 만들기로 하고 유니버셜과 카날 플러스를 설득해 마침내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이것이 <멀홀랜드 드라이브>다. 

   굳이 이렇게 제작 과정을 세세하게(그렇지 않다. 진짜 이야기는 훨씬 길다) 밝힌 이유는, 이 영화의 태생이 원래는 반쪽짜리 영화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다. 이 영화를 한 편의 독립된 작품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절반의 파일럿과 절반의 다른 영화로 볼 것인지에 따라 영화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영화는 이런 혼란을 유발하는 듯한 장면이 영화 곳곳에 숨어 있다. 

 

 

3. 이야기 

   선형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비선형적인 이야기라 정리가 될지는 잘 모르겠으나 한 번 요약해본다.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거칠게 보자면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3-1. 전반부 

  검은 머리의 여인(로라 헤링)이 검정색 리무진을 타고 가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사고를 당한다. 사고를 당하기 전 운전석의 남자가 그녀를 죽이려 했으나, 끔찍한 사고 덕분에 그녀 혼자 살아남고 그녀는 시가지로 내려온다. 충격과 상처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는, 빨간 머리의 여자가 자신의 아파트를 비우는 것을 보고 그 집에 숨는다. 그와 동시에 낙천적이고 생기가 넘치는 배우 지망생 베티 엘름(나오미 와츠)이 그 아파트에 도착하고 검은 머리의 여인을 발견한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기억이 안나, <길다>포스터에 적힌 리타 헤이우드의 이름을 보고 자신이 '리타'라고 얘기한다. 베티는 리타의 기억을 찾는 것을 돕기로 하고, 무언가 단서를 찾기 위해 그녀의 가방을 열어본다. 가방엔 엄청난 돈과 파란 열쇠가 있다. 

 

   한 남자가 선셋대로에 있는 윙키스라는 음식점에서 그의 친구로 보이는 사람에게 자신의 악몽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는 자신의 악몽에서 끔찍한 사람을 봤으며, 그저 그게 꿈이기를 기대하며 그 장소를 확인하자고 한다. 그런데 꿈에서 본 일들이 그대로 벌어지고, 끔찍한 형상의 사람을 보자, 그는 공포에질려 쓰러지고 만다. 

 

   서툴어 보이는 해결사(킬러?)가 그날 끔찍한 차사고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 사람을 죽이고 전화번호부를 훔친다. 그는 떠나면서 실수로 두 사람을 더 죽인다. 그리고 그는 동료와 함께 거리를 돌아다니며, '검정 머리를 한 좀 나이든' 새로 온 창녀가 있는지를 탐문하고 다닌다.   

 

   영화 감독 아담 케셔(저스틴 테록스)는 자신이 감독하는 영화에 카밀라 로즈(멜리사 조지)라는 여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하라는 압력을 받는다. 요구를 거부한 아담이 집에 도착하자 그의 아내는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고 있었고, 그는 집에서 쫓겨난다. 호텔에서 머무는 중, 그는 자신이 파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카우보이'라는 미스터리한 사람을 만난다. 카우보이는 카밀라 로즈를 주연으로 영화를 찍으라는 말을 하고, 잘 행동하면 자신을 한 번 보겠지만, 잘못 행동하면 자신을 두 번 볼 거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베티와 리타는 리타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차량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들은 윙키스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리타가 주문을 받는 웨이트리스의 명찰에 적힌 이름 '다이앤'을 보고 '다이앤 셀윈'이라는 이름을 기억해낸다. 그들은 전화번호부에서 다이앤의 이름을 찾아내 전화를 걸지만, 그녀는 받지 않는다.  

 

   베티는 밥 부커가 감독할 영화 오디션을 보고 엄청난 찬사를 받는다. 그 자리에 있던 캐스팅 감독이 그녀를 아담이 감독하는 영화 <실비아 노쓰 이야기(The Sylvia North Story)> 세트장에 데려간다. 세트장에선 카밀라 로즈의 오디션이 진행되는 중이었고, 아담은 "이 여자에요"란 말을 한다. 그 말과 동시에 베티와 아담은 서로 끌리는 듯이 쳐다보고, 베티는 약속이 있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베티와 리타는 다이앤 셀윈의 집에 찾아 갔으나 그녀는 응답하지 않는다. 그녀의 집에 몰래 들어간 베티와 리타는 죽은 다이앤의 시체를 발견한다. 공포에 질린 리타는 집에 돌아와 머리를 자르고, 베티는 그런 그녀에게 금발 가발을 씌운다. 그날 밤 그들은 서로 사랑을 나누고, 베티는 리타에게 사랑한다고 한다.   

 

   새벽 2시 리타가 갑자기 일어나 베티와 함께 실렌시오 극장으로 간다. 그곳은 퍼포먼스 극장이고, 사회자는 '모든 음악은 녹음되었으며, 모든 것은 환상'이라고 얘기한다. 퍼포먼스가 시작하고, 한 여인이 노래를 부르는 도중 쓰러지지만 노래는 계속 흘러나온다. 순간 베티는 그녀의 지갑에서 파란 상자를 찾아낸다. 집에 도착해서 리타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파란 열쇠를 꺼내고 베티를 부르나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리타가 홀로 열쇠를 꽂아 상자를 열자, 상자는 갑자기 떨어지고 사라진다. 

 

 

3-2. 후반부 - 혹은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이야기 

   상자가 떨어지자, 앞서 떠났던 빨간 머리의 여인이 방에 들어와 방 주위를 둘러보지만, 방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화면 전환. '카우보이'가 다이앤 셀윈의 방에 들어와서 "이봐, 아가씨. 일어날 시간이야."라고 얘기한다. 두 번의 화면 전환 후, 다이앤 셀윈(나오미 와츠-베티)이 침대에서 일어난다. 그녀는 외롭고 우울한 실패한 여배우고, 성공한 여배우 카밀라 로즈(로라 엘레나 헤링-검정 머리 여자/ 리타)와 사랑에 빠졌지만, 카밀라는 다이앤을 거부한다. 

  

   카밀라의 초대로 다이앤은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있는 아담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한다. 아담은 성공한 감독으로, 카밀라와 사랑에 빠졌다. 리무진은 집에 도착하기 전에 멈추고, 갑자기 나타난 카밀라가 다이앤을 지름길로 인도하며 에스코트 한다. 저녁을 먹는 동안, 다이앤은 자신이 이모가 돌아가신 후, 배우가 되기 위해 캐나다에서 헐리우드로 왔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실비아 노쓰 스토리> 오디션 장에서 카밀라를 처음 만나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그 때 다른 여인(멜리사 조지- 카밀라 로즈)이 카밀라에게 속삭이고 키스를 하며 다이앤을 쳐다본다. 질투와 분노에 몸서리치는 다이앤. 그 때 아담과 카밀라가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서 서로 킬킬거리고, 화면은 갑자기 선셋대로 윙키스 레스토랑으로 바뀐다.  

 

   다이앤은 그곳에서 해결사(청부업자)를 만나고 있다. 그녀는 카밀라 로즈의 사진과 돈을 주며 살인을 의뢰한다. 그 때 웨이트리스가 주문을 받는데, 그녀의 이름은 '베티'다. 해결사는 자신이 일을 끝내면 파란 열쇠를 찾으라고 이야기한다. 다이앤을 고개를 들어 보니, 카운터에 악몽을 꿨다는 사내가 서 있었다.  

 

   화면은 그녀의 집으로 바뀌고, 파란 열쇠가 보인다. 그녀는 자신을 죽이려는 노부부의 환각에 몸서리치며 서랍의 권총을 꺼내 침대에서 자살한다. 

 

 

4. 전반부 - 실제 벌어진 일, 후반부 - 베티의 꿈

   파일럿이 제작된 순서대로 전반부의 이야기를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로 보고, 후반부 부분을 베티의 '환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다이앤의 시체를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 베티와 리타가 사랑을 나눈 후, 리타가 자면서 "실렌시오."라고 말을하는 장면부터 영화 끝까지를 얘기한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정확하게 대구가 되어 있다. 리타가 "실렌시오"라고 얘기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영화의 끝, 실렌시오 극장에 앉아 있는 한 관객이 "실렌시오"라고 얘기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그러니까 이 "실렌시오" 이야기는 자기 완결성을 가진 이야기다.  

 

"실렌시오"로 시작해 "실렌시오"로 끝난다

 

사회자가 파란 조명과 연기가 올라오면서 사라지고 공연이 시작된다. 다이앤이 자살하고 파란 조명과 연기가 올라오면서 사라진다. 그 다음 장면은 "실렌시오"극장의 텅빈 객석으로 바뀐다.

 

   리타의 기억의 단서인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다이앤 셀윈, 그리고 다이앤이 죽은 것을 확인했을 때 리타의 반응, 리타와 사랑에 빠진 베티 등 리타와 관련한 일련의 사건을 겪은 베티가, 자신이 오늘 겪었던, 밥 부커 감독의 연기 오디션, <실비아 노쓰 스토리>의 오디션과 아담 케셔, 카밀라 로즈를 보고온 기억이 꿈에서 재구성되어 벌어지는 일로 볼 수 있다. 말이 안돼지만, 꼭 그렇다고 할 수 없다. 꿈에는 논리가 없는 법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간단하게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전반부가 현실이고 후반부가 베티의 꿈이라면, 현실에서 벌어난 베티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 어떻게 베티의 꿈에서 아귀가 맞게 벌어질 수 있을까? 분명히 전반부는 전지적 시점인데, 후반부는 1인칭 시점이다. 그렇기에 또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5. 전반부 - 환상, 후반부 - 사실 

   영화가 시작한 후, 크레딧이 오르기 전에 두 장면이 나온다. 하나는 댄서들이 지르박 춤을 추면서 베티의 얼굴이 나오는 것이고, 그리고 한 여인(아마도 다이앤으로 추정되는)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흐느끼는(혹은 무언가를 흡입하는) 소리가 들린다. 앞선 해석은 이 두 장면을 빼놓았는데, 이 장면이 들어가면 영화의 이야기 구성이 달라지게 된다. 이 장면에서부터 영화가 시작했으니까. 이렇게 놓고 보면, 앞서 풀리지 않았던 실마리가 해소된다.

다이앤은 윙키스 레스토랑에서 '베티'라는 이름을 보고 환상에서 자신의 이름과 베티를 바꿔치기 한다. 

 

 

현실에서 카밀라와 사랑에 빠지는 성공한 감독 아담 케셔는 다이앤의 환상에서는 카밀라의 캐스팅을 거부한다. 그런 그가 집에 가니, 아내는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고 있다. 환상속에서 다이앤은 아담에게 그녀만의 방식으로 복수한다. 

 

다이앤이 카밀라를 만난 것은 <실비아 노쓰 스토리> 오디션 장이었다. 다이앤은 주인공을 원했으나, 감독은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고, 그 역은 카밀라에게 돌아갔다. 그렇기에 다이앤의 환상속에선 어떤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영화의 캐스팅(특히 여주인공)을 결정케 했다. 

 

카밀라를 죽여달라는 청부를 하는 다이앤은 이 사람이 영 미덥잖게 보인다. 그녀의 환상속에서 그는 어설픈 킬러로 나와 일을 처리한다. 

 

살인을 청부하는 다이앤이 윙키스에서 고개를 들어보니 한 사내가 무섭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이 사내는 다이앤의 환상 속에서 악몽을 꾸는 남자로 분한다.

 

   후반부의 시간은 다소 꼬여있다. 처음 다이앤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카밀라가 죽어있을 때이다. 경찰이 그녀를 찾아왔다는 이웃의 말에,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는 계속 과거의 회상장면을 보여준다. 후반부가 과거의 회상장면이라는 것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피아노 모양의 재털이'와 킬러가 준 '파란 열쇠'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정리해본다면, "카밀라에게 차인 다이앤이 청부해서 그녀를 죽이고, 약에 취해 환각을 경험한 다이앤은 죄책감으로 자살을 한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즉, "사실 → 환상 → 사실"의 순으로 영화를 꼬아놔서 보여준 셈이다. 

   그런데 또 이렇게만 해석할 수 없다. 이 영화가 1인칭 시점의 영화라면, 다이앤이 죽고 난 후 나오는 "실렌시오"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군더더기라고 여긴다면, 영화 앞부분의 장면도 군더더기라고 볼 수 있다. 

 

 

6. 전부 현실 

   다른 사람의 영화에서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데이빗 린치의 영화라면 그것도 가능한 해석이다. 파란 상자를 돌리자마자 갑자기 세계가 돌아가고 각자 자아는 사라지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 데이빗은 이미 이런 이야기를 <로스트 하이웨이(Lost Highway)>에서 비슷하게나마 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파란 상자와 파란 열쇠가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할텐데, 데이빗 린치는 그의 저서 『데이빗 린치의 빨간방』에서 그것들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난 상자와 열쇠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ㅡ.ㅡ;;;) 

 

 

 

7. 전부 환상

   차라리 이렇게 보는 게 속편할지 모르겠다. 꿈에는 논리가 없으니까. 

 

 

8. This Magic Moment 

   영화의 해석과는 별개로,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는 사람을 빨려들게 하는 마법같은 순간이 있다. 가짜가 진짜같이 느껴지는 '마법'같은 순간인데, 이 영화에서는 (영화의 내용과는 별개로) 두 번 그런 장면이 나온다.  

 

 

   베티가 리타와 함께 집에서 오디션 연습을 하는 장면은 충분히 가짜스럽다. 그런데, 같은 오디션 장면인데도, 베티가 배우와 연기를 하는 모습은 마치 '진짜 상황'인 것처럼 몰입하는 힘이 있다. 가짜가 진짜처럼 보이는 힘은 '영화'라는 매체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정말 중요하고 인상적인 장면인데, 극장 상영 시에는 잘렸다. 영화가 끝나고 꽤 많은 사람들이 분개한 이유이기도 하다.

 

 

   실렌시오 클럽에서 벌어지는 퍼포먼스는 립싱크다. "밴드는 없습니다. 오케스트라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녹음된 것입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고 한 여인이 나와 노래를 부른다. 그녀의 노래는 정말로 아름답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던 중 그녀는 갑자기 쓰러지지만, 노래는 계속 흘러나온다. 그 자체가 가짜인줄을 아는데도, 관객들(우리들)은 눈물을 흘리는 감동을 느낀다. 어쩌면 데이빗은 영화라는 매체가 순 가짜 투성이지만, 그 순간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9. 마무리 

   어쩌면 이 영화는 "내 인생의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유희나 퍼즐이 아닌, 영화라는 '매체'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 영화는 지금까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볼 때마다 달라지는 희안한 영화. 데이빗의 영화는 내게 있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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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knowho 2010-02-19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심층적이면서 다양한 해석과 설명이 가득한 리뷰,고맙네요.
이 영화 보고 이렇게 정리하느라 머리깨나 멍하셨을 듯!

저는 그렇게 봤습니다.
우선 리타가 파란박스에 키를 넣기 까지가 현실입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전반부의 베티(나오미 왓츠)의 환상같은 상상부분이죠.
베티가 나름대로 전반부의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게 후반부인거죠.
첫번째,어떻게 리타가 사고를 당했나?
두번째,리타와 함께 찾아갔던 다이앤은 어떻게 죽은 것인가?
이 두가지에 대한 답을 베티가 상상했던 게 아닐까...
전반부에 리타의 실체를 살짝 언급했던 부분이
어설픈 킬러가 거리의 창녀한테 탐문했던 부분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베티의 상상과 달리 리타는 "검은머리의 나이든 창녀"였던 게 아닐까...
반면에 전반부가 환상이고 후반부가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과할 정도로 화려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환상에 가깝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또한 전반부에 베티가 만난 인물들이 후반부에 다른 인물들로 차용되었다는 게
후반부가 환상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줍니다.
예를 들어, 영화 감독의 경우 리타와 사랑에 빠지는 연적으로,
맨션 관리인 코코는 감독의 어머니로, 오디션 구경할 때 봤던 낙점 여배우
카밀라 로즈는 리타의 숨겨진 연인으로 등장하고
리타가 차 사고를 당한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파티가 열리는 위치로 차용됩니다.
마치 베티가 주연과 각본, 감독을 해서 완성해낸 한편의 영화라고나 할까요...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후반부가 픽션의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건
이미 전반부에서 등장 인물들과 그 관계의 설정이 관객들에게 더 현실적으로
확정된 후에 후반부를 접하게 되면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훌륭합니다.
우선 영화를 보고난 후, 누구라도 머리를 굴리게 만드는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어이가다 보면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어떤 접점을 만나게 됩니다.
한마디로,이 영화는 독립된 전반부와 후반부가 각각 분리되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수많은 연결고리들로 이어지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케 합니다.
첫번째,킬러가 갖고 있어야할 가방속 현금과 열쇠를 어떻게 리타가 갖고 왔을까?
가방속에 리타의 신분증이나 어떤 소지품도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그 가방이 리타보다는 킬러의 소유일 가능성이 더 커보입니다.
그렇게 보면,후반부의 베티의 추리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전반부와 이어지게 되는 거죠.
두번째,전반부에 엄한 사람 2명을 잡으면서까지 킬러가 손에 넣으려고 했던 전화번호부가 후반부에 베티와 윙키스에서 접선하는 씬속 테이블에 놓여있습니다.
저는 과연 그 전화번호부가 왜 그리 중요했을까?
영화를 수차 보면서 그안에 과연 어떤 정보가 있는 것인지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었는데
그게 전날밤 리타의 차 사고와 관련된 것이라면 그 역시 어떤 면에서 후반부와 상통하는거죠.
그 외에도 "숨은 그림 찾기"나 "수수께끼"처럼,
이 영화에는 전반부와 후반부가 현실과 환상의 충돌로 빚어지는 면면이 숨어있을 거라는
(감히)짐작-머리의 용량 한계로 다 찾아 내지는 못하고-만으로도 재미와 매력이 가득한 영화로 즐길 수 있을 겁니다.

데이빗 린치의 영화는 늘 흥미롭습니다.
뭔지 모를 섬뜩함이 우리의 일상과 밀접해있음을 그가 보여줄 때면 더더욱 감탄스러운 소름이 돋는 법입니다.
리타가 박스에 키를 넣으려고 옷장에서 상자함을 꺼내기 전에는 베티가 서있다가
리타가 돌아서서 상자함을 침대에 놓을 때 이미 베티가 화면에 사라진 걸 보고
일순간 뜨악했습니다. 그리고 여지없이 리타가 베티를 부르며 찾더군요.
(이 장면에서 촐싹맞게도 저는 베티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
리타의 상상으로 표출된 무의식의 또다른 자아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해봤습니다.)
여튼, 어떻게 그런 미묘한 느낌을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줄 수 있는 건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 데이빗 린치 이야기의 특성상 그럴 수도 있겠지만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또한 베티가 공항에서 따뜻하게 헤어졌던 노부부를 리무진에서 웃는 장면에서는 전혀 상반된 어떤 악마성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도 감독의 독특한 재주로 꼽고 싶습니다.
저역시,실렌시오 클럽의 무대는 감독이 갖는 영화에 대한 생각을 대변해주는 듯 합니다.
모든 게 실황이 아닌 녹음임에도 눈물 짓게 할 수 있는 영화의 힘(?)이
데이빗 린치의 미스터리 영화에선 눈물 짓게 하는 힘이 머리 쓰게 하는 힘으로 변환 되는 게 아닐까 싶네요.
또한 이번 상영시 극장에서 삭제했던 베티가 오디션 보는 장면도
어떤면에선 영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감독의 의도가 내포되 보입니다.
비록 연습 상대인 리타의 어설픈 연기도 이유일 수 있지만 그 보단 영화란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똑같은 인물과 대사도 180도 바뀔 수 있는 변이성을 가진, 마치 생물과 같은 존재로 보고 싶은 감독의 의미를 표현한 게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내 영화를 제대로" 봐주길 바란다는 "추신" 같은 장면을 편집했다는 데
이번 극장상영의 아쉬움을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Tomek 2010-02-22 09:15   좋아요 0 | URL
어리석은 글에 현명한 글을 남겨주셔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데이빗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찾기 힘든데, 이렇게 친히 긴 글을 남겨주시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
어떻게 보아도 무방한 영화를 만든 것 같아요. 반복되는 '교집합' 부분을 중심으로 영화를 해석하고 싶지만, '여집합'부분이 또 나름 영화로써 작동을 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본 사람이 알아서 스스로 받아들이는 영화' 데이빗의 영화는 그런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

novio 2010-02-25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이빗 린치 감독의 작품이라면 굉장히 어려운 영화겠네요. 그리고 이번 리뷰글은 무척 생활 속의 일상도 함께 담겨 있는 정겨운 글이네요. 즐감했습니다. ^^

Tomek 2010-02-26 11:34   좋아요 0 | URL
독특한 영화일뿐,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고맙습니다.
 

                
               <TWIN PEAKS>
               시즌  1    
               에피소드  1 (2)
               타이틀  Traces to Nowhere
               각본  Mark Frost & David Lynch
               감독  Duwayne Dunham
               방영일  1990년 4월 12일
 

 

   
 

               <지난 회 보기>
              
0. Prologue - Chaos
               1. Pilot (aka Northwest Passage) 

 
   

  

 

1.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전에 한 가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시리즈 넘버링에 관한 것이다. 보통 드라마는 첫 번째 시즌에 파일럿 에피소드가 첫 번째 에피소드로 포함 되는데, <트윈 픽스>는 좀 독특한 구성을 지니고 있다. 앞서 얘기한 파일럿 에피소드는 따로 독립된 작품으로 여기고, 지금부터 얘기하는 드라마가 시즌 1의 첫 번째 에피소드로 분류된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자면, <트윈 픽스>는 파일럿, 시즌 1 - 7개 에피소드, 시즌 2 - 22개 에피소드로, 총 30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는 이 드라마가 시즌 별로 끊어지는 독립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전부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된 작품이라 시즌을 나누는 게 거의 무의미하기 때문에 에피소드별로 구분을 하기 마련인데, 이게 국가별로 제각각이다. 드라마를 제작한 미국에서는 위에서 분류한 방법으로 <트윈 픽스>를 분류한 반면, 미국을 제외한 다른 여러 나라에서는 시즌 구분을 하지 않고, 파일럿 부터 시즌 2 마지막 작품까지를 1~30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이유는, 파일럿 에피소드의 판권 때문인데, ABC TV가 <트윈 픽스> 파일럿을 유럽에 비디오로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워너 브라더스에서 파일럿에 대한 판권을 사서 유럽에 출시하고, 미국에도 따로 출시를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실종 살인>이라는 제목으로 비디오로 출시가 됐다고 하는데, 확인은 못했다) 이 때문에 <트윈 픽스> 파일럿의 부가 판권이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드라마 종방 후, 미국에서 <트윈 픽스>시리즈는 두 번 비디오로 출시됐으나, 모두 파일럿이 포함되지 않은, 15편의 비디오로 출시되었고, 우리나라에 출시된 비디오도 이것을 바탕으로 했다. 2001년 아르티잔에서 발매한 시즌 1 DVD에서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미국에서는 파일럿이 빠진, 7개의 에피소드로만 구성되어 팬들의 격한 비난에 시달려야 했었다. 반면, 영국(유니버셜)과 호주(파라마운트)에서 발매한 시즌 1에는 파일럿이 포함되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 발매된 DVD는 유니버셜에서 발매했기에, 파일럿이 포함될 수 있었다. 물론 이 지난한 문제는 2007년에 <Twin Peaks: Definite Gold Box Edition>을 발매하면서 말끔히 해결할 수 있었다.

 

이렇게 히트할 줄 알았으면 그때 팔지 않는건데... 

 

   이렇기 때문에 각 나라에서 드라마 에피소드를 세는 게 제각각이다. 파일럿을 시리즈에 포함하느냐, 포함하지 않느냐에 따라, 드라마 에피소드가 하나씩 밀리거나 당겨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는 이렇게 하겠다. 원칙적으로는 파일럿, 시즌 1, 시즌 2로 나누되, 그 뒤에 괄호를 넣어 전체 시리즈를 총괄하는 번호를 붙이는 것으로 하겠다. 그러면 나중에 해당 에피소드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제작 

   시즌 1 제작 결정으로, 데이빗과 마크는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더 확장시킬 기회를 얻었다. 그들이 기대했던 에피소드보단 적었지만, 일단은 이야기를 만드는데 주력을 했다. 데이빗과 마크가 파일럿을 바탕으로 첫 번째와 두 번째 에피소드를 썼고, 이것을 바탕으로 할리 피튼(Harley Peyton)이 3번과 6번 에피소드를, 로버트 엥겔스(Robert Engels)가 4번 에피소드를 썼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마크가 썼는데, 그는 '고작 7시간'으로는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다 풀지 못하는 것을 알기에, 시즌 2의 제작을 위해 결말부에 여러 '떡밥'을 넣기로 했다.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시즌 1 - 7번 째 에피소드의 클리프행어 결말은 그가 가진 작가적 역량을 모두 풀었다고 할만큼 자부심을 느끼는 작품이기도 하다. 

   문제는 프리 프로덕션 기간이었다. 파일럿 방영을 4월 8일 부활절로 잡고, 4월 12일 목요일부터 매 주 한 편씩 방송한다는 ABC의 '살인적인' 스케줄로 준비할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게 되었다. 때문에 데이빗과 마크는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 첫째, 경제적으로 촬영하기 위해, 시애틀로 가지 않고 노쓰 샌프란시스코 밸리의 스튜디오에서 세트를 세워 내부촬영을 한다. 외부촬영은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찍는 것으로 한다. 둘째, 각 에피소드 별로 다른 감독이 '책임지고' 찍는다. 촬영 전, 데이빗과 마크와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되, 데이빗과 마크는 그 결과물에 대해 관여하지 않는다. 단, 사운드 믹싱은 데이빗이 한다. 셋째, 7개의 에피소드를 '동시에' 촬영한다. 

   이런 원칙을 정하고, 실내 세트가 세워지는 동안, 데이빗은 그가 한 때 몸담았었던 AFI(American Film Institute, 미국 영화 연구소)에 가서 카렙 데스샤넬(Caleb Deschanel)과 함께 드라마를 찍을 감독들을 찾는 작업을 했다. 이렇게 해서 찾은 감독들이 티나 레스본(Tina Rathborne), 팀 헌터(Tim Hunter), 레슬리 링카 글래터(Lesli Linka Glatter)다.

 

데이빗 린치가 AFI에서 데려온 미지의 감독들 중, 가장 알려진 감독은 팀 헌터였다. 그는 87년에 <리버스 엣지(River's Edge)>라는 영화를 감독했는데, 이 영화 또한 10대 소녀의 살인사건을 다뤘다. 지금 본다면, 앳된 키아누 리브스와 무시무시한 데니스 호퍼를 발견하는 재미가 클 것이다.

 

   시즌 1 첫 번째 에피소드 감독은 파일럿의 편집을 맡았던 듀웨인 던햄이 맡기로 했다. 일단, 파일럿을 찍은지 1년이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파일럿의 이야기와 캐릭터에 가장 깊숙히 개입한 그가 1편의 감독을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데이빗과 마크가 이미 찜해놓은 에피소드(2, 7편)를 제외하고 나면 실상 그가 고를 것은 1편 밖에 없기도 했다. 

 

에피소드 1편은 듀웨인 던햄이 감독했으나, 데이빗 린치의 인터뷰집『Lynch on Lynch』에는 데이빗 린치가 감독했다고 표기되어 있다. 아무래도 파일럿과 시즌 1의 1, 2편의 스크립트를 데이빗과 마크가 썼고, 파일럿과 2편의 감독을 데이빗이 했기 때문에 이런 실수가 나지 않았나 싶다. 1편은 데이빗이 찍었다고 보기엔, 좀 평범하게 보인다. 1편은 파일럿과 2편을 연결해주는 다리인 셈이다. 

 

 

3. 이야기 

   아침에 호텔에서 일어난 데일은 식사를 하는 중 오드리 혼을 만난다. 그녀는 로라와 같은 학교에 다니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며, 정신 발육이 멈춰있는 오빠 조니(Robert Bauer)를 돌봐주러 일주일에 세 번 왔다고 한다. 오드리는 데일에게 호감을 보인다. 

   보안관 사무실에 들러 데일은 윌에게 로라 부검 결과를 듣는다. 그녀가 죽은 시간은 자정에서 새벽 4시 사이고 과다출혈이 있었다. 어깨와 혀에 깨문 자국이 있는데, 그것은 자해로 보인다. 손목과 팔목, 팔에 있는 상처는 묶여서 생긴 것으로 추정되고, 죽기 전 최소한 3명의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셜리 존슨은 남편 리오 존슨의 빨래를 하다가 피가 묻은 셔츠를 발견하고, 숨겨놓는다. 리오는 피묻은 셔츠를 찾지 못해 성질을 부리고, 셜리를 폭행한다. 

   로라 파머의 살인사건 용의자로 수감된 제임스 헐리는 데일과 해리의 심문을 받는다. 그는 로라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같이 있었던 사람이다. 제임스는 로라가 무언가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고 진술한다. 로드하우스에서 난동을 부렸던 바비는 마이크(Gary Hershberger)에게 리오 존슨에게 줄 돈이 로라에게 있다고 한다. 제임스는 무혐의로 풀려나고 바비와 마이크 또한 풀려난다. 

   로라의 일기장에 있는 'J를 만나다'라는 단서로, 로라와 관련한 J로 시작하는 사람들을 조사하는 데일과 해리는 패커드 제재소를 소유한 조시 패커드를 만난다. 그와 관련해 제재소를 운영하는 캐서린 마르텔과 벤자민 혼은 제재소에 대한 음모를 꾸민다. 

   한편 반사상태에 빠진 로네 폴라스키의 부모를 취재하는 보완관보 호크(Michael Horse)는 그녀가 혼 백화점 향수 카운터에서 일을 했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등장한 외팔이를 보고 쫓으나, 시체 보관소 앞에서 놓치고 만다. 로라의 친한 친구 다나가 로라의 어머니 사라를 위로하러 갔을 때, 사라는 침대 뒷편에 누군가가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를 지른다. 

   제임스와 다나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바비와 마이크는 제임스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로라를 치료했던 정신과의사 자코비는 로라가 남긴 테이프를 들으며 훔쳐온 로라의 목걸이를 꺼낸다. 로라의 테이프에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듯한 말과, '수수께끼 남자(mystery man)'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자코비는 로라의 테이프를 들으며, 목걸이를 바라보고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4. 에피소드 1 

   새로 시작하는 시즌의 첫 번째 에피소드지만,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대신, 파일럿에서 다루었던 이야기와 캐릭터를 조금씩 확장하거나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새로 등장하는 캐릭터는 빅 에드가 보안관 해리에게 언급하는 자끄 르노(Walter Olkewicz)뿐이고, 그나마 등장하지도 않는다. 

" 어제 로드하우스에서 노마를 만나기도 했었지만, 내 임무(stakeout)를 소흘히 하지도 않았어. 싸움을 말리려 나가는데 갑자기 머리가 휘청거렸고, 그 이후론 기억도 안 나. 아마도 누군가가 내 맥주에 약을 탄 것 같아. 자끄 르노가 어제 바에서 일했어." 

 

   이야기의 전개는 매우 친절한 편이다. 예를 들어, 윌이 로라 파머의 부검 결과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시청자들이 "도대체 저렇게 끔찍한 짓을 누가 했을까?"라고 생각할 때, 화면은 리오 존슨과 셜리 존슨을 비춘다. 셜리는 리오의 세탁물 중, 피가 묻어있는 옷을 발견하고 숨긴다. 리오는 그 옷이 없어진 것을 알고 분개한다. 떄문에 자연스럽게 리오 존슨을 의심하게 한다. 게다가 그는 수틀리면 자기 부인도 패는 성격이니, 범인으로 의심하기에 알맞은 인물이다. 물론, 트윈 픽스에는 이보다 더 기괴한 인물들이 많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초자연적인 일도 발생하는데, 로라의 어머니인 사라 파머가 집에서 이상한 사내(살인자 밥-2편에서 설명된다)를 보는 것과, 병원에서 외팔이 사내가 로라의 시체가 보관되어 있는 시체 보관소 앞에서 사라지는 일이 그렇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이런 일련의 '기이한 상황'은 목격자의 환상정도로 치부하기 마련이지만, 데이빗과 마크는 이 설정을 TV에서 수용할 수 있는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이번 편에서는 잠시 소개만 했을 뿐이고, 2편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시즌 1의 제작이 파일럿 제작 후 1년이 지난 다음에야 만들어져서 인물들의 모습이 전과 조금 다르다는 사실이다. 가장 큰 차이를 보여주는 인물들은 리오 존슨과 오드리 혼(Sherilyn Fenn)인데, 그 중 리오 존슨을 맡은 에릭 달(Eric Da Re)의 모습이 가장 큰 차이가 난다. 에릭은 TV 시리즈와 극장판 모두 다 출연했는데, 그의 출연 분량을 시간 순서대로 놓으면 다소 황당한 머리숱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2월 23일 자정에 가까운 시간 (극장판 트윈픽스, 제작 1992년)

2월 24일 아침 (파일럿, 제작 1989년)

2월 25일 아침 (시즌 1 에피소드 1, 제작 1990년) 

 

 

 

5. 기억할만한 지나침

   "마릴린 몬로와 케네디 형제들 간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드라마와 관계없는 이 대사는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데이빗과 마크는 처음에 마릴린 몬로에 대한 프로젝트로 만났다. 이 대사는 그들의 엎어진 프로젝트를 상기시키는 대사로 볼 수 있다.  

   둘째, 마릴린 몬로와 케네디 형제간의 이야기는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던 금발 여인과 정계 '거물' 사이의 이야기다. 케네디 형제들에 관한 스캔들 때문에 그녀의 죽음이 은폐됐다는 음모론도 있다. 이 대사는 로라 파머의 살인자가 트윈 픽스의 '거물'일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보여주고 있다(실제로 이렇게 기획됐었다).  

   그리고 세번째, 정치적인 사건을 끌어들여서 이 드라마를 정치적인 알레고리로 읽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트윈 픽스 마을 초입에 있는 두 개의 봉우리(차후에는 흰 오두막과 검은 오두막)를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보고, 트윈픽스를 선과 악이 공존하는 '미국'으로 보는 방법이다.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어느 정도는 수긍할 수 있는 해석이다. 왜냐하면 당시 90년대에 초반에 나온 영화들은 이렇게 도식적인 해석이 들어맞는 영화들이 나왔던 시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얀 드봉 감독의 <스피드(Speed)>. 버스 안의 세계를 '미국'으로, 키아누 리브스를 '대통령'으로, 버스 안의 인물들을 '국민(미국을 구성하는 인종)'으로, 버스를 위협하는 전직 경찰관을 '외부로부터의 위협'으로 보고 영화를 한번 감상해 볼 것. 버스 안의 인물들이 어떻게 죽고,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는지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도식적인 영화로 잘 알려져있다. 물론 우리에게야 시원한 액션 영화로 간주되지만. 

 

   빅 에드와 호크가 서로 은밀히 눈을 쓸어내리는 행위를 반복한다(이 장면은 앞서 빅 에드와 해리 보안관 사이에서도 했던 행위다). 이 행동은 '북하우스 보이'라는 자경단원들의 표식이다. 자경단원들의 활약은 나중에 펼쳐진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철썩) ㅡ.ㅡ;;;

   데이빗 린치 영화에서 가족끼리 식사하는 장면은 꽤 자주 나온다. 가족 식사만큼 가정의 화목함과 그 안에 숨어있는 갈등을 경제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이번 에피소드에서 바비 가족의 식사장면에서는 부모와 아들의 소통 불가능한 모습을, 제임스가 다나의 가족과 같이 식사하는 장면에서는 제임스와 다나의 애틋한 감정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일련의 데이빗 영화에서 식사장면은, 이런 애틋함보다는 기괴하거나 절망적인 경우를 나타내는 게 더 많다. 

 

위로부터 단편 <할머니(Grandmother)>, <이레이저 헤드>, <극장판 트윈 픽스>, <스트레이트 스토리>, <인랜드 엠파이어(Inland Empire)>. 데이빗 린치의 식사장면은 항상 무슨 '사건'이 발생된다. 가장 '정상적인(?)' 영화인 <스트레이트 스토리>조차, 저 장면에서 앨빈이 집을 떠나 형을 찾아가려는 결심을 한다. 그 외의 영화들에서는 주인공을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 장면들이 전개된다. 

 

   "처음엔 네 여자친구랑 사귀더니 이번엔 내 여자친구야." 바비와 마이크가 제임스와 다나가 사귀는 것을 알고 분개하는 장면이다. 바비는 로라의 '공식적인' 남자 친구였으나, 로라와 제임스가 비밀리에 사귀었다는 것을 알고 복수를 다짐한다. 데이빗 린치의 영화에서는 이렇게 차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많은데, 아기자기하고 재밌는 장면도 있는 반면, '기괴하게 보이는' 장면도 있다.  

 

첫 번째, 두 번째 <로스트 하이웨이>, 세 번째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ive)>. <로스트 하이웨이>의 경우는 매일 여자들이랑 잠자리를 갖는 용의자를 미행하는 형사들의 신세한탄을 언어유희(?)로 풀어냈고,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맘좋은 푸근한 노인들을 작정하고 '기괴하게' 보이도게 했다. 여담이지만, 데이빗 린치만큼 일상적인 것을 기괴하게 보이게 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조시는 재재소 소유권으로 서로 갈등을 빚고있는 캐서린에게 전화를 받는다. "어제 네가 벌인 'shenanigans activities'때문에 손해를 많이 봤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거야." 그 말을 들은 조시가 데일과 해리에게 묻는다. "shenanigans가 무슨 뜻이죠?" 그러자 데일이 대답한다. "허튼 행동, 해악, 종종 기만적이거나 피해를 의도하는 속임수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한 조시를 놀리는 캐서린의 장난이기도 하지만, 이 어려운 단어는 트윈 픽스라는 마을을 설명하는 '열쇳말'이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의 'shenanigans'가 종래에는 그들에게 어떤 파국을 이끌지 계속 지켜볼 일이다.

 

   조시를 쳐다보는 해리의 모습만으로 데일은 해리와 데일이 서로 사귀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낸다. 그는 다른 일반적인 수사관들과 달리 증거를 찾기 보다는 자신의 직감과 직관을 믿는 편이고, 그렇게 수사를 진행한다. Clueless Detective. 데이빗 린치의 별명이기도 한 이 단어는 어떻게 해석하든 그 의미에 부합한다.

 


 

 

6. 덧붙임

a. 대부분 사실에 기초하여 썼고, 개개의 세부사항은 사실에 부합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사실의 전후부분이 바뀐 경우도 있습니다.  

b. 컨텐츠 중 캡쳐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해당 저작권사에게 있습니다.  

c. Refenences   

- 『Lynch on Lynch, Revised Edition』크리스 로들리, Faber & Faber
- 『데이빗 린치의 빨간방』데이빗 린치,  곽한주 옮김, 그책
- <Twin Peaks: Definite Gold Box Edition> Lynch/Frost Productions, CBS DVD, Paramount Home Entertainment
- <Twin Peaks: Fire walk with me> Lynch/Frost Productions, CIBY 2000, New Line Cinema
- <David Lynch The Lime Green Set> Absurda
- <Lost Highway> Universal Studios
- <straight story> Walt Disney Video,
- <Mulholland Dr.> Universal
- <Inland Empire> Absurda/Rhino
-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
- IMDB http://www.imdb.com/ 

d. 다음 글은 3월 10일 오전 9시에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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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맨 - The Wolf Ma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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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늑대인간(werewolf)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멀게는 그리스 신화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도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악마' 이미지는 중세 시대, 흡혈귀와 마녀 논쟁이 한창 벌어지던 때에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도 '늑대인간'은 많이 다루어졌는데, 그 중 첫 작품은 <늑대인간(The Werewolf)>이란 작품으로 1913년에 무성영화로 만들어졌으나, 화재로 소실,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늑대인간 영화는 <런던의 늑대인간(Werewolf of London)>으로 1935년 작이다, 1941년 <울프맨(Wolfman)>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이 영화는 <런던의 늑대인간<American Werewolf in London)>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향후 모든 늑대인간 영화의 기본이 된다. 헐리우드가 이 매혹적인 소재를 가만 놔둘리가 없다. 2010년에 개봉한 조 존스톤 감독의 <울프맨(The Wolfman)>은 1941년 작을 리메이크 한 영화다.  

 

    

<울프맨>. 왼쪽이 1941년작, 오른쪽이 2010년작. 

 

   아쉽게도 '늑대인간'이란 소재에서는, 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이란 거의 없다고 해도 과한말이 아니다. 관객 입장에서 늑대인간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인간에서 늑대로 변하는 과정. 그 과정을 얼마나 '그럴듯하게' 보여주느냐 였다. 그리고 그 성취는 이미 80년대에서 다 이룬 상태였다. 

 

<런던의 늑대인간> 인간이 늑대인간으로 변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그렇다면 <울프맨>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배트맨 비긴즈> 이후로 여러 히어로들에게 통과의례가 된 '자아의 고뇌'가 남아있다. 

   일단 <울프맨>의 시간적 배경은 19세기 말의 영국이다. 아! 19세기 말 영국에선 무슨 일들이 벌어졌던가! 산업혁명으로 도시엔 스모그까 깔리고, 어두운 밤에는 연쇄 살인범 '잭 더 리퍼'가 활동한 시기였다. 물론 당대의 명탐정 셜록 홈즈가 활동했던 시기이기도 하고, 복수에 눈이 먼 스위니 토드의 살인과 인육파티가 벌어진 공간이기도 하며, 희귀병을 앓고 있는 존 메릭의 절규 - "난 동물이 아니에요. 난 사람이에요." - 가 뿜어져나온 시기이기도 했다. 첨단과 전통, 이성과 비이성이 공존한 뒤죽박죽의 시기. 그런 때에 늑대 한 마리쯤 풀어 놓는다고 뭐가 이상하겠는가? 

 

기어이 런던에 간 (미국인) 늑대인간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미국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로렌스(베네치오 델 토로)는 형의 약혼녀인 그웬(에밀리 블런트)에게서 형이 실종당했다는 편지를 받고 아버지(안소니 홉킨스)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형은 그 사이 시체로 발견된다. 형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던 로렌스는 형의 유품과 관련이 있었던 집시들을 조사하던 중, 알 수 없는 괴수에게 공격당하고 의식을 잃게 된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정신을 차린 로렌스는 어느 순간부터 몸 안의 변화를 느끼게 되고, 보름달이 뜨자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 늑대 인간으로 변하고 그를 잡으러 온 마을 사람들을 살육한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된 로렌스는 사람들에게 잡혀가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알 듯 말 듯한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어서 중간까지만 정리) 

 

   영화는 두 가지 전략을 구사한다. 하나는 자신의 육체가 변하고 그것을 통제하지 못하는 자아의 고뇌이고, 다른 하나는 늑대 인간 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거대한 살육'이다. 

   첫 번째 전략은 이 잔혹한 영화에 뭔가 있어보이게 하는 것이다. 일단 주인공 로렌스는 매우 복잡한 인물이다. 히스페닉계 어머니의 죽음, 이방인으로 미국에서 살아가는 것, 형의 죽음 등 그의 머리 속엔 온통 잡다한 트라우마가 가득 차 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쇠약한 인물이 늑대 인간으로 변하면서 그의 트라우마 목록엔 죄의식과 늑대의 공포가 첨가된다. 게다가 그는 이런 정신적 트라우마를 해결해야 하는 동시에 형을 죽인 범인도 쫓아야 하고, 형의 약혼녀인 그웬과도 사랑에 빠져야 한다. 베네치오 델 토로는 이런 복잡한 인물을 잘 캐리커쳐 했다. 

   오히려 눈에 띄는 역할을 한 연기자는 아버지 역의 안소니 홉킨스다. 요근래 맘좋은 할아버지 역만 한 이 노배우는 오랜만에 물만난 물고기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악마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마치 <한니발>의 렉터 박사와 <드라큘라>의 반 헬싱 교수를 반씩 섞은 듯한, 우아하면서도 히스테리적인 역할이었다.   

 

웃는 듯, 우는 듯, 안소니, 안소니

 

   두 번째 전략인 '거대한 살육'은 좀 아쉬웠다. 영화에서는 총 5번의 보름달이 보여진다. 즉, 관객이 늑대 인간(의 살육)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다섯 번이나 된다. 하지만, 그 횟수는 마음에 들지만, 표현은 조금 아쉽다. 영화는 늑대 인간 영화답게, 희생자들의 팔을 자르고, 목덜미를 물어 뜯고, 머리를 날려버리고, 배를 물어 창자를 물어 뜯어내는 등 잔혹하지만, 끔찍하지는 않다. 좀 더 길게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을 정신 없이 빠른 편집으로, 그저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할 뿐이다. 어차피 R등급의 영화를 목표로 만들었으면, 좀 더 막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오히려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기법은 '귀신집 효과'로 정신없이 뻥뻥 터지는 음향에 있다. 동물의 왕국 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고어 장면을 기대할 만한 영화이면서도 심리적인 공포를 유발하게 한 효과는 앞서 언급했던 주인공 로렌스의 '심리적'인 요인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영화는 품격이 높아졌는지 모르겠으나, 장르 영화로는 조금 아쉬운 면이 있다.

 

로렌스의 침대를 기어올라오는 '골룸(정확히 표현하자면 미친 늑대병-Lycanthrope-환자)' 장면은 <장화홍련>의 침대 씬이 떠오를만큼 아찔했다. 하지만 영화는 김지운 감독처럼 더 나가지 않고, 심리적 한계선에 다다르기 전에 멈춘다.

 

   이런저런 불평을 남겼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제외하고는 영화를 보는 내내 재미있어 했다. 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났고, 21세기에나 어울리는 주제를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하는, 그것도 장르 영화에 풀어 놓은 것도 흥미로웠다. 걸작이 될 영화는 아니지만, 나름 수작(秀作)이다.

 

 

 

*덧붙임 

집사람과 같이 봤는데, 집사람은 늑대 인간을 보더니 츄바카가 생각난다고 하더군요. 듣고보니 그럴듯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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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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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 서적은 어떤 면에서 보면, 오타쿠들의 세계와 비슷하다. 한 권의 책, 아니 한 편의 글을 읽기 위해 주렁주렁 달려있는 주석을 찾아보며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인내심을 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밀리터리 오타쿠와 일본 대중문화 오타쿠, 그 둘을 충족시켜야 '낄낄거리며 즐길 수 있는' 굽본좌의 『본격 2차 세계대전 만화』가 생각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물론 이진경 씨(이진경은 필명이고 박태호가 본명이다. 직함을 붙이려면 본명에 붙여야하기에 감히 '씨'를 붙였다)와 굽본자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이 책,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하긴. 그의 저서가 어디 쉬운 게 있었던가. 그나마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이진경의 필로시네마』조차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뺀다면 거의 철학서에 가까운 책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이 책이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책이 어렵더라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다. 각각 개별적인 이야기들이 어떻게 취합되어 역사(history)가 되는지, 수 많은 역사들 속에서 어떻게 통합적인 역사(History)가 만들어지는지, 저자는 자신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 설명한다. 지금은 유효기간이 다 된 것이라 생각하는 '맑스주의'를 통해 역사와 시간을 바라보는 시선도 새롭고, 주류의 역사가 아닌, 소수자, 타자의 시선으로 전복된 역사의 실례와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역사라는 큰 틀을 이용해 진보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을사조약으로 강제적으로 맞이한 근대와 '근대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2000년대를 반추하며 새로운 가능성의 역사를 기대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사실들을 개념화하기 위해서 익숙하지 않은 용어가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지지만, 결코 난해하거나 난삽하지는 않다. 각 편의 글은 설정해놓은 주제를 향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현학적으로 보이는 주석들은 그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다.

   책을 읽으면, 2008년에 있었던 '근현대사 교과서 사건'의 의미가 좀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 왜 그들이 역사를 그렇게 그들 방향으로 돌려놓고 싶어하는지. 잉여생산물이 도래하고 난 이래로 부르주아지들의 기득권은 바로 그 '잉여생산물'이었으나, 어느순간부터 '시간'을 통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노동자계급들의 '시간'을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생산물의 양은 물론이고, 그들의 삶조차 통제할 수 있으니까. 그런 주류계급들은 그들 중심의 언어와 그들 중심의 역사로 재편하기를 원한다. 통제된 시간과 재편된 역사속에서 (표준어라 불리는) 통일된 언어를 배움으로해서 모두들 그 주류에 포함되어 있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모습. 

   세상과 역사에 대한 진단을 할 수 있으면서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인문학 서적은 『공산당 선언』을 제외하고는 흔치 않은 것 같다. 행동강령이 쓰여있지 않지만,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세상을 개념화하지만, 도구화하지는 않는다. 읽고 직접 느끼고 행동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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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맨 - The Wolf Ma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걸작은 아니지만 수작(秀作). 잔혹하지만 끔찍하지는 않은 심리-외디푸스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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