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블리 본즈 - The Lovely B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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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도록 아름다운' '천상의 피조물들'. 카타르시스 없는, 잘 만든 불쾌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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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블리 본즈 - The Lovely B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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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시작되면 사랑스러운(lovely) 아이의 모습이 화면에 비친다. 선물로 받은 사진기로 자신의 모습을 찍는 14살 소녀의 천진난만함. 행복한 가정. 태어나서 처음 느끼기 시작하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 한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런 장면의 연속에서, 소녀는 이렇게 얘기한다. "내 이름은 수지 새먼. 1976년 12월 6일. 나는 살해당했다."   

 

 

   영화는 <베리 린든>처럼 아이의 죽음을 관객에게 미리 알려준다. '비극'이라는 드라마를 강조하지 않고, '운명'을 이야기한다. <러블리 본즈>는 수많은 '유아살해 영화(아, 정말 끔찍한 목록이다)'들과는 다른 방식을 취했다. 

   원작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본 것이 영화에 독(毒)이 될지 득(得)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느낌은, 안 읽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화에 만족했었다. 그러나 같이 영화를 본 아내를 비롯한 다수의 관객들은 '불쾌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영화의 만듦새에 대해 불평한 것이 아니라, 그 정서에 대해 불평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피터 잭슨의 실패작이 아니다. 단지 그가 만든 '유쾌하지 않은' 웰 메이드 영화다. 

   첫 사랑이 시작되려는 14살의 수지 새먼(시얼새 로넌)은 그의 이웃 조지 하비(스탠리 투치)에게 강간당하고 무참히 살해당한다. 그의 가족은 깊은 슬픔에 빠져 지내고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수지는 천국과 이승의 중간 세계에서 (In Between) 머물며 가족들을 바라보고, 그 세계에서 또래의 친구들을 사귀며 지낸다. 수지가 죽은지 1년이 다 되어갔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고, 어머니(레이첼 와이즈)는 집을 나가고 아버지(마크 왈버그)와 동생(로즈 맥키비)은 홀로 사는 이웃 하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두 세계를 보여준다. 하나는 수지가 머물고 있는 중간 세계, 다른 하나는 가족들과 살인자가 살고 있는 이승이다. 아마도 소설은 살아남은 가족들의 이야기로 진행하지 않았을까? 유령이 현실 세계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햄릿』에서처럼, 잠깐 비추는 정도일 뿐이니까. 이승에서는 혈육의 '부재'를 극복하고 위기를 봉합하는 가족의 모습이 보여지고, 중간 세계에서는 수지의 행복한 환상이 보여진다. 피터 잭슨은 이 이질적인 두 세계를 거의 동일하게 나누어 보여준다.   

 

 

   중간 세계에서의 환상은 그의 전작 <천상의 피조물들>이 생각날 정도로 탄성이 나오는 아찔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만큼의 감흥은 일어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천상의 피조물들>에서 환상이 현실 세계를 사는 소녀들이 꾼 꿈이었다면, <러블리 본즈>의 환상은 현실 세계에 없는, 유령의 환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환상장면이 불필요하거나, 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난 그 장면이 그만큼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막,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설레임을 느끼는 소녀에게, (가족말고) 생애 첫 키스를 기대할 수 있었던 첫 데이트를 앞에 두고, 무참히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아이에게, 그 정도의 위로는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수지의 환상 장면은 내게 있어 "끔찍하게" 아름다웠다. 감탄을 불러 일으키면서도, 그 상황을 생각하며 탄식하게 만드는. 어쩌면 이 영화는 수지를 위한 피터 잭슨의 진혼곡이 아니었을까. 

   그에 반해 현실 장면은 굉장히 삐끄덕 거린다. 너무나도 쿨한 할머니(수잔 새런든)와 죽은 딸의 방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고 기어이 떠나는 엄마, 집안일은 뒤로한 채 범인을 잡으려고 동분서주하는 아빠. 이들의 위기와 갈등은 (마침내) 살인범의 증거물을 찾아낸 동생이 집에 들어오기 직전에 봉합된다. 폭행에 깁스를 한 아버지와 다시 돌아온 엄마, 그들의 화해와 포옹으로 동생은 증거물을 (잠시) 내려 놓는다. 그렇게 산 가족들은 죽은 딸을 떠나보내고(혹은 망각하고) 살아간다. 이 장면에서 스필버그(제작자로 참여)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아마도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이 영화의 '결말부'일 것이다. 확실하게 복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확실하게 화해를 하는 것도 아니고, 확실하게 망자의 원혼을 달래주는 것도 아닌, '어설픈 권선징악'은 동양 문화권 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확실히 '불쾌하게' 생각할 듯 하다. 영화로만 따진다면, 어떤 카타르시스도 느끼지 못하는 어정쩡한 결말이다. 하지만, 이런 '어정쩡한' 결말이 이 영화에 맞다고 생각한다. 확실하게(아니 시원하게) 복수했다면, 가족들은,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어떤 부채의식도 가지지 않고, "그래도 다행이야"라는 생각을 하며 곧 무참히 살해된 수지를 기억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수지가 우리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 "모두들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그 말을 가슴에 담고 살아갈 수 있을까? 사랑스런 시체(the lovely bones)는 떠날 때에도 눈물을 짓게 만든다. 이 슬픔이, 이 느낌이 보편적인 감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덧붙임 

1. 위에 언급한 the lovely bones는 '사랑스런 시체'란 뜻이 아니고, '갑작스런 시련을 통해 점점 커지는 유대감'을 뜻한다고 합니다. 위키를 찾아보니 소설 후반부에 수지가 얘기하는 것에서 따왔다고 하더군요. 물론 영화에서도 언급됩니다.

"These were the lovely bones that had grown around my absence: the connections - sometimes tenuous, sometimes made at great cost, but often magnificent - that happened after I was gone."

2. 살인자 하비와 수지의 동생이 벌이는 서스펜스 장면은 사람을 옥죄게 하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주먹을 꼭 쥐고 "아, 쫌!!" 이라고 외쳐본 적은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3. 브라이언 이노의 음악은 언제 들어도 뭉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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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러블리 본즈' - 죄를 벌하는 것은 운명의 몫
    from Film life in Forest 2010-02-26 21:53 
    사실 나는 "영화 볼 때 남 얘기따위 듣지 않아!"라고 말하고 다니며 그럴려고 무진장 애쓰는 사람이다. 내가 영화를 고르고 영화를 볼 때 마인드는 어디까지나 내가 정한다는, 저 옛날 'X세대'적 마음을 가질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실 해외언론의 악평은 신경 안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자세히 읽지 않았다. 를 보고나니 저 옛날 볼 적이 생각났다. 가끔 남들은 다 싫다는데 나만 좋아하는 영화가 있다. <천년을..
 
 
전호인 2010-02-23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언뜻 보았는 데 슬픈영화로 기억합니다. 쩝

Tomek 2010-02-23 18:30   좋아요 0 | URL
내용으로만 따지면, 슬프고, 끔찍하고, 가슴아프고, 괴로운 이야기인데, 영화는 좀 다르게 나왔습니다.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시면 좋은 영화일 수 있지만, 이야기의 조화를 따지신다면 어정쩡한 영화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호불호가 확실히 갈릴 영화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

카스피 2010-02-24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픈 내용에 비해 보여주신 스틸컷은 무척 환상적이네요^^;;;

Tomek 2010-02-25 09:00   좋아요 0 | URL
끔찍한 장면은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수지가 이승과 천국 사이의 세계에서 겪는 환상은 정말 탄성이 나올정도로 아름답지요. PG-13/15세 관람가 영화이니 그런 것은 당연하겠지요. ^.^;

고맙습니다.

김기범 2010-02-25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실명결고 말하지만 이영화는 장르의 정체성이 없는영화이다 이도저도 아니여서 흥행성 작품성에 모두 오명을 얻은영화 이런걸 개봉하는이유를 모르겟다

박종민 2010-03-11 0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등 모험 판타지 영화에 젖은 관객들이라면 소화하기 힘든 영화일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는 판타지의 범주에 속하기엔 느낌이 틀립니다. 분명 초현실주의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 영향을 받은듯 합니다. 이 영화는 이런 저런 기법이 들어차 있습니다. 등대를 비롯한 여러 상징체계 요소들이 등장합니다. 감독은 관객들은 상징과 은유 비유에 맘껏 다양한 해석을 내리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Tomek 2010-03-11 10:00   좋아요 0 | URL
피터 잭슨의 뉴질랜드 시절이 없었다면 뜨악할만한 작품이었겠지만, 그의 감수성이 아직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인 것 같습니다. 물론 거대자본과의 만남은 좀 삐걱거린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언제나 성공만 할 수는 없지요. 오히려 다음 영화가 기대됩니다.

고맙습니다. ^.^;
 


               <낙타씨의 행방불명>
               원작  박민규 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극본  이명숙
               연출  기민수
               방영일  2005년 5월 7일 

 

 

1. 들어가며 

   <낙타씨의 행방불명>은 내게 있어서 의미있는 드라마다. 이 드라마로 박민규 작가를 알게 됐으니까. 이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난 박민규라는 존재를 좀 더 늦게 알게 됐거나, 아니면 아직도 모르고 지냈을 거다. 뭐 박민규 작가야, "그랬거나 말거나" 했겠지만, 난, 그만큼 외롭고 우울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혹시 알어? 자살이라도 했을지. 농담이 아니다.

   원작 소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창작과 비평, 2004년 가을호)」 는 지금껏 두 번 영상화 됐다. 처음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낙타씨의 행방불명 (KBS 드라마시티, 2005년 5월 7일 방송)>이고, 다른 하나는 <카스테라 (TV 문학관, 2007년 3월 2일 방송)>다. <낙타씨의 행방불명>은 기본적인 설정과  소설 특유의 분위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새로 쓴 이야기고, <카스테라>는 단편집 『카스테라』에 실린 작품 중,「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와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TV 문학관 답게 디테일한 묘사는 소설을 그대로 따라가지만, 그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원래는 원작 소설과 이 두 드라마를 같이 비교하려 했으나, 드라마 <카스테라>는 두 작품이 하나의 내러티브로 섞여 있어서 독립된 작품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기에,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와 <낙타씨의 행방불명>만 이야기 하겠다. 

 

 

2. 이야기 

2-1. 소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소설은 박민규 특유의 문체로 가볍고, 엉뚱하고, 발랄하게 진행되지만, 그 내용은 참혹한 성장담이다.

   상고를 다니는 '나(승일)'는 수많은 아르바이트르 하며 생계를 돕는다. 그런 내가 이렇게 실리적으로 변한 이유는 중학교 때, <무슨 상사>라 불리우는 작은 회사에 식물처럼 무표정으로 앉아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난 이후부터다.

   방학을 맞이해 신도림역에서 푸쉬맨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아버지와 '나'는 생계외에 어머니의 병원비까지 벌어야한다. 힘든 나날이 지속되던 중, 신도림역에 도착한 전철에서 튕겨나온 아버지와 조우하는 일이 발생되고, 나는 짐짝처럼 아버지를 열차에 구겨 넣는다. 그러던 아버지가 말없이 집을 나갔다.

   어머니가 '기적적으로' 깨어나 자신의 병원비를 벌고, 할머니를 요양소에 보내고, 우리집은 조금씩 생기를 찾고 있다. 어느날 나는 러시아워가 끝난 신도림역 벤치에 누워 있다가 기린을 보게 된다. 그 기린은 아버지의 양복을 입었다. 나는 기린을 붙잡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운다. "아버지, 그럼 한 마디만 해주세요. 네? 아버지 맞죠?" 그러자 멀뚱히 듣고 있던 기린의 끔찍한 대답이 이어지고 소설은 끝난다.

 

2-2. 드라마 <낙타씨의 행방불명>

   드라마 역시 주인공 이정식(문지윤)의 시점으로 진행한다. 정식은 학교에서 달리기 선수로 재능이 있지만, 그 외의 일에는 무관심한 편이다. 그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박승태), 아버지(기주봉), 어머니(김선화), 누나(송지영)와 함께 곧 재개발이 이루어질 달동네에 살고 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명석형(서동원)의 소개로 경마장에서 인형탈을 뒤집어쓰고 일하는 아르바이트를 얻는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누나는 빛때문에 가출을 한다. 정식은 누나를 '업소'에서 만난다. 정식은 아버지를 경마장에서 만나고, 아버지는 정식에게 밥을 사준 후, 가출을 한다. 정식은 생계를 위해 학교를 그만두지만, 육상부 코치(이한위)의 부탁으로 이번 시합에는 나가기로 한다.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고 돌아오던 날, 재개발이 시작되고 정식의 집은 사라진다. 정식은 그 폐허위에 텐트를 치고, 아버지, 엄마, 누나가 돌아오길 기대한다. 정식에게 호감이 있던 미주(정구연)가 정식을 위로하러 동물원에 같이 간다. 정식은 동물원에서 아버지를 보는데, 자세히보니, 그것은 아버지가 아닌, 외로워 보이는 낙타였다.  

   시합 당일, 정식은 앞서나갔으나, 실수로 넘어지고 만다. 그때 고개를 들어보니, 할머니, 어머니, 누나, 그리고 동물원에서 봤던 낙타의 모습이 보인다. 다시 보니, 결승선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누나가 정식을 기다리고 있다. 정식은 일어서서 가족이 있는 결승선을 향해 달린다. 

 

   

3. 소설과 드라마

   미안하구나.   

   아버진 그렇게 얘기했다. 또 그 소리. 내가 일만 한다하면 늘 같은 소리였다. 처음엔 들을 만했는데, 결국 들으나마나가 돼버린 지 오래다. 나이 마흔다섯에 시간당 삼천오백원, 즉 그것이 아버지의 산수였다. 여하튼 무슨 상사(商社)에 다녔는데, 여하튼 <무슨 상사>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직장이었다. 딱 한 번 나는 그곳을 찾아간 적이 있다. 중학생 때의 일인데 도시락을 갖다주는 심부름이었다. 약도가 틀렸나? 엄마가 그려준 약도를 몇 번이고 확인하며, 근처의 골목을 서성이고 서성였다. 간신히 찾아낸 아버지의 사무실은 - 여하튼 그곳에 있기는 한, 그런 사무실이었다. 쥐들이 다닐 것 같은 어둑한 복도와, 형광등과, 칠이 벗겨진 목조의 문. 혹시 외국(外國)인가? 라는 생각이 들 만큼이나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깜짝이야, 그런 단어가 머리 속에 있었다니 넉넉한 환경은 아니어도, 제법 메탈리카 같은 걸 듣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세상은 뭔가 ESP 플라잉브이(메탈리카가 사용한 기타의 모델명)와 같은 게 아닐까, 막연한 생각을 나는 했었다. 했는데, 해서 문을 열고 들어서자 꼬박꼬박 도시락만 먹어온 얼굴의 아버지가 가냘픈 표정으로 사무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주인공 '나'가 어떻게 또래에 비해 얌전하고 현실적인 '산수'를 하게 되었는지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어린아이의 세계'에서 살다가 '어른들의 세계'를 알게되고, '아버지의 힘듦'을 느끼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드라마에서는 이 부분을 정식의 환상 부분으로 처리했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된 것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정식은 놀란다. 이 전에도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도왔지만, 이 장면 이후로 정식은 더 많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체력적으로 힘들어한다.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물론 세상엔 수학(數學) 정도가 필요한 인생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삶은 산수에서 끝장이다. 즉, 높은 가지의 잎을 따먹듯 - 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다보면, 어느새 삶은 저물기 마련이다. 디 엔드다. 어쩌면 그날 나는 <아버지의 산수>를 목격했거나, 그 연산(演算)의 답을 보았거나, 혹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즉, 그런 셈이었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는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았다. 그리고 느낌만으로 <아버지 돈 좀 줘>와 같은 말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참으로, 나의 산수란. 

   드라마에서 수학 시간은 총 두 번 나온다. 첫 장면에서 정식은 선생님의 설명을 이해못해 선생님 얼굴을 뻔히 쳐다보다가 무안을 당한다. 정식에겐 산수만으로도 벅찬데, 선생님의 수학은 이해 못하는 성질의 형이상학이다. 두 번째 장면은, 어머니가 입원하시고, 생계를 위해 무리하게 아르바이트를 해 수업시간에 자는 장면이다. 정식에겐 더 이상 수학은 이해 못할 차원의 학문이 아니라, 상관없는 학문이 된다.  

 

 
   처음 열차가 들어오던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열차라기보다는, 공포스러울 정도의 거대한 동물이 파아, 하아, 플랫폼에 기어와 마치 구토물을 쏟아내듯 옆구리를 찢고 사람들을 토해냈다. 아아, 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뭔가 댐 같은 것이 무너지는 광경이었고, 눈과 귀와 코를 통해 머리 속 가득 구토물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야! 코치 형이 고함을 질러주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도 놈의 먹이가 되었을 테지. 정신이 들고 보니, 놈의 옆구리가 흥건히 고여 있던 구토물을 다시금 빨아들이고 있었다. 발전(發電)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힘! 그때 코치 형이 고함을 질렀다. 해서, 엉겹결에 - 영차, 영차 무언가 물컹하거나 딱딱한 것들을 맘구마구 밀어넣긴 했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어찌 내 입으로 그것이 인류(人類)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원작에서는 지하철역, 게다가 악명 높기로 유명한 신도림역을 주 사건이 벌어지는 무대로 삼았다. 3분마다 들어오는 지하철,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과 타려는 사람들의 아비규환. 박민규 작가는 아마도 열차를 하나의 세상으로 본 게 아니었을까. 180명 정원에 400명이 들어가는, 그것을 '특권'이라고 허용해주는 잔인한 세상. 그 세상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나'와 그 세상에서 튕겨져 나오는 '아버지'를 다시 (세상 속으로) '우겨 넣는' 나. 지하철역이라는 공간은 세상을 환유하는 공간이다.  

   드라마에서는 지하철역 대신 경마장을 택했다. 카메라가 비추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튕겨져 나온 사람들, 그렇기에 다시 그 세상에 편입하기 위해 한탕을 원하는 사람들을 비춘다. 누구나 부자를 꿈꾸지만 결국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정식은 아버지를 만난다.  
 
 

 
   병실에 들어서자, 엄마의 손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들어왔다. 엄만 어때? 대답 대신 아버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초원의 복판에서 갑자기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된 타조처럼 - 멍하고, 어두운 표정이었다. 실은  그 동안 그나마 아주 잘 걸어왔다는, 아니 달려온 거라는 생각이 나도 들었다. 사라질 엄마의 봉급, 여전한 할머니의 약값, 발생될 엄마의 치료비... 아버지의 눈동자가 그토록 잿빛이었단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뭐랄까, 전지가 떨어진 계산기의 꺼진 액정과 같은, 그런 잿빛이었다. 이제, 계산이 안 나온다. 나도, 계산이 서질 않았다. 불 꺼진 병원의 비상계단에서, 나는 코치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의 절망 부분은 드라마쪽이 더 울림이 컸다. 기주봉 씨라는 대배우가 이 역을 맡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활자의 묘사보다는 시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더 크게 느껴진다. 이 장면 이후로 아버지는 가출한다. 아버지가 가출하기 전, 중국집 화장실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이렇게 한탄을 한다. 

   "구질구질해? 진짜 구질구질한 게 뭔 줄이나 아냐? 죽어라고 휴가 한 번 제 때 못내고 입 꽉 깨물고 일했어. 딴 눈 한 번 안 팔고, 살았는데, 그랬는데 결국, 여기 밖에 못 온거야.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여기 요만큼. 결국 제자리지 뭐."

 

   끝내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대신 어머니의 의식이 기적처럼 돌아왔다. 의식이 돌아왔다는 사실보다도, 퇴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뻐 나는 울었다. 글쎄 그 정도의 서러운 이유라면 누구나 눈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

   그렇게 우리집은, 다시금 숨을 트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라졌지만 할머니란 짐을 덜게 된 까닭으로, 또 엄마가 스스로 자신의 병원비를 번 까닭으로 그대로, 그렇게. 근처의 지붕에서 지켜본다면, 아마도 그것은 잔디의 작은 싹이 움을 튼 모습과 비슷한 관경이었을 것이다. 살아, 있다. 무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유사한 산수를 할 수 있단 것은 얼마나 큰 삶의 축복인가. 사라지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

   소설과 드라마는 '희망'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들여다보면, 희망보다는 '암담함'의 분위기에 가깝다. 책은 "무사하진 않았지만", "살아, 있다"는 표현처럼,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삶의 질을 따지기 대신, '생존' 그 자체에 대한 안도감을 피력하고 있다. 이제 18세인 고등학교 2학년 생에게 이것을 희망이라 부를 수 있을까. 

   드라마는 더 처절하다. 마지막 생존의 보루인 집까지 없어진 상태다. 할머니는 요양원에, 아버지는 가출, 어머니는 병원, 누나는 업소에 뿔뿔이 흩어져있다. 정식은 무너진 집 폐허 위에 텐트를 세우고 가족을 기다린다. 여름이 오면 가족들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무너진 집 위에서 정식은 멀리 있는 아파트를 바라본다. 정식은 가족들과 저 앞에 보이는 아파트-Home, Sweet Home-에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된 거예요? 기린의 무릎을 흔들던 나는, 결국 반응을 포기하고 이런저런 집안의 근황을 들려주었다. 할머니의 소식과 어머니의 회복, 그리고 나는 부동산 일을 배울 수도 있다, 선배가 자꾸 함께 일을 하자고 한다, 자리가, 자리가 있다고 한다. 경제도 차차 좋아질 거라고 한다, 무디슨가 어디서 우리의 신용등급이 또 한 계단 올라셨대요, 좋아졌어요. 그러니 돌아오세요.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구름의 그림자가 또 빠르게 지나갔다. 아버지, 그럼 한마디만 해주세요. 네? 아버지 맞죠? 그것만 얘기해줘요. 

   무관심한, 그러나 잿빛의 눈동자가 이윽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소설과 드라마 모두 마지막은 주인공의 '환상'으로 끝난다. 소설의 '나'는 환상에서조차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지만, 드라마의 '정식'은 아버지는 물론, 흩어졌던 가족을 모두 만난다. 소설의 '나'나 드라마의 '정식'이나 깨어나면 결국엔 '혼자'일 것이다. 소설과 드라마 각기 결말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은, 말 그대로 '참혹한 성장담'이다. 어떤 결말이 더 나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소설은 소설대로,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감정의 울림이 있었으니까. 개인적으론 소설의 울림이 조금 더 크게 느껴졌다.

 

 

4. 드라마 

   정식이 사는 곳은 재개발이 부분적으로 들어간 달동네다. 용역깡패들은 수시로 등장해 이곳 주민들을 위협하고 공포에 질리게 한다. 동네가 부서지면서 정식의 가족들은 흩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정식의 가족이 모두 흩어졌을 때, 정식의 집은 헐린다.

 

   소설과 드라마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아버지와 주인공에게 '짐'이 되는 역할이다. 단, 소설에서는 어머니가 의식을 잃은 것으로 처리해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드라마에서는 병원에 있는 것을 핑계로 '집안 일'에서 아예 신경을 꺼버리고 주인공 정식에게 모든 짐을 지게하는 '무책임한 엄마'로 나온다. 어찌보면 조금 다르게 갈 수도 있는 역할이었을텐데, 어머니 역을 맡은 김선화 씨가 워낙에 악역을 많이 맡아 어쩔 수 없이 스테레오 타입으로 비친 것 같기도 하다.  

 

   소설에 없고 드라마에 추가된 누나(송지영) 역은 어머니와 비슷한 역이다. 가족의 붕괴를 나타내는 한 축이자, 소년인 정식이 처음으로 '가장'의 관점으로 가족(누나)을 바라보고, 세상과 현실을 깨닫게 하는 역할이다.

 

   소설에서 주인공 '나'에게 여러 아르바이트를 소개하고, 인생에 대해 설교(조언)도 해주는 '코치 형' 역은 드라마에서 둘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소설에서 '코치 형'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최명석(서동원)'으로, 다른 하나는 학교에서 육상을 가르치는 '코치 선생님(이한위)'이다. 이 둘은 각기 여러 의미에서 정식의 인생에 개입한다. 명석은 정식에게 세상(사회)을 알려주고, 코치는 정식에게 "정식아, 네가 희망이다"라는 말을 한다.

 

   소설에는 없는 주인공의 '여자친구' 송미주(정구연)가 드라마에선 추가 됐다. 큰 역할을 하진 않지만, 정식이 힘들 때마다 도움을 - 도시락을 싸온다거나, 동물원에 같이 간다거나, 노래를 녹음해 준다거나 - 준다.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고 돌아오는 길, 동네가 철거에 들어가자, 허둥지둥 짐을 싸던 정식이 갑자기 다 포기한 듯 주저앉고 미주가 선물해준 노래를 듣는다. 

   "거칠은 벌판으로 달려가자. 내일의 희망을 마시자. 보석보다 찬란한 무지개가 살고 있는 저 언덕 너머 내일의 희망이 우리를 부른다." 

  

 

5. 맺음 - 희망

   드라마를 보면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희망. 희망이 정말 있을까? 희망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달리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서 끝까지 달리는 것? 하지만 그 결과가 단지 '환상'이라면, 희망이란, 얼마나 잔혹한가. 

 

 

6. 덧붙임 

a. 언급하지 않으려 했으나 조금만 이야기한다면, <낙타씨의 행방불명>과 <카스테라>의 차이는 '분위기'에서 납니다. <낙타씨의 행방불명>은 (비록 내용은 끔찍하더라도) 박민규 작가의 문체처럼 발랄하게 진행하지만, <카스테라>는 그 발랄함을 걷어내서 굉장히 어둡고 무겁습니다.

위 <낙타씨의 행방불명>, 아래 <카스테라>    

 

b. 기민수 PD는 <그저 바라만 보다가>, <굿바이 솔로>, <꽃보다 아름다워> 등을 연출했습니다.  

c. 짧게 쓰려 했는데, 또 길어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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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런 2010-02-23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민규의 '그렇습니까기린입니다' 저도 정말 좋아하는데, 드라마가 있었는지는 몰랐네요. 일상에서 묻어나는 고단함과 위로를 잘 표현해 준 작품이었어요. 특히 저는 "조금씩, 열차는 흔들렸고, 조금씩, 마음도 흔들렸다. 삶은, 세상은, 언제나 흔들리는 것이었다." 라는 구절을 좋아했었는데.. 여튼 이렇게 영상으로 소개를 받으니 또 묘하네요. 글 잘 읽고갑니다 :)


Tomek 2010-02-24 09:26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알로하, 오예" 저는 이 구절을 가장 좋아합니다. ^.^; 박민규 작가의 특징은 농담같은 말들이 나중에 다시 언급되면서 묘한 울림을 주는 것 같아요. 화성인, 금성인, 지하철, 은하철도, 화단에서 꽃잎 뜯어먹는 남자 하와이 티셔츠를 입은 성추행범... 뭐 이런 농담들이 나중에 다시 반복될 때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

stella.K 2010-02-26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2005년이요? 이런 거 했는 줄 몰랐네요. 함 봐야겠습니다.^^

Tomek 2010-02-26 18:09   좋아요 0 | URL
소설과 상관없이 재밌지만, 소설을 읽으셨으면 더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

밍키 2021-10-23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다시 보고 싶은 드라마라서 검색하다가 여기까지 오게됐네요ㅠㅠㅠ
혹시 이거 어디서 볼 수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빵과자유를위한정치>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 - MB를 넘어,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
손호철 지음 / 해피스토리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스스로 진보적(progressive)이라 일컫는 손호철 교수가 한국일보, 프레시안 등에 기고한 칼럼을 모은 책이다. 기간을 조금 벗어나는 글도 있지만, 대부분이 2007년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부터 지금 한창 이슈화되고 있는 세종시 문제까지 MB정부 2년여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쓴 정치평론이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위해 쓴 글이 아닌, 한 진보주의자의 관점으로 작금의 사태를 바라보고 비판한 글이기에, 한나라당, 민주당은 물론이고, 여타 군소 정당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 역시, 감상과 애도를 배제하고 날카롭게 바라본다. 

   각각의 글들은 신랄하고 날카로우며, 때로는 모골이 송연해질정도로 상황을 파악하고 비판하지만, 이 각각의 글들을 한데 모아 생각해보니, 어쩐지 저자의 깊은 한숨과 탄식이 들리는 것 같다. 저자가 본문에서도 여러번 언급한 '해가 져야 비상을 시작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언제나 미리 예측하지 못하고, 사후에 일어난 일을 가지고 평가만하는 지식인의 무력함이 글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한 진보주의자의 초상'이라 불려도 좋을만큼, 이 책은 '진보적' 관점에서 한국 정치를,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비판하고 충고하고 있다. 그렇다고 MB(정부)를 악으로 놓고, 민주당과 그 외 군소정당을 선으로 놓는 우를 범하지도 않는다. 그는 대한민국의 정치를 정당으로 바라보지 않고, 구조적인 문제에서 바라보고 있다. 

   예를들어, 정권만 바뀌면 개편되는 정부기구와 교과서 문제를 거론하며, 한 나라의 근간이 되는 국가기구와 역사는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근간을 마련하자고 제의한다. 김용갑 의원을 바라보며,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이념이 아니라, 그 이념을 담을 그릇, 즉, 격(格)을 이야기한다. 오바마가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이야기한 것도, 부시 정권 8년에서 잊혀졌던, 미국의 격(decent)이 아니었던가.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한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실정때문이기도 하다. 앞으로 정권이 바뀔려면 3년 혹은 8년이 걸릴수도 있다. 단순히 '정권교체'만을 외치는 것으론 정권교체는 불가능하며, 또한 설령 된다 하더라도, 언발에 오줌누는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다. 차라리 오래 걸리더라도, 천천히 구조적인 틀을 세워가며 확실히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 손호철 교수의 글을 읽고 든 내 짧은 생각이다.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 책에서도 자주 언급하는, 아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위기'를 설명할 때 쓴 말이다. 맞다. 지금은 위기다. 새로운 것이 태어날지, 아니면 다른 낡은 것이 새로운 것을 대체할지, 그것은 국민의 선택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 결정을, 선택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 덧붙임:

319쪽 밑에서 7번 째, 6번 째 줄에 있는 2006년은 1996년의 오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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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2월 3주

   중앙씨네마에서 기획한 [마지막 스크린 추억을 만나다]를 보러 중앙극장에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야 알았다. 중앙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사실을. 

   중앙극장은 중앙씨네마로 이름을 바꿨지만, 아직도 내겐 중앙극장으로 남아있다. 그곳에서 처음 본 영화는, 중학교 때, 처음으로 가족들과 <쥬라기 공원>을 봤었다. 청계고가 밑 어두 컴컴한 분위기, 쏜살같이 달리는 자동차와 매연과 경적소리를 뚫고 들어간 극장은 재개봉관같은 허름한 분위기였다. 시설에 실망을 했지만, 영화가 시작되고나서 그런 생각은 접어두게 되었다. 마법같은 순간. 영화에 나오는 거대한 공룡들을 보고 감탄하고, 티라노가 나왔을 때 같이 소리를 질렀던, 93년 여름을 보냈던 그때 그사람들은 그 순간을 기억을 할까?  

   중앙극장은 내게 어떤 내세우기는 뭣하지만, 간직하고 있는, 은밀한 기억과도 같은 곳이다. 그런데 그곳이 없어진다니. 도시는 나날이 발전하지만, 추억은 그만큼 빠른 속도로 사라진다. 몇 십년 후, 이곳 서울은 내게 있어서 어떤 공간으로 남을까? 추억은 사라지고 현실만 남은 삭막한 공간으로 남지 않을까? 이번주는 사라지는 극장, 사라지는 추억을 생각하며 그와 관련한 영화를 찾아보는 게 어떨까 싶다. 

 

   극장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다루는 영화 중 이 영화를 능가하는 영화가 있을까? 영화에 대한 사랑, 극장에 대한 사랑,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웃기고 울렸던 추억들. 이탈리아 시실리 섬의 '씨네마 파라디소' 극장은 단순히 영화가 상영되는 곳이 아닌, 그곳 작은 섬에 머물렀던 모든 사람들의 추억이 머물러 있는 곳이다. 주인공 토토에게는 아버지같은 존재인 알프레도와의 추억과 첫사랑의 기억이 머물러있는 곳이기도 하다. 

   결국 극장은 부서지고, 남아있는 노인들은 그들의 부재함을 인정하고 슬퍼한다. 극장이 없어진 자리엔 쇼핑몰이 들어설 것이고, 그 장소는 추억의 장소가 아닌, 실용의 장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존재하는한, 또 극장이 존재하는한,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항상 존재할 것이고, 그들은 그 추억을 간직하며, 들쳐보고 살아갈 것이다. 

 

   차이 밍량 감독의 <안녕, 용문객잔>또한 사라져가는 극장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의 주인공(!)인 복화극장은 내일 문을 닫을 예정이다. 이 극장의 마지막 상영 영화는 호금전 감독의 <용문객잔>이고 밖엔 폭우가 내리고 있다. 폭우를 뚫고, 젊은 일본인 남자가 동성애 파트너를 찾기 위해 극장에 오지만, 극장안은 텅 비었다. 그런데 그 때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존재들이 나타난다. 

   차이 밍량은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것을 기억해두기 위해 영화를 찍는 것 같다. <애정만세>를 봤을 때도 그랬고, <구멍>을 봤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 영화 <안녕, 용문객잔>또한, 이제는 사라져가는 변두리 구석의 극장을 회환에 찬 눈길로 따스하게 바라본다. 영화는 극장 구석구석을 마치 잊지 않으려는 듯 보여주고, 그 안에서 다리를 저는 여자 매표원과 젊은 영사기사의 애틋한 감정도 보여준다. 결국 영화는 끝나고, 내일이면 극장은 문을 닫을 것이다. 이 모든 풍경들이 추억속에 사라져간다. 

 

   이야기를 너무 감상적으로 끌었다. 람베르토 바바의 <데몬스>는 극장이라는 공간이 악몽의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 영화는 비디오나 DVD로 보면 결코 그 매력을 느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 영화의 '악령(혹은 좀비)'들이 극장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환상이 극장이라는 현실로 들어오는 순간. 영화 속 상황과 영화 밖 실제 상황과 겹쳐져, 이 영화는 독특한 아우라로 상영시간 내내 보는이를 옥죈다. 아마도 이 영화를 상영한 극장은 다시는 영화를 상영할 수 없을 것이다. 추억과 아쉬움이 아닌, 끔찍한 기억으로서의 공간. <데몬스>는 다른 방법으로 극장이라는 공간을 환기시킨다. 

 

   앞으로 살면서 몇 번이나 추억과 이별을 하게 될까? 청춘은 추억을 쌓는다. 청춘이 끝나면 추억을 꺼내보고, 하나씩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청춘은 끝났다. 

 

 

*덧붙임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전계수 감독의 <삼거리 극장>은 <안녕, 용문객잔>과 <데몬스>를 섞은 듯한 느낌의 영화였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꼭 찾아보시길... 정말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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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io 2010-02-19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앙씨네마, 혹시 스폰지 하우스 중앙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너무 가슴이 아프네요. 그곳에서 영화(솔직히 시사회가 대부분이었지만)를 많이 봤었는데... 저간의 사정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극장에서 경험과 추억, 그리고 환상을 살찌우고 있는 많은 영화인들에게 이 소식은 큰 충격이 될 것 같네요. ㅠㅠㅠ

Tomek 2010-02-19 17:44   좋아요 0 | URL
스폰지 중앙은 작년(벌써 작년이네요)에 정리를 했고, 중앙씨네마만 남은 상황이었는데, 그 중앙극장도 문을 닫는다고 하더군요. 스폰지는 광화문 하나만 남고 다 정리한 상황입니다.

이젠 메가박스나 CGV에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ㅠㅠ

2010-02-22 0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2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3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3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