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의 양심·시청자만이 두려움의 대상”
[한겨레가 만난 사람]
YTN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 노종면 노조위원장
정치권과 구본홍씨 쓸 수 있는 카드 바닥 드러내
민영화 막기 위해서라도 ‘출근 저지’ 성공시킬 것
 
 
한겨레 이문영 기자
 








 

» 노종면 YTN노조위원장
 
주연과 조연이 바뀌었다. 막둥이 ‘윤택남’(누리꾼들이 붙인 보도전문 채널 <와이티엔>(YTN)의 애칭)이 첫째 ‘고봉순’(<한국방송> KBS)과 둘째 ‘마봉춘’(<문화방송> MBC)의 인기를 넘어섰다.

막둥이의 인기는 16일 오후 감행한 생방송 기습시위로 절정을 이뤘다. ‘공정방송’ 팻말의 생방송 노출은 윤택남네 ‘반항아들’의 겁 없는 ‘애드리브’였다. 생방송(오후 1시 ‘뉴스의 현장’) 두 시간 전에 시위팀이 꾸려진 ‘즉흥 애드리브’였지만, 노조 집행부가 오랜 시간 치밀하게 준비한 ‘계산된 애드리브’이기도 했다. 택남이네 젊은 기자들의 투쟁에 회사는 징계와 고소로 대응했고, 시민은 뜨거운 응원과 지지로 화답했다. 2008년 여름은 와이티엔 창사 15년 만에 맞고 있는 최대 시련의 시기이자 최고 영광의 시기다.

“우리 투쟁은 와이티엔 사장의 ‘기준’을 지켜내려는 싸움이다.”

노종면(40·[사진]) 위원장은 지난 두 달 동안의 구본홍 사장 출근저지 투쟁을 이 한마디로 정의했다. 거창한 기준도 아니다. “보도매체 사장으로서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말아야 한다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포기할 수 없는 ‘최소한의 기준’은 노조가 대통령 언론특보 출신인 구 사장에게 단 하루도 정상 출근을 허용하지 않은 이유가 됐고, 조합원들이 회사의 징계 압박보다 언론인으로서 각자의 양심을 더 두려워하도록 만든 근거가 됐다. 노 위원장은 “조합원 모두가 우리의 투쟁이 옳은지, 자신의 생각이 옳은지 끊임없이 자문하며 두 달을 싸워 왔다”고 밝혔다.

“구본홍씨의 출근을 막으며 우리는 여러 공간에서 그를 만나고 그의 생각을 피부로 접했다. 무능력한 사태해결 방식, 노조 반대에 징계로 대응하는 모습, 인사에서 드러난 사람을 평가하는 시각 등 단지 특보 출신이란 사실 하나만으로는 사장이 될 수 없음을 구씨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

1990년대를 겪으며, 국민이 지키지 않으면 방송은 정치권력 논공행상의 가장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러기까지 서기원 사장 임명 반대를 위해 486명이 연행되고 11명이 구속된 한국방송 노조의 처절한 투쟁이 있었다. 2008년을 겪으며, 한국 사회는 공정방송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얻어내는 것이란 엄중한 사실을 배우고 있다. 그러기까지 와이티엔 노조의 두 달 넘는 지난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노 위원장은 ‘공정방송 수호의 선봉에 와이티엔이 있다’는 평가가 “힘도 되고 부담도 된다”고 말했다. 그는 와이티엔을 한국방송이나 문화방송과 비교하는 시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케이비에스와 엠비시는 그들이 처한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다”고 했고, “와이티엔도 와이티엔의 자리에서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는 오히려 “현재 와이티엔 노조는 매우 아슬아슬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투쟁의 정점이다. 아주 작은 변수에 따라 노조 동력이 한층 불붙을 수도, 찬물을 맞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다. 징계 협박 등 외부의 힘이 우리를 쓰러뜨리진 못했다. 다만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조합원들이 피로감에 지쳐 간다. 투쟁 방식에 대한 노조 내 이견도 있다. 우리의 최대 적은 우리 내부의 이탈이다.”


 

» 노종면 YTN노조위원장
 


노 위원장은 그러나 “조합원들을 무한히 신뢰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구 사장과 타협을 시도하던 전임 지도부가 물러나고 새 지도부가 들어서기까지 노조는 적지 않은 내부 갈등을 겪었다. 구 사장 반대투쟁 그 자체보다 투쟁 이후 상처 치유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두 달이 지난 지금, 우려는 많이 가셨다. 노조원들끼리 익명에 숨어 서로를 비난하는 행위가 사라졌다. 동료에 대한 징계방침이 알려지자 ‘나도 징계하라’는 글이 사내게시판에 잇따라 올라왔고, 17일 인사위원회를 막기 위해 100여명이 떼로 모였다. 힘겨운 싸움이 신뢰를 키웠고, 신뢰는 싸움을 지속하는 자양분이 됐다.

“우리의 싸움이 와이티엔 내·외부 지형을 적지 않게 바꿨다. 무엇보다 노조에 전달되는 정치권의 반응이 다양해졌다. 전엔 노조 투쟁에 대한 반협박조의 목소리가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여권에서도 구본홍 교체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온다. 정치권도 구본홍씨도 쓸 수 있는 카드가 거의 바닥난 셈이다.”

그는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주식매각 발언으로 와이티엔 민영화 논의에 불을 지피다 비판받은 점과, 최근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와이티엔 노사문제를 빌미로 재승인 불허 근거를 찾으려다 실패한 점에 주목했다. 정치권의 구 사장 ‘외곽지원’도 별로 소득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반면 와이티엔의 민영화 가능성 자체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정권이 민영화를 통해 방송을 장악하고 거대자본과 족벌신문에 방송 진출 길을 열어주려는 시도는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걱정스럽다. 와이티엔도 유력한 민영화 대상이다. 민영화를 막아내기 위해서라도 출근저지 투쟁을 잘 끝내야 한다.”

노 위원장은 회사 쪽과의 대화 가능성을 여전히 열어 뒀다. 그는 “지금이라도 사쪽이 ‘끝장투표’를 통해 사내 민의를 확인하겠다면 노조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다만 끝장투표가 이뤄지려면 사쪽은 조합원 고소와 징계 방침부터 철회하고, 다수가 반대할 땐 구본홍씨가 물러나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반대로 다수가 찬성하면 노조도 구 사장을 인정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본격 파업에 돌입하지 않았으나, 와이티엔은 이미 준파업 상태다. 구 사장의 인사명령에 불복종했고, 각 부서에서 부서장을 제외시킨 채 고참기자 중심으로 방송을 제작하고 있으며, 두 차례의 징계 시도도 무산시켰다. 노 위원장은 “이후 파업 계획을 밝힐 시기가 아니다”라면서도 “방송을 포기하려는 파업이 아니라 방송을 지키기 위한 파업”임을 강조했다.

와이티엔은 두 달 전의 와이티엔이 아니다. 출근저지 투쟁이 끝난 뒤의 와이티엔도 지금의 와이티엔과 다를 것이다. 와이티엔을 향한 외부의 기대 또한 전과 같을 수 없다. 노 위원장은 “우리의 싸움이 끝날 때 와이티엔은 오로지 시청자만을 두려워하는 방송사로 거듭나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9월22일, 구 사장 출근저지 투쟁 67일째다. 와이티엔의 역사가 67일째 새롭게 기록되고 있다.

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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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지지 않은 정신 / 김종철

 

삶의창
 
 
한겨레  
 






 

?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마음이 허전할 때, 문득 그리워지는 분들이 있다. 몇 해 전 돌아가신 방송극작가 박이엽 선생도 그런 분이다. 박이엽은 문필가이기 전에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고 민병산 선생과 함께 나란히 인사동 거리를 느린 걸음으로 떠돌던 ‘무욕’의 철학자이자 탈속의 현인이었다.

원래 민병산이나 박이엽이 내게 중요했던 것은 그분들의 뛰어난 번역 때문이었다. 나는 일본 소설을 별로 읽지 않았지만, 내가 큰 감명을 받은 작품은 대개 민병산 번역이었다. 원작의 질 못지않게 역자의 해박한 지식과 섬세한 감수성이 결정적인 구실을 했음이 틀림없다. 박이엽의 번역도 일품이었다. 나는 그가 옮긴 <나의 서양미술 순례>나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혹은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의 기행문을 읽으면서 외국어에 대한 그의 정확한 이해는 물론, 우리말에 대한 그의 풍부한 교양과 예민한 감각이 늘 경탄스러웠다.

그런 박이엽의 학력은 중졸이었다. 그의 지식과 교양은 밑바닥 생활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배움의 결과였다. 그의 추모문집이 작년에 <저절로 아름다운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 책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지만, 그중에서 내게 무척 인상 깊었던 일화가 하나 있다.

원래 젊어서부터 폐병으로 고생하던 박이엽은 1970년대 어느날부터 어떤 대학병원에서 정기적인 진료를 받았다. 그를 담당했던 나이 지긋한 의사는 첫날 진료가 끝나자 박이엽에게 다음부터는 병원이 아니라 의과대학의 자기 연구실로 직접 찾아오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병원에 올 때마다 진료비를 따로 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후 연구실에서 만날 때마다 그 의사/교수는 자신의 캐비닛에서 한달치 약을 꺼내 이 가난한 환자에게 무료로 주곤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의사는 대학병원의 규칙을 어겨가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가난한 환자 누구에게나 그런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의사는 박이엽을 앞에 앉혀놓고 담배가 해롭다는 이야기를 길게 해주었다. 그 당시는 담배의 유해성이 아직 사회적 이슈가 되지 않고 있었다. 이때 박이엽은 ‘사실 담배를 끊을 마음은 전혀 없으면서’ 환자의 건강을 염려하는 의사에 대한 인사성으로 “그럼 저도 담배를 끊어야 할까요?”라고 예의 바른 척 물었다. 그러자 당장에 의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자슥아, 네가 담배 시작할 때는 내 허락 받고 했어?” 의사는 이 청년 환자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박이엽은 평소에 환자에게 그지없이 인자하면서도 환자의 ‘교활한’ 태도에는 조금도 용서가 없는 의사의 이 솔직담백한 인간성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 후 그 의사에 대한 그의 존경심이 더 깊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빈틈없는 시스템 속에서 관리되고 길들여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세련된 삶, 근대적인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대학병원의 의사가 병원당국 몰래 환자를 자기 연구실로 오게 하여 약을 공짜로 준다든지, 환자에게 거리낌 없이 화를 낸다든지 하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인간적인 배려와 반응은 오늘의 ‘진보된’ 사회 시스템에서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다. 더욱이 이미 이 체제에 잘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그런 행동은 오히려 촌스러운 것으로 비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촌스러운 야생의 정신이 아직 살아 있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도처에서 목격하는 제도화되거나 상품화된 ‘친절’은 결코 친절이 아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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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창비논평:  2008.9.17.]

http://weekly.changbi.com/trackback_post_294.aspx




[특집3] 공영방송 장악에 맞서온 한국언론운동의 힘 

최영묵 /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지난 5월 15일 뉴라이트전국연합의 감사원 특별감사 청구로 본격화된 이명박정권의 KBS 장악시도는 8월 11일 대통령의 정연주 사장 '불법' 해임으로 일단락되었다. 정사장 '퇴출작전'에는 감사원, 검찰 등 모든 핵심 권력기관이 동원되었고 18년 만에 경찰도 투입되었다. 정권은 신속하게 후임사장을 임명했다. 신바람 난 MB는 이후 두차례나 KBS를 방문했다. 한번은 방송의 날 기념식 때문이었고, 한번은 '대통령과의 대화 ― 질문 있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을 위해서였다.




KBS노조가 침묵하는 가운데 새로 출범한 'KBS 사원행동'이 MB정권의 방송장악 시도를 온몸으로 저지하고 있다. 시민은 아직도 촛불을 밝히고 있고, 방송장악저지범국민행동 등은 지속적으로 길거리 '여론전'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사원행동의 싸움은 '공권력' 앞에 힘에 부치고, 시민사회의 대응은 거대여당 국회의 '입법권' 앞에서 무력해질 가능성이 크다. 벌써 '땡전뉴스'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나온다. 2008년 9월 한국의 '국가대표' 공영방송 KBS는 다시 '권력 나팔수'가 될 것인지의 기로에 섰다.   




땡전뉴스와 시청료 거부운동




잠시 과거로 돌아가보자. 지난 1983년 8월 31일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 여객기 007편이 러시아 상공에서 사라져버렸는데, 소련 미사일에 의해 격추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사건으로 승객과 승무원 등 모두 269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그러나 당시 KBS 9시뉴스에서는 KAL기 실종사건을 머리기사로 다루지 않았다. 평상시처럼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하는 소위 '땡전뉴스'를 내보냈다. 내용은 서울 모처에서 조기청소를 하는 전두환 대통령의 동정이었다.




이렇듯 당시 KBS는 독재정권의 '애완견' 노릇으로 일관했다. 이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결국 'TV시청료 거부운동'으로 폭발했다. 산발적으로 시도되던 시청료 거부운동은 1985년 8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범국민행동으로 전개할 것을 결의하면서 점화되었다. 이듬해인 1986년 1월에는 'KBS시청료 거부 기독교범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된다. 이어 9월에는 '보도지침' 폭로사건을 계기로 국내 민주화운동단체를 총망라한 '시청료거부 및 자유언론 공동대책위원회'가 발족함으로써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 효과는 대단했다. 시청료 징수율이 1985년 76%에서 1986년 66%, 1987년 57%, 1988년 44%로 크게 하락했다. 전두환정권은 정당성에 큰 타격을 입었고 KBS는 심각한 재정난에 처하게 된다.




시청료 거부운동은 군사정권하에서 전국적으로 진행된 최초의 조직화된 시민운동, 시민언론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987년 이후 국내 방송민주화의 초석이 되었다. 시청료 거부운동은 언론민주화를 촉구하는 제한적 운동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에 저항하고 사회민주화를 지향하는 수단적 국민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그 이듬해 노태우 대통령의 '6·29선언'을 끌어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서기원과 서동구, 노태우와 노무현




어렵게 집권한 노태우 대통령은 5공과 다르다고 주장하기 위해 흥사단 이사장을 지낸 서영훈씨를 KBS사장에 임명했다. 하지만 서영훈 사장이 KBS개혁을 시도하자 정권은 이내 본색을 드러낸다. 노태우정권은 임명 1년여 만에 서영훈 사장을 강제 퇴진시키고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서기원씨를 후임사장에 임명했다. 그러자 결렬한 반대에 봉착했다. 과거와 달리 KBS에는 강력한 노조가 결성되어 있었다.




지난 1988년 5월 결성된 KBS노조는 2년 만인 1990년 그 유명한 36일간의 4월투쟁을 시작했다. 노조는 우선 낙하산사장 거부투쟁, 출근저지 투쟁을 벌인다. 여의치 않자 바로 전면적인 제작거부에 돌입했다. 그러나 노태우정권은 강경일변도였다. 경찰병력을 KBS 사내에 투입하여 사장 퇴진투쟁을 벌이던 노조위원장 등을 체포한다. 화톳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4월 26일 각계 인사로 구성된 'KBS 지키기 시민모임'이 결성되었다. 심지어 방송위원회 강원용 위원장까지 나서서 서기원 사장 퇴진을 촉구한다.




이에 대해 권력은 경찰 재투입, 상주로 맞대응했다. 이후 서기원 사장 퇴진요구는 민가협 등 시민단체와 야당, 다른 언론사로 들불처럼 번졌다. 특히 MBC노조와 CBS노조는 KBS사태에 항의하기 위해 동맹 제작거부운동을 벌였다. 1990년 4월투쟁은 결국 KBS 직원 수백명이 연행되고 14명이 구속되면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이후 노동조합과 시민사회가 함께하는 방송민주화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노무현정부 초기에도 KBS사장에 관한 논의가 활발했다. "KBS사장이 총리보다 중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언론특보였던 서동구씨를 KBS사장으로 임명했다. 무리수였다. KBS노조와 시민사회가 적극 반대에 나섰다. 서사장은 조선일보의 '밀담폭로'로 취임 9일 만에 사퇴했다. 정연주 사장은 서사장 후임이었다. 서사장 임명 전에 이미 민언련, 언개련, 여성민우회 등 시민단체와 KBS노조 등으로 구성된 'KBS사장 추천위원회'에서는 정연주 사장을 포함한 3인을 KBS사장 후보로 이사회에 추천한 바 있었다. 낙하산 투입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KBS의 ‘영구시민화’를 위하여




지난 5월 이후 정연주 사장에 대한 MB정권의 퇴진압박이 극에 달할 무렵, 어느날부터 촛불시민이 KBS본관 앞에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KBS는 1980년대의 땡전뉴스와 시청료 거부운동으로 치명상을 입었고, 이후에도 권력과 유착함으로써 시민의 '자폭요구'와 돌팔매질에 시달린 적은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민이 KBS를 지키겠다고 나섰다. 조중동과 한나라당에서 편파방송 운운하고 있지만, 2000년 이후 KBS는 국내 언론사 중 영향력 1위, 신뢰도 1위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그 구체적 반증이다. 'KBS 사원행동'이 방송장악 저지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배후의 촛불과 시민에 힘입은 것이다.




이후에도 MB정권의 공영방송 통제와 장악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KBS를 영구중립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핵심을 잘못 짚은 거다. 방송의 중립성은 중요하지만 사회적 합의가 불가능한 '정치적' 구호일 뿐이다. 역설적으로 KBS는 '영구시민화'해야 한다. 늘 시청자의 편에서 시민의 필요와 권익을 대변하는 방송이면 된다. KBS가 시청자의 방송이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민이 나서야 한다. 그 첫걸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MB정권과 힘겹게 싸우고 있는 'KBS 사원행동'과 외곽의 '범국민행동'을 적극 지지, 지원하는 일이다.




2008.9.17 ⓒ 최영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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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아래 글을 읽어보십시오.


캠릿브지 대학의 연결구과에 따르면, 한 단어 안에서 글자가 어떤 순서로 배되열어 있는가 하것는은 중하요지 않고, 첫째번와 마지막 글자가 올바른 위치에 있것는이 중하요다고 한다. 나머지 글들자은 완전히 엉진망창의 순서로 되어 있지을라도 당신은 아무 문없제이 이것을 읽을 수 있다. 왜하냐면 인간의 두뇌는 모든 글자를 하나 하나 읽것는이 아니라 단어 하나를 전체로 인하식기 때이문다.


다 읽으셨죠?
뭐 이상한 거 없던가요?

이번에는 천천히,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읽어보십시오.

캠릿브지 대학의 연결구과에 따르면, 한 단어 안에서 글자가 어떤 순서로 배되열어 있는가 하것는은 중하요지 않고, 첫째번와 마지막 글자가 올바른 위치에 있것는이 중하요다고 한다.
나머지 글들자은 완전히 엉진망창의 순서로 되어 있지을라도 당신은 아무 문없제이 이것을 읽을 수 있다.
왜하냐면 인간의 두뇌는 모든 글자를 하나 하나 읽것는이 아니라 단어 하나를 전체로 인하식기 때이문다.

뭐가 이상한지 아셨나요?
'캠브리지'가 맞는데 '캠릿브지'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연구결과'가 맞는데 '연결구과'라고 쓰여 있었고,
'배열되어'가 맞는데 '배되열어'라고 쓰여 있었고,
'하는것은'이 맞는데 '하것는은'이라고 쓰여 있었고,
'중요하지'가 맞는데 '중하요지'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재밌지 않나요?
우리말편지도 이렇게 편하게 읽어주십시오. ^^*

고맙습니다.

우리말편지를 보내는 성제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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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8-30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blog.aladdin.co.kr/silkroad/1050820 요기 보시면 영어 원본도 있삽니다. ^^

해콩 2008-09-02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 요것 참 재미나요. 처음 한 줄은 정말 아무 이상 없는 줄 알았지뭐예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