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누리꾼(서재지기)들이 일 주일 넘게 고민해서 만들어낸 결실입니다. 헤드와 본문, 명의까지 다 해서 일곱 줄밖에 안 되지만, 이 일곱 줄을 위해서 우리는 10번도 넘게 문안을 버리고 100번도 넘게 다투고 10000번도 넘게 뜯어보아야 했습니다.
ⓒ 파피루스
의견광고

'알라딘'이라는 인터넷 서점에서 서재질(블로그질)을 하면서 가끔 리뷰를 쓰고 이웃 서재지기(블로거)와 인사도 나누고 했는데, 사회 현안에 민감한 분들이 많아서 서재질을 하면 신문을 보는 듯한 효과가 있습니다. 가장 최신의 신문기사를 올리시는 분들도 있고, 어디서 발견했는지 동영상을 오려다가 올려주시는 분들도 있어요.

 

이번 광우병 쇠고기 국면에서 '82쿡'이나 '소울드레서', 'MLBpark' 같이 얼핏 보면 사회 현안과 무관해 보이는 온라인 동호회가 주도적으로 여론을 형성하는 것을 보면서 저희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팽배(?)했습니다.

 

그 결과 63명 알라딘 소액 광고주의 의견 광고가 오늘자(6월 19일) <경향신문>에 실리게 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수도 없이 토론을 했습니다. 머리를 쥐어짜 문안을 작성하고, 작성한 문안을 여러개 버리고, 그렇게 고친 문안을 1000번도 더 보고, 세세한 문구를 놓고 이웃들과 또 토론을 했습니다. 재정을 맡은 분은 업무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고 합니다.

 

의견광고에 담은 작은 소망

 







  
제 블로그 댓글을 메일에 연결해 놓았더니 엄청나게 많은 의견이 넘쳐났습니다. 이 사진이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줍니다. 특히 문안 교정할 때, 마감이 다가올 때, 알라디너들은 극도로 긴장한 채 제 서재에 다녀갔습니다. 재정을 맡은 친구는 업무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였고, 저도 회사에서 핀잔 좀 들었습니다. 그러나 힘들게 만들어낸 의견광고라 더 보람이 있었습니다.
ⓒ 오승주
의견광고

6월 보름간(6/2~6/14일) <경향신문>에 실린 의견 광고를 하나하나 헤아려 보았습니다. 총 24면(전면광고 1건) 하단 광고에 독자들의 의견이 쇄도했는데 이 중 단독으로 하단광고를 게재한 단체는 14개였습니다. 마이클럽(miclub)은 두 번이나 의견광고에 참여하거나 단독으로 광고를 게재하였습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많은 분들이 <경향신문>이나 <한겨레>가 의견광고로 돈을 많이 버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의견광고가 아무리 쇄도한다고 해도 비상시적인 수익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문사의 재무를 탄탄히 해주는 광고는 대기업의 광고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기업은 오히려 경향과 한겨레에 광고를 싣지 않고 있습니다. 조중동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죠.

미디어평론가 백병규씨는 <오마이뉴스>에 올린 칼럼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하지만,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야말로 사실은 조·중·동 때문에 큰 피해를 입고 있다. 누리꾼들의 조·중·동 광고주 불매 운동 때문에 조·중·동에 광고를 싣지 않고 있는 기업들이 덩달아 <경향신문>과 <한겨레>에도 광고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기업들이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에 광고를 하더라도 누리꾼들의 반발을 살 염려는 없다. 하지만 주요 대기업들의 광고가 뚝 끊기자 촉각을 곤두세우고 광고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조·중·동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딱한 처지기 때문이다."

 

<경향>에 의견광고를 싣는 첫번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의견광고가 매출에 큰 도움은 못 되겠지만, 정론매체의 독자로서 줄기차게 의견광고를 보내 기자들을 격려하고자 함입니다.

 

두번째는 촛불의 2막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촛불국면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지만, 누구도 시원스러운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리의 촛불이 꺼지는 일은 없겠지만, '직접행동'은 '다양한 행동'으로 분출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 첫 십년의 한국(철수와영희)>이라는 책에서 손호철 교수가 말한 TATA가 한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처의 별명이 뭔지 아십니까? 영어로 마담 TINA입니다. 'There is no alternative.' 즉, 대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신자유주의정책에 대해 비판을 하면 대안이 없다고 대답하기 때문에 생긴 별명입니다. 하지만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TATA입니다. TATA는 'There are thousands of alternatives'의 약자인데 수천 개의 대안이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것은 작은 대안들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 대안들이 합쳐져서 큰 대안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73쪽)

 

촛불의 제2막은 '문화'로 풀어야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책이라는 매개로 나름대로의 대안을 강구하려는 것입니다. 이번 의견광고가 끝이 아니라 다른 독자들과 독자 커뮤니티와 연계해서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싶습니다. 제가 볼 때 촛불의 제2막은 '문화'로 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론과 정치는 모두 기득권이 잠식해 버렸지만, '문화'만큼은 그들이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광우병과 대운하 같은 문제를 신문보다 책을 통해 먼저 알게 됩니다. 각 분야별로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하여 나눌 수도 있고, 신문에 추천된 책을 광고로 실어보낼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처세/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를 싹쓸이하는 세태가 현재의 물신풍조를 더욱 키웠다고 생각하니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굳이 '책'이라는 깃발 아래 뭉친 이유입니다.

 

촛불행렬과 함께 거리를 헤매면서 가장 반가웠던 순간은 '작가회의' 소속 젊은 작가들이 부지런히 다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이 이 사회를 아름다운 시와 이야기로 풀어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촛불이 거리에서 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 그리고 각자의 생활에서 형형색색으로 빛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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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8-06-21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어쩜.. 말도 잘하시지~ ^^

마늘빵 2008-06-22 00:39   좋아요 0 | URL
에헷 깜짝이야. 감사합니다. 해콩님 닉넴은 2차에 반드시!
 

광우병과 글로벌자유시장


                                                    임 성 진(전주대 사회과학부 교수)

2008년 5월과 6월은 이 땅에 또다시 민주화의 진정한 의미와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10대들에 의해 불붙여진 쇠고기졸속협상반대 촛불집회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 연령층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사상 초유의 시민불복종운동으로 발전했다. 새로운 형태의 자발적 참여민주주의에 세계인들도 놀라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국민의 80%이상이 반대하고 연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구호를 외치는데도 정부는 장관고시를 강행하며 지금껏 일방적인 대응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마치 건설회사가 철거민을 몰아내고 고층아파트를 지으며 쌓았던 노하우를 진압경찰을 동원해 이번엔 국민들에게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듯하다.

한미쇠고기협상 타결 후 정부는 줄곧 수입될 미국산쇠고기가 광우병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말만 되풀이해 왔다. 그러나 이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알아차리는 데는 광우병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으로도 충분하다. 올바른 정보를 쉽게 습득할 수 있는 발달된 정보통신망 덕에 국민들은 정부의 수습책만으로는 광우병의 위험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광우병은 현행 축산시스템의 구조적 문제

광우병의 진정한 위험성은 식용 쇠고기부위로부터 광우병위험물질이 제대로 제거되어 있느냐 있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축산업 시스템의 구조자체에 있다. 싼 가격에 더 많은 육류를 공급하기위해 공장형 축산이 도입되고 여기에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인위적 사육이 이루어진다. 마구잡이식으로 성장호르몬이 투여되는가 하면, 더 살찐 고기를 얻기 위해 동물성 사료까지 동원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에서는 가축부산물을 이용하는 랜더링(rendering)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도축장에서 버려지는 각종 소의 부산물은 통속에 모아져 분쇄된 다음 섭씨 135도에서 끓여진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면 여기서 지방이 떠오르는데, 이것은 화장품 등의 원료로 사용된다.

기름으로 쓰고 남은 부분은 다시 건조하여 가루로 만든 다음 공장형축사에서 키우는 가축들의 사료에 섞는다. 싸고 동물성단백질이 풍부한 이 육골분을 초식동물인 소가 먹게 됨으로서 소는 졸지에 자신의 종족을 먹는 식우(牛)종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광우병의 비극은 시작된다.

그런데 부산물이 모이는 그 통속에는 도축된 소의 부산물뿐만 아니라 음식점에서 쓰고 남은 기름, 팔다 남아 유통기간이 지난 고기, 그리고 안락사하거나 차에 깔려 죽은 동물사체도 들어간다. 그 외에도 닭사육장 바닥에 모인 배설물과 깃털까지도 재료로 사용된다. 이러다 보니 부산물에 들어있는 각종 균과 호르몬, 항생제, 살충제 성분도 사료를 통해 가축과 사람에게까지 전달된다.


축산시스템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시장시스템

이처럼 광우병 재앙의 원인이 명확한데도 위험한 생산은 계속되고 판매시장도 세계로 확대되어가는 위험천만한 일이 발생하고 있다. 그것은 축산시스템보다도 더 본질적인 지구촌 시장시스템에 원인이 있다. 쇠고기졸속협상의 배후에도 실제로는 한미FTA라는 시장자유주의 시스템이 놓여있다.

전지구적 차원에서 급격하게 확대되고 있는 자유무역은 자연에 대한 과도한 착취와 급증하는 물질 이동을 수반한다. 이러한 글로벌자유무역의 중심에는 국가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국적기업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들 기업의 판매량은 무려 세계무역의 2/3를 차지하며 단지 500개의 초국적기업이 세계무역의 70%를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부가 국가들의 부를 합한 것보다도 크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는 기업의 이해관계가 국제관계에서 우선적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다.

기업의 관점에서 볼 때는 환경과 시민의 건강, 자원의 지속가능한 이용 등을 보장하기 위한 법과 민주주의는 자유무역의 규정에 따라 제거되어야 마땅한 장애요소로 여겨질 뿐이다. 실례로 WTO가 생산방식을 기초로 한 수입의 차별화를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GMO와 비GMO 농산물, 아동노동과 정상적 노동의 생산물, 그리고 동물학대나 호르몬투여를 통해 생산된 육류와 정상적인 성장을 통한 축산물을 무역거래 시에 서로 다르게 취급하기 어렵다.


초국적기업이 지배하는 글로벌 자유시장의 맹신은 위험

1989년 EU는 축사에서 성장호르몬을 투여한 소의 역내시장유통을 금지시키면서 동시에 호르몬으로 범벅이 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국민의 건강권보호를 근거로 금지했었다. 그러자 미국은 WTO에 제소를 했고 시장자유주의의 수호자인 WTO는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EU의 거부와 잇따른 미국의 제소가 이어지면서 유럽과 미국 간의 쇠고기분쟁은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다.

EU의 사례는 격화되는 글로벌자유시장체제에 깊이 관여하면 할수록 보장해야할 기본권보호와 장기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신중한 준비가 필요함을 잘 보여준다. 이명박정부는 민영화와 규제완화를 통한 자유시장체제의 극대화만이 경제를 살리는 길인 양 이를 밀고 나가고 있다. 그러나 시장에의 맹목적인 과신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우리는 지난 외환위기를 통해서 충분히 경험한 바 있다. 이번 쇠고기문제를 계기로 질적인 경쟁력확보가 자유시장과 세계화에 대한 올바른 대응책임을 인지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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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최 촛불을 끌 수가 없다

오늘의 촛불 집회가 6월항쟁·여중생 추모제·탄핵 반대와 다른 점… 대의민주주의적 장치를 통해 수습할 길 없어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역사학

[표지이야기 1부-타오르는 촛불]
예측불허의 한국 현대사가 또 한 번 예측할 수 없는 국면을 맞고 있다. 촛불이 다 타버리도록 어둠이 물러가지 않을지, 아니면 날이 밝아올지, 그 전에 환한 전기불이 들어와 촛불을 켤 필요가 없어질지 지금으로서는 속단할 수 없다. 다만 한동안 촛불이 꺼지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촛불시위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아, 어둠이 가시기 전에 촛불이 밝음을 잃는 순간이 하나 또 있다. 집회 현장에서 자주 듣는 것처럼 사람들이 횃불을 드는 경우다.



△ 1987년 6월항쟁 당시 거리의 모습(맨 위)과 2008년 촛불집회. 지금은 대의민주주의의 실패로 벌어진 사태를 대의민주주의적 장치를 통해 수습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1987년부터 2008년까지

촛불문화제를 17번 하도록 국민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던 정부는 시민들이 광장을 벗어나 거리로 나서자- 첫날은 청계광장에서 한 50m쯤 벗어나 종로1가로 온 게 전부다- 불법 거리시위를 한다고 난리법석을 쳤다. 그런데 원래 시위는 거리에서 하는 거다. 오랜 기간 군사독재를 겪는 동안, 반대라고는 꼴을 보지 못하는 권위주의적 작자들이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고, 그 하수인들이 ‘심기’마저 경호해야 한다는 희한한 논리로 반대세력이 한 뼘 거리에 나서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히 교내 시위라는 말이 익숙해졌다. 교내 시위가 1960년대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거리로 나가기 위해 교정을 몇 바퀴 돌며 사람을 모으는, 말하자면 본게임에 앞서 워밍업을 하는 것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 때는 거리에 나가면 군부가 나설 수 있는 빌미를 준다고 해서 여러 날 거리에 나가네 마네 논쟁을 했다. 우리 역사에 위화도 회군 이래 최대의-그러나 최악의- 회군이었다는 비판을 듣는 서울역 회군도 이 연장선에서 나왔다. 80년대는 거리 데모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반 시민들은 참여할 수 없는 구조였다. 재야단체나 각 대학 학생회, 학회 등을 통해 은밀히 ‘택’(영어 ‘tactic’을 줄인 은어로 그날 시위의 장소 및 이동경로 등에 대한 지침)을 받을 수 있는 사람 몇 명이 ‘만약 경찰에 붙잡히게 되면 어떻게 알고 나왔냐는 질문에는 이러이러하게 순진한 척 답하라’는 것까지 교육을 받은 뒤 거리 시위에 나왔다.
1987년 6월항쟁은 국민운동본부라는 지도부가 있었지만, 아무도 이 항쟁이 한 달 가까이 지속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그런 변화를 가져오기를 다 바라고는 있었지만, 이런 현실이 벌어질 것을 기대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과 비교한다면 6월항쟁도 처음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87년 1월14일 박종철군 추모집회 때 처음 모인 인원은 미선이·효순이 촛불추모제 때나 지금에 비한다면 몇십분의 일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문치사 은폐·축소 사실이 5월 하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의해 알려지면서 광범한 공분이 일고, 이 분노에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게 되는 사건이 더해져 6·10 국민대회로 이어지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학생과 시민 수백 명이 ‘그냥 헤어질 수 없다’면서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밤샘을 하면서 시위에 탄력이 붙었다. 특히 6월항쟁 때는 이전과는 달리 전국에서 동시에, 서울도 한 곳만이 아니라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라고 할 정도로 분산된 장소에서 동시다발 전술을 택한 것이 톡톡히 효과를 보았다.
90년대에는 1991년 이른바 분신 정국과 1996년 말~1997년 초에 걸친 노동법 개악 저지투쟁 당시에 사람들이 거리에 많이 나왔다. 91년 강경대가 죽고 김귀정이 죽고… 살벌한 강경 진압과 그에 따른 희생, 그리고 그 억울한 희생에 길동무가 돼준, 끝없이 이어지는 분신과 투신…. 그러나 그 봄은 정원식 총리에 대한 밀가루 투척이 ‘패륜’으로 몰리면서 서럽게 끝이 났다. 97년의 노동법 투쟁은 뜨거운 대중의 열기를 지도부가 잘 받아내지 못하면서 흐지부지 끝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환위기가 덮쳐왔다.
2002년 월드컵은 시민에게 광장을 되돌려주었다. 그 뜨거운 열기. 같이 하면 이렇게 즐겁고 신나는구나 하는 것을 시민들이 알아버렸다. 이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고, 그해 가을 미선이·효순이 두 중학생을 기리는 촛불추모제로 이어졌다. 이 추모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든 것이지만, 사실 월드컵 열기에 온 국민이 들떠 있는 동안부터 꾸준히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해온 대책위원회가 있어 집회를 주도했다. 이를테면 이들이 지도부 역할을 했다. 추모제 말미에 가끔 “미대사관으로 가자” 하는 구호가 나오고 실제로 그 앞에 가서 ‘으싸으싸’ 하면서 전경과 몸싸움을 하기도 했지만, 이는 대개 집회를 마무리하는 수순이기도 했다. 그냥 가기 아쉬운 사람들, 절대로 그냥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그래도 한번 소리도 지르고 몸도 풀었다고 생각하려면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사실 이런 집회는 준비도 홍보도 어렵지만 해산이 제일 어렵다고 하지 않나?
미선이·효순이 촛불추모제가 좀 비장하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면, 탄핵 반대 집회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탄핵을 자행한 수구세력을 심판할 날을 받아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회가 민의를 배신해서 거리에 나앉아 촛불을 들었지만, 총선이 한 달도 안 남았으니 초조할 일도 없었고, 구태여 거리시위를 할 이유도 없었다. 시위대 입장에서 이 당시는 경찰도 우리 편 같아 보였다.
2002년의 촛불추모제, 2004년의 탄핵 반대 촛불집회에 이어 2008년에 시민들이 다시 촛불을 들었다. 시민들이 촛불을 드는 때는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이다. 미선이·효순이가 불쌍하게 장갑차에 치여 죽었는데, 미군은 아무 잘못이 없단다. 한국 정부는 속수무책이고 국회도 손 놓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책임이 없다면 그때 거기를 지나간 미선이·효순이의 잘못이란 말인가? 정부가, 국회가 제 역할을 못할 때 시민들은 촛불을 들었다. 2004년의 탄핵 시도는 국회가 시민들에게 촛불을 나눠주고 불붙여준 것이다. 국회가 ‘탄핵질’을 안 했으면 시민들이 촛불 들 일도 없었다. 탄핵 때는 대의정치가 제대로 작동 못한 정도가 아니라 대차게 오작동을 한 경우다. 그래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고, 선거로 심판했다.

심해지는 현대사의 예측 불가능성

87년 6월항쟁은 당시 군사정권의 직선제 수용으로, 2002년의 촛불추모제는 바로 뒤의 대통령 선거에서 ‘반미 감정 좀 가지면 어때’라고 말하는 후보의 당선으로, 그리고 탄핵 정국의 촛불집회는 탄핵을 시도한 의회권력을 한 달 뒤의 총선에서 심판함으로써 마무리됐다. 요컨대 대의민주주의의 실패에 따른 직접민주주의의 한국적 방식으로 촛불이 타올랐지만, 그 촛불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와 같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작동 방식과 맞물리며 자연스럽게 꺼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대통령 선거를 치른 지 6개월, 국회의원 선거를 치른 지 한 달도 안 돼 촛불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요컨대 자연스럽게 촛불을 끌 수 있는 카드는 이미 써버린 것이다. 이미 촛불에서 문제의 핵심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넘어섰다. 한 달 동안 촛불집회를 하며 시민들이 그런 식의 쇠고기 수입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는데 정부는 꿈쩍도 안 했다. 대통령의 사과는 오히려 시민들의 염장을 질렀다. 시민들은 협상이 잘못됐다고 하는데, 대통령은 협상은 잘못 없고, 소통을 잘못한 것이 문제란다. 6월항쟁 때도 없었던 밤샘시위를 하면서, 그리고 “잡아갈 테면 기꺼이 타주마”라고 제 발로 닭장차에 오르면서까지 안 된다고 하는데도 정부는 막무가내로 장관 고시를 강행했다. 이쯤 되면 확실히 막가자는 거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가? 선거는 다 지나갔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 같은 장치도 없는데 시민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미국 축산업자의 이익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대통령이나 정부의 알량한 체면을 위해서인가? 국민의 뜻과 이익이 아닌 다른 것을 위해 복무하는 대통령과 정부를 그냥 두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2002년이나 2004년과는 달리 대의민주주의의 실패로 인해 벌어진 사태를 대의민주주의적 장치를 통해 수습할 길이 보이지 않는 오늘, 한국 현대사의 예측 불가능성은 더욱 심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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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번째 기회_제도장벽에 뿌리내리기(作)
    from 木筆 2008-06-07 13:30 
       1. 참* 자원활동 학생 두명과 5-6번의 만남을 마무리하다. 30시간을 채우는 것이었고, 이 학생들이 하는 것은 영상자료를 녹취하는 것이다. 지구온난화와 유전자 조작 등 관심의 영역밖에 있던 일들이다. 그들은 한번도 관심없었고, 녹취하고 함께 이야기하면서 여러 사실들이 자신의 삶과 이어져있음을 알고 많이 놀라한다. 이런 기회가 없더라면 한번도 관심없을지도 몰랐을 것이라한다. 세상과 현실이 이렇게 상반되는 방향으로
 
 
여울 2008-06-07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너무 뜸했나요. ㅎㅎ. 먼댓글 이어씁니다. ㅎㅎ
 

여성 가장은 투명인간일까



남성 노동자에게 가족임금을 보장하라는 주장, 여성 노동자는 ‘딸린 식구’ 취급하나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가족임금’이란 개념이 있다. 가족의 생계를 일차적으로 책임지는 노동자(빵을 벌어들이는 자)한테는 노동자 자신뿐 아니라 가족의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있는 정도의 임금(가족임금)이 주어져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다. 가족임금 논리를 적용받는 노동자는 대부분 남성들이다. ‘여성은 가정, 남성은 일터’라는 전통적인 성별 분업 논리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활동가들도 가끔 가족임금 쟁취를 내건다. ‘여성 가장’을 고려할 때 과연 가족임금의 신화는 유지돼야 할까?



△ 가족임금을 보장하라? ‘유기농 자활공동체’에서 4명의 여성 가장이 유기농 반찬을 만들고 있다. (사진/ 한겨레 박종식 기자)




가족의 빵을 책임지고 있는 여성 가장은 갈수록 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성 가구주는 2008년 329만3천 가구(총가구의 20.1%)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2005년 현재 ‘자녀를 둔’ 한어머니 가정은 108만3천 가구에 달했다. 그리고 가난은 여성에게 집중된다. 한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여성 가구주 가구 중에서 빈곤가구 비율은 21.0%, 전체 빈곤가구에서 여성 가구주 가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45.8%에 이른다. 이처럼 여성 빈곤가구가 많다는 사실은 가족임금 논리가 여성 취업자한테는 적용되지 않고 있음을 말해준다.
사실 가족임금 개념은 애초에 노동시장에서 여성을 배제할 목적으로 남성 노동자들이 요구한 것이다. 노동력 과잉에 따른 남성 저임금의 원인이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시장 진입에 있다고 판단한 것인데, 남성의 이익을 위한 노동조합과 자본 간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노동과 페미니즘>(조순경 엮음)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가족임금제는 남성에게 충분한 임금을 주는 근거로서가 아니라 저임금 여성 노동력 동원을 합리화해주는 명분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 남성들이 여성에 비해 상대적인 임금우위를 누리면서 남녀 임금차별에 둔감해지도록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우리나라 전체 여성의 평균임금 수준은 2006년 남성의 63.1%(남성 평균 월총액 279만원, 여성 178만3천원)에 불과하다. 특히 2006년에 월급여총액 150만원 이하를 받는 노동자는 여성의 경우 전체 여성 임금취업자의 51.9%(남성은 전체 남성 임금취업자의 21.7%)에 달했다.
자본은 항상 새로운 노동 공급 원천을 확보하려고 한다. 노동 수요보다 노동 공급이 풍부해야 임금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롭게 발견한 노동력의 저수지는 여성들이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증가는 여성들의 파워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기엔 여성들을 집 바깥으로 끌어내 일터로 보내려는 자본의 요구가 깔려 있다. 물론 예전에는 자본이 가족임금 타협을 통해 가족생계 임금을 지불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가족임금 논리를 앞세워 저임금 여성 노동력을 적극 활용한다. 남성 배우자가 이미 가족임금을 받고 있으므로, 여성은 생계부양자가 아니므로, 낮은 임금을 줘도 된다는 논리다. 여성한테는 복사나 커피심부름 역할을 맡긴다는 ‘사무실의 부인’(office wife) 관념 역시 어떤 의미에서 여성은 생계책임자가 아니고 ‘딸린 식구’에 불과하다는 논리를 고착화한다.
과연, 한창 자녀를 키워야 할 나이에 혼자 되어 임금근로에 나서는 여성은 얼마나 될까? 여성 ‘가장’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유추해볼 수는 있다. 여성 가구주 가운데 나이 40대가 19.6%이고, 여성의 평균 이혼 연령은 39.3살(2006년)이다. 배우자가 생존해 있으나 남편이 실직 상태 등에 있어서 부인이 혼자 벌고 있는 가구는 2005년에 40만8천 가구에 달했다. 2006년 현재 기혼 남성 실업자는 25만 명이다.
여성 가장의 일터가 대부분 저임금 비정규직이란 점은 전혀 놀랍지 않다. 40만8천 가구에 이르는 ‘부인 홑벌이 가구’ 중에서 단순노무·판매·서비스직 종사 가구는 23만3천 가구에 달한다. 혼자 벌고 있는 여성 가구주들이 저임금 직종에 종사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자본은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생산을 ‘외부화’하고, 이에 따라 소규모 납품·협력업체가 급증하고 있다. 저임금을 이윤의 원천으로 삼는 소규모 업체일수록 여성 노동력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2005년 현재 국내 100인 이하 사업장에 종사하는 여성 노동자는 276만 명(전체 여성 취업자는 359만 명)에 이른다.
물론 선배 여성 세대에 비해 요즘 여성 노동자들의 지위는 나아지고 있다. 그러나 “가족임금을 보장하라”는 슬로건은 여성 가장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여성 가장들이 궁핍에 빠져들고 있는 지금, 노동시장에서의 성별 임금평등 없이 빈곤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가난해도 어쨌든 그들도 그럭저럭 견디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라는 말만 계속 되풀이하고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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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채널e-무하마드알리편

 

 

1974년

자이르공화국의 수도 킨샤사,

24살의 복싱 헤비급 챔피언

조지 포면 VS 32살의 노장
복서.....

캐시어스 클레이

1960년 로마 올림픽 복싱 라이트헤비급 금메달리스트,

흑인이라는 이유로 식당에서 쫓겨난 금메달리스트는

그 길로 금메달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한 영광은 아무 쓸모가 없다."

1964년 WBC 헤비급 챔피언은 백인 주인의 성과 노예의 이름을 버렸다.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이름,

스스로 선택한 삶,

일 위에서보다

링 밖에서 더 많이 얻어맞았던

그의 새로운 이름

무하마드 알리

1967년 배트남전 징집명령 거부,

3년간 출전 금지,

챔피언 타이틀 박탈,

권투선수 자격 박탈,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은 우리를 검둥이라고 욕하지 않았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


링 밖에서 빼앗긴 챔피언 벨트를 되찾기 위해

32살의 나이에 다시 링 위에 오른 무하마드 알리.

젊은 챔피언 조지 포먼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주먹을 겨눈

무하마드 알리.

"나는 챔피언이다. 나는 이긴다."

8회까지 고전하던 무하마드 알리는

순식간에 조지 포먼을 KO시켰다.

"챔피언은 체육관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소망, 꿈 그리고 이상이 진짜 챔피언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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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빠 2008-06-09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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