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소타 주 덜루스에서 로버트 짐머만Robert Zimmerma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밥 딜런Bob Dylan은 라디오를 듣고 기타와 피아노를 배우며 성장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리틀 리처드의 음악을 알고나서부터 여러 록밴드에서 활동했다. 내성적이던 로버트는 11학년 학예회에서 피아노 옆에 서서 절규하듯 노래를 불러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했으며 당시 학교의 교장은 노래가 채 끝나기 전에 커튼을 내려 공연을 중단시켰다. 그의 영어교사의 말에 따르면, 그 다음날 등교한 그는 평소처럼 조용했지만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고 한다.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당시 유행했던 비트족 열풍에 빠져들었고 자신의 우상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의 블루스와 포크가 결합된 음악에 심취했다. 그는 이름을 딜런으로 바꾸고 포크 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961년 학교를 그만둔 딜런은 당시 투병 중이던 우디 거스리의 병상을 지키기 위해 미네소타를 떠났고 얼마 후 맨해튼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블루스/포크 커버곡과 새로 작곡한 곡을 연주하여 순식간에 그리니치 빌리지의 극성팬들에게 인기를 독차지했다. 아직 젊은 나이에 그는 이미 포크와 블루스의 대가다운 면모를 보여주며 데뷔앨범 "밥 딜런" (1962)에서 음악적 소양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그가 알려지게 된 것은 두번째 앨범 "프리윌링 밥 딜런The Freewheelin' Bob Dylan"(1963)을 통해서였다. 이 앨범은 "블로잉 인더 윈드Blowin in the wind"와 어 하드 레인즈 거너 폴A Hard Rain's a gonna fall"같은 송가를 통해 밥 딜런이 저항세대에 끼친 짧지만 엄청난 영향의 시작을 의미했다. 이는 고전적인 곡 "더 타임스 데이 아 어 체인징 The Times They Are-A Changin”(1964)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딜런은 반정부주의, 시민권리를 주장하는 운동, 마약 그리고 문화적 불만으로 점철된 갈등의 시대를 산 동시대의 젊은이들을 위해 일종의 정치적 표어를 곡으로 썼다. 그 후 이삼 년 동안 그는 포크음악에 변화를 몰고 왔다.



^밥 딜런                           ^프리윌링 밥 딜런

 <더 타임즈 데이 아 어 체인징

 

 

 

그의 다음 앨범, “어나더 사이드 오브 밥 딜런 Another Side Of Bob Dylan”(1964)은 그의 팬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는 사회적인 이슈들을 버리고, 여자에 대한 큰 쓰라림에 대한 감정들을 표현한 개인적인 노래들을 불렀다. 이것은 팬들이 배반이라고 생각한, 그의 여러 전환들 중 첫 번째 였다. 개인적인 노래들을 위해 항의하는 노래들을 버린 후 그는 락을 위해 포크송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락을 버렸고 다시 태어난 기독교를 위해 유대교를 버렸다.



^어나더 사이드 오브 밥 딜런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적 음악을 넘어섰으며, 상징주의 시인들의 시구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 또한 그는 로렌스 펄링게티와 앨런 긴즈버그 같은 비트족 시인들이 쓴 재즈적으로 변용된 시들과 공연 중간에 신들린 즉흥 연주를 보여준 기타리스트 척 베리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65년에 이해에 그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전자 악기로 돌아섰다;-브링잉 잇 올 백 홈Bring it All Back Home’이라는 획기적인 앨범을 발표했다. 그에게 실망한 포크 순수주의자들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서브터레이니언 홈시크 블루스Subterranean Homesick Blues’같은 노래는 전작들처럼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영화 제작자 D.A.펜베이커는 무대 위와 무대 밖에서 딜런의 모습을 촬영하여 <돈 룩 백Don’t Look Back(1965)>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오프닝 장면에서 딜런은 서브터레이니언 홈시크 블루스의 가사가 적힌 여러 장의 큐 카드를 카메라 앞에서 떨어뜨렸고, 앨런 긴즈버그는 뒤에서 아무 말 없이 어슬렁거렸다. 이 다큐멘터리는 시네마 베리떼의 특징을 알림과 동시에 뮤직 비디오의 시대를 예고했다.



^브링잉 잇 얼 백 홈                  ^"돈 룩 백"의 오프닝 씬

 

 

 

 

그 후 2년 동안 그는 두 개의 앨범 하이웨이 61 리비지티드Highway 61 Revisited”(1965)블론드 온 블론드Blonde on Blonde”(1966)를 더 발표했다. 두 앨범 모두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추구하는 그의 의도를 확인시켜주었으며, 최고의 팝 뮤직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미스터 탬버린 맨Mr. Tambourine Man”, “라이크 어 롤링스톤 Like A Rolling Stone” 그리고 저스트 라이크 어 우먼Just Like A Woman”같은 곡들은 딜런이 얼마나 다양한 음악을 추구하는 지 입증했다. ‘라이크 어 롤링스톤은 이 시기의 가장 성공적인 불후의 명곡으로, 60년대 젊은이들의 좌절감을 열렬히 표현하였고 그들의 진심 어린 저항심의 목소리가 되었다. 이것은 세대의 대변자로서의 밥 딜런의 역할의 가장 높은 지점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 노래는 2004년 가을, 롤링스톤지의 역대최고의 노래 1위를 차지했다. 1965년과 1966년에 두 번에 걸친 세계 순회공연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팬이 되었다.



^하이웨이 61 리비지티드          ^블론드 온 블론드(감독님이 가장 좋아한다는 앨범)

 

 

 

 

1966년 밥 딜런은 오토바이 사고로 목을 다쳤다. 이 사고는 그의 생애의 터닝 포인트였다. 이 사고 후 밥 딜런은 우드스탁의 그의 집으로 사라져서 은둔생활을 하며 그의 아내 사라와 함께 가족을 부양하는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 이후의 노래들은 밥 딜런의 송라이팅이 변형을 겪었으며 간결하고 더 직설적으로 변했음을 보여준다. 사고 이후의 첫 번째 앨범 <존 웨슬리 하딩”John Wesley Harding(1968)”은 소란한 락을 버리고 조용하며 더 개인적인 노래들로 채워졌다. “얼 어롱 더 워치타워All Along The Watchtower”(지미 핸드릭스의 리메이크로 유명)’ 진실과 진지함에 대한 새로운 헌신을 표현하였다. 영화 음악 팻 가렛 앤 빌리 더 키드Pat Garrett and Billy the Kid(1973)”‘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은 밥 딜런에게 최초로 미국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하게 했다. “블러드 온 더 트랙스Blood on the Tracks(1975)”는 오랫동안 컴백을 기다리게 한 그의 첫 번째 차트 1위의 앨범이 되었고 뒤이어 두번째 앨범 디자이어Desire(1976)”이 나왔다. 다시 한번 그는 정열적으로 열중하여 음악을 하였다.



^존 웨슬리 하딩                    ^팻 가렛 & 빌리 더 키드

 

^블러드 온 더 트랙스             ^디자이어

 

 

 

 

1970년대 말에 딜런은 기독교적 성향이 아주 강한 일련의 세 음반 중 첫 음반인 슬로우 트레인 커밍Slow Train Coming”(1979)를 발표했다. 1980년대 초반에 딜런은 유대교에 새로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뒤 실망스러운 앨범들을 발표했으며-그러나 인피델스 Infidels”(1983), 메르시Oh, Mercy”(1989)는 예외였다-엉뚱한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점점 늘었다. 그러나 이른바 네버 엔딩 투어라고 부르는 전국 순회공연을 위해 계속 옮겨다녀야했던 딜런에게는 이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순회공연에서 톰 페티 앤 더 하트브레이커즈나 그레이트풀 데드 등과 공동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슬로우 트레인 커밍



^인피델                              ^오 메르시

 

 

 

 

80년대 그는 여기저기 많은 곳에서 투어를 했고, 90년대에는 그의 노래들이 새로운 청중을 찾았으며 음악계에서 더 많은 갈채를 받았다. 1991년 그는 그래미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았으며 그의 1997년 앨범 타임 아웃 오브 마인드Time Out Of Mind”는 그래미에서 세 개의 상을 받았고, 그리고 2001년 영화 <원더 보이즈Wonder Boys>(2000)에 삽입된 음악 모든 건 변했어Things Have Changed’로 밥 딜런은 오스카상을 받았다. 2006 65세의 나이에 발표한 그의 모던 타임즈앨범은 다시 한 번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사랑 받았다.

 

^타임 아웃 오브 마인드              ^모던 타임즈

 

 

 

 


"모던 타임즈"의 수록곡 "웬 더 딜 고우즈 다운When The Deal Goes Down"의 뮤직 비디오엔 스칼렛 요한슨이 출연해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http://www.sonybmg.com/musicbox/video/bobdylan/ 에 방문하셔서 위에서 세번째 When The Deal Goes Down을 선택하시면 뮤직 비디오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아임 낫 데어>에 이 영상과 흡사한 장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뮤직 비디오의 한 장면

 

 

 

 

참고문헌: <아임 낫 데어> 공식 프레스북, <아이콘> (바버라 캐디 지음 인희 옮김 거름.)


[출처] 밥 딜런의 역사|작성자 밥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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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8-07-30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콩님 잘 지내시죠?^^
어제 '아임 낫 데어'를 봤어요. 참 좋더군요. '아이콘'을 사서 읽어볼까봐요.
밥 딜런의 시적인 노랫말이 좋아요. 자료가 반가워 들어왔는데 사진들이 모두 액박으로만
보여요. 님 ^^

해콩 2008-07-30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붙여넣기 할땐 분명 사진 보였는데 이게 왠일? ㅜㅜ 제겐 이 영화가 너무 어려워서 밥 딜런에 대한 공부를 좀 하고 싶었어요. ^^; 사진은.. 어디 가서 찾죠? ㅠㅠ
 


"미친 소 근본적 해법 생명존중서 출발해야"
청소년인문잡지 '인디고잉' 광우병 생태학적 접근 '눈길'



'청소년들이 직접 만드는 인문교양 잡지'로 잘 알려진 '인디고잉'(INDIGO+ing)이 최신호인 7·8월호에서 한국 사회 초미의 관심사인 광우병과 대운하 문제를 중요하게 다뤘다.


 
 
광우병에 대한 경각심을 강하게 제기하고 이와 관련된 촛불집회를 초기에 주도했던 층이 청소년들이었다는 점에서 이들 청소년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잡지라는 정제된 형태로 차분하게 내놓았다는 점이 먼저 눈길을 끈다. 또 '인디고잉'이 어떤 잡진가? 전국 유일의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전문 서점으로 부산에서 활동 중인 인디고서원(www.indigoground.net)이 발행하는 귀한 잡지다. 최근 한국을 들끓게 하고 있는 촛불과 쇠고기 정국에 대해 지역 청소년들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는 기회를 이번 기획은 마련해 주었다.

'광우병 문제가 발생하면서 생명의 위기를 느낀 사람들의 시위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저 역시 현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고, 또 그런 촛불 문화제를 느껴보기 위해 거리로 나가 촛불을 들었습니다. 소중한 시간에 이렇게 나와서 촛불 문화제를 펼치는 시민들을 보며, 우리들의 민주정신을 훌륭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시위는 온전한 생명의 존재로서 소와 따뜻한 정을 나누던 인간적인 삶의 회복을 위한 외침이 아닌, 우리만 안전한 먹거리를 먹으면 된다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시위였기 때문입니다.…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참다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생태적 상상력입니다. 어느새 삶과 생명에 대한 존중이라는 가장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가치를 상실한 채 펼쳐지고 있는 구호나 저항들은 마치 오염된 바다를 인식하지 못한 채 그 바다 위에 일시적으로 일렁이는 파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디고잉' 이번 호에 '생태적 상상력과 광우병'이라는 토론 주제를 제기하면서 김지현(19) 유진재(19) 군이 쓴 글의 일부다. 촛불시위라는 '현상'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본질'을 포착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인문적 성찰이 날카롭다.


 
  사진 = 연합뉴스
 
''내 인생 좀 펼쳐보려고 하니 광우병 걸렸네' 등 내가 죽고, 내 이웃이 죽고 우리 국민이 죽는 문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금 더 나아간다 해도 친미 정부, 자국민을 생각하지 않는 정부를 탓하는 지점에서 끊긴다. 대한민국 안에만 들어오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들이다. 그러나 지구 위 어딘가에서 미친 소와 병든 닭, 그리고 오리는 여전히 아프다. 이런 병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누가 어떻게 끊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청소년은 집회현장에는 거의 없었다.' 정재윤 군은 자신의 글에서 현실을 이렇게 비판한다. 이렇게 되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만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이나경 양은 '환경은 생물에게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자연조건이나 사회적 상황을, 생태는 생물이 살아가는 모양이나 상태를 뜻한다'며 인간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방식으로 흐르기 쉬운 환경이라는 개념보다 평등하고 생명을 감싸안을 수 있는 생태로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인디고잉'의 청소년 필자들은 이번 호 '세계와 소통하다' '더불어 실천하다' 등의 기획면에서 이 같은 흐름의 토론을 이어간다. 세상을 주도하는 어른들이 길거리에서 '눈앞의' 문제들과 싸우느라 바쁠 때 청소년들이 진지한 토론과 독서로 '이 현상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 뒤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고 있는 광경이 이채롭다. '인디고잉' 편집진은 청소년의 목소리로 이 기획을 채운 것은 아니다. 석학 철학자 박이문(포항공대·시몬스대 명예교수) 선생의 '문명의 악몽과 인간의 선택', 김규항('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씨의 '우리 안의 대운하', 현병호(교육잡지 '민들레' 발행인) 씨의 '촛불이 밝혀주는 것' 등 생각 깊은 어른들의 글도 함께 실어 소통을 지향했다.

조봉권 기자 bgjoe@kookje.co.kr

  입력: 2008.07.08 20:37 / 수정: 2008.07.09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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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이제 저항을 넘어 창조로!
  [촛불의 소리] '적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촛불을…
 
 
2008-07-08 오후 6:59:16

 

 
 
 
   

 
 

  우리집에서 촛불을 밝혔습니다. 7월 5일. 제가 두 번째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순간입니다. 서울과 원주에서 우리 집에 감자 캐 주러 온 네 분의 일꾼들과 함께 어머니까지 참석하여 촛불집회를 한 것입니다.
  
  6월 10일. 광화문 거리를 새벽까지 샅샅이 훑고 다닌 것이 첫번째 참석이었습니다. 두번째가 바로 7월 5일 우리집에서입니다. '참석'이라기보다 '개최'가 되겠습니다.
  
  두 달을 넘기고 있는 촛불집회에 대한 많은 분석과 칭송이 있습니다.
  
  새로운 시위문화의 탄생이라고만 할 수 없는 어떤 변혁의 단초가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가슴 벅찬 순간들은 매일매일 연출되고 있습니다.
  
  촛불을 찬양하건 비난하건 똑 같은 점이 하나 있습니다.
  
  평소의 자기 생각과 주장에 촛불현상을 꿰어 맞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 김지하 선생의 글도 그렇습니다. 늘 후천개벽의 징후만 좇고 있는 분입니다. 월드컵 이후 저는 김지하 선생님을 두 번 만나 강의를 들었습니다. 같은 얘기입니다.
  
  보수 세력들의 좌익빨갱이 재방송과 다르지 않습니다. 촛불현상에서 자기 주장의 근거만 확대해서 본다는 점에서는.
  
  어느 교수는 자신이 번역하고 저술한 <제국기계>와 <다중> 이론이 실현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집단지성과 다중지성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진보학자나 사회운동가는 프랑스의 6.8 혁명을 빗대고 제2의 6.10항쟁을 거론합니다.
  
  저는 지금의 촛불을 믿지 않습니다.
  
  '웹2.0 의 소통방식'이나 '네트워크로 엮인 독립개체의 등장', '거리 권력의 탄생'에도 저는 열광하지 않습니다. 열광하기에는 이제 겨우 시작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탄생되던 2002년.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세력교체'라 하면서 열광을 했던 논객들이 여전히 지금의 촛불현상의 분석과 이론화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당시에 선거참관인으로 제한된 공간 안에 있어서 뉴스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다가 당선소식을 들었습니다. 다음날 '인간 노무현'은 믿지만 '대통령 노무현'은 믿지 않는다고 글을 썼던 적이 있습니다.(졸저 '아궁이 불에 감자를 구워먹다'에 실려 있음)
  
  지금의 촛불을 믿지 않는 이유는 제가 집에서 촛불을 밝힌 것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한 사회의 진정한 변화는 종국에는 자기자신의 근원적인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고 보는 때문입니다. 권력의 변화가 아니라 권력의 해체가 전제 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촛불은 그렇지 않습니다.
  
  권력의 변화, 또는 권력 담당자의 교체가 아니라 권력의 해체라고 하는 것은 정치권력 뿐 아니라 개인 속에 있는 모든 유형의 권력마저도 깡그리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권력 그 자체의 속성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는 권력자는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착한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대책회의'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시민의 직접민주주의가 발현되었다면서 대의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안이라고 촛불을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시민단체 논객은 서울광장에 '시민권력'이 탄생했다며 정부권력과 별개의 권력이 서울에 공존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 놓기도 했습니다.
  
  권력의 개념을 거론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촛불의 지도부라 하는 분들의 생각과 지향이 어딜 향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 순간 우리는 역사상 등장한 시민권력의 행로를 떠 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동학혁명, 3.1만세운동, 4.19 혁명, 광주항쟁, 6.10 항쟁을 떠올려 보면 됩니다.
  
  멀리는 프랑스 대혁명이나 중국의 5.4 운동이나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 필리핀의 반 마르코스 혁명 등등.
  새로운 권력을 탄생시키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생명의 관점, 생태의 관점, 사랑의 관점, 포용과 상생의 관점에서 보면 바뀐 권력은 이전 권력과 차이보다는 동질성이 더 큽니다.
  
  권력의 지위에 오른 4,19와 6.10의 주역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면 됩니다. 권력은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한 개인을 권력의 속성에 포박합니다.
  
  모든 유형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위치에 계신 분들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의 계승자라 할 수 있습니다.
  큰 자유는 자기 생각과 주장에 묶이지 않는 것이고 최고의 평등은 온 세상 만물이 하나라는 인식으로까지 나아 가는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쇠고기 정국에 대처하는 모습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 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촛불의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촛불은 이명박 권력에 대한 저항과 비판을 주된 자기 동력으로 삼습니다.
  
  그 이면에는 새로운 권력을 꿈꾸고 있습니다. 스스로 권력의 포로가 되고자 합니다. '저항폭력'의 이름으로, 또는 '대항폭력'의 이름으로 행사하는 거리에서의 말과 행동의 폭력성은 스스로를 권력자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미국 미친 소. 너나 쳐 드셈" 이라는 여고생들의 팻말을 보고 모두 박장대소를 하면서 통쾌해 하는 풍경입니다.
  보수 기독교 광신도들이 온 세상을 '예수천국과 불신지옥'으로 양분 하듯이 촛불들도 이명박으로 대표되는 상대편(현 정부, 한나라당, 조중동, 극우단체들, 보수 종교인 등)을 뜯어 고치고 물리쳐야 할 악의 세력으로 보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거침없는 조롱과 업신여김, 비아냥과 헐뜯기와 깎아 내리기는 결국 자기 자신 속에 그런 기운을 채워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주체가 되기에는 거리가 멉니다.
  
  진보신당에서 생중계하는 <칼라티브이> 진행자 진중권 선생은 민주노동당이 분당할 때 "가만 놔 두면 저절로 망할 집단"이라고 극언을 서슴지 않았던 사람인데 촛불정국의 떠오르는 논객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두루 활보하고 있습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노컷뉴스, 미디어스, 엠비시 일부 내용들은 분명 기사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촛불에 대한 부추김과 확대재생산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다른 쪽으로 몰려 있는 조중동의 끔찍한 보도들은 더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 이제야말로 <저항을 넘어선 창조의 길>이 촛불이 가야 할 방향이 되어야 한다.

  지금 7.5 대행진 이후 촛불의 행로를 놓고 고심이 많습니다. 그 고심은 어떤 의제로 전환 할지에 대한 것이며 어떤식으로 촛불을 켤지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의 동력을 유지하면서 의제를 전환 하는 것이 과연 해법이 될까요?
  
  저는 이제야 말로 <저항을 넘어 선 창조의 길>이 촛불이 가야 할 방향이라고 봅니다.
  
  이명박 정부를 향한 요구와 주장은 이제 됐습니다. 나 자신을 향한 요구와 주장을 펴 나가야 할 때라고 봅니다. 남과 주변환경을 향한 요구와 저항은 마치 평화와 행복이 환경조건과 상대편의 행동 여부에 달려 있다는 식의 오해를 갖게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이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를 전면에 내세워 촛불의 행로를 거론 할 수 없었다고 봅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촛불의 재협상이라는 요구조건이 이뤄졌느냐와는 무관하게 거리의 싸움에서는 이겼습니다.
  
  그런데도 재협상과 정부책임자 처벌이나 구속자 석방, 또는 한반도 대운하 포기와 공공부문 민영화 금지 등에만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촛불이 이런 것에 시간과 정력을 계속해서 쏟을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소를 음식으로만 보는 시선을 거두고 생명을 가진 가축으로 봐야 하며 내 밥상에 오르는 반(反) 생명적 음식들을 하나씩 제거해 가야 하고 이명박 식의 신자유주의적 사고와 생활을 청산하기 위한 자기 혁신의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자가용 버리기, 대형차 경차로 바꾸기, 재생에너지 쓰기는 기본입니다. 농촌 살리기와 유기농(자연농) 식품 먹기, 초중고 정식 교과목에 명상과 수련을 포함시키기, 음식 안 남기기 등을 선언하고 실천하는 촛불을 켜야 합니다.
  
  채식하기, 귀농하기, 더울 때는 땀 흘리고 추울 때는 떨며 살기, 포용하고 사랑하기, 어떤 조건에서도 늘 평화롭기, 이런 것이 이 시대 최고의 진보일 것입니다. 비판과 저항, 상대를 이기기 위한 투쟁은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한시적인 수단에 불과 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농민들이 주관하는 촛불집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땅과 물과 공기를 오염시키는 화학농법을 하면서 도시적 소비생활을 하는 농민들이 많습니다. 도시민들의 타락한 입맛을 좇아 끝임없이 스스로가 파괴 될 때까지 파괴적인 농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국 미친 소 대신 한우 판촉에 열을 올리는 지자체가 많습니다. 우리 동네만 해도 지자체 지원속에 계속 지어지는 한우 축사들을 보고 있자면 이것은 가축들이 사는 집이 아니고 쇠고기 공장에 불과합니다.
  
  논 한 가운데에 덜렁 세워지는 축사의 한우들은 사료만 먹고 자랍니다. 갇혀 살고 파란 풀을 단 한입도 먹지 못하고 일생을 마칩니다. 고기 생산 공장인 셈이죠. 촛불이 결과적으로 이런 우리 현실은 온존시키는 쪽으로 가서는 안됩니다.
  
  농민들이 치켜드는 가장 강력한 촛불은 지금까지의 반 생명적 농사를 중단하고 생명의 농사를 짓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교사들이 치켜드는 가장 강력한 촛불은 어떤 경우에도 어떤 종류의 폭력도 학생들에게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는 것이며 어떤 경우에도 부정적인 언사로 사물을 설명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이 치켜드는 가장 강력한 촛불은 공장에서 지급 받은 면장갑을 한번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빨아 사용하는 것입니다. 파업은 이러한 큰 세상으로 가는 과도기적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시민들은 자기 집에서 촛불을 켜고서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권위적 군림을 포기하겠다고 촛불앞에서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씩 광장에서 촛불을 켜서 촛불다짐 발표대회를 여는 것입니다.
  직장단위, 가족단위, 정당단위, 기타의 모임단위로 각자의 촛불실천을 발표하고 서로 격려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정치적 요구을 내세우는 촛불집회도 열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요구를 집약하는 것이지요.
  
  촛불들의 새로운 실천 제안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의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진심으로 비는 기도회를 제안 할 수 있고 북한 굶주리는 동포를 위한 보름 동안 성미 모으기 운동도 제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창조의 촛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창조'의 핵심은 <개인적 대각성의 사회화와 사회변혁의 일상생활화>입니다.
  
  프랑스 6.8 혁명을 관 속에 넣고 마지막 못질을 했다고 호언하는 사르코지가 지금의 프랑스 대통령입니다. 3년 전 프랑스의 주변부 삶을 사는 이민 청소년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정치혁명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비판과 저항을 출발점으로 민초들은 일어납니다.
  비판과 저항을 동력으로 삼아 나아 가려면 끝임없이 '적'을 필요로 합니다.
  
  오늘 비판적 지성이라 할 수 있는 손아무개 선생은 '촛불은 아직 승리하지 못했다'면서 계속 촛불집회를 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요구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하면서.
  
  여기서 말하는 '승리'가 이명박의 신자유주의적 지향과 뭐가 다를까요? '승리'가 목표가 되면 패배의 순간을 준비하는 짓과 다를바 없습니다.
  
  창조의 삶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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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심(公心)과 공안(公眼)으로 판단해야


조선 5백년의 역사에서 가장 처참하고 반역사적인 사건들은 학문이나 사상적 견해가 다른 반대파 학자들을 학문과 사상의 차이 때문에 죽이는 것이 아니라, 역적이나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서 죽이는 일입니다. 당신들은 우리 집권세력과는 학문과 사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같이 살아갈 수 없으니 죽일 수밖에 없소라고 했다면 정직하기라도 하지만 학문과 사상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는 사람을 죽였다는 역사가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유를 둘러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지난날 역사의 비극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을 거론하면, 바로 송시열과 윤휴라는 숙종 때 인물들의 문제입니다. 윤휴는 남인계 학자로 애초부터 주자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주자의 경전해석에 많은 이론(異論)을 제기하면서 사서오경에 대한 새로운 주석으로 학계에 많은 풍파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어떤 정권이나 권력자도 그를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큰 학자로 대접받아 온갖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라는 고관의 벼슬에 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에 많이 알려진 ‘기해예송’이라는 복제(服制)문제로 남인과 서인의 싸움이 격화되자, 송시열의 기년(朞年)설에 참최(斬衰) 3년설을 강력히 주장한 윤휴는 송시열과 정면대결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비주이종(卑主二宗)’, 즉 임금을 낮추고 종통을 두 개로 나눈 서인의 잘못을 따지는 윤휴의 예설은 서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의 지적이었습니다. 이래서 서인들은 궁한 입장에 처했지만 권력이 그들에게 있었기에 반대파들을 축출하거나 귀양 보내 위기를 모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게 되자, 마침내 비장의 무기를 꺼냈으니, 바로 ‘사문난적’이라는 역적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방법을 활용하게 됩니다. 신성시되는 주자학을 비판했다는 이른바 ‘사문난적’이라는 죄를 씌우고 역적이라 몰아붙여 극형에 처했으니 바로 윤휴의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정치의 쟁점이던 ‘예송’은 젖혀두고 엉뚱한 경전주석을 문제 삼아 정적을 제거했던 반역사적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다산은 그의 편지 「여이여홍(與李汝弘)」이라는 글에서 공평한 마음(公心)과 공평한 안목(公眼)으로 보면 정치적 이유인 ‘예송’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숨기고 다른 이유로 윤휴라는 정적을 제거했던 점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요즘 촛불문화제를 보면서 반미·좌파세력으로 매도하며 배후 추적으로 촛불을 끄려는 당국의 입장을 공심과 공안으로 본다면 어떻게 평가할까요. 원인제공자가 누구였나를 공심·공안으로 따져야 하지 않을까요.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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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7월 01일 화요일


"학생 징계 내용 공표해도 되나요?"


정당한 절차를 거쳐 징계 받은 학생의 신상을 공표할 수 있을까? 일선학교 교사들로부터 인권위에 전화로 상담하거나 홈페이지를 통해 문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학교폭력, 금품갈취 등으로 교칙을 위반하여 처벌받은 학생에 대해 게시판에 학년, 반, 성명을 공고 했을 때 인권침해에 해당하는지, 만약 인권침해라면 학년과 성만 기재해서 공고한다면 괜찮은지 여부를 묻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어떤 교사는 상습적인 금품갈취를 한 학생의 징계내용중 학교내 특정층의 출입을 금지하고, 이같은 내용을 공개한다는 것도 포함됐는데 이것이 인권침해인지 상담하기도 했다. 나아가 인권위가 게시판 공고시 학생의 인적사항을 기재할 수 없도록 권고하였다는데 결정문을 보내달라는 교사도 있었다.
학부모의 상담도 있다. 사립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학칙을 어겨 징계를 받았고 학교측이 게시판에 이름, 반, 위반사항, 징계내용을 공개했는데, 이것은 초중등교육법 제18조의4(학교의 설립자, 경영자와 학교의 장은 헌법과 국제인권조약에 명시된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여야 한다)의 규정을 어긴 범법행위가 아니냐는 것이다.

쟁점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침해여부다. 우리 헌법 제17조는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같은 프라이버시(privacy)권은 자신의 사생활을 공개당하지 않을 권리와 자신에 관한 정보의 공개와 유통을 스스로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주요내용을 하고 있다.

위 상담사례와 관련 우선, 인권위는 징계사실에 대한 게시판 공고시 학생의 인적사항을 기재할 수 없도록 권고한 사례는 아직 없다. 또한 상담단계에서 인권침해 여부를 단정하여 답변할 수는 없다. 즉 개별적인 사안의 인권침해 여부는 진정을 할 경우 조사를 거쳐 위원회에서 판단하여 결정하기 때문이다. 특히 국·공립학교와 달리 사립학교에서의 인권침해의 경우는 위원회법상 조사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조사의 어려움이 있다. 다만 최근 일선 학교 교사나 학부모들의 질의가 잇따라 다음과 같은 원론적인 내용을 안내하고 있다.

먼저 교칙을 위반했거나 설령 법률을 위반한 학생이라고 할지라도 징계와 처벌 받은 사실은 프라이버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을 학교 게시판에 공표하는 것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기본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 물론 공익적 차원에서 프라이버시권을 제한할 수 있지만 이 경우도 명문화된 법적 근거가 반드시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 헌법 규정(제37조 제2항)이다. 실제로 일반 형사법에 대한 판결의 공시도 피해자의 이익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한하는데, 이는 형법 제58조 제1항을 근거로 하며 이와 별도로 반드시 법원의 판결에 의해서만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학생의 징계에 관한 근거는 초중등교육법 및 동법 시행령에서 학칙에 위임하고 있을 뿐 징계사실의 공표에 대한 내용은 별도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학생의 징계 사실을 공표하는 것은 법적 근거가 없는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성명을 공개하지 않고 학년과 성만 공개하는 경우도 대상자가 특정되어 노출될 소지가 있다면 마찬가지라고 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상 학생에 대한 구체적인 신상정보를 공표하지 않고 처벌과 징계의 내용만을 공표하는 것은 프라이버시권 침해 논란과 무관할 수도 있다. 가령 ‘모년 모월 모일 어떠어떠한 학칙 위반 사실이 발생하여 관련 학생을 학칙 제00조에 의거하여 징계위원회에 회부하여 이러이러한 처분을 하였음을 공지한다’는 정도는 용인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법령 위반 사실에 대한 공표의 취지가 그렇듯, 교육적이고 예방효과를 준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학칙과 법령을 위반했다면 징계를 받는 것은 불가피하겠지만 이와 별개로 공표문제와 관련 일선 학교 현장의 주의가 요구되는 대목인 것 같다.

 글: 박광우(국가인권위원회 인권상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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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7-02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부분 학교 교칙에 공고하도록 되어 있죠.

BRINY 2008-07-02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모든 게 조심스러워요.
나이드신 교사들은 '덮어두지말고 공개해서 본보기를 삼아야해'라고 주장하시더라구요.

해콩 2008-07-02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특히 자라는 아이들은...' 이런 관점이 필요하지 않을까해요. 잘못을 반성하고 고쳐나갈 수 있는 기회를 뺏지는 말아야겠죠. 연세 있으신 샘들께서 아이들에게 좀더 너그러운 모습 보여주신다면 후배교사들이 더욱 존경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죠. 일벌백계의 본보기로 아이들을 징계하고 그 사실을 널리 알려 확실하게 낙인 찍어버리는 것, 잘못한 학생은 물론 다른 학생들까지도 잠재적인 '범죄자'로 규정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학교 교칙을 한 번 살펴봐야겠어요. 우리 학교는 어떤지...

글샘 2008-07-13 12:43   좋아요 0 | URL
학교가 노화되는 데도 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학교의 교사 평균 연령이 40대 중후반입니다. ㅠㅜ 젊은 교사가 너무 없죠. 아이들이 믿고 상담할 만한 친숙함이 없어진다는 건... 아이들의 학교 생활이 불행해진다는 거죠. 요즘 대학생들이 정치에 몰관심인 것도 학교이 노쇠화와 관련있지 않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