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타쿠예 오야신 :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안다. 모든 종교적인 열망, 모든 진실한 예배는 똑같이 하나의 근원과 하나의 목적을 갖고 있음을. 우리는 또 안다. 학식있는 자의 신, 어린아이의 신, 문명화된 사람의 신, 원시적인 사람의 신이 결국은 모두가 같은 것이라고. 신을 결코 생김새가 어떻게 다른가를 놓고 우리를 판단하지는 않는다. 신은 이 대지 위에서 올바르게 살고 겸허하게 행동하는 모든 이들을 자신의 품안에 받아들인다.

젊었을 때 그대의 혀를 잘 지키라. 그러면 늙어서 그대의 부족에게 도움이 될 한 가지 생각이 그대 안에서 익어갈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부족 회의를 열 때 말하는 지팡이를 사용한다. … 누구든 말하는 지팡이를 잡은 사람은 그의 손 안에 신성한 말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는 동안은 오직 그 만이 말을 할 수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침묵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 그에게 진실되고 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기위해 말하는 지팡이에 독수리 깃털을 매달기도 했다. 지팡이 끝에 매단 토끼털은 그가 하는 말이 그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하며 또한 부드럽고 따듯한 말이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또한 지팡이에 매단 파란색 돌은 위대한 정령이 그가 하는 말뿐 아니라 그의 가슴이 하려고 하는 말을 다 듣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무지개 빛을 지니고 있으며 수시로 색깔이 달라지는 조개는 세상이 날마다, 계절마다, 해마다 변화하며 사람들과 상황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 가슴속에 있는 것을 말하는 순간 그가 자신의 손에 우주의 모든 힘을 쥐고 있음을 말해 주었다.

그대의 가슴 속에 죽음이 들어올 수 없는 삶을 살라. 다른 사람의 종교에 대해 논쟁하지 말고, 그들의 시각을 존중하라. 그리고 그들 역시 그대의 시각을 존중하게 하라. 그대의 삶을 사랑하고 그 삶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고, 그대의 삶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만들라. 오래 살되,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에 목적을 두라. 이 세상을 떠나는 위대한 이별의 순간을 위해 고귀한 죽음의 노래를 준비하라. 낯선 사람일지라도 외딴 곳에서 누군가와 마주치면 한두 마디 인사를 나누라.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누구에게도 비굴하게 굴지 말라. 자리에서 일어나면 아침 햇빛에 감사하라. 당신이 가진 생명과 힘에 대해. 당신이 먹는 음식, 삶의 즐거움들에 대해 감사하라. 만일 당신이 감사해야 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 잘못이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마음 속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즉한 사람처럼 되지 말라. 슬피 울면서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도록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 그 대신 그대의 죽음의 노래를 부르라.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인디언 전사처럼 죽음을 맞이 하라.

그들 사회에는 거짓, 허위, 배신, 탐욕, 시기, 욕설을 의미하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풀잎들이 햇빛 속에 고요히 있듯이 대지는 내게 침묵을 가르쳐 주네. 오래된 돌들이 기억으로 고통받듯이, 대지는 내게 고통을 가르쳐 주네. 꽃들이 처음부터 겸허하게 피어나듯이 대지는 내게 겸허함을 가르쳐 주네. 어미가 어린 것들을 안전하게 돌보듯이 대지는 내게 보살핌을 가르쳐 주네. 나무가 홀로 서 있듯이 대지는 내게 용기를 가르쳐 주네. 땅 위를 기어가는 개미들처럼 대지는 내게 한계를 가르쳐 주고, 하늘을 쏘는 독수리처럼 대지는 내게 자유를 가르쳐 주네. 가을이면 떨어져 생명을 마감하는 잎사귀들처럼 대지는 내게 떠남을 가르쳐 주고, 봄이면 다시 싹을 틔우는 씨앗처럼 대지는 내게 부활을 가르쳐 주네. 눈이 녹으면서 자신을 버리듯이 대지는 내게 자신을 버리는 법을 가르쳐 주네. 마름 평원이 비에 젖듯이, 대지는 내게 친절을 기억하는 법을 가르쳐 주네.

<나바호족 인디언들의 결혼식사>
이제 두 사람은 하나의 불을 피울 것이다. 이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사랑과 이해, 지혜를 상징하는 하나의 불꽃을 갖게 될 것이다. 이 불이 두 사람에게 따뜻함과  음식과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 이 새로운 불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새로운 삶과 새로운 가정을. 이 불은 언제가지나 타올라야 한다. 두사람은 언제까지나 함께 있으리라. 이제 두 사람은 새로운 삶을 위한 불을 밝혔다. 이 불은 꺼지지 않으리라. 늙음이 그대들을 갈라 놓을때까지.

<아파치족 인디언 식사>
이제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줄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춥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함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행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두 개의 몸이지만 두 사람 앞에는 오직 하나의 인생만이 있으리라. 이제 그대들의 집으로 들어가라. 함께 있는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 위에서 그대들은 오랫동안 행복하리라.

모든 만물 속에서 움직이는 위대한 정령을 통해 인간의 의식을 바꾸는 데는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사람의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 사람은 또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그 생각이 만물을 통해 드러난 때까지. 전체 새들의 무리가 방향을 바꾸는 것은 똑같은 생각, 똑같은 힘 때문이다. 새떼 전체가 한 가지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네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네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눠야만 한다.

위대한 정령 와칸 탕카. 대지 전체가 살아있는 경전.

네가 삶의 길을 여행할 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말라. 누구도 슬프게 하지 말라. 할수 있는 한 언제나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라. … 조용한 삶을 살고, 모두에게 친절하라.

존중한다는 것은 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대지와 대지 위에 사는 모든 생명들을 존경심을 갖고 대하라. 위대한 정령으로부터 멀어지지 말라. 동료 인간들을 존중하라. 모든 인류의 이익을 위해 함께 일하라. 필요한 곳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라. 몸과 마음을 잘 돌보라. 보다 좋은 일에 자신의 노력을 쏟으라. 언제나 진실되고 정직하라.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라.

교사들 중 많은 이들이 소위 교육받은 바보들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삶을 사랑하라 가르치고, 우리가 자연의 일부분임을 가르친다. 하지만 교실에 앉아 그것들을 배울 때, 아이들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 대신 온갖 것들을 암기할 뿐이다. 학교가 아이들의 창조성, 꿈꾸는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미국 사회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 속에 큰 약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나라는 폭력을 기초로 세워져 있다. 폭력을 숭배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폭력적으로 살아갈 것이다. 사랑으로 폭력과 맞서는 것 역시 무의미한 파괴로 끝이 난다. 미국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라. 미국은 전쟁에서 패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전쟁에 개입할 때마다 미국 정부는 언제나 과잉 살상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며,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가루로 만둘어 버린다. 항의를 해도 수그러드는 법이 없다. 베트남 전쟁을 보라. 미국은 2차 세계 대전때 사용한 것보다 더 많은 폭탄을 떨어뜨렸다. 과잉 살상의 대표적인 예다.

환경은 이쪽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다. 환경은 저쪽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 자신이 곧 환경이다.

지혜라는 것은 그것을 찾는 것을 중단하고 신이 그에게 바라는 진정한 삶은 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찾아온다는 것.

그가 그 자리에 있든 없든, 절대로 다른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말라. 다른 사람이 가진 종교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라.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으라. 설령 그가 하는 말이 무가치하게 느껴질지라도, 마음을 담아서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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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아미쉬-수쿠아미쉬 족(族)의 추장 시애틀, 1856년

   워싱턴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 왔다. 대추장은 우정과 선의의 말도 함께 보내 왔다. 그가 답례로 우리의 우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그로서는 불친절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대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것이다.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백인이 총대를 들고 와서 우리의 땅을 빼앗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대들에게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 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紅人)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들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홍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

   워싱턴의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 온 것은 곧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달라는 것과 같다. 대추장은 우리만 따로 편히 살 수 있도록 한 장소를 마련해 주겠다고 한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안을 잘 고려해 보겠지만, 우리에게 있어 이 땅은 거룩한 것이기에 그곳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울과 강을 흐르는 이 반짝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피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을 팔 경우에는 이 땅이 거룩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달라. 거룩할 뿐만 아니라, 호수의 맑은 물 속에 비추인 신령스러운 모습들 하나 하나가 우리네 삶의 일들과 기억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 준다. 카누를 날라주고 자식들을 길러 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아침 햇살 앞에서 산안개가 달아나듯이 홍인은 백인 앞에서 언제나 뒤로 물러났지만 우리 조상들의 유골은 신성한 것이고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다. 그러니 이 언덕, 이 나무, 이 땅덩어리는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다. 백인은 우리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인에게는 땅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똑같다. 그는 한 밤중에 와서는 필요한 것을 빼앗아 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땅은 그에게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것을 다 정복했을 때 그는 또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백인은 거리낌없이 아버지의 무덤을 내팽개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서 땅을 빼앗고도 개의치 않는다. 아버지의 무덤과 아이들의 타고난 권리는 잊혀지고 만다. 백인은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저 하늘을 마치 양이나 목걸이처럼 사고 약탈하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대한다. 백인의 식욕은 땅을 삼켜 버리고 오직 사막만을 남겨 놓을 것이다.

   모를 일이다. 우리의 방식은 그대들과 다르다. 그대들의 도시의 모습은 홍인의 눈에 고통을 준다.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봄 잎새 날리는 소리나 벌레들의 날개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홍인이 미개하고 무지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도시의 소음은 귀를 모독하는 것만 같다.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한밤중에 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홍인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내음을 사랑한다. 만물이 숨결을 나누고 있음으로 공기는 홍인(紅人)에게 소중한 것이다. 짐승들, 나무들, 그리고 인간은 같은 숨결을 나누고 산다. 백인은 자기가 숨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여러 날 동안 죽어 가고 있는 사람처럼 그는 악취에 무감각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대들에게 땅을 팔게 되더라도 우리에게 공기가 소중하고, 또한 공기는 그것이 지탱해 주는 온갖 생명과 영기(靈氣)를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베풀어준 바람은 그의 마지막 한숨도 받아 준다. 바람은 또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준다. 우리가 우리 땅을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잘 간수해서 백인들도 들꽃들이 향기로워진 바람을 맛볼 수 있는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안을 고려해 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즉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개인이니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나는 초원에서 썩어 가고 있는 수많은 물소를 본 일이 있는데 모두 달리는 기차에서 백인들이 총으로 쏘고는 그대로 내버려 둔 것들이었다. 연기를 뿜어내는 철마가 우리가 오직 생존을 위해서 죽이는 물소보다 어째서 더 소중한지를 모르는 것도 우리가 미개인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 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게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맺혀져 있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딛고 선 땅이 우리 조상의 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들이 땅을 존경할 수 있도록 그 땅이 우리 종족의 삶들로 충만해 있다고 말해 주라.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그대들의 아이들에게도 가르쳐라. 땅은 우리 어머니라고.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들들에게도 닥 칠 것이니, 그들이 땅에다 침을 뱉으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 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종족을 위해 그대들이 마련해 준 곳으로 가라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 보겠다. 우리는 떨어져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우리가 여생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패배의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의 전사들은 수치심에 사로잡혔으며 패배한 이후로 헛되이 나날을 보내면서 단 음식과 독한 술로 그들의 육신을 더럽히고 있다. 우리가 어디서 우리의 나머지 날들을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 많은 날이 남아 있지도 않다. 몇 시간, 혹은 몇 번의 겨울이 더 지나가면 언젠가 이 땅에 살았거나 숲 속에서 조그맣게 무리를 지어 지금도 살고 있는 위대한 부족의 자식들 중에 그 누구도 살아 남아서 한때 그대들만큼이나 힘세고 희망에 넘쳤던 사람들의 무덤을 슬퍼해 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우리 부족의 멸망을 슬퍼해야 하는가? 부족이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인간들은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가 간다. 자기네 하느님과 친구처럼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백인들조차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백인들 또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가지는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땅을 소유하고 싶어하듯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곳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이며 그의 자비로움은 홍인(紅人)에게나 백인에게나 똑같은 것이다. 이 땅은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이므로 땅을 해치는 것은 그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다. 백인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갈 것이다. 어쩌면 다른 종족보다 더 빨리 사라질지 모른다. 계속해서 그대들의 잠자리를 더럽힌다면 어느 날 밤 그대들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멸망할 때 그대들은 이 땅에 보내 주고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그대들에게 이 땅과 홍인을 지배할 권한을 허락해 준 하느님에 의해 불태워져 환하게 빛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불가사의한 신비이다. 언제 물소들이 모두 살육되고 야생마가 길들여지고 은밀한 숲 구석구석이 수많은 인간들의 냄새로 가득 차고 무르익은 언덕이 말하는 쇠줄(電話線)로 더럽혀질 것인지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덤불이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독수리는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날랜 조랑말과 사냥에 작별을 고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의 끝이자 죽음의 시작이다.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 보겠다. 우리가 거기에 동의한다면 그대들이 약속한 보호구역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서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마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 홍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가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기억될 때라도, 이 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백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의 심장 고동을 사랑하듯이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당신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이 땅의 기억을 지금처럼 마음속에 간직해 달라. 온 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대들의 아이들을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이.

   한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나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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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yo12 2004-09-19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해콩 2004-09-20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첨뵙는 분이다. 반갑습니다. -- __ -- 꾸벅!! 사실 이 글은 느티나무님 서재에서 퍼온 건데요, 거기에 더 좋은 글들이 많답니다.

해콩 2004-11-09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서부지역에 거주하던 두아미쉬-수쿠아미쉬족(族)의 추장 시애틀의 연설문.

이 연설이 행해진 것은 1854년, 미합중국 대통령 피어스에 의해 파견된 백인 대표자들이 이 인디언 부족이 전통적으로 살아온 땅을 팔 것을 제안한 데서 비롯되었다.

지금의 워싱턴주에 해당하는 이 지역 토착민들의 삶터를 차지하는 대신에 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보존지구를 주겠다는 것이 백인 정부의 제안이었다. 여기에 대하여 몸집이 장대하고 우렁찬 목소리를 가졌다고 전해지는 시애틀 추장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는데, 거의 시적이라고 할 만한 연설문은 오늘날 환경과 자연에 대한 분별없는 파괴의 결과로 인하여 전인류가 심각한 고통에 직면하게 된 시대에 오히려 생생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19세기라는 한정된 시대를 뛰어넘어서 지금의 우리들에게 감동적으로 전해오는 이 연설문의 아름다움과 진리성은, 본질적으로 우주와 세상을 조화로운 질서있는 하나의 전체로서 보는 통합적 비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통찰력은 실은 인류사의 오랜 전통에서 많은 현자들과 신비가들에게, 그리고 많은 구전전통에서 잘 알려진 세계관에 뿌리를 둔 것이다. 자연에 근거한 소박한 언어와 이미지와 비유를 가지고 시애틀추장은 존재의 위대한 신비와 인간의 삶터와 창조주와의 관계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을 표현한다.



우리가 이 연설문에 나타난 생각을 단지 원시 자연숭배사상이나 애니미즘의 선언으로 간주한다면, 이 발언문에 포함된 깊은 진리를 지나쳐버리게 될 것이다.

시애틀추장은 자주 "어머니로서의 땅(大地)" 혹은 "자아로서의 땅"에 주목하여 인간이란 자연 속의 먼지나 아이와 같은 존재임을 환기하고, 그러면서도 인간에게는 땅을 지키고 보호할 거룩한 임무가 창조주로부터 주어져 있음을 주목하기도 한다. 생명에 대한 봉사의 정신과 깊은 겸손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인간적 위엄을 가지고 그는 그 자신과 자기 부족의 전통에서 깨우친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백인의 난폭한 욕망이 필연적으로 토착적 전통가치를 파괴하고, 인디언 문화의 멸망을 초래할 것임을 내다보면서 창조주의 자비로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견지한다. 그리하여 그는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가 가는" 인간의 근본적인 운명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 모두를 이 세상 만물의 무수한 다양한 형태속에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는 하나의 거룩한 존재를 발견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인디언 문화의 근본적인 비폭력성과 그들이 느낀는 우애와 형제애의 중심에는 실로 이러한 거룩한 존재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 인식은 모든 것이 상호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는 우주의 근원적 구조를 알게 하고, 모든 존재, 모든 사람이 참으로 공통한 운명에 종속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커다란 통합적 비젼이야말로 진정하게 비폭력적인 삶의 기술을 보장하는 원천이 아닐 것인가? 우리가 이러한 비젼에 동참할 것인가 어쩔 것인가는 자유롭게 선택해야 할 문제이지만, 이것을 완전히 무시할 때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파국에 직면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존재의 공통한 운명과 상호의존성에 언급하는 인디언 추장의 발언에 귀기울인다는 것은 우리가 좀더 겸손하고 책임감있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언어는 단지 의사표현의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그렇게 건조한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지 않고 아주 축축한 것이다. 축축함이란 것은 민족의 역사와 문화적 바탕에서 나도 모르게 배어들어 있는 것을 지니고 있는, '나'라는 개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무의식적으로 습득된 선험적인 내용을 지녔다는 뜻이다. 어느 나라 말을 할 때, 그 말한 상대가 나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거나 돈이 있거나 힘이 있을 대, 그 우월한 상대방의 언어를 대등하고 능숙하게 쓰게 되기 전에는 항상 열등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세네갈과 알제리 지식인들도 프랑스, 영국 사람들과 대화할 때, 똑같은 걸 느꼈다. 폴 니잔이라는 지식인이나 알제리의 유명한 독립 이론가 프란츠 파농 같은 경우도 같은 말을 했다."

 

강준만편저, [한국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개마고원, 2004, 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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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4-08-30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이번에 프란츠 파농의 전기를 읽었는데...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았어요.^^

해콩 2004-09-01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란츠 파농.. 알제리 민족(독립)운동(이론)가, 읽어보고 싶어요. 언젠가 영화도 나왔던 것 같은데... ^^ 샘 읽으신 전기는 어느 출판사?
 

~ '용서'라는 것은 용서를 안 해도 되는 강자가 할 수 있는 자기 선택이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약자가 자청해서 할 수 있는 미덕이 아니다. 용서란 승자가 베풀 때에는 도덕적 위대성을 과시하는 미덕일 수 있지만 패자가 부르짖으면 꼴불견이 된다. 비굴의 자기기만일 수가 있다. 작금의 대일관계에서 마치 국민적 성숙의 표시처럼 고창되고 있는 '잊지는 말되 용서하자'는 캐치프레이즈는 40여 년 전 진주만 기습 공격서건을 놓고서 미국 국민이 일본인에 대해 화해의 정신으로 한때 유행했던 슬로건에서 착상된 것 같다. 그러나 분명히 가려서 생각할 일이 있다. 피해자이면서 승전국인 미국인들은 패전자이자 과거의 가해자인 일본에 대해서 과거를 잊지 많아도 되고, 용서를 안 해도 됐지만 그렇게 한 것이다. 열등한 자의 강요당한 망각과 관용이 아니라 우월한 위치에서의 자발적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 정신에는 도덕적 우월함이 있다. 식민지시대는 접어두고라도, 행방 후 지난 40년간에 형성된 한일 두 나라의 현실적 지위 관계에서 우리가 어설프게 과거를 '잊자'니 '용서하자'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가? '용서하지 말자'는 주장이 아니다. 용서의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리영희, [분단을 넘어서],  한길사, 1984. 49쪽.

강준만 편저,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개마고원 2004. 153쪽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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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쳐 창조한 지식과 축적한 경험은 정치나 이념적으로 말해도 '극좌'에서 '극우'까지 다양하고 무쌍하다. 그리고 그 사이는 끝없이 풍부하다. '우'의 극단에 서면 우주의 모든 것이 '좌'로 보이게 마련이다. 조금 거리가 멀면 보든 것이 '극좌'로 보일수밖에 없다. '좌'도 그 극에서 서서 보면 모든 것이 '우'로 보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극'의 병리학이다. 벽에 걸려 있는 부랄시계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착각에서 깨어날 때가 있다. 한 번 오른쪽 끝까지 갔다간 왼쪽 끝까지 돌아가고, 다시 그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러면서, 아니 그래야만, 시계는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화가 나서 시계 부랄을 오른쪽 끝에 못박아보았더니 시계는 죽어버렸다. 이상한 일이다. 진자나 저울의 바늘도 중앙에 돌아와 서려면 좌와 우를 조금씩 왔다갔다 하면서 편안하게 제자리를 잡는 것 같다. 그러고는 느긋이 안정을 누린다. 왜 그럴까? 8*15이후 반 근 반세기 동안 이 나라는 오른쪽은 신성하고 왼쪽은 약하다는 위대한 착각 속에 살아왔다. 이제는 생각이 조금은 진보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새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는가?

- 리영희, [자유인, 자유인: 리영희교수의 세계인식], 범우사, 1990.

- 강준만 편저,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177쪽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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