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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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만나는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 책을 받아들고 <깃털 베개>부터 읽는다. 짧은 작품인데 매우 강렬하다. 소름이 쭈뼛쭈뼛 돋다가 머리맡에 놓인 베개를 꺼림칙하게 쳐다보게 된다. 이 작품을 읽는 이들은 모두 그러하리라.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녀의 신혼생활은 몸서리가 날 만큼 두려운 나날이었다. 남편의 냉혹하고 모진 성격 때문에 천사처럼 온순한 금발 신부가 어릴 적부터 동경해온 신혼의 꿈은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97쪽) 첫 부분부터 무언가 불길한 일이 곧 일어날 것 같다. 모두가 단꿈에 젖는다는 신혼이라는데, 왜 여자는 두려울까? 얼마나 달콤한지 ‘허니문’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진 신혼. 그런데 아내는 행복하기는커녕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밤마다 공포에 짓눌려 비명을 지른다. 남편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의사를 불러와 진찰하도록 해보지만, 의사 또한 아내의 병명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내의 병은 나날이 심해져만 간다. 이 작품은 억압적인 결혼 생활에 짓눌린 여성의 삶을 공포라는 외피로 묘사한다. 사랑한다지만 싸늘하기 짝이 없는 남편과 일궈나가는 일상의 스트레스로 여자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리고 앓아누운 것은 아닐까? 특히 이 작품 결말을 장식하는 ‘그 사건’은 아내를 착취하고 그 피를 빨아먹는 남편이란 존재의 은유로도 읽힌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이처럼 공포와 환상이 뒤섞여 풍요로운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작품이 주를 이룬다. <목 잘린 닭>도 마찬가지이다. ‘마시니페라스 부부에게는 아이가 넷 있었는데 모두 백치였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부터 섬뜩하다. 아이들은 어쩌다 모두 백치가 됐을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아이들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벽돌담에서 무엇을 보는지 조금씩 밝혀진다. 아이들이 빚어내는 비극도……. 이 작품을 읽노라면 사랑의 속성이 얼마나 나약하고 허물어지기 쉬운 것인지 절감하게 된다. 아이들이 백치가 되어버릴 때마다 부부는 서로를 탓하고 원망한다. 그러면서도 욕망은 남아 있는지, 아니면 그토록 어리석은 인간이기에 또다시 헛된 꿈을 꾸면서 이번만은 다르리라는 기대와 바람 속에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일을 거듭한다. 욕망과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가련한 인간의 모습이다.

 오라시오 키로가의 작품 안에서는 사랑이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광기 서늘한 사랑과 욕망은 존재하는데, 그 사랑은 대부분 좋은 결실을 이루지 못한다. 달콤한 신혼도 파국으로 치닫거나, 백치 아이들을 줄줄이 낳을 뿐이다. 결혼을 앞두고 ‘질펀하게 놀아야’한다는 그릇된 욕망은 뜻하지 않은 비극을 낳기도 한다(<천연 꿀>). 한눈에 반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그린 <사랑의 계절>에서도 ‘네벨’과 ‘리디아’의 순수한 사랑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못한 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흐르듯 세월만 덧없이 흘러간다. 그들의 사랑이 이뤄질 만 하면 미치광이 같은 인물(모르핀 중독자 리디아의 엄마)로 인해, 번번이 무너진다. 처음부터 사랑이 일종의 ‘광기’에서 시작하기도 한다(<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낮에는 멀쩡하다가도 밤마다 40도가 넘는 고열 속에서 낯모르는 이를 찾아 헤매고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런 여인의 사랑 고백을 들으며 처음에는 불쾌하게 여기던 ‘나’는 서서히 그 고백이 진짜라면 얼마나 좋을까 꿈꾸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어차피 사랑은 일종의 ‘광기’이자 ‘격정’, ‘환상’에 도취된 상태가 아닌가 싶어진다.

 이렇듯 오라시오 키로가가 그리는 사랑의 세계는 광기와 욕망이 뒤섞이다가 마침내 죽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다. 그는 왜 이토록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지 못했을까? 작가 이력을 살펴보면 그가 죽음에 집착한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다. 아버지를 비롯해, 의붓아버지, 친구, 누나와 형, 아내까지 비명횡사하고, 1937년에는 오라시오 키로가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키로가 주변에는 죽음이 너무나 짙게 드리워졌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쫓아다니는 작품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사랑도, 욕망도, 광기도 죽음 앞에서는 고개 숙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사랑하고 욕망하고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멘수들>의 두 노동자처럼 금세 탕진하고 말 것을 알면서도 잠깐의 향락과 즐거움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갖고 싶은 물건을 손에 넣고자 폭우 속 강물에 기꺼이 몸을 던진다(<강에서 나무를 건져올리는 이들>). 살고, 사랑하고, 욕망하고, 꿈꾸고, 죽어가는 인간들. 그러한 삶이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서 환상적이면서 강렬한 언어로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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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개예술가의 초상
딜런 토머스 지음, 이나경 옮김 / 아도니스출판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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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의 작품 제목을 도발적으로 비튼 제목과는 달리 뜻밖에도 너무나 아름다운 한 편의 성장 소설이 펼쳐진다. ‘나’라는 인물을 줄곧 고집하지 않으면서 주변 인물들을 생생히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한 소년이 청년으로 자라는 과정을 놀랍도록 잘 그리고 있다. 시처럼 아름다운 단편 연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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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리카 라스 로마스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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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평 일색이라 기대하고 마셨다. 왜 칭찬이 자자한지 알겠다. 고소하고 깊은 맛. 오렌지향이나 산미는 많이 느껴지지 않는다. 초가을 비오는 날 따뜻하게 내려 마시기 좋은 딱 그런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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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9-12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히 100자 평의 제왕입니다. 크.... 지겨웠던 전 직업의 찬란한 후유증이여! ㅋㅋㅋㅋ

잠자냥 2020-09-12 10:0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직업도 쓸모가 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안 그래도 제 친구들이 제가 쓴 책 리뷰나 100자평 보면 안 읽고 싶던 책도 읽고 싶어진다곸 그 직업으로 계속 쭉 나가지 그랬냐고ㅋㅋㅋㅋㅋㅋㅋㅋ 진심으로 알라딘 엠디 지원해보라는 친구도 있었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9-12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엠디 지원해 보세요 잠자냥 님! 저도 잠자냥 님의 백자평을 좋아하는 1인으로서 격하게 응원합니다. ㅎㅎ
저 어제 커피 또 사가지고 이거 또 왔어요. 제 동생은 오렌지 느껴진다는데 저는 안느껴져요, 오렌지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잠자냥 2020-09-12 13:21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취미는 취미로 남겨야 제맛. 그리고 만일 엠디가 된다면(푸하 누가시켜준대?) 나쁜 책은 나쁘다고 자유롭게 말 못할 거기에..... ㅎㅎㅎㅎ
오렌지요? 동생분이나 조카분 아무래도 후각이 엄청 발달?! 저도 다시 맡아봐야겠어요. 킁킁..

단발머리 2020-09-12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잠자냥님 엠디 지원을 강력 추천합니다! 다시 한 번 진지하게 ㅎㅎ생각해 보세요!! 저한테도 이 커피가 오늘 도착했답니다. 친구가 선물해줘서 첨 먹었는데 알라딘커피 중에서 젤 좋아요^^ 나도 백자평 쓰고 스탬프 받으리~~~

잠자냥 2020-09-12 14:12   좋아요 0 | URL
저는 알라딘의 야인(?) 엠디로 남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커피 정말 무난하게 늘 마실 수 있는 거 같아요~
 
인형의 주인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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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유령이나 귀신, 환상이 빚어낸 공포보다도 더 끔찍하고 무서운 것은 바로 ‘인간‘임을, 나약한 인간 속에 깃든 비뚤어진 정신과 욕망임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총기 사고, 사이코패스, 인종차별, 가정해체 등등 현대 미국 사회의 끔찍한 초상이자 이 세계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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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켄 리우 한국판 오리지널 단편집 1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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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전통, 동양과 서양, 이성과 감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SF. 그리고 그 안에는 늘,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담겨 있다. 언제부터인가 믿고 읽는 켄 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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