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유치하지만 매우 자연스러운 쏜살 문고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박소현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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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인종, 계급 문제를 바라보는 맨스필드의 섬세한 시선. 그 유명한 ‘가든 파티’의 맨스필드의 시작은 이러했구나! 이제껏 흔히 만날 수 없었던 초기작들 위주로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맨스필드 팬을 위한 필수 소장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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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또는 예술이 도구로 쓰이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기지 않을 것이다. 선전선동을 위한 문학이 누군가의 마음을 흔드는 일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친일문학가나 정권 찬양을 노래한 시인에게 아직도 많은 이들이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리라.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저 유럽에서도 나치 독일에 부역한 문인이나 예술가, 철학자들은 그 이유로 사람들의 외면을 받거나 바로 그 전력이 가장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만일 문학이 냉전시대에 어느 한 이데올로기를 수호하고 그 세계를 지키는 데 일조하거나, 또는 반대로 상대 진영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고발하는 역할을 했다면 어떨까? 조지 오웰의 <1984>와 <동물농장>은 파시즘 및 소련의 전체주의 사회를 풍자, 고발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그 조지 오웰이 영국 외무부 정보조사부(IRD)와 모종의 관계가 있었으며 임종 당시 IRD에 공산주의 동조자 명단을 정부에 넘겨주었다면? 그리고 그 대가로 IRD는 <동물농장>을 여러 나라 언어로 출간될 수 있도록 돕고, <1984>를 위해서도 온갖 좋은 일을 해주었다면? 이런 사실을 알고도 오웰에 대한 감정이 예전과 똑같을 수 있을까? 실제로 오웰은 찰리 채플린, E.H. 카, 역사학자 아이작 도이처를 비롯한 38명을 ‘서방을 위한 선전자(propagandists)로 신뢰할 수 없는 인물’로 지명해서 넘겨주었다.

오웰뿐만이 아니다. 프랜시스 스토너 손더스의 <문화적 냉전 : CIA와 지식인들>에 따르면 조지 오웰을 비롯해, 이사야 벌린, 레몽 아롱, 버트런드 러셀 등 우리가 익히 아는, 세계 지성을 이끌었던 인물들의 이름이 여럿 등장한다. 미국은 냉전을 확산하고 연장하기 위해 지식인들을 동원하고 이용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미국적 가치를 확산하기 위해 반공 성향의 지식인들을 내세운다. ‘세계문화자유회의’ 같은 선전선동 프로그램을 수행하기 위한 민간단체를 만들었고, 이 단체는 세계 35개국에 지부를 두고 <인카운터>를 비롯한 수많은 잡지를 발행했다. 이언 매큐언의 <스위트 투스>에도 이런 내용이 언급된다. 인카운터는 CIA 자금으로 운영되었으며, CIA는 1940년대 말부터 그들이 지식층 문화라고 여기는 것을 후원해 왔다고. 대부분은 한 발 물러서서 ‘다양한 재단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그들의 목적은 중도 좌파 유럽 지식인들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도록 꾀어내고 자유세계를 옹호하는 것이 지적으로 높이 평가되도록 만드는 것’(<스위트 투스>, 157쪽)이다.

<스위트 투스>는 바로 이 시기, 1970년대 초 영국 보안정보국 MI5을 배경으로 삼는다. 아름다운 외모의 ‘세리나 프룸’은 케임브리지대학 수학과 졸업을 앞두고 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그녀가 수학과에 진학한 것은 모두 어머니 때문이다. ‘페미니스트의 작고 단단한 씨앗을 깊숙이 간직한 어머니’는 세리나가 케임브리지대학에 가서 수학을 공부하는 것이 ‘여성으로서의 의무’라고 말한다. 문학이 아닌, 과학이나 공학이나 경제 분야에서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통 이 분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세리나는 학교 다니는 내내 문학, 그것도 온갖 종류의 소설 읽기에 푹 빠진다. 당연히 전공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다. 그런데 이런 세리나에게 운명처럼 한 남자가 나타난다. 전(前) 보안정보국 요원이자 케임브리지대학 역사학 교수 ‘토니 캐닝’- 캐닝은 세리나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가능성을 알아본다. 두 사람은 곧 연인 사이가 되는데, 토니는 세리나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심어주고 마치 선물이라도 주듯 보안정보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세리나는 토니로부터 배운 온갖 지식을 동원해 훌륭히 면접을 치르고 입사에 성공한다.

제아무리 케임브리지를 졸업해도 여성인 세리나는 요원으로 일할 수 없다. 1970년대 영국은 남녀차별이 심해 정보국에 들어간 여성들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그저 사무 보조원으로 만족해야 했다. 세리나 또한 사무직 말단으로 몇 달을 보내며 희망 없는 상대와의 연애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던 중, 드디어 그녀에게  임무다운 임무가 주어진다. 암호명 ‘스위트 투스’- 이 작전은 지식인들을 후원함으로써 그들이 서방 자유세계를 옹호하는 입장을 대중에게 널리 퍼뜨리도록 은밀히 조종하는 것이다. 작가를 포섭하기 위해 "현대의 저술, 그러니까 문학, 소설에 훤한" 세리나가 적격이라고 판단된 것이다. 세리나는 ‘세계 곳곳에서 예술의 탁월성과 표현의 자유’를 증진하는 ‘자유국제재단 소속’으로 위장하고 이제 막 데뷔한, 장래가 촉망되는 소설가 ‘톰 헤일리’를 찾아간다. <스위트 투스>의 진짜 재미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세리나는 톰을 만나러 가기 전부터 그에게 흥미를 느낀다. 자신이 담당할 작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의 단편들을 섭렵하는데, 읽을수록 이 남자가 궁금해진다. 자기 멋대로 그에 관한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실제로 만났을 때 톰의 외모는 세리나의 상상과 달라 뜻밖이지만 그래도 매력적이다. 게다가 톰 헤일리도 세리나의 미모에 반했는지 첫날부터 은근히 작업을 건다. 톰은 자유국제재단에서 자기를 콕 집어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의아해하고, 반신반의하지만 조건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소설만 쓰고 싶은데, 먹고 살아가기 위한 직업을 가져야 하고, 직업을 가지면 소설 쓰기는 어려워질 것이라는 딜레마에 빠졌던 그에게 이런 재단의 전폭적인 후원은 너무나 달콤하게 느껴진다. 그들을 위해 자신이 뭔가 특별히 해야 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톰은 세리나가 국가 정보부에서 왔는지 전혀 모르니까). 게다가 자기 담당자인 세리나도 꽤 매력적이고……. 거절할 이유가 없던 그는 덥석 이 제안을 물고, 재단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이 아름다운 여자를 연인으로 얻어 소설 창작에 몰두하는 꿈같은 나날을 보낸다. 그것이 자신에게 덫으로 돌아올 줄은 전혀 모르는 채.

이렇게만 적어놓으니 <스위트 투스>는 단순한 첩보 스릴러 같지만, 사실 문학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광이라고 부를 만한 세리나가 바로 그 문학에 대한 탐닉 때문에 보안요원이 되고, 또 그로 인해 평생의 사랑이나 마찬가지인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세리나의 첫사랑인 토니도 문학 때문에 만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리나가 톰과 사랑에 빠지면서 두 사람은 서로 소소한 견해 차이는 있지만 늘 문학과 관련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 작가가 좋아, 저 작가가 더 좋아, 이 작품 읽어 봤어?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독서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어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것이다. 심지어 세리나는 톰의 새 작품을 가장 먼저 읽고 평해주는 충실한 독자이자 때로는 편집자 역할도 해준다. 톰의 작품을 읽고 그를 이해하고 알게 되면서 점점 더 그를 너무나도 사랑하게 되는 세리나.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까봐, 아니 진실을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사실 이 책 맨 앞부분에 사랑에도, 임무에도 실패했다고 쓰여 있기 때문에 세리나와 톰의 사랑이 파국을 맞는다는 것, 그러고 나서 회한에 차서 그 모든 일을 세리나가 기록하고 있음을 독자는 알고 시작한다.

그러나 이언 매큐언은 그렇게 쉽게 독자가 바라는 대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지는 않는다. 세리나의 첫사랑인 토니의 숨겨진 비밀, 톰과 세리나의 사랑이 어떻게 될지 등등 독자의 예상을 살짝 비껴나가면서 참으로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빚어낸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너무나 쉽게 사랑에 빠지고, ‘페미니스트의 작고 단단한 씨앗을 깊숙이 간직한 어머니’와 달리 토니와 톰, 또 그 밖의 남자들의 말에 너무 쉽게 휘둘리는 세리나라는 캐릭터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하고, 여자가 정말 이렇게 생각한다고? 아닐 거 같은데, 이언 매큐언 당신이 좀 잘못 아는 거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종종 있는데, 이 작품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그 모든 의구심이 풀리면서 아, 하고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맨 앞 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마 이 작품을 읽는 모든 이들이 그러할 것이다. 작품을 읽는 내내 앞서 언급한 <문화적 냉전 : CIA와 지식인들>이 떠올랐는데, 아니나다를까 이언 매큐언은 이 책 끝부분에서 손더스의 이름과 함께 바로 이 책을 언급하면서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 매큐언의 <스위트 투스>를 통해 얼핏 접했지만 부드러운 냉전 시대, 지식인들이 어떻게 프로파간다 도구로 쓰였는지 더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문학이라는 한 세계를 빚어내지만, 그 문학이 도구로 쓰일 때는 그 도구를 쓰는 이들이 원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 냉전은 끝났지만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문학과 예술은 그렇게 이용되고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스위트 투스>는 작품 안팎으로 무척 흥미로운 질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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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1-05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건 또 뭡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문학과 첩보요원이라니... 와. 너무 흥미진진하네요!! 당장 읽고 싶어요!! >.<

잠자냥 2020-11-05 15:46   좋아요 0 | URL
이거 정말 재미났어요. 제가 이언 매큐언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도 이건 참 재미났습니다. ㅎㅎ

잠자냥 2020-11-05 15:48   좋아요 0 | URL
그리고 이거... 섹스 묘사하는 부분 많아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11-05 16:13   좋아요 0 | URL
저는 이언 매큐언 몇 권 읽었는데, 칠드런 액트가 참 좋았어요.

아니, 뭐라고요? 섹스 묘사하는 부분 많다고요?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거에요? 왜죠? 영문을 모르겠네요?

=3=3=3=3=3=3=3=3=3=3=3=3=3=3=3

단발머리 2020-11-05 16:13   좋아요 0 | URL
이것은!! 볼드체로 알려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다다다다다다다닥!!

잠자냥 2020-11-05 16:18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좋아하실 거 같아서.............. 좋아하실 거면서 ㅋㅋㅋㅋㅋㅋ(아니 다락방 님은 이거 읽으시고 별로 많지도 않은데? 이럴지도 ㅋㅋㅋㅋ)

다락방 2020-11-05 16:20   좋아요 1 | URL
도대체 저를 어떤 인간으로 보고 계신거에요? 네?

아무튼 살건데요, 야한 거 많이 나온다 그래서 사는거 아니에요. 그건 꼭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흥!!

단발머리 2020-11-05 16:24   좋아요 0 | URL
제가 사실 이언 매큐언을 좀 좋아하지 않습니까? 속죄도 좋았고 칠드런 액트도 좋지 않았습니까? 그런 의미로다가 이 책도 1독 해야겠군요! 에헴!!!

다락방 2020-11-05 16:32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도 이언 매큐언 좋아서 사는거 저 다 알아요. 야한 거 때문에 끌린 건 아니잖아요. 저처럼... 그쵸?

단발머리 2020-11-05 16:45   좋아요 0 | URL
암요암요! 딱 그거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0-11-05 19:32   좋아요 1 | URL
요즘 알라딘에서 식스(...)하면 syo지!!
난 야한 거 많이 나오는 이언 매큐언 좋다고 당당하게 밝히고,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 쓸데없이 당당한가

다락방 2020-11-05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 연말결산 댓글 1위 누구에요? 저 아니에요?

단발머리 2020-11-05 16:44   좋아요 0 | URL
저는 아니지요?!?🙄

다락방 2020-11-05 16:47   좋아요 0 | URL
갑분1위쟁탈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11-05 16:49   좋아요 0 | URL
겁나 치열해서 이러다가 싸움 날 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11-05 16:56   좋아요 0 | URL
압도적으로 다락방 님이 1위이십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11-05 16:56   좋아요 0 | URL
그 다음은......... 다락방 님 절반에 해당하는 댓글로 폴스타프 님입니다.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11-05 17:16   좋아요 1 | URL
전 뭘해도 압도적이란 말예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포스트잇 2020-11-05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오웰에서 진심 놀랬습니다. 저는,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까지 겨우겨우 읽었고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에서도 통 재미가 없어서 그만뒀는데 뒤에 뭔 얘기가 있길래 좋다고 이 난리신지... 다시 읽어야 하는건지..
영화 <식스센스>도 초반에 너무 재미없어서 나가려다 반전에 뒤통수 맞았던 적이 있어서 또 그 경험을 하는건가 싶네요.
.......

잠자냥 2020-11-05 23:56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러셨군요! 그런데 이 책은 진짜 끝까지 보셔야 해요...!
 
스위트 투스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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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도구로 쓰였던, 부드러운 냉전 시대의 이야기. 그러나 결국에는 문학 창작에 관한, 그리고 회한 어린 사랑에 관한 이야기.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절로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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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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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토카르추크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방랑자들><태고의 시간들>을 읽고 난 후, 이 작가는 참 독특한 글쓰기를 하는구나 싶었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소설과는 조금 다르다고나 할까. 이번에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를 읽으니,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해진다. 다음에는 어떤 소재와 주제, 어떤 독특한 형식으로 작품을 내놓을까 사뭇 기대가 되기도 한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스릴러, 그것도 추리 소설형식을 띠고 있다. 작품이 시작하자마자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살인이 잇달아 일어난다. 어떤 죽음은 영문조차 알 수 없지만, 또 어떤 죽음은 유혈이 낭자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다. 살해당한 이들은 모두 어떤 특수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을 읽을 이들을 위해 그 공통점을 자세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은 살해당한 이들이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 과연 범인은 누구인지 추적해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살인도 여러 차례이고, 범인도 쉽게 잡으려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야기는 자꾸만 샛길로 빠져나간다. 매 장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것도 독특한데, 단지 블레이크의 시로 문을 여는 것만이 아니라 작중 인물들이 즐겨 블레이크의 시를 읊는다. 그중에는 블레이크의 시를 번역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이도 있다. 오랫동안 교사로 근무하다가 이제는 폴란드 외딴 고원에서 별장 관리인으로 일하는 육십대 여성 두셰이코 야니나와 그의 옛 제자 디오니시오스가 블레이크의 시를 즐겨 읽는 이들이다. 사실 이 작품의 제목인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도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작 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서 <지옥의 격언>에 등장하는 구절이라고 한다. 두셰이코와 디오니시오스, 아니 작가는 하필이면 왜 윌리엄 블레이크 시를 계속 읊조리는 것일까? 더욱이 이 책 안에는 여러 개의 삽화가 들어있다. 뭔가 투박한 느낌이 판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판화 느낌이 나는 그림을 삽입한 까닭도 알고 보니 윌리엄 블레이크와 관련이 있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하나의 스릴러 작품으로 봤을 때는 크게 흥미진진하지는 않다. 전통 추리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그 결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뛰어난 탐정이나 수사관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살해당한 이들의 공통점은 누가 봐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 데다가 주인공 노년 여성은 점성학에 빠져서 무슨 말만 하면 별자리 운운, 점성학을 들이대며 헛소리 같은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는다. 그러면서도 동물을 끔찍하게도 아끼는 사람이라, 동물과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장 연설을 종종 늘어놓는데, 그이의 장광설을 듣다 보면 아, 내가 지금 추리 소설 읽는 게 아니었던가? 때때로 잠시 현타가 밀려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의 재미는, 알고 보니 텍스트 밖에 있었다. 애초부터 윌리엄 블레이크의 생애를 내가 잘 알았더라면, 이 책을 읽는 재미가 한결 컸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옮긴이의 후기에 따르자면 블레이크는 시인이자 급진적인 사상가로,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물질적 타락을 개탄한 아나키스트이기도 했다. 그는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 시대에 맞서 고독하게 동판화를 새기며(!)’ 시를 썼고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생태주의 예술가로 불리기도 한다. 판화를 연상시키는 이 책 속 간결한 그림체는 결국 생계를 위해 판각사로 일했던 윌리엄 블레이크, 대량 생산 시대에 맞서 자신의 시를 동판화에 새기던 그의 삶과 겹치는 것이다. 제목을 비롯한 각 장 도입부에 인용된 블레이크의 시도 결국은 두셰이코, 디오니시오스 등 이 작품의 소외된 이들의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작품에서 내내 윌리엄 블레이크를 불러온 까닭은 바로 그 반 문명, 생태주의적인 가치관을 이 작품에 담고 싶어서였으리라.

 

우리 네 사람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보았다. 마치 우리가 공통점이 아주 많은 것처럼. 그리고 한 가족인 것처럼. 나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임을 깨달았다. 본질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으며, 필요한 물건이나 식량을 만들어 내지도 않고, 땅을 경작하지도 않고, 경제 활성화에 보탬이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자손을 번성시킨 것도 아니다. 지금껏 우리는 세상에 유용한 뭔가를 제공한 적이 없다. 우리에게는 권려도 없고 보잘것없는 재산 말고는 다른 자원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고 있지만 남들은 그것을 조금도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라진대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마 아무도 그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왜 우리는 꼭 유용한 존재여야만 하는가. 대체 누군가에게, 또 무엇에게 유용해야 하는가? 세상을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누는 것은 과연 누구의 생각이며, 대체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는가? (.....) 구멍이 많고 휘어진 거목은 사람에게 베이지 않고 수세기 동안 살아남는다. 왜냐하면 그 나무로는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보기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유용한 것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이익은 누구나 알지만, 쓸모없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339~340)

 

두셰이코와 디오니시오스를 비롯해 이웃인 괴짜’, 중고 옷가게 점원 기쁜 소식등 두셰이코와 가깝게 지내는 이들은 모두 사회 주변부 인물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른바 쓸모 있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눈으로 보자면 낙오자라고 낙인이 찍히고도 남을 이들이다. 그에 비해 살해당한 자들은 저마다 사회에서 모두 한자리씩 차지한 기득권층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말과 행동은 옹호되고 정당화되어 아무렇지 않게 사회의 주요 가치관으로 소비된다. 그러나 거기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은 이상한, 비정상적인 사람 취급을 받는다. 두셰이코처럼 가진 것도 없고, 이제는 변변한 직업도 없는 노년 여성이 주장하는 말이라 그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노망난 늙은이의 헛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실은 지금 누구나가 귀 기울여 마땅한 이야기가 아닌가. 오히려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관례라는 이름 아래, 사회 통념이라는 이름 아래 묵인되고 장려되어 온 기존의 가치관들이 사회를, 자연과 동물을 병들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멈추고, 더 나아가 그 목소리를 내는 입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 이 작품은 이렇게 성장과 반 성장, 문명과 반 문명, 인간과 자연(동물을 포함한)의 대결 구도를 통해 지금 세계가 나아가는 길이 과연 이대로 괜찮은지, 계속 그렇게 해도 온당한지 질문한다.

 

동물을 보면 그 나라가 어떤지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동물을 대하는 태도 말입니다. 사람들이 동물에게 잔인하게 군다면 민주주의나 그 어떤 시스템도 소용이 없습니다.” (148)

 

첫 번째로 살해당한 왕발은 사냥감을 유인하는 몰이꾼이다. 그는 목에 사슴 뼈가 걸려 질식해 죽었다. 그 모습을 본 두셰이코는 동물들이 사냥꾼에게 복수하는 것이라고, 인간을 향한 동물들의 복수가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이의 이런 주장은 정신 나간 과격한 동물보호가가 지껄이는 헛소리로 취급당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어쩐지 정말 동물들이 복수를 시작한 것은 아닐까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작품 속 누군가의 말처럼 어쩌면 기후 변화로 인해 동물들이 공격적으로 돌변한 것일 수도있으며 그래서 그들이 이제 모든 것에 대해 복수를 시작한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코로나19 바이러스도 달리 보자면 동물, 자연의 복수가 아니겠는가. 오늘날의 세계 상황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작품 속 이런 주장이 결코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낯선 전개만큼이나 작품의 결말 또한 조금 충격적이다. 이렇게 끝나면 안될 것 같은, 어쩐지 정의롭지 못하다는, 불편한 느낌이 자꾸만 고개를 든다. 그러나 이 지구의 기득권층 자체가 정의롭지 못하다면, 그래서 지구 자체가 정의롭지못한 시스템을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작품의 이런 결말은 차라리 온당한 게 아닌가 싶어지기도 한다. 죽은 목숨도 여럿 있고 범죄의 진상도 낱낱이 밝혀지지만 왠지 속 시원하지 않은 느낌. 머릿속에 해결되지 않은 질문은 여전히 남는 느낌. 아마 그런 질문들을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 세계에, 그리고 독자에게 던지고 싶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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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룬디 뭉카제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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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부룬디 커피. 첫 인상이 좋다. 깊고 진한데 끝맛은 아주 깔끔하다. 약하지만 입속에 오래 머무는 감귤향도 산뜻. 첫눈 오는 날 창 밖을 보면서 마시면 딱 좋을 그런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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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1-03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른 마셔보고 싶어요!
어제 여동생은 마셔보고 산미랑 고소함이 느껴지고 커피 거품도 짱이라고 하던데, 저는.. 월급날까지 참았다 사려고요. 후훗.
가난한 영혼입니다..

잠자냥 2020-11-03 10:24   좋아요 0 | URL
부룬디 커피는 처음이라 저도 설레며 사봤어요. 커피 거품은 역시 짱입니다. ㅎㅎ
가난한 영혼이지만 책 살 때만큼은 알부자인 다락방 님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11-03 10:37   좋아요 0 | URL
저 요즘 밀가루 살 때 재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11-03 10:43   좋아요 0 | URL
아, 맞다. 요즘 다락방 님이 밀가루업계 살려먹이고 계시짘ㅋㅋㅋㅋㅋㅋㅋ 치아바타 여왕님 ㅋㅋㅋ

coolcat329 2020-11-05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커피는 이상하게 끌리네요...

잠자냥 2020-11-05 14:37   좋아요 0 | URL
드셔보셨어요? 맛도 향도 괜찮아요~~

coolcat329 2020-11-05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뇨. 구입하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