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꼭 걷는다. 30분 남짓.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엎어져서 자거나 스마트 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했는데, 허리가 안 좋아지면서 그 시간엔 걷기 시작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춥든 덥든 걷는다. 그러다 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 회사는 코로나 이전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찾던 동네에 있다. 호텔도 많고 그 호텔 앞마다 공항버스 정류장이 촘촘하게 새워져 있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로는 그 호텔들도 하나둘 사라지거나 생활치료 센터와 같이 변경된 용도로 쓰이더니, 정류장도 방치된 채 제 기능을 잃어버렸다. 아니, 그 또한 다른 기능이 생겼다고나 해야 할까.

공항버스 버스정류장에는 지붕도 있고 기다란 벤치도 있다. 어느 날이었나, 점심때 산책을 하는 중에 어디선가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날아와 주위를 둘러봤다. 그 버스정류장에는 노숙자가 잠을 자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때가 잔뜩 낀 커다란 짐 보따리가 있었고 마시고 버린 빈 술병, 맥주 페트병이 뒹굴고 있었다. 누군가는 여행의 기쁨으로 들떠서 거쳐 갈 공항 버스정류장, 여행이 멈춰버린 후로는 어느 노숙인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 이후로 점심때마다 그곳을 지날 때면 그를 보게 되었는데, 그는 늘 미동도 하지 않고 그렇게 거기 있었다. 내가 그를 보는 시간은 오후 1시에서 2시 그 사이이므로, 그가 다른 시간에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는 그 시간엔 항상, 어딘가로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이 삶이라는 현실에 발목이 붙잡힌 모습으로 그렇게 늘 그 자리에 묶여 있었다.

덥수룩한 머리에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어서 그의 성별도 가늠할 수 없었는데, 어느 날 나는 그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를 발견한 이후로는 이상하게도 회사 근처에서 그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아니 내가 보지 못했던 노숙자들의 모습이 속속 눈에 들어왔고, 참 이상하게도 남자보다는 여성 노숙자가 더 많았다. 그들은 대개 자기가 정한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는데, 버스정류장의 그 사람처럼 옆에 술병을 놓아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빈 컵라면 용기를 내려놓고 멍하니, 정말로 그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멍한 시선으로 그저 먼 곳을 응시하는 이도 있었다. 밤에는 자기 안전을 지키려고 내내 걷거나 깨어 있고 낮 동안 그렇게 도심 속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잠들기 때문인지 그들의 얼굴은 검게 그을렸다. 씻지 못해서 뿐만이 아니라 오랜 길 생활로 검게 탄 것이다. 그들을 보고 나면 이 안온한 삶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들도 지금의 내 나이에는 삶이 그렇게 가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래전, 안국동 근처 서머셋 팰리스 1층에 스타벅스가 있던 시절, 그곳에 자주 가곤 했다. 광화문 교보에서 책을 사고 들러서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다 오기 좋은 그런 장소였다. 그때, 그날도 책을 읽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풍겨오는 악취에 고개를 들었던 것 같다. 그날 나는 참 묘한 광경을 보았다. 노숙자임이 틀림없는, 하얗게 머리가 센 할머니가 커피를 사서는 창가에 앉아 영자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좋지 않은 냄새가 나니까 점원들도 난감했을 터인데 돈을 내고 커피를 사니까 거부할 수도 없어서 주문을 받았고, 그 할머니는 당당하게 자리에 앉아 신문을, 그것도 영자신문을 읽고 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최고구나, 하는 생각부터 커피를 마실 돈이 있으면 배를 채우시지 하는 생각, 정말 저 영자신문을 읽는 것일까 하는 생각까지…….

그 이후로도 나는 그 할머니를 그 근처, 종로 또는 광화문 스타벅스에서 종종 만났다. 그때마다 그는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거나 책을 읽거나 뭔가를 쓰거나 했다. 노숙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길에서 생활하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내 주변에 나 말고도 이 할머니를 본 사람들이 있었다. 친구 중 누군가도 그랬고, 지금의 내 연인도 이 할머니를 직접 본 일이 있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는 ‘맥도날드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꽤 유명한, 심지어 방송에도 나온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로서는 꽤 고등교육을 받았고, 외무부에서 근무한 적도 있는 여성이었다. 인천공항에도 유명한 노숙인 할머니가 있다. 나는 공항에서도 직접 그를 본 적 있고, 그가 종종 공항철도를 타고 “공짜로 영화 보러” 간다던 상암동의 한국영상자료원에서도 본 적이 있다. 그 또한 유명한 대학을 나왔고, 몇 개 국어가 가능해 외국인과 대화를 즐기는 여성이었다.  

그들이 젊었던 시절에는 자신들이 탄 삶이라는 버스가 어디로 자신을 이끌지 알 수 없었겠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도 24시간 오픈하는 맥도날드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밤을 지새우거나, 24시간 불이 켜진 공항을 떠돌며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는, 떠날 곳이 없는 그런 노년을 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꿈꾸지도 않았을 것이다. 삶은 무섭다. 대학 교육 이상을 받았고 지금 이렇게 시원한 곳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글을 끼적이고, 오늘도 점심때면 새하얀 얼굴로 그 검게 그을린 얼굴을 또 지나칠 테지만 혼자 살아갈 것이 틀림없는 내 앞날 또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정류장에서 어디로도 떠날 수 없고 떠날 곳도 없는 그처럼 인생의 덫에 붙잡힐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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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6-24 11: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맥도날드 할머니 저도 방송으로 본 기억이 있어요! 고학력에 그리 된것도 들여다보면 각자 또 사연이 있어서...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란 말이 맞네요.😔

잠자냥 2021-06-24 11:18   좋아요 6 | URL
전 나이 들수록 문득 그 할머니 생각이 나서 그 할머니가 방송 출연한 것도 몇 년 전에야 알았어요. 2013년인가 돌아가셨더라고요.

오늘 다락방 님 페이퍼 읽다 보니 덴마크였다면 그분이 그렇게 돌아가시진 않았을 것 같기도 하네요;;;

다락방 2021-06-24 11:18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바로 그 지점에서 미래가 불안하기도 한 것 같아요.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란 만화에 보면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이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오잖아요. 바로 그 이유로 저는 제 삶에 대한 기대가 크기도 하거든요. 앞으로 내 삶은 어떻게 진행될까, 누구를 만나고 어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까.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긍정적이기만 한 건 아닐텐데,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어‘ 라는 말은 좋은 의미로도 그리고 완전히 반대의 의미로도 쓰일 수 있겠지요. 제가 스스로 노력한다고 해도 세상의 어떤 일들이 저를 후려쳐서 넘어뜨릴지 모르잖아요.

점심후의 산책은 저도 요즘 계속 하다가 족저근막염 때문에 쉬고 있어요. 족저근막염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알지도 못했는데, 제가 그걸 앓고 있습니다. 인생 뭘까요..

잠자냥 2021-06-24 11:22   좋아요 6 | URL
그러게요. 이 글 쓰고 나서 다락방 님 페이퍼 보러 갔는데, 덴마크가 정말 더 여러 의미로 천국처럼 느껴지네요. 싱글 여성들이 노년에도 불안하지 않을 나라라고나 할까... 휴 :(

족저근막염 저도 지금 검색해 봤어요. 아이코야 통증도 그렇고 답답하겠어요. 얼른 낫기를!

레삭매냐 2021-06-24 11:4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어려서는 마냥 그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나이가 드니
참...

어쩌니 저쩌니 해도 자본주의
쏘사이어티에서는 돈이 쵝오지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아 참, 스타벅스에서는 음료 주문
하지 않아도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다고 하네요. 전세계 공통 룰이
라고 하네요.

잠자냥 2021-06-24 12:11   좋아요 5 | URL
그러게요, 젊음이 좋은 건 마냥 그렇게 시간을 보내도 된다는 게 아닐까 싶네요.
스타벅스에선 그렇군요. 그럼에도 그 할머니는 커피를 참 좋아하셨나 봅니다.

새파랑 2021-06-24 12: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산책을 하다가 많은걸 떠올리셨군요. 미래는 알수 없는게 맞는거 같아요 ㅜㅜ 근데 잠자냥님 점심먹고 30분을 산책하시는게 놀랍네요. 왠지 책 읽으실거 같은데...언제 그렇게 많은 책을 읽으시는지!

잠자냥 2021-06-24 12:31   좋아요 5 | URL
점심때라도 눈 쉬게 하려고요. ㅎㅎ 저녁때도 30분 이상은 산책합니다.
그러게요 책은 언제 읽을까요? 꿈에서? ㅎㅎㅎ
그나저나 새파랑 님이야말로 정말 책 많이, 빨리 읽으시잖아요!

새파랑 2021-06-24 12:36   좋아요 5 | URL
다른분도 아닌 잠자냥님이 저보고 많이 읽는다고 하시는건 좀 ㅎㅎ 하긴 그동안 읽으신 책이 엄청나게 많으실거 같아요 👍
전 점심때 읽어요. 걷는건 저녁에만 ^^

coolcat329 2021-06-24 13:23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글 읽으며 이 분 맥도날드 할머닌데 했는데 역시 그 분이었군요.
젊음이 좋은건 시간을 마냥 보내도 되기때문이라는 말 정말 동감입니다.
저는 제 삶이 너무 평탄하면 정말 불안감을 느낍니다. 이런 평안이 오래갈 수가 없을거라는 생각에요. 반대로 안좋은 일이 생기면 이게 삶이고 미래도 이런식으로 다가오겠지라는 생각에 또 불안해지고요. 이러나 저러나 현대인은 불안감을 지니고 살 수밖에 없나봅니다.

근데 잠자냥님 게임하시는게 또 의외네요. 책 읽으실거같은데요 ㅎㅎ

잠자냥 2021-06-24 14:21   좋아요 5 | URL
맥도날드 할머니 역시 유명한 분이었군요. 이 서재에서도 많이들 알고 계시네요.
불안이 영혼을 좀먹는다고 하지만 불안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어요.

게임..; 네 아주 구닥다리 게임을 수 년... 거의 10년 넘게 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을 다 합하면 책 한 권은 쓰고도 남았을 거예요;; ㅋㅋㅋ 어제도 <수영장 도서관> 읽다가 12시에 책 덮고 1시간이나 게임하다 잤어요;

<수영장 도서관> 너무 진도가 안 나가요; 너무 야해서 -_-

독서괭 2021-06-24 15:08   좋아요 3 | URL
오.. 저도 잠자냥님 게임하시는 게 참 의외네요. 회사도 다니고 책도 많이 읽고 리뷰도 페이퍼도 많이 쓰시는데.. 다락방님에 이어 잠자냥님의 하루도 24시간이 아닌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됩니다 ㅋㅋ / 근데 너무 야해서 진도가 안 나가는 건 무엇이죠??

다락방 2021-06-24 15:30   좋아요 2 | URL
수영장 도서관 관심 1도 없었는데 진도가 안나갈 정도로 야하다고요?? @.@

잠자냥 2021-06-24 15:42   좋아요 3 | URL
이렇게 낚일 분들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요-

네, 너어어어무 야해요. 그런데 여러분, <수영장 도서관>에 여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습니다. 아, 주인공 누나가 잠깐 전화 통화하는 걸로만 나와요.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약 250쪽 돌파). 게이 섹스가 너무 적나라해서 자꾸 현타가 옵니다. 내가 왜 이걸 읽는 것일까... 언제까지 이러기만 할 것이냐? 좀만 더 읽으면 다른 거 나올 거지? 이런 심정으로 읽고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ㅠ_ㅠ

독서괭 2021-06-24 16:01   좋아요 2 | URL
어엇 그렇군요. 전 지금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읽고 있는데 요것도 좀 야한 퀴어소설인데 이보다 훨씬 적나라한가 봅니다.

잠자냥 2021-06-24 16:06   좋아요 3 | URL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전 영화로만 봤는데요, 책은 어떨지 모르지만 암튼 그 영화하고 <수영장 도서관>을 비교하자면, <콜 미..>는 그냥 초딩 관람가입니다.... ;

Falstaff 2021-06-24 16:08   좋아요 4 | URL
아휴.... 사 놓았는데.
게이 섹스는 일종의 선이 있는 거 같아요. 그걸 넘으면 좀 피곤합니다. <아름다움의 선>에서도 가끔 가다가 그어놓은 줄을 넘어가 불편하고는 했는데, 에효.....
넘 야해서 진도 안 나가는 거... 너무 야해서 과하게 불편해지는 현상이라고 이해하겠습니다. ㅠㅠ

잠자냥 2021-06-24 16:19   좋아요 4 | URL
네, 폴스타프 님 말씀처럼 일종의 선이 있는데.... (제 기준은 그리고 그 선에 대해 나름 넓다고 생각하는데도..) 이 소설은 좀 그 선을 지나치게 넘어서 정신적으로 좀 피곤하네요. 괴로워서 진도를 팍팍 못 나가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선>은 이거에 비하면 양반 수준... <수영장 도서관>이 작가 데뷔작이라 센세이션 일으키고 싶었나 보다 뭐 그런 생각도 듭니다.

다락방 2021-06-24 16:25   좋아요 4 | URL
아 저는 역시 수영장 도서관 패쓰하겠습니다.
저 김봉곤 단편 읽다가도 너무 섹스얘기만 나와서 이사람은 사랑이 그냥 섹스인가? 이 생각 했어가지고, 으, 그 피로함 싫습니다. 저는 패쓰.

coolcat329 2021-06-24 19:00   좋아요 2 | URL
저는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도 조금 충격이었는데, 이건 굉장하군요. <아름다움의 선>도 표지가 좀 부담스럽더라구요.
그래도 고수님들 리뷰는 기대됩니다.🤭

잠자냥 2021-06-25 09:29   좋아요 1 | URL
박상영이나 김봉곤의 작품은 안 읽어봐서 제가 비교하기는 뭐하지만, <수영장 도서관>이 아마 훨씬 더 할 겁니다. 저도 이 책 읽다 보니까 게이들의 사랑은 결국 섹스인가? 이런 편견이 생길 지경입니다;;; ㅎㅎㅎ 암튼 이제 책이 뭔가 의미가 있을 법한 부분에 접어들었으니 리뷰는 꼭 남기겠습니다.

독서괭 2021-06-24 15: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 많이 읽기 위해서라도 운동 열심히 해야 합니다ㅠㅠ 저도 달리기 시작했어요. 노년의 삶이 어찌될 지 정말로 예측할 수 없네요. 한치 앞도 모르는데...

잠자냥 2021-06-24 15:42   좋아요 3 | URL
맞아요. 책 읽는 것도 그리고 뭔가 이렇게 기록하고 남기는 것도 건강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달리기 라이프 응원합니다!

mini74 2021-06-24 19: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들면서 이런 글을 읽으면 예전과 다르게 느껴지는게 있어요. 남일같지 않다 ㅎㅎ 나이가 들수록 소박하게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는 삶에는 참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돼요. 돈도 중요하지만 건강, 그리고 삶이 허무해지는 순간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정신력 ㅎㅎ

잠자냥 2021-06-25 09:31   좋아요 1 | URL
맞아요. 나이 들수록 소박하게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도 참 많은 것이 필요하단 생각, 저도 정말 격하게 공감합니다. 건강+돈+정신력! 대공감입니다.

공쟝쟝 2021-06-24 19: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까닭은 모르겠지만 저는 이 글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각자들이 겪어내는 삶이라는 게 있겠지요. 인생이 쳐놓는 덫들을 하나하나 제거해왔다고 생각했는 데 그 자체가 덫이었을 지도 모르구요.

잠자냥 2021-06-24 23:06   좋아요 1 | URL
아이고 쟝쟝님 *덥석* ㅎㅎㅎ
 

어릴 적에 나는 꽤 모범생이었다. 적어도 초등학생 때까지는 그랬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숙제를 하고, 준비물을 챙겨놓아야만 뭔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마음이 놓였다. 그래봤자 기껏해야 놀거나, 책을 읽거나, 자는 것뿐이었지만 그래도 그래야지만 안심이 됐다. 아마, 초저녁부터 잠이 들어버리기가 일쑤여서 더 미리미리 해둔 건지도 모르겠다. 준비물을 챙기는 그 과정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연필을 깎을 때였다. 샤파, 은색 기차 모양 연필깎이에 연필을 돌려서 그 뾰족한 심들을 나란히 필통에 넣어둘 때가 가장 좋았다.

중고등학교 때, 나는 모범생의 범주를 벗어났고, 그런 ‘경건한’ 순간은 내 일상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회사를 다니면서 다시 그런 순간이, 아니 그와 비슷한 순간이 찾아온 것 같다. 요즘은 저녁마다 커피를 간다. 수동 커피 그라인더에 커피 알갱이를 넣고 커피가 분쇄될 때까지 손잡이를 돌린다. 마치 어릴 적 연필깎이 손잡이를 돌릴 때와 비슷하다. 봄이나 가을, 겨울에는 아침에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뽑아서 텀블러에 담아서 갖고 나가는데, 여름에는 아무래도 뜨거운 커피를 찾지 않게 된다. 그래서 선택한 게 전날 밤에 미리 커피를 내려놓고는, 아침에는 텀블러에 얼음과 커피만 넣어서 출근하는 것이다. 때로는 이 과정이 무척 귀찮아서 그냥 자버리기도 한다. 그런 다음 날은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투 샷이나 내려서 얼음을 넣고 커피를 넣고 이래저래 바쁘게 움직여야만 한다.

엊저녁도 커피 알갱이를 분쇄기에 넣고 열심히 손잡이를 돌렸다. 부엌의 작은 창으로 바깥을 보면서 무심히 커피를 갈다가, 문득 연필깎이 손잡이를 돌리던 때가 떠올랐다. 어릴 때는 연필 몇 자루로 내일을 준비했는데, 이제는 커피를 갈면서 내일을 준비하는구나. 열 살 이전부터 지금까지- 사람은 늘 이렇게 뭔가를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어쩐지 한숨을 폭 내쉬다가 문득 다시 마음을 고쳐먹는다. 아니야, 준비할 게 있는 삶이 얼마나 좋아? 더는 연필을 깎지 않고, 더는 커피콩을 갈지 않아도 되는 삶, 그런 삶이 온다면 또 어쩐지 슬퍼질 것 같았다. 손잡이를 더 열심히 돌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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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6-14 16: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왠지 어릴적에(지금도 그렇고) 완전 모범생에 학구파 이셨을거 같아요. 그리고 커피를 갈면서 저런 생각을 하시는군요. 전 맨날 사먹거나 카누만 타먹어서 ㅜㅜ 반성해봅니다^^

잠자냥 2021-06-14 16:28   좋아요 4 | URL
모범생이었다가 잠시 방황(?)하고 술마시고 놀다가 다시 범생이 라이프로 돌아왔습니다. 범생이라기보다는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삶에서 벗어난 삶이랄까요. ㅎㅎㅎ 커피 갈다 보면 그 반복적인 행위에 멍때릴 때도 많은데 저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ㅎㅎㅎ

다락방 2021-06-14 16:0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아주 어릴적엔 모범생일 수 있어도 청소년기에는 모범생도 아닌 그렇다고 날나리도 아닌 그 어디쯤에 새로운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초등학생(사실은 국민학생) 때는 엄청난 모범생이어서 전교에 소문이 날 정도였지만(대단했어요) 고등학교 시절에는 할리퀸 문고 읽다가 선생님께 걸리는... 그런 아이였지요.. 흠흠.

그렇지만 준비하는 삶, 이라는 잠자냥 님의 페이퍼에는 매우 많이 진심으로 동의하고 공감합니다.
매일에 대해 더는 커피콩을 갈지 않는 삶이 슬프다면, 저는 읽을 책을 준비하지 않는 삶도 슬플것 같아요. 여행이라는 것이 주는 아주 많은 것을 좋아하는데 그중에는 분명 ‘어떤 책을 가져가지?‘ 하고 고민하는 과정 그리고 챙기는 과정도 필수거든요. 세 권 가져갈까 다섯권 가져갈까, 어느 책을 가져갈까 고르는 순간은 정말 너무 짜릿하고 행복하죠.

삶은 그런 작은 준비들로 채워지는 것 같아요.

오늘 페이퍼 너무 좋네요, 잠자냥 님.
:)

잠자냥 2021-06-14 16:34   좋아요 4 | URL
어릴 때부터 책 많이 읽는 친구들이 보통은 얌전한 성향이 있지요. 그래서 어른들은 그걸 범생이라고 착각하는 것도 같고 어린이들은 어른 말 듣고는 아 내가 그런가보다 하는데, 사실 마음속으로는 (특히 문학 같은 책 많이 읽다 보면) 이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삐딱선 타고 싶어지는 시기가 있지요. 저도 그랬던 거 같고요. 그렇다고 해도 대부분은 소심한 성격이라 대놓고 반항은 못하고 은근히 그 어디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노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랬고, 다락방 님도 그랬겠지요.ㅎㅎㅎ

맞아요. 준비할 게 없는 삶은 참 여러 가지로 슬픈 것 같기도 해요. 여행이 즐거운 것도 준비하는 그 과정이 즐겁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읽을 책을 준비하지 않는 삶, 그것도 슬플 것 같아요. 그래서 다부장님(과 저를 비롯해 여기 알라딘 개미지옥 개미들)은 그렇게 읽을 책을 무쟈게 준비하나 봅니다. ㅎㅎㅎ

레삭매냐 2021-06-14 16:2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는 뒤돌아 보면 모범생이었던 적이
1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숙제는 귀찮아서 안하고 그냥 몸으로
때웠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타이어를
받치고 담치기를 하여 야자 시간에
오락실에 가서 스노볼인가 뭔가하는
오락을 했습니다.

그랬던 닝겡이 지금은 꾸역꾸역 책을
열심히 읽고 리뷰질을 하고 있습니다.

뭐 그랬다고 합니다.

잠자냥 2021-06-14 16:40   좋아요 5 | URL
오, 레샥매냐 님이 책 읽는 모습 보고 부모님이 기절하신 거 아닙니까? ㅋㅋㅋ
아니 이 녀석이 이렇게 늦게 철들다니! 이런? ㅋㅋㅋㅋ
스노우볼이 뭐지? 하고 검색해보니... 아아, 이 게임 저도 해봤어요. ㅋㅋㅋㅋ 잘하지는 못함.

페넬로페 2021-06-14 16:5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매일밤 쌀을 씻으며 내일을 준비해요. 그러면서 아이고 또 낼은 무슨 음식을 헤서 먹여야하나 하는 고민을 합니다~~커피콩을 갈면서 하는 잠자냥님의 생각들이 넘 좋네요^^

잠자냥 2021-06-14 17:04   좋아요 4 | URL
아, 쌀씻기! 요즘 코로나 때문에 회사에 도시락 싸갖고 다니다 보니 며칠에 한 번 씻는데도 쌀 씻는 거 정말 귀찮더라고요. =_= 쌀씻기보다는 커피콩 가는 게 덜 귀찮은 거 같아요. ㅎㅎㅎㅎ

mini74 2021-06-14 19: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버지가 퇴근하시고 저녁을 드시고 나면 연필을 가지런히 깎아주셨어요. 연필잡는게 서툴러 자꾸 연필심이 부러져서 하루에 다섯자루에서 여섯자루씩 깎아야 할 연필이 늘어나자. 아버지가 잠자냥님꺼와 같은 연필깎이를 사오셨어요 ㅎㅎㅎ

잠자냥 2021-06-14 22:38   좋아요 2 | URL
ㅎㅎ 그때 초딩들의 가장 인기 있는 연필깎이가 아니었을까요! ㅎㅎ

그레이스 2021-06-14 19: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글들을 너무 잘 쓰셔서...
소재도 다양하고...
^^;

잠자냥 2021-06-14 22:38   좋아요 1 | URL
알라딘 개미지옥에서 이 정도는 보통입죠! ㅎㅎ

단발머리 2021-06-15 08: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연필 깎는 삶도 커피콩 가는 삶도, 잠자냥님 손끌을 거치니 근사한 추억이자 오늘의 기억이네요. 숙제 마치고서야 놀았다는 범생이 생활은 저에겐 좀 멀지만 ㅋㅋㅋㅋㅋ 저도 오늘은 커피를 좀 내려야겠어요. 마침 비도 오고 딱이에요. 알라딘 너무 좋네요. 이런 좋은 글을 공짜로 읽네요 ㅎㅎ

잠자냥 2021-06-15 09:17   좋아요 1 | URL
아이고~ 알라딘 개미지옥의 개미들은 다들 너무 칭찬을 잘해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오늘 날씨 비오니까 커피는 더 맛나겠죠?ㅎㅎ

독서괭 2021-06-15 1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출산 전에는 아침에 출근해서 커피콩을 갈았었는데.. 살며시 올라오는 그 향기. 너무 좋죠? 전 연필깎기는 이용하지 않고 커터칼로 깎는 걸 좋아했어요. 요즘은 서재이웃님들 글 보며 힐링합니다~

잠자냥 2021-06-15 14:37   좋아요 1 | URL
저는 칼로 연핀을 정말 잘 깎는 사람 부러워했어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런 재주가 있는지. 독서괭님도 그런 재주를 갖고 계시군요!

공쟝쟝 2021-06-17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맘 잘 알지만... 잠자냥님께 자동 커피 그라인더를 추천하며... (쿠팡에서 3만원) ... 원두 오도독 가는 거 참 좋아요. 근데... 그라인더 사고 나서 ㅋㅋㅋㅋ 이걸 왜 이제야 샀노.... ㅋㅋㅋ 원두 갈 때 솔직히 좀 손목 팔 아프지 않아용??? ㅋㅋㅋ

잠자냥 2021-06-18 09:5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저도 그거 써봤는데(엄마집에 있음요), 편하긴 합디다. 식구들이 여럿 있을 때 수동으로 갈면 그거 가는 사람은 거의 ㅋㅋㅋㅋㅋㅋㅋ 막판에 알통이 ㅋㅋㅋㅋㅋ 그래서 사람 많을 땐 자동으로 쓰는데요, 저처럼 고작 1~2인용 내리는 사람은 수동으로도 만족합니다요- 난 계속 칼리타 쓰겠소.(왜 계속 희곡 말투냨ㅋㅋㅋㅋㅋ)
 

얼마 전에 작은 오디오를 하나 샀다. 크기는 작지만, 소리가 꽤 훌륭하다는 평을 받는 오디오였다. 반신반의했는데 물건을 받아 시디를 넣고 돌려보니 생각보다 훌륭했다. 기대보다 더 좋았다. 그리고 이 작은 오디오 때문에 삶의 큰 즐거움이 하나 더 생겼다. 나는 좋은 오디오에 대한 욕심이 있다. 지금은 경제 여건상 이 정도 오디오를 살 수 있을 뿐이지만 능력이 된다면 나중에라도 꼭 어마어마한 음질의 오디오를 마련해보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 자동차라든가 집이라든가 이런 것에 쏟는 욕심처럼 나는 오디오에 꼭 그런 욕심이 든다.

그런 오디오를 마련해서 책과 시디로 둘러싸인 방에 오디오를 설치해놓고 책과 음악 나, 이렇게 그 방 안에 머무는 것이다. 어떤 방해도 없이. 고요한 가운데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은 오디오를 타고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악에 그대로 온몸을 맡긴다.... 볼륨을 한없이 올려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그런 곳이라면 더없이 좋다. 생각만으로도 즐겁다. 어떤 책은 음악을 들으면서 함께 읽어도 괜찮을 것이다.


예전에 읽은 <스토너>를 보면서 더욱 확고해진 생각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사람에게서 구할 수 있는 기쁨이나 행복은 매우 가변적이고 한정적이라는 사실이다. 가족, 연인, 친구, 배우자, 동료 등등 사람들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그 관계 안에서 기뻐하고 행복해 하며 즐거움을 찾는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변하기 쉽고 그 변화 때문에 관계는 늘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이나 행복감 또한 한결같을 수는 없다.

어쩌면 그렇기에 '스토너'가 더더욱 문학 속으로 빠져들어 가면서 자신의 고독한 삶을 위로받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문학에 자신의 삶을 바쳤기 때문에, 아니 꾸준하게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보통의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은 의미 있는 삶을 살다 간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다. 그리고 그런 삶의 의미를 아는 이들의 눈에는 스토너가 그저 외롭고 고독하게 죽어간 가련한 인간으로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책이나 음악도 사람이 만든 것이기에 만든 이의 의도를 알고자 사람들은 끊임없이 애쓴다. 그렇지만 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의 의도를 100% 정확하게 알기란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사람 또한 나 아닌 타인을 100% 완벽하게 알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알고자,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을 뿐이지만 완벽한 이해나 앎은 관계 안에서 존재할 수 없다.

책이나 음악은 사람의 해석을 기다리고 환영한다. 비록 작가나 작곡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알지 못하고 독자나 청자의 주관이 깊이 배인 해석일지라도 환영한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수록 작품이 풍요로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있는 그대로 보아주길 바란다. 해석이 있으면 오해가 생기고, 이해가 아닌 오해 때문에 인간관계에서는 늘 불협화음이 따를 수밖에 없다. 타인의 주관적 해석 때문에 사람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이런 까닭에 어떤 예술 작품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일보다도 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알아가는 과정이, 사람과의 관계가 한층 어렵고 까다롭다. 그러나 그 공들임에 비해 쉽게 어긋나는 것 또한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그렇기에 사람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행복이나 즐거움은 변하기 쉽고 제한적이며 불완전한 것이다. 

내가 어릴 때부터 이런 사실을 알았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돌아보면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사람과 함께 할 때가 아니었다. 적어도 어린 시절에는 그랬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집에는 창고처럼 쓰이는 뒤꼍이 있었다. 형제가 많아 온전한 내 방이 없던 나는 그 뒤꼍을 어느 곳보다 사랑했다. 여름이면 그곳에 돗자리를 깔고 라디오(이종환, 김기덕, 배철수 같은)를 들으며 책을 읽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나는 친구가 많았던 적도 없었고, 많기를 바랐던 적도 없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이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던 그 시기에는 사람으로부터 즐거움을 얻기도 했지만, 그때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부질없다는 것을, 곧 모두 지나갈 것임을. 쉽게 변해버릴 한없이 가벼운 것임을.

대학을 가고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와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인간은 인간에게 좋은 존재가 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더욱 깨닫게 되었다. 물론 나 또한 분명 타인에게 그런 존재일 것이다. 인간은 타인을 해석하기 때문에 상처를 주고 자신도 상처 받는다. 그렇기에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편이 낫다. 아니면 해석할 여지를 아예 주지 않던가. 그러나 이조차도 불가능하다. 사람은 꼭 가까운 사람만을 해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친구가 얼마 되지 않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그 숫자가 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친구를 늘이고 싶어서 마음이 다급하지도 않다. 그런데 묘하게도 좋은 책이나 음악을 만나는 일에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 책도 읽어보고 싶고, 저 음악도 들어보고 싶고..... 어떤 이에게는 무척이나 외롭고 지루해 보일 수 있는 이런 삶에 나는 아주 만족한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이 내게는 진리나 다름없다. 그 구석방에 좋은 오디오까지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는 셈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과 딱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그래서 행복하다. 어린 시절, 그 안에선 한없이 평화로웠던 뒤꼍에서의 느낌이 고스란히 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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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5-12 11:3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내일 할 얘기지만, 스토너가 사실은 소세키의 겐조하고 비슷하지 않나 싶어요. 존 윌리엄스가 스토너에게 과하게 선역을 시켜서 말입죠. 사실은 스토너 역시 찌질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가정과 사회생활에서는요. 이번에 소세키 읽으며 확실하게 느낀 건, 소세키 >>>>>> 윌리엄스!!!

잠자냥 2021-05-12 11:19   좋아요 4 | URL
아 맞습니다! 겐조하고 비슷한 인물이죠! 하지만 전 겐조는 어떤 면에선 좋은데 스토너는 좋아할 수는 없더라고요. 스토너는 사실 딱히 매력적인 인간은 아니죠.
소세키>>>> 윌리엄스라는 말에도 공감합니다.
내일 기대하겠습니다.

그레이스 2021-05-12 11: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스토너 읽을 때 조금 답답하단 생각을 했는데, 제게도 그런 모습이 있더라구요.^^
움베르토 에코의 말 저도 동의해요~
책이 있는 구석 방안 쉴 곳이라는...♡

잠자냥 2021-05-12 11:32   좋아요 2 | URL
아마 알라딘 서재분들은 다들 책이 있는 방구석을 가장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ㅎㅎ

Falstaff 2021-05-12 1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파트 살면 오디오 좋은 거 전혀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출력대로 들을 수 없어요. 아래층, 위층, 벽 넘어 옆집에서 날마다 쳐들어올 겁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1-05-12 11:32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 그래서 아파트가 아닌 또 단독주택이 필요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능 ㅋㅋㅋ

2021-05-12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12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1-05-12 11:5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살짜쿵 태클을 걸자면,
고 쿼테이션은 에코가 아니라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분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려서는 새로운 관계에 점프하
길 원했지만, 이제 나이가 드니
그 관계들을 유지하는 데 더 중점
을 두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기억이 휘발되고
나니, 어느 시절 사람들과 함께
보내던 시절이 참으로 행복했었구
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그 땐 그랬
지 하구요.

오디오에 대한 로망은... 회사에서
놀고 있는 티악 앰프부터 어떻게
슈킹을...

잠자냥 2021-05-12 11:55   좋아요 4 | URL
아하, 그렇군요.<장미의 이름>에서 나왔기에 그렇게 인용했으나, 정확히는 그게 맞군요. 감사합니다!

mini74 2021-05-12 13: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남편이 싼값에 얼릉 주워왔다는 오디오, 형부가 우와하며 가격을 말한 후 잔잔한 음악과 책이 있던 방의 평화는 잠시 깨졌었죠 ㅎㅎㅎ

잠자냥 2021-05-12 14:1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오디오에 환장한 사람들도 은근 많죠. ㅋㅋㅋ

새파랑 2021-05-12 1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과 씨디에 둘러쌓인 방에서 살고 싶어요. 언젠가는~!
스토너 읽고 인간관계에서 많이 생각했었는데~ 역시 책 좋아하는 사람은 책만 있으면 혼자있어도 어디있어도 즐겁다는^^

Falstaff 2021-05-12 14:03   좋아요 2 | URL
흠... 자랑으로 읽으시면 곤란하고요,
제가 책 읽는 곳으로 쓰고 있는 방에 한 줄로 늘어놓으면 28미터의 책꽂이와 33미터의 CD 꽂이가 꽉 차있는데요, 책 읽을 땐 음악 못 듣고, 음악 들을 땐 책을 못 읽습니다. 마음 먹고 책이나 음악을 좀 즐기려면 또 술에 취해 있기 십상이고요. ^^;;
책은 두 번 읽기가 쉽지 않고, CD는 두 번 이상 듣기가 쉽지만 듣는 것만 들어서 한 번 달랑 듣고 먼지만 쌓이는 애들 불쌍해 바라볼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책은 모르겠으나, 음반은 많이 사지 마세요. 딱 들을 것만 사시는 것이.... 전 반올림 해서 3천 장 가지고 있는데, 정작 듣는 건 한 2백장 되려나 그렇습니다.
오디오는 아파트 기준해서, 잠자냥님이 즐기시는 자그마한 거면 충분합니다. 괜히 오디오 입문이네 뭐네 해서 인켈 하이파이 팔아버리고 전문가용이네 뭐네 하는 거 샀다가 아직도 후회 막급입니다. ㅜㅜ

잠자냥 2021-05-12 14:15   좋아요 2 | URL
새파랑 님/ 맞습니다. 책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 어떤 날은 사람하고 악속해놓고도 집에서 그냥 혼자 책이나 읽고 싶다고 생각하죠.

폴스타프 님/ 책하고 음악 같이 감상하기 어렵긴하죠. 책도 두 번 읽기 쉽지 않고, 음반도 듣는 것만 듣는다는 말씀 공감해요. 저도 소싯적엔 음반(주로 락 음악)도 사 모았는데, 결국 듣는 것만 듣고 자리만 차지하고.. 요즘은 정말 어쩌다 삽니다. 올봄 알라딘 수입 음반 할인 행사도 생애(?) 최초로 그냥 넘어갔다능. ㅋㅋㅋ 책도 읽고 되파는 경우가 많고요. 짐이다 짐.

근데 폴스타프 님 그 방 구경하고 싶네요- ㅋㅋ 술 취했을 때 함 올려주세요. ㅋ

로자 2021-05-12 14: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저는 작은 크기에 소리가 훌륭한 오디오가 궁금하네요. 저한테 알려주실 수 있나요?

잠자냥 2021-05-12 15:06   좋아요 2 | URL
제가 완전 반했던 미니 오디오는 필립스 mcm 2150입니다. 전 이 오디오를 두 번이나 샀습니다. 그런데 이 오디오는 시디 넣는 부분에 먼지가 쌓이면 판이 튀는 단점이 있어서... 현재는 브리츠 BZ-T7600 WC 쓰고 있습니다. 디자인은 브리츠가 예쁜데요. 소리는 아무래도 필립스가 더 좋았습니다(특히 중저음).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제 주관적 느낌이니, 실제로 여러 후기 검색해 보시고 판단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공쟝쟝 2021-05-13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는데 행복해졌어요..* 음악들으면서 고독한 독서하는 모습이 근사하게 느껴졌어요. 저도 오늘은 음악독서를..*
저는 책도 사람도 너무 좋아해요. 불가해하다는 거 알아도 사람에 대해서도 책만큼 혹은 책 처럼 알아가고 싶어요. 수많은 질문들을 던져주는 책처럼 누군가에게 열렸을 때 수많은 질문을 품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요. 많을 필요는 없어요. 마치 책처럼요.
아직은 책도 사람도 일단은 많이 보고 읽어가야하는구나 싶긴해여ㅡ 고르는 눈이 없거든요 ㅠㅠ

잠자냥 2021-05-13 14:06   좋아요 1 | URL
쟝쟝님은 사람 좋아하는 거 글에서도 느껴져요. ㅎㅎ
그래서 또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ㅎ
행복해지셨다니 저도 기분 좋네요-

두부 2021-05-15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책이 최고의 벗이죠.

잠자냥 2021-05-15 23:37   좋아요 1 | URL
네 살아갈수록 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ㅎㅎ

행복한구름 2023-10-20 1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학생 시절의 작은 키에도 누우면 머리와 다리가 서로 마주보는 벽에 닿을 것만 같은 작은 방에 엎드려서 과자와 우유를 놓고 역사책을 읽던 시절이 저에게는 가장 행복했습니다. 지금은 아이둘의 아빠라 나만의 공간이 전혀 없지만,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독립하고 저도 은퇴하면 저는 다시 골방에서 책을 읽고 있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언젠가는 나만의 작은 휴식처를 찾을 수 있기를.

잠자냥 2023-10-20 16:1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행복한 구름 님의 옛추억을 읽노라니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언젠가의 그 로망이 꼭 이뤄지길 바라겠습니다.
 

신경숙 새 책이 나왔다. 책을 굳이 여기 올리고 싶지는 않다. 전에는 엄마 어쩌고 찾더니 이젠 아버지한테 가는 내용인가. 뭐 암튼 그런가 보다. 이 책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작가 자체에 대한 양심이야 그렇다 치고(기대하는 바가 없기에), 창비 출판사 자체의 뻔뻔함도 그렇다 치고. 어제 이 책 출간 소식에 도서 정보를 클릭해 보면서 좀 의아했다. 100자평은 이 작가와 출판사의 양심 없음에 대한 비난으로 별 하나가 주를 이룬다. 그런데 리뷰를 보자. 알라딘 책 소개 창에는 출간일이 '2021-03-05'로 되어 있다. 어제 내가 봤을 때도 그랬다. 어제 세일즈 포인트는 10이었다. 오늘 보니 3,410포인트로 훌쩍 올랐다. 곧 죽어도 신경숙인지, 세일즈포인트는 순식간에 올라가긴 한다. 그걸 믿고 창비도 그런 뻔뻔한 수작을 하는 것이겠지. 아, 물론 작가도.


그런데 참 이상하다. 어제 내가 봤을 땐 리뷰가 2개 있었는데 둘 다 별 다섯을 줬더라. 오늘 보니 리뷰가 7개다. 어제 2개에 이어 5개 더 추가. 근데 다들 별 다섯, 별 넷이다. 세일즈 포인트 10일 때도 벌써 책 읽고 리뷰 쓴 분들인가? 아, 오프라인 서점이나 다른 온라인 서점에서 사서 봤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왠지 그런 거 같지 않다. 창비가 서평단 모집해서 책 뿌렸을 테고 그분들은 그에 응해 별 다섯이 아닌 책인데도 별 다섯을 주는 거다. 그게 공정한 평가일까? '공짜'로 읽은 값이다. 출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책에 극찬하는 리뷰가 줄줄 달리고, 그런데 실구매자 리뷰는 도대체 볼 수 없는 기묘한 행태. 난 사실 그럴 때 그 독자들의 양심에 더 화가 난다. 책 뿌리는 출판사나 작가보다도 더.



덧. 요즘 미시마 유키오 <봄눈>을 읽고 있다. 더럽게 잘 썼다. 그 작가를 좋아하지 않아도 정말 인정한다. 미치도록 잘 썼다. 신경숙이 얼마나 그의 문장을 표절하고 싶었을지 이해가 간다. 물론 신경숙이 <봄눈>을 표절한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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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1-03-03 1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건 제 개인적인 견해인데, 100자평을 구매자가 쓸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구매자의 100자평이 땡스투 적립금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책을 사지 않았고, 책을 읽지도 않은 독자의 100자 기대평이 땡스투 적립금을 받는다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요.

잠자냥 2021-03-03 11:43   좋아요 4 | URL
읽지도 않은 사람들의 ‘기대평‘으로만 가득 채워진 100자평도 참 그렇긴 하죠. 저는 물론 단순 기대평이 아닌 100자평이나 리뷰는 꼭 ‘구매‘ 여부와 상관없이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평가 대상인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수도 있고, 다른 서점에서 샀을 수도 있고, 선물 받은 책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뭐랄까 출판사로부터 책 제공 받은 티가 ‘뚜렷하게‘ 나고 그 대가로 좋은 평 써주는건 좀 보기 그래요. 전 그래서 그런 리뷰는 다 거르기는 합니다.

다락방 2021-03-03 13:30   좋아요 1 | URL
사이러스님, 현재 ‘구매자‘의 백자평에만 땡스투가 적립되고 있습니다. 구매자 표시가 붙지 않은 백자평은 땡스투를 아무리 눌러도 적립되지 않습니다.

cyrus 2021-03-03 14:5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락방님. ^^

Falstaff 2021-03-03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하야, 제가 서평단 응모를 여태 한 번도 하지 않은 겁니다.
영숙이 쟨 좀 어디가 모자른 거 같기도 하고, 영숙이 하면 미쳐 넘어가는 영숙이 빠들은 확실하게 뭔가가 빠졌고, 아직도 유사성 운운하는 일반 팬들 가운데 상당수는 ‘우연한 문자적 유사성‘을 확신하고 있고, 유럽과 아메리카에선 표절을 한 작가들을 확실하게 매장시키고 있는데, 오호라, 진짜로 대한민국은 글 도둑놈, 글 도둑년 입장에서 별유천지비인간입니다.
한 번 만 더 강조하자면, 영숙이....는 초성자음 부끄럼 탈락 현상입니다아아아.....

잠자냥 2021-03-03 12:29   좋아요 1 | URL
영숙잌ㅋㅋㅋㅋㅋ 초성자음 부끄럼 탈락 현상ㅋㅋㅋㅋㅋㅋㅋㅋ
영숙이 문학이 어디가 그렇게 좋은지도 모르겠어요.

blanca 2021-03-03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시마 유키오의 <봄눈>을 읽고 저도 소름이 돋았어요. 그의 행적 자체는 논란이 될지라도 필력은 넘사벽이더라고요. 글 쓰는 사람들이 읽고 어떤 유혹을 느낄 정도로. 잠자냥님 생각하신 그대로 저도 생각했어요. 이래서 그랬구나. 그런--;;

잠자냥 2021-03-03 18:18   좋아요 0 | URL
와 정말 소름 돋는다는 말이 딱입니다. 어쩜 그렇게 쓰죠? 그런 문장이 가능하다니 놀랍습니다(비록 번역문일지라도).

행복한책읽기 2021-03-03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신경숙 창비 디스 페이퍼서 미시마 유키오를 낚아갑니다.^^ 그 책을 올려주시지. ㅋ 근데 창비 대표가 작가 남편 아닌가요??

잠자냥 2021-03-03 20:11   좋아요 0 | URL
미시마 유키오 <봄눈>은 저도 아직 읽는 중이라 리뷰 쓰기는 뭐했고요. 다 읽으면 꼭 올리겠습니다. 넘나 잘 쓴 것....

잠자냥 2021-03-03 20:20   좋아요 0 | URL
창비 대표는 아니고 신경숙 남편은 남진우 시인인데요. 문학평론가이자 교수로 문학권력이 꽤 있는 사람이죠. 신경숙 표절 사태 때도 참 어처구니 없는 궤변을 늘어놓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부창부수.

행복한책읽기 2021-03-03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저 바보였군요. 금각사 저자였다니. ^^;;;

잠자냥 2021-03-03 20:18   좋아요 0 | URL
넵. 그리고 신경숙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했지요.

2021-03-04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4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4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4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 토요일 늦은 오후, 걸으려고 집을 나섰다. 내내 화창하던 하늘에 그때쯤엔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지나가는 비겠지, 하고 우산 하나 챙겨서 나갔다. 잠시 걸으니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래도 걸었다. 좀 더 걷다보니 빗줄기가 꽤 거세졌다. 집으로 돌아갈까 싶기도 했으나 지난밤 확인한 일기예보에서는 오후 6시에 잠깐 비가 오고 그 뒤로는 맑음 표시였다. 다시 걷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폭우처럼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도저히 우산에 기대서 걷기가 불가능해졌다. 어쩌지? 하다가, 가까운 곳에 있던 맥줏집으로 들어갔다. 카페에 가도 됐을 텐데, 그날 이미 커피를 마신 터라...... 아니 그냥 날 밝을 때 맥주가 마시고 싶던 터라.....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비를 보며 맥주 한 잔과 치킨을 비우고 나오니,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하늘이 맑게 갰다. 공기는 더욱 깨끗해졌다. 그래서 다시 걷기 시작. 한참 걷다 보니 목이 말라서 또 다시 맥주를 마시러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밤이 깊어졌다. 어느덧 밤 열두시를 넘긴 시간, 갑자기 출출해져서 근처에 있던 24시간 콩나물국밥집에 갔다. 거기서 해장을 하고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 시간에도 꽤 많은 손님들이 있다. 아마 나처럼 한 잔 걸치고 해장하고 집에 돌아가려는 사람들이었으리라. 테이블 자리는 이미 다 차서 나는 사람들 무리와 떨어진 방으로 올라갔다. 좌식 자리에 앉은 건 우리뿐이었다.

주문을 마치고 사람들이 열심히 지켜보고 있는 텔레비전을 한번 바라보니, TV에서는 축구 경기를 중계하고 있었다. 아아, 그래서 오늘 사람들이 삼삼오오 술집에 많이 모여 있었구나. 나는 그저 토요일이라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모두의 눈이 텔레비전에 쏠려 있을 때, TV를 보지 않고 있는 한 남자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제 예순을 조금 넘었을까. 일어선다면 160을 조금 넘을 키에 60킬로그램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체구를 지녔다. 그가 내 눈길을 끈 이유는 홀로 잔뜩 취한 채 웅얼웅얼 뭔가를 내내 중얼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환한 국밥집에서 혼자 취해 허공에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내 밥상에도 국밥이 올라왔고, 나는 밥을 먹는 일에 열중했다. 그런데 그때 들려오는 소리, “아, 여기서 이러지 마시라니까. 안받아주려다 받아줬더니 또 그러네. 얼른 드시고 가.”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 테이블에 국밥을 주고 돌아가던 가게 아주머니가 아까 그 취한 사내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자주 이렇게 취한 상태로 와서 옆자리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거나 하는 모양이었다. 그 남자 옆 자리에는 4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묵묵히 국밥을 입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국밥을 다 먹은 그 남자는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을 치른 그 남자는 갑자기 등을 돌리더니 아까 그 노인을 향해 폭언을 퍼붓기 시작했다. “밥 좀 편하게 먹자. XX야. 나이 처먹으려면 곱게 처먹어. 그 꼬라지니까 그 나이에도 그렇게 혼자 밥 처먹으면서 남한테 시비나 걸고 있지 XX야. 너, 내가 손봐주려다 오늘 바빠서 그냥 간다. 새꺄” 등등. 아까 가게 아주머니가 한 소리하는 걸 듣고 기세가 등등해진 것인지,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을 정도로 폭언을 퍼부었다. 노인에게 한창 퍼부으면서 헬멧을 쓰는 폼과 차림새를 보니 그는 늦은 밤까지 택배를 나르고 뒤늦게 식사를 하던 사람인 듯싶었다.

지켜보니 노인은 시비를 건다기보다는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옆 자리 건너 자리 사람들에게도 말을 걸고 있었다. 웅얼거림이나 마찬가지라, 시비라고 보기에도 어려웠다. 노인의 옆 건너 자리에 있던 그들은 30대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 셋이다. 그들 중 하나는 몸집이 노인의 두 배는 돼 보였다. 그는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줄곧 노인을 쏘아보더니 담배를 피우러 나가다가 노인에게 덤벼들 기세를 취했다. 그때 나머지 둘이 그를 말림으로써 아무 일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노인의 맞은편 자리에는 남녀가 앉았다. 그런데 그들 중 여자가 아까부터 노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조롱이랄까. 여자는 이제 주변의 그런 분위기에 고무됐는지, 아니면 자기 앞에 남자가 앉아 있기에 안심이 되었는지 급기야 노인에게 “할아버지, 쉿!쉿!”하면서 껄렁껄렁한 얼굴로 노인을 계속 비웃었다. 나는 여자의 그 조롱이 아까 폭언을 퍼붓던 남자의 태도 못지않게 섬뜩하고 불쾌했다. 저 여자가 혼자 국밥을 먹으러 왔어도 저럴 수 있을까? 아니, 저렇게 홀로 술을 마시면서 웅얼대는 저 노인이, 건장한 30~40대 남자였어도 다들 저럴 수 있었을까? 물론 내가 그 노인 옆자리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그가 계속 그렇게 술 취해서 중얼중얼 거린다면 나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인을 향한 그 주변 남자들과 그 여자의 태도에는 분명 지나친 무엇인가가 있었다.

텔레비전 속 축구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1대 0으로 앞서나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노인 주변 사람들은 축구경기보다 노인을 조롱하거나 위협하는 일을 더 즐기는 듯했다. 여자의 얼굴은 개미집을 발견해서 마구 짓밟아버리는 심술궂은 아이의 얼굴에나 있을 법한 그런 웃음이 스며있었다. 나는 얼마 전 본 영화 <기생충>이 떠올랐다. 기우네 가족과 입주 가사도우미 문광이 서로 죽일 듯이 싸우던 그 장면……. 그 국밥집에서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술 취한 노인의 웅얼거림이 아니라, 그에 대응하던 남자의 폭언과 또 다른 남자의 살기어린 눈빛과 여자의 비웃음이었다. 노인보다 젊고 힘세고 곁에 무리가 있고, 남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그 행동들. 그런데 그들은 모두 그 시간에 4천 원짜리 국밥으로 한 끼를 때우고 있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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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9 17: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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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9 17: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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