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하늘바람 > 이야기속 동물의 상징성

1. 하늘의 비밀을 알고 있는 동물 <노루>

 

우리는 노루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야기가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 일 것이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를 나무꾼이 숨겨주고 그 보답으로 노루는 선녀들이 언제 어디서 하늘의 두레박을 타고 내려와 목욕하는 것을 알려주고 선녀 옷을 숨겨 선녀와 함께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노루는 하늘의 움직임을 미리 다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자신을 살려준 나무꾼에게 은혜를 보답함으로써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은혜를 갚을 줄 아는 동물로 여겨진다.

충남 공주 우성면 내산리에 노루목 전설이 바로 은혜를 갚은 노루 이야기다.

포수에게 쫓기는 노루를 나무꾼이 숨겨주자 그 노루는 은혜를 보답 하기위하여 묘 자리를 잡아주었고 그 자리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무덤을 옮겼다. 그 후 나무꾼은 점점 집안이 일어나 아주 부자가 되어 잘 살았다는 이야기다. 그때부터 여기를 노루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 하변 이씨 선조 한사람이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를 숨겨주고 과거에 장원을 하였으며 그 후 과거시험 때가 되면 노루가 앞산에 나타나 울음으로 과거시험이 있음을 알려주었고 이씨 집안은 12명이나 장원급제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노루는 이렇게 은혜를 보답할 줄 아는 동물일 뿐 아니라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하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신성한 동물로 여겼던 것이다.

또 우리 속설에 노루를 잡으면 재수가 없다고 한다. 이 속설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믿고 그렇게 실천하고 있다. 특히 전방의 군부대에서는 이 속설을 절대적으로 신봉하여 노루가 잡히거나 죽은 노루를 보아도 절대 놓아주거나 먹지 않고 묻어 준다.

이렇게 노루가 불길함을 미리 예견해 주는 동물로 여기게 된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 편에서 많이 나온다. 유리왕이 흰 노루를 잡고 난 뒤 백제 시조 온조가 왕에 오르게 된 것이나, 중천왕 15년에 흰 노루를 잡았더니 그해 11월에 우레와 지진이 있었으며 또 장수왕 때 흰 노루를 잡고 그해 12월 눈이 다섯 자나 내렸다고 하는 기록들을 들 수 가 있다.

이러한 믿음은 고려도 마찬가지였다.

고려 시대에는 도성에 자주 노루가 나타났다.

노루가 나타나면 불길하다는 것을 고려 우왕 때 일관의 말에서 엿볼 수 있는데 일관이 말하길 “전해오는 비기에 의하면 노루가 성안에 들어오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으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각별히 조심하여 행동하십시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고려는 망하였으며 노루가 나타나면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고 믿게 되었다. 이렇게 불길함을 미리 예견해 주는 신성한 동물, 하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신성한 동물로 여겼기 때문에 노루고기를 먹으면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여겼다.

노루가 나타났을 때 불길함을 나타내는 이야기는 많이 있다. 그 예를 들면 

<노루가 동네를 쳐다보고 울면 그 동네는 화재가 생긴다.> <노루고기를 먹으면 제수가 없다.> <노루가 짖으면 맞은편 동네 사람이 죽는다.> <노루를 잡으면 사고가 계속난다.> 등 많은 속설이 아직도 시골에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속담에나 민요 등에는 노루 사냥을 하는 모습이나 고기를 먹는 이야기도 있다.

노루 뼈는 세 번을 우려먹고도 또 우려 사위를 준다는 말은 노루 뼈가 보신이나 신경통에 좋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또 노루고기 함 점 먹으려다 돼지고기 열 점 잃는다. 란 말은 노루고기가 맛이 좋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비록 노루를 사냥하는 풍속도 있었고 요리도 해먹었지만 우리 민중들 가슴 속에는 노루는 신성한 동물로 잡으면 불길하다는 의식이 내재되어있다고 하겠다.

 

2.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우리 민족에게 거북이는 매우 상징적이며 상서로운 동물이다. 미래를 미리 알려주기도 하고  신의 뜻을 전달해 준다. 그뿐만 아니라 거북이는 재물 복을 갖게 하는 영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거북은 나쁜 의미보다 좋은 뜻을 가진 동물로 우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특히 거북은 장수의 동물로 십장생의 하나로 널리 그려졌고 오랜 삶에서 터득한 경험으로 지혜로운 동물이기도 하다.

거북은 오랜 옛날부터 점복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는데 지금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즉 거북의 등을 태워 등짝이 갈라지는 것을 보고 길흉을 예언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귀복 龜卜 하였다. 그 예로 <삼국사기> 기록된 의자왕 20년에 있었던 백제의 멸망을 예언하는 거북이 등을 들 수 가 있다.

거북이는 각종 일상생활 도구에서도 많이 볼 수가 있다. 거북이 모양을 형상화한 대표적인 곳은 바로 문방사우라고 할 수 있으며 또 비석의 받침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비석의 받침으로 사용된 거북, 즉 귀부龜趺 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가 있다.

비석 밑에 거북이가 그려지게 된 때는 신라시대 부터이다. 커다란 거북에 용머리를 하고 있는 비석 받침돌을 비희贔屓라고 하는데 그 대표적인 유물로는 태종 무열왕릉 기념비를 들 수가 있다. 그리고 임금의 옥새나 왕의 인보 등에는 반드시 거북의 형상으로 손잡이를 만들곤 했다. 이것은 거북이 같이 그 왕조가 오랫동안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이렇게 인장의 손잡이로 사용되는 거북을 귀뉴龜紐 라고 한다.

그밖에 집을 짓고 상량을 할 때 대들보에다 하룡河龍 해귀海龜 라는 글씨를 거북이 대신 쓰기도 하였다. 

거북이는 은혜를 갚는 동물로 설화 속에 많이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이제현의 <역옹패설>에 나오는 이야기로 거북이를 살려주고 거북이의 도움으로 삼대가 재상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통해현 포구로 큰 거북이가 잘못 들어왔다. 이를 발견한 당시 현령 박세통이 다시 바다로 살려 보내준다. 그날 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내 아들의 생명을 구해주었으니 공과 아들 손자 삼대에 걸쳐 재상을 지낼 것이다.”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 이후 박세통과 아들 홍무는 재상에 올랐으나 손자 박함은 상장군에 그쳤다. 박함은 불만을 품고 거북이의 예언이 거짓이라고 시를 지어 노래했다. 그러자 박함의 꿈에 거북이가 나타나 말하길 “그대가 주색에 빠져 스스로 복을 찬 것이지 내가 은덕을 잊은 것은 아니다. 조그만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라고 사라졌다. 그 후 박함은 재상이 되었다.」

거북이가 장수한다는 것은 신성한 동물로 여겨 옛사람들은 고분 벽화에 사신도로 많이 그려져 왔다. 즉 북방을 지키는 현무로 북쪽은 죽음을 의미하지만 현무는 죽음을 지키는 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오랜 삶에서 터득한 경험이 바로 지혜로 연결되어 지혜로운 동물로 여겨졌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로 <토끼와 늑대 거북이의 지혜겨루기> 이야기를 들 수가 있다. 몇 번을 지고도 승복하지 않은 토끼 때문 마지막 내기로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하였다. 그때 성질 급한 토끼는 자기는 천살이라고 하였고, 늑대는 이 세상이 생길 때 자신은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거북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늑대 너를 보니 죽은 내 손자가 생각난다고 말하였다는 이야기다.

거북이가 민속놀이에도 등장을 하는데 충북의 거북이 놀이가 일제 강점기에는 대표적인 놀이였다. 사람이 둥근 멍석을 덮어쓰고 거북이 형상을 하여 집집마다 다니며 지신밟기로 액을 막아주고 한해의 풍성함을 축복하는 고사 등을 지내며 그 집안의 무사태평과 발복을 기원하는 놀이로 추석날에 행해졌다.

거북이와 같이 지혜롭고 보은을 행하는 사람들로 넘치는 사회가 되었음 하는 바램이다.  

 

3. 단군을 연상케 하는 동물 <곰>

 

우리는 곰을 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남자들은 웅담을 생각할 것이다. 정력과 건강에 최고라는 웅담 때문에 요즘 곰의 수난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학생들은 곰을 보면 단군신화를 연상케 될 것이다.

단군신화에 한웅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신단수로 내려와 신시를 열었다. 그 때 곰과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이 되기를 청한다. 한웅은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백일 동안 이것만 먹고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하여 호랑이는 실패하고 곰은 성공을 하여 여자가 되어 한웅과 혼인을 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다.

오랜 옛날엔 곰을 신으로 추앙하고 신성시 했다는 것을 지명이나 문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 고구려조에 나오는 금와왕 이야기에 해모수와 유화가 만나는 장소가 웅신산이다. 또 불국사를 창건한 대성이라는 사람은 곰을 죽인 후 곰의 복수를 막기 위하여 장수사라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곰은 우리 조상의 상징으로, 절대 능력을 지닌 신성한 신으로,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 즉, 여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충남 공주는 옛 지명이 곰내熊川 곰나루熊津 웅주熊州 라고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여자로 변한 곰과 살던 총각이 여자가 곰인 것을 알고 도망을 가다 강물로 뛰어 들었는데 곰도 따라 강물에 뛰어 들었으나 헤엄을 칠 줄 몰라 곰이 죽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아직도 시베리아나 중국 소수민족 사이에는 곰을 신으로 숭배하는 사상이 남아있다.

중국 흑룡강성에 살고 있는 오르죤족(Oulunchun)은 수렵을 주로 하는 민족이다. 그들은 곰을 잡으면 곰의 머리를 나무틀에 올려놓고 곰에게 절을 한 후 담배를 바친다. 그리고는 다른 짐승을 많이 잡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그리고 곰의 뼈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성대하게 풍장을 해준다고 한다.

곰이 신으로 추앙받게 되는 데는 겨울잠을 자기 때문이라고 한다. 겨울 동안 안보이든 곰이 봄이 되면 다시 보이므로 신성한 동물로 영생, 또는 환생을 의미하는 동물로 나타나기도 하였는 모양이다.

또 곰은 은혜를 갚을 줄 아는 동물로 설화에 많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사냥꾼에게 쫓기는 자신을 숨겨준 나무꾼의 소원을 들어주어 장가들게 하였다는 곰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여우하고는 살아도 곰 하고는 못산다.”라는 말이 있듯이 미련함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동물이기도 하다. 곰이 “옥수수 따듯이 한다.” 는 속담은 곰의 미련함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속담이다. 이 말은 곰은 옥수수룰 딸 때 왼손으로 따면 오른쪽 겨드랑이에, 오른손으로 따면 왼쪽 겨드랑이에 옥수를 끼어 넣고 따므로 2개 이상을 따지 못한다는 말이다.

얼마 전 지리산에 풀어 논 반달곰이 과수원에 폐를 끼친다고 반달곰을 죽인사건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우리는 곰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웅담이 탐이 나서가 아니라 아직까지 우리들의 정서에는 곰에 대한 신성함이나 성서러움 또는 단군설화에 나오듯 우리 조상이라는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으로 온 이여성이 곰의 자손이라는 말이 있는 것은 자신이 범상하지 않는 인물임을 스스로 내세우기 위한 것일 것이다. 이여송은 조선에 원군 와서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또한 최초로 조선 땅에 말뚝을 박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바로 경상도 성주가 고향인 조선사람이였다는 설화가 전해내려 오는 것은 그 당시에 조선을 구한 은인이라는 믿음이 민중들에게 깔려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4. 태양 속의 새 <까마귀>

 

우리는 까마귀를 보면 불길 한 징조라고 생각하고 죽음을 연상한다. 언제부터 까마귀가 불길한 징조를 가져오는 흉조가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동이족이 중원의 패권을 상실하고 한반도로 이주 하고 난 뒤 중국의 영향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까마귀를 흉조로 보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본디 까마귀는 태양을 상징하는 새로, 불길한 징조를 미리 알려 불행을 막을 수 있도록 예시를 주는 새로, 또 효자를 상징하는 착한 새로 알려줘 있다.

까마귀의 어원은‘가마고’라고 한다. 가마는 곰의 어원이 변하여 생긴 말이라고 한다. 또 가마는 우두머리를 나타내며, 곰은 단군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까마귀는 단군과 관련된 새로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삼족오는 태양 속에 발이 세 개 달린 까마귀의 그림이다. 왜 태양 속에 발 세 개 달린 까마귀를 넣었을까? 봉황이나 공작 등 아름다운 많은 새들이 있는데 유독 까마귀를 넣는 이유는 바로 단군왕검의 적통을 이어 받아 태양을 숭배하는 정통성 있는 왕조라는 것을 의미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 이야기가 있다. 연오랑이란 이름을 풀이하면 까마귀를 인도하는 남자라는 뜻이다. 즉, 태양을 인도하고 끌어 오는 사람이다. 그래서 연오랑 세오녀가 일본으로 가고 난 뒤 신라가 태양이 정기를 잃었다고 하였다. 그들을 다시 데려오기 위하여 신라 아달라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냈으나 일본의 왕이 된 연오랑이 오지 못한다고 하여 그의 왕비인 세오녀가 짜준 비단을 가지고 태양의 정기를 다시 찾기 위한 제사를 지낸 곳이 바로 오늘의 영일만이다.

삼족오의 유래는 희화의 아들 열 명이 태양이 되어 하늘에 떠 있으니 온 천지가 말라 죽게 되어 희화는 수하 장수 제준에게 활을 쏘아 태양을 떨어트리게 하였다고 한다. 그때 떨어진 태양은 발이 세 개 달린 까마귀였다고 전한다.

또 까마귀는 앞으로 닥칠 위험을 미리 예시해 주는 새로도 많이 등장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란 비처왕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도 까마귀가 나와서 그 서신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인도한 것이다. 그 후 비처왕은 정월보름날에 까마귀의 기일이라 하여 찰밥을 지어 까마귀에 제사 지냈다고 한다.

또 까마귀를 보고 반포조反哺鳥라고 한다. 이 말은 반포보은에서 유래되었는데 까마귀는 늙은 어미를 위하여 먹이를 물어다 주어 그 은혜를 갚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그 외 칠월칠석날 견우와 직녀가 만날 수 있도록 은하수에 다리를 놓아주는 새도 까마귀와 까치다.

이렇게 좋은 의미로 우리 설화에 많이 나타나는 까마귀를 우리는 죽음을 상징하는 흉조라고 느끼게 된 것은 음양 오행사상이 도입되고부터가 아닌가 한다.

까마귀는 온 몸이 까만색이다. 검은 색은 오행 중 북방을 나타낸다. 또 어둠을 상징하고 죽음의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거망증이 심한 사람을 우리는“까마귀 고기 먹었나?”라고 한다. 이것 또한 까마귀의 몸 색깔에서 비롯된 말이라 생각한다. 온 몸이 새까만 까마귀는 먹통을 연상하게 하고 먹통의 까만색을 까마귀에 비유하여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까마귀를 길조로 여겨 도시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제시하는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5. 정절의 새 <기러기>

 

 지금쯤이면 저 멀리 시베리아에서 추위를 피해 우리나라로 날아오는 기러기 떼들을 볼 수가 있다. 기러기는 겨울철새로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다시 북쪽으로 날아간다. 이렇게 기러기는 일정한 계절에 맞춰 이동을 하므로 옛 선비들은 곧잘 기러기를 빗대어 소식을 전하곤 하였다. 또한 기러기는 이별이나 쓸쓸함의 상징으로도 많이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 속담에 혼자된 사람을 “짝 잃은 외기러기”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혼자된 홀아비나 과부의 외로움을 나타내기도 하는 말이다.

우리는 기러기를 보고 쓸쓸함과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기러기를 보고 쓸쓸함이나 외로움, 그리고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한 옛 선인들의 영향 때문이라 생각한다.

기러기라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전통혼례에서 등장하는 기러기이다.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장가를 갈 때 기러기 한 쌍을 앞장세워 간다. 이것을 목안(木雁)이라고 한다.

우리는 가끔 혼례 때 사용되는 기러기를 원앙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원앙은 암컷이 수컷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라도 갈아치운다는 것과 일부다처제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원앙 부부사이가 좋다고 하여 신혼부부의 금실을 대신할 수는 있어도 기러기처럼 상징적인 의미는 가지지 못한다.

그러면 많은 동물들 중에서 왜 기러기가 선택되어 인간의 대사라는 혼인에 등장하여 앞장서 가는 것일까?

기러기는 한번 짝을 지어면 평생 그 짝과 지낸다고 한다. 만약 한쪽 즉 수컷이나 암컷 중 한 마리가 죽게 되면 남은 기러기는 죽을 때까지 정조를 지키고 혼자 살아간다고 한다.

이러한 기러기의 습성 때문에 혼인에 기러기가 등장하는 것이다. 평생 동안 변치 말고 함께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또 살다보면 혹 불행한 일을 닥쳐 한쪽이 먼저 갈 수도 있는 일이니 한쪽이 먼저 가더라도 기러기처럼 정조를 지키고 혼자 살아가라는 뜻도 있다 하겠다.

충청도에선 혼례 때 전안상에 목안을 올려놓고 북향사배를 드리기도 한다. 그런 다음 신부의 어미가 치마로 기러기를 덮어서 가지고 나가는데 이것은 기러기가 날아가지 말라는 의미와 알을 잘 낳으라는 의미 즉, 생산을 잘하여 자식을 많이 두라는 의미도 있다. 치마로 싼 기러기를 쌀독에 넣거나 안방에 던져서 첫 아이의 성별을 점치기도 한다. 기러기 머리가 왼쪽으로 가면 아들을 낳고, 오른쪽으로 가면 딸을 낳는다는 것이다.

기러기는 작은 기러기는 안(雁)이라 부르고 큰 기러기는 홍(鴻)이라 부른다.

우리 옛 선인들은 기러기에 4가지 덕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첫 번째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가을이면 찾아오고 봄이면 돌아가니 믿을 수 있다고 하여 신(信)이오, 두 번째는 하늘을 날 때는 차례가 있어 앞에서 울면 뒤따르는 무리들이 화답을 하니 예(禮)요, 세 번째는 한번 짝을 맺으면 다시 짝을 얻지 않으니 절(節)이요, 네 번째는 무리지어 밤낮으로 살피고 생활하여 서로를 보호하니 그 지혜를 예폐(禮幣) 즉, 고마운 뜻을 표하기 위하여 보내는 예물로 사용하고도 남는다고 하였다.

어느 동물인들 나름대로의 지혜가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 조상들의 기러기에 대한 믿음과 애정은 다른 동물들 보다 훨씬 더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기러기는 앞에서 말한 4가지 덕을 지니고 있는 동물로 신의가 있고 또한 예의가 있으며 평생을 혼자 살아가며 정절을 지키는 지조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지혜롭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유교사상에 가장 부합하기 때문에 더욱 기러기를 추켜세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있으면 “기럭 기럭” 울음소리를 내면서 하늘에 무리지어 나르는 기러기를  대할 때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기러기의 4덕을 생각하며 내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는 여유를 가졌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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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7 23: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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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따져서 이길 수는 없다
2.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도 잔소리는 용서가 안 된다
3.좋은 말만 한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아니다
4.말에는 자기 최면 효과가 있다
5. '툭'한다고 다 호박 떨어지는 소리는 아니다







6. 유머에 목숨을 걸지 말라
7. 반드시 답변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화를 자초한다
8. 상대편은 내가 아니므로 나처럼 되라고 말하지 말라
9. 설명이 부족한 것 같을 때쯤 해서 말을 멈춰라
10.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은 뒤에서도 하지 말라


11. 농담이라고 해서 다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12. 표정의 파워를 놓치지 말라
13. 적당할 때 말을 끊으면 다 잃지는 않는다
14. 사소한 변화에 찬사를 보내면 큰 것을 얻는다
15. 말은 하기 쉽게 하지 말고 알아듣기 쉽게 해라






16. 립 서비스의 가치는 대단히 크다
17. 내가 이 말을 듣는다고 미리 생각해 보고 말해라
18. 지루함을 참고 들어주면 감동을 얻는다
19. 당당하게 말해야 믿는다
20. 흥분한 목소리보다 낮은 목소리가 위력 있다


21. 한쪽 말만 듣고 말을 옮기면 바보 되기 쉽다
22. 눈으로 말하면 사랑을 얻는다
23. 덕담은 많이 할수록 좋다
24. 자존심을 내세워 말하면 자존심을 상하게 된다
25. 공치사하면 누구나 역겨워한다








26. 남의 명예를 깎아내리면 내 명예는 땅으로 곤두박질 처진다
27.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면 진실성을 인정받는다
28. 잘난 척하면 적만 많이 생긴다
29.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해야 인정받는다
30. 말의 내용과 행동을 통일시켜라


31. 두고두고 괘씸한 느낌이 드는 말은 위험하다
32. 상대에 따라 다른 언어를 구사해라
33. 과거를 묻지 말라
34. 일과 사람을 분리해라
35. 애교는 여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36.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사용해야 웃길 수 있다
37. 대화의 시작은 호칭부터다
38. 대화의 질서는 새치기 때문에 깨진다
39. 말을 독점하면 적이 많아진다
40. 무시당하는 말은 바보도 알아듣는다


41. 작은 실수는 덮어 주고 큰 실수는 단호하게 꾸짖어라
42. 지나친 아첨은 누구에게나 역겨움을 준다
43.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한 비밀을 털어놓는 것은 무덤을 파는 일이다
44. 악수는 또 하나의 언어다
45. 쓴 소리는 단맛으로 포장해라






46. 말은 입을 떠나면 책임이라는 추가 달린다
47. 침묵이 대화보다 강한 메시지를 전한다
48. 첫 한 마디에 정성이 실려야 한다
49.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면 대화는 저절로 잘 된다
50. 낯선 사람도 내가 먼저 말을 걸면 십년지기가 된다


51. 목적부터 드러내면 대화가 막힌다
52.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해서 말하면 큰 낭패를 당하기 쉽다
53. 말을 잘한다고 대화가 유쾌한 것은 아니다
54. 내 마음이 고약하면 남의 말이 고약하게 들린다
55. 타협이란 완승, 완패가 아니라 승&승이다






56. 험담에는 발이 달렸다
57. 단어 하나 차이가 남극과 북극 차이가 된다
58. 진짜 비밀은 차라리 개에게 털어놓아라
59. 지적은 간단하게 칭찬은 길게 해라
60. 가르치려고 하면 피하려고 한다


61. 정성껏 들으면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62. 비난하기 전에 원인부터 알아내라
63. 내 말 한 마디에 누군가의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64. 눈치가 빨라야 대화가 쉽다
65. 불평하는 것보다 부탁하는 것이 실용적이다






66. 말도 연습을 해야 나온다
67. 허세에는 한 번 속지 두 번은 속지 않는다
68. 내가 먼저 털어놓아야 남도 털어놓는다
69. 그런 시시한 것조차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70.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어서는 안 된다


71. 지나친 겸손과 사양은 부담만 준다
72. 도덕 선생님은 선생님 자리에서 내려올 수 없다
73. 말은 가슴에 대고 해라
74. 넘겨짚으면 듣는 사람 마음의 빗장이 잠긴다
75. 말투는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76. 때로는 알면서도 속아 주어라
77.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라
78. 정성껏 들어주면 돌부처도 돌아보신다


돌아서서 후회하지 않는 유쾌한 대화법 78 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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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보슬비 > "韓-美두 농부, 21세기 新유목민을 비판하다"

"韓-美두 농부, 21세기 新유목민을 비판하다"

  
[동아일보]

호모 노마드(Homo Nomad·유목하는 인간). 21세기의 신(新)인류다. 세계화와 더불어 휴대전화와 무선인터넷으로 무장한 ‘디지털 노마디즘’이 피할 수 없는 흐름으로 떠올랐다. 기업 경영에서도 쉼 없이 이동하며 제국을 이룬 몽골의 이 최고경영자(CEO)의 새로운 모델로 부상한 지 오래다. 유목주의는 ‘세계화’와 ‘디지털’이라는 두 키워드가 점령한 현대의 금과옥조처럼 수용되고 있다.

그러나 유목주의의 유행에 문제는 없는 걸까. 유목주의와 대척점에 서 있는 정착민의 철학을 지닌 두 명의 농부가 ‘현대의 미신’인 유목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환경운동가인 천규석 씨가 지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실천문학사)와 미국의 시인 겸 문명비평가인 웬델 베리 씨가 쓴 ‘삶은 기적이다’(녹색평론사)는 책이 최근 잇따라 출간됐다.

저자들은 정착민의 대표 격인 농부이자 지식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천 씨는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뒤 1965년 귀향해 지금까지 농사를 지으며 한살림운동 대구 공동체를 만드는 등의 활동을 해 왔다. 베리 씨는 뉴욕대 등에서 영문학, 문예창작을 강의하다 1960년대 중반에 사직하고 켄터키 고향마을로 돌아가 40년간 농사를 지으며 40여 권의 책을 집필했다.

천 씨는 자신의 책에서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대안적 생활방식으로 급부상한 유목주의가 사실은 침략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생활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유목으로 생계를 꾸려갈 경우 가구(5인 가족 기준)당 30여만 평의 땅이 필요한 반면 농경으로 살려면 1가구에 필요한 땅은 일모작이냐 이모작이냐에 따라 900∼1800평에 불과하다. 즉 “최소한의 토지에서 최대한의 에너지를 생산하는 생태 경제적 측면에서 유목은 지속이 불가능한 생계 양식이며 자급자족적이지 않은 결핍적 존재”라는 주장이다.

이는 과거 유목민이 도시와 국가를 세울 때 필연적으로 인근 농경민에 대한 침략과 농업생산물의 탈취를 통해 국가를 유지하려 했던 데에서도 드러난다. 천 씨는 “지금 전 세계를 휩쓰는 세계시장 제국주의도 그 침략성, 수탈성에서 유목주의와 닿아 있다”며 칭기즈칸은 오늘날 미국과 그 확대 연장선상에 있는 ‘세계시장’이란 신제국주의의 선구자라고 비판했다.

베리 씨의 ‘삶은 기적이다’는 미국의 사회생물학에드워드 윌슨 씨가 쓴 ‘통섭’에 대한 비판 형식의 책이지만 유목주의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 배어 있다.

그는 현대 사회의 이동 현상을 비판하면서 “독창성과 혁신에 대한 숭배는 실은 무엇이든 사고파는 일에 내가 꼴찌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의 발을 밟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획일주의자가 저지르는 어리석은 짓거리”라고 주장했다.

‘통섭’에서 윌슨 씨는 ‘오늘날 우리는 전 지구를 홈그라운드로 삼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베리 씨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인간도 전 지구를 알았던 적이 없다. 이 ‘세계여행’의 시대에도 전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은 너무 커진 이동성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어디서도 살고 있지 않다. 우리가 지구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친밀하게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애정을 갖고 알고자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한 장소에 오래 살아야 한다.”

유목주의자가 숭상하는 혁신과 낯섦, 가 보지 않는 곳을 발견하는 일 대신 친숙함,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에 대해 잘 아는 것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프랑스 곤충학자 앙리 파브르가 생애 마지막 30여 년을 ‘사방 벽으로 둘러싸인 자갈밭 한 뙈기’ 안에 있는 곤충들과 그 밖의 동물을 연구하면서 소중한 발견을 할 수 있었듯이 말이다. 혁신은 인간의 재능과 수단에 의해 한정되지만 친숙함은 살아 있는 한 무한히 확대되며 삶의 한계에 의해서만 한정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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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裵)씨의 유래


개성

경남

경주

고령

고양

곡강

곤산
(고양)

곤양

금강

금성

김해

나주

남양

남원

남해

달성

대구

대전

밀양

분성
(김해)

상주

서산

선산

성산

성주

수원

아낙

안동

안성

온양

의성

전주

창녕

청산

청주

평산

풍산

풍성

함흥

해주

협계

홍해

화순

 

 

 

 

 

총 45개의 본관과 323,004명이 있다.(1985년)

경주배씨(慶州裵氏)

 

[유래]

경주 배씨의 기원은 박혁거세 탄생 전설에 나오는 신라 6부 촌장중의 한사람인 금산 가리촌장(金山 加利村) 지타(只他)가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고 총재태사에 올랐다. 그후 32년(유리왕 9년)에 금산 가리촌을 한지부로 고치고 성을 배씨로 하사하였다. 후에 한지부가 경주로 이름이 바뀌어서 본관을 경주로 하였다.
그러나 그후의 후손은 기록이 없으며, 배현경(裵玄慶)을 중시조로 하고있으나 배현경은 원래 이름이 성이 없이 백옥(白玉)이었으며 나중에 성을 배씨라고 했다고 한다. 중시조 배현경은 담력이 크고 용맹하며 지략이 뛰어나 궁예가 고구려에서 태봉이란 나라를 세울때에 이를 도와 행오에서 출발하여 기장에 이르렀다. 그러나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년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당시 동료 기장이었던 신숭겸, 복지겸, 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기로 하고 왕건에게 왕창근, 송합홍 등 점술가의 예언을 설명하면서 거사를 권하여 왕건을 고려 태조로 옹립하고 개국 일등원훈에 서훈되었으며 '고려사'에 고려 개국 4공신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919년(고려 태조2년)에 도읍지를 송도로 옮길때 개주 도찰사가 되어 새 도읍을 건설하는데 공을 세우고 궁예의 잔당을 소탕하는데 공을 세워 대상행이조상서 겸 순군부령도총 병마대장에 이르렀다.
936년(태조 19년) 그가 병으로 위독하자 태조가 친히 문병하며 '경의 자손이 있으니 그들을 잊지 않겠노라' 하고 나가자 죽었다. 왕이 부음을 접하자 가마를 멈추고 통곡하였다. 995년(성종15년)에 평산 태백성에 태사사를 세워 매년 봄, 가을에 향사한다.

우리나라 배씨는 모두 지타(태사공)의 후손이었으나 자손이 번성해짐에 따라 본관과 파가 나뉘어져 분성 배씨, 성산 배씨, 달성 배씨, 흥해 배씨, 협계 배씨, 화순 배씨, 함흥 배씨 등이 있으며, 대동보를 부정하고 다르게 족보를 만든파도 있다.

[기타]

[인구] 경주배씨는 90,027명이 있다.(1985년)

 

박(朴)씨의 유래


강남

강릉

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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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고령

고성

고흥

공주

광산

광주

구산

군위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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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포

남양

남원

남주

남평

노성

단양

달성

담양

대천

덕원

덕진

면천

영성

무안

문의

문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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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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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부안

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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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삼화

상산

상성

상영

상주

선산

설성

성신

성주

수원

순창

순천

순흥

안동

안성

압해

야성

언양

여수

여주

연안

영암

영양

영월

영천

영해

영흥

예천

우봉

운봉

울산

월성

은풍

음성

의령

의성

의형

의흥

이산

인제

인천

일성

임실

장성

장흥

전주

정선

정승

정주

제주

주계

죽산

증평

진안

진원

진주

진흥

창녕

창원

천안

청송

청주

초계

춘천

충주

태안

태인

평산

평양

평주

평택

하명

한산

한양

함인

함양

함열

함평

함흥

해남

해명

해주

현천

현풍

 

 

 

 

 

총 127개의 본관과 3,435,640명이 있다.(1985년)

 

 

[유래]

신라가 생기기 전에 여섯개의 마을(6부)에 촌장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1. 이(李)씨의 조상인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의 알평(謁平).
2. 최(崔)씨의 조상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 - 삼국유사에는 정씨의 조상으로 되어있으며 진주소(蘇)씨도 소벌도리를 시조로하고 있다.
3. 손(孫)씨의 조상인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의 구례마(俱禮馬).
4. 정(鄭)씨의 조상인 취산 진지촌( 山 珍支村)의 지백호(智伯虎).(삼국유사에는 최씨의 조상으로 되어있다)
5. 배(裵)씨의 조상인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의 지타(只他).
6. 설(薛)씨의 조상인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의 호진(虎珍).

기원전 69년 이들 여섯 촌장들이 아들을 데리고 알천의 언덕위에 모여서 백성을 다스릴 임금을 추대할것을 의논을 하고 있었다. 이때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아래에 있는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에 오색영롱한 빛이 비치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 가서 보았더니 박같이 생긴알이 있어서 알을 깨어보니 그곳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아이를 혁연히 세상에 나왔다고 해서 혁거세(赫居世)라고 하고 박에서 나왔다며 성을 박이라고 해서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정이라는 우물에 용이 나타났는데 왼쪽갈비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나왔다. 얼굴과 입술이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아서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졌다. 사람들이 이아이가 나온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알영(閼英)이라고 했다.
기원전 57년 이 두 아이가 13세가 되자 박혁거세는 왕이되고 알영을 왕비로 삼았으며 나라이름을 서라벌(신라)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신라 왕실의 56왕은 박(朴), 석(昔), 김(金)의 3성에 의하여 교체 반복되었는데, 그 중에서 박씨 왕은 시조왕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모두 10명이다.

박씨는 여러 본관 중 단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다고 하며, 모든 박씨는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끼리는 되도록 혼인을 피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씨의 세계는 박혁거세의 증손인 파사왕(신라 5대)과 일성왕(신라 7대)에서 갈라졌는데,
파사왕계는 뒤에 영해, 면천, 강릉 등으로 분관했고, 비안, 우봉(牛峰), 이산(尼山), 해주(海州) 등도 파사왕의 후손이라 한다.

한편 일성왕계는 그의 25대손인 경명왕(신라 54대)과 경애왕(신라 55대) 대에서 다시 갈라졌는데,
경명왕계는 아들 9형제에서 각기
- 첫째 아들 박언침의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 : 밀양, 반남, 진원 박씨 등
- 둘째 아들 박언성의 고양대군파(高陽大君派) : 고령 박씨
- 셋째 아들 박언신의 속함대군파(速咸大君派) : 함양, 삼척 박씨 등
- 넷째 아들 박언립의 죽성대군파(竹城大君派) : 죽산, 음성, 고성 박씨
- 다섯째 아들 박언창의 사벌대군파(沙伐大君派) : 상주, 충주 박씨
- 여섯째 아들 박언화의 완산대군파(完山大君派) : 전주, 무안 박씨
- 일곱째 아들 박언지의 강남대군파(江南大君派) : 순천, 춘천 박씨 등
- 여덟째 아들 박언의의 월성대군파(月城大君派) : 경주 박씨의 8대군파와
- 아홉째 아들 박교순(朴交舜)의 국상공파(國相公派) : 울산 박씨로 분파되었다.
한편 경애왕계는 계림대군파(鷄林大君派)를 이루었다.

박씨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가 비교적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밀성대군파의 밀양 박씨가 주류를 이루어 박씨 인구의 70∼80%를 차지하고 있는데, 밀양, 반남, 고령, 함양, 죽산, 순천, 무안, 충주박씨를‘8박’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 8본이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김씨, 이씨와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한국의 3대성의 하나이다.
박씨는 옛문헌에 314본관이 있었지만 현재는 127개의 본관이 있으며 이중 46개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의 대한 유래는 알 수가 없다.
1960년 국세조사에 36만 7271가구에 인구 2,112,076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3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인구는 3,435,640명으로 전국 가구 구성비 8.5 % 순위는 275성 중 역시 김씨, 이씨, 다음으로 제3위였다.

(울보님 서재에서 배씨/박씨만 가져왔어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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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 2006-03-03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정리 잘하셨네요,,옆지기님이 박씨군요,,

프레이야 2006-03-03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족보챙기고 자부심도 대단하답니다. 밀양박씨 청제공파 몇대손이라더라?? 경주배씨는 역시 무관의 피가 흐르네요^^ 배중손만 알았는데요..
 

[문화칼럼] 봄 열풍아 불어라
/조말선 시인

생활의 핍진함 속에서 봄은 상징성이 강하다. 실제로 봄이 왔지만 봄이 온 게 아니라는 말이 그래서 생겨났을 것이다. 기온이 몰라보게 올라간 요즘 도시의 끝까지 걸어나가 보면 비탈마다 버려진 묵은 밭을 손보는 이들이 있다. 묵은 해에 심어놓은 야채들이 그 자리에서 말라버렸거나 시금치,배추들이 땅에 납작 붙어 빛이 바래 있는 밭들은 마치 아이들의 헌 공책 같다. 갈구리 끝에서 정리돼 가는 이랑들이 새봄에 어떤 글자를 받아 적을까 얼굴을 말갛게 씻고 설레는 새 공책 흉내를 낸다. 흥이 난 내가 빨리 걷는다고 빨리 오는 게 아니며 늦게 걷는다고 더디 오는 게 아닌 봄이 겨울을 지나온 자에게는 아무런 회의도 없이 누구의 설득도 없이 스며드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계절을 이야기할 때 그 순환성을 내세우기보다 그 시기마다 불어닥치는 열풍을 눈여겨보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그만큼 무슨무슨 열풍들이 불어닥쳤다가 물러서고 또 새로운 열풍이 그 자리를 메우곤 하는 차례가 반복되는 바람에 겨울이 가는지도 모르고 오는 봄도 저만치 밀려나 보인다. 허구한 날 오고가는 계절의 순환에 감격해 하는 사람은 덜떨어진 취급을 받으므로 '얼짱 열풍''몸짱 열풍''한류 열풍''웰빙 열풍''매트로 섹슈얼 열풍''블로그 열풍' 쯤은 기본적으로 아는 체를 해야 한다. 이러한 열풍들은 자리를 바꿀 때마다 초강력태풍처럼 위력이 대단하다. 열풍을 소비하는 쪽에서는 추세에 뒤질세라 비판없는 수용을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보인다. 인터넷이 그 일등공신인 건 다 아는 사실이다.

고민 없고 반성 없이 받아들인 자본의 상품인 만큼 소비자들은 새로운 상품이 몰아치면 바로 갈아탄다. 예뻐지고 날씬해지고 싶은 욕구는 나이와 성별을 따지지 않는다. 장수하려는 욕망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덮어버렸으며,남자 연예인들은 모조리 샤기 컷을 한 '이준기'가 되었다. 고민도 반성도 없이 멋진 몸매로 장수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누구나가 바라던 유토피아다.

유토피아는 상징으로써 기능할 때 희망의 종착지로 보이듯 상징의 세계는 그대로 두는 게 낫다는 데 덧없이 몰아치는 '열풍'의 문제가 있어 보인다. 비판과 반성 없이 받아들인 삶은 주체적인 삶이 아니다. 이러한 삶은 깊이 인식할 시간도 없지만 인식의 기능조차 퇴화시켜 버린다. 그것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삶의 방정식에 나를 대입시킨 것 뿐이어서 그런 삶은 다분히 키취적이다.

모 텔레비전 방송사의 프로그램 덕에 '독서 열풍'이 분 적이 있었다. 그때 세상에는 딱 두 부류의 책이 존재했는데 방송사에서 선정한 우수도서와 그렇지 않은 도서였다. 많은 학생들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우수도서를 탐독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또 수많은 양서들이 피해 아닌 피해를 보았을 것이고,양서의 본질이 많이 왜곡되지 않았나 싶다. '웰빙 열풍' 때문에 여든 일곱까지 건강하게 살아온 한 노인이 금연을 한다고 나서고 있다. 그 노인은 수명을 조금 늘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누려온 즐거움을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보인다. 담배가 백해무익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추종을 낳는 열풍보다는 내가 주인이 된 나다운 삶을 살 기회를 빼앗기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열풍을 추종하는 삶은 신세대적인 사고로 부추기기 앞서 자연적인 삶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인다.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느림'이 거론된 지 오래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 바람은 한없이 더디다. 어찌보면 순환하는 자연에 궤도를 맞추는 느린 삶과 열풍은 부조화다. 그것은 너무 느려서 이미 우리 삶 깊숙이 스며있는지조차 모르는 게 아닐까.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의지와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살아 갈 수는 없을까. 그런 확신을 얻기 위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깊숙이 들여다보며 열풍에 의연할 수 있는 삶은 어떨까. 그때 계절의 순환이 주는 교훈은 구태의연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나다운 것을 위해 고통을 감내한 후에 오는 봄이 진정한 봄답다. 그 봄은 나로 인해 충분히 회의했으며 나에 의해 충분히 설득당했기에 적당한 때에 스르르 스며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를 무릎 아래 바짝 끌어당기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멋진 신세계'에서 존의 입을 통해 말한 헉슬리의 말을 전해 주고 싶다. "나는 편안한 것을 원치 않습니다. 나는 신(神)을 원합니다. 나는 시(詩)를 원하고,현실적인 위험을 원하고,자유(自由)를 원하고 선(善)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ㅂ ㅅ 일보 2006.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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