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가 품은 만큼 드러내보인다. 그 사실을 저메이카 킨케이드를 읽으며 다시금 깨닫는 비 오는 아침. 세상의 풍경이 달리 보이던 사춘기 첫 여름날 같다.

사실 난 엄마만큼 컸다. 엄마와 말을 할 때면 서로 시선이 맞았다. 시선이 맞다. 그런 생각이 떠오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엄마와 내 시선이 맞다. 그 생각에 잠시 행복했는데 곧 이런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람? 저 사람은 내 엄마인 애니. 난 엄마 딸인 애니. 그래서 엄마와 아빠가 날 꼬마 아가씨라고 불렀던 거다.
난 침대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고서야 흔들거리는 내 다리가 침대 아래 넣어둔 트렁크에 부딪히는 걸깨달았다. 지금의 나보다 한 살 많은 열여섯 살 때 엄마가 샀던 트렁크였다. 엄마는 그 안에 가진 짐을 다 넣은 뒤, 도미니카의 부모님 집을떠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도미니카를 떠나 앤티가로 왔다. 엄마가 원하는 대로 독립하여 혼자 살 것인지, 엄마의 아빠 뜻대로 계속 부모님 집에서 살 것인지, 그 문제로 엄마의 아빠와 대판 싸운 뒤였다. 엄마의 엄마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엄마의 아빠와 말을 섞지 않은 지 오래였으므로 그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엄마는 자기 아빠와 대판 싸웠고, 엄마가 그 내막을 소상히 얘기해준 적은 없지만, 난 언어들은 이야기를 평소 내 방식대로 이리저리 대강 짜맞췄다. 이제 이 트렁크 안에는 내 삶의 모든 것이 각 단계별로 담겨 있었고,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보더라도 나에 대해 상당히 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내 발뒤꿈치가 트렁크를 칠 때마다 내 가슴이 무너져내렸고, 난 울고 또 울었다. 그 순간 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마가 그리웠고, 어딘가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엄마와 단둘이 살고 싶었다. 하지만 또한 엄마가 죽어버려 완전히 쪼글쪼글해진 모습으로 관 속에 누워 내 발치에 놓여 있는 걸 보고 싶기도 했다. - P101

그 순간은 곧 지나갔다. 옷을 갈아입고 오후에 해야 할 집안일이 있었으므로 난 침대에서 일어났다. 엄마와 난 서로를 피했고, 코코넛우유에 생선과 함께 요리한 초록 무화과가 놓인 저녁 식탁 앞에서야 다시서로를 마주보았다. 아빠 앞이라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려 애썼지만 우리의 검은 존재가 우리보다 힘이 세서, 딱히 알아챌 만한 말이 오가지 않았음에도 뭔가 어긋나 있는 건 분명했다. 아마 우리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는지 아빠는 엄마가 오랫동안 원했던 가구를 드디어 만들어주겠다고 말했다. 사실 그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분란이 있었다. 그말에 엄마는 어정쩡하게 점잖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다음 아빠는 나를 보며 원하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트렁크."
"하지만 트렁크는 있잖아. 엄마 트렁크 말이야."
"그렇긴 한데, 내 트렁크를 갖고 싶어." 내가 대답했다.
"좋아. 우리 딸이 트렁크를 원한다면 만들어줘야지." 아빠가 말했다.
난 곁눈질로 엄마를 살폈다. 다시 반대쪽을 곁눈질하니 불빛을 받아벽에 드리워진 엄마의 그림자가 보였다. 커다랗고 견고한 그림자였고, 얼마나 엄마를 똑 닮았는지 덜컥 겁이 났다. 앞으로 사는 동안 어떤 게 진짜 엄마고 어떤 게 세상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선 엄마의 그림자인지 구분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 P102

마 체스는 내 침대 발치 마룻바닥에 자리를 잡고, 거기서 먹고 잤다. 나는 곧 할머니 냄새와 할머니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나는 소리가없으면 안 됐다. 때로 한밤중에 쏟아져내리는 뜨끈한 검댕에 갇혀 나갈길을 찾지 못하는 심정으로 허우적대면, 마체스가 내 침대로 들어와내가 다시 제정신-그때 내가 처해 있던 상태에서 그나마 제정신이라 할을 차릴 때까지 함께 있어주었다. 내가 자그마한 쉼표 모양으로 몸을 모로 웅크리고 눕고 마 체스가 커다란 쉼표 모양으로 몸을 구부리고 내 뒤쪽에 누우면 내가 그 안에 꼭 맞았다. 낮에 엄마가 식사하는 아빠 곁에서 아빠를 챙기는 동안 마 체스는 나를 구슬려가며 한 숟갈씩 먹였다. 목욕도 시키고 옷도 갈아입혀주고 침대보도 갈고, 엄마가내게 해주던 일을 전부 도맡아 했다. 마 체스와 아빠는 서로 마주치지 않게 조심했다. 상대를 싫어해서라기보다는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달라서였다. 한번은 마 체스가 아빠에게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거냐고 물었고, 아빠가 다니면서 집을 짓는다고 대답하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집? 집은 뭐하게?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땅에 굴 하나 잘 파면 될 일인데." - P119

내 침대에 누워 에프레임 씨가 양떼를 몰고 목초지로 나가는 소리 - 일어나서 아빠와 나의 목욕물을 준비하고 아침을 차릴 시간을 엄마에게 알려주는 신호를 듣는 일도 다시는 없었으면 했다. 다시는 내 침대에 누워 엄마가 옷을입고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입안을 헹구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특히 침대에 누운 채 엄마가 입 헹구는 소리를 듣는 일은 절대 없었으면 했다.
어둑한 방 침대에 누운 내 눈에 내 책-학교에서 상으로 받은 책도있고 엄마가 선물로 준 책도 있었다-과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영원히 사랑해야 마땅했을 사람들의 사진과 여덟 살 생일 때 받은 오래된보온병과 바닷가에 갈 때마다 조금씩 가져온 조개껍질이 놓인 책장이 보였다. 방 한구석에 세면대가 있었다. 바닥에는 활짝 핀 붉은 히비스커스가 그려진 흰 법랑 세면기와 그와 짝을 이루는 물단지가 있고, 다른쪽 구석에는 학교 갈 때 신던 낡은 신발과 나들이용 신발이 있었다. 또다른 구석에는 오래된 옷이 들어 있는 서랍장이 있었고 난 이 방을속속들이 다 알았다. 나의 열일곱 해 가운데 열세 해를 이 방에서 보냈다. 아빠가 원래 집에 이 방을 덧붙여 짓던 그날도 눈앞에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어디를 보든 내게 커다란 의미가 있던 것, 언젠가 내게 기쁨을 주었던 것,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방안에 누운 나는 그 어느 것도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뻤다. - P124

이 길거리에 있는 것 중에 내가 헤어지기 아쉬운 것이 있다고 하면 그건 분명 도서관이었을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엄마는 도서관 회원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어딜 가든 날데리고 다녔기에 도서관에 갈 때도 나를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엄마가 굳이 대출할 마음은 없는 책을 읽을 때면 난 아주 조용히 엄마 무릎에 앉아 있었다. 아직 글을 깨치지 못했지만 책장에 적힌 글자는 그 모습만으로도 흥미로웠다. 한번은 엄마가 읽는 책 안에 어떤 남자의 사진이 커다랗게 들어 있었다. 누구냐고 묻자 엄마는 루이 파스퇴르라고 알려주며, 그 책이 그의 일생을 적은 책이라고 했다. 내가 아직 어려서우유를 그냥 마실 수 없을 때 우유를 데워서 살균해 먹인 것이 그 사람덕분이라고, 그가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해냈고 그래서 그 과정을 ‘파스테리제이션‘이라고 부른다고 했기 때문에 그 일이 내 머리에 또렷이남았다. 엄마가 내 어린 시절 물건을 모두 보관하는 엄마의 낡은 트렁크에 내가 집어넣은 것 중 하나가 내 도서관 회원증이었다. 당시 펜스의 연체료가 있었다.
이 모든 장소를 지나가면서 나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오고가고 드나드는 사람들을 알아채지 못했고, 내 발이 땅을 디디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고, 심지어 내 몸도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눈에 들어온 그 장소들이 바닥도 천장도 없이 그냥 허공에 떠 있는 듯했고, 내가 그 모든 장소를 동시에 드나드는 느낌이었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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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2-08-09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루시도 안 읽었는데 ㅠㅠ 이거 신간이네요! 앗뜨거 신간 ㅋㅋㅋㅋㅋ😍

vita 2022-08-09 11:49   좋아요 2 | URL
저도 루시는 아직 ^^;;; 민이가 샀어요, 민이 책 제가 먼저 읽음. 이 책 읽고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독립하겠다고 난리칠까봐 숨겨놓을까 해요 ㅋㅋㅋㅋ

하이드 2022-08-09 1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루시 너무 좋아서 저메이카 킨케이드 책들 원서로도 사뒀어요. 이 책도 기대됩니다. 저메이카 킨케이드 책에 나온 여자들의 부딪힘이 정말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어요.

vita 2022-08-09 15:16   좋아요 1 | URL
오, 루시 그렇게 좋군요. 그럼 저도 읽으면서 다른 분들 리뷰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이 소설에서 엄마딸 부딪치는 거 무척 사실적이라서 좋았어요.
 
영화로 읽는 프랑스 문화
이선우 지음 / 지성공간 / 202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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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용으로 제작한걸까. 표지만 봐서는 그렇지만 실상 내용을 읽고나니 좋은 책인데 표지가 이리 나오는 바람에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는 힘들겠다는 아쉬움. 영화 하나씩 보면서 프랑스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바람도 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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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22-08-09 0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랑스 문화에 어울리는 화려한 장식은 커녕
표지가 너무 밋밋하네요 ^^;

vita 2022-08-09 09:19   좋아요 1 | URL
교재용이 아닐까 싶어요 너무 심플해서;; 내용은 좋아요 오거서님 :)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둘째 아들 장 르누아르

뒤라스의 시나리오, 알랭 레네의 연출

<게임의 규칙>은 인물의 대사가 상당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보면 대사보다 이미지가 훨씬 중요한 영화이다. 그럴듯하게꾸며진 스튜디오에서 인공적인 조명을 활용하고 안정적인 슛을구성하여 촬영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던 1930년대에 르누아르는로케이션 촬영, 자연광, 빠른 카메라 무빙, 심도 구현 등을 과감하게 시도한다. 특히, 저택에 모인 귀족들이 다 같이 사냥을 하는 시퀀스에 이르면 관객은 갑자기 이전 장면과 전혀 다른 방식의 촬영스타일로 인해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롱테이크가 유난히 눈에 띄는 이 사냥 장면은 앞부분까지의 촬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얼핏 보면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진다. 이 시퀀스가 중요한 이유는사회에 대한 비관적 관점을 은유적 이미지를 통해 강렬하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사냥개들에 의해 몰이를 당하다가 결국귀족들의 총에 맞아 죽는 토끼의 모습을 오랜 시간 쫓는데, 후작의 영지 내에서 무력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토끼의 모습은 앙드레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사냥을 하는 귀족들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건 이들이모두 비슷한 의식과 감성을 공유한 같은 계층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 사냥터는 사회의 축소판으로 기능하면서 다시 한 번 계급의 구분을 강조한다.
미학적으로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성취로 꼽는 것은 딥 포커deep focus를 통해 공간의 깊이감을 그대로 담아냈다는 점이다. 즐거운 하루를 보낸 뒤 잠을 자러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기 전 저 - P164

택의 복도에 모인 다수의 인물들을 하나의 숏 안에 담아내는 시퀀스가 오랜 시간 펼쳐지는데, 이 과정에서 감독은 상당히 입체적인 미장센을 구현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영화를 찍을 때 카메라는 중심이 되는 소수의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이들의 행위와대사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촬영되었다. 인물 뒤로 보이는 배경같은 디테일들은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딥 포커스로 촬영된 장면은 하나의 신 안에 깊이감을 구현함으로써 여러 인물에대한 동시적 연출을 가능하게 만든다. 전경부터 후경까지 다층적인 위치 선정을 통해 다수의 인물을 배치시키고 이들 모두를 동일한 선명도로 포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출은 심도를 더 잘 담아낼 수 있는 광각 렌즈의 등장으로 가능해질 수 있었다. 이 딥포커스와 관련해서는 미국 감독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이 훨씬자주 언급되기는 하지만, <시민 케인>이 1941년 작품이라는 점을감안한다면 르누아르가 오슨 웰스보다 먼저 이 기법의 진수를 보여줬으니 르누아르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이처럼 <게임의 규칙>은 내러티브적 메타포와 새로운 카메라테크닉을 기반으로 양차 대전 사이의 프랑스 귀족 사회, 상층부르주아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는 냉소적인 위트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재미있는 점은, 사회 비판적인 이 영화의 모티브가 고전 문학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8세기 프랑스 극작가 보마르셰의 희극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구상하여, 영화가 시작될 때 〈피가로의 결혼>의 대사가 등장한다. <피가로의 결혼>은 프랑스 혁명 직전에 상연된 작품으로 역시나 혼란스러운 애정 관계를 소재 - P165

로 삼아 귀족 사회의 위선을 조롱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런고전의 모티브를 차용한 것과 발맞추어 형식적으로도 연극적인스타일을 빌려온 부분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클래식 음악을 적극활용하여, 영화의 시작과 끝은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장식되고, 중간에 쇼팽, 요한 스트라우스 등의 음악도 종종 들려온다. 이렇게, 르누아르는 점잖아 보이는 포장지를 두르고 그 안에는 신랄한 비판을 담는 전략을 취한다.
<게임의 규칙>을 포함해서 르누아르는 노동자들이나 평범한 사람들이 처한 사회적, 경제적 환경을 다루는 의식 있는 작가였다. <랑주 씨의 범죄>(1936)는 노동계층에 대한 성찰과 정치성을 보여주고, <위대한 환상>(1937)은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휴머니즘을보여주는 일종의 반전영화이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서 비판적인리얼리즘과 동시에 주관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도 구현해 냄으로써 시적 리얼리즘의 영역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사조와 상관없이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하나로 평가받기에 이른것이다. 시적 리얼리즘이 점점 형식적인 부분에만 치중해서 본래의 의의를 잃어갈 때도 르누아르는 지속적으로 당대 현실을 고발하는 사회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했다. 특정 장르에 구애받지도 않았고, 주제도 다양했으며, 표현 방식도 다채롭고, 또 촬영을 할 때는 배우에게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고하니, 이 정도면 영화를 하려고 태어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르누아르는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 P166

가게 되었고 할리우드에서도 작품 활동을 계속한다. 개인적인 평가이지만 할리우드 시기에 만든 르누아르의 작품들은 프랑스에서 만든 작품에 비해 매력이 떨어지는 느낌이 있다. 이후 인도와 이탈리아를 거쳐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서 1950년대부터 컬러로 작품 활동을 재개하는데, 이때부터 또다시 그만의 매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이런 걸 보면 예술가에게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특별한 분위기나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프렌치 캉캉>(1955), <엘레나와 남자들>(1956) 등 프랑스로 돌아와 연출한 컬러영화를 보면 아버지 르누아르로부터 물려받은 색채와 빛에 대한 감각도 드러난다. 1979년 사망하기 전까지 르누아르는 총 39편의 장편을 연출했는데, 그 명성에 비춰 보면 대단히 많은 수는 아니지만 하나하나가 다일정한 수준에 올라 있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대단한 감독임을새삼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에 일침을 가하면서 동시에 스타일적인 측면에서도 관습을 깨는 시도를 감행함으로써 영화 미학의 한 장을 새로 열었다는데서 르누아르는 프랑스 영화에 관심이 있는 시네필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 P167

"너는 히로시마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라는남자의 대사로 본격적인 영화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자, "나는 모든 것을 봤어요."라고 항변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어서 그녀는 말한다. 병원, 박물관, 영화, 그리고 뉴스를 통해히로시마의 아픔을 다 봤다고. 하지만 남자는 반복한다. 너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이 대사는 <히로시마 내 사랑>을 포함하여 역사를 다룬 모든 영화를 통해 레네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영화나 소설이라 하더라도 과거의 시간을 있는 그대로 재현할 수 없으며, 관객 또한직접 겪어 보지 못한 사건을 예술 작품을 통해 온전히 이해할 수없다. 어떠한 박물관도 과거를 비슷하게 모방해 낼 수 있을 뿐, 똑같이 만들 수는 없다. 이러한 재현 불가능성, 어떠한 기교로도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현실과 영화적 재현의 간극을 강조함으로써 히로시마가 되었든 나치 점령이 되었든 인류가 겪은 비극적인역사에 대해 누구도 감히 보았다고,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음을<히로시마 내 사랑>은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전달한다.
비극적인 공동의 역사를 에로틱하기까지 한 사적인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소환하는 독특한 방식을 통하여 레네는 역사를 어떻게 돌아볼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주인공들의 이름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두 남녀의 이름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등장하지 않으며, 심지어 엔딩 크레딧에도 ‘그녀’와 ‘그’로만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그녀와 그는 서로의 이름을 느베르와 히로시마로 부른다. 주인공에 - P199

게 개별적인 이름을 부여하지 않은 설정은 보편성을 지향하고자하는 레네의 의지를 보여준다. 두 남녀의 조금은 특별한 러브 스토리를 바탕으로 비극적이고 처참한 역사를 반추하게 만드는 아이러니한 연출을 통해 과거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히로시마 내 사랑>은 2차 세계대전과 히로시마 원폭 사건이라는 비극적 역사에 대한 기억을 품고 있는 두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반전과 화합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느베르Nevers라는 도시의 이름과영어 단어 never의 언어적 유사성 또한 의도되었으리라 짐작할 수있다.
역사와 통속적인 소재를 시적인 이미지와 대사를 통해 예술적으로 연출해 내는 영화 미학의 성취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히로시마 내 사랑>은 개봉 당시 대중적, 비평적 성공 모두를 거뒀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그동안의 영화사를 뒤집어 버린 작품이라고평했으며, 고다르는 질투가 날 정도의 작품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 외에도 많은 비평가들이 새로운 영화이며 지금껏 전혀 보지 못했던 영화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이 작품은 현대 영화의 진정한 시작이라는 평가까지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순수하게 영화적인 완성도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껄끄러움과 불편함이 남는다. 일본의 오랜식민 지배를 받으며 수많은 희생을 치렀고 일본의 패전으로 겨우해방을 맞이한 비극적 역사를 가진 한국인의 입장에서 <히로시마 내 사랑>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 없는 어려운 - P200

영화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 영화를 향해 유럽인의 자기중심적 관점, 아시아 역사에 대한 몰이해 등을 보여준다는 비판도 종종 제기되곤 한다. 나 역시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매번 감탄과 동시에 일종의 한계를 느낀다. 누군가에게는 미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훌륭해 보이는 작품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이 작품을 권하고 싶기도 하다. <히로시마 내 사랑>을 감상하는 경험은 한 편의 영화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꽤나 무겁고 진지한 시간이 될 것이다. - P201

조직의 안위를 위해서는 당연한 결정일 수도 있겠으나 그동안 쌓아 온 우정을 떠올린다면 배신이기도하다. 이 결정을 내리는 순간 제르비에의 얼굴은 콘트라스트 효과에 의해서 반은 어둠에 묻힌 상태로 연출되어 도덕적 모호함을드러냄으로써 악당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로 표현된다. 그의 양심을 괴롭히는 것은 대의가 아니라 동료에 대한 윤리적 선택이다. 이처럼, <그림자 군단>은 일반적으로 레지스탕스에게 기대되는위대한 활약은 배제하고 인간적인 측면에서 조명함으로써 각 개인이 겪는 고뇌와 배신,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영웅이면서 동시에 범죄자로 보이도록 하는 이중적 재현은 멜빌이 자주 이용하는캐릭터 구축의 방식이다. 멜빌의 영화에는 절대적 악인도 선인도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인물들은 자신의 목표를 향해 경주마처럼 달려가는과정에서 법이나 윤리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림자 군단>의 레지스탕스들은 정의의 사도들이 아니다. 이분법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모호하고 불명확한 캐릭터로 묘사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림자 군단>은 레지스탕스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저항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주인공들은 위태로운 삶을 지속하는 과정에서 조직을 위해, 때로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기존의 도덕적 판단에 위배되거나 감정적 동요를 넘어서는 결정을 지속해 나간다. 이처럼 개인적 가치관의 혼란과 고뇌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멜빌은 인물들의 결정에 대해 어떠한 변명도 더하지 않는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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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07 0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제가 더 멋있는데...
밤의 여행자...^^

vita 2022-08-07 10:18   좋아요 1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책 읽고나니 원제가 더 넓게는 작가의 뜻을 반영했다고 여겨요, 한역본 제목도 마음에 들어요. 마음산책에서 끌어안기 테마로 시리즈로 계속 나올듯 해요. 은근 기대하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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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 클레르*는 몽트뢰유에 ‘여성의 집‘을 설립하고, 그후엔 연대의식과 생태학과 자기관리에 토대를 둔, 나이 많은여성들을 위한 요양원인 ‘바바야가**의 집‘을 설립했으며, 노년에 관한 모든 지식을 전수하는 대학을 창립한 인물이다.
성숙한 나이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진짜‘ 삶에 눈뜨게 되었다. 그녀는 사회가 강요한 결혼 생활, 사회적 외모, 틀에 박힌행동들을 떨쳐버리고,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열렬한 페미니스트가 되었으며, 어머니가 병들자 당신의 노년을 행복하게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세상을 뜨기 2년 전인 2014년에 내가 이 탐구를 시작했을 때 그녀는이렇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우리 늙은 여자들은 깨친 전위대이지요. 늙은 세상은 우리 뒤에 있고,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낙태와 피임의 자유를 위한 운동에 앞장선 프랑스의 페미니스트(1927~2016).
** 슬라브 신화에 등장하는 마녀. - P36

맞으러 달려갑니다. 우리는 늙은 다리로 달리는데, 우리의 다리는 덜 빠르되 효율적이고, 중요한 건 머리가 여전히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는 겁니다. 창조하고 발명하고, 관습적인 것들, 고정관념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는 내 삶이 대단히 열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나이에도 고삐 풀린 암망아지처럼 우리가 아직 망가뜨리지 않은 풀밭을 가로지르며 질주하니까요. 남자들은 과거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과거가 그들에게는 위엄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제 눈에는 남루해 보여요. 우리 여자들은 미래의 씨를 뿌리고, 새로운 사회가 도래하게 하려는 사람들이지요." - P37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결코 자기 나이에 신경 쓰지 않았고, 성적 욕망을 비롯한 강렬한 욕망을, 삶이라는 술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맛보려는 욕망을 아주 늦게까지 몸으로 느꼈다. 그렇다고 그녀가 지난 시간을, 눈부신 청춘기의 시간을, 아름다움의 시간을 기억하지 않은 건 아니다. 향수를 느끼지 않은 건 아니다. 그녀의 비밀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나 혼자만 볼 뿐, 한 번도 말해본 적 없는 그 이미지를 생각한다. 그것은 언제나 한결같이 감탄스러운 침묵 가운데 있다. 그것은 내 마음에 드는 나의 모든 이미지 가운데 - P37

내가 나를 알아보고 흡족해하는 이미지다." 마르그리트는 수맥을 탐지하는 재능으로 그녀는 정말 땅속 어디에 물이 있는지 찾아낼 줄 알았다―시간을 주시했고, 세월을 적으로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물리적 죽음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글쓰기가 중단되는 걸 더 최악의 일로 두려워했다. "글을 쓰지 않을 때는 절대 닫히지 않는 숲속을 나아가야 한다. 닫히는 숲에서는 갇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지막 숨을 내쉴때까지 글을 썼으며, 거의 죽었다가 여러 차례 다시 돌아와경계의 지혜를, 유독한 통찰력을, 산 자들에 대한 맹렬한 질투를 펼쳐 보인다. 더는 정말 산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운 그녀는 선사시대 나이의 힘을 발휘한다. "해보라고. 당신들은나를 꺾지 못해. 난 여기 살아 있지 않으니까. 그 누구에게도그렇고. 심지어 나에게조차." - P38

나탈리 사로트"는 자신이 별 지장 없이 노년에 이른 것에아연해했다. 작가는 『굴성屈性Tropismes』에서 노화에 대해 탁월하게 잘 말했는데, 당시 ‘신인 작가‘이면서 첫 책이었다―우리 인식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불가해한 변화를 환기하며 통찰력과 자기 성찰과 유머로써 노화의 모든 단계를 살펴볼 줄알았다. 그녀는 노년을 축복처럼 체험했고, 여든셋의 나이에『어린 시절Enfance』를 썼다. 이 눈부신 작품에서 그녀는 눈에보이지 않는 걸 드러내고, 어린 그녀가 세상을 배우는 실습장이었던 정신적 궁전을 말로써 말끔히 정돈해냈다. 노화는거의 탄생의 시점으로 발가벗고 돌아가게 한다. "그래서 정말 그럴 생각이에요? 어린 시절의 기억을 환기할 생각이냐고요? (・・・) 이 말이 거슬려서 좋아하지 않겠지만, 꼭 들어맞는건 이 말뿐이라는 걸 인정해야 해요. 그러니까 당신은 (・・・) 기억을 떠올리고 싶은 겁니다. 비비꼴 것 없어요. 분명히 그거예요."
그녀의 아파트로 찾아갔던 일이 기억난다. 그녀는 글 쓸 때

*20세기 중반의 프랑스 누보로망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 - P41

즐겨 찾는 맞은편 카페로 가자고 했다. 나탈리는 박자를 맞춰걸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은 큰 모험 같았다. 나탈리는 조심조심 걸음을 내디뎠다. 건너편에서 웬 부인이 감탄과 빈정거림이 섞인 듯한 표정으로 나탈리를 지켜보았다. 그녀가 마침내 건너편에 이르자 부인이 요란하게 박수를 보냈다. 나탈리는 툴툴거렸다. "웬 오지랖이람. 저 여자는 자기가 뭐라도되는 줄 아나? 늙는다는 건 쪼그라들었다는 인상을 주지 않고 전에 하던 대로 계속할 줄 아는 겁니다. 내 머릿속에서 나는 여전히 열여덟 살이에요. 저 여자는 나를 몇 살로 생각할까요? 메테르니히 공주가 여든 살에도 연애를 한다는 데 놀란 사람에게 뭐라고 응수했는지 아세요? ‘이제 겨우 여든 살인걸요. 무슨 명목으로 내게서 사랑을 박탈하려는 거죠?‘ - P42

겨울 오후가 끝나간다. 아니 에르노는 어둠이 내리기 직전, 늙어서 죽어가는 고양이를 지켜보며 느꼈던 슬픔에 대해 내게 말한다…………. 그녀는 서재 앞의 큰 전나무들을 가리키며 말한다. "아주 늙은 나무들은 세월이 가면서 가장 낮은가지들을 떨궈요.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그렇다고 슬퍼할 건없어요. 내 피부, 내 몸도 늘어지고, 가슴도 처지죠. 일종의추락입니다. 자연의 법칙이니 내겐 거슬리지 않아요. 내 경우, 늙는다는 느낌은 욕망의 상실과 함께 왔지요. 남자들과연애하고 싶은 욕구가 더는 없었어요. 사실을 말하자면 더는고통받을 용기가 없었지요. 물론 저항할 수는 있어요. 리프 - P51

팅? 모두가 그러듯이 나도 생각해보긴 했죠. 시술을 받기로 마음먹었다가 공교롭게도 건선이 심해서 포기했어요. 그 후로는 세월과 맞서 싸우지 않기로 결심했죠."
나는 그녀가 "제 나이로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제 나이이고‘ ‘제 나이로보이며‘, 더는 예전처럼 정원 일을 하지도 않고, 온종일 걷지도 않으며, 자다가 수시로 깨고, 그래서 아침이면 흐리멍덩하다고 느끼고, 점심 먹고 나면 잠깐이라도 낮잠을 자고 싶어진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저 웃을 뿐, 한탄을 늘어놓길 바라지 않는다. 살면서 그녀는 할 수 있는 걸 해왔고, 후회를 느끼지 않으니, 이제 그녀의 삶은 멈출 수 있다. 충분히 채워졌으니, "중요한 건 존재감이죠. 내겐 내 삶이 아닌 다른 삶이있어요. 나이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요." - P52

아흔 살 생일에, 아카데미프랑세즈에서 마련한 우정 어린파티에서, 문명의 미래에 관한 최고 거장 가운데 한 사람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즉석에서 나이 드는 경험에 관한 연설을 했고, 그 연설을 로제 폴 드루아가 저자의 승인을 얻어옮겨 적었다. - P109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이런 고령에 도달한 건 내 평생 가장놀라운 일 중 하나인데, 마치 망가진 홀로그램이 된 느낌입니다. 망가진 홀로그램은 더는 온전한 일체성을 갖지 못하지만, 모든 홀로그램이 그렇듯이 남아 있는 부분이 전체에 대한 완전한 표상과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지요. 그러니 오늘날 내게는 실재 내가, 한 인간의 4분의 1 혹은 절반일 뿐인 내가, 전체에 대한 생각을 아직 생생히 간직하고 있는 가상의 내가 있습니다. 가상의 나는 책을 쓸 계획을 세우고, 여러 장을 구성하기 시작하고는 실재의 나에게 말합니다. "계속 이어가는 건네 몫이야." 그러면 실재의 나는 가상의 나에게 말하지요. "그건 네 일이야. 전체를 보는 건 너뿐이라고. - P110

노화는 삶의 아름다움을 경험했기에 치러야 하는 대가일까? 덤이라는 생각이 우리의 상상계를 가로막는다. 꼭 우리가 무언가를 덜어서 이 덤의 값을 치러야 할 것만 같다. 욕망도, 가능성도, 미래도 줄여서. 계속되는 삶의 기쁨은 어째야 하나? 죄책감을 느껴야 할까? - P110

가와세 나오미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고 할머니 우노의 슬하에서 자랐다. 아주 젊은 나이에 영화감독이 된나오미는 수퍼8 카메라를 한 대 샀고, 할머니를 자기 영화의중심 주제로 삼았다. 그녀는 수십년동안 사시사철 온갖 상황에서 할머니를 촬영했다. 할머니가 늙어가는 걸 보기 위해서였다. 카메라는 주름들, 기복들, 틈새들, 느린 변화들을 세세히 묘사하고 탐색하는 손길이 된다. 우리는 시간이 할머니의 얼굴과 몸에 작업한 아름다움을 몇 시간 동안 보도록 초대받는다. 나오미는 할머니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딱한 번만 예외였는데, 할머니가 너무 늙고 지쳤다고 느껴서 이젠 네 양모 노릇을 그만해도 되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다. 그때 나오미는 화를 버럭 내며 할머니에게 공격적으로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는 데 나이는 핑계가 될 수 없고, 그럴 - P124

이유는 더더욱 못 된다고. 나오미는 할머니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게 된 뒤에도 계속 촬영을 이어간다. 우노는 97세에 세상을 떠난다. 나오미가 할머니에게 바친 마지막 영화의 제목은 〈흔적〉이다. 영화의 마법을 통해, 영화에 대한 믿음을통해 나오미는 노화를 장엄한 변화로 바꿔놓고, 환히 빛나는할머니의 부재하는 존재를 보여준다. - P125

자기 목소리를 낮춘다면 늙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게 아닐까? 개인적 탐구의 칼날을 갈기, 호기심을 자극하기, 자기자신보다 타인들에 몰두하기. 새 리듬을 찾기, 새로운 칸막이들을 열기, 놀라기, 더는 잃어버릴 게 없으므로 명령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기, 과거의 것에 틀어박혀 탄식하지 말고, 바로 이 순간 자신의 가능성들을 간직하는 행운을 알기. - P162

"두려움과 불안에서 자기 자신과의 합일로 가는 길을 걷기까지 때로는 일생이 걸린다. 삶에 동화되기까지."
-샤를 쥘리에 - P168

제기되는 건 윤리와 인구통계학 차원의 문제들이다. 최근에 노인의 수가 60퍼센트나 증가해서 65세 이상 노인은 1300만 명이 넘는다. 왜 우리는이렇게 수가 많은데 이렇게 고분고분할까? 2018년 5월 국가윤리자문위원회는 노인들의 ‘게토화‘를 고발했고, 노인들이 처한 수치스러운 조건을 부각했다. 요양시설에 노인들을 수용하면서 수치스러운 상황이 야기되고, 그 상황이 다시 수치스러운 일들을 야기하는 것이다. 위원회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 사회적 배제는 아마도 노화가, 삶의 끝이, 죽음이 의미하는 것에 대한 집단적 부정과 결부된 것으로 진짜 윤리적 문제들을 제기한다. 특히 인격 존중의 관점에서 그렇다." 50년 전 보부아르가 [노년]에서 쓴 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삶의 의미는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의 문제가 된다. 우리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 모른다면 지금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다. 이 늙은 남자, 이 늙은 여자에게서 우리를 알아보자. 우리가 우리의 인간적 조건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싶다면 그래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더는 노년의 불행을 무심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문제로 느낄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문제다." 물론 예전이라고 더 나았던 건 아니다. 1980년대까지 존재했던 대규모 호스피스 병동들의 시대가 지나간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 P179

스페인어로는 은퇴자라는 말을 쓰지 않고, 후빌라도스 jubilados, 즉 삶의 환희에 들어선 사람이라고 한다. - P190

BUS조앤 디디온은 남편의 죽음과 딸의 질병 이후에 쓴 책인 『마법 같은 생각의 해The Year of Magical Thinking』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그 질문은 그 후 나를 떠나지 않고 있다.
"죽은 자들이 반드시 돌아와야만 한다면, 어떤 지혜를 가지고 돌아올까? 우리가 그들을 마주할 수 있을까? 그들의 죽음을 허용한 우리가?" - P200

동물은 죽음이 가까우면 서로 결속한다. 우리는 아니다. 왜일까? 1964년 케냐의 야생보호구역에서 경비원 윈터는 서른 마리 코끼리 무리 가운데 세 마리를 죽여야 할 임무를 맡았다. 그는 처음 총을 몇 발 쏜 뒤 펼쳐진 지옥 같은 광경을묘사했다. "코끼리들이 갑자기 동요하더니 사방팔방으로 육중한 몸을 돌리고 끔찍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죽은동료들을 일으키려고 시도했다." 코끼리들은 상아까지 부러뜨려가며 죽은 동료들을 일으키려고 거듭 시도했다. 그러다코끼리들은 멀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돌아와 또 죽은 동료들을 일으키려 했다. 헛된 시도는 세 차례나 계속되었다. 얼마후 무리의 ‘우두머리‘가 마치 죽은 친구들에게 ‘인사‘라도 하듯 몸을 일으키더니 나머지 무리와 함께 숲속으로 달려갔다. 코끼리들은 자기 죽음이 다가오는 걸 느낄까? 가장 나이 많은 코끼리들은 무리에서 떨어져 먼저 간 연장자들이 죽기 위해 찾아간 곳으로 간다. 우리는 돌고래들이 친구의 죽음을겪고 난 뒤 밥 먹기를 거부하는 걸, 기러기들이 비명을 내지르고 방향감각을 잃고 더는 날지 못하는 걸 보았다. 숲속의 암컷 침팬지들이 새끼가 죽고 난 뒤에 관찰되었다. 어미 침팬 - P206

지들은 죽은 새끼들을 안고 몇 주 동안 내려놓지 않았다. 데리다는 말했다. 그렇다. 동물들도 죽으며, 동물들도 죽음과 애도와 대단히 의미심장한 관계를 맺고 있다. 비록 그들이 그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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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22-08-0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탈리 사로트는 제게도 낯선 인물이지만 궁금!

vita 2022-08-06 21:3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찾아서 읽어보려구요 혜윰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