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소년도 아는 것을 왜 마흔아홉 아줌마는 머리로는 알지만 심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걸까 했다가 방금 전에 심적으로도 이해가 되어 푸근해진 마음으로 간만에 일기를 쓴다. 아이가 좋아하는 유투버는 열아홉인데 소소한 일상의 도전으로 컨텐츠를 엮어나간다. 스쳐지나가는 인연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영원으로도 이어질 거 같다 싶은 인연들에 대한 기대로 말을 끝맺는 열아홉 아이가 얼마나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할지 기대가 생겼다. 3분짜리 병맛같은 유투브 하나를 보고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질 수도 있군, 싶어 또 소소한 기록.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지만 간만에 영차. 물론 푸근하지 않을 때는 잔인한 말을 속사포처럼 내뱉는 게 특기이긴 하지만. 특기를 살려 잔인한 말을 속사포처럼 랩으로 내뱉어 릴스로 올리면 엄마는 금방 스타가 될 거야 라고 딸아이는 이야기했다. 잔인함은 진지하고 냉철하다. 그래서 표면 위로 잔인하게 말을 만들어 가슴을 후벼파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속사포처럼 내뱉을 때는 이미 이성을 잃고난 후다. 이성적으로 그러한 행동을 한다면 또 그건 그것대로 좋을 수도 있겠지만 사회적인 관계성은 제로 이하로 떨어질지도. 그래도 어디 한번? 진지하게 5초 정도 생각해보았다. 그래볼까? 라고. 


 브래디 미카코 언니의 책을 한 권씩 천천히 읽고 있다. 뇌가 정화되는 느낌이 인터넷을 잘 사용하지 않게 되어 그런지, SNS를 좀 자제한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구나 이 정도. 궁금하리라 여겼으나 의외로 담담해지기도. 끊어지고 단절되는 시간이 필요했구나 알았다. 읽는 시간은 더디 흘러갔고 그게 나쁘지 않았다. 활자들이 눈에서 사라지다 흩날리는 경험은 눈의 이상보다는 심리적인 거 같은데 라고 스스로 진단내리고 책을 좀 멀리 했다가 다시. 취미에 당당하게 읽기라고 더 이상 쓰지 못하게 생겼다. 읽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흐릿해진 경우. 운동 강도가 세졌으니 이 정도는 먹어야겠지 여겼고 그 결과 돼지가 되었다. 먹으면 먹는대로 그대로 살로 가는 몸. 안일해지는 순간 정직하게 반응하는 것이 인간의 표정이고 인간의 몸이라는 걸 또 깜박하고. 오 끔찍해,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들렸고 급하게 운동 강도도 보통으로 돼지처럼 먹던 단 군것질도 좀 줄이기 시작했다. 극단적으로 탄수화물을 줄이고 정제당이 들어간 식품을 끊으면 살은 급속도로 빠진다. 그렇다고 해서 식욕이 있는 마당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먹는 맛을 잃는다는 건 살 맛을 잃는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살 맛을 잃을 경우 먹는 활동은 극히 어리석어 보이니까. 하지만 먹는 활동에 탐닉되어 끝없이 먹을 거 이야기만 하는 것도 역시 비호감이다. 정제당도 줄이긴 했지만 열심히 먹는 덕분에 다시 붙은 살은 의외로 쉬이 떨어져나가지 않는다. 역시 중년이란. 다시 느끼면서. 얼굴에 오동통 살이 붙은 걸 본 이들은 좋아한다. 이제서야 건강해보이는구나, 라고. 


 모임이 있을 때 자주 가던 이탈리아 밥집에서 딸아이와 이른 저녁을 먹고 한 시간 동안 느긋하게 청계천을 걸었다. 여기에서 자주 모여 와인도 먹고 식사도 하고 그랬는데 말야, 그게 마치 까마득한 옛날 일로 여겨지네, 말하니 시간이 흐르고 인간들은 왔다가 다시 떠나가곤 하지. 라고 피드백을 보인 건 열일곱 소녀. 마치 인생을 깨달은 것처럼 이야기하지마 꼬맹아, 라고 조개를 껍데기에서 까서 입 속에 넣으며 중얼거리니 그래서 아쉬워? 하고 아이는 물었다. 찰랑거리는 심연에 얼굴을 찰나 들이박고 물었다. 아쉽니? 연아,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순간은 정직하다. 아니, 전혀. 응, 그러니까 말야, 엄마, 라이프란 그런 거지, 라고 아이는 대답했다. 울고 가슴을 쥐어뜯어봤자 그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인간을 그렇게 쉬이 보면 안 되는 것, 이라는 말이 왜 자연스럽게 떠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인간들은 다 거대한 착각을 하며 살아가는데 자기 시나리오대로 되리라고 여기는 건 또 뇌의 가장 크나큰 고집.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상대방 탓을 하기 전에 말귀를 제대로 오픈할 수 있도록 소통하려고 애썼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역시 육아를 하는 입장이기도 해서. 아이를 키운다는 건 동시에 나를 키우는 일이기도 하다. 반백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사는 건 쉽지 않고 배워야 할 것들 투성이다. 할머니 앞에서 투정을 부렸더니 할머니는 희망과 빛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청춘이다, 아가. 그러니 두려워하지도 겁먹지 않아도 괜찮아. 무섭고 가슴이 찢어질 거 같아도 네 앞에 있는 건 빛이니까. 아이를 키우며 나 자신도 키운다. 그 과정이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지루한 일도 아닌지라. 


 브래디 미카코 에세이 안의 소년이 이렇게 말했거든 하면서 알려준 그 말을 아이는 그런 식으로 써먹었다. 라이프란 그런 거지. 각자 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살아가지만 그 시나리오대로 착착착 현상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운도 불운도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 내가 현명하고 지혜로워 그러는 게 아니라 나도 사는 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그걸 이해해보려고 내 나름대로 애를 쓰다보니 이 자리에 온 거다, 라고 미국의 어떤 심리학자는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다. 그러리라고 예상했다가 덜커덕 발목을 잡혀 좀 스크래치가 나고 말겠지 하고 여겼다가 발목이 떨어져나가는 경우도 있고. 뎅강 잘려나간 발목 자리를 허하게 바라보다가 이런, 계산을 잘못 했군, 하고 쯧쯧 혀를 차기도. 하지만 잘려나간 발목 자리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한탄만 하기에는 너무 흥미로운 것들이 많은 세상이다. 잠깐만 내 안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세상을 마주하면 속사포처럼 새로운 것들이 엄청나게 쏟아지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홀로 안으로 틀어박히는 시간도 나름 좋았다. 고통은 이왕지사, 라고 하지만 가급적 겪지 않는 게 좋습니다. 미친 개에게 물려봤자 끔찍한 기억들만 한가득 생기니까, 라고 또 어느 뇌과학자는 친절하게 유투브에서 말했다. 탓하지 않고 서로를 안아주는 시간은 좋다. 모두에게. 하지만 까닭없는 비난이 그저 어느 한 부분 트리거가 되어 비난의 화살을 쏘게 될 경우에 그 화살 하나는 무수한 화살들이 되어 상대방의 심장을 짓뭉개어 버린다. 이건 관계성에 관련된 이야기인지라 그 화살을 쏘는 이가 내가 될 수도 혹은 그 화살을 맞는 이가 내가 될 수도 있다. 왜 굳이 화살이어야 하는가, 그게 또 의구점이기도 하지만. 시작은 화살 하나지만 그 화살촉에는 선의가 담겨있지 않다. 악의와 분노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화살촉. 음 이건 뭘까. 


 변호사를 만나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커피를 마셨고, 아는 지인이 소개팅을 주선해주어 소개팅을 했다, 하지만 서로 이상형이 아닌지라 가끔 커피나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내가 매일 지나다니는 곳에 있기도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서로 아는 이들 이야기가 나왔다. 웃음이 좀 비실비실 나오기도 했다. 세상은 이렇게 비좁은 거다, 한 사람 건너 또 한 사람 건너면 겹치기 일쑤. 인간은 그래서 악하게 살면 다 돌아오더라구요, 라고 그가 이야기했다. 정말 그렇다고 여겨요? 라고 아이스라떼를 한 모금 삼키고 물어보니 그는 머리를 좀 굴리는듯 하다가 답했다. 악한 말과 악한 행동이 업보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나쁜 말을 했구나, 나쁜 행동을 했구나, 라는 걸. 입술을 비죽이다가 그걸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들도 꽤 있던데, 지능과 무관하게, 심보와 무관하게 라고 말하니 그런 바보들에게까지 왜 신경을 쓰며 살아야 합니까, 이렇게나 바쁘고 할 일이 많은 시대에, 라고 답하며 그는 시니컬하게 웃었다. 오, 제법이군, 속으로 생각했다. 과거의 일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하더니 계산해볼까요 해서 대충 계산을 해보니 12억. 종이냅킨 위에 적힌 셈법을 헤아리다가 으흠 12억이라니, 하고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충격이 좀 크군요, 소리내어 말했지만 뭐 그러려니. 


 판사 언니가 왜 그렇게 나를 말렸는지 그 까닭은 좀 이해가 확실히 되었다. 그때 느낀 것들. 그런 것들을 다시 느낄 필요는 없겠지. 인간이 제 속내를 드러내보이는 건 언제나 다급하고 긴급할 때와 많은 것들을 손에 움켜쥐고 있을 때다. 이때 셈법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 그걸 보면 그 인간이 보인다. 법정을 나오면서 다시는 저 자리에 앉고 싶지 않군, 했던 기억도. 까마득한 옛날 같지만 불과 얼마 전이다. 바람은 전혀 불지 않지만 뜨거운 태양이 서서히 열기를 낮추는 걸 바라보면서 아이와 만나 식사를 하고 청계천을 걸으면서 12억이란 숫자를 다시 떠올리고 그 떨어져나간 발목 자리에서 피어날 것들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뎅강 잘려나간 발목에서 피어나는 게 있다면 그건 조금 더 굳센 것들이 될 테고 그 굳센 것들이 나를 조금 더 단단하고 더 부드럽게 만들어주면 좋겠다. 호기심에 사로잡혀 태양과 함께 반짝거리는 은빛 달을 응시하면서 마음 속으로 되뇌이는 말들. 돼지가 된 마당에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지, 근육도 잘 생기지 않는 마당에, 싶어 먹고 마시는 욕심을 줄이기로 했다. 과하게 먹고 마시는 건 욕심이고 그건 어떻게든지 드러나기 마련이다, 감추려고 해도. 근육을 허락하지 않는 몸이로군 하지만 헬스장에서 내내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저질체력에서 이 정도까지 온 것만 해도 장한 것. 장하다고 하지만 조금 더 애쓰면 될 터인데 그 '조금만 더' 이게 힘들다. 바운더리의 벽이 이렇게나 강해요, 마치 보이지 않는 벽처럼. 나이트 죽순이로 보이는데 의외로 성실하네, 라는 말을 경상도 아줌마에게 들었다. 어깨를 탁 치면서 왜 이렇게 솔직하십니까, 웃으며 말하니 내가 나이트 죽순이로 살아봤으니까, 라는 말을 듣고 웃음이 더 터져나왔다. 요가할 때 우리만 키득키득거리다가 선생님한테 지적질 당하기 일쑤. 6월도 금방 지나갈듯. 할 일이 좀 많아졌다. 기록하려는 욕망은 한여름이 되면 다시 지글지글 끓어오를 것이다. 다 좋은데 어깨가 너무 굽었네, 라고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이야기하시고 엎드려 가만히 힘을 빼며 에너지가 차오르는 시간이 되면 요가원 모든 선생님들이 다가와서 등을 누르고 어깨를 낑낑거리며 잡아당기는데 그럴 적마다 웃음이 차오른다 저 뱃속 깊은 곳에서. 운동 강도는 보통, 하지만 다시 차오르는 웃음은 그득. 생각은 이어지고 궁금한 것들도 이어지고. 



 + 밑줄긋기는 [여자들의 테러] 




16세의 후미코는 조선에서 일어난 일을 담흑의 눈동자로 차분히 읽어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인간의 완전한 독립이란 목숨을 걸고 구하는 것임을.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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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6-10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평생 한결같이 게으름뱅이인지라 항상 무엇을 했던 것보다는 ‘하지 않았‘던 것에 후회가 많아요. 열일곱 소녀의 조언을 마음에 새기고 오늘 하루도 시작합니다. 돌아오지 않는 시간은 흘러가게 두고, 오늘을 잘 누려봅시다.
굿모닝~~~ 많이 늦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곧 점심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5-06-10 10:17   좋아요 1 | URL
얼마 전에 97세 갓 넘긴 어르신 말씀에 따르면 뇌가 잘 돌아간다는 전제하에 일평생 해온 것들과 만난 이들과 일어났던 일들을 기억하며 기억하며 기억하며 나날들을 보낼 때가 많다고 합니다. 단발님 말씀을 듣고보니 할머니 말씀 겹치면서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보다는 앞으로 할 무수한 것들과 앞으로 만날 무수한 이들을 꿈꾸는 편이... 아 오늘을 잘 누려봅시다, 가 그 이야기군요.. 아침 너무 많이 먹어서 점심은 가볍게!

책읽는나무 2025-06-11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저기 성실한 사람들이 많아요.
성실함은 곧 빛을 발할 때가 올 것이니 와…넘 눈부시지 않을까, 염려가 살짝 됩니다.
아이를 보면서 할머니를 보면서 또는 여러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결국 내가 나 자신을 키우는 것 같다는 문구는 참 좋네요.
조용하게 수이 님의 글을 읽다 보면 실용? 철학서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아침 물린지 얼마나 됐다고 또 점심.ㅜ.ㅜ
안 먹고 살 순 없나 생각해 보지만 또 도저히 굶고는 살 순 없어 또다시 뭘 먹나? 고민하게 되네요.
가볍더라도 굶진 말아요.
맛난 점심 시간 되시길^^
 

오늘 읽은 최고의 댓글,

“니 생각만 정답이 아니란다, 겸손해라, 인간.”

여기 이 한 줄에 모든 것들이 담겨져 있는.

마흔 명의 고수들 틈바구니에서 깨갱거리며 동작을 행하는데 대빵이 다가와 손 더 올려 하고 천장 향해 오른손 중지를 쭉 들어올리니 더 올라가는 신기한 몸뚱이. 대빵이 즉각 알아차리고 다른 이들에게 신경쓰지 말고 본인 몸에 집중해, 해서 순간 쫄았던 몸에 긴장감 풀렸다.

다들 얼마나 기가 막히게 행하시던지, 오늘 한층 겸손해져서 깨갱거리고 있다가 저 댓글을 읽고 전습록 구절 조금 더 읽고 완전 바닥과 합체가 되어버린.

인간의 미덕은 겸손이다. 인간의 몸뚱아리를 지니고 살아간다면 바르게 행해야 할 게 겸손이니. 몸이 풀리니 앞으로 두 시간은 기본적으로, 라고 자상하게 웃으며 말하시길래 아뇨 힘들어요 도망칠래요 하니 체력 조절하며 세 시간은 가뿐히 행해야 더 겸손해질듯 피드백 받아 나도 모르게 눈동자 좌우로 굴렸다.

몸뚱아리는 그저 마음을 그대로 담는 그릇이니. 대빵 왈, 자신을 믿지 말고 몸을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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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5-19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시사 방송 들으면서 요가하는데 말이지요. 호흡 안 따라하고 ㅋㅋㅋㅋㅋㅋㅋ 대충 동작만 따라하다가 아기자세로 마무리짓는 요가 8년차 회개하고 갑니다. 수이님의 진심이 문장 사이사이 느껴집니다.

“니 생각만 정답이 아니란다, 겸손해라, 인간.”
노란색 포스트잇에 적어서 노트북 옆에 붙여두려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5-05-27 10:58   좋아요 0 | URL
아기자세와 시체자세를 제일 좋아하는 요가 3개월차 인사드립니다. 니 생각만 정답이 아니란다, 겸손해라, 인간, 이걸 제게 수시로 알려주시는 분이 그대라는 걸 ㅋㅋㅋ 날 좋네요. 오늘은 요가 안 하고 노는 날입니다. 나마스떼~

책읽는나무 2025-05-20 2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이 님 조금 더 있음 곧 열반에 들어가셔도 될만큼 경지에 오르시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앗. 제 생각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나요?
겸손…겸손.ㅋㅋㅋ

수이 2025-05-27 10:58   좋아요 0 | URL
언니 제가 열반에 들어가면요, 세상 사람들이 다 열반에 들어가고난 다음에 제가 맨꼴찌라는 사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트란 안 홍 감독의 [씨클로]는 스물을 갓 넘겼을 때. 비디오 가게에서 알바로 일하던 고등학교 후배 녀석이 언니 이 영화 끝내줘요, 봐봐요, 라고 내밀어서 빌려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여름밤에 봤다. 미성년자는 보지 못한다 해서 부모님과 동생들이 모두 자고 있는 틈을 타 야밤에 소리를 잔뜩 죽이고. 미친듯 라디오헤드를 반복적으로 들었던 기억도. 때마침 라디오헤드가 흘러나와서 맥락 없이 떠올랐다. 네 평 골방에서 거의 항상 문을 잠가놓다시피 하며. 지나고 보면 옥상에서 빨래를 널 적마다 담배를 몰래 태우곤 했는데 엄마나 아빠나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는 게 엄마 입장이 된 지금 생각해보니 놀라울 지경이지만. 옷을 벗고 있는 나를 보고 뭐라뭐라 하는 할머니들 시선을 뒤로 하고 안경을 벗고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엄마랑 마주쳤다. 엄마, 하고 부르니 할머니들이 박여사 따님이야? 그래서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세신사 언니와 40분 동안 수다를 떨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오랜만에 맥주를 한잔 했다. 소주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해서 막걸리도 싫어 맥주를 주문해 엄마와 알콩달콩 음식점에서 나눠 마셨다. 음식점 사장님은 지금 그 자리에서 30년 동안 장사를 하고 있는데 이제는 애들도 다 컸고 이제 그만 가게를 접자고 해도 할망구가 두 다리 성하고 두 팔 성할 때까지는 해야 한다고 못 닫게 한다고 하지만 고관절 수술에 인공관절 수술도 두 다리 모두 하고 어깨 수술도 한 마당에 이게 어디 성한 다리고 성한 팔이냐 말을 해도 수술을 했으니 성한 거다, 그러니 해야 한다 무작정 고집을 피우는데 지겹다, 정말 그만 하고 싶노라며 단골인 엄마에게 계속 말말말. 하긴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이 곱창을 즐겨 먹었으니 실로 30년이다, 신기하기만 하구나 맥주를 마시면서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엄마는 맥주도 곱창도 잘 먹는 나를 보며 왜 이렇게 잘 먹어? 딸, 하고 또 놀라워했다. 뜨거운 물에서 놀다 나와서 그런가 잘 들어가는군 하지만 새벽 한 시에 장 꼬여서 응급실 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심하던 지난 밤의 나와는 너무 다르구먼 허허허 하면서 신경성이 도졌나 싶었다. 장 꼬인 건 실로 오랜만인지라 식은 땀을 흘리며 이 식은 땀이 갱년기 증상인가 아니면 신경성인가 가만히 매트 위에 엎드려서 고심했다. 한 시간 지나 멀쩡해져서 둘 다 동시에 왔다는 걸 인지했다. 이게 다 내 업보구나 싶기도 한데 아까 만 번 다시 태어나 죽고 태어나 죽고 이걸 그래도 해보겠노라 하는 게 두 가지 마음에서 비롯되어 하나는 전생에 만 번의 환생을 할 정도로 죄가 깊고 깊으니 그 죄를 만 번의 생을 통해서 갚아야 한다는 것과 또 하나는 그런 식으로 강렬하게 알고 느끼고 싶다는 것. 탐구심이 끝없다는 게 어느 정도로 무모한지 알 수 있다. 체력은 되지 않고 욕심은 그득해서 너덜너덜. 공중부양 되는듯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어 유투브에서 이것저것 찾아보니 못하는 건 없다, 스승이 있으면, 대신 만 번은 그래도 반복해야 가뿐하게 행할 수 있을듯, 이라는 댓글을 보고 말똥말똥해졌다. 열 번도 아니요, 백 번도 아니요, 천 번도 아니요, 만 번이다. 허허허허허허허 하고 웃음이 나올듯. 없던 두통이 생긴 건 카페인의 과다 섭취 때문이다, 알아채서 하루 두 잔으로 다시 카페인 조절. 저녁에는 무조건 커피는 금지하기로. 저녁을 과식하는 바람에 뜨끈하게 매실차를 타서 호로록거리고 있다. 인도철학사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어렵다. 아마 낯선 용어들 때문에 더 그런듯. 노트에 정리를 하며 봐야 할듯. 스크린타임을 가지지 못한지 너무 오래 되어 영화 하나 보고 싶은데 동시에 책 읽고픈 마음도. 5월 들어 오늘 처음으로 3000보 찍었다. 다음주에도 내내 비가 내린다. 한국 날씨가 이상하게 변하는구만. 카페에서 옆 테이블에서 중년 여성 두 분이서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말끝마다 이재명 그 새끼가 민주당 그 새끼들이 라고 흥분을 하시며 젊은 여성이 고함을 내지르다시피 그래서 결국 헤드폰으로 귀를 막았다. 그렇지 이런 세계에 살고 있지, 이게 바로 삶이지, 라는 걸 다시 느낌. 저 분노는 어디에서부터 기인한 걸까. 내가 삶을 택해서 끌고 가는 것도 있지만 이 생이 나를 톡톡 치며 내 사람들에게로 내 공간으로 이끌고 가는 것도 동시에 행해진다, 이걸 다시. 오랜만에 초코쿠키 먹어 맛나 엄마, 아이가 말해서 므흣. 6월에는 밀가루 좀 의식적으로 덜 먹어보기로. 아이가 돌아오려면 두 시간 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이런 마음. 자정 넘겨 수시로 귀가하던 젊었던 나는 미쳤군 미쳤던 거였어. 스와미 비베카난다의 책을 완독. 이미 했던 이야기들이 진리가 아니거나 진실이 아니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아쉬운 점은 다른 표현방식을 찾는다는 것. 이미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시공간을 넘어서서 입을 모아 이야기하니 그것이 틀릴리 없다. 조금 더 관찰하고 조금 더 골몰할 것. 내가 할 일은 그곳에 있을지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완독. 책에서는 broken people 이라고 명명되는데 독자 입장에서 나는 이 모든 이들이 브로큰 피플이라고 보았다. 확대해서 보자면 시간을 이어 공간을 넘고 내내 이어가는 과정 자체가 broken 일지도 모른다.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그런 부서져버리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고통 뿐만 아니라 함께 하는 기쁨 자체도 어쩌면 부서져버리는 순간들의 연장선상일지도. 그렇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건 아니고. 부서지고난 후에도 다른 관계로 치유가 되고 이미 새로운 살이 돋아 그저 아주 자그마한 흉터가 되었을 뿐인, 허나 몸이 썩어 없어지기 전까지는 내내 이어져있을 상흔을 마주하면서 주름은 깊어지고 몸의 감각은 서서히 퇴화된다. 소설 속에서도 명시되어 있지만 그러니까 타인을 위해서 어떤 모션을 행한다는 것 말이다. 낯선 이가 내 생 안으로 들어오고 내가 그의 삶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 그렇게 해서 새로운 관계가 생성된다는 것. 소설 안에서 이 모션은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는 행위를 뜻한다. 루시와 밥의 관계도 감동적이지만 밥과 맷의 관계가 심장을 둥둥둥거리게 만들었다. 바로 이어서 다른 소설을 시작하고 싶지만 숨 고르기 하고 이론서로 잠깐 이탈한다. 5월을 숨쉬게 만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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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5-19 2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서지고난 후에도 다른 관계로 치유가 되고 이미 새로운 살이 돋아 그저 아주 자그마한 흉터가 되었을 뿐인, 허나 몸이 썩어 없어지기 전까지는 내내 이어져있을 상흔을 마주하면서 주름은 깊어지고 몸의 감각은 서서히 퇴화된다.

이 문장 너무 좋아요. 하나의 관계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질투와 집착의 아이콘을 사랑하는 저로서는 더욱 그래요. 윌리엄이 가고, 데이빗이 오고요. 근데 윌리엄과 밥이 함께 오는 경우도 있더라는... 저도 <Tell me everything>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굿나잇!

수이 2025-05-27 11:06   좋아요 0 | URL
이건 제가 이야기한 건 아니고 어떤 심리학자가 한 이야기라는데 관계에 대해서 사람들이 자꾸 겁을 내는 까닭은 또 나름 여러 겹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물론 그렇겠지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 질투와 집착의 아이콘을 사랑하는 단발머리님이 포용력 제일 갑이라는 사실이 좀 모순적이긴 해도. 윌리엄과 밥을 모두 포용하는 루시 언니가 역시 갑이라는 생각이 또 들기도 하고 저도 다시 읽어볼 때는 내용이 가물가물할 즈음에. 오늘 날씨 넘 환상적이군요 으흠.
 
Tell Me Everything (Hardcover)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 Penguin Books Ltd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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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안에서 시공간을 넘어 이야기는 이어진다. 루시와 올리브와 밥이 내 안에서 그득 넘실거리며 파도처럼 왔다갔다. 부서져가는 이들이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보폭을 함께 하는 과정, 어쩌면 이것이 선(goodness)이 아닐까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라 내린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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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요가 - 인도 최고의 지성과 영성, 비베카난다의 말
스와미 비베카난다 지음, 김성환 옮김 / 판미동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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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거 같으면서도 전혀 모르겠지만 또 수긍은 가는 마음의 움직임들. 하나로 곧게 나아가는 게 옳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읽으면서 내내 고개를 갸우뚱. 회의주의자의 피가 짙어서 애매하게. 뻗대고 싶은 마음이 커서 큰일이다. 지난한 과정이 될듯. 다른 것들을 담아내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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