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이야기책이 집 안에 들어오면 정치경제학은 위험에 빠진다. 세상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고, 공상하고 느끼는 비경제적인 활동이 기승을 부릴 것이며, 더 나쁘게는 그것이 실제로 발현되기까지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드그라인드 씨는 옳다. 분명 문학과 문학적 상상력은 전복적이다. 이제 우리는 문학을 선택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즉, 문학은 위대하고 소중하고 흥미롭고 훌륭하지만, 대학의 학과 중 하나로 정치, 경제, 법적 사유와는 동떨어진 분야로 생각하거나, 또 그것들과 동등한 것이라기보다는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근대 학문이 분화의 길을 걷고 문학의 가치에 대한 편협한 쾌락주의적 이론이 자리 잡으면서 우리는 그래드그라인드 씨가 굳건히 붙들고 있었던 통찰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주목한 점은 다음과 같았다. 즉 소설(지금부터는 소설 작품들에 주목할 것이기에)은 고유한 형태와 스타일, 그리고 독자와의 소통 방식을 통해 삶의 규범적 의미를 표현함으로써 도덕적 문제를 제기하는 형식을 띤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며, 한 방식이 아닌 다른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만든다. 또한 독자들을 특정한 정신과 마음 자세를 갖도록 이끈다. 그리고 그래드그라인드 씨가 아주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듯이, 좁은 의미의 경제적 합리성- 그의 견해에서는 이것이 공적 사유와 사적 사유 모두의 규범이 된다 -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마음가짐들은 잘못된 것이며 매우 위험한 태도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래드그라인드식 경제학의 시각에서 볼 때, 만약 문학이 위험하고 통제되어야 마땅한 것이라면, 이는 또한 문학이 더 이상 단순한 장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우리의 공적인 삶에 두드러진 기여를 할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그래드그라인드 씨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책들에 대해 - 그것이 인류의 비전이나 사회적 삶에 대한 온전한 의미를 나타내는 데 적합한지를 따져서 - 의문을 품어본다면, 그래드그라인드 씨가 강력히 거부하면서도 쓸데없는 이야기책들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이를 집으로 가져오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만약 이야기책들이 갖는 의미를 변호하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책들이 집에 머물러도 되는 강력한 이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즉, 아이들의 지각을 형성하는 집과 학교뿐만 아니라, 공공정책과 사회발전을 연구하는 대학에서도, 정부와 법정에서도, 심지어 로스쿨에서도 - 공적 상상력public imagination이 형성되고 길러지는 곳 어디에서든 - 이야기책은 공적 합리성 교육에 필수적인 부분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27-28)
식혜를 마시면서 문장 옮기기, 읽고 싶은 책들이 있다고 해서 마냥 사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식재료도 사야 하고 옷도 사야 하고 귀금속도 사야 하고 아이의 학원비와 아이의 옷과 신발과 아이의 책도 사야 한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