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애인이 페이스북에 한대수와 같이 사진을 찍고 자랑질해놓은 걸 보았다. 아 물론 옛날 애인 사진 막 찾아보고 그러지 않음, 친구의 친구인지라 아직까지 온라인으로 보기는 보지만. 이게 더 구차한 변명처럼 들리겠는걸. 노상 한대수 틀어놓고 그의 침대 위에서 일이 끝나고 나면 같이 책 읽던 때도 엊그제 같은데 벌써 수십년 전이다. 수십년 전 일이라고 하니 무슨 70대 할머니 같구먼 느낌이. 동굴에서 사람들이 그 벽에 벽화를 그리며 서로 낄낄거렸던 일처럼 아주 옛날 같아 기억에서도 흐릿한.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어, 라는 그의 말이 뭘 뜻하는지 어렴풋 알 것도 같다 싶다. 어제는 마치 아주 옛날 일인 것만 같아 그게 작년이지? 벌써 1년도 지났지? 라고 친구에게 말해놓고 보니 무슨 1년 전인가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건 불과 1년 동안이었고 2024년은 질곡의 시간 속에서 갑자기 여러 번개를 맞아 뜻하지 않게 한꺼풀씩 그 틈바구니 사이에서 나온 한 해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12월이 다 되어 앗차차 너무 놀았구나 라고 반성도 하고는 있지만. 이건 언제나 알라딘 새해 다이어리를 받을 적마다 느끼는 거다. 앗차차 너무 놀았구나 어느덧 한 해의 마무리라니, 라는 심정으로. 하여 사람들이 제일 많이 새해 다짐을 세우는 건 12월이다. 피티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제일 등록을 많이 하는 시기는 바로 한 해의 끝, 12월. 12월부터 슬슬 모터를 가동하여 새해에는 진짜 새로운 몸으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겠다 라고 회원님들은 이야기하심, 이라고. 한 셋트 끝내고난 후에 그럼 새로운 몸으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퍼센트는 어느 정도? 물어보니 머리를 굴리더니 음 글쎄, 한 5프로? 라고 그래서 좋아, 이 몸이 그 5프로 안에 들어가도록 하지요, 했다. 어제 친구의 진지한 표정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는 동안 좋아하는 이들 얼굴의 표정에서 마음을 앗기는 때가 각기 다르구나 라는 걸 알았다. 이 사람에게는 이 표정, 저 사람에게는 저 표정, 그 사람에게는 그 표정. 저녁을 먹고난 후 같이 귤을 까먹는 동안 민이가 너와 나의 경계, 나보다 너를 생각하는 것과 너보다 나를 헤아리는 것, 그 경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축제 준비를 하는 동안 한 아이가 무단으로 결석해서 팀 플레이에 차질이 간 이야기를 하면서. 집단과 룰에 대한 강직함이 이 아이에게는 있구나, 그걸 아이를 키우는 동안 여러 번 느끼곤 했다. 십대 후반이 된 아이는 그 강직함을 확연하게 드러내곤 한다. 진이 같구나, 싶었다. 내 첫째동생 진이와 내 아이 민이의 그 꼬장꼬장함, 그 꼿꼿함, 그 강직함, 그런 것들이 겹쳐지면서 진이 같구나 아이에게도 이야기했다. 무단으로 결석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있었겠지, 팀 플레이에 차질이 생긴 건 아쉬운 일이지만 그 친구에게도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했더니 딸아이는 코로나 걸려 아픈 거 아니고서는 당연히 나와야지, 축제인데. 라고 답했고 그 답을 들으면서 아이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렇지, 내 동생도 어렸을 때 그렇게 답하곤 했지. 열이 40도가 아니면 당연히 학교 가야지, 뭐 그런 식의 대답. 월요일에 만나면 물어봐봐, 왜 결석했는지. 말하고 모든 게 확연할 수 없단다, 아가, 살다보면 그런 경우들을 더 많이 겪을 테고, 네 강직함이 언젠가 거대한 벽에 부딪힐 때가 있을 텐데 그때 너무 아파하고 무너지고 그러지 마, 아가, 하고 속으로만 말했다. 오전 내내 아이를 데리고 병원과 헤어샵을 다녀오고나면 늦은 점심을 먹을 테고 일정이 다 끝나 집에 돌아올 무렵이면 어둠이 세상을 덮을 시간이고 허둥지둥 또 버릴 것들이 뭐가 있는지 헤아려야 한다. 기나긴 하루가 될듯 혹은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휙 지나갈 테고. 한해 마무리를 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올해 알게 된 건 내가 몸을 쓰는 걸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 이 몸이 나로구나, 라는 걸 알게 해준 이들, 요가 선생님부터 시작해서. 죽기 전까지 이 몸의 틀어짐을 내내 지니고 가야한다고 여겼는데 최대한 균형을 맞추려고 나날이 애쓰는 동안 매일 1000kcal 소모한지 이제 3주째. 엄마와 진이가 매일 아프다는 이야기를 한다. 오늘은 여기가 아프고 오늘은 저기가 쑤시고. 다리 찢기를 다시 시작하면서부터 다리를 찢어봐, 두 팔을 늘리고 목도 왔다갔다 움직이고 너무 안 움직이는 거 아니야? 잔소리를 매일 해대고. 새로 운동 하나를 더 시작하면서부터 느낀 건 움직이지 못해 환장한 년 같구먼, 이다. 어쩌면 팩트일지도. 간만에 핀란드 있는 친구에게 전화 넣어야겠군. 생일이라는 걸 깜박할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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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불경을 읽는 이들이_ 불경까지는 아니어도 붓다 말씀이 적힌 이런저런 대중서들을 읽는 이들이 주변에 꽤 늘어가는 건 어떤 현상일까 싶다. 번뇌를 다스리는 게 그 순간은 가능할 터인데 페이지를 덮고난 후에도 그 번뇌가 잘 다스려지는지에 대해서 궁금해 질문을 한 적 있는데 언젠가 스님은 그 순간이야 다잡을 수 있다고 여기지만 다 그렇게 다잡혔다면 세상이 이렇게 엉망진창이겠냐고 껄껄 웃으며 말씀하셨다. 다잡으려고 애쓰는 그 모습이 갸륵해서 말없이 바라보고는 있지만 순간 무너질 걸 아니까 또 말없이 바라만 보고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불경은 읽지 않고 있다. 그만큼 지금 내 안에 번뇌가 소용돌이치는 순간들이 극히 적다는 반증인 거고. 민이가 상담 중에 너털웃음을 짧게 지으면서 불경 하나 챙겨서 가야겠네요, 마음 수양 꽤 하려면, 이라고 대꾸해서 원장님도 나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젯밤에는 오랜만에 레이첼 야마가타의 옛 노래를 우연히 접하고 찾아 들었다. 스무살 즈음에 자주 다니던 소프트 락부터 시작해서 정통락까지 자주 틀어주던 술집 사장님과 우연히 동네에서 마주쳐 실례를 무릅쓰고 가서 아는 척을 했더니 정말 사장님이 맞았다. 이제는 은퇴하시고 손녀딸 보살핀다고 하셨다. 하긴 내가 쉰이니 사장님 연세를 정확히는 알지 못해도 그 즈음 이실듯. 그 연세에 롤링스톤즈 앨범 커버 사진이 박힌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인물이 흔하지 않으니 알아보기도 알아보았지만. 록산 게이 책이 나왔고 주디스 버틀러가 개역이 되어 나왔다. 학원 가기 전에 친구에게 책 좀 보내고 의도치 않게 운동을 사흘 쉬어야 해서 간만에 여유가 생겼다. 벽돌책 들고 나가서 읽어야겠군. 슬슬 집을 찾아보고 있다. 온라인으로 대략 분위기라도 알고 싶어서. 평수는 작어도 해가 잘 드는 곳으로. 몇 군데 알아보고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계약하기로. 이 나이에 방 하나 없이 지낼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뭐 민이 방 주고 나는 거실에서 룰루랄라 온갖 비밀을 만들기로. 어제는 길을 걷다 꽃을 사고 싶었는데 곧 짐 옮겨야 하는 처지에 가당치 않다 싶어 이사하고 사기로. 아이는 당근으로 이것저것 소소한 자기 물건들을 팔아치우고 있다. 나도 좀 팔아보려고 뒤적여보았는데 책 말고는 물건이 하나도 없더라. 아이구, 이 여자야, 이제 옷도 좀 사고 그래보자, 라고 스스로 헛웃음. 같이 수업을 듣는 여대생들 중에 모태 솔로가 둘 있는데 언니, 연애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라고 물어봐서 말했다. 연애를 막 많이 하면 돼. 라고. 그랬더니 둘 다 까르르르 웃으면서 연애를 막 어떻게 많이 해요! 한 번도 못했는데! 라고 그래서 글을 잘 쓰려면 편지를 많이 쓰고 일기를 많이 쓰면 돼, 그럼 어느 순간 글을 잘 쓰게 돼. 그러니까 진심을 다해서 솔직하게 내 마음을 페이지에 활자로 새겨넣는 거지. 연애도 비슷할 거야, 일단은 플러팅이지. 라고 했더니 둘 다 눈빛이 반짝반짝거려서 귀여워서 다들 머리 쓰다듬어주었다. 귀여운 것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실패하는 걸 두려워하지 마, 쪽팔려서 미리 입 못 여는 게 한국인 특징이잖아, 처음부터 완벽한 문장을 말하려고 머릿속에서 난리법석, 그렇다고 해서 만든 문장이 완벽한 문장인가 싶으면 아니야 또. 그럼 또 좌절해요. 그럼 또 침묵하고. 그게 한국애들 가장 큰 특징인데 물론 어렸을 때 나도 그랬고_ 그냥 열어 입을. 실패해도 괜찮아, 쪽팔려도 괜찮고. 그런데 뭐 아주 처음부터 완벽한 연애를 한다고 투철하게 준비를 하시는데 그런 식으로 하지 마. 그냥 깨질 거 각오하고 으스러질 거 각오하고 실패해도 괜찮아, 이런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해. 죽지 않아, 아무리 사랑했다가 헤어져도. 언니가 해보니까 알겠더라. 안 죽어. 그러니까 해, 연애. 하고 싶으면 해. 더불어 오픈 유어 마인드, 오픈 유어 아이즈, 오픈 유어 이어즈 앤 voilà, 오픈 유어 바디! 했더니 선생님이 아주아주아주! 하시더니 엄청 웃으셨다. 몸과 마음은 언제나 같이 가는 겁니다, 선생님, 그 무엇이 처음인지는 모르겠으나. 라고 말하고 또 잠깐 그의 말이 떠올랐으나 그것까지는 하지 않았다. 아이들 충격 받을까봐. 어느 일러스트레이터가 자신의 작품을 올리고 그 아래 코멘트를 달았는데 다른 이들이 댓글 단 거 보니까 아니야, 너, 그거, 너 그거 틀렸어, 네 마음 그거 틀린 거야, 라고 가스라이팅하는 늙은 여인들 많더라. 각자 다른 거고 각자 달리 사는 거지, 뭘 또 그렇게 틀렸다고 난리법석일까, 이 언니들은, 싶었다. 니네나 잘 살아, 그렇게 니네 말이 옳으면, 라고 댓글 달까 하다가 관뒀다. 속으로 Peace, 하면서. 암튼 여왕벌들은 어딜 가나 존재하는구만. 오프나 온라인이나. 조용히 납작하게 엎드려서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조용히 운동하고 책 읽고 맛난 거 사먹으면서 존재감 없이 살아야 돼, 라고 스스로에게 타이르고 있다. 그게 얼마나 가능할지 불확실하니까. 이사하면 꽃 사야지. 점찍어둔 와인도. 해상도에 대해서 그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책과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_ 아무리 그렇게 많은 책을 읽고 아무리 좋은 선생님들에게 많이 배우고 그래봤자 당신이 삶을 바라보는 해상도가 겨우 그 정도라면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어, 라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말을 그런 식으로 다이렉트로 했으니 그가 상처를 받았으리라, 싶은 건 나중에 내가 한 말을 똑같이 반복하는 그 입술을 바라볼 때였던 것도 같다. 삶의 해상도를 달리 만드는 사람을 만나봐, 내가 바라보던 그 해상도 그대로 말고 높이거나 낮추거나 그와 무관하게 말야. 관계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기도 하니까, 라고 말하면서도 스스로 꼰대 같다 느껴서 방금 내가 말한 건 꼰대 같았어, 인정해. 하지만 그래도 말하고파서_ 라고 덧붙였다. 봄에 가장 먼저 출국하는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아빠언니오빠 다 없잖아, 하고 싶은 거 다 해, 공부 말고 딴 것도. 말하고나니 아 내가 얘 엄마뻘인데 하고 막 웃었다. 이 아이 엄마가 나보다 두 살 더 많은데 그 언니가 내가 이런 말 하는 거 알면 나 죽이려 하겠군 싶어서 또 키득키득.


친구가 릴리 킹 계속 이야기해서 내가 11월에는 책 안 산다, 이사 전까지, 했다가 결국 질렀다. 읽어야지. 개인적으로는 가운데 원서 표지가 마음에 드는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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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11-20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릴리 킹.... 일단 적어볼게요. 적자생존. 적어야 산다. 적는 것만이 살 길. 적어둔 사람이 참 승자.
적을 때는 이니셜로. 아니면 가명. 아니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4-11-20 11:07   좋아요 1 | URL
실명 쓴다 돌아버리면, 그러고 가명입니다 하면 안돼? ㅋㅋ

단발머리 2024-11-20 11:29   좋아요 1 | URL
오케이 and 예스 and 슈어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나 but ㅋㅋㅋㅋㅋㅋ

수이 2024-11-20 11:32   좋아요 0 | URL
언니 말을 잘 듣는 저는 💋
 
















어제 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니 왜 그런 환상을?! 했더니 이제 환타지를 무너뜨릴 준비를 해야겠군요, 그와 비슷한 말을 했는데 엄청 웃었다. 잠깐 그를 보고 돌아오는 동안 그러니까 그 환상을 얼른 무너뜨리고 다시 새롭게 정비를 하면 될 일인데 문제는 계속 환상에 머무르려고만 하는 거고 그 환상에서 내내 머무를 수 없어 현실로 억지로 끌려나올 적마다 새롭게 항상 불쾌한 감정이 동반되는 거 아니겠냐는 말은 혼자 속으로만 했다. 애써서 고(schmerz)를 부속품처럼 지니려고 하지 마, 그 말은 텍스트로 했다. 이십대 시절에 옛연인과 즐겨 나누었던 말이 있는데 말해줘도 모르잖아, 그럼 굳이 입 아프게 말할 필요 없어, 그냥 냅둬, 인간은 어차피 지 꼴리는대로 살게 되어 있어, 였다. 거북한 감정 없이 불편함도 일절 느끼지 못한 채 천천히 홀로 길을 걸어 내려오는데 단테의 문장 하나가 떠오르면서 그걸 인용한 마르크스가 어떤 마음이었을지도 알 거 같아 푸훕 웃었다. 삼합 읽기 책은 이번 달 야전과 영원이다. 고르고 한 페이지 달랑 읽은 사람 반성하자. 이러고 비비언 고닉 바로 펼치지 마. 친구들한테 욕 먹어. 전기와 도시가스와 인터넷 정리를 해야 하고 또 할 일이 뭐가 있더라 버릴 쓰레기가 아직도 엄청 많고 냉장고도 서서히 비워야 하고 또 체크. 올해 들어 셀피를 엄청 찍었다. 작년부터 매일 아침 나가기 전에 현관 앞에서 혹은 깨끗한 화장실 거울 앞에서 종종 찍는 게 습관이 되어 꾸준하게 찍고 찍고 버리고 또 찍고 버리고 그러면서 한 사람 말이 겹치기도 겹쳤고. 허리 채 오지 않았던 머리카락을 싹둑 자르고나니 허전하기도 허전하고 도시 아줌마에서 그냥 산 타는 아줌마로 변신했어, 라는 민이 말에 웃기도 웃었지만 편한 건 역시 어쩔 수 없구나 싶다. 산 타는 여자에게 허리까지 오는 기나긴 머리카락이 대체 뭐 필요하겠는가. 물론 나는 산을 안 타지만. 머리는 어차피 내내 길러야 하니까 거지존을 어떻게 버틸지가 문제다. 광배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더불어 왼쪽 어깨가 약하다는 것도 운동을 하는 동안 알았다. 금연했다고 하니 선생님이 칭찬했다. 이야기를 하다가 아니 그게 어떻게 금연이야? 절연이지! 해서 마음 내키면 폈다가 아니면 다시 끊고 그건 금연이라고 할 수 없죠. 금연이면 죽을 때까지, 칼이 내 목에 들어온다고 해도 절대 담배를 태우지 않겠다! 이게 금연이죠! 해서 인간이 꼭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는 거니? 3셋트 끝내고 말했더니 배를 움켜쥐고 미친듯 웃더라. 그릭 요거트는 맛이 없다. 블루베리랑 뒤섞어 먹으니 그나마 먹을만. 아 어제 들이 말한 것 중 선생님이랑 비슷한 말 있어서 또 홀로 웃었다. 공부하고 공부하고 공부하다 보니 놀 시간까지 제대로 놀지 못해 세월이 이렇게 흘러 곧 육십이다, 이게 말이 되니? 대체? 잘 놀아야지 하고 공부했던 건데, 하고 불어로 선생님이 욕했는데 어제 들도 아 공부만 하지 말걸 그랬어요, 좀 놀기도 놀았어야 하는데, 해서 혼자서 큭큭. 집에 돌아와 민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니 공부도 해야 돼, 놀기도 놀아야 돼, 대체 언제 쉬나요, 아이구나, 해서 머리 쓰다듬어주면서 내내 하염없이 쉬는 시간만 주어지기도 한다, 인간에게는, 그러니 그때가 오기 전에 바지런히 놀고 바지런히 공부해야죠, 라는 꼰대 발언을 가감없이 했다. 붓다가 하는 말은 언제나 진리다. 그 진리가 인간사 적용이 된다는 것도 알고 시간 너머로 쌓이고 쌓여 그게 진리로서 굳건하다는 것도 알고 그러다가 문득 아 붓다 가까이 하는 이들 멀리 해야겠다 싶었다. 내가 참 붓다를 사랑해, 붓다 말씀을 즐겨 듣고 즐겨 읽어, 그리 살고 싶지, 평화롭게 유유자적 지혜롭게, 라고 항상 말들을 해요. 그리고 시간이 좀 흘러 그들 마음 속 지옥도를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또 아 하나님, 아 부처님, 아이고 공자님, 이러고 있더라. 하여 붓다 말씀 인용하며 이러이러합니다_라는 이들은 경계해야겠구나 알았다. 부처님 앞에서 삼배하면서 나 홀로 그랬지. 좋은 것들에만 붓다를 인용하고 밝고 귀한 것들에만 붓다를 인용하고 싶지 당연히, 그런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더 읽고 더 듣고 더 반성하고 그러렴, 아가들아, 붓다 말씀은 좀 적당히 인용하고. 이런 마음이 들면 붓다를 멀리 하는 게 답일까 아니면 붓다를 가까이 하는 이들을 멀리 하는 게 답일까 헷갈릴 수도 있는데 내 환상이 거기에서는 딱 그 정도까지만, 만일 더 알고 싶다면 그 이상 인연과 무관하게 나아가는 거 아니겠는가, 라고 말해서 알았다. 어제 들 지인 중에 연애 엄청 하고 싶어하는 이가 있다고 하면서 연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는 질문을 들었는데 연애는 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만으로는 불가한 거 같고 혼자만의 세계를 꾸려나가는 와중에도 다른 이들에게 틈새를 보여야 하고 관심을 보여야 하고 그래야 하는 거 같아요, 그 대답은 당시에는 하지 못해서 나중에. 다시 탑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걸 굳이 말릴 필요는 없구나 그것도 알았는데 대화를 나누다가 굳이 어떤 경계를 정해서 이게 옳고 이게 맞다 그렇게 되면 그쪽을 택했으니까 어떻게든 그 길로 계속 나아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이 나이가 되어서 이런저런 경험을 하고 살다보니 물론 꼰대스러운 말이라는 건 잘 알겠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고통을 끝까지 부여잡고 이 길이 내가 택한 길이야, 라고 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게 붓다 말씀이랑 합이 맞는 거야? 아니면 상충되는 거야? 속으로 알쏭달쏭하기는 했다. 턱 아래 길이가 제각각 다른 털 세 가닥에 모든 집중이 쏠리는 걸 느끼면서 나는 현상학적 인간이군 어쩔 수 없이, 알았다. 아이리스 머독의 책 한 권을 끝냈다. 언니 주장이 페미니즘이랑 어쩐지 합치되는 면이 있는듯.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너나 잘해, 다른 이들 걱정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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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 머독 읽고 있는데 비비언 고닉 올려, 라고 해서 책 사진도 없는데 마침 커피를 마시고 있어서 후다다다다닥. 커피 마시고 학원 후다다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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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11-11 1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찻잔이 매력적입니다

수이 2024-11-11 10:40   좋아요 1 | URL
땡투에 눈이 멀어 갖고 있는 게 이것뿐 ㅋㅋ
 

간만에 회전

다시 말해서 그는 우리가 우리의 친구를 쫓는 살인자에게 오로지 ‘예‘와 ‘아니오‘로만 답할 수 있으며 물음에 답하기를 단순히거부할 수는 없다는 가정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칸트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 의무라고 말한다.
여기서 생겨나는 첫 번째 의문은 이렇다: 정직truthfulness과 거짓말은 어느 정도로까지 법적인 관념들인 것인가? 이러한 혼동을 처음 초래한 것을 가지고 콩스탕을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칸트는 최선을 다해 그러한 혼동을 유지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칸트의논증은, 정직과 거짓말이라는 한 쌍의 용어를 법적인 맥락에서 취급하려는 그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향들로 계속해서 행로를 바꾼다. 때로는 윤리적 쟁점의 방향으로(예컨대 그가 진리를 말할 의무는 ‘무조건적 명령인 신성한 이성의 법‘이라고 말할때), 그리고 때로는 법 그 자체보다는, 어떤 법 철학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의미에서 좀더 ‘철학적인‘ 영역을 향해. 법과 법철학이 칸트의 이론에서 다소간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참일지는 모르지만, 특정 국가 기구에 세워진 기존 관행으로서의 법과 법의 토대와 가능성에 관심을 두는 법 철학 간의 구분을 강조하는것이 여전히 도움을 줄 것이다. 사실상 바로 이러한 구분이야말로 칸트가 자신의 논변에 덧붙이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주장들 예컨대, ‘거짓말은, 법학자들이 자신들의 정의에서 요구하듯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쳐야만 한다는 추가적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다‘)의 기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칸트는 두 가지 점에서 콩스탕과 논쟁을 벌인다. - P81

어떤 사람을 극도로 싫어하고 있으며 그에 관한 어떤 정보를 갖게되었다고 가정하자. 나는 그 정보를 그가 알게 된다면 큰 고통을당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그에게 고통을 야기할 의도로 나는그에게 그 일에 대해 알려주기로 결정을 내린다. 하지만 나는 그의 알 권리를 근거로 이러한 행위를 정당화한다. 따라서 나는 그것이 불필요한 고통을 남에게 가하는 악의적인 행위라는 것을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진리 -말하기라는 훌륭한 행위로서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마도 타인들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심지어 나는 그것이 나의 신성한 의무라는 것에 스스로 수긍하고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앨리슨은 어떤 상황의 ‘도덕적으로 돌출해있는 요인(들)‘을 무시할 수 있게 해주는 이른바 ‘자기기만이라는 것을 예증하기 위해 이 사례를 사용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사례를어떤 다른 것의 예증으로서 사용할 것이다. 즉, 우리의 의무를 행동의 구실로서 제시하는 도착적 태도의 예증으로서 말이다. 더구나 여기서 우리는 이중적 ‘자기기만‘의 경우를 다루고있는 것이다. 자기기만의 첫 번째 계기는 앨리슨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실제 의도-남을 해치는 것-와 관련하여 스스로를 기만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기만은 또 다른 보다 근본적인 자기기만의 계기를 기반으로 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의무의 ‘내용‘)를 ‘기성의ready-made‘ 것으로서, 즉 우리가 상황에 연루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간주하는 한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 P100

‘우리는 당신의 실제 의도가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행동을 위선적인 것으로서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 경우에 그는 단순히, 타인에게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야만 했다고 계속 말할 것이다. 그 자신은 타인을 해쳤을 때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며,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기 때문에 이를 회피할 수는없었다고 말이다.......이러한 종류의 위선자의 가면을 벗길 유일한 방법은 그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타인에게 당신이 알고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당신의 의무라는 것이 어디에 쓰여 있습니까? 왜 당신은 그것이 당신의 의무라고 믿는 것입니까? 당신은 당신의 의무에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칸트의 윤리의 근본적 원칙들에 따르면, 의무는 오로지 주체가 자신의 의무로 만드는 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십계명처럼 ‘바깥‘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을 자신의 의무로 만들고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은 바로 주체다. 정언명령은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부터 이끌어내는 잉여-향유를 뒤에 숨길 수 있는 윤리적 행위들의 목록(남김 없는 목록은 아니더라도)을, 즉 일종의 ‘순수이성의 교리문답‘을 만들 수 있게 해줄 어떤 시금석이 아니다. - P101

칸트는 매우 유사한 문제와 대면한다. 왜냐하면 그의 저술에서 정념적인 것(이는 주체가 느낄 수 있는 것, 쾌락과 고통이다. ‘지적인‘ 혹은 ‘정신적인‘ 쾌락 또한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은 장애물을, 자유의 방해물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자유는 본질적으로 주체의 ‘분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것은 주체가 정념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행위 속에서 구성된다. 하지만 우리는정념적인 것이 복수를 한다고, 즉 정언명령의 통로를 따라서 어떤 종류의 쾌락을 심어놓음으로써 자신의 법칙을 부과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쾌락에 대한 최선의 묘사는 ‘고통 속의쾌락‘일 것이다. 즉 쾌락의 변형으로서의 고통, 쾌락이 소진될 때 그 자리를 차지하는 정념적 양태로서의 고통 말이다. 여기서주체의 직접적 관심사는 다른 어떤 것- 예컨대, 주체가 그것의 이름으로 자신의 직접적 관심사와 쾌락을 잊게 되는 어떤 이념이나 어떤 cosa nostra[우리의 것]ㅡ에 의해 대체된다. 예컨대, 주체는 ‘대의good cause‘에 이바지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고통을 받아들이려 한다. 사드와 칸트 모두는 이러한 논리를 뛰어넘으려고 한다.
그리하여 칸트에게 있어서 자유는, (여하한 종류의 정념적 동기라는 형태로의) 쾌락에 의해서건, 아니면 주체의 죽음에 의해서건, 언제나 한계를 만날 수 있다. 이러한 방해를 ‘뛰어넘을‘ 수 있게 해주고 그것 너머에서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그 무엇은, - P131

라캉이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칸트의 요청(그것의 진리는, 우리가 보았듯이, 육체의 불멸성이다)은 정확히 동일한 제스처를, 동일한 ‘해결책‘을 함축한다. 그것의 기능은 시간과 공간 외부에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설치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보다 낮은 단계로부터 보다 높은 단계의 도덕적 완전성에로의‘ 무한하고 끝없는 전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칸트가 영혼불멸성의 요청을 도입하는 것은 종종 반대에 직면한다. 순수 실천 이성의 분석론」에 나오는 논변과는 대조적으로 이제 칸트가 도덕적 주체들에게 (일종의) 천국과 행복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청과 더불어 그는 그가 이전에 그렇게도 엄격하게 배제했던 것을 ‘뒷문으로‘ 도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행동을 위한 어떤 가능한 ‘정념적 동기‘를말이다. 하지만 불멸성의 요청과 관련한 우리의 논변에 비추어볼 때, 이 약속(혹은, 격려)은 매우 이상한 것임이 판명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도중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온갖 고통과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정언명령을 끝까지 따른다면, 당신이 희생 그 자체에서 취하는 쾌락과 자긍심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가능성이 마침내 당신에게 주어질 수 있으며, 그리하여 당신은 마침내 당신의 목표에 도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의 영혼불멸성은 우리에게 매우 특이한 천국을 약속한다. 왜냐하면 윤리적 주체를 기다리는 것은 사드적 규방을 섬뜩하게도 닮은 천국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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