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김연수 단편을 좀 더 읽고 김안 시집을 좀 더 읽다가 아무래도 날 새겠다 싶어서 (이젠 마흔다섯을 향해 달려가는데 이 나이에 날 새워 책 읽는 건 아무래도 아닌지라) 참고서 부러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저녁 다 먹고 독일어 선생님이 수연아 단어시험 보자_ 해서 단어시험 보고 그러는 와중에 절반이나 틀려버리고 꿈속에서 엉엉 울었는데 독일어 선생님이 수연아 이건 다 꿈인데 독일어 단어 몇 개 틀렸다고 세상이 무너지냐 왜 울고 그러냐 어차피 다 꿈인데_ 해서 금세 그렇다면 뭐 헤헷 하다가 꿈이란 단어를 틀린 것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아침이 되어 벌떡 일어나서 기분이 좋은 게 기분좋은 꿈을 꾸어서 그런지 오늘도 김안이랑 김연수를 읽을 수 있어서 그런지 아리까리했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스피커가 터질 정도로 틀어놓고 아침을 후딱 해서 허기를 채우고 커피를 내리기 위해서 커피콩을 갈았다. 다 갈았는데 좀 흘렸네. 마리가 다가와 냄새를 킁킁 맡더니 이 여편네야, 이 안타까운 커피를 다 흘리남! 하더니 앙증맞은 발로 쓱쓱 치워줬다. 아 먼지 좀 묻었어도 그냥 내려서 마시려고 했는데 네 발 닿아서 이 엄마 새로 커피 더 갈아야겠다 그런데 계속 커피가루 냄새 킁킁 맡고 발로 싹싹 치우는 모습이 너무 심쿵인지라 얼른 폰 들어서 동영상으로 담아놓았다. 우리 살 빼자,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데 너는 살 빼야 엄마랑 앞으로 십 년은 더 너끈히 같이 하지. 너 일찍 가면 이 에미는 우울증 와서 며칠 동안 끙끙 앓을 텐데 안되겠다 살 좀 빼고 건강하게 몸 만들어서 이십 년 더 같이 살자 했더니 뭘 알아들은건지 계속 얼굴 바라보면서 냥냥. 미물이라 해서 마음을 알아주지 못할쏘냐. 그렇게 말하는 것도 같고 미물이면 어때,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싶어 꽈악 껴안았더니 지랄발광. 너도 곧 중년이다, 살 빼자. 어제 새벽에 체조한답시고 이십분 동안 달 보면서 땀 흘렸다. 살이 3키로는 빠진 기분이라서 물 한잔 마시고 잤다. 이십분 스트레칭한다고 근육이 붙겠는가 싶은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다리 막 딴딴하고 팔 막 딴딴해서 와 딴딴아줌마가 된 기분이야! 환호성.
김안 시를 읽는데 김연수 단편들 읽은 게 떠올랐다. 아이들에게 우리는 언제나 상처를 안기는데 그게 뜻하건 뜻하지 않건. 다시 한번 보호망 생각이 떠올랐다. 보호해줄 어른 하나 없는 아이의 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어떤 건지, 세상이 무너지는 거랑 별반 다르지 않을까 싶은. 사람은 참 제멋대로 살아가는데 그걸 베일 없이 드러내면 상처받는 이들 여럿이라는 게 서로 뜻이 맞지 않아서일까. 바람이 불지 않은 여름 나날들이 이어지고 언제 또 이렇게 다시 맹렬하게 읽어댈까 싶게 읽어대고 있는데 뭐 이건 읽을수록 책탑이 더 높아져만가는 기분이다. 얼마나 더 지지리궁상을 떨어야 하는가 싶은.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막 읽고 막 읽어요. 눈알 빠질 정도로. 강릉과 남해 사이에서 갈등한다. 마음은 남해인데 이미 괜찮은 숙소는 다 예약. 코로나인데 아니 무슨 벌써 숙소가 다 예약 완료냐. 버럭. 김안이 쓴 구절 중 기억남는 구절 하나. 아 정말 이렇게 막 좋아도 되는 거니.
우리가 쓰는 것들은 우리만큼 천하지는 않으니 (46)
헐벗은 우리들이
더이상 우리일 수 없는 우리들이
어리석은 어른들이었던 엄마아빠를 흉내내면서
한껏 어리석어져가는 동안 팔자주름은 선명해지고
콧털마저 새하얗게 변해가는 동안
언젠가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된다면
설령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스물다섯이었던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들
문득 기억난다
김안 시 읽는 동안,
더 헐벗어져야 더 가벼워져야 할 텐데
그렇다고 진리가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아직까지 그런 순간을 꿈꾸네
어리석은 어른이 되어서도 아직까지도
바벨
김안
여보, 나는 망설이고 있소. 어젯밤 꿈에 우리의 방이 피
를 흘리고 있었소. 우리의 텅 빈 방이 고통 없이 출렁이고
있었소. 우리의 피부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처럼, 생활은
순순히 흘러가지 않소. 우리의 지난 연애들은 내 늑간으로
들어와 깨진 화석이 되었소. 이제 내 기억 속에서는 그 어
떤 살과 피의 온도도 떠오르지 않소. 도마 위에서 물고기
들이 제 스스로 검고 끈적한 알들을 쏟고 있소. 나는 망
설이고 있고, 나는 숨 쉴 수가 없고, 물고기도 없고, 이 물
고기는 물 밖에서도 죽지 않소. 배를 가르고, 내장을 뿌리
고, 알을 쏟아 내고 나면 이 방이 꽉 찰까, 이 방이 뜨거워
질까를 생각하오. 꿈속에서 우리의 방은 지붕이 없고 벽이
없고, 우리는 썩은 물고기처럼 누워 서로의 냄새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소. 우리는 아직 살아 있고, 우리는 팔다
리가 없소. 여보, 살아남기 위하여 더 가난해지려는 사람
들처럼 엄마를 아빠를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
들처럼 갑시다, 그곳으로. 기억이 허물어진 곳으로, 우리의
아이들에게 우리의 살과 피를 받쳐 들게 하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