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복서가에서 브뤼노 라투르가 나왔다구? 라고 두 눈을 비비고 다시 스크린을 보았다. 복복서가에서?!

구남친2이 잡지를 창간했다고 알고 싶지 않은데 누가 또 친히 알려주셔서 가서 보았다. 참 이름 하고....... 촌놈 티 낸다, 라고 댓글을 달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고 참 쉼 없이 일을 저지르는구나 나이도 이제 있으면서,라고 생각했으나 곰곰 생각해보니 100세 인생인데 살 날이 엄청 많고 그는 정년퇴직하면 65세. 그렇다면 미친듯이 할 일이 많을 텐데 싶으니 그렇네, 이햐 하고 놀라웠다. 확실히 아재들과 할배들이 이 세상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라는 걸 이럴 때도 느낌. 얼마 전에 구남친1과 통화할 때 아재가.... 이야기했더니 당신도 이제 아줌마잖아! 버럭 해서 아니 내가 언제 아줌마가 아니라고 했나요? 왜 버럭 하시나요? 아재, 했다. 나랑 동갑이니까 그도 나는 청년인가 아니 이제 아저씨인가 아 곧 할배가 되는가 이런 생각을 왜 안 하겠는가. 푸훕. 구남친들 셋의 직업군이 같아 그들 나이를 비교하며 그들의 활동량과 연구 성과를 보았을 때 진짜 딱 그 모먼트는 40대 후반부터 50대 후반이겠다 싶은 느낌이다. 물론 구남친3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 이제 쉬고 싶어, 라고 했지만 여기에서 쉬고 싶다는 말은 더 이상 머리 쓰고 싶지 않아, 놀고 싶어, 이거겠지만 했던 일이 연구실에 박혀 내내 읽고 쓰고 연구하는 거라면 지금부터가 한창이 아닌가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거야 뭐 잘 모를 일이다. 나는 연구하는 사람은 아닌지라. 암 걸리거나 뇌일혈 와서 쓰러지는 같은 직군의 선배들 보면 딱 50대 중반부터. 일하건 일하지 않건 여자들도 딱 50대가 고비인 거 같다. 몸이 달라지는구나 이걸 느끼는 모먼트가. 몸이 달라져서 정신도 달라지는 건지 아니면 정신이 달라져가는 현상에 따라 몸도 달라져가는건지그것까지는 모르겠으나 더 이상은 술도 담배도 예전처럼 안 들어가고 커피로 바들바들 에너지를 쥐어짜는 것도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이게 있어서 아 진짜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인간의 몸은 그야말로 신기하기 그지 없어.그러거나 말거나 어쨌거나 구남친들도 구남편도 열심히 현역에서 일을 하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면 역시 중년들이 이 나라를 움직이고 있군, 이런 걸 다시 느낌, 명확하게. 벌어들이는 돈도 돈이지만 그들의 활동량을 보고 있노라면 아 무시무시하구먼, 이런 걸 확실히.

친구가 선물을 보냈다. 그러니까 이건 나 프랑스 못 가는 거 위로하는 선물 맞지? 라고 했더니 아무래도 그렇지...... 라고 해서 어흑, 하고 눈물을 쏟지는 않고 감사합니다, 언니, 하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한달 동안 놀 수 있겠다. 데헷. 맨날 노는 거 같은데 아무래도 3월까지 놀아야겠다, 라고 마음을 다시 먹었다.

아이는 필요한 부교재, 학교에서 사래, 하는데 한꺼번에 안 하고 한 권씩 사네, 알라딘 택배기사님에게 미안합니다, 했다. 알라딘 기사님이 일주일째 매일 오고 계시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아이는 물리 수업을 듣고 미친듯 환호하며 이야기. 겁나 재밌는데 아이들이 재미없다고 해서 놀랐어, 라고 말하는 걸 듣고 아 물리가 재밌다라? 확실히 내 피는 아니고만, 했다. 엄마는 과학 뭐 재밌었어? 물어봐서 나는 생물이랑 화학, 물리랑 지구과학이었던가 그건 잘....

했더니 나는 과학 다 재밌어, 막 가슴 두근거리면서 들었어, 수업 시간에, 라고 해서 아 내 피가 아니니 다행이로군, 라는 생각을 하며 아이 이야기를 들었다. 과학책도 읽어야 하니? 내가 이 나이에? 라고 쓴웃음을 삼키고 싶군요.어제 아이가 수업시간 이야기 들려주면서 그런 이야기,엄마 인간이란 너무 신기하지 않아? 인간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지 알 수가 없어, 그냥 경이로워, 라고 말하는 꼬꼬마를 보면서 그런 말을 하는 네가 더 경이롭구나, 딸아, 라고 속으로 피드백.

어젯밤에 데드리프트 과하게 하는 바람에 아침에 일어나서 뒷벅지 후들거려 덜덜덜 떨면서 아침에 양치질했다. 음 좋군, 이 정도는 해야 몸에 무리가 가는구먼, 알았다. 무리다, 이 이상 하면 나 죽는다, 이때가 딱 그 타이밍이다. 변화가 오는 건. 그건 운동도 그렇고 관계도 마찬가지인듯.

오십대 언니들이 하는 유투브 우연히 클릭했다가 잼나서 어젯밤 보다가 수면 한 시간 부족, 새벽에 후덜덜거리며 일어났다, 아니 겨우 한 시간 덜 잤을 뿐인데 몸이 이렇게 반응을 하는가 싶어서 죽을 거 같았다. 딸아이가 12시까지 수학문제 푸는 바람에 먼저 자기 미안해서 덩달아 유투브 보다가 책도 못 읽고 엄청 놀았음. 어젯밤에 구남친2 잡지 스르륵 읽으면서 잼나서 또 한참 킬킬거렸다. 아 이 활자중독자들 같으니라고, 라는 생각을 다시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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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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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3-04 2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책 읽는 손이 멋집니다.
라캉 들뢰즈 가타리 생각만 해도 어렵고도 어려웠던.... 이제는 멀리하고싶은 철학자들이네요. 책읽는 손에 추천과 화이팅을 전합니다. ^^

수이 2025-03-05 12:52   좋아요 1 | URL
어제 친구가 바람돌이님 만나고 온 이야기 해줘서 오, 이번 여름에 바람돌이님 보러 부산 갈까 했어요. 들뢰즈는 이번 여름에 좀 읽어보려고 해요. 저는 가까이 한 적이 없어서 ^^;;;

바람돌이 2025-03-05 17:29   좋아요 1 | URL
친구??? 저랑 만난 사람은 책읽는 나무님과 프레이야님인데... 잠시 얼굴만 본분은 공쟝쟝님과 단발머리님. 누굴까요? ㅎㅎ
여름에 저는 돈없어서ㅜ어디 못가고 부산을 지킵니다. 놀러오세요. ^^

2025-03-06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빗방울들

무엇보다도 먼저 신유물론에서 물질은 기존과 다르게 형상화된다. 데카르트 식의 이분법 철학에서 물질은 딱딱하고 공간을 차지하면서 경계를 갖는 대상으로, 외부의 정신적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예측과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신유물론에서 물질은 정신에 대립적인 수동적 대상이 아니다. 물질은 정신과 분리되어 있다가 정신에 의해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내에 변화의 활력이 깃든 살아있는 물질로 새롭게 형상화된다. 가령 스피노자에게 물질은 정신과 분리되어 대립하는 실체가 아니라 신이 내재되어 있는 존재의 다른 양태일 뿐이며, 제인 베넷에게 물질은 죽어있는 대상이 아니라 "생기"를 가진 "생동하는 물질(vibrantMatter)"이다. 신유물론이 물질의 존재론적 토대를 스피노자의 생기론(viltalism)로부터 가져오고 이를 모든 존재에 깃든 생명성을 가리키는 "조에(zoe)"와 연결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로써 신유물론에서 말하는 물질은 수동적 질료 그 이상이 된다. "물질성은 항상 ‘단순한‘ 물질 그 이상이다." 물질성은 이분법에서의 물질과 달리 그 내부에 생명과 의미를 담는 ‘물질-담론‘(캐런바라드)이자 ‘물질-기호(도나 해러웨이)‘로서, "초과, 힘, 활력, 관계성, 차이이며 이를 통해 물질은 활동적, 자기-창조적, 생산적,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신유물론에서 몸은 몸 밖의 정신에 종속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행위자성(agency)"을 가지는 존재, 횡단적으로 다층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변화하는 "자기-조직적인 물질"이다. - P57

우리는 언제나 성차화된 몸으로 체험하고 세계의 여러 층위와 얽히게 된다.
그로스에 따르면 서구의 이분법적 문화 안에서 성차는 고체성과액체성의 대조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가령 생물학적 차원에서조차 남성의 몸은 페니스와 관련하여 고체성으로 상징된 반면, 여성의 몸의 스타일은 젖이나 월경과 같은 "체액"으로 은유되어왔다. 남성의 몸은 정액과 관련될 때에도 체액이라기보다 "인과론적인 행위자"로설명되었으며, 뼈를 갖지 않는 남근조차도 "견고한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정액은 체액이 아니라 수태시키는 능력, 대상을 생산하는 능력이나 이를 통해 생산한 대상으로 이해된다. 반면 여성은 "누출, 액체성으로서 재현되고 스스로를 체험하게 된다. 이로써 여성성은 전염병과 무질서를 연상시키는 액체, 결정 불가능성, 이성적 남성을 무질서로 유혹하는 비체가 되는 것이다. 이로써 서구의 이분법 안에서 남성은 동일성을 재현하는 고체로, 여성은 이완과 흐름을 상징하는 액체가 된다.
그로스는 이러한 자연문화적 성차를 "환원 불가능한 성적 특수성"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환원불가능하다는 것은 "각 성별의다른 성별에 대한 경험과 체험된 현실의 일종의 외부성 혹은 이질성은 언제나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차가 한계지평으로 남아있음을 의미한다. - P70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 Process and Reality』(1929)에서 세계는 사물이 아닌 "과정"으로 구성되며 현실적 존재가 "생성되는 방식"이 그 존재가 무엇인지를 구성한다고 설명한다. 화이트헤드에게 최상의 가치는 "창조성(creativity)"이고 각 생성의 과정이 "새로움(novelty)"을 낳으며 이는 "새롭고 독특한 어떤 것,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을 생산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창조성을 "보편자들의 보편자"(PR 21)라고 부르면서, 사물들이 스스로 바뀌고 변모하며 "어떤 독창성 (...) 자극에 대한 반응의독창성"(PR 104)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생성과 창조성이 특별히 인간에만 관련되지 않고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적용된다고 보기 때문에 포스트휴머니즘을 선취하는 면이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생명의 창조성에 대한 사유를 『사고의 양태Modes of Thought』(1938)에서 ‘자기향유(self enjoyment)‘와 ‘관심(concern)‘이라는 서로 상반되면서 긴밀히 연결된 정서적 움직임으로 잘 설명한다. 그는 "생명 개념은 자기향유의 어떤 절대성을 포함한다. (…)경험의 계기는 그 즉각적인 자기향유에 있어서 절대적이다"라고 말하며 삶의 모든 순간이 자율적인 "자기창조(self-creation)"라고 정의한다. 생명의 자기향유는 직접적이고 절대적이다. 자기향유는 어 - P150

떤 관계로부터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해방되어 내가 살아가는경험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순전히 "나는 내 삶을 내가 살아가고있는 대로 즐긴다." 한편 화이트헤드는 곧 이어 "각 계기는 관심의 활동이다. (...) 계기는 느낌과 정향의 방식으로 본질적으로 자신을 넘어서는 사물들에 관심을 갖는다"고 말한다(MT 167).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지거나 관여한다는 것은 그것을 무시하거나 지나칠 수없고 그것이 내게 응답하도록 압박해오는 것이다. 자기향유와 달리관심은 관계적이고 타자와 연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샤비로는 "관심은 타자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비자발적인 경험이다. 관심은 나도 모르게 나를 바깥으로 개방한다. 관심은 나의 자율성을 제한하여 나 자신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향하도록 이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기향유와 관심의 구분은 근본적이지만 동사에 두 상태는 서로 긴밀히 묶여 있어 우리는 한쪽 없이 다른 한쪽만을 가질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샤비로는 "관심은 그 자체가 일종의 향유이며 즉시적인 자기향유의 과정 자체로부터 생겨난다"
고 지적한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내가 나 자신을 넘어서는 우주에 가장 활발히 관여하는 것은 나 자신의 직접적인 자기실현에 몰두할 때이다. 생명의 자기향유는 시간을 경유하면서 관심으로 변모한다. 즉시적인 자기향유도 미래로 넘어가며 자신을 넘어선 것에 도달한다. 반대로 타자를 향한 관심은 자기향유에 필요한 전제조건이 - P151

이와 같이 화이트헤드와 샤비로처럼 타자를 향한 배려와 윤리에 대해서도 미학화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면, 재/생산에 대한 여성의 비결정성은 타자와 전체를 위한 것이기에 앞서 철저히 자신을 위해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판단의 문제가 된다.
화이트헤드에게 관심은 자기향유보다 우월하지 않다. 이는 레비나스와 다른 점이다. 화이트헤드에게 관심은 여전히 "자율적인 가치평가"(PR 248), 즉각 현실적 계기가 "마주치게 되는 것의 중요성에대한 미학적 판단"이다. 가치판단이란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해 내가 자율적이고 자기-생성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각 존재는 무엇이 자신을 위해서 중요한지에 대한 감각을 지닌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관점에서는 타자들에 대한 주목도 그 자체가 일종의 향유이며 전체적인 자기향유에 반하기보다는 그 안에 포함될 수 있으므로 윤리는 단지 자발적인 미적 결정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우리 현존의 기저에는 ‘~할 가치 있음(worth)‘에 대한 감각이 있다. (...) 그 자신을 위한 현존의 감각, 그 자신의 정당화인 현존의 감각"(MT 109)이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미적인 가치판단을 내리고 미적인 가치를 향해 운동한다. 아이를 낳는 일이든 타인을 돌보는 행위든 모두 나를 위한 나의 미적인 가치판단의 결과이며 내 존재의 자기향유일 뿐이다. 그러므로 "윤리학은 미학을 대체할 수 없다." - P158

메를로 퐁티는 몸이 능동적 주체이면서 객관적 대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몸의 이중감각을 통해 설명된다. 두 손을 맞잡았을 때, 손은 능동성과 수동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앞서 말했듯이 버틀러의 수행적 몸, 즉 몸의 물질화는 언어적 힘에 의해 이끌려간다고할지라도 변신이라는 점에서 능동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몸이
‘배치와 접속‘을 가능하게 하는 행위역량을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침투되는 존재다. 우리는 실체로서 존재할 수없기에 관계 속에서 실재성을 드러낸다. 몸은 내 몸이면서도 내 몸이 아니다. 그렇게 경계는 흐려진다. 버틀러의 수행이론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성적 존재로서의 몸은 성적주체로서의 몸이며, 그 몸은 관계맺음의 과정 속에서 개체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몸은 스스로를 확장시킬 수 있지만 동시에 한계적 상황에서 처해있는 주체임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늙어 죽으며 쉽게 상처받고고통받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욕망과 한계는 나의 주체적 행위뿐 아니라 내게 행해진 사회규범에도 그 원인이 있다" 우리의 논의는 몸의 물질성이다. 그리고 그 몸이 성적 주체성이라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 몸을 논하는 이가 인간인 한에서 그 몸은 인간 몸인 관점이다. 그러나 몸인 내가 다른 몸과의 관계에서 스타일화한다고 할 때, 우리는 인간 몸만을 전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몸은 사회규범을 포함한 다양한 지각 세계의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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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을 입고 산자락에 놓인 학교와 집을 왔다갔다 하면서 제멋대로 감동에 겨워하며

읽었던 책 이야기가 나와 반가운 마음에 오늘 아침 재독하면서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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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생활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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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식과 위선을 벗어던질 때 인간이 어떤 풍경을 마주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때 어느 정도의 극치를 보여줄 수 있는지, 하여 인간은 인간 앞에서 벌거벗을 수 있는 거다. 허나 요지는 이 사회는 위선과 가식을 필수 요소로 여긴다는 점이고. 인간은 그룹을 지어 서로와 서로 사이에 경계를 짓는다. 그것이 마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듯 번역가 또한 이야기하고. 간만에 활자로 영혼 때 벗기는 작업. 온전한 것을 잃을까봐 노심초사했는데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건 그대로라는 걸 알았다. 사회 안에서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다시 깨닫게 해주는 시간. 많은 것들을 바라는 게 아니라 소소한 걸 원하는 거라는 건 어느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이 법의 경계 안에서 이루어지건 그 바깥 테두리에서 이루어지건. 속 편하게 와인을 마시고 속 편하게 다른 인간에게 고통을 주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것이 또 인간이라는 건 무얼 뜻하나. 화형대에서 어떤 살인사건이 일어나건 군중들은 시선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게 마땅히 옳은 일이라 여겼고 그것이 옳지 않다는 건 화형대 위에 있는 이들이나 화형대와 군중들 사이에 있는 경계선에 있는 이들 모두 아는 일이었다.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어떤 정해진 법칙이라는 건 언제나 그 너머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때 그 사건들이 지금에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그 누가 확신할 수 있는지 시인은 묻는다. 그 시선들의 마주침과 어긋남 속에서 비밀스럽게 이루어지는 과정들. 봄이 얼마나 기다려지던지, 이 시집 안에 봄 이야기는 곳곳에 만발했고 더불어 영하를 넘나드는 서울 하늘 아래에서 얼마나 봄이 기다려지던지, 봄인가, 하면 어느덧 초여름이 올 것을 알기에 더더욱 기다려지는 거고. 하여 그 말들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을지도. 시간 여유를 두고 천천히 다른 구절들도 찾아보기로. 오늘 내 산소호흡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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