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스 캐롤 오츠 : 작가의 신념 - 삶, 기술, 예술 위대한 생각 시리즈 8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송경아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전 세계적인 인지도에 비해 유독 한국에서 외면 당하는 작가들이 있다. 플래너리 오코너나 조이스 캐롤 오츠가 대표적이지 않을까. 그러고보면 한국에선 단편 작가들의 작품들은 번역도 제대로 되지 않을뿐더러 읽히지도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카버가 알려진 것도 거의 최근의 일이다. 왜 그런걸까?

 

이 책은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 글쓰기, 그리고 작가로서의 삶 등에 대한 JCO의 에세이다. <작가란 무엇인가2> 파리 리뷰 인터뷰를 보아도 그녀의 집필량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하다.(그녀의 얼굴만큼이나) 백 권의 책이라니! 그녀가 삼십년 정도만 더 산다면 어쩌면 발자크를 능가할 지도 모르겠다. 한 작품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곧이어 다른 작품을 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당신의 가슴속에 있는 것을 써라.

 

당신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을 써라. 결코 당신의 주제와 그에 대한 열정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당신의 금지된 열정은 글쓰기의 연료와 같다. 일생에 걸쳐 오래 전에 죽은 아버지에 대해 분노했던 위대한 극작가 유진 오닐처럼, 일생에 걸쳐 어머니에 대해 분노했던 위대한 소설가 어네스트 헤밍웨이처럼, 일생에 걸쳐 자살의 황홀경으로 유혹하는 매혹적인 죽음의 천사와 싸웠던 실비아 플라스나 앤 섹스톤처럼 말이다. 도스또예프스키의 난폭한 자기 파괴 본능, 플래너리 오코너의 불신자들에 대한 사디즘적 정벌의 본능 또한 그러했다. 발광에 대한 에드가 앨런 포의 공포,.....당신의 묻혀 있는 자아 또는 자아들과의 투쟁이 예술을 낳는다.

 

기죽지 마라! 곁눈질을 하거나 당신을 다른 동료들과 비교하지 마라! 글쓰기는 경주가 아니다. 아무도 진짜로 이기지 못한다. 만족은 노력에서 나오고, 그 결과 보상이 따른다 해도 그런 보상은 아주 드물게 오는 법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 가슴 속에 있는 것을 써라.

 

전적으로 당신이 속한 세대를 위해 써라. 그렇지 않다 해도 당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위해 써라.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후세를 위해 쓸 수는 없다. 과거의 세상을 위해 쓸 필요도 없다.

 

세계가 당신을 정당하게 대우하거나 자비롭게 다루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인생은 롤러코스터처럼 정면충돌이다. 예술은 냉정하게 선택되고, 오직 소급적으로만 창조될 수 있다. 그러나 글을 쓰기 위해 인생을 살지 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행로를 걸으면서 몇 번이나 예술 작품과 사랑에 빠진다. 다른 사람의 예술에 대한 존경과 숭배에 열중해 버려라. 드가가 마네를 얼마나 숭배했던가! 멜빌이 호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시인들이 월트 휘트먼을 얼마나 왕처럼 모셨던가! 만약 당신을 흥분시키거나, 인상적이거나, 긴장하게 하는 목소리나 통찰력을 발견한다면 그 안에 빠져 버려라.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것이다


나는 지금껏 루이스 캐럴, 에밀리 브론테, 카프카, , 멜빌, 에밀리 디킨슨, 윌리엄 포크너, 샬롯 브론테,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다양한 작가들과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책장위의 언어는 얼음처럼 차가운 매체다. 공연자나 육상 선수들과는 달리, 우리는 원하는 만큼 다시 상상하고 교정하고 완전히 퇴고해야 한다. 우리의 작품이 돌에 새겨지는 것처럼 돌이킬 수 없이 인쇄되기 전에는 원고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해야 한다. 초고는 아마 잘 안 써지고 사람을 피곤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원고, 그 다음 원고들은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이 상쾌할 것이다


마지막 문장이 씌어질 때까지 첫 문장은 씌어질 수 없다는 믿음만 가져라. 마지막 문장을 쓰는 오직 그 순간에 이르러서만 당신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소설이라는 고통의 치유법은 오직 소설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당신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을 써라.

 

달리기와 글쓰기.

 

내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달리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일까. 워즈워드, 콜리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디킨스, 하루키, 그리고 조이스 캐럴 오츠 등등은 글쓰기에서 달리기 혹은 산책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준 이들이다.

 

이야기들은 정밀한 구현체를 요구하는 사령들처럼 나타난다. 관념적으로 말하면, 달리기는 내가 쓰는 것을 영화나 꿈처럼 그려볼수 있는 확장된 의식을 갖게 해주는 것 같다. 나는 타이프라이터 앞에서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경험한 것을 회상한다. 나는 워드프로세서를 쓰지 않고 상당한 분량을 손으로 쓴다


다시 말하지만 작가들은 미쳤어’.라는 소리를 들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글을 형식상 타이핑해 낼 때쯤이면 나는 이미 그 글을 거듭 마음속에 그려보고 있다. 나는 글쓰기란 결코 그저 책장 위에 단어들을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비치는 것, 감정의 집합체, 날것 그대로의 경험 같은 것을 구현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기억할 만한 예술을 만들려는 노력은 독자나 구경꾼에게 그 노력에 걸맞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달리기는 명상이다. 좀더 실용적으로 말하자면, 달리기는 내가 마음의 눈으로 그때까지 쓴 원고 사이를 거닐고, 교정을 해서 오류를 잡아내고 글을 더 개선시키도록 만들어 준다. 끊임없는 교정이 나의 방식이다.

 

예술의 기원

 

모방으로 시작한 것은 어느 날 흘끗 바라본 우리 자신에게서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채 발견하게 되는 그 무엇이 된다. 그건 무얼까? 인생 그 자체? 겉보기에 예술가들이 가장 의식하고 있는 것은 그의 발견에 대한 복종이다.

 

....예술 작품을 만듦에 있어 우리는 전혀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만들지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복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 즉 그것을 발견하는 일은 마치 자연 법칙처럼 필연적이며 비밀스럽기 때문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온 세상에 걸쳐 거대한 체스 게임을 하고 있는 거군요. , 물론 지금 여기가 세상이라면 말이죠. ,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제가 그 말들 중의 하나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말이 될 수만 있다면 졸이 되어도 상관없어요. 물론 여왕이 되는 것이 더 좋기는 하지만요.”

 

- 루이스 캐럴, <거울 나라의 앨리스> 중에서

 

나는 왜 썼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죄가

나를 잉크에 담았을까, 부모의 죄일까, 나 자산의 죄일까?

아직 아이일 때, 아직 명성을 쫓는 바보가 아니었을 때,

나는 혀 짧은 소리로 시를 읇었다. 시가 내게 다가왔기 때문에.

 

- 알렉산더 포프, <애벗낫 박사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실패의 기록

 

예술가들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실패에, 즉 실패의 정도와 적응과 타협에 능통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실패라는 용어는 대개 심오하다. 성공이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일시적 환상, 곧 꺼질 거품, 곧 지게 될 꽃인 반면, 실패는 진실이거나 적어도 타협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합리적이리라


만약 내가 믿는 바와 같이 절망이 도취감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부조리한 상태라면, 그것이 인간의 환경과 덜 어긋남은 물론이고 더욱 실질적이고 믿을 만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에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T.S 엘리엇은 비평가들의 대부분이 실패한 작가들이라는 언급을 듣고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렇지요.”

 

모든 예술이 은유거나 은유적이라면, 은유의 동기란 정말 무엇일까? 동기라는 것이 있을까? 아니면, 사실은 은유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사람이 절대적인 자신을 갖고 예술 작품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을까? 왜 그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심원하고, 저항할 수 없고, 때때로 삶을 바꾸어 놓는 응답으로 느껴지는 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의 의미도 없는 것일까?

 

옛날에 스물다섯 개의 양철 인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형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래된 양철 숟가락 후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인형들은 각각 자기 총을 어깨에 매고, 눈을 앞으로 꼿꼿하게 고정시키고, 아주 작은 빨강과 파랑 제복을 입고 있었습니다.....하나만 빼고 모든 군인들은 아주 똑같았습니다.


그는 다리가 하나뿐이라는 점에서 나머지와 달랐습니다. 맨 마지막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를 완성할 만큼 양철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인형들이 두 다리로 서 있는 것과 똑같이 한 다리로 잘 서 있었습니다. 사실은 바로 그가 유명해진 인형이었습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양철 병정> 중에서.

 

지드가 <수상록>에서 언급했듯이 예술가는 자기만이 열쇠를 가지고 있는 특별한 세계를 필요로 한다. 일을 하다가 죽거나 심하게 병들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매우 현실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여기에 분명한 모순이 있다면 그 모순은 예술이라는 모험의 핵심에 있는 것이리라. 작가는 깨지기 쉬운 달걀 피라미드를 실어 나르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실어 나른다. 사실 그 자신이야말로 언제라도 떨어져 마루에서 엉망진창으로 더럽게 깨질 수 있는 깨지기 쉬운 달걀 피라미드이기 때문이다.

 

새벽이 오기 전에 잠에서 깨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드물다. 차라리 죽음을 연모케 하는 꿈 없는 잠이, 아니면 현실보다 더 무서운 환영과 기괴한 모든 것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본능이 우리의 뇌수 곳곳을 휩쓸고 다니는, 공포와 일그러진 즐거움의 밤이 우리로 하여금 깨어나 어둠 속에 있게 한다. 그 본능은 몽상이라는 질병이 정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예술, 바로 고딕 예술에 지속적 생명력을 부여하는 본능이다.

 

......겹겹으로 겹친 외올베 같은 새벽안개가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지고 사물들이 조금씩 그 형태와 색채를 되찾으면 우리는 새벽이 그 고유한 바랜 빛깔로 세상을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을 지켜본다. 흐릿한 거울이 사물을 비추어 보여준다는 본연의 삶을 되찾는다.....그 무엇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밤의 비현실적인 그림자로부터 우리가 익히 알던 대로의 진정한 삶이 돌아온다


우리는 우리가 떠났던 바로 그 지점에서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하고, 이때 우리는 늘 하던 대로 판에 박힌 습관 같은 일을 힘들여 지루하게 반복해야 한다는 깨달음에 진저리를 치기도 하지만, 제어하기 힘든 갈망, 아마도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게 되면 어둠 속에서 새로이 다시 태어난 세상을 보게 될 수도 있으리라는 갈망에 몸을 떨기도 한다. 이런 세계에서 어떠한 의무감이나 후회의 의식적인 형태를 띤 과거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도리언 그레이에게는 이러한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삶의 진정한 목표였다.

 

-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중에서

 

대다수 소설가들의 특징인 몽상적인 것과 실용성의 기묘한 혼합은 <율리시즈>의 여러 가지 문체, 그 놀랄 만큼 풍부한 자기 패러디적 목소리들에 대한 조이스의 태도로 예증된다. 


내 관점에서 기술이 정확한가 아닌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 열여덟 개의 에피소드를 진군시킬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하며, 일단 내 군대가 지나간 후에는 적군이 다리를 하늘 높이 날려 버리더라도 내 알 바 아니다.”

 

실패에는 종종 문자 그대로의 이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실패란 가장 우울한 경험으로 하여금 가치 있고, 사람을 성장시키고, 깊은 중요성을 가진 경험과 비슷해질 때까지 그 안팎을 뒤집어 버리는 방법이 아닐까?......<기 돔빌>이 실패한 후 제임스는 자기 수첩에 이렇게 쓴다


나는 오래된 펜을 다시 잡는다. 나의 잊을 수 없는 모든 노력과 신성한 투쟁의 펜을. 오늘 나는 나 자신에게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크고 충만하고 드높은 미래가 아직 열려 있다. 내가 필생의 작업을 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며, 나는 그 작업을 할 것이다.”

 

만약 내가 내게 일어난 일, 혹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글을 쓰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면 나는 내게 머무는 고독과 고립의 감각을 조금 잃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내 안에 있는 형상 없는 덩어리의 밀도와 모습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내 공책에 끄적이고 읽는다. 삶은 상상할 수도 없이 풍부해 보인다.

 

- 앨리스 제임스, <일기> 중에서

 

그러나 천재는 자기가 천재라는 것을 실제로는 알 수 없다. 희망을 갖고, 예감을 갖고, 맹렬한 편집증적 의심에 괴로워하지만, 결국 그에게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척도이다. 성공은 멀리서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지만, 실패는 충실한 동행이자 다음 책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자극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하러 글을 쓰겠는가? 그 충동은 이론적이고 철학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의 피와 뼈만큼이나 육체적인 것이다.


 “죽기전에 무엇인가 쓰고자 하는 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 인생이 짧고 열광적이라는 이 파괴적인 감각은 내가 나 자신의 닻에 집착하게 만든다.” 이렇게 버지니아 울프는 일기 속에서 우리 모두를 향해 얘기하고 있다.

 

영감!

 

우리는 모두 예전에 영감을 받은 경험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알고 있지만, 앞으로 영감을 받으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영감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믿으면서 자신의 일에 끈덕지게 몰두한다. 마치 작은 불꽃이 피어나리라고 믿으면서 젖은 성냥으로 계속, 계속, 계속, 성냥이 부러질 때까지 불을 켜대는 것과 비슷하리라.

 

나는 초기 초현실주의자들이 분명히 옳았다고 생각한다. 세계는 해독해야 하는 기호의 숲이다. 꿈속의 외견상의 무질서 속에 의미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세계는 무질서 속에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은 채로 개방성, 혹은 유용성이나 우연을 기록하려고 스스로를 열어 두고 카메라를 메고서 파리의 거리를 떠돌아다닌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와 같이, 경외심을 갖고 알아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이미지들은 넘쳐난다.

 

나는 그것을 한 편의 시로 적노라

맥도나와 맥브라이드

코널리와 피어스는

오늘 그리고 앞으로도

녹색 옷을 입는 곳이면 어디서든

변했다, 완전히 달라졌다.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탄생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1963년 시인 랜달 자렐은 어머니에게서 한 상자의 편지를 받았다. 그 상자에는 자신이 열두 살이었던 1920년 대에 썼던 편지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즉각 자신의 창조성의 마지막 단계가 될 일에 착수했다. 그의 아내가 말한 바로는 실로 시를 공중에서 잡아채는 일이었다.

 

노먼 메일러의 첫 소설 <나자와 사자The naked and the Dead>는 전적으로 계획적인 노력의 산물이자, “내가 스물다섯 살때까지 배운 모든 것에 따른 확실한 결과물이었다......그러나 두 번째 소설 <바르바리 강변>은 난데없이 튀어나온 것 같다. 매일 아침 그는 소설을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 생각도 없이 썼다.


....메일러의 <허크 핀>은 이와 비슷하게 석 달 동안 무아경의 백열 상태 속에서, 어떤 의미로는 주인공의 목소리로 구술되어 쓰였다.

 

조셉 헬러의 소설들은 으레 주제, 배경, 인물, 이야기와 독립적으로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첫눈에 반해 버렸다. 요사리안은 군목을 보자마자 미친 듯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라는 <캐치 22>의 첫 문장은 아무 이유없이 그저 헬러에게 떠올랐고 그가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한 시간 반 이내에 헬러는 그 소설의 독특한 어조와 교묘한 형식 그리고 인물들 대다수를 마음속에 구상했다.

 

<사건이 일어났다>의 시초는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는 내가 두려워하는 네 명의 사람이 있었다. 이 각각의 네 명은 다섯 명씩을 두려워했다.”라는 불가해한 문장이다. 문장이 떠오르기 일 분 전까지만 해도 헬러는 이후 몇 년동안이나 열중하게 될 그 작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문장이 떠오르자 한 시간 이내에 그 작품의 서두, 중간,결말 그리고 불안이라는 지배적인 어조를 파악했다.

 

조안 디디온은 인물이나 플롯, 혹은 사건의 개념초자 없이 <있는 그대로>를 시작했다. 그녀는 오직 마음속에 두 개의 그림만을 품고 있다. 하나는 온통 흰 색의 빈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라스베가스의 리비에라 호텔 카지노에서 이름을 불러 찾고 있던 할리우드 이류 배우이다. 빈 공간은 아무 이야기도 암시하지 않지만, 여배우의 모습은 이런 것을 암시한다


팔과 등이 드러나는 짧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긴 머리의 젊은 여인이 새벽 한 시에 리비에라 호텔의 카지노를 걸어간다. 그녀는 혼자 카지노를 가로질러 비치된 전화를 집어 든다. 나는 그녀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그녀를 보았다.

 

1976<파리 리뷰> 인터뷰에서 존 치버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사실들이 저절로 한꺼번에 다가오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모아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직류 전기 에너지 같은 것이다.그 다음에는 글쓰기 자체가 중량을 맞추는, 즉 단어들을 상상과 일치시키는 지난한 노력만이 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스티븐 디달러스는 조이스의 에피퍼니라는 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조야한 말 혹은 몸짓이나 마음 그 자체의 주목할 만한 상태에서 갑자기 영적인 현시가 나타나는 것. 그것은 예술가들 자신에게 있어 가장 섬세하고 덧없는 순간들이기 때문에 이런 에피퍼니를 아주 조심스럽게 기록하는 것이 에술가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다.”.


...그는 대략 70개의 에피퍼니를 모았고, 그 중 40개 정도가 살아 남았다..은총이 정말로 외부에서 우리에게 쏟아진다고 상상한다면 순진한 일이다. 강림을 받을 영적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예술의 신적인 기원에 대한 플라톤의 주장의 역 명제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동일한 것, ‘악마적인예술이라는 친숙한 개념은 그런 것이다. 무엇인가 우리가 아닌 것이 우리 안에 살고 있다. 무엇인가가 우리를 통해 이야기하겠다고 고집한다. 문학적 강박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는 것은 다른 강박, 가령 가장 원시적이고 강력한 색정적 사랑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여기서 감정의 대상은 전적으로 인간이지만 그 감정은 어딘가 원시적이고, 냉혹할 정도이고, 때때로 불안할 정도인 비인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성난 바람, , 정령들의 힘을 암시하는 문자 그대로에 가까운 은유, 바로 정신 착란(brainstorm)’이라는 개념이다.

 

가령 윌리엄 블레이크의 무절제한 환상이나, 초기 작품을 쓰던 카프카가 건강이 안 좋았고 육체적으로 탈진했다는 것과는 상관업싱 지칠 줄 모르고 뭔가에 사로잡힌 듯이 밤새 글을 쓰던 무아경 같은 것이다. 1934727일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말한다. “창조력이 갑자기 우주 전체에 질서를 가져오다니 얼마나 놀라운가그러나 그녀는 그 우주가 결국 사람의 가장 내밀하고 탐사되지 않은, 악마적이자 신적인 자아라는 것까지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보코프는 그의 자서전 <기억이여, 말하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시는 태곳적부터의 충동으로 의식 속의 우주에 있어 작가의 위치를 표현하려는 위상적인 것이다. 의식의 팔은 밖으로 뻗어 더듬어 찾고, 그 팔은 길수록 좋다. 아폴로가 타고난 기관은 날개가 아니라 촉수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편지에서 동생 스타니슬라우스에게 말한다. “미사의 신비와 내가 하려는 것 가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다......일상생활의 빵을 그 자체로 영구적이고 예술적인 생명을 가진 것으로 바꿈으로써.....사람들의 지적, 도덕적, 영적 고양을 위하여......그들에게 일종의 지적 혹은 영적인 기쁨을 주려는 것이다.”

 

192898일 비타 새크빌 웨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소설을 시작할 때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그것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건널 수 없는 심연의 저쪽 편에 그것이 존재함을 느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숨가쁜 고통 속에서만 극복된다는 것도요. 글을 쓰려고 앉을 때 나는 분명 한 시간 정도 있으면 착상에 내려앉을 언어의 그물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설에서......훌륭한 것은, 그것을 쓰기 전에는 글로 쓸 수 없는 것처럼 보이며, 오직 눈에 보이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작가가 9개월 동안 절망 속에서 살면서 의도했던 것을 잊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책은 봐줄 만해집니다.

 

문체는 매우 간단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모두 리듬입니다. 일단 당신이 그것을 파악하면, 틀린 말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리듬이라는 것은 매우 심원하고, 단어들보다 훨씬 더 깊이 내려갑니다. 광경과 감정은 그에 걸맞는 말을 만들어내기 훨씬 이전에 마음속에 이 물결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작가는 이것을 다시 잡아내어서 작동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기고 그 다음에, 그것이 마음속에서 뛰어오르고 굴러 떨어지면서 그것은 딱 맞는 말을 만듭니다.

 

(윌리엄 포크너)는 내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소설을 쓰고 있다. 나는 145쪽에 머물러 있고, 그것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것을 증오한다. 프리다는 그것이 매우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게는 잘 모르는 외국어로 된 소설 같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간신히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작가의 독서 : 기능공으로서의 작가 1

 

토마스 하디의 시를 연구하고 있었던, 더 이상 젊지도 않고 책도 내지 못하는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를 생각해 보라. 프로스트가 어느 날 자기의 선배만큼이나 위대한 시인이 되고 미국에서 하디보다 훨씬 더 널리 읽히게 된다는 것은 프로스트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놀라운 결과였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와 나다나엘 웨스트의 <미스 론리하츠>를 발견하는 젊은 플래너리 오코너를 생각해 보라. 오코너가 나다나엘 웨스트에게 진 빚은 그녀의 전 소설에 스며들어 있고, 심지어 <오르다보면 모든 것은 한 곳에 모이기 마련이다>같이 성숙한 작품도 날카롭고 폭로적이지만 재미있는 문장, 이야기의 결말에서 갑자기 잔인하게 변하는 희극적인 어조 등은 웨스트적인 구석을 간직하고 있다.

 

동시대인 나다니엘 호손의 알레고리적 이야기 모음집 <구 목사관의 이끼>에 너무나 충격을 받아 <모비 딕>의 집필 계획을 수정하는 젊고 열의가 넘치는 허먼 멜빌을 생각해 보라. <모비 딕>의 희극적이고 피카레스크적 어조를 훨씬 더 장중하고 더 고상하고 비극적인 어조로 바꾸는 과정에서 그는 19세기는 물론 20세기에서도 가장 강렬한 미국소설 중 한 편을 창조해냈다.

 

앨저넌 스윈번, 헉슬리, 심지어 동시대인 어네스트 헤밍웨이 같은 전혀 공통점이 없는 모델들을 취하고 버리면서 하나의 목소리, 시점, 통찰력을 찾고 있던 이십대 중반의 젊은 작가 윌리엄 포크너를 생각해 보라. 그 후 그는 자신과 기질적으로 더 맞는 작가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나 조셉 콘라드의 <나르시서스 호의 검둥이>와 더불어 제임스 조이스를 발견했다


이 작품들은 모두 포크너에게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영향을 미치게 되는, 획기적으로 씌어진 산문의 걸작들이다. 이후 포크너의 특이한 시적 산문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코맥 맥카시같이 다양한 작가들에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영향을 주었다.

 

마크 트웨인이나 셔우드 앤더슨 같은 걸출한 선배들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있다. 특히 그들이 <허클레비 핀의 모험>이나 <와인스버그, 오하이오> 같은 걸작에서 미국 방언을 갈고닦지 않았다면, 그 유명한 헤밍웨이 스타일은 개발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율리시즈>를 읽고, 내 경우에 맞도록 혹은 그 반대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 1/3도 채 안 되는 200페이지를 읽었다. 그리고 첫 2,3 장에서는 즐거워하고, 자극받고, 매혹되고, 흥미를 느꼈다. ......그 다음에는 여드름을 짜고 있는 메스꺼운 풋내기 대학생을 보는 것처럼 당황하고, 지루해하고, 화가나고 환멸을 느꼈다


그런데 톰(T.S 엘리엇)은 이것이 <전쟁과 평화>와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무식하고 천박한 책으로 보인다. 이것은 독학 노동자의 책이다. 그들이 얼마나 사람을 괴롭히는지, 얼마나 독선적이고, 끈질기고, 거칠고, 공격적이고, 궁극적으로는 욕지기가 나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 1922816일 일기 중에서

 

, 고마워라. 나는 내 머리를 직관으로 가득 채웠다. 직관은 지나치거나 충분하게 채울 수 없는 것이다. , 마침내 그저 자아를 놓아 버리는 것. 그 기나긴 세월동안 (엄청나게 장렬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희망하고 기다려온 몰두와 생산이라는 행동 그저 잠재적이고 상대적인, 물질적인 면에서의 양의 증가 에 자아를 내던지는 것. 요컨대, 더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희망하고 기다려왔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결말에 다다른 것 같다. 나는 이것만을 바란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순종과 그만큼의 감사를 느끼며 운명에 고개 숙여 절한다.

 

헨리 제임스, 1895214<작가노트> 중에서

 

십대시절부터 이미 야심찬 젊은 작가였던 존 가드너는 다른 작가의 언어에서 산문의 리듬을 느끼기 위해 모범이 되는 소설 작품을 타이핑했다고 말했다. 가드너는 특히 톨스토이의 숭배자였고, 그의 도덕적이고 설교적인 어조는 가드너의 소설 속에 울려 퍼진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다른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방했던 단편 작가 중 한 명인 레이먼드 카버는 형식면에서 체오프, 이사크 바벨, 프랭크 오코너, V.S 프리쳇, 어네스트 헤밍웨이 같은 선배들에게 진 빚을 인정했다. 그는 <불길 : 에세이, , 단편>의 서문에서 책상 옆 벽에 체호프의 소설에서 나온 “......그리고 갑자기 그에게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라는 문장 일부분을 붙여 놓았다고 쓰고 있다.

 

소설가이자 영화제작자인 존 세일즈는 넬슨 올그런에 대한 존경심에 가득 차서 말한다. “당신이 꼭 당신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처럼 쓰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들이 만든 등장인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 속의 영혼은 당신의 마음속에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렇게 열거된 사례들에서 어떤 교훈이나 일반적인 명제를 끌어낼 수 있을까? 만약 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간단한 교훈이다. 널리 읽고, 열성적으로 읽고, 의도가 아니라 본능의 인도를 받아라. 당신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작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작가가 되고 싶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작가의 독서 : 기능공으로서의 작가 2

 

헨리 제임스는 예술가란 이상적으로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상상 세계에 진짜인물들이 살도록 해야 하고, 그들을 담고 있는 그 세계 또한 진짜라는 환상을 주어야 하는 소설가에게는 특히나 맞는 말이다. 작가라는 것은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감정적으로 작품을 통해 빛을 발해야 한다. 태양이 보이지 않는 흐린 날의 불빛같이 모든 것들이 동등하게 빛을 받아 보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물들을 바꿀 수 있고, 우리의 영혼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 수 있다. 사진작가들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더 날카롭게 보는 것철머, 글쓰기 훈련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 더 예민해지고 관찰력이 깊어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변화를 겪을 수 있는 길은 글쓰기라는 예술을 기술로서 접근하는 것이다.

 

자기비판이라는 불가사의한 예술

 

그저 올바른 음절을 제대로 된 자리에 갖다 놓아라.’조나단 스위프트의 충고이자 완벽주의자의 신조이다. 그러나 이 신조는 작가의 악몽이 될 수도 잇다. 언제나 아름답고 찬란하게, 독창성을 발휘하며 의기양양한기세로 글을 쓰고자 하는 긴장은 스스로를 마비시키는 자기 저주가 될 수 잇다. 가장 야심작인 <노스트로모>를 쓰며 비참해하던 조셉 콘라드 같은 완벽주의자의 절망 속에는 어형과 겸손이 둘 다 들어 있다


낭떠러지 위로 14인치 널빤지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처럼 나는 계속 나아간다. 만약 비틀거리기라도 한다면 나는 파멸할 것이다.” 콘라드는 일에 대한 혐오가 발작하면 우둔한 느낌이 들 정도로 움츠러들고 두뇌가 물로 변해 버리는 느낌이며, 글쓰기는 그저 신경증적 힘이 언어로 변환되는 것일 뿐이라는 확신이 든다고 말했다.

 

입센<들오리>에서 삶의 거짓에 대해 말한다. 삶을 가능하게 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환상은 심지어 불합리한 것이라 해도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어떤 작가들에게는 삶의 거짓이 필수적이다. 그들은 자기가 천재성을 갖고 있다고 믿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글을 쓸 수 없다. 현실 생활과 너무 극적으로 충돌하지만 않는다면, 그런 확신에는 죄가 없다.

 

 

이 짧은 책의 리뷰가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글쓰기에 관한 책은 널리고도 널렸다. <작가의 신념>이 다른 글쓰기 책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짧은 분량안에 무수한 작가들이 불쑥 불쑥 출현한다는 점이다. JCO가 그렇게나 많은 책을 쓸 수 있었던 동력은 그만큼이나 많은 선배들, 동시대의 작가의 책을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죽기 전에 영화를 만들고 싶어한 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나는 실패했지만 다음 작품은 더 나아질 것이다. 정녕? 실패 이후의 헨리 제임스의 메모를 염두해 둘 것.

 

오늘 나는 나 자신에게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크고 충만하고 드높은 미래가 아직 열려 있다. 내가 필생의 작업을 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며, 나는 그 작업을 할 것이다


-2015.5.26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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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유 2016-02-11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군요.
이렇게나 일목요연하게 작성하시다니
시이소오 님의 멋진 리뷰에 제 마음이 설렙니다.
아무리 바빠도 완독하고 싶은 책 영순위에 올려봅니다.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2-11 08:11   좋아요 0 | URL
중구난방에 너무 길어서 우려했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네요 ^^
 
강희대제 11 - 얼웨허 역사소설, 전면 개정판 제왕삼부곡 1
얼웨허 지음, 홍순도 옮김 / 더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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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의 도통인 능보가 군사를 대동하고 나타난다. 능보는 열셋째 황자마마의 전갈을 받고 군대를 움직였다고 강희에게 고한다. 누가 과연 부대를 이동시킨 전갈을 보냈단 말인가. 태자들의 필적 결과 윤상의 것으로 판명난다. 사실 편지의 필적을 위조한 인물은 여덟째 황자였다.

 

이 일을 계기로 강희는 태자를 폐위시킨다. 군대가 움직였다는 사실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강희는 무단을 불러들인다. 강희는 윤상에게 곤장 마흔 대를 내림과 동시에 양봉협도에 윤상을 가둬둔다.

 

태자가 폐위됨에 따라 태자에 오르기 위한 황자들끼리의 치열한 암투가 벌어진다. 장자인 장황자는 태자 윤잉을 복위시키려는 세력이 있다며 윤잉을 죽일 것을 강희에게 간한다. 장황자와 각을 세운 셋째 윤지는 장황자와 다툼을 벌인다. 윤지는 한술 더 떠 장황자가 태자인 윤잉의 이불호청 속에 <건곤십팔지옥도>를 넣어 두는 둥 태자 자리에 욕심을 내왔다고 고한다. 이에 강희는 장황자를 구금시킨다. 강희는 다음날 백관들의 투표 결과에 따라 새로운 태자를 임명할 것이라는 지의를 전한다.

 

윤상은 양봉협도에서 정신을 차린다. 그 옆으로 자고가 윤상을 간호하고 있었다. 황자들마다 시녀들을 보낸다. 명목상으로는 윤상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론 윤상을 감시하기 위한 조치였다. 아홉째는 윤상이 좋아했던 아란을 시녀로 보낸다. 여덟째는 교 언니를 시녀로 보낸다. 넷째 황자인 윤진이 병문안을 온다.

 

윤진의 식객인 오사도, 문각 선사, 성음 스님 등은 넷째가 태자가 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윤진을 부추긴다. 첫째, 둘째, 셋째가 곤혹을 치르고 조정에선 여덟째 황자를 새로운 태자로 옹립하려는 분위기가 날로 고조된다. 태감인 하주아는 여덟째가 황자가 될 거라는 기대심에 강희가 여덟째에게 보내주겠다고 하자 강희에게 감사를 표한다. 강희는 파당을 만드는 여덟째가 못마땅했다. 또한 여덟째를 감싸고도는 동국유와 마제도 꼴 보기 싫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이 천거한 황자를 태자로 삼겠다는 명유를 거스를 수도 없었다. 강희는 윤잉을 다시 태자로 복위시키고 파당을 만든 여덟째의 왕위를 박탈한다. 넷째를 비롯한 황자들의 간청에 강희는 황자들을 풀어준다.

 

태자 윤잉은 열셋째에게 왕위에 오르는데 걸림돌이 될 것 같은 정춘화를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윤상은 윤잉에 대해 크게 실망한다. 윤상은 완의국(조정의 빨래방)에서 일하는 정춘화를 찾아가지만 정춘화를 죽이지 않기로 결심한다.

 

강희는 남순을 떠난다. 처음 남순에 나섰을 때 만났던 도적떼 두목인 유철성은 이제 강희를 보좌하는 시위가 되었다. 강희는 남순 중 객점에서 구양굉이라는 노인을 만나 역관에 동행한다. 역관에 풍하독이 들어와 구양굉에게 횡포를 부리려하자 강희가 신분을 밝힌다. 풍하독은 놀라 심장마비로 즉사한다. 강희는 탐관오리인 풍승운을 개들이나 뜯어 먹게 내다 버리라고 명령한다. 이에 구양굉은 아무리 탐관오리라 하더라도 법의 공정한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강희에게 간언한다. 강희는 구양굉에게 벼슬을 내리려 하나 구양굉은 자신의 본명이 방포임을 고한다. 방포는 수배령이 내려진 이후 이름을 바꾸었고, 강희가 특별사면령을 내린 사실을 모른 채 도망다니는 중이었다. 강희는 그날로 방포를 상서방으로 불러들인다.

윤잉은 여덟째에 대한 복수심에 태자파’(윤잉, 넷째, 열셋째) 관리들을 제외한 팔황자당’(여덟째를 위시로 한 대부분의 황자들)의 관리들 위주로 탐관오리들을 색출한다.

 

윤진은 여러 황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임백안의 비밀 문서를 손에 넣을 궁리를 한다. 윤진은 비밀문서가 여덟째 집 근처인 전당포 만영호에 있음을 온유진으로부터 듣는다.

 

윤진의 측근들은 윤진이 도둑을 맞았다며 전당포에 도둑맞은 장물들이 있는지 알고 싶다는 구실로 만영호를 찾아간다. 윤진은 오랜만에 황자들을 초청해 회식자리를 가진다. 한편 만영호로 장물들을 보낸다. 황자들을 임백안으로부터 장물들이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은 윤진은 열셋째를 보낸다. 윤진은 비밀문서와 함께 임백안을 체포한다. 여덟째가 임백안의 입을 막기 위해 죽이려 하자 윤진이 임백안을 감금시킨다.

 

강희가 남순에서 돌아오자 임백안은 이미 사형에 처해졌다. 방포는 비밀문서를 소각할 것을 강희에게 간언한다.

 

윤상을 음해하려던 자고의 본색이 밝혀진다. 윤상은 자고를 풀어주나 자고는 자결한다.

 

강희는 열넷째 윤제에게 병권을 맡긴다. 윤제는 백운관에서 팔황자당의 황자들을 만난다. 아홉째, 열째, 열넷째는 자고를 이용한 윤상을 암살하려던 음모가 무위로 그쳤음을 알게 된다.

 

태자 윤잉은 강희 몰래 병권을 키워간다. 강희는 병변을 준비하며 자신의 측근들의 부정부패를 감싸고도는 윤잉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밑줄 그은 문장

 

p85. “폐하! 옛말에 이르기를 토끼 한 마리가 그물을 빠져나가면 온 동네가 텅 빈다라고 했사옵니다.” .....그러나 강희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바로 간파했다. 만약 토끼가 그물을 빠져나가게 되면 사람들은 그걸 잡으려고 너 나 없이 우르르 쫓아다니느라 생업도 뒷전이 된다. 그러다 토끼는 우여곡절 끝에 누군가의 손에 잡힌다. 그런 후에야 사람들은 현실을 인정하고 토끼에 대한 환상을 버린다.

 

p107. 이 세상에 그대를 사랑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 한, 그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권한이 없다.

 

p112. “넷째마마께서는 구오지수입니다!”

윤진은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그가 앞에 쏟아놓은 것은 네 개의 바둑알이었다. 9에서 5를 빼면 4가 되니 알아 맞혔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놀란 것은 오사도가 알아 맞혀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운명이 구오지수에 해당한다는 말 자체가 간단치 않아서였다. 그는 <역경>괘에 구오는 용이 하늘을 나는숫자라는 해석을 모르지 않았다. 말하자면 구오는 귀하기가 이를 데 없는 제왕의 숫자인 것이다.

 

p134. 공자가 이르기를 인은 멀리 있는가? 아니다. 내가 인하고자 하면 곧 인에 이른다고 했어. 마음을 버선 뒤집듯 뒤집어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고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p152.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는 하나 그건 일반인들 사이에서나 가능한 것입니다. 세 번을 참으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화기치상 (음과 양이 서로 화합하면 그 기운이 서로 어우러져 상서롭게 됨)이 최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p187. “ 문제는 물이 너무 깨끗하면 고기가 살 수 없다는 사실이야. 관가에서도 그 진리는 적용이 돼. 자네는 모든 선비 출신 관리들의 취약점을 결코 피해가지 못했어. 굽혀야 할 때는 굽힐 줄도 아는 것이 진짜 사내라고. 꼭 장사할 때만 수완이 필요한 것이 아니야. 때로는 포악한 사자가 돼 으르렁거리다가 때로은 온순하고 푸근한 어미 양이 돼 꼭 품어 안을 수 있는 여유를 길러야 해. 개구리가 뒤로 주저앉는 것은 더 멀리 뛰기 위한 것이지, 결코 후퇴는 아니네.”

 

굴원이 쓴 <초사>에 이런 말이 있지. ‘강물이 깨끗하면 머리를 감고, 강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는다라는 거야. 정말 일리가 있어. 현명한 신하라면 명철보신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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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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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 힘든 이름이다. 존 버거. 정혜윤pd 책에서도 자주 등장했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하는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저런! 그 사람 맞다. 어릴 적에 존 버거를 미술 비평가로만 알고 있었을 뿐 그 후 그가 소설도 쓰고 사회비평가로도 활동했음을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책의 앞 표지 뒷면에는 아룬다티 로이의 추천사가 실려있다.

 

존 버거는 절묘한 작품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이 책은 부드러움과 정치적 비전을 향한 희구를 도구 삼아 다듬어낸 절제된 분노에 관한 작품이다. 그가 쓰는 것은 모두 심오하고, 정확하며, 대답을 요구한다. 그것은 자유와 그 결핍, 희망과 그 결핍, 권력과 그 결핍, 사랑과 사랑하는 이와 강제로 헤어졌을 때 그 자리를 대신하는 끔찍한 갈망이다.

 

책을 읽어보니 왜 아룬다티 로이가 부드러움과 정치적 비전을 향한 희구라고 말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존 버거에 대한 수전 손택의 말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양심의 명령에 따르는 책임감과 감각적인 세계에 대한 배려를 동시에 보여주는 데 있어 존 버거 만큼 성공한 작가는 없다.” 아마도 존 버거에 버금가는 이가 있다면 아룬다티 로이가 아닐까.

 

서간체의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감옥에 수감 중인 사비에르에게 보내는 아이다의 편지 내용이 주를 이루다보니, 딱히 중심 서사가 없어 가독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없지 않지만, 버거의 정치적 비젼의 문장들과 감각적인 세계의 문장들은 쉽사리 다음 문장으로 눈길을 돌리도록 허락지 않는다. 사비에르는 주로 정치적 비젼을 토로하는 문장을 쓴다.

 

지옥은 돈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고안한 것이고, 그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으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우선 그들의 처지가 더욱 나빠질 수도 있다는 협박을 반복함으로써, 그리고 두 번째로는 약속을 통해, 말을 잘 듣고 충직하게 지내면, 다른 삶에서는,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그들도 지금 이 세상에서 부를 통해 살 수 있는 것과 그 이상의 것까지 즐길 수 있다는 약속을 통해서 말이다.

 

지옥을 들먹이지 않았다면, 교회의 과시적인 부와 무자비한 권력에 대한 의문이 더욱 공개적으로 제기되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복음의 가르침에 명백히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옥은 축적된 부를 일종의 성스러운 대상으로 만들어 주었다.

 

오늘날의 시련은 너무나 깊다. 이젠 사후의 지옥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제외된 사람들의 지옥이 지금 이곳에 세워지고 있으며, 똑같은 경고를 전한다. 오직 부만이 살아 있는 것을 의미있게 만들어 준다는 경고를.

 

아이다는 주로 우리에게 감각적인 세계를 맛보게 해준다.

 

매일 밤 당신을 조각조각 맞춰 봅니다 아주 작은 뼈마디 하나 하나까지

 

당신에게 말해 주고 싶은 것이 있어요. 덧없는 것은 영원한 것의 반대말이 아니에요. 영원한 것의 반대말은 잊히는 것이죠.”

 

그녀는 삶이란 하나의 사고일 뿐이라고,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된 거예요. 그래서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을 주워 들고 어떻게든 다시 붙여 보려고 애쓰기보다는, 그냥 조용히 지니며 나머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무것도.”

 

부재가 무라고 믿는 것보다 더 큰 실수는 없을 거예요.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시간에 관한 문제죠. 무는 처음부터 없던 것이고, 부재란 있다가 없어진 거예요. 가끔씩 그 둘을 혼동하기 쉽고, 거기서 슬픔이 생기는 거죠.”

 

미 소플레테, 야 누르, 혹은 미 구아포로 시작되는 사비에르에게 보내는 아이다의 편지를 읽고 있노라면 그녀가 얼마나 사비에르를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다.

 

내가 보낸 손 그림들을 창문 바로 아래 붙여 놓았다고 했죠. 그렇게 하면 바람이 불 때마다 그림들이 제 멋대로 흔들린다고요. 그 손들은 당신을 만지고 싶은 거예요.”

 

위정자들의 폭력으로도 그들의 사랑을 막을 순 없다.

그들의 손이 닿을 수 없다는 사실에 몇 번을 울컥했는지.

 

적어도 당신에게 이 작품이 닿기를.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관심의 쉼표를 찍어주었으면.

 

-2014. 11. 19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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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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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충격을 예상하고 덤볐지만 설마 이 정도일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시몬 비젠탈이 만난 SS (나치 친위대)군인들은 포로들에게 아무도 살아남아 증언하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치는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화장터를 폭파하고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지만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있었다.

 

나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불필요하게잔인했다. 이 책은 경악그 자체다. 그러나, 그건 가해자인 나치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피해자인 포로들 때문이다. 포로들에게 가해지는 첫 모욕, 첫 구타는 SS로부터 온 게 아니다. 수용소안의 다른 포로들로부터 온다. 똑같은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포로들로부터. 이곳은 그야말로 지옥이 아닌가.

 

라거(수용소)는 끔찍한 것이면서 동시에 해독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치와 포로라는 이분법은 적용되지 않았다. 하나의 경계선이 아니라 여러 개의 복잡한 경계선들이 있었다. 일반포로들이 있었고 특권층 포로들이 있었다. 새로 들어온 포로, ‘신입’Zugang은 포로들로부터 조롱받고 장난질 당했다. 관리자 포로들은 신입이 들어오면 바로 주먹을 날린다. 만약 신입이 추릭슐라근, 주먹에 주먹으로 답한다면 특권층 포로protekcja는 신입을 때려죽이거나 죽통에 빠뜨려 익사시킨다.

 

특권층 포로 중 일종의 간수인 카포’kopos, capo가 있다. 대부분 자발적으로 특권을 원한 카포는 자신의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처벌이라는 이유로 포로들을 때려 죽였다.

 

존더코만도스’Sonderkommandos라 불리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그저 다른 포로들보다 더 많이 먹을 수 있는 특권밖에 없었다. SS특수부대라고 불렀던 존더코만도스는 가스실에서 시체를 꺼내고, 턱에서 금니를 뽑고, 여자들 머리카락을 자르고, 시체들을 화장터로 운반하는 일들을 했다. 특수부대는 대부분 유대인으로만 구성되었다. 특수부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첫날 미쳐버리거나 아니면 익숙해지던가 둘 중 하나였다. 레비는 특수부대를 기획하고 조직한 것을 나치의 가장 악마적인 범죄였다고 말한다. 레비의 말처럼 나치는 육체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영혼마저 파괴했다.

 

생존자 존더코만도스인 니즐리는 축구시합 참관에 대해 증언했다. SS(나치 진위대)SK(존더코만도스)의 축구시합. 마치 어느 마을 운동장에서처럼. 마치 너희도 우리와 같다는 듯이

 

특수부대에 편입된 유대인 400명 전원이 존더코만토스를 거부한 채 곧장 독가스로 살해된 경우도 있었다. 특수부대가 주도한 반란도 있었지만 반란에 가담한 450명 전원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해방이후 포로들은 자유를 만끽하기 이전에 수치심을 느꼈다. 그들은 수 년 동안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의 삶을 강요받았다. 포로들은 라거안에서 배고픔, 추위, 두려움을 느꼈지 생각하지 않았다. 수용소 안에서 자살은 극히 드물었지만 해방이후 포로들 중에 자살을 택한 이들이 많았다. (시간의 차이가 있을 지언정 장 아메리도, 그리고 레비도 결국 자살했다.) 라거 안에서 자살이 드물었던 원인에 대해 레비는 이렇게 말했다. “자살은 동물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라고.

레비는 이 책을 통해서 라거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면서도 침묵한 독일인들을 원망 하고, 불필요하게 잔인했던 SS대원들에 대해 분노하기도 하지만 냉철하게도 라거가 시스템이었음을 간파한다.

 

여기서 잠깐, 몇몇 포로들을 라거 당국과 다양한 규모로 협력하도록 내몬 동기들을 하나하나 논하기에 앞서, 이러한 인간의 행태에 대해 섣불리 어떤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신중치 못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가장 큰 잘못은 시스템에, 곧 전체주의 국가의 구조 자체에 있음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권력은 어느 정도 통제된 것이든, 찬탈한 것이든, 위로부터 수여받은 것이든, 아래로부터 인정받은 것이든, 정당한 자격이 있어서 부여받은 것이든, 공동의 연대로 부여받은 것이든, 아니면 피로써 또는 부로써 부여받은 것이건 간에 인간사회 조직의 모든 형태속에 존재한다.

 

이 책은 그 어떤 호러나 미스터리 소설보다 끔찍하다. 왜냐하면 아우슈비츠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한국사회가 시스템의 관점에서 보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다. 특권층이었던 카포혹은 존더코만도스들과 같은 최악의 사람들인 친일파는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특권층일가를 이루고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포로들은 수치심을 느꼈다. 그런데 왜 한국사회 특권층들은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걸까.

 

수치심은 고사하고 갈수록 비열해져만 간다. <주진우기자의 사법 활극>를 보면 한국의 판사, 검사들은 현대판 아우슈비츠의 SS, SK들이다. 육체를 파괴할 수 없기에 그들은 더욱 더 악랄하게 영혼을 파괴한다.

 

다른 사람 대신에, 다른 사람을 희생하여 내가 살아있는 것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은 것일 수도, 그러니까 사실상 죽인 것일 수도 있다.’ 라거의 구조된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메시지의 전달자들이 아니었다. 내가 본 것, 내가 겪은 것은 그와는 정반대임을 증명해주었다. 오히려 최악의 사람들,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 무감각한 자들, ‘회색지대의 협력자들, 스파이들이 살아남았다.

 

확실한 원칙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원칙이었다. 나는 물론 내가 무죄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구조된 사람들 무리에 어쩌다 섞여 들어간 것처럼 느꼈다. 그래서 내 눈앞에서, 남들의 눈앞에서 끝없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느꼈다. 최악의 사람들, 즉 적자들이 생존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SS가 만든 수용소 안에서 우리들은 동료의식으로 서로를 맞이하기 보단 서로의 것을 빼앗고, 다투고, 죽인다. (층간소음 살인사건은 아우슈비츠 라거에 대한 은유다)

 

세월호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분노와 함께 수치심을 느꼈다.

세월호의 가라앉은 자들대신에 내가 살아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사실상 내가 죽인 것이다.

이곳은 게토다.

 

밑줄 그은 문장


95. 다른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기 때문에 부끄러운가? 특히, 나보다 더 관대하고, 더 섬세하고, 더 현명하고, 더 쓸모 있고, 더 자격 있는 사람대신에?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명백한 범법행위를 발견하지 못한다. 누구의 자리를 빼앗은 적도 없고, 누구를 구타한 적도 없으며, 어떤 임무를 받아 들인적도 없고, 그 누구의 빵도 훔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각자가 자기 형제의 카인이라는 것, 우리 모두가 자기 옆 사람의 자리를 빼앗고 그 사람 대신에 산다는 것은 하나의 상상, 아니 의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상이 우리의 정신을 갉아먹는 것이다. 좀벌레처럼 우리 머릿속 깊숙이 자리 잡고 들어앉아 갉아먹으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낸다.

 

97. ‘다른 사람 대신에, 다른 사람을 희생하여 내가 살아있는 것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은 것일 수도, 그러니까 사실상 죽인 것일 수도 있다.’ 라거의 구조된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메시지의 전달자들이 아니었다. 내가 본 것, 내가 겪은 것은 그와는 정반대임을 증명해주었다. 오히려 최악의 사람들,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 무감각한 자들, ‘회색지대의 협력자들, 스파이들이 살아남았다. 확실한 원칙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원칙이었다. 나는 물론 내가 무죄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구조된 사람들 무리에 어쩌다 섞여 들어간 것처럼 느꼈다. 그래서 내 눈앞에서, 남들의 눈앞에서 끝없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느꼈다. 최악의 사람들, 즉 적자들이 생존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99. 또 다른 하늘 아래에서 비슷하면서도 다른 노예생활을 경험하고 돌아온 솔제니친도 그 점에 주목했다.

 

장기 복역자들, 생존자이기 때문에 당신들이 축하나는 그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두말할 나위 없이 프리두르키pridurki거나 수감생활 대부분의 시간동안 프리두르키였다. 왜냐하면 라거는 절멸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저 다른 수용소 세계의 언어에서 프리두르키는 어떤 식으로든 특권의 지위를 획득한 포로들로, 우리 쪽에서는 프로미넨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80. 룸코프스키처럼, 우리 역시 권력과 위신에 현혹되어 우리의 본질적인 나약함을 잊어버린다. 우리 모두 게토 안에 있다는 것을, 게토 주위엔 담벼락이 둘려 있고 그 밖에는 죽음의 주인들이 있으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자발적이든 아니든 간에 권력과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84. 그들은 인사도 하지도, 미소를 짓지도 않았다. 음울한 광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고 입을 봉해버리는, 감히 무어라 할 수 없는 혼란스런 감정이 동정심과 더불어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그 수치심이었다. 가스실로 보내질 인원 선발이 끝난 뒤, 그리고 매번 모욕을 당하거나 당하는 자리에 있어야 했을 때마다 우리를 가라앉게 만들던 그 수치심, 독일인들은 모르던 수치심, 타인들이 저지른 잘못 앞에서 의로운 자가 느끼는 수치심이었다. 그런 잘못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만물이 존재하는 세상 속으로 그것이 돌이킬 수 없이 들어와버렸다는 사실이, 그리고 자신의 선한 의지는 아니었거나 턱없이 부족했고 또 그것을 막는데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는 사실이 의로운 그를 가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87. 어둠에서 나왔을 때,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일부를 박탈당했다는 의식을 되찾고 괴로워했다. 원해서도 무기력해도 아니었고 죄가 있어서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수개월 또는 수년을 동물적인 수준에서 살았다. 우리의 나날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배고픔과 피로와 추위, 두려움으로 채워져 있었고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기 위한 성찰의 자리는 없어졌다.

 

88. 해방 후 일어난 자살의 많은 경우들은 이와 같이 몸을 돌려 위험한 물을 바라보는 데서 기인했다고 나는 믿고 있다. 해방은 어쨌든, 반성과 우울함이라는 해일과 함께 찾아온 위기의 순간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소비에트 수용소들을 포함해서 라거를 연구하는 많은 역사학자들은, 포로생활 도중에 자살이 일어난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에 동일하게 주목했다.

 

특수부대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고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지배 민족인 우리는 너희들의 파괴자이지만, 너희들은 우리보다 나은 것이 없다.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실제로 원하고 있지만, 우리에겐 너희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을 파괴할 능력이 있다.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파괴한 것처럼

 

46. 소수 또는 한 사람이 다수에 의해 권력을 행사하는 곳에서 특권은 태어나고, 권력 자체의 의지에 반하면서도 특권은 증식한다. 그러나 한편, 권력이 특권을 용인하거나 조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라거에 국한해서 논하고 있지만 라거는 하나의 실험실로서 족히 바라볼 수 있다. 관리자 포로라는 혼성 계층은 수용소의 골격을 형성하며, 동시에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주인과 하인의 두 영역을 나누는 동시에 연결하는, 경계가 불분명한 회색지대이다.

 

프로텍치아와 협력의 회색지대는 다양한 뿌리로부터 탄생한다.

첫째, 권력층은 그 폭이 좁으면 좁을수록 그만큼 외부의 조력자가 더 필요해진다. ....노르웨이의 크비슬링, 프랑스의 비시 정부, 바르샤바의 유대인평의회, 살로 공화국, 존더코만도스 등등

 

그들을 묶어두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범죄의 짐을 지게 하는 것이고 그들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이며 가능한 한 그들을 연루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진짜 주범들과 공범관계로 묶일 것이고,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범죄조직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48. 두 번째는 억압이 거셀수록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기꺼이 권력에 협력하려는 의향이 더욱 더 확산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향은 미묘한 차이들과 다양한 동기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포, 이데올로기적 유혹, 승자를 곧이곧대로 모방하는 것, 어떤 권력이건 간에 그것을 향한 근시안적인 욕망, 비겁, 명령이나 규율 자체를 교묘하게 피하려는 철저한 계산에 이르기까지 그 동기는 다양하다.

 

여기서 잠깐, 몇몇 포로들을 라거 당국과 다양한 규모로 협력하도록 내몬 동기들을 하나하나 논하기에 앞서, 이러한 인간의 행태에 대해 섣불리 어떤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신중치 못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가장 큰 잘못은 시스템에, 곧 전체주의 국가의 구조 자체에 있음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51. 권력은 어느 정도 통제된 것이든, 찬탈한 것이든, 위로부터 수여받은 것이든, 아래로부터 인정받은 것이든, 정당한 자격이 있어서 부여받은 것이든, 공동의 연대로 부여받은 것이든, 아니면 피로써 또는 부로써 부여받은 것이건 간에 인간사회 조직의 모든 형태속에 존재한다.

 

52. 그러나 앞서 작업반 카포들에서 보듯,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관리자들이 가졌던 권력은 낮은 계급의 관리자의 권력이라 해도 실질적으로 무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충분히 냉혹하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처벌받거나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의미에게 그들의 폭력에 지워진 하한선은 낮았지만 상한선은 업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도 처벌이라는 명목으로 극악무도한 잔혹행위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1943년 말까지 포로가 카포에게 맞아 죽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모든 권력이 위로부터 내려오고 아래로부터의 통제는 거의 불가능한 전체주의 국가의 위계구조는 보다 작은 규모로, 그러나 확대된 특징들을 보이면서 라거들 내부에서 비슷하게 재현되었다.

 

25. 수십 년이 지나도록 희생자는 고통 속에 괴로워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다시 한 번 그 상처는 치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장 아메리는 벨기에 리지스탕스 운동을 하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게슈타포에게 고문당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글은 우리를 경악에 빠뜨린다.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에 시달리는 채로 남는다. (...) 고문당한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적응할 수 없을 것이다. 철저하게 그를 무로 만들어 버린 데서 오는 혐오감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신뢰는 첫 따귀로 이미 금이 가고, 이어지는 고문으로 더 이상 회복되지 않는다.

 

그에게 고문은 끝나지 않는 죽음이었다. 아메리, 그는 1978년에 자살했다.

 

26. 슈페어처럼 야심차고 지적인 전문가든 아이히만처럼 광신적인 냉혈한이든, 아니면 트레블링카의 슈팅글이나 아우슈비츠의 회스처럼 근시안적인 관리든, 고문 발명가들인 보거와 카두크처럼 우둔하고 추악한 사람이든, 질문을 받는 사람의 개인적인 성격과는 상괸없이 말이다. 말하는 사람의 정신적, 문화적 수준에 따라 크고 작은 오만함을 보이면서 여려 형태로 표현되는 그 답변들은 본질적으로 모두 똑같은 내용을 말한다. ,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나쁜 일을 저질렀다. 내가 받아온 교육과 살아온 환경을 감안했을 때 나는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다, 내가 하지 않았다면 내 대신 다른 사람이 더욱 엄하게 했을 것이다, 등과 같은 답변이다.

 

30. “우리는 절대적 복종과 위계질서와 민족주의에 맞게 교육되었다. 우리는 슬로건에 흠뻑 젖어 있었고 의례와 시위에 도취되어 있었다. 우리 민족에 유익한 것이 유일한 정의이며 대장의 말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배웠. 도대체 우리에게서 뭘 바라는가?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우리와 같았던 모든 사람들의 것과는 다른 행동을 우리에게 어떻게 기대한단 말인가? 우리는 부지런한 집행자였고 그런 부지런함 덕분에 칭찬받고 진급했다. 결정은 우리가 내린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자라난 체제는 자율적인 결정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 결정을 내렸고 다른 식으로는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정하는 능력을 거세당했기 때문이다. 결정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금지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것에 무능력해져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책임이 없으며 처벌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순전히 그들의 후안무치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근대적인 전체주의 국가가 개인에게 행사할 수 있는 압력은 무시무시하다. 그 무기는 본질적으로 세 가지이다. 교육, 지도, 대중문화로 위장한 프로파간다 또는 직접적인 프로파간다, 정보의 다원주의에 반하는 봉쇄, 그리고 테러가 바로 그것이다.

 

 

22. 이 책은 아직까지도 분명치 않아 보이는 라거 현상의 몇가지 양상들을 밝히는데 이바지하고자 한다. 보다 야심찬 목적도 있다. 좀 더 급박한 질문, 우리의 이야기를 읽을 기회가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노예 제도나 결투 의식이 그랬던 것처럼, 수용소 세계는 어디까지 사멸했으며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것인가, 어디까지 되돌아왔거나 되돌아오고 있는가, 위협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적어도 이러한 위협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들 각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역사가의 작업, 즉 근원을 철저하게 파헤치는 작업을 할 의도는 없었고 그럴 능력도 없다. 다만 거의 전적으로 나치의 라거들을 다루는 데 국한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에 대해서만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읽은 책들과 들은 이야기, 그리고 내가 초기에 쓴 두 책의 독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는 라거들에 관하여 충분한 간접 경험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내가 지금 집필을 하는 이 순간까지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사, 굴락의 수치, 불필요하고 피비린내 나는 베트남 전쟁, 캄보디아의 대학살, 아르헨티나의 실종자들, 그리고 그 후 우리가 목도한 잔인하고도 어리석은 수많은 전쟁들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나치 수용소의 체계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유일무이한 것이다. 다른 그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도 그토록 예기치 못한, 그토록 복잡다단한 현상이 나타난 적은 없었다. 기술적 정교함과 광신, 잔인함이 그토록 짧은 시간내에 그토록 명석하게 조합되어 그렇게 수많은 인명이 절멸된 적은 없었다.

 

41. 그러나 입소한 수용소에서 목격한 놀라운 광경은 그들에게 뜻밖의 충격을 던져 주었다. 자신이 내던져진 세계는 물론 끔찍한 것이었지만 또한 해독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세계는 그 어떤 모델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고, 적은 주변에도 있었지만 내부에도 있었다. “우리라는 말은 그 경계를 잃었고, 대립하는 자들이 두편으로 나뉜 게 아니었다. 하나의 경계선이 아니라 여러 개의 복잡한 경계선들, 곧 우리들 각자의 사이에 하나씩 놓인 수많은 경계선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적어도 불행을 함께하는 동료들의 연대감을 기대하면서 수용소에 입소했지만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바라던 동맹은 없었다. 반면에 수천 개의 봉인된 단자들만이 있을 뿐이었고 이 단자들 사이에는 필사적이고 은밀하고 지속적인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2015.7.15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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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0 0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2-10 08:47   좋아요 1 | URL
`긍정`보다 비판적 사유가 더 필요한거겠죠?
감사합니다^^
 
강희대제 10 - 얼웨허 역사소설, 전면 개정판 제왕삼부곡 1
얼웨허 지음, 홍순도 옮김 / 더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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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황자인 윤상은 넷째 황자 윤진과 함께 황하를 시찰하던 중 장오가를 만난다. 아역들이 장오가를 포함한 소금밀매꾼을 체포해 아문으로 데려간다. 청렴하기로 소문난 현령 시세륜은 소금밀매꾼들에게 소금을 들고 달려보라고 하고는 소금장수들을 전부 놓아준다. 사실 그들의 소금밀매라는 것은 호구지책으로 소꿉놀이에 불과할 뿐이고 소금 유통을 방해하는 큰 도둑은 돈과 권력으로 뭉친 염도(소금 정책 담당 관리)와 소금장수들이었다.

 

유명한 학자인 방포는 친구의 책에 서문을 써주었다, 책에 청나라를 비방하는 대목이 있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보낸 연갱요에게 체포된다. 사실 방포는 소금장수들과 죽이 맞은 전 현령을 쫓아냈다. 소금장수들은 여덟째 황자인 윤사에게 줄을 대 방포를 체포한 것. 윤사는 대내외적으로 24명 중의 황자 중 학문이나 인품 면으로 단연 최고의 황자로 인정받았다.

 

윤진과 윤상은 북행길에 오르던 중 강하진에 숙식하기로 한다. 그런데 강하진은 그 흔한 주막없이 진 하나가 통째로 유팔녀라는 자의 소유였다. 두 황자는 유팔녀의 하인에게 부탁해 하룻밤 신세를 진다. 그곳에서 두 황자는 위기에 처한 아란이란 노래하는 여자를 구해준다.

 

 

강희는 장부와는 달리 국고에 천 냥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강희는 윤상을 호부로 보내 국고를 채우라 명한다. 신임 호부로 시세륜이 임명된다.

 

황태자 윤잉은 궁녀인 정춘화와 통정을 나눈다. 추석맞이 잔치에서 강희 앞에서 국고 환수 건으로 열째 황자인 윤아가 윤상과 치고 박고 싸운다. 대신들과 마찬가지로 황태자와 황자들도 국고에서 빌린 빚이 있었고 윤아는 윤상과 시세륜이 너무 가혹하게 빚을 환수한다며 강희에게 호소한다. 윤아는 빚을 못 갚겠다고 버티고 이에 여덟째 황자인 윤사가 윤아 대신 빚을 갚는다.

 

한편 윤상은 예전에 구해준 아란을 또 다시 만나 그녀를 정실부인으로 맞이하고 싶어 한다.

윤상은 윤진의 도움으로 만든 전적 문서를 아란에게 건네주나(만주족과 한족은 결혼할 수 없었다) 아란은 윤상의 구애를 거절한다. 윤상은 기둥서방격인 임백안과 아란의 몸값을 흥정하지만 아란은 한사코 거부한다.

 

시위와 대신들을 데리고 암행을 하던 중 강희는 채시구에 있는 사형장에 다다른다. 동국유와 마제가 사형집행을 중지시킨다. 사형당할 구운생의 나이는 예순이 넘었으나 구운생을 자처하며 사형을 기다리는 남자는 젊은이였던 것. 이 당시에는 재백압(돈과 권세가 있는 사람들을 대신해 죄를 뒤집어쓴다는 의미)이 비일비재했다. 구운생이라는 자는 소금장수 장오가였다. 장오가의 아버지가 구운생에게 볼모로 붙잡혀있어 장오가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없이 구운생 대신 사형장에 끌려 나왔다. 강희는 장오가를 보군통령아문에 있는 선박영 휘하로 보낸다.

 

장오가 사건을 해결하라는 성지를 받고 윤사가 형부로 들어간다. 돈 받고 범인을 바꿔치기 한 주동자는 임백안이었다. 그러나, 임백안에게 약점이 잡힌 윤사는 함부로 임백안의 죄를 추궁할 입장이 아니었다. 임백안은 게다가 백관행술이라는 비밀 문서를 만들어 보관중이었다. ‘백관행술은 임백안이 보고 들은 관리들의 온갖 부정부패가 기록된 문서였다.

 

호부의 국고 환수 문제는 결국 흐지부지 돼버렸다. 시세륜이나 우명당은 강희의 배려로 안전지대로 옮겨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호부의 하급관리들은 이리저리 난타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호부상서로 새로 부임한 아령아는 아예 국고를 활짝 열어 버린다.

 

장오가는 운좋게 호위에 선발된다. 수렵대회에서 강희를 호위하던 장호가는 악륜대의 부당한 처사에 참다 참다 분개한다. 악륜대는 장오가를 욕하면서 조봉춘이나 무단에 대한 폭언을 서슴치 않는다. 그걸 본 강희는 악륜대가 태자의 처지가 이전 같지 않다고 생각해 엉뚱한 생각을 한다고 짐작하고는 악륜대를 경질시킨다.

 

수렵대회에서 윤아는 아홉째의 도움으로 일등을 차지하나 윤상이 이의를 제기하고 두 황자는 또 다시 다툼을 벌인다.

 

강희는 냉향정의 장춘화를 찾아간다. 강희는 장춘화가 한 남자와 통정함을 알게 된다. 강희는 그 남자가 태자라는 사실애 경악을 금치 못한다.

 

밑줄 그은 문장

 


 

 

 

 

 

 

 

 

p 229. "나는 64괘 중에서 제일 길한 점괘가 태괘라고 알고 있어. 그런데 선생은 어째서 불길하다고 하는 거지?"
오사도가 즉각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 사람에 한해서입니다. 이것은 태자전하의 운명을 점치는 점괘입니다. 때문에 나라와 백성들의 운명을 점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큰 틀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태자전하는 화의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그 불길이 극성에 달하고 있습니다. 또 그것은 최상을 뜻하는 ‘태’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상서로운 이 글자를 원합니다. 그러나 최고봉에 오르고 나면 허탈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내려가는 일밖에는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 속에는 화가 숨어 있습니다. 또 화에는 복이 깃들어 있습니다. 흉이 극에 달하면 길한 일이 생깁니다. 더불이 길이 최고조에 오르면 나쁜 일이 생깁니다. 이는 <역경>에서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p319. "우주의 ‘우’는 상하사방을 의미하옵니다. 유한한 공간을 뜻하옵니다. 또 ‘주’는 왕고래금을 의미하옵니다. 무한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옵니다. 이 손자는 육합지중에 몸을 두고 성도가 이뤄지는 때에 머무르고 있사옵니다. 위로는 황은을 우러르고, 아래로는 은총을 받고 있사옵니다. 손자의 모든 것은 군주에게서 왔사옵니다. 공의와 사정 역시 모두 그런 생각 속에 있지 않겠사옵니까!"
홍력의 말에 강희의 눈은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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