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도착하기 전에 陳俊이 耿에게 이르기를 "劇縣의 오랑캐 군대가강성하니, 우선 營門을 닫고 군사들을 휴식시키면서 上이 오시기를 기다려야합니다." 하였다. 耿이 말하기를 "大駕가 장차 이르실 것이니, 신하들은 마땅히 소를 잡고 술을 걸러 百官을 대접하여야 할 터인데, 도리어 저 오랑캐 - P271

를 君父에게 남겨 드리고자 하는가?" 하고는 마침내 출병하여 크게 싸워서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하여 다시 대파하니, 張의 군사 중에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도랑에 모두 시신이 가득하였다.
耿은 張가 곤궁하여 장차 후퇴하려 할 줄을 알고는 미리 左 右을설치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는데, ㅅ定(오후 10시경) 때에 張가 과연 군대를이끌고 떠나가자, 耿은 다시 매복했던 군대를 일으켜 크게 공격해서 추격하여鉅가에 이르니, 8, 90리에 죽은 시체가 서로 이어졌으며,輜重車2천여 대를 거두어 얻었다.
張가 劇으로 돌아간 뒤 며칠 만에 車駕가 臨淄에 이르러서 직접 군사들을 위로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크게 모였다. 황제가 耿에게 이르기를 "옛날 韓 歷를 격파하여 기반을 닦았는데, 지금 장군이 阿를 공격하여자취를 드러냈으니, 이는 모두 齊나라의 서쪽 지역이다. 功이 충분히 서로 비견할 만하고, 韓信은 이미 항복한 齊나라를 습격하였는데 장군은 홀로 강한敵을 함락시켰으니, 그 功이 韓信보다 더 어렵다. 또 옛날 橫이 酈生(食其)을 삶아 죽였는데, 田橫이 항복하자 髙帝는 衛尉(食其의 아우 商)에게명하여 원수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張가 전에 伏隆을 죽였으나만약 張가 귀순해 온다면 내 마땅히 大司徒(伏隆의 아들 伏湛)에게 명하여그 원한을 풀게 할 것이니, 또 일이 더욱 서로 비슷하다. 장군이 지난번 南陽에 있을 때에 이 큰 계책을 세웠는데 나는 항상 소활하여 부합하기 어렵다고여겼으나 뜻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일이 끝내 이루어지는군요" 하였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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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경조(京兆, 西安)의 지독한 도적인 초사(焦四) 등이 수백 명을 불러 모아 살고 있는 백성들을 겁탈하고 노략질 하며 삼보(三輔, 西安)지역에 해(害)를 끼치자 황제는 상을 내걸고 불러 모집하면서 사형시키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기다렸다. 초사 등은 죄를 받게 해달라고 하면서 스스로 귀부하니 각기에게 금포(錦袍)·은대(銀帶)·의복(衣服)·민전(緡錢)을 하사하고 나란히 발탁하여 용맹군사(龍猛軍使)로 삼았다.

황제는 다시 사자를 파견하여 요(遼)에 가서 화의(和議)를 약속하게 하였지만 〔요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사람을 모집하여 바다에 배를 띄워 여진(女眞)과 오실(烏實) 등의 부족에게 뇌물을 주면서 그를 배반하게 하였지만 두 부족은 좇지 않았다.

정축일(28일)에 황제는 촉(蜀)지역에서의 도적 떼가 점차 평정되어가자 조서를 내려서 자기에게 죄를 주었다. 애초에 한림학사인 전약수에게 명령하여 조서의 초안을 잡게 하였고 이미 완성되어 황제에게 올리니 황제는 붓으로 친히 몇 글자를 지워버려서 모든 허물을 끌어안는 것이 깊고 절실하였다. 그것에서 대략 말하였다.
"짐은 마땅하지 않은 사람에게 위임하였고 이치를 밝히는 것도 밝지 아니하여 저들 백성과 가까이 하는 관원(官員)이 은혜와 화합으로 정치를 하지 못하는데 이르게 하였다. 관각(??, 전매)의 관리는 오직 각박하게 깎아 내는 것만을 공로로 생각하여 나의 증민(蒸民, 많은 백성)을 어지럽히게 되자 일어나서 미친 듯이 노략질하였다. 이렇게 덕정(德政)을 잃은 것을 생각해 보니 이리하여 힘써 자신에게 책임 지우는 것이다. 고쳐서 다시 설립하는데, 영원히 전의 폐단을 거울로 삼아 지금부터 이후로는 아마도 경계(警戒)함을 줄 것이다!"

요(遼)의 초토사(招討使)인 한덕위(韓德威, 942~996)가 수만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진무(振武, 內蒙古 呼和浩特市 大靑山南麓)에서부터 남침하였는데 영안(永安, 四川省)절도사인 절어경(折御卿, 958~995)이 경기(輕騎)를 인솔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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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맞아서 그 무리를 자하차(子河?)에서 크게 패배시키니 그 치중(輜重)을 다 내버리고 숨어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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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한 것이 보고되자 황제가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거란은 가볍게 나왔다가 쉽게 물러가는데, 짐은 항상 변경에 있는 장수들에게 훈계하기를 그들과 더불어 칼끝을 가지고 다투지 말고, 그들이 깊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군사를 나누어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요격(邀擊)하면 반드시 남기는 것이 없을 것이다. 지금 과연 나의 말과 같았다."

황제가 말하였다.
"짐의 여러 아들 가운데 누구에게 신기(神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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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맡길 수 있겠는가?"
구준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천하를 위하여 군주를 선택하시는데 모의 하는 것이 부인과 환관에 미치는 것은 안 되고 모의하는 것이 가까이 있는 신하에게 미치는 것도 안 되니, 오직 폐하께서는 천하 사람들의 희망에 부응하기 위하여 선택해야 합니다."
황제가 머리를 숙이고 오래 있다가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게 하고 말하였다.
"원간(元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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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가능하겠소?"
대답하여 말하였다.
"아들을 아는 것은 아버지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성스럽게 생각하신 것이 이미 가(可)하다고 여기시었다면 원컨대 바로 결정하십시오."
황제는 드디어 조원간을 개봉윤으로 삼고 수왕(壽王)으로 고쳐 책봉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세워서 태자로 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태자에게 쏠리고 있으니, 나를 어느 곳에 두려고 하는 것이요?"
구준이 두 번 절하고 축하하며 말하였다.
"이는 사직(社稷)의 복입니다."
황제가 들어가서 〔이 내용을〕 말하자 후빈(后嬪)과 6궁(宮)이 모두 앞으로 와서 축하하였다. 황제가 다시 나가서 구준을 이끌어서 술을 마셨는데, 아주 만취하고서야 끝냈다.

구준은 일찍이 사건을 상주하면서 절실하고 곧아서 황제는 화가 나서 일어났는데, 구준이 황제의 옷을 붙잡고 다시 앉기를 청하였고 일이 결정되고서 마침내 물러갔다. 황제가 칭찬하며 감탄하여 말하였다.
"이 사람이 정말로 재상이다!"
또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짐이 구준을 얻은 것은 마치 당 태종이 위징(魏徵, 58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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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얻은 것과 같다!"

고려에서 해를 이어가며 요(遼)에 진공(進貢)하였는데, 요주(遼主)는 한림학사인 장간(張幹) 등을 파견하여 왕치(王治, 成宗)를 고려 국왕에 책봉하였으며 왕치는 그 동자(童子) 10명을 파견하여 가서 거란어를 익히게 하였다.

3월 임인일(2일)에 고려 국왕인 왕치(王治)가 요(遼)에 청혼하였는데, 요(遼)에서는 동경유수인 소긍덕(蕭?德, ?~996)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허락하였고, 고려는 그 신하인 한언경(韓彦卿)을 파견하여 요(遼)에 가서 납폐(納幣)하게 하였다. 이미 그리하였는데, 왕치가 죽자 요인(遼人)들은 그 폐백(幣帛)을 돌려주었다.

기축일(26일)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요주(遼主)에게 문안(問安)하였는데, 이때에 요주(遼主)는 탄산(炭山, 河北 獨石口 밖으로 西北쪽 ?河上游)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뒤에는 상례(常例)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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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읽은 책들은 다음과 같다. 





이 중 <조선인들의 청일전쟁>과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권을 읽을 때 특히나 즐거웠다. 


<조선인들의 청일전쟁>은 리뷰, 페이퍼로도 글을 남겼는데 청일전쟁을 주제로 하여 중국, 일본을 비롯한 자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시각으로 뜯어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장점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아는 청일전쟁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겉핧기 식이었는지 여실히 느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역사적 배경과 시작, 전개, 그리고 결과와 영향에 이르기까지 통합적인 흐름을 엿볼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권은 15~18세기 유럽인의 일상 생활에서의 소비 생활을 엿본다. 일상 생활이라는 친숙한 소재인데다 우리가 현재에도 사용하는 다양한 물품들이 어떤 식으로 시작되고 퍼져나갔는지 확인해볼 수 있었다. 음료인 커피나 차, 소금, 설탕, 후추 등의 식재료를 비롯한 먹거리, 집, 가구, 의복, 사치품 등 다양한 사례를 통해 당시 흥미로운 소비 생활을 확인할 수 있다.


2달 동안 함달달 모임 원서로 <Three Keys>를 읽었다. 원래도 씩씩했던 미아였지만 난관에 빠진 친구 루페와 그의 가족을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나라면 인종 차별이 일상인 그 곳에서 그런 적극성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생각은 할 수 있어도 행동으로 뛰어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 책 덕분에 미국의 이민자들에 대한 입장과 미국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여러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며칠 전 책을 주문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땐 역시 책을 사는 게 답인가. 


<When Stars Are Scattered>는 이 달에 읽기로 한 함달달 원서 책이다. 표지도 넘 좋고 안의 내용도 좋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키메라 - 만주국의 초상>은 장바구니에 계속 담겨 있었던 책이었는데 도서관에 신청해서 빌려보기에는 아까울 것 같아 과감히 질렀다. 만주국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현대중국의 탄생>도 마찬가지! 근 몇 달간 장바구니에 담겨 있었고 도서관에는 가격 때문에 받아주지 않는 책이라 그냥 샀다. 




지난 달부터 일이 폭풍처럼 밀려들어 며칠 전부터 야근이다 밤샘이다를 반복하고 있다. 이 달에는 더욱 중요한 일들이 많다. 어쨌든 걱정한다고 달라질 일은 없고 닥친 일을 수습해나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다.





철쭉이 떨어지기 전 아파트 근처에서 찍었다. 


친구분들 모두 5월도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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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05-06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야근에 밤샘에 저 많은 책과 벽돌책을 어찌 읽으신거죠???
대단하십니다!^^
보기만 해도 뿌듯한 북결산이네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은 저도 얼른 읽고 싶은 책입니다.
5월도 응원합니다.
건강 챙기시며 행복한 독서생활 하시길요~~

거리의화가 2024-05-09 18:15   좋아요 1 | URL
초반에 읽은 것들이 많습니다. 주말 근무까지는 아직 하지 않아서 그나마 책을 읽고요. 주중에는 진짜 쉽지 않네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 읽기 시작하신 것 같더군요. 즐독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하수 님도 건강 잘 챙기시고 행복한 5월 보내세요.

자목련 2024-05-07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월에는 야근과 밤샘이 없기를 바라요.
건강 잘 챙기시며 초록초록한 기분으로 채워지길!!

거리의화가 2024-05-09 18:16   좋아요 0 | URL
야근은 괜찮은데 밤샘만 없었으면 좋겠어요^^;
자목련 님 행복하고 건강한 나날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장기지속은언젠가는 깨진다. 그것은 단번에 전체가 깨지는 방식이 아니라, 서서히 금이가면서 깨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카스티야의 블랑슈와 성왕 루이 9세의 시대에 파리 주변의 농노(여기에서 농노는 인두세, 결혼세, 상속세의 세 가지 봉건 부담을 지는 사람이다)와 자유농으로 구성된 농민이 영주에 대항하여 자유를 획득한 것과, 농노해방(affranchissement, manumission)이 증가했다는 것-사실 자유민이 농노와 섞여 있으면 언젠가는 그들 자신도 농노가 - P353

될 위험이 있었다 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띤다. 그리고 오를리, 쉬시-앙-브리, 부아시 등지에서처럼 농민이 유리한 경제적 배경을 이용하여 돈으로 그들의 봉건부담을 사버렸다는 것 역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이런 움직임들은 넓게 퍼져갔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농민의 자유는 마치질병처럼 유럽 일부에 퍼져서 우선 경제활동이 활발한 지역부터 먼저 건드리고 그다음에는 이웃 마을과의 교류에 힘입어 덜 활발한 지역까지 건드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 P354

서유럽 세계가 명백한 후진성을 드러내는 곳은-아라곤이라는 예외적인 곳을 빼면 모두 주변(périphérie) 지역이다(그러나 아라곤의 경우도 이베리아라는 복합적인 세계 속에서는 수 세기 동안 주변 지역이었다). 소수에 불과하며 아주 좁은 지역에 한정된 선진지역과 변두리에 몰려있는 후진지역을 나타낸 지도를 상상해보자. 정체해 있거나 아주 느리게 진화하는 지역, 즉 영주제적이며 동시에 봉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고, 시대에뒤처져 있지만 그러면서도 서서히 변화해가는 그런 지역들은 이 지도상에서특별한 색깔로 칠해져야 할 것이다. 유럽 전체를 보면 농업자본주의가 차지하는 부분은 결국 아주 소수이다. - P406

선구산업이란 현재 또는 가까운 과거에 자본과 이익, 노동력을 자신에게 끌어모으는 산업이며, 원칙적으로 그 산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주변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발전을 이끌어줄 수 있는(가능성만을 말하고 있음에 주목하라) 산업을 말한다. 과거의 경제는 사실 통합성이 부족해서, 오늘날 저개발 국가들에서처럼 흔히 분해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이 반드시 그 경계를 넘어 이웃 영역에 영향을미치지는 않는다. 그 결과, 전산업화 시기의 세계는 현대 산업처럼 분야 간에 차이가 생기고 또 대단히 앞선 분야가 있는, 기복이 심한 면모를 가지고있지 않았고 또 가질 수도 없었다는 점을 우선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전산업은 상대적으로는 중요성을 가진다고 해도 전체적으로 보면 경제 전체를 자기 자신에게로 이끌어오지 못했다. 실제로 산업혁명기까지는 전산업이 결코 경제성장을 지배하지 못했다. 오히려 불확실한 성장을보이는 데다가 고장과 급정거를 겪는 경제 전체가 전산업을 지배했다. 전산업이 주춤거리는 발걸음을 옮기고 툭툭 끊어진 곡선을 보이는 것이 그런 이유에서이다. - P430

몇 가지 예외가 있지만 자본가들다시 말해서 다양한 활동을 무차별적으로 하던 "대상인들은 생산에 전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결코 대지에 두 발을 굳건히 뿌리 박은 지주가 아니었다. 간혹 지대 수취인인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진짜 이익을 얻고 신경을 쓰는 곳은 다른곳이다. 이들은 또 자기 일에 갇혀 있는 수공업 작업장의 주인이나 수송업경영자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업가들 중에 누군가가 배를 한 척소유하든가 혹은 배의 일부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면, 또 선대제를 가까이에서 통제했다면, 그것은 참된 그의 모습과 관련을 가질 때에 한정되어서의일이다. 그의 참된 모습이란 시장, 거래소, 상업망, 긴 교환의 연결망 등에서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분배야말로 이익을 내는 참된 분야인 것이다. - P508

우리가 받는 인상(자료가 분산되어 있고 불충분하기 때문에 단지 인상만을이야기할 수밖에 없다)은 언제나 이윤이 높은 경제 분야가 있게 마련이지만그런 분야들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매번 경제 자체가 변화함에 따라 이윤율이 높은 분야도 변화하면, 그때마다 활동적인 자본이 이것들을 좇아가고 이곳에 머물고 번영을 구가한다. 일반적인 법칙으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자본이 그런 영역을 창조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 P593

유럽 어디에서나 편재하는 밀을 보더라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틀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그것은 자체 소비의 대상으로서 물질생활이라는 1층에 머무를 수 있다. 그것은 또 대개 일상적인 곡창지대로부터가까운 도시-이 도시는 주변 농경지대에 대해서 "위치상의 우위를 가진다까지의 교역과 같은 근거리 사이의 규칙적인 교역품이 되기도 한다. 다음으로는 지방 간의 불규칙적인 그리고 때로 투기적인 교역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기근이 심화되고 반복되는 위기의 상황에서 원거리상으로 일어나는 대단히 큰 규모의 활기찬 투기 대상이 되기도 한다. 상업세계 내에서 층이 바뀔 때마다 다른 경제주체들과 다른 경제 행위자들이 개재되는 것이다. - P630

왕정은봉건제의 마그마로부터 나온 것이다. 프랑스 국왕은 영주들 중에 한 명으로서 단지 그들 중에서 뛰어난 인물일 뿐이며, 그들의 언어와 원칙을 함께 나누어 가지면서 동시에 그들을 뛰어넘은 자이다. 이런 식으로 국왕은 그 기원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귀족은 국왕과 동질적이다." 국왕은 귀족과 싸우지만 그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는 없다. 그는 궁정의 화려한 허식 속에 귀족들을 가두어두지만 그들과 함께 그 역시 갇혀 있는 셈이다. 국왕은 귀족을 근원으로부터 단절시키지만 반대로 귀족에게 상업의 문을 활짝 열어주지도 못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을 거두어서 책임을 져야 했다.
도시에 대해서 국왕은 특사와 특권을 많이 부여하면서도 한편으로 세금을 부과하고 소득의 일부를 앗아간다. 그러나 도시로서는 조금씩 형성 중인전국시장으로부터 이익을 보았다. 또 도시귀족과 부르주아지는 상업의 독점권을 누린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국왕은 그의 권력의일부를 "상품으로서" 판다. 국왕의 관리들은 도시 출신이다. 도시민은 관직을 샀다가 다시 팔아버리거나 자손에게 물려준다. 관직 매매는 부르주아지의 일부를 봉건화했다. 관직은 마치 예전에 토지 조각들을 봉토로 주는것처럼 국가가 양도하는 공적인 권위의 조각들이다. 관직 매매는 피라미드처럼 위로 쌓아가는 왕정사회를 형성했다. 이 피라미드의 상층에는 성격이모호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계층인 법복귀족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귀족은국왕의 변덕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느리기는 하지만 핵심적인 행정기관이 발달하고 국가의 필요가 생기면서 만들어졌다. - P763

나 자신의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다소의정도 차이는 있으나 독점의 성격이 강한 과거와 현재의 자본주의 모두는그 자신이 유래한 (게다가 그것을 먹이로 삼고 있는) 자유경쟁을 완전히 배제해버리지는 않는다. 자본주의는 자유경쟁의 위에서 그리고 옆에서 공존한다." 왜냐하면 15-18세기의 경제 옛날부터 발달해온 몇몇 "중심들"로부터시장경제와 교환경제의 승리를 통해서 공간을 정복한 역시 레닌이 19세기말의 "제국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제시한 수직적인 구분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의 혹은 법률상의) 독점과 경쟁이 그것이며, 달리 말하자면 내가 정의하는 바의 자본주의와 발전 중인 시장경제가그 두 개의 층이다. - P802

베버에게 자본주의는 경제발전이 마침내 찾아서 도달하게 된 약속의 땅이며 진보의 최종적인 만개로 보였다. (내가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면) 그는 자본주의를 결코 취약하거나 일시적인 체제로 보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의죽음, 혹은 적어도 일련의 연속적인 격변이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현재 우리의 눈앞에서 진행 중이다. 어쨌든 그것은 "이제 더 이상역사발전의 최종 단어로 보이지는 않는다. - P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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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해방이며, 개방이며, 또다른 세계로의 접근이다. 그것은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과 인간이 교환하는 잉여는 조금씩 조금씩 이 좁은 틈을 통과해간다. 그것은 애초에는 성서에서 말하듯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지나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러나 그 구멍은 점차 커지고 또많아지며, 그러다가 이 과정의 마지막에 가면 "시장이 일반화된 사회(sociétéà marché généralisé)"가 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그 과정의 마지막에가서, 즉 뒤늦게 이루어진 일이며, 그것도 지방마다 제각각이어서 결코 같은 때에 같은 방식으로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장의 발전에 관한 단순하고 단선적인 역사는 없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것, 고졸한 것, 근대적인 것, 대단히 근대적인 것 등이 혼재한다.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 P25

화폐는 교환을 확대시키는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언제나 불충분하다. 광산에서 산출되는 귀금속의 양이 모자라고, 해가 갈수록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하며, 퇴장(退)이라는 심연은 언제나 열려 있다. 이 문제의 해결 방안은 결국 상품-화폐(marchandise-monnaie)-다른 모든 상품이 반영되며 측정되는 거울과 같은 존재-이상의 것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표시-화폐 (monnaie-signe)를 의미한다. 11세기 초에 중국에서 최초로 이것을 만들었다. 467) 그러나 지폐를 만드는 것과 그것을 실제 사정에 맞게 유통시키는 것은 다른 일이다. 중국에서는 서양에서처럼 지폐가 자본주의를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사실 유럽은 아주 일찍부터 해결책 - 그것도 여러 해결책들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제노바, 피렌체, 베네치아에서는 13세기부터 환어음(lettre dechange)이라는 위대한 혁신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교환 속으로 아주 조금씩밖에 침투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침투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 P143

교역에 필수적인 지폐가 실제로 도입되는 데에는 거래소와 은행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모든 지폐를 시장에 내놓으며 거래소는 공채증권과 주식이 단번에 유동성 있는 지불수단이 될 가능성을 마련했다. - P144

지폐에서 금속화폐로, 또 그 반대로 쉽게 전환하는 것은 거래소가 제공하는 본질적인 장점이다. 영국의 연금은 단지 "바람장사"의 기회만은 아니다.
그것은 보조화폐이며 충분한 보증을 가진 화폐인 데다가 이자까지 붙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소유자가 유동성[현찰화폐/역자]을 원하면 곧 거래소에가서 그 증서를 판매하면 된다. 수월히 얻을 수 있는 유동성, 유통, 이런 것이야말로 네덜란드와 영국의 사업이 훌륭한 성과를 거둔 비밀이 아니었을까? - P145

16세기의전진은 정기시에서 정기시로 현찰과 크레딧이 이전되는 우월한 유통의 영향 아래 위로부터 조직되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모든 것은 꽤 높은 수준에 있는 국제적 유통―"공중(空中)에서의" 유통에 매여 있었다.525) 그후이것은 속도가 떨어지고 더 복잡해지다가 급기야는 엔진이 쿨럭거리기 시작한다. 1575년 이후 안트베르펜-리옹-매디나 델 캄포를 잇는 순환이 막혔다. 제노바인들은 이른바 브장송 정기시를 통해서 이것을 다시 이어보려고했으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17세기에는 상품을 통해서 모든 것이 다시 작동했다. 나는 이 재출발에 대해서 그것이 전적으로 암스테르담이나 그곳의 거래소 때문에 가능해졌다고하지는 않겠다. 물론 그것들이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보 - P173

다는 차라리 작은 반경, 나아가서 극도로 작은 반경을 가진 소박한 경제 유통로 속에서, 즉 기본적인 밑바닥에서 교환이 증가한 데에 그 원인을 돌리고싶다. 중요한 특징 내지 결정적 모터는 상점이 아니었을까? 이런 조건에서(16세기의) 물가상승은 상층 구조의 지배와 상응한다. 이와 반대로 하락과정체를 겪던 17세기에는 하층 구조의 우위를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가능한 설명이기는 하다.
그렇다면 계몽주의 세기(18세기)의 재출발과 약진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1720년 이후의 움직임은 아마 모든 층위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핵심사항은 체제(system)에 균열이 생겼으며 그 균열이 점차커져간다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시장에 대항하여 반(反)시장(contre-manché)이 작용했다(나는 지금까지 사용해온 사거래[private market]라는 말보다는 이 반시장이라는 강한 뜻의 말을 더 좋아한다). 정기시에 대항하여 창고와 보세창고 교역이 증대한다. 정기시는 기본적인 교역의 차원으로 복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마찬가지로 거래소에 대항하여 은행들이 번성했다. 은행들은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해도 점차 수가 늘어나고 독자적인 기구가 되면서 식물의 꽃이 피어나듯 사방에서 뚫고 나왔다. - P174

지금까지 우리가 그려본 모델은 단지 서양에서만 타당하다. 그렇지만 일단 이렇게 만들어본 모델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유용성을 제공하지 않을까?
서양 발전의 핵심을 두 가지 들어보면 첫째, 상부에서 여러 [교환/역주] 도구가 발달한 것이고 둘째, 18세기에 여러 수단과 방법이 증가한 것이다. 이런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는 어땠을까? 유럽과 가장 거리가먼 경우는 중국으로서 이곳에서는 제국의 행정이 경제의 계서화를 가로막았다. 단지 효율성 있게 돌아가는 것은 하층의 읍 및 도시의 상점과 시장뿐이었다. 유럽과 가장 유사한 경우는 이슬람권과 일본이다. 물론 우리는 세계적인 차원의 비교사를 다시 시도해보아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주거나 아니면 적어도 정확하게 문제를 제기하도록 해줄 것이다. - P175

유럽 중세 및 근대에 벌어졌던 정치투쟁과 종교적 열정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자기 나라에서 쫓겨나고 외국에서 소수 집단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들과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도시들은 싸움질이 일어난 말벌집과도 같았다. 성벽내에는 시민만이 아니라 망명자가 따로 있었는데, 이들은 너무나도 수가 많아서 푸오루쉬티 (fuorusciti : 망명자들)라는 총칭적인 이름으로 하나의 사회카테고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쫓겨난 후에도 자신을 내쫓은 도시의 중심부에 재산과 사업관계를 계속 유지하다가 어느 날 다시 그 도시로 돌아가고는 했다. 이것은 제노바, 피렌체, 루카 등 여러 도시에서 많은 가문이 겪은역사이다. 바로 이 푸오루쉬티가, 특히 그들이 상인인 경우에, 큰 부를 쌓은것이 아닐까? 그들이 큰 사업을 할 경우에는 "원거리 교역"을 수행한다. 그들은 이 일을 맡을 수밖에 없다. 추방된 사람들은 바로 그렇게 먼 곳에 나가있다는 이유 때문에 번영을 구가하는 것이다. - P220

금과 은이 언제나 경쟁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유럽은 은을 유출시켰고 이 은은 세계를 일주했다. 그 대신 유럽은 금을 과대평가했는데, 이것은 금을 집에 묶어두고, 상인과 상인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의 중요한 결제에 씀으로써 유럽이라는 "세계경제"의 내부에서 금을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또 중국, 수단, 페루 등지로부터 확실하게 금을 수입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 P274

은의 대량 유출은 유럽 경제의 내부에서도 빈번한 고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대신 이것은 지폐라는 임시방편이 큰 성공을 거두도록 하는 데에 일조했다. 또 먼 곳에서 광산을 개발하도록 부추겼고 상업에서 귀금속을 대체하는방편을 찾도록 만들기도 했다. 레반트에 직물을 보내고, 중국에 면직과 아편을 보내는 것이 그런 예이다. 아시아는 은을 얻는 대가를 직물, 특히 향신료, 약품(drogues), 차와 같은 식물로 갚으려고 한 데에 비해서 유럽은 수지를 맞추기 위해서 광공업에서의 노력을 배가한 것이다. 장기적으로 이것은유럽이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만든 도전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확실한 것은,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유럽이 향신료나 중국풍 물품 같은 사치품을 얻기 위해서 자기 피를 뽑아서 팔았기 때문에 빈혈에 걸렸다는 식의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P275

•시장이라는 말은교환, 유통, 분배 등과 상통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시장이라는 말은 흔히 상당히 규모가 큰 교환 형태, 이른바 시장경제, 다시 말해서 하나의 체제를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에서의 어려움은 다음과 같다.
•복합체(complexe)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는 경제생활, 나아가서 사회생활이라는 전체 속에 옮겨놓고 보아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이 복합체 자체가 끊임없이 진보하고 변화하며, 따라서 어느 한 순간에라도 같은 의미, 같은 범위를 가지지 않는다. - P304

아무리 활동적인 경제라고 해도 변두리만이 아니라 그 중심부에-
서도-상당히 넓은 영역이 시장의 움직임과 거의 무관한 채로 남아 있었다.
단지 화폐나 외국의 희귀한 물건이 도착하는 것과 같은 몇몇 모습들만이 이 - P305

작은 세계가 완전히 닫히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따름이다. 그와 유사한타성 내지 정체성은 조지 시대의 영국이나 활발하기 그지없었던 루이 16세시대의 프랑스에서도 볼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경제가 성장하면서 바로 이러한 외진 지역들이 줄어들게 되고 그곳들이 생산과 소비의 일반 흐름에 동참하도록 만든다. 그러다가 산업혁명이 마침내 시장 메커니즘을 일반화시킨 것이다.
자체조절적이고 경제 전체를 지배하며 합리화시키는 시장, 이것이 경제성장의 역사의 핵심이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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