馮異가 관중을 다스려서 출입한 지 3년 만에 上林苑이 도읍을 이루었다.
어떤 사람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馮異의 위엄과 권세가 지극히 중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그에게로 돌아가서 咸陽王이라고 부릅니다." 하였다. 황제가 이 글을 馮異에게 보이자, 馮異가 두려워하여 글을 올려 사례하니, 조서로 답하기를 "장군은 우리 국가에 있어서 의리는 군신간이요 은혜는 부자간과 같으니, 어찌 의심하고 혐의하여 두려워하는 뜻이 있는가?" 하였다.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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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일(25일)에 황제가 재상에게 말하였다.
"듣건대 조정에는 서로 사귀며 붕당을 만들고 서로 헛된 칭찬을 하면서 빨리 승진하여 쓰이기를 구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들뜨고 경박한 풍조는 자라게 해서는 안 될 것이요."
마침내 조서를 내려서 경고하고 어사대가 이를 규찰하도록 명령하였다.

경서전운부사·태상박사·직사관인 미산(眉山, 四川省 眉山) 사람인 주태부(朱台符, 965~1006)가 말씀을 올렸다.
"폐하께서 천명을 받으시고 사물과 더불어 다시 시작하는데, 이계천에게 절월(節鉞)을 수여하고 여환(黎桓)에게 왕작을 덧붙여 주고68 모두 사자에게 명령하여 그 지역을 진무(鎭撫)하시었지만 오직 저 거란만이 아직 악택(渥澤, 은택)을 입지 않은 것은 왕도(王道)가 치우침이 없게 한다는 까닭이 되지 않습니다. 신은 어리석으나 마땅히 이때를 이용하여 문무에 재주와 지략을 가지고 변경에 관하여 아는 인사를 선택하여 한 명의 경개(耿介)한 신하로 삼으시어 제위(帝位)를 이으시고 상복(喪服)을 벗고69 나서 예(禮)로서는 마땅히 수호(修好)하여야 합니다. 그들과 더불어 전에 있었던 악연을 다 버리고 다시 옛날의 맹약을 찾아 회복하여 재화(財貨)를 가지고 이롭게 하고 관시(關市, 국경무역)를 허락하여 태조시절의 고사(故事)처럼 하여서 두 나라가 이미 화평하게 되면 북쪽을 돌아보는 걱정거리가 없게 되고 오로지 서쪽에 힘을 쓸 수 있으니 이계천은 마땅히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고 손을 맞잡을 것인데 이는 한 번 거동(擧動)하여 두 가지를 얻는 것입니다."

경인일(7일)에 유사에게 조서를 내렸다.
"역역(力役)하는 것 가운데 명목이 없는 것과 영선(營繕)을 하는 것 중에 급하지 않은 것은 모두 이를 철폐하라."

"이들은 모두 선량한 사람들이 아니고 단지 스스로 승진하고자 하는데 그치고 있으니 마땅히 견책하여 이를 경계해야 하오."
이항이 나아가서 말하였다.
"조정에서는 최근에 언로(言路)를 열었는데 만약에 말한 것이 이치에 맞는다면 의당 표창하고 상을 주어야 하며 아니라면 조정에 남겨 두면 됩니다. 하물며 신 등은 재주에 맞지 않게 태보(台輔, 재상)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만약에 파직되거나 면직된다면 마침내 일을 말한 사람이 조정에 보충함이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경을 정말로 어른 같은 사람이요."

병자일(24일)에 황제가 보필하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일반 관리 가운데서 재간에서는 모자람이 없는데 덕행을 물어 보면 그에 적당한 사람이 아주 적다. 무릇 덕(德)이란 모든 행동의 근본이며 덕을 실천한 집안에는 반드시 충신과 효자가 있을 것인데, 어찌 덕행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그 충성과 효도를 온전히 할 수 있겠는가? 또 일반 관리가 관장하는 업무는 대부분 제대로 처리하지 아니하면서 다른 부문의 이해를 주워들어가지고 진급하려고 도모한다. 만약에 스스로 본래의 부문을 잘 처리할 수 있다면 모든 직책이 엄숙하게 하지 아니하거나, 또 어찌 정사(政事)가 굽어지고 더러워 질 것을 걱정하겠는가?"

장영이 말하였다.
"전당(錢唐, 浙江省 杭州市)지역에는 10만 가구가 있는데 굶주린 사람이 8만~9만이니 만약에 소금을 가지고 스스로 살아가지 못하여 어느 날 벌 떼처럼 일어나서 도적이 된다면 그 걱정거리는 깊다. 가을까지 기다리게 되면 마땅히 옛날 법을 준용하게 될 것이다."

일찍이 조서를 내려서 백성들이 거마하(拒馬河)86를 건너서 거란에 가서 말을 사는 것을 허락한 일이 있는데, 하승구가 말하였다.
"연변전도사(緣邊戰櫂司)87는 도하(淘河)88에서 니고해구(泥姑海口)89까지는 굴곡(屈曲)으로 9백여 리 정도인데, 천연적으로 험하고 굳어서 정말로 지리적으로 이로운 곳입니다. 태종께서는 28개의 채(寨)90에 125개의 포(鋪)를 설치하고 정신(廷臣) 11명과 수졸 3천 명에게 명령하여 배 1백 소(?)를 거느리고 왕래하면서 순찰하고 경계하여 간사함을 막아 완급으로 대비하였으니 대단한 요해처입니다. 지금 공사(公私)의 무역을 허락하여 주시어서 사람과 말이 바꾸어 물을 건너게 하는 것은 대단히 편리하거나 마땅하지 아니합니다. 만약에 그러하다면 채(寨)와 포(鋪)는 헛되이 설치한 것이 됩니다."
황제는 그 말을 받아들여서 바로 전에 내린 조서를 중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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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도착하기 전에 陳俊이 耿에게 이르기를 "劇縣의 오랑캐 군대가강성하니, 우선 營門을 닫고 군사들을 휴식시키면서 上이 오시기를 기다려야합니다." 하였다. 耿이 말하기를 "大駕가 장차 이르실 것이니, 신하들은 마땅히 소를 잡고 술을 걸러 百官을 대접하여야 할 터인데, 도리어 저 오랑캐 - P271

를 君父에게 남겨 드리고자 하는가?" 하고는 마침내 출병하여 크게 싸워서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하여 다시 대파하니, 張의 군사 중에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도랑에 모두 시신이 가득하였다.
耿은 張가 곤궁하여 장차 후퇴하려 할 줄을 알고는 미리 左 右을설치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는데, ㅅ定(오후 10시경) 때에 張가 과연 군대를이끌고 떠나가자, 耿은 다시 매복했던 군대를 일으켜 크게 공격해서 추격하여鉅가에 이르니, 8, 90리에 죽은 시체가 서로 이어졌으며,輜重車2천여 대를 거두어 얻었다.
張가 劇으로 돌아간 뒤 며칠 만에 車駕가 臨淄에 이르러서 직접 군사들을 위로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크게 모였다. 황제가 耿에게 이르기를 "옛날 韓 歷를 격파하여 기반을 닦았는데, 지금 장군이 阿를 공격하여자취를 드러냈으니, 이는 모두 齊나라의 서쪽 지역이다. 功이 충분히 서로 비견할 만하고, 韓信은 이미 항복한 齊나라를 습격하였는데 장군은 홀로 강한敵을 함락시켰으니, 그 功이 韓信보다 더 어렵다. 또 옛날 橫이 酈生(食其)을 삶아 죽였는데, 田橫이 항복하자 髙帝는 衛尉(食其의 아우 商)에게명하여 원수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張가 전에 伏隆을 죽였으나만약 張가 귀순해 온다면 내 마땅히 大司徒(伏隆의 아들 伏湛)에게 명하여그 원한을 풀게 할 것이니, 또 일이 더욱 서로 비슷하다. 장군이 지난번 南陽에 있을 때에 이 큰 계책을 세웠는데 나는 항상 소활하여 부합하기 어렵다고여겼으나 뜻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일이 끝내 이루어지는군요" 하였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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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경조(京兆, 西安)의 지독한 도적인 초사(焦四) 등이 수백 명을 불러 모아 살고 있는 백성들을 겁탈하고 노략질 하며 삼보(三輔, 西安)지역에 해(害)를 끼치자 황제는 상을 내걸고 불러 모집하면서 사형시키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기다렸다. 초사 등은 죄를 받게 해달라고 하면서 스스로 귀부하니 각기에게 금포(錦袍)·은대(銀帶)·의복(衣服)·민전(緡錢)을 하사하고 나란히 발탁하여 용맹군사(龍猛軍使)로 삼았다.

황제는 다시 사자를 파견하여 요(遼)에 가서 화의(和議)를 약속하게 하였지만 〔요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사람을 모집하여 바다에 배를 띄워 여진(女眞)과 오실(烏實) 등의 부족에게 뇌물을 주면서 그를 배반하게 하였지만 두 부족은 좇지 않았다.

정축일(28일)에 황제는 촉(蜀)지역에서의 도적 떼가 점차 평정되어가자 조서를 내려서 자기에게 죄를 주었다. 애초에 한림학사인 전약수에게 명령하여 조서의 초안을 잡게 하였고 이미 완성되어 황제에게 올리니 황제는 붓으로 친히 몇 글자를 지워버려서 모든 허물을 끌어안는 것이 깊고 절실하였다. 그것에서 대략 말하였다.
"짐은 마땅하지 않은 사람에게 위임하였고 이치를 밝히는 것도 밝지 아니하여 저들 백성과 가까이 하는 관원(官員)이 은혜와 화합으로 정치를 하지 못하는데 이르게 하였다. 관각(??, 전매)의 관리는 오직 각박하게 깎아 내는 것만을 공로로 생각하여 나의 증민(蒸民, 많은 백성)을 어지럽히게 되자 일어나서 미친 듯이 노략질하였다. 이렇게 덕정(德政)을 잃은 것을 생각해 보니 이리하여 힘써 자신에게 책임 지우는 것이다. 고쳐서 다시 설립하는데, 영원히 전의 폐단을 거울로 삼아 지금부터 이후로는 아마도 경계(警戒)함을 줄 것이다!"

요(遼)의 초토사(招討使)인 한덕위(韓德威, 942~996)가 수만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진무(振武, 內蒙古 呼和浩特市 大靑山南麓)에서부터 남침하였는데 영안(永安, 四川省)절도사인 절어경(折御卿, 958~995)이 경기(輕騎)를 인솔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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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맞아서 그 무리를 자하차(子河?)에서 크게 패배시키니 그 치중(輜重)을 다 내버리고 숨어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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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한 것이 보고되자 황제가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거란은 가볍게 나왔다가 쉽게 물러가는데, 짐은 항상 변경에 있는 장수들에게 훈계하기를 그들과 더불어 칼끝을 가지고 다투지 말고, 그들이 깊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군사를 나누어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요격(邀擊)하면 반드시 남기는 것이 없을 것이다. 지금 과연 나의 말과 같았다."

황제가 말하였다.
"짐의 여러 아들 가운데 누구에게 신기(神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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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맡길 수 있겠는가?"
구준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천하를 위하여 군주를 선택하시는데 모의 하는 것이 부인과 환관에 미치는 것은 안 되고 모의하는 것이 가까이 있는 신하에게 미치는 것도 안 되니, 오직 폐하께서는 천하 사람들의 희망에 부응하기 위하여 선택해야 합니다."
황제가 머리를 숙이고 오래 있다가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게 하고 말하였다.
"원간(元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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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가능하겠소?"
대답하여 말하였다.
"아들을 아는 것은 아버지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성스럽게 생각하신 것이 이미 가(可)하다고 여기시었다면 원컨대 바로 결정하십시오."
황제는 드디어 조원간을 개봉윤으로 삼고 수왕(壽王)으로 고쳐 책봉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세워서 태자로 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태자에게 쏠리고 있으니, 나를 어느 곳에 두려고 하는 것이요?"
구준이 두 번 절하고 축하하며 말하였다.
"이는 사직(社稷)의 복입니다."
황제가 들어가서 〔이 내용을〕 말하자 후빈(后嬪)과 6궁(宮)이 모두 앞으로 와서 축하하였다. 황제가 다시 나가서 구준을 이끌어서 술을 마셨는데, 아주 만취하고서야 끝냈다.

구준은 일찍이 사건을 상주하면서 절실하고 곧아서 황제는 화가 나서 일어났는데, 구준이 황제의 옷을 붙잡고 다시 앉기를 청하였고 일이 결정되고서 마침내 물러갔다. 황제가 칭찬하며 감탄하여 말하였다.
"이 사람이 정말로 재상이다!"
또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짐이 구준을 얻은 것은 마치 당 태종이 위징(魏徵, 58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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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얻은 것과 같다!"

고려에서 해를 이어가며 요(遼)에 진공(進貢)하였는데, 요주(遼主)는 한림학사인 장간(張幹) 등을 파견하여 왕치(王治, 成宗)를 고려 국왕에 책봉하였으며 왕치는 그 동자(童子) 10명을 파견하여 가서 거란어를 익히게 하였다.

3월 임인일(2일)에 고려 국왕인 왕치(王治)가 요(遼)에 청혼하였는데, 요(遼)에서는 동경유수인 소긍덕(蕭?德, ?~996)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허락하였고, 고려는 그 신하인 한언경(韓彦卿)을 파견하여 요(遼)에 가서 납폐(納幣)하게 하였다. 이미 그리하였는데, 왕치가 죽자 요인(遼人)들은 그 폐백(幣帛)을 돌려주었다.

기축일(26일)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요주(遼主)에게 문안(問安)하였는데, 이때에 요주(遼主)는 탄산(炭山, 河北 獨石口 밖으로 西北쪽 ?河上游)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뒤에는 상례(常例)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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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읽은 책들은 다음과 같다. 





이 중 <조선인들의 청일전쟁>과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권을 읽을 때 특히나 즐거웠다. 


<조선인들의 청일전쟁>은 리뷰, 페이퍼로도 글을 남겼는데 청일전쟁을 주제로 하여 중국, 일본을 비롯한 자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시각으로 뜯어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장점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아는 청일전쟁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겉핧기 식이었는지 여실히 느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역사적 배경과 시작, 전개, 그리고 결과와 영향에 이르기까지 통합적인 흐름을 엿볼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권은 15~18세기 유럽인의 일상 생활에서의 소비 생활을 엿본다. 일상 생활이라는 친숙한 소재인데다 우리가 현재에도 사용하는 다양한 물품들이 어떤 식으로 시작되고 퍼져나갔는지 확인해볼 수 있었다. 음료인 커피나 차, 소금, 설탕, 후추 등의 식재료를 비롯한 먹거리, 집, 가구, 의복, 사치품 등 다양한 사례를 통해 당시 흥미로운 소비 생활을 확인할 수 있다.


2달 동안 함달달 모임 원서로 <Three Keys>를 읽었다. 원래도 씩씩했던 미아였지만 난관에 빠진 친구 루페와 그의 가족을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나라면 인종 차별이 일상인 그 곳에서 그런 적극성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생각은 할 수 있어도 행동으로 뛰어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 책 덕분에 미국의 이민자들에 대한 입장과 미국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여러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며칠 전 책을 주문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땐 역시 책을 사는 게 답인가. 


<When Stars Are Scattered>는 이 달에 읽기로 한 함달달 원서 책이다. 표지도 넘 좋고 안의 내용도 좋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키메라 - 만주국의 초상>은 장바구니에 계속 담겨 있었던 책이었는데 도서관에 신청해서 빌려보기에는 아까울 것 같아 과감히 질렀다. 만주국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현대중국의 탄생>도 마찬가지! 근 몇 달간 장바구니에 담겨 있었고 도서관에는 가격 때문에 받아주지 않는 책이라 그냥 샀다. 




지난 달부터 일이 폭풍처럼 밀려들어 며칠 전부터 야근이다 밤샘이다를 반복하고 있다. 이 달에는 더욱 중요한 일들이 많다. 어쨌든 걱정한다고 달라질 일은 없고 닥친 일을 수습해나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다.





철쭉이 떨어지기 전 아파트 근처에서 찍었다. 


친구분들 모두 5월도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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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05-06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야근에 밤샘에 저 많은 책과 벽돌책을 어찌 읽으신거죠???
대단하십니다!^^
보기만 해도 뿌듯한 북결산이네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은 저도 얼른 읽고 싶은 책입니다.
5월도 응원합니다.
건강 챙기시며 행복한 독서생활 하시길요~~

거리의화가 2024-05-09 18:15   좋아요 1 | URL
초반에 읽은 것들이 많습니다. 주말 근무까지는 아직 하지 않아서 그나마 책을 읽고요. 주중에는 진짜 쉽지 않네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 읽기 시작하신 것 같더군요. 즐독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하수 님도 건강 잘 챙기시고 행복한 5월 보내세요.

자목련 2024-05-07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월에는 야근과 밤샘이 없기를 바라요.
건강 잘 챙기시며 초록초록한 기분으로 채워지길!!

거리의화가 2024-05-09 18:16   좋아요 0 | URL
야근은 괜찮은데 밤샘만 없었으면 좋겠어요^^;
자목련 님 행복하고 건강한 나날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