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에 이르러 할라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분화가 진행되었다. 즉 하나의 할라가 나뉘어서 따로 거주하는 두 개 이상의 동성同姓 씨족 집단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할라에서 분화된 씨족 집단을 무쿤muk?n이라고 했다.

모든 만주족은 성을 가지고 있었다. 만주족이 일상에서 성을 사용하지 않은 원인은 그들이 국가를 세우기 전에 씨족 단위로 생활했던 시기의 관습이 청대 내내 지속된 때문이었다.
만주족의 조상인 여진족은 씨족이나 부족 단위로 흩어져 거주했다. 이 씨족을 여진어로 할라hala, 姓라고 했다. 할라는 하나의 씨족 집단을 가리킴과 동시에 성姓을 의미했다.

만주족이 대거 본래의 성을 축약하거나 변형하는 방식으로 한족의 성처럼 보이게 만든 것은 대개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 이후이고, 그 가장 큰 원인은 청 말기와 신해혁명 시기에 한인의 만주족에 대한 적대감이 급격히 커진 때문이었다.

과거에 할라는 자주 이동하면서 살았으나 농경이 발전하고 정착 생활이 늘어나면서 촌락을 구성하게 되었다. 하나의 할라가 몇 개의 촌락에 분산되어 살기도 하고, 촌락에 다른 씨족인이 섞이기도 했다. 이러한 촌락을 여진어로 가샨ga?an이라고 했다.

누르하치의 정복전에 강력히 저항하다 복속된 여진인은 기존의 조직을 완전히 해체시키고 구성원을 개인 단위로 여러 니루에 배속시켰지만, 그 외에 다수의 여진인은 과거의 혈연 조직과 지연 조직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니루로 편입되었다. 하나의 혈연 집단의 사람 수로 하나의 니루를 만들 수 있으면 그렇게 했고, 대개 씨족장인 할라 다hala da, 姓長나 무쿤 다muk?n da, 族長를 니루의 수장인 니루 어전으로 임명했다. 하나의 지연 집단 내에 몇 개의 혈연 집단이 있고 이를 합쳐서 하나의 니루를 만들면 대개 촌락장인 가샨 다ga?an da, ?長를 니루 어전으로 임명했다. 씨족은 여진인이 팔기로 편제된 후에도 그 영향을 받지 않고 니루 속에서 존속되었다. 결국 팔기제가 만들어진 후에도 만주족이 일상에서 성을 사용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나지 않은 것이다.

이름의 일부가 아버지에서 아들과 손자로 대대손손 계승되면서 진짜 성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만주족의 이런 독특한 방식의 유사 성姓을 중국 학계에서는 수명성隨名姓이라고 부른다. 즉 아버지의 이름의 일부를 자식이 계승하여 마치 성처럼 쓴다는 뜻이다. 아버지 이름의 일부를 따서 아들이 성처럼 사용하다 보니 많은 한인들은 만주족의 아버지와 아들이 상이한 성을 쓴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다. 만주족이 성을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고 이름의 첫음절이 성처럼 불리다보니 일어난 오해였던 것이다.

홍 타이지는 탕서 제사를 황실이 독점하는 조치를 반포하는 동시에 야제野祭, 즉 굿을 금지시켰다.

청 황실의 가장 중요한 샤머니즘 제사는 탕서 제사와 곤녕궁(입관 전은 청녕궁) 제사였다. 탕서 제사가 궁궐 밖에서 시행된 샤머니즘 제사였다면, 곤녕궁에서 열리는 제사는 궁중에서 시행된 샤머니즘 제사였다. 곤녕궁에서 거행된 제사의 형식은 탕서 제사와 유사했다. 곤녕궁 제사에서는 탕서 제사와 마찬가지로 하늘신과 조상신뿐만 아니라 석가모니, 관음보살, 관제關帝 등 외부에서 도입된 신도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만주족 고유의 신인 조상신이나 부뚜막신jun ejen 등은 워처쿠라고 불린 반면, 외래의 신은 언두리enduri라고 불려서 양자가 구분되었다. 많은 신이 제사의 대상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신은 역시 조상신이었다.

건륭제는 1747년(건륭 12)에 다양한 종류의 샤머니즘 제사의 격식과 축문들을 정리하여 『만주인의 제신祭神하고 제천祭天하는 규정서Manjusai wecere metere kooli bithe』라는 제목의 만문서를 편찬했다. 청대의 많은 만문서들이 처음부터 한문본과 함께 편찬된 것과 달리 이 책은 최초에 만문만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그 후 30여 년이 지난 1780년(건륭 45)에 『만주제신제천전례滿州祭神祭天典禮』라는 제목으로 한역漢譯되었다. 이런 사실은 만주족에게 샤머니즘 제사가 얼마나 강하게 고유의 전통으로 인식되었는지를 보여 주며, 건륭기의 샤머니즘 제사에 대한 황실 의례서를 만드는 일이 만주어 강화 정책과 연계되어 진행되었을 가능성까지 보여 준다.

샤머니즘은 누르하치가 국가를 수립해 가던 초기부터 복속된 여진인을 통합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누르하치는 기병한 후 여진족의 다른 경쟁 부족을 격파한 뒤에 그들의 씨족 수호 신령을 모신 사당인 탕서tangse, 堂子를 파괴했다. 결국 자기 씨족의 수호 신령을 모신 누르하치의 탕서가 다른 모든 씨족의 탕서를 대체했다. 다만 누르하치 편에 동참한 부족은 자신들의 신령을 모시는 것이 인정되었다.

조선어의 ‘거덜’과 같은 뜻의 어휘인 만주어 ‘쿠툴러kutule’도 몽고어 ‘쿠투치’로부터 유래했다. 쿠툴러는 몽고어 쿠투치와 마찬가지로 ‘말을 끄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용어는 만주어에서 동사형 어미 ‘?mbi’와 결합하여 ‘말을 끈다’는 의미의 동사형 ‘쿠툴럼비kutulembi’로도 쓰였다. 한문으로는 고도륵庫圖勒 혹은 고독립孤獨立이라고도 음사했고 때로는 의역하여 근마인?馬人, 사졸?卒, 공마노控馬奴, 근역?役 등으로 쓰기도 했다. 『만문노당』에서 쿠툴러를 때로는 쿠투시kutusi라고도 썼다. 아마도 몽고어 쿠투치의 원래 발음이 만주어에 강하게 남아 있는 현상일 것이다.
만주족의 쿠툴러도 조선의 거덜처럼 기본적으로는 말을 관리하고 끄는 일을 했다. 그러나 만주족은 기병 위주의 전쟁이 잦았기 때문에 쿠툴러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이 조선의 거덜보다 훨씬 복잡하고 컸다.

조선 시대에 말을 끄는 하인을 ‘거덜’이라고 했고, 이를 한자로는 ‘구종驅從’ 혹은 ‘구종배驅從陪’라고 했다. 조선의 사복시司僕寺에서 말 관리를 담당하던 종7품의 잡직 종사자들도 거덜이라고 했는데, 이들의 정식 관칭은 견마배牽馬陪였다. 이들 거덜들은 평소에 말을 관리하다가 궁중의 귀인이나 상전이 말을 타고 행차할 때면 말고삐를 잡고 행차의 앞에서 ‘물렀거라’를 외치며 위세를 부렸다. 때로는 이들이 공무에 개입하여 농간을 부리기도 했다.

건륭제는 해마다 겨울에 북경 자금성의 서쪽에 있는 북해北海에서 팔기군의 빙상 대회를 개최했다. 이를 ‘빙희?嬉’라고 불렀다. ‘빙희’는 청조 이전에도 중국에 있었던 어휘였고 단순히 ‘빙상의 오락’을 가리켰다. 그러나 청대에 만주족 황제가 개최한 빙희는 성격이 특수했다. 청대의 빙희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형식을 갖춘 일종의 빙상 전투 훈련이자 황제의 참관하에 진행된 빙상 사열이었다.

청대 만주족의 스케이팅 관습은 청조가 멸망한 후에도 여전히 겨울철 오락으로 유지되었다. 신해혁명이 일어난 후에 중화민국中華民國의 북경 시민이 된 만주족은 겨울이 되면 종종 조양문朝陽門에서 출발하여 얼어붙은 수로를 따라 활주하여 이갑二閘을 지나 로하潞河로 진입해서 북경의 동남쪽 교외 통주通州까지 가서 그곳 특산인 삭힌 두부醬豆腐를 한 사발 사들고 북경으로 돌아오곤 했다. 북경 시내에서 통주까지의 거리가 대략 20킬로미터 정도이니까 빙상으로 마라톤을 즐긴 셈이다.
청대에 해마다 빙희가 열렸던 북해는 1925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었고 겨울이면 스케이팅을 즐기는 북경 시민들로 북적이게 되었다.

‘가추하gacuha, ?出哈’ 혹은 ‘가라하galaha, ?拉哈’는 직육면체 모양으로 생긴 포유류의 발목관절뼈를 지칭하는 만주어이다. 또한 가추하는 청대에 만주족이 이 뼈를 던지며 노는 놀이의 이름이기도 했다. 조선의 만주어 사전인 『한청문감漢淸文鑑』에서는 가추하를 ‘노름하는 깍뚝 뼈’라고 설명했다. ‘노름’은 오늘날 한국에서 사행성 짙은 도박이라는 의미가 강하지만 이 사전에서는 단순히 ‘놀이’의 의미이고, 깍뚝 뼈는 깍뚜기처럼 육면체 모양으로 생긴 뼈라는 뜻이다. 가추하를 한어로는 배식골背式骨이라고 했다. 이 놀이 도구를 만들 때 주로 양이나 돼지의 뼈를 많이 사용했다. 돼지의 관절뼈로 만든 가추하는 특히 롤로lolo라고 하고, 소나 사슴의 관절뼈로 만든 것은 로단lodan이라고 불렀다.

가추하는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었으며 실내건 실외건 장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놀이였다. 그러나 어린이와 여성 들이 겨울철 실내에서 만주족의 쪽구들 위에 옹기종기 앉아서 즐기는 것이 가추하 놀이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강희제는 만주족이 한어를 구사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한인 통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만주족에게 한어를 습득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만주어가 쇠퇴할 가능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이 시기는 입관한 지 20여 년이 지난 후로, 만주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중국에 입관한 만주족이 여전히 만주어를 사용하며 만주족의 주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까지는 만주족이 만주어를 구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만주어의 쇠퇴를 걱정할 만한 현상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발상이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강희제 자신이 만주어·몽고어·한어를 자유롭게 구사했기 때문에 만주족이 한어를 습득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만주어의 쇠퇴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강희제가 만주족 관원에게 한어의 습득을 강조한 것이 만주어를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

자언어가 타언어의 영향으로 인해 쇠퇴했는가 발전했는가 하는 판단은 자언어가 타언어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했는가가 그 기준이 된다. 막대한 타언어가 유입되었어도 자언어가 본래 모습을 일부라도 갖추고 있으면 타언어는 자언어 발전의 동력이 되는 것이고, 그 반대로 자언어를 완전히 상실해 버리면 타언어는 자언어의 쇠퇴와 소멸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만주족이 만주어를 상실하기 전인 18세기 초기, 즉 옹정기 내지 건륭 초기 정도를 기준점으로 설정하여 만주어와 한어의 관계를 판단한다면, 우리는 한어가 반드시 만주어에 대해 공격자이고 침투자이고 상극자인 것만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로 한어가 만주어의 보완자였다고 상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적어도 만주족이 일상생활에서 만주어보다 현격히 한어를 많이 사용하게 된 18세기 중후기 어느 시기 이전까지는 만주어에 대한 한어의 유입이 만주어를 쇠퇴시킨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만주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만주족은 한어의 유입 앞에서 피동적으로 그 세례를 받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한어를 만주어 속으로 유입시키고 녹여 나가기도 했다.

만주어에 없는 한어를 번역하여 새로운 만주어 어휘를 만드는 작업은 입관 후 꾸준히 진행되었지만, 그 작업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만주어 상실에 대한 위기감이 최고조로 증폭된 건륭기였다. 1771년(건륭 36) 출판된 『어제증정청문감御製增訂淸文鑒,Han i araha nonggime toktobuha Manju gisun i bulek? bithe』은 강희기에 출판된 『어제청문감』을 증보한 만주어 사전이지만 체례와 수록된 어휘의 수를 보면 완전히 새로운 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어제증정청문감』에는 『어제청문감』에 없는 5,000여 개의 만주어 어휘가 더 수록되었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기존에 없는 새로 만들어진 만주어 어휘였다. 이 외에도 건륭기에 『청문휘서淸文彙書,Manju gisun i isabuha bithe』(1751년), 『청자회전淸字會典,Manju hergen i uheri kooli bithe』(1769년), 『청문보휘淸文補彙,Manju gisun be niyeceme isabuha bithe』(1786년) 등의 만주어 사전과 문법서들이 간행되었다.

만주족이 남긴 방대한 문헌들을 검토하다 보면 모어를 지키고 발전시키려는 그들의 노력에 경탄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대량의 어휘들이 만주족의 실제 언어생활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로 만든 만주어 어휘를 보급하는 것은 고사하고 점차 소실되어 가는 기존의 만주어를 지키는 것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어려워졌다. 청조는 기인의 학교 교육을 통해 만주어를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그조차 만주족 통치자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결국 18세기 말기를 지나며 만주어는 새로 만들어진 신조어로 풍성해졌지만 일상 언어생활에서는 점차 사라져 가는 역설적인 상황을 맞게 되었다.

청은 만주족 고유의 국가 체제인 팔기와 중국의 국가 행정 체제를 하나의 국가 체제 안에서 결합시켰고 상이한 두 체제를 효율적으로 운용했다. 제도의 창설과 운용 면에서 청의 또 다른 탁월한 점은 중국을 지배하는 현실에 맞추어 입관 전에 없었던 새로운 제도들을 창안한 것이었다. 내무부內務府는 그 가운데 하나로, 만주족 고유의 조직과 중국식 제도에서 각각 일부가 결합하여 명과 청 황실 어디에도 없던 새로운 기구로 등장한 것이었다.

내무부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훗날 1679년(강희 18)부터이지만, 그 조직 안에서 일하는 주체가 환관에서 보오이 니루의 보오이들로 대거 물갈이된 것은 순치제가 사망한 직후였다. 따라서 내무부가 출범한 시기를 1661년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내무부가 창설된 후 십삼아문의 환관이 모두 자금성 밖으로 축출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내무부에 부속된 하부 기구인 경사방敬事房에 남아서 황제와 황후·비빈들의 잠자리를 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강희기 경사방에 남은 환관의 수는 고작 400명에 불과했다. 명 말기에 환관의 수가 10만 명에 달했음을 감안하면 청 궁정의 환관은 양적으로 그 존재감이 미미해졌다.

순치제는 1653년(순치 10)에 명의 환관 조직인 이십사아문二十四衙門을 모방하여 십삼아문十三衙門을 창설하자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왕공 대신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이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십삼아문이 황제의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신권을 위축시키리라는 불안감이 반발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청 초기의 신하들은 만주족이건 한인이건 명의 멸망이 환관의 폐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역사의 교훈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부정부패의 상징인 환관이 만주족 황실에서 다시 부활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순치제는 자신의 구상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는 반대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십삼아문의 지휘권을 전적으로 만주족 대신에게 부여해서 환관이 정치에 절대 개입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선포했다.

내무부는 만주어로 ‘도르기 바이타 버 우허리 카달라라 야문dorgi baita be uheri kadalara yamun(안의 일을 모두 관리하는 아문)’이라고 하며, 청대 궁정의 의식주와 관련한 온갖 잡다한 일상적 업무들을 수행하고 황실의 재정을 총괄한 기구였다. 내무부라는 한어 명칭이 제정된 것은 1679년(강희 18)이었다. 그전에 순치제 시기에는 궁정의 잡무를 환관의 기구인 심삽아문十三衙門과 팔기의 보오이 니루booi niru, 包衣佐領, 包衣牛錄가 담당했다. 그보다 더 전인 청 태종 시기에는 궁정의 잡무를 보오이 니루가 담당했고 그 조직을 한어로 ‘내부內府’라고도 칭했다. 즉 내부는 내무부의 전신이었다.
내부의 보오이 니루는 청 태종 홍 타이지가 장악하고 있던 상삼기上三旗,dergi ilan g?sa(즉 양황기·정황기·정백기) 예하의 하층민인 보오이들로 구성되었다. 상삼기의 보오이 니루는 내부를 구성했고, 내부가 청 궁정의 살림을 전담하면서 ‘보오이 니루’라는 조직명은 내부 혹은 훗날의 내무부와 거의 동일하게 쓰이게 되었다.

일반 관원이 황제와 공적인 영역에서 관계를 맺는 것과 달리 보오이들은 황제와 사적 영역에서 관계를 맺었고 사적 관계는 공적 영역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조인의 가문은 옹정제의 즉위와 함께 몰락하기 전까지 강희제의 총애와 비호 아래 남경에서 엄청난 세도가로서 부귀영화를 누렸다.

열하에 피서산장이 세워지기 이전에, 순치기와 강희기 중반까지 황제의 북순에서 가장 중요한 행궁은 카라호톤 행궁이었다. 카라호톤은 열하의 남서쪽의 난하?河와 이손하伊遜河가 합류하는 지역에 있었다. 이곳은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승덕시承德市의 난하진?河鎭이다. 카라호톤의 ‘카라’는 ‘검다’는 의미의 몽고어이고 ‘호톤’은 ‘도시’를 의미하는 몽고어 ‘호트’가 만주어화한 어휘로, 청대 한문 기록에서는 객라하둔喀喇河屯이나 객라성喀喇城으로 음사되어 쓰이거나 흑성黑城으로 의역되어 쓰였다.

열하행궁이 완성된 후 강희제의 주요 숙박지 및 몽고 왕공과의 회견지는 카라호톤에서 열하로 이동했고, 카라호톤은 점차 쇠퇴해 갔다. 그러나 그 중요성이 열하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감소했을 뿐, 카라호톤은 열하 인근의 주요 도시로 계속 존속했고, 옹정기와 건륭기에는 팔기병이 배치되기도 했다. 카라호톤 행궁은 수렵을 위한 숙박지와 회견지로서의 기능적 측면에서, 그리고 궁전과 별서와 사묘로 이루어지는 구조적 측면에서 열하행궁의 초기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청은 몽고 왕공의 자제들을 북경으로 데려와서 만주 자제들과 함께 교육시키고 장성한 후에 현지로 돌려보내서 부친의 직을 계승시키는 방식을 활용했다.

청은 복속된 몽고를 촐간盟과 호슌旗 단위로 세분하고, 각각의 호슌에 ‘자삭’이라는 명칭의 수장을 임명했다. 막남몽고(내몽고)는 내자삭몽고Dorgi jasak i Monggo, 內札薩克蒙古로 불렀으며, 6촐간 49호슌으로 나뉘었다. 막북몽고(외몽고)와 막서몽고는 외자삭몽고Tulergi jasak i Monggo, 外札薩克蒙古라고 불렸으며 막북몽고는 4촐간 86호슌으로, 막서몽고는 9촐간 61호슌으로 구획되었다. 자삭에게 행정과 사법상의 실권을 부여해서 기존의 아이막部의 수장인 칸의 통합적 권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자삭과 호슌 설치의 핵심 목적이었다.

청은 황제와 황족의 딸을 몽고의 왕공 귀족과 결혼시키고, 황제와 왕공은 몽고의 공주와 혼인함으로써 동맹 관계를 강화해 갔다. 이 방식은 양자의 동맹에 효과적이었다.

청의 황제들은 몽고 왕공들을 접견한 후에, 그들이 이끌고 온 수렵단과 함께 무란위장에 가서 수렵을 하고, 잔치를 벌이고, 씨름을 하며 친목을 도모했다.

청의 황제는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자신을 다양한 신민에 맞추어 여러 형태로 표현하는 데 능숙했다. 황제는 만주족의 한han일 뿐만 아니라 한인에 대해서는 유가적 성왕聖王이자 황제皇帝였고, 몽고에 대해서는 칭기즈칸의 정통을 계승한 대칸이었고, 티베트에 대해서는 극락정토의 불법을 현세에 펼치는 차크라바르틴轉輪法王이었다. 청 제국의 황제는 다면성simultaneity을 띠고 다양한 유형의 백성을 통치했다.
149) 청의 황제는 상이한 여러 정치체제의 통치 중심이자 왕중왕이었고, 하나의 국가 안에 공존하기 어려운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한 몸에 모아서 구현했다.

외팔묘는 청 정부에서 승려를 파견하고 북경의 이번원 소속의 라마인무처喇?印務處에서 승려의 월급과 자금을 지급해서 운영된 일종의 국립 사찰이었다. 열하 현지에서 외팔묘 전체를 관할하는 것은 보녕사에 주재하는 감포mkhen po,堪布였다. 감포는 티베트 불교에서 주지를 의미했다. 감포의 관할하에 외팔묘 각각의 사찰을 관할하는 것은 다-라마da lama, 達喇?였다. 다-라마는 수석을 의미하는 만주어 ‘다da’와 승려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라마lama’를 합쳐 만든 명칭이었다. 12개의 사찰 외에도 열하에 건립된 소규모의 민간 사찰이 다수 있었고, 불교 사찰 외에 민간종교 시설까지 계산하면 수는 더욱 많아진다.

거시적으로 보면 외팔묘의 수많은 건물군은 중국식과 티베트식을 혼융한 새로운 건축 양식을 구현하고 있다. 외팔묘의 혼융된 새로운 건축 양식은 중국과 내륙아시아를 함께 지배하게 된 청의 제국적 지배 체제를 상징한다.

청은 준가르의 내분을 이용하여 1755년(건륭 20) 중심부인 일리(현 중국 신강성 이닝伊寧)를 공격했다. 100여 일의 전투 끝에 청은 수장인 다와치를 생포하고 준가르를 멸망시켰다. 3년 후인 1758년(건륭 23)에는 동투르키스탄 남부의 알티샤르를 정복했다. 다음 해에 청은 동투르키스탄을 신강新疆, Ice jecen으로 명명하고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 준가르를 정복한 사건은 청의 역사에서 중국을 정복한 일에 버금가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준가르를 정복함으로써 청은 17세기 초 누르하치 시기부터 몽고에 대한 공세를 시작한 이래 150년 만에 내몽고와 외몽고에 이어 서몽고까지 지배하게 되었고, 청의 번부藩部, tulergi golo가 완성되었다. 청과 러시아와 준가르가 각축해 오던 중앙유라시아는 이후 청과 러시아의 세력이 상충하는 장이 되었다.

외팔묘의 사찰들은 티베트 불교 세계의 주요한 사찰들이 변형된 모방품이고 축소판이었다. 보녕사는 티베트 최초의 사찰인 삼예사를 모방했고, 안원묘는 준가르 제국의 중심지인 일리의 쿨자사를 모방했으며, 보타종승지묘는 티베트의 중심지인 라싸의 포탈라궁을, 수미복수지묘는 티베트 둘째 도시인 시가체의 타쉬룬포사를 모방했다. 그러나 외팔묘는 단순히 티베트 불교 세계의 대표 건축물들의 모방품이 아니고, 라싸와 시가체와 일리가 가지고 있는 불교의 권위들을 가져와서 열하라는 공간에 재배치한 만다라였다.

1644년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후에 만문 동전과 한문 동전을 따로 주조하지 않고 하나의 동전에 만문과 한문을 함께 새기는 형식으로 변화했다. 동전을 주조하는 곳도 수도와 지방 각 성의 중심지들로 다원화되었다.

한인은 동전에 새겨진 만주 문자의 의미를 모를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것이 문자라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 같다. 감숙 지역에서는 보천국에서 발행한 동전이 부정不淨과 사기邪氣를 막아 주는 신묘한 효능이 있다고 믿었고 앞다투어 소장하려고 해서 품귀 현상을 빚기도 했다. 그 이유는 동전 뒷면에 천泉을 음사하여 새겨진 만문 ciowan의 모양새가 『삼국지』의 관운장이 휘두르던 청룡언월도를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인은 때로 동전의 만주 문자를 그림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청 말기에 태평천국을 통해 일시적으로 한인의 국가가 수립되었을 때 발행된 동전에서는 만주 문자가 모두 사라졌다. 만주 문자를 없애고 한자만을 새긴 동전을 발행한 것은 만주족과 청 제국의 통치에 저항하여 수립된 한인의 국가 태평천국이 자신을 표명한 방법의 하나였던 것이다.

만주족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팔기에 속한 기인이었다. 심지어 만주족 가족에 속한 노복까지도 기인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만주족의 모든 성년 남성은 전업 군인이었고, 그에 딸린 모든 가족은 군인 가족이었다. 하나의 민족 구성원 전체가 농업, 공업, 상업 등의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전업 군인으로 생계를 영위하며, 수백 년의 장구한 시간 동안 자신들을 먹여 살리는 방대한 인구의 타민족을 지배한 것은 인류사에 드문 사례이다. 이 독특한 만주족의 업종과 만주족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의 피지배 민족을 무력으로 지배하는 과정이 청나라의 정복왕조적 속성을 지속적으로 자극하고 상무성을 존숭하는 관습을 만들어 냈다.

자광각은 자금성의 서쪽에 있는 중남해中南海의 서안에 세워졌다. 자광각과 그 터는 본래 무과 시험을 치르던 시험장이었다. 건륭제는 1760년(건륭 25) 자광각을 대대적으로 다시 짓고, 이곳을 일종의 전쟁기념관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자광각의 준공을 기념하여 건륭제는 바로 몇 해 전에 정복한 신강의 전쟁에서 무공을 세운 전쟁 영웅 100명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그리고 100폭의 초상화를 자광각의 네 면의 벽에 걸었다. 초상화 외에도 자광각에는 앞에서 말한 동판화와 황제가 지은 기념문, 수많은 전리품, 지도들, 황제의 전투 장비 등이 전시되었다. 자광각은 전쟁기념관이자 승전을 환영하는 연회장이었다.

시위 제도는 청대 만주족이 관료로 진출하는 통로로 활용되었다. 만주족은 관직에 진출하기 위해 한인처럼 치열하게 과거시험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만주족도 과거시험을 치러 관직으로 진출하기도 했지만 만주족만의 정원을 정해 두고 만주족만을 대상으로 시험을 보게 하는 제도가 운용되었기 때문에 한인의 시험처럼 경쟁이 치열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만주족에게는 과거시험을 통하지 않는 관직 진출 통로가 있었다. 만주족은 대대로 세습되는 팔기의 직책을 계승하거나, 자신이 전쟁에서 공적을 세우는 등의 방법을 통해 관료로 진출했다. 그에 더해 시위 제도는 만주족이 관직으로 진출하고 고위 관료로 진급해 가는 지름길이었다.

북송 말기부터 관우는 국가에 의해 본격적으로 존숭되고 민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어 갔다. 그 이면에는 북송이 관우를 통해 백성의 충성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북송은 거란, 여진, 서하 등 북방 민족의 위협에 계속 시달렸다. 그러한 상황에서 민심을 집결시키고 충성심을 강화하기 위해 선택된 인물이 관우였다.

관우가 중국인의 재신으로 숭상되기 시작한 시기도 북송 말기로 추정된다. 관우는 송대에 호국신으로 숭상되었지만 송이 멸망한 후 몽골이 중국을 통치했어도 그 숭상이 단절되지 않았다. 원대에 관우는 궁중의 불교 행사 때에 신단에 불교의 신과 함께 모셔졌다.

송대와 마찬가지로 명대에도 관우 신앙은 외부로부터의 위기를 극복하고 내부의 충성심을 고취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강화와 연계되면서 더 확산되었다.

청의 지배 민족이 만주족이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악비보다 관우를 현창한 원인 외에 관우 신앙이 확산된 또 하나의 원인은 청 전기에 민간의 상업 활동이 극성기를 맞은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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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전교조는 아니더라고?"
그 말을 듣고 곽은 조합에 가입해둘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민원으로부터 보호받으려면 조직이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전교조와 교총 등 모든 교원 조직 가입을 거절했던 이유를 돌아보고 있을 때 교장이 말을 이었다.
"다행이네. 전교조 교사, 수업중 마르크스 읽혀. 이런 기사라도 나봐. 작살난다."
기사에 달릴 댓글이 눈에 선했다. 전교조가 사상 교육으로 학생들을 세뇌하며 공교육의 저반을 흔들고 있다…… 노동조합에 대한 몰이해는 차치하고, 곽이 가늠할 때 조합에는 그런 영향력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학생들이 들어줘야 세뇌를 하고, 조합원이 존재해야 저반을 흔들 것 아닌가. 전교조를 한국 교육에 암약하는 간첩 집단 취급하는 세계관은 황당하다못해 순진해 보였다. 하지만 광범위하게 실재하는 편견이기도 했다.

모두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수업을 듣지 않는 게, 혹은 어떠한 학교교육에도 참여하지 않는 게 부와 권력만을 추종하고 소수자를 배척하며 환경을 파괴하는 불량배로 성장할 거라는 뜻은 아니었다. 노동 착취에 시달리며 형벌 같은 생존을 이어가지만 어떤 비판 의식도 벼릴 수 없는 죄수가 된다는 뜻도 아니었다. 아무도 예단할 권리는 없었다. 학교에서 잘 배워야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한다는 믿음은, 제도교육에서 ‘모범적인’ 성취를 얻어서 삶의 기반을 마련한 자신 같은 교사들의 고정관념이었다. 공교육이란 중산층의 아비투스를 재생산하고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필연적으로 보수적인 국가 장치 아닌가. 바른 자세로 수업을 경청하라는 지도는 규율화된 신체를 양산해 사회적 유용성을 극대화하려는 ‘학교-감옥’의 통치술 아니냔 말이다. 곽은 일리치, 부르디외, 푸코 등을 떠올리며…… 어떤 지도도 하지 않았다. 엎드린 학생들의 뒤통수를 애정어린 눈으로 보았다. 학생들이 버리고 간 학습지의 빈칸에 숨은, 자신이 모르는 언어로 된 가지각색의 목소리들을 상상했다.

비극적으로 여길 필요는 없었다. 전성기는 무한히 지속될 수 없으며, 때로 아티스트는 대중의 외면을 스스로 가속시키는 법이다.

이야기에는 효율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메시지가 있다

세상은 정치적인 음악가에게는 약간의 존경을 적선하지만, 정치하는 음악가에게는 무자비하다는 걸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언론은 정치에 발을 들였던 예술가들의 궁색한 말로와 군소정당의 반복적 실패를 부각중이다. 호사가들은 로나의 선언을 유력 정당 공천을 유리한 조건에 받기 위한 포석으로 폄하하고 있다. 가장 가슴 아픈 사실은, 팬들조차 그녀가 ‘순수함’을 잃었다고 손가락질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대 또는 아스팔트에 있어야만, 허락된 자리에 머물러야만 보존되는 ‘순수함’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외다리비둘기이며 아로미이다. 제플린88과 똑딱이단추, 배부른소크라테스와 목련러너, 까망쥐, 잉맨, 사축A, 빵또아, 붕어싸이코, 당근도기립하시오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친구와 연인, 추종자이자 소비자, 감시자와 연구자 또는 변호사였으며, 이제 로나의 동지가 되려 하는 사람들이다. 로나는 모두의 스타가 아닐지언정 우리의 별이다. 우리는 ‘모두’가 아니므로 당신의 하루를 모른다. 하지만 알고 싶다. 로나가 질문했듯, 만약 당신이 단지 생존하기 위해 그렇게나 일하는 데에 지쳤다면, 더 많은 삶을 사랑하고 창조하는 데에 쓰고 싶다면, 자신이 자유로운 인간인지 의심해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우리다. 머지않은 창당 대회, 서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붉은 도브의 연주에 맞춰 같은 노래를 부를 것이다. 우리의 별, 로나가 예고한 대로 그 노래의 제목은 ‘우리는 가능하다’이다.

하늘이 맑았다. 눈밭은 하얬고 바다는 파랬다. 음식냄새를 피우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날이었다. 미안한 일에 사과하고 고마운 일에 인사하기. 마주앉아 밥을 먹고 나란히 서서 사진 찍기. 그러려면 때맞춰 울리는 알람이 필요하다는 느낌. 한시에는 한 번, 열두시에는 열두 번의 종소리가 울리도록. 돌아가면 오른쪽 태엽을 감아보고 싶었다. 열두 바퀴든 열두 바퀴 반이든. 그때 잘못 셌거나 지금 잘못 셌거나. 아니면 그때는 열두 바퀴였는데 이제는 열두 바퀴 반이거나. 시계판 뒤에 무슨 장난과 음모가 있든 살아야 할 시간이 많았다. 어쩌면 서핑을 배울 수 있을 만큼 긴 시간이 있을지도 몰랐다. 왜 시도도 안 해봤을까. 나도 파도를 탈 수 있지. 그래, 나는 파도를 탈 수도 있어.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눈 쌓인 갓길에 서 있었다. 나직한 바람에 봉지의 표면이 파르르 떨렸다.

버리려면 들어야 했다. 버리는 것과 떨어뜨리는 것은 아주 달랐다.

아까 군청 사람을 만났는데 말이야.
아버지는 소주를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가족끼리도 카지노에 놀러간다는 먼 나라. 늘어나는 관광객들을 위해 지어질 도로와 호텔. 동네가 탄광문화관광촌으로 개발되면 치솟을 땅값. 국회의원으로부터 도의원, 군의원 들로 이어지는 낯선 이름들. 결국 군청의 아무개 계장이 아버지와 몇 촌이며 항렬이 어떻게 되는지. 그래서 송희 너는 앞으로 무엇을 배워두면 좋은지……
송희는 아버지의 야윈 팔뚝을 보았다. 검댕이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작업화를 신었던 옛날. 저 팔뚝으로 정말 깜깜한 땅속에서 돌덩이를 내리쳤을까. 탄차를 밀고 포대를 짊어지고 어머니를 안았을까. 그리고 나를 들어올렸을까. 송희는 눈앞의 사람이 버린 것과 버리지 못한 것을 가늠해보았다.
송희는 물었다.
근데 아빠는 몸무게가 몇이야?

정확한 궤적으로 떠오르는 바벨. 무수히 상상했던 깨끗한 움직임. 꽂힌 원판을 세어보니 이미 100킬로그램이었다.
3차 시기를 위해 복도를 걸으며 송희는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오늘 역도대에 오른 건 이십여 명. 그중 십수 명은 역도화를 벗게 될 것이다. 송희는 자기가 그 십수 명 중 하나라는 걸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다만 바벨을 떨어뜨리고 끝내고 싶진 않았을 뿐.

방해하는 사람은 없어.
그래. 사실 언제나 없었지. 적어도 역도대 위에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도 말리지도 않았어. 송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들었거나, 내가 들지 못했을 뿐.
이상하게 말이야.
송희는 그렇게 말하며 바벨에 원판을 더 꽂았다. 그것은 100킬로그램이 되었다.
이제 아무도 밉지가 않아.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어떤 실수는 바로잡을 수 없을 뿐이다.

나는 살고 있을까.

잘 살려면 일단 살아야 한다. 살려면 생각을 멈추고 잠들어야 한다. ‘나는 살고 있다’는 쓸모없는 주문이다.

지금 내가 알아내야 할 것은 보편 법칙이나 핵폭탄 해제 비밀번호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선물한 태블릿의 게임 계정이 왜 자꾸 로그아웃되는가이다. 〈사천성〉과 〈애니팡〉은 어머니의 취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요즘은 혼자 하는 캐주얼 게임조차 로그인을 요구한다. 영문자와 숫자와 특수문자가 조합된 열두 자리의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일은 68세의 인간을 화나게 한다. 대문자 자동 변경 기능을 끄고 특수문자 키보드로 전환하는 방법을 전화로 설명하는 일은 나를 화나게 한다.

오늘날 ‘문명국가’의 다수 시민은 화요일 밤에는 실시간 중계되는 가자 지구의 화염을 보고 목요일 정오에는 총기 난사범의 프로필을 듣더라도 일요일 오전에는 애인에게 단검이 아니라 커피와 토스트를 건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차세계대전을 끝낸 폭발 이후 현재까지의 시대를 핵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아토미카Pax Atomica’라 부르기도 한다.

누구도 누구를 치유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마음의 상호확증파괴다.

나는 가장 먼저 깊은 밤의 문 앞으로 간다. 나는 문을 닫지 않는다. 문을 열지도 않는다. 나는 문을 없앤다. 문도 문틀도, 그것들을 지지하는 벽과 기둥도 없애버린다. 모두 사라진 곳에 활주로가 나타난다.

‘규범’ ‘정상’ ‘평균’ 같은 억압적 개념들에서 평범함을 떨어뜨려놓을수록, 평범함이 얼마나 다양하고 비일관적이며 풍부한 것인지 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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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가 멸망한 후 중국은 청 제국의 강역을 계승했고 만주족은 중국인의 일원이 되었다. 지금 중국이 주장하는 중국사의 영역은 중국 내지China proper를 넘어 청 제국이 지배한 광활한 공간을 포괄한다. 중국은 만주 지역을 동베이東北라고 부르며 중국사가 포괄하는 공간으로 편입시켰다. 반면 한국에서 만주 지역은 한국 고대사의 공간으로 간주된다. 두 나라는 만주 지역에서 태어난 국가를 각자 ‘국사’의 일부에 배치했고, 역사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양자의 역사 공간은 충돌한다. 양자의 사이에서 만주족과 그들의 조상이 영유했던 그들만의 역사와 그들만의 공간은 실종되어 갔다. 이 글은 만주족이 살았던 이야기를 그들의 시각으로 서술했다. 한국과 중국이 서로의 역사를 이해하고 공존하는 길을 찾는 데 이 글이 조그만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건주여진의 조상인 오도리부는 무단강의 하류역으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하여 조선의 회령에서 거주하다가 서진하여 압록강의 북방에 자리 잡았다. 해서여진의 기원인 훌룬은 동류 송화강의 지류인 훌룬강 유역으로부터 서진하여 송화강 만곡부에서 거주하다가 남하하여 북류 송화강의 중류역에 정착하여 울라와 하다로 발전했다. 여진의 주요 부족의 인구 이동이 일단락된 것은 16세기 초중반이었다. 이 시기에 여진은 건주여진, 해서여진, 동해여진으로 구분되었다.

한국인은 이 지역을 ‘만주’라고 부르고 있지만 정작 청대에 만주인은 ‘만주’를 지명으로 쓴 적이 없다. 만주인에게 ‘만주’는 족명일 뿐이었다. 청대 만주인은 만주 지역을 행정적으로 성경盛京, Mukden·기린吉林,Girin·흑룡강黑龍江, Sahaliyan ula으로 분할하여 불렀다. 때로는 이를 합쳐 불러야 할 현실적 이유 때문에 동북東北, dergi amargi ba이나 관외關外, furdan i tule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동북’은 중국 내지의 동북쪽에 있는 땅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고 ‘관외’는 산해관의 밖에 있는 땅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둘 다 만주 지역 자체의 단일한 정치적인 속성에서 도출된 이름이 아니고 수도인 북경北京을 기준으로 한 방위적 성격을 지닌 명칭이었다.

훗날 청대에 만주족 황실은 조상인 몽케테무르의 거주지를 만주어로는 ‘오모호이Omohoi’라고 쓰고, 한자로는 오막휘鼇莫輝, 아막혜俄漠惠, 악막휘鄂謨輝 등으로 다양하게 음사했다. 오모호이의 위치에 대해 중국의 일부 연구자는 아막혜라는 지명이 있는 현재 길림성 돈화敦化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모호이는 돈화가 아니고 오음회, 즉 조선의 회령이었다. ‘회령’이란 지명은 김종서가 육진을 설치하던 시기인 1434년(조선 세종 16)에 오음회에서 ‘회會’ 자를 취하고 거기에 ‘안녕하다’는 의미의 ‘령寧’을 붙여 만든 이름이다. 따라서 회령은 오모호이의 ‘호이會’를 계승한 지명이다.

1432년 몽케테무르가 북경에 조공하고 있는 때에, 조선은 여연閭延과 강계江界를 약탈한 파저강 유역의 여진을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여연을 약탈한 여진족은 파저강의 건주여진이 아니고 훌룬 우디거였다. 그러나 조선은 약탈자가 건주위의 이만주라고 오판하고 그를 공격 목표로 결정했다. 이때 북경에 있던 몽케테무르가 문제가 되었다. 세종은 정벌군이 출정하기 전에 사령관인 최윤덕崔閏德에게 비밀 지시를 내렸다. 그 내용은 조선군이 건주위와 전투할 때 북경에서 돌아오는 몽케테무르가 이만주에 조력하면 ‘모르는 체하고’ 그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세종의 밀명은 사후에 명의 문책이나 여진인의 반발 등을 피하기 위해 의도된 오살誤殺을 하라는 것이었다. 몽케테무르는 조선군과 길이 엇갈렸고 이만주를 지원하지도 않아서 의도된 오살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최윤덕이 받은 비밀 지시는 세종의 인자하고 온유한 이미지와 전혀 다른 마키아벨리적 모습을 보여 준다. 또한 북방 변경 지역의 개척을 준비하던 세종에게 명의 정1품 우도독 지위와 수천 명의 직속 백성을 보유하고 변경에서 거주하는 몽케테무르가 얼마나 부담스러운 존재였는지를 보여 준다.

1427년(조선 세종 8)에 몽케테무르는 큰아들 권두와 손자 마파馬波를 조선에 파견했다. 권두는 세종을 알현하여 그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전심하여 나라를 받들라’고 당부한 뜻을 전하고 그 자신은 한양에서 시위로 종사하겠다고 밝혔다. 세종은 그의 충성은 알겠으나 그가 명에 종사했으니 조선에서 시위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답변했다.
21) 권두는 1431년(조선 세종 13) 다시 한양을 방문하여 과거에 아버지 몽케테무르가 태종으로부터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어 북변 방어의 임무를 수행했으니 부친이 노쇠한 지금 그 지위를 자신에게 계승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권두는 이 요청의 말미에서 조선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강조했다. "나는 조선 경내에서 자랐으니 이 해골은 이미 조선의 물건입니다. 청컨대 우리 부친의 직임을 대신하여 북변의 간성干城의 임무를 맡도록 해 주십시오".
22) 권두가 이때 건주좌위의 배후에 있는 명과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보면 곧 건주좌위의 조선에 대한 복속을 선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세종은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권두의 과도한 충성 발언이 부담스러웠는지 권두를 접견하지 않았고 그에게 상장군을 수여하지도 않았으며 하사품만 주어 돌려보냈다. 권두는 송별연 자리에서 "시위를 하려고 왔는데 전하께서 허락해 주시지 않으니 실망이 크다"며 눈물을 흘리고 돌아갔다.

오갈암 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조선 영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조선에 의해 전투의 참상과 경과가 관찰되어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고 있다.
34) 오갈암 전투에서 건주여진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상대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홀라온忽喇溫’은 훌룬의 음역이며, 그 실체는 부잔타이가 이끈 울라의 군대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부잔타이를 하질이何叱耳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부잔타이의 여진어 칭호인 하스후 버일러Hash? beile(좌左버일러)의 하스후를 표기하기 위해 ‘하何’와 사이시옷을 나타내는 이두문자 ‘질叱’, 그리고 ‘후h?’ 음을 표기하는 ‘귀耳’, 이 세 글자를 결합한 것이다. 부잔타이는 오갈암 전투에서 패전한 후에 여허와 협력하여 건주에 대항했지만 기울어진 대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1599년 누르하치는 여진 통일의 장정을 시작했다. 그해 건주여진은 하다를 공격했고, 하다는 해서여진 가운데 가장 먼저 멸망했다. 하다의 마지막 버일러인 멍거불루는 생포되어 건주여진의 수도인 퍼알라에 끌려와 있다가, 누르하치의 비첩婢妾과 사통하고 대신인 가가이G’ag’ai, ?盖(?~1600)와 밀통하여 찬탈을 도모했다는 죄로 죽임을 당했다. 1607년에는 해서여진 가운데 가장 존재감이 약했던 호이파가 멸망당했다. 호이파의 바인다리 버일러는 방어를 위해 도성을 삼중으로 축성한 보람도 없이 누르하치의 공격을 맞아 패배했고 아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울라는 호이파가 멸망한 후에 6년을 더 버티다가 멸망했다.
해서여진 후기의 맹주였던 여허는 해서여진 가운데 가장 오래까지 버티다가 1619년에 멸망했다. 몇 년간이나마 건주여진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방파제가 되어 여허의 멸망을 막아 준 것은 명이었다. 명은 1619년 1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몇 년 전부터 아이신 구룬金國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있던 건주여진을 공격했다. 그러나 명의 공격이 완전히 실패하자 여허는 후원자를 상실했다. 명은 여허를 후원하고 지켜 주기는커녕 신흥 금나라 앞에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그해 가을 누르하치는 여허를 공격했고, 동성의 버일러 긴타이시와 서성의 버일러 부양구는 피살되었다. 해서여진의 마지막 국가가 멸망한 것이다.

‘동해’가 ‘동쪽 바다’를 뜻하는 어휘에서 만주 지역 동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전화했을 것임은 상식적 차원에서 추론 가능하다. 기록에서도 ‘동해’가 단순히 ‘동쪽 바다’의 의미에서 지역명으로 전화해 가는 단계의 다음 용례를 찾을 수 있다. ‘동해에 가까운 후르카국dergi mederi hanciki h?rha gurun’,
44) ‘동해에 가까운 사견국使犬國, dergi mederi hanciki yendah?n tak?rara gurun’,
45) ‘동해 연안을 따라 거주하는 나라 사람dergi mederi jakarame tehe gurun’,
46) ‘동해 쪽의 와르카dergi mederi ergi warka’
47)가 그 용례이다. 용례에서 보이듯이 아마도 ‘동해 가까운dergi mederi hanciki’에서 ‘가까운hanciki’을 생략하고, ‘동해 연안을 따라 거주하는dergi mederi jakarame tehe’에서 ‘연안을 따라 거주하는jakarame tehe’을 생략하면서 ‘동해Dergi mederi’가 지역명으로 정착했을 것이다.

누르하치 시기부터 홍 타이지 시기까지 후금은 만주 지역 동부를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그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력을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17세기 초기에 후금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명, 몽고, 조선과 대치해 갈수록 인구의 부족이 큰 문제가 되었다. 당시 후금은 직접 통치하의 총인구가 100만 명 미만이었다. 반면에 명의 인구는 약 1억 명이고 조선의 인구는 약 1,000만 명 정도였다. 인구가 적은 것은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신생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후금에게 인구의 증가는 국가의 성패가 걸린 문제였다. 동해여진인은 후금의 인구를 증가시키는 데 가장 좋은 집단이었다. 누르하치 시기와 홍 타이지 시기 동안 무력으로 포획하여 끌고 오거나 자진 이주한 동해여진인의 수가 10만 명을 상회할 정도로 동해여진은 양적으로 상당한 인구를 가진 집단이었다. 양보다 질은 더 좋았다. 동해여진인은 몽고인이나 조선인과 달리 여진어를 쓰는 집단이기 때문에 건주여진에 동화되는 것이 쉬웠다.

누르하치가 여진 세계를 통일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후금이 복속된 지역을 통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일통된 여진에 대한 후금의 지배는 영역적 지배라기보다는 복속된 인민을 후금의 중심지인 허투알라 일대로 이주시켜서 사람을 통치하는 인민 지배의 성격이 강했다.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것처럼 영역 지배의 성립이 근대국가의 출발점이라면 후금은 확실한 전근대국가였다. 보통 청나라나 만주족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만주족 대부분이 중국으로 이주한 1644년 이후에 만주 지역이 인구가 텅 비어 버린 공간으로 변했다고 알고 있다. 그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만주 지역은 이미 누르하치 통치기부터 인구 이동이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정복한 만주 지역 곳곳의 인구를 건주여진의 중심지인 현재 요령성 동부에 집결시킴으로써 팔기의 몸집을 불리고 명과 정면 대결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입관하기 수십 년 전부터 요령성 동부를 제외한 만주 지역 곳곳은 인구가 사라진 황무지가 되어 갔다.

니루라는 이름의 수렵 조직이자 전투 단위는 1니루에 성인 남성 10인 정도가 포함되는 작은 규모로 존재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1601년 무렵 기존의 니루를 성인 남성 300명당 1니루의 큰 조직으로 확대시키고, 상시적으로 병사를 동원할 수 있는 군사 단위로 재탄생시켰다. 5개의 니루로 구성되는 잘란jalan과 그 상급 단위인 25개의 니루로 구성되는 구사g?sa가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은데, 아마도 1601년 니루를 만들 때 함께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에 황黃, suwayan, 홍紅, fulgiyan, 백白, sanyan, 남藍, lamun의 4개 구사가 조직되었고, 정복전을 거치며 건주여진에 복속되는 인구가 많아지면서 1615년에 양황?黃, kubuhe suwayan, 양홍?紅, kubuhe fulgiyan, 양백?白, kubuhe sanyan, 양람?藍, kubuhe lamun의 4개 구사가 증설됨으로써 모두 8개의 구사, 즉 팔기가 완성되었다. 이때 누르하치의 통치하에 포함된 모든 인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심지어 노복까지 팔기의 구성원으로 등록되어 기인旗人, g?sai niyalma이 되었다. 따라서 흔히 말하듯이 팔기제를 군사제도라고 설명하는 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팔기제는 군사제도였을 뿐만 아니라 행정제도이자 사회조직이었다. 다시 말해 팔기는 누르하치가 건설하고 확장시킨 국가 그 자체였다.

기존의 씨족과 촌락 구조를 깨지 않고 니루로 만들거나, 기존 구조를 깨고 니루를 만드는 두 가지 방식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누르하치는 팔기를 청 초기 국가의 발전 과정에서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핵심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니루의 규모는 다양했는데, 자발적으로 복종한 집단은 니루의 정원인 300명에 못 미치더라도 자체적으로 니루를 만들 수 있게 허락했고, 저항했던 집단은 분할하여 니루들의 구성원의 수를 맞추는 데 충원했다. 또한 혈연과 지연의 내부적 결합이 흔들리지 않고 니루로 이어진 경우에도, 니루를 각 구사에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부족의 결합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만주의 어원에 대한 여러 설 가운데 어느 것 하나 결정적인 것은 없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바탕으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주’가 누르하치 통치 시기부터 그의 세력권 내의 여진인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드물게나마 사용되었고 홍 타이지 재위 시기에 ‘주션’을 대체한 공식 집단명으로 선포된 후 사용 빈도가 대거 증가했다는 정도이다.

홍 타이지는 ‘주션’이라는 명칭을 폐기함으로써 그 이름에 묻어 있는 과거의 상쟁의 기억, 특히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상쟁의 기억을 일소하고, ‘만주’만을 사용함으로써 여진을 새로운 이름 아래 하나로 통합하고자 의도했던 것이다.

중국을 정복해서 중원 왕조의 외피까지 입은 만주족은 티베트·신강·몽골까지 지배 영역을 확장했다. 만주족이 획득한 강역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창안한 통치 기술은 현대 중국에 계승되었다. 이런 성취와 유산에도 불구하고 만주족은 역사에서 평가절하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은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한족과 우월한 중국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한족에 흡수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만주족은 청대에 자신들의 언어와 생활양식의 많은 부분을 상실해 갔지만, 한인과의 경계를 허물어뜨리지 않았고 만주족이라는 자의식과 정체성을 잃지도 않았다. 현재 만주족은 중국에서 ‘만족滿族’이라는 민족명으로 여전히 존속하고 있으며, 그 인구는 1,000만 명을 상회한다. 근래 이들은 각종 단체와 협회를 조직해서 만주족 문화의 유지와 부활을 도모하고 있다. ‘만주’가 지나간 과거의 주인공만이 아닌 ‘만족’의 전신으로서 오늘에 드리우고 있는 그림자의 실체로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허투알라 일대에서 이동해 온 다수의 여진인을 요양의 한인들과 한 집에서 거주하도록 조치한 만한동거滿漢同居 정책은 요양 한인의 반발과 저항을 야기했다. 한인은 우물에 독을 풀어서 여진인을 살해하는 방식으로 소극적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요양의 한인을 설득하지도 제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학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했다.

누르하치 시기의 심양 궁궐은 외조와 내정이 하나의 영역 내에 있지 않고 서로 떨어진 두 공간에 분리되어 있었다. 이 점이 중국식 궁궐 구조와 크게 다른 점이었다. 건물의 명칭도 한어가 아닌 만주어였다.

홍 타이지의 권력 강화와 중앙집권적 제도의 지향은 필연적으로 중국식 제도의 도입으로 이어졌고, 그 임무를 수행한 한인 관료를 통해 한어와 중국식 문화가 후금의 권력 핵심부로 유입되었다. 홍 타이지는 한인과의 공존을 위해 아버지 누르하치와는 다른 유화적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요양 한인의 학살에 대해 아버지 누르하치의 오류를 비판했다. 이어서 누르하치가 노예화시켰던 한인을 평민으로 격상시켰으며 그들 가운데 지식인을 관료로 기용했다. 이들 한인 지식인 관료들은 중국식 문화를 후금에 도입함으로써 후금에 관료제를 정착시키고 후금을 중앙집권적 국가로 변화시킨 주역이었다.
1636년 홍 타이지는 국호를 기존의 ‘아이신 구룬’에서 ‘다이칭 구룬’으로 개칭하고, 만주족의 한이자 요동 한인의 황제이자 몽고의 대칸이 되었다. 이는 곧 만주족이 한인, 몽고인과 공존하겠다는 의지를 선포한 것이었고 다민족국가의 표방을 의미했다.

강희기 동순의 이면의 목적은 시행 시기의 상황에 따라 각기 상이하다. 그러나 표면과 이면의 목적을 통합하여 구조적으로 보면, 표면의 목적은 언제나 조상 능 참배와 성공의 자신감을 표방하는 것이었다. 반면 이면의 목적은 시기마다 닥친 상이한 위기의 관리와 타개를 위한 것이었다.

건륭제가 심양의 궁궐을 증축한 것은 만주족의 정체성을 재수립하고 조상의 고토인 만주 지역의 의미를 재발견하기 위한 중심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건륭제가 심양 궁궐에서 시행한 행사 가운데 샤머니즘 제사를 지낸 사건은 만주족의 정체성 수립과 만주 지역을 연계하고 궁궐이 그 중심 공간으로 기능했음을 잘 보여 준다.

지금 중국 흑룡강성 영안寧安의 청대 지명은 닝구타였다. 이 곳은 먼 과거에 발해가 건국된 곳으로 발해의 다섯 수도 가운데 하나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가 있었던 곳이었다. 조선 전기에 조선인은 이곳을 고주古州나 구주具州라고 불렀고, 그곳에 사는 여진인을 혐진우디거라고 불렀다. 『만주실록』에서 닝구타는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일하기 전까지 동해여진 워지부의 영역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누르하치는 동해여진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1610년에 닝구타를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두 번째의 닝구타는 누르하치가 후금을 개국한 지역인 허투알라 인근, 즉 현재 요령성의 신빈현 내에 있었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신빈의 닝구타는 청대에 기록된 누르하치의 사적과 관련한 문헌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청대에 만문과 한문으로 제작된 지도에서도 신빈현 일대에서 닝구타Ningguta, 寧古塔라는 지명을 찾을 수 없다. 신빈 일대에서 닝구타와 유사한 지명은 조선인 신충일이 남긴 『건주기정도기』에서 ‘림고타林古打’라는 형태로 유일하게 나타난다. 신충일은 1595년(조선 선조 28)에 건주여진의 도성인 퍼알라Fe ala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후에 『건주기정도기』를 썼다. 그는 이 기록에 수록한 지도에서 허투알라에서 약간 떨어진 소자하蘇子河의 상류역에 ‘지명림고타地名林古打’라고 기입했고, 소자하의 상류를 ‘림고타천林古打川’이라고 지칭했다. 엄밀히 따지면 림고타林古打가 닝구타Ningguta의 음역인지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청대에 그리고 현재까지도 영안의 닝구타와 신빈의 닝구타가 착종되며 빚어져 온 혼란은 림고타가 닝구타의 음역이고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의 여섯 형제를 지칭하는 ‘닝구타의 버일러들Ninggutai beise’의 닝구타가 이 지명에서 비롯한 명칭이라는 가정에서 시작되었다.

‘닝구타 버일러’의 닝구타는 ‘나단타’나 ‘우윤타’와 동일선상에 있는, 형제들의 수로 그들을 합칭하는 호칭이자 일족을 부르는 명칭이고, 지명에 기인한 명칭은 아닌 것이다. 만약 지명 림고타와 ‘닝구타 버일러들’의 닝구타가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닝구타가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고 그 반대일 것이다. 즉 ‘닝구타 버일러들’이 거주했기 때문에 림고타라는 지명이 생겼을 것이다.

청조의 만주족 통치자들은 그들의 먼 과거의 전설적 조상인 부쿠리 용숀의 신화를 장백산이라는 탁월한 랜드마크에 연결해 갔다. 그 이유는 이 신령스러운 지리적 표상을 자신들의 왕조와 황실의 정통성을 빛내는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태조고황제실록』은 첫머리 부분에서 『태조무황제실록』과는 달리 장백산을 조상의 발상지라고 확실하게 규정했다. 또한 이 기록은 『태조무황제실록』의 서술과는 달리 장백산의 지리적 배경과 부쿠리 용숀 탄생 신화라는 두 개의 상이한 사실을 하나의 단락 안에서 하나의 사실처럼 자연스럽게 결합시키고 있다. 결국 이 기록에서 부쿠리산은 수많은 산으로 이루어진 장백산 산무리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그곳에서 태어난 부쿠리 용숀은 곧 장백산에서 태어난 것이 되었다. 이로써 장백산과 부쿠리산과 부쿠리 용숀 삼자가 완벽하게 결합했다.

부쿠리 용숀의 탄생지인 부쿠리산에 장백산이 첨입되어 결합하는 최초의 기록은 『태조무황제실록』이다. 이 책은 1636년(숭덕 1)에 편찬되고 여러 번의 개수改修를 거쳐 1655년(순치 12)에 정본定本이 완성되었다. 책의 권1 첫머리에서는 「선先 겅기연 한의 훌륭히 행한 규범」에 기록된 부쿠리 용숀의 탄생 신화와 그의 일란 할라로의 이동과 몽케테무르로의 계보 연결을 그대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태조무황제실록』은 이 서술과는 달리, 부쿠리 용숀의 탄생 신화 앞에서 장백산의 지리적 배경을 서술하고, 그에 뒤이어 부쿠리 용숀의 탄생지인 부쿠리산을 서술하면서 위치를 설명하는 지리적 기준점으로 장백산을 삽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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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항구의 끝. 콘크리트 방파제에 서서 바다를 봤다. 아주 짙고 또 넓었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왔지만 먼바다는 잔잔하게만 보였다. 수평선은 단호했다. 보이지 않는 건너편에는 내가 살던 일본. 그 건너의 건너편에는 또다른 얼굴들. 그 모두를 잇는 커다란 바다. 송희가 말한 커다란 사랑의 모양과 크기를 상상해보려 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이들, 정희정, 이저벨라 린, 박규영도 포함될 만큼 둥글고 크게. 그런데 아까의 아주머니가 가질 수 있는 것이 그 커다란 사랑의 어떤 조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영록이 산 수건 세트가 그의 어머니에게 전해졌는지 궁금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서 있었다. 나는 그냥 선 채로…… 있었다.

플래그는 서랍 속에 접힌 채로 있다.
지금은 펼치지 않고도 떠올릴 수 있는 그 세계지도에서, 세상의 모든 바다는 분명 이어져 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이 다소 무섭다. 바다를 등지고 아무리 멀리 가도, 반드시 세상 어떤 바다와 다시 마주치게 될 테니까. 그 불편한 예감에 시달릴 때마다 이상하게도 오래전 지하 소극장에서 본 오타쿠들이 떠오른다. 그 기모이한 오타쿠들의 열렬한 구호. 가치코이코죠. 진짜 사랑 고백. 좋아 좋아 정말 좋아 역시 좋아…… 그것도 사랑이라면, 나는 어쩐지 그 근시의 사랑이 조금 그립다.

혼자가 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멀리 떠났다가도 돌아와 몸을 눕히게 되는 침대처럼, 있는 힘껏 뛰어올라도 바닥으로 끌어내리고야 마는 중력처럼 혼자 됨이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나. 이미 혼자인데 어떻게 더 혼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떤 혼자는 다른 혼자보다 더 완성된 것일까.

혼자를 두려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말 것. 적극적으로 혼자 됨을 실천할 것. 연애는 옵션이거나 그조차도 못 되므로 질척거리지 말고 단독자로서 산뜻한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할 것.

리아는 사랑이란 우리가 관성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넓고 깊다며, 눈을 뜬 자에게는 도처에 존재하는 것이라 했다. 왜 사랑을 성애性愛에서만 구하려고 하니. 우리는 신을 사랑할 수도, 계절을 사랑할 수도 있지. 조카의 해맑은 웃음에서, 동네 빵집에 진열된 갓 구운 빵에서, 뜻밖에 가뿐하게 눈뜬 아침 이불 속에서 듣는 새들의 지저귐에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야. 그게 성숙이라고.

저게 나인가. 아니지. 저것도 나인가. 그건 맞지. 완두는 맹희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일부이긴 했다. 나 생각보다 관종이었을지도. 맹희는 갖가지 조합의 검색어를 입력하여 시청자들의 반응을 찾아 읽었다. 각오는 했지만 어떤 말들은 너무 부당했다. 사람들은 나이와 직업과 외모를 초월한 사랑이 더 진실하다 여기면서도 정말 그것들을 초월하려고 시도하면 자격을 물었다. 인생을 반도 안 산 사람에게 어떻게 ‘도태’되었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지, 596명이나 거기에 추천을 누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의아했다. 맹희 자신도, 감자도 토마토도 양파도 그들이 비난하는 만큼 잘못한 건 아니었다. 어째서 이렇게나 많은 남자가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을, 무엇을 속이거나 팔아넘기겠다는 말로 번역해서 들을까.

전철역을 나서고도 집에 가지 않고 산책하는 날들. 노점에서 굽는 붕어빵 냄새. 담장 위를 걷는 고양이의 발걸음. 전동 킥보드에 올라탄 여중생들의 웃음소리. 모든 것이 은총처럼 빛나는 저녁이 많아졌다. 하지만 맹희는 그 무해하게 아름다운 세상 앞에서 때때로 무례하게 다정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 마음이 어떤 날에는 짐 같았고 어떤 날에는 힘 같았다. 버리고 싶었지만 빼앗기기는 싫었다. 맹희는 앞으로도 맹신과 망신 사이에서 여러 번 길을 잃을 것임을 예감했다. 많은 노래에 기대며. 많은 노래에 속으며.

그는 어떤 것들은 예고될 수 없으며 호명될 뿐이라고 생각하며 담대해졌다. 당장 해야 할 일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

결석하지 않고 학교도 잘 다녔다. 법을 어긴 적도 없었다. 하루에 삼분의 일에서 이분의 일을 일터에서 성실히 보냈고 공과금도 기한 내에 냈다. 그럼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살았으니까 이만큼이라도 산다고 만족해야 할까. ‘스물일곱 살 인생 평가 좀’ 같은 제목의 글에 사람들이 쏟아놓는 댓글을 보면 가끔 뭘 잘못한 것 같기도 했다. 더 잘살고 싶었다면 공부를 더 잘했어야 한다고. 솥뚜껑삼겹살도 즉석떡볶이도 먹지 말고 맥주도 마시지 말고 섹스도 하지 말고 닥치고 공부해서 시험에 붙든 돈을 모으든 했어야 한다고. 남들 다 자리잡을 때 어리바리하고 게을렀던 우리가 ‘빡대가리’라고. 두 사람은 이런 질문에 도달했다.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

미래는 여전히 닫힌 봉투 안에 있었고 몇몇 퇴근길에는 사는 게 형벌 같았다.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보일러를 아껴 트는 겨울.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는 서로의 등을 보면 봄날의 교무실이 떠올랐다.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때로는 시시하고 때로는 끔찍했으며 결국에는 죄다 망해버린 연애들이 있었다. 초라하게 사라진 나라들조차 폐허 어딘가에는 영광을 남기는 것처럼 그 연애들에도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은 있었다. 연애가 망하더라도 사랑은 망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저렴한 각본으로 사랑하느니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어차피 첫 단추부터 이상했으니까. 차라리 이것은…… 딩동. 음식 도착을 알리는 초인종이 울렸다. 두 사람이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우리는 친한 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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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사에서 혜원의 시에 차운하다甘露寺次惠遠韻
김부식

속객은 찾아오지 않는 곳
올라와 내려다보면 생각이 맑아지네.
산의 형세 가을이라 더 아름답고
강물빛 밤이어도 밝기만 하다.
하얀새 홀로 날아 사라지고
외로운 돛배 하나 가벼이 떠가네.
부끄러워라, 달팽이 뿔 위에서
반평생 공명 찾으며 살아왔구나.
俗客不到處 登臨意思清
山形秋更好 江色夜猶明
白鳥孤飛盡 孤帆獨去輕
自慚蝸角上 半世覓功名

-『동문선』 제9권

산중의 눈 내리는 밤山中雪夜
이제현李齊賢

종이이불에 한기 돌고 불등 어두운데
사는 밤새도록 종을 치지 않는다.
아마 성을 내리, 묵던 손이 일찍 문을 열고
암자 앞 눈 쌓인 소나무 보려 함을.

紙被生寒佛燈暗 沙彌一夜不鳴鍾
應塡宿客開門早 要看庵前雪壓松

『동문선」 제21권(『익재난고益齋藁』제3권)

교동喬桐
이색李穡

바다 어귀 아득하고 푸른 하늘 나지막한데
돛 그림자 날아오고 해는 서편에 기우네.
산 아래 집집마다 막걸리 거르고는
파 썰고 회치노라니 닭은 둥지로 드네.

海門無際碧天低 帆影飛來日在西
山下家家蒭白酒 斷葱斫膾欲雞棲

-『동문선」 제22권 (『목은집牧隱』 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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