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한국전쟁, 그리고 비무장지대의 탄생

미국과 유엔의 서방국 사이에서 처음 논의되었던 한반도 비무장지대는 ‘정치적인 해법‘으로서 제기된 것이었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 의도를 고려하고, 한반도 밖으로의 확전을 방지하는 방안이었다. 정전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 비무장지대는 ‘군사 작전 지대‘로 인식되고 규정되었지만, 사실 비무장지대 구상은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해결하려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 P69

미국은 영국, 인도 등과 함께 중국과 정치적으로 정전문제를 협상하려고 했으나, 그 시도는 실패했다. 군사적으로 전황이 유리하던 중국은 정전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의 정전 시도는 실패했으나, 비무장지대 설정을 통해 정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미국, 기타 서방국, 중국 사이에 인식이 공유되었다. 이때 논의한 38선 기준의 비무장지대, 정전 감독 기구의 설치 등은 이후 정전회담의 토대가 되었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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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합체‘ collective라는 말을 사용하여 인간들과 비인간 존재들 간의 연합을 묘사할 것이고, ‘사회‘society라는 말로는 우리의 집합체의 한쪽 부분만을, 즉 사회과학이발명해 낸 분할의 한쪽 편만을 지칭할 것이다. 맥락과 기술적 내용은 매번 재정의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 P26

이 글의 가설은 다음과 같은 것인데, ‘근대성‘이라는 말이두 가지의 완전히 다른 실천을 지시하고 있고, 이 두 가지 실천은 그 효과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구분되어야만 하지만 최근에는 이것들이 혼동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천의 첫 번째 집합은 ‘번역‘translation인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존 - P41

재들 간의 혼합, 즉 자연과 문화의 하이브리드들을 만들어낸다. 두 번째는 ‘정화‘purification로서, 전적으로 구분되는 존재론적 지대를 창출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 존재들의 존재론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인간 존재들의 존재론적 지대이다. 첫 번째 집합이 없다면 정화의 실천은 헛되고 무의미해질 것이다. 두 번째 실천이 없으면 번역의 작업은 느려지고 제한되거나 심지어 불가능해질 것이다. 첫 번째 집합은내가 연결망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응하며, 두 번째는 근대적인 비판적 입장이라고 부르는 것에 상응한다. 전자는 예를들어 고층대기의 화학과 과학적, 산업적 전략, 그리고 국가의정상들의 관심사, 그리고 생태주의자들의 근심 모두를 단일한 연속적인 사슬로 연결시킬 것이다. 후자는 언제나 거기에있어 온 자연세계와, 예측가능하고 안정적인 이익과 이해관계가 있는 사회, 그리고 지시대상과 사회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담론들 사이에 분할을 수립할 것이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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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이득‘을 준 이상 이는 노동이다. 그러나 그이득이 스스로에게 돌아갔고 그 보상 역시스스로가 얻은 것이므로 ‘무료‘ 노동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로부터 ‘무료 노동‘이라고 불릴 수있는 유일한 노동은 지불받지도 보상을 얻지도 않은, 다른 이를 위해 행해지는 노동이라는 점을 도출할 수 있다. - P41

가사노동의 특징적인 생산 관계가 가사노동에만 해당하지 않고 혹은 가사노동에만 한정되지 않고 다른 종류의 과업과 노동역시 특정 지으므로, 우리는 가정 내 노동이 - P46

라는 개념으로 가사노동의 개념을 대체하기를 제안한다. 연구 대상은 분명 사회학적이고 광범위한 의미의 집에서 무료로 실시되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 P47

토착 이론은 개인의 신장과 그의 신체 기관에 필요한 음식의 양 사이에 상관관계가 성립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이 전제가 분배의 원칙이 아니라 합리화에 불과하 - P86

다는 것은 이 상관관계에서 드러나는 예외의 수만 봐도 명백해진다. 남편, 사장, 아버지, 장자는 그 자신이 아무리 왜소하더라도자신과 신장이 비슷한 여성이나 노동자, 아이, 동생에게 특권을 양보하지 않는다.
필요 편차 이론은 또한 에너지 소비의 차이라는 세 번째 논거를 포함한다.
이 주장은 실제 개인이 소비하는 에너지 측정값에 근거하지 않으며, 활동과 에너지 소비 사이에 개인과 무관한 관계를 설정한다. 이 관계는 기본적으로 활동을 ‘큰일‘과 ‘작은 일‘로 분류한다. 하지만 이 분류는해당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 소비에 따른 것이 아니라 활동의 성격에 기초한다.
이때 기술적인 수행 자체는 분류의실질적 기준이 아니다. - P87

소비는 재화만이 아니라 서비스도 포함하는 문제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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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들은 세월호를 "대한민국에서 제일 위험한 배"라고 불렀다. 청해진 해운은 일본에서 18년 이상 운항한 나미노우에호를 구입해 불법으로 증개축했다. 증개축이 반복되면서 '승인이 나지 않은 도면'으로 증개축이 이어졌다. 증개축으로 배의 무게가 239t 늘었고, 배가 기울었을 때 평형상태로 되돌아오려는 복원력은 낮아졌다. 한국선급이 승인한 최대 화물 적재량은 1077t인데, 그날 배에는 화물 2214t이 실려 있었다(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조사 결과). 이윤을 위한 과적은 상습적이었다. 부실하게 고박한 화물이 쏠리면서 복원성이 상실되었다. 배 한 구역이 침수되더라도 다른 구역은 침수되지 않도록 수밀문, 맨홀을 닫고 운행했어야 하는데 세월호 지하층의 수밀문, 맨홀은 모두 열려 있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이를 방치한 채 배를 떠났다. 시뮬레이션 결과, 닫혀 있었더라면 배는 더 오래 떠 있었을 것으로 나타났다. 해경 지휘부는 현장 출동 책임자에게 사진, 영상 송출을 계속 요구했다. 생사의 순간이 허비되었다. 수많은 부주의와 방관이 쌓였고, 배가 침몰했다. 304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날의 아픈 기억이다. - P3


세월호 참사는 일상을 안전하게 살아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침에 출근했던 가족이 무사히 퇴근하는 것, 여행을 갔던 가족이 무사히 돌아오는 것,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사회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어요. (...) - P15




꼭 10년이 흘렀다. 소중한 가족을 잃은 이들은 어떻게 이 슬픔을 견뎠을까. 나는 지금도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생각하면 무너지곤 하는데 말이다.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에서 지난 10년 간의 기록을 담은 책을 읽었다. 참사 당일의 현장 상황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가족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어 과거부터 현재까지 참사의 역사를 복기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참사 초기 정부의 기능이 불능인 상황에서 자진해서 내려간 민간 잠수사들, 유가족을 실어 나르기 위해 봉사하러 간 택시 기사님들을 비롯한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있었다. 그 분들이 아니었다면 그마저도 굴러갔을지 지금은 그저 그나마 그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 뿐이다. 초기 정부의 막장 대응, 불통과 관련한 가족들의 인터뷰를 듣자니 그 때가 떠올라 분노가 일었다.  


2017년 4월 18일 세월호 선체의 수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5월 13일 세월호 선내 4층에서 단원고 조은화 학생이, 18일에는 허다윤 학생이, 22일에는 이영숙 씨가 수습되었다. (그전인 5월 5일에는 세월호 침몰 해역 수중 수색에서 고창석 단원고 교사의 유해가 수습되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8년 5월 10일 세월호가 바로 세워졌다. - P69

 

실종자 가족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3년 간을 기다렸다. 3년이라니…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기간이다. 


그 표정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는데 아이를 찾기 전과 찾고 나서의 표정을 보면 하늘과 땅 차이예요. 완전히 달라.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요. 얼굴이 새카맣다가 하얘져요, 진짜로. 마치 살아 있는 애를 찾은 것 같은 얼굴이에요. 처음에는 진짜 이해하지 못했어. 완전히 얼굴이 피는데 그걸 어떻게 설명하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요. 얼굴이 빠짝 마르고 시커메지고 표정도 하나도 없던 사람이, 뼛조각이라도 아이를 찾는 순간 살아 있는 자식을 만난 것 같은 얼굴이 돼요. 그러다가 갑자기 슬픈 얼굴이 돼요. 자기 곁에 아직도 못 찾은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기쁜데 미안한 거죠. (이승용) 


그마저도 세월호 선체 수색으로 9명의 실종자 중 4명은 돌아왔지만 5명은 영영 찾지 못했다. 뼛조각이라도 찾겠다는 가족의 마음이 너무나 절절하게 느껴져 울음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호가 뭍으로 나오고 세워지던 날이 기억난다. 흉물 같던 배는 마치 너덜너덜해진 피부 같아 보였다. 세월의 흔적만큼 배도 그렇게 변해버렸구나 싶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아이를 잃고 황망해진 부모와 형제는 정부의 안일한 대응과 진상 규명을 위해 일어섰고 오래도록 지난한 투쟁을 이어갔다. 그 힘은 분명 아이를 잃은 슬픔과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에 대한 분노가 자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 개개인의 역량의 강화, 투쟁에 대한 승리의 경험도 다른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당시 부모들의 나이는 평균 사오십 대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시대를 살아왔으며 다수가 고등학교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세대다. 정치 활동에 무관심하거나 미온적일지라도, 감금이나 고문 같은 국가폭력이 자행되던 시대의 공포에 시달렸던 세대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정보통신기술과 네트워크 매체의 발달 역시 이들의 각성과 실천을 자극했다. 가족대책위라는 공동체로 모여 있었던 이들은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빠르게 공유했으며 수많은 시민과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교류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은 새로운 특징을 지닌 유가족의 출현을 촉진했다. 한계 지어진 틀 안의 존재를 넘어 사유하고 증언하며 주장하고 실천하는 주체의 등장이었다. - P238~239


난관 끝에 탄생한 세월호 특조위는 여당과 정부의 탄압으로 제대로 된 활동을 이어가지 못한 채 종료됐다. 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허망하게 갔는지 그 원인을 밝혀달라는 것이 그렇게도 자신들에게 문제가 되는지… 

’세월호특조위에 여당과 야당이 위원을 추천하는데 여당인 새누리당이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사람을 추천하면 어떻게 할 거냐“?‘ 그게 가족들의 가장 큰 걱정이었는데 새누리당에 김재원 의원이 ’아, 우리가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여론이 있고, 보는 눈이 있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하더라고요. 정말 상상이상이었어요.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위원을 추천하는 것은 물론이고 진짜 하나하나 다 방해했어요. 공무원 파견을 안 하거나, 아예 뽑지를 않거나 예산을 덜 주거나 제때 안 주고, 자료도 부실하게 주고. 무엇 하나 특조위가 제대로 기능을 할 수가 없었어요. (박주민) - P150


세월호참사와 관련되어 법적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은 공직자는 123정 김경일 정장 단 한 명뿐이었다. 경찰, 국정원, 검찰의 적폐청산 기구들은 ‘세월호 참사는 사참위에서 다룰 사안’이라며 아예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호특조위와 마찬가지로 사참위 또한 수사권과 기소권을 갖지 못했다. 세월호 5주기인 2019년 4월 16일 세월호 특별수사단 구성을 위한 청와대 국민청원이 20만 명을 돌파했지만 청와대의 답변은 역시나 사참위 조사 결과를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 P167


세월호 선체 수색 종료 이후에도 참사와 관련하여 소식들이 이어졌지만 그동안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 같다. 안산에 합동분향소가 철거되었지만 대신 가족협의회와 안산 시민들이 연대하여 4.16생명안전공원을 통해 기억과 추모의 공간을 추진 중이다. 2021년 2월 마침내 4.16생명안전공원 국제설계공모가 시작되었는데 착공 예정 공사비가 500억 원을 넘으면서 사업 적정성 검토를 추가 진행하며 현재 착공 일정을 가늠하기 어려워진 상태다. 끝까지 공사가 잘 진행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또한 진도의 팽목항에 있던 임시 시설물들도 철거될 뻔 했으나 희생자 가족 중 한 명이 가족대기실과 희생자 분향소로 쓰이던 낡은 컨테이너에 ‘팽목기억관’을 만들었다. 


가족들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재단을 운영하고 합창, 공방, 연극, 목공, 꽃누르미 공예, 봉사 등을 하며 몸과 마음을 치유해나가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적 시선에서 그들은 자유롭기 어려웠을 것 같다. 사실 이 분들도 살아나가야 하는데 계속 피해자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 우습지 않나. 웃으면 웃어서 뭐라고 하고 울면 운다고 뭐라고 하고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그래도 가족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힘을 내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임영애 씨는 자신에게 전사(戰士)의 얼굴을 새로 주었다. 슬픔을 지우고 강함을 그려 넣었다. 그것이 순수라는 이름으로 피해자에게 순응을 요구한 사회에 맞서는 길이라 여겼다. 피해자다움은 그만큼이나 강력한 족쇄였다.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은 그 족쇄를 끊어내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 P388


의혹으로 둘러싸인 사건에 대해 명쾌하고 간결한 단 하나의 진실을 바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렇게 보면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의 현주소는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진상규명의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실은 때로 울퉁불퉁하고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거나 여러 가지 모양을 갖는다. 왜 세월호가 그렇게 빨리 침몰했는지, 왜 세월호에 갇힌 이들을 국가는 구하려 하지 않았는지, 그 진실의 얼굴은 아직 장막에 가려진 채 남아 있다. 한편 진실을 찾는다는 것이 무너진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면 사법적 정의 외에도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회복적 정의의 실현도 함께 가야 한다. - P173


의혹이 아니라 진실이 알고 싶다. 대체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이유라도 알면 여전히 분노하는 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결국 진실이 끝까지 밝혀지지 못한다 해도 이 사회적 재난의 대가는 끝까지 우리 사회가 짊어지고 가야 하지 않을까. 






자신은 이제 새들이 모두 날아가고 난 뒤의 빈 나무 같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 P211 (사랑의 단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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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아져만 가고 있던 민족주의 의식의 파도 속에서 국제주의의 경험이 제자리를 찾는다는 것은몹시도 어려운 일임이 중일 양국 모두에서 밝혀졌다. - P638

청조의 마지막 10년 전 기간 동안은 아니더라도 마지막 5~6년 동안에 진행된 개혁 계획은 만주족 통치자들, 한족 순무와신사들이 권력을 보존하거나 심지어 확장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목적한 바와는 정반대의 결과를져왔다. 결국 개혁들은 왕조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 P692

19세기 말 중국이 근대적 기업을 장려했던 것은 신속하게존경할 만한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정치적 필요성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이러한 근본적인 목표가 다양한 파벌의 정부 관료들을 단결시켜공동으로 공업화에 매진하도록 했다. - P699

하나의 새로운 사회 계급을 형성하게 된 상인, 신사, 관료들은 당시에는 아직 뚜렷한 부르주아 계급이 되지는 못했다. 대규모 조약항에서는 신사상인들의 수가 상당한 정도에 이르러 그들의 공통적인 생활 방식과 가치관 그리고 사회적·정치적 성향은 일반 - P702

대중과 뚜렷이 구별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목표에 대한 광범위한 통일을 결여하고 있었으며 전통적인 향촌과 친족 관계에 강한애착을 갖고 있었다. - P703

공화주의와 사회주의가 중국인들의 흥미를 크게 끌었던 것은 두 이념이 세계를 석권하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즉 중국인들은 그것들이 국가의 부강, 정치적 통일과 질서, 그리고 사회 복리를 제공해줄 최 ‘첨단‘ 사상이라고 생각했다. 새롭고 진보적인 것을 찾아 나선 중국의 지식인들은 왕왕 하나의 사상을 위해 다른 사상을 버리거나 또는 쉽게 양립할 수 없는 사상들을 하나로 결합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이념은 극심한 인격 분열로 발전하기도 했는데, 주요한 갈등은 외국인에 대한 태도를 둘러싼 차마 말할 수 없는 갈등이었다. 그들은 외국의 혁명가들에게 혈족 관계를 느꼈으며 외국의부와 막강한 힘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위에 분개하면서도 동시에 서구와 일본의 원조를 구했다. 제국주의가중국을 부분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비롯된 이런 딜레마는 혁명 운동과 혁명 이념의 불안정성을 한층 더 증폭시켰다. 혁명가들 중에는 낙오하거나 변절하거나 사상을 바꾼 사람들도 있었고, 내부에서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 P821

폭정은 세 가지 상이한 방면에서 동시에 표출되었다. 민감하기 짝이 없는 종족 문제와 애국심, 민주적 의식, 경제적 이익 이 모두를 동시에 범했던 것이다(공교롭게도 이 세 가지 시책은 결국 삼민주의의 세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청조에 대한최후의 심판에 있어서의 혁명파의 역할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청조는 기본적으로 정권 자체의 오류 때문에 적절치 못한 정권이라는 - P855

것이 드러났지만 그에 대한 판결은 혁명파가 전력을 기울여 수립하려고 했던 원칙(삼민주의)에 따라 내려졌다. 이 원칙들은 전적으로 분명하거나 일관된 것이 아니었으며, 그것을 옹호한 일부 사람들은 입으로만 떠들어대면서 실제로는 언제라도 어길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1911년 당시 그것들은 중국의 국민적 합의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다.
마침내 혁명파가 사태의 핵심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왜냐하면 다양한 집단들은 이 세 가지 원칙 중 어느 하나에만 찬성한 반면 혁명파만은 세 가지 모두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최종적인 반연합에 가담한 모든 파벌 가운데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조절하고 경쟁중인 집단을 규합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입헌주의 개혁파들 사이에서 가장 가까운 동맹 세력을 찾을 수 있었다. - P856

1911년 이후 중국의 역사는 새로운 사상과 행동의 틀을 어•떻게 짤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911~1913년 사이 사람들의 사상과 행동이 워낙 다양하고 불안정했기 때문에 나타나게 된 변화무쌍한 이합집산은 그 자체가 혁명적 변화의 증후이기도 했다. 새로운 세력은 너무 많고 또 너무나 다양해 서로 화해하거나 구질서의 많은 생존자들과 타협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뒤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제국의 멸망을 인정하면서 장젠은이렇게 말하고 있다.

각자는 자기 의지의 주인이며 세상에 이러한 힘을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900년 이전의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탄생한 것이다. - P874

1911년의 중국은 해체된 사회가 가진 이중적 전망을 보여주었다.
즉 그러한 사회는 동시에 신군, 근대적 엘리트, 혁명파 등 1911년에왕조에 반대하기 위해 협력한 일군의 새로운 사회 세력의 온상이기도했던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생명을 서서히 영혼과 정신을 잃어가고 있던 사회의 흐릿한 틀 안에 감추어둘 수는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던 소위 소년 중국Young China은 분명한 정체성을 갖지도 못한 채 극히다양한 지역적 상황에 불확실하게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면 위의거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민중의 압력으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왕조의 권력이 소진되지 않았다면 벼락부자(폭발호戶), 청년 장교, 활력에 찬 대도시의 지식인들이 정말 왕조를 종식시킬 수 있었을까? 그러나 결국 황제를 퇴위시킨 것이 과연 이 소년 중국의 공격이긴한 것일까? 최고위층의 정치적 의지력의 약화와 상실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시 폭동인 신해혁명은 아편전쟁 이후의 전례 없는 사회적 변화의 결과이자, 농업 제국인 낡은 세계에서 등을 돌리고 정치 조직과 경제적 발전에 관한 새로운 기술을 서구에서 찾으려고 한 도시 엘리트들의창작품으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공화국은 당시 새로운 엘리트들의손에 장악되어 있었으나 그것을 탄생시킨 청조의 붕괴는 농촌 전체 내부에 깊숙한 근원을 가진 운동이 서서히 진척되면서 나온 성과였다. - P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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