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이야기 나비클럽 소설선
김형규 지음 / 나비클럽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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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내가 발 붙고 서 있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이 많은 탓이다. 몇 달 전 서재 친구분께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신 것을 보고 작가도 나처럼 현실에서 비롯된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관심이 갔다. 작년 말 희망 도서로 신청했는데 예산 때문에 잘려서 한참을 기다린 끝에 비로소 내 손에 받아들 수 있었다. 


우선 작가의 이력이 흥미로웠다. 동양사를 전공하고 러시아 현대사를 연구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사회과학 분야의 출판사를 차리기도 했다. 현재는 티셔츠를 입고 대중 교통으로 출퇴근을 하는 변호사로 일한다. 


러시아 현대사와 동양사를 공부해서인지 소설의 배경에 구체적인 사실에 근거한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다.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졌을 때 나처럼 어릴 때라 당시 한국의 노동계와 사회계에 일어났던 일들을 잘 모르던 사람도 이런 사실이 있었고 이런 대화가 오갔겠구나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와 ‘너’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나온다. ‘너’는 호기심의 대상이기도 하고 질문의 대상이기도 하며 공포, 또는 연민의 대상이기도 하다. 


표제작인 <모든 것의 이야기>는 슬픔과 연민에서 시작해 이상과 희망으로 나아가고 싶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20년 대림동 수정커피호프에서는 슬픔과 외로움의 냄새가 진하게 흐른다. 나는 수정커피호프에서 일하는 탈북자 여성을 위험에서 구해준다. 나는 가난과 폭력 속에서 살아왔다.


있잖아, 내가 되게 무서운 사람이거든. 사람들은 나를 많이 무서워해. 

그런데 내가 집에만 들어가면, 들어가서 문을 닫으면, 곧바로 눈물이 막 쏟아져.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언제나 그래. 엉엉 울어. 무서운 것도 없는데 무서워서 온몸이 덜덜 떨려. 추워서 덜덜 떨려. - P24


내가 가진 것이 없고 나를 지켜주는 이가 아무도 없을 때,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나를 더 강하게 다그쳐야할지 모른다(사회적 가면). 세상은 폭력과 위협이 난무하고 나를 지키려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과 온종일 부딪치며 돌아온 나는 피투성이가 된다. 이럴 때는 우는 것이 나의 마음을 해소하는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2043년 화성 마오 기지에는 두 명의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은 중국의 우주본부가 핵폭격을 받고 인공위성도 격추되어 본부와 통신도 할 수 없고 지구로도 돌아갈 수 없는 고립된 상황이 되었다. 둘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아끼며 나아갈 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너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며 울음을 터뜨린다. 지구를 그리는 두 사람. 문을 열고 나아간 너. 둘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돌아갈 수 있을까.


1999년 마석 어쭈구리 테이블에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흐른다. 


우리의 꿈을 위하여!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한때나마 품었던 꿈들에 대한 이야기를 끝없이 쏟아낸다. 선생님, 용접공, 과일 가게 주인, 경찰관, 소방관, 사냥꾼, 가수, 우주인. 꿈은 일관성도 없이 다종다양하다. - P56


‘어쭈구리’라는 상호명을 볼 때 반가웠다. 대학 근처에 어쭈구리가 있었는데 만 원에서 이만 원이면 다양한 안주에 소주를 마실 수 있어서 친구들, 선배들과 무척 많이 갔던 기억이 난다. 대학을 다니면서 장학금을 얻기 위해 공부도 하고 동시에 돈을 벌기도 해야 했다. 당시는 IMF를 막 넘은 터라 여전히 경기는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취업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던 때였다. 그 시절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꿈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하루를 무사히 넘기길 바랐던 것 같다. 


1951년 하동군 양보면에서는 한국 전쟁이 한창이다. 

3년 간 이어진 한국 전쟁은 시시각각 전황이 바뀌었다. 인민군이 내려와 인민군의 세상이 되었다가, 얼마 후에는 국군의 세상이 되었다. 내가 알던 사람이 인민군으로 변신하고 사람들에게 평등 세상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반동분자를 가려내어 처형하는 일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곳에서 인간이란 어느 장단에 맞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간절히 그리운데 누가 그리운지 모르겠고, 그리운 누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내가 누군지도,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가고 싶은 데가 있는지도,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겠고, 거기 가면 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거기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뜻을 헤아리려 애써보아도 헤아릴 수 없는 부서지고 조각난 말들이었다. - P90


앞이 보이지 않는 뿌연 세상 속에서도 결국 이야기의 마지막 말은 ‘네가 문을 열고 나아간다.’이다. 희망 섞인 바람이자 주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어서 기다리면 변하는 것은 없다. 문을 열고 나아가야 무엇이든 실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림동에서, 실종>은 차별과 배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대림동’하면 떠오르는 주입식 이미지들이 있지 않나. 대림동을 가자고 하니 택시 기사가 하는 반응은 너무나 뻔하다. “그 위험한 곳에 왜 가려고 하세요?” 계속 읽고 있으려니 부끄러워서 어디에 숨고 싶어진다.


대림동은 분지예요. 아무 건물이나 옥상에 한번 올라가서 보세요. 신도림동, 신길동, 신대방동, 구로동의 고층 아파트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요. 거인의 성벽처럼요. 대림동은 아파트가 거의 없잖아요. 그래서 그 성벽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여기서 누가 뭘 하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지 못하는 거예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거죠. 제대로 된 이름도 없고요. 조선족, 중국 동포, 그런 이름들도 웃기잖아요. - P113


가난한 사람들, 노동하는 사람들이 제 몫을 누리고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꼭 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런 세상으로 가는 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면 하고 싶어요.

그게 연극이지? 있잖아,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은 늘 배신당해. 힘없는 목소리였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나는, 우리가, 이겼으면 좋겠어요. 이길 거라고 믿어요. 우리가 끝까지 함께 한다면요. 그러고는 모두 말이 없어졌다. - P165


<가리봉의 선한 사람>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다. 작가가 경험한, 보고 느낀 것이 가장 많이 담겨져 있는 이야기라 생각됐다. 선한 노동자는 거지꼴이 되거나 아귀들에 뜯겨 살아남지 못한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이 자신의 밥그릇을 뺏는다고 생각하고 사장은 노조가 만들어지거나 노조가 목소리를 내는 것을 혐오한다. 지금은 폭력으로 할 수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방법들로 노동자를 무너뜨리게 하는 일이 많다. 


- 정규직: 청소부들이 주제를 모르고 정규직이 되려 하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우리가 취준생으로 몇 년을 고생했나

  공정하지 않아 정의롭지 않아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세상은 평등하지 않아 평등해선 안 돼 세상은 원래부터 불평등한 것

  오른쪽 공장 건물의 창문에서 누군가 얼굴을 내민다. 살집이 두툼한 사장님이다.

- 사장님: 공순이들이 겁도 없이 파업을 하려 하네

  세상 무서운 줄 몰라 백골단을 불러 묵사발을 내줄까

  하지만 나는 교양 있는 사장님 근로자를 자식처럼 사랑하지

  건전한 노조 활동을 육성하려 하네 건전한 어용노조를 육성해 - P176~177


<구세군>은 어떤 미래를 그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하는 이야기다. 기본 소득에 대한 이야기, AI의 등장으로 사람과 기계가 직업을 두고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일 등.

기본 소득이 실현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일하지 않을까. 일반 납세자들, 무직자들, 재벌을 비롯한 기업가들 간에 충돌은 여전하지 않을까. 지금의 굳어진 양당제가 의원 내각제로 변화할 수 있을까. 


사육되기를 거부하라. 세계는 사람의 것이다. - P222


사육되기를 거부하라는 메시지는 ‘동물 농장’을 읽었을 때의 감정이 떠올랐다. 과학과 기술로 환경은 무너지고 인류는 기술과 실력을 겨루어야 하는 시대가 올 지 모른다.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 시간 뿐 아니라 레닌그라드, 한국 등 공간을 뛰어넘어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읽고 나면 슬프고, 벅차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뒤섞이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역시 읽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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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1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11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4-05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4-08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립백 콜롬비아 몬테 블랑코 퍼플 카투라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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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백을 열자마자 후르츠(?) 향이 너무 강해서 깜짝 놀랐지만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훌륭하다는 느낌이었다. 제조 날짜도 최신이라 그런지 좀 더 신선해서 마음에 들었다. 평소에도 진하게 먹는 편이라 레시피대로 내려 마셨는데 괜찮았다. 앞으로 드립백도 이 정도로 농도감 있게 나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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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의 혼돈 - 중국 명대의 상업과 문화
티모시 브룩 지음, 이정.강인황 옮김 / 이산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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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역사를 지나 명나라 역사를 읽으려고 자료를 찾는데 과거에 나온 책들 중 읽을 만한 책은 모두 품절되고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었다. 명나라와의 외교적 사례는 오히려 조선에서 더 사례를 구하기 쉬울 정도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 책도 과거에 보관함에 담아두기는 했지만 이미 품절되어 구할 수 없는 책이라 방도를 찾아야 했다. 지역 도서관에도 없어서 책바다 서비스를 이용해 무려 열흘 만에 어렵게 책을 받았다. 이 때문에 책바다라는 서비스도 처음 이용해봤다. 


이 책은 정치사가 아니라 경제사와 문화사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명대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생활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과거의 자료에서 끌고 온 몇 명의 길잡이들을 이용하여 사례를 살펴보고 저자가 의견을 종합하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어 읽기 어렵지 않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중심 인물은 장타오다. 그는 (상인들의 활동이 많은) 현의 지현을 지내면서 현지를 편찬했는데 점차 상업이 유행하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전기->중기->후기->말기 갈수록 상업이 자리를 잡는 후반부로 갈수록 암울한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만족했다.

살 집이 있고, 경작할 땅이 있었으며, 땔감을 마련할 수 있는 산이 있었고,

김을 맬 채소밭도 있었다. 과세에는 혼란이 없었고 도적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적당한 때에 혼인을 하고 여염집은 편안했다.

여자는 실을 잣거나 베를 짜고 남자는 곡식을 재배했다.

노복은 기꺼이 열심히 일하고 이웃은 서로 친하고 화목했다.


장사꾼이 이미 많아지고 전토는 중시되지 않아서

자산을 가지고 다투거늘 흥망은 예측할 수 없다.

유능한 자는 바야흐로 성공하고 머리가 둔한 자는 곧 파멸한다.

동쪽 집은 이미 부유한데 서쪽 집은 저절로 가난해졌다.

힘 있는 자와 하층민 사이의 균형이 깨져버렸으니

사소한 것을 두고도 서로 다툰다.

모두들 서로에게 빼앗으며 저마다 자기만 키운다.


상업으로 부를 이룬 사람이 많아지고

농사를 지어서 부를 얻는 사람은 드물어졌다.

부자는 더욱 부유해졌고 빈자는 더욱 가난해졌다.

흥한 자는 홀로 위세를 부리고 몰락한 자는 두려워 물러선다.

재물이 나는 곳엔 따르는 무리가 있지만

생업과 살림살이는 일정치 못하다.

교역은 부산하고 티끌만한 이익도 그러모았다.

간악한 세력가가 변란을 일으키고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자가 사람들을 침탈한다.

순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부자는 백에 하나, 빈자는 열에 아홉이다.

빈자들이 부자에게 맞서지 못하니 소수가 도리어 다수를 제압한다.

금령은 하늘을 맡고 전신은 땅에 우뚝 섰다.

탐욕은 한이 없어 골육이 상잔하나 저 혼자 쓰고 누려도 바닥이 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과의 거래에서는 터럭 한올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귀역이 도사리고 있다.


몽골과의 전쟁이 끝나고 땅은 황폐해져 있었다. 홍무제는 황폐해진 땅을 원상 복구하고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며 제국을 통합하는데 치중했다. 명은 가구와 인구를 등록하도록 (이갑제) 하여 효과적인 세금 징수와 요역, 군역 등에 동원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었다.

황제의 이상은 안정된 농경사회였다. 국가는 최소한의 세금을 받아 기본적인 역할만 했다. 농민들은 촌락에 묶여 있고 공장(工匠)들은 국가에 소속되어 일했고, 상인들은 부족한 필수품만을 거래해야 했으며 군인들은 변경에서국가를 방어했다. 행정은 아주 소수의 교육받은 계급에 맡겨졌고 이들은 스스로를 엄격하게 성찰하는 도덕군자들이었다. 홍무제의 목표는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백성은 일단한 곳에 정착하면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만 이동이 가능했다. 또한 왕조의 핵심법률을 모아 편찬한 『대명률』(大明律)에서는 신체적 이동뿐 아니라 사회적 이동도 제한하고 있다. 공장(工匠)의 아들은 공장이 되어야 했고, 군인의 아들은 군인이 되어야 했다. 직업을 바꾼 자에 대한 벌은 물리적 장벽을 넘어선 자에 대한 벌만큼이나 가혹했다. - P39~40


영락제는 홍무제의 정책 방향에서 벗어나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고 상업 부흥지로 떠오른 쑤저우가 대운하 체제를 기반으로 하여 물류의 중심지로 더 성장할 수 있도록 했다. 물품 거래도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은납제로 바뀌고 있었지만 정부도 과세를 은납으로 대체하면서 은의 수요가 점차 늘어났다. 

끊임없는 세수 확대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명조는 몇 가지 과세를 은납으로 대체했다. 그 일부가 베이징으로 보내졌고 그 비율은 점점 커졌다. 은납의 시작은 금화은이 부과된 1436년으로 생각할 수 있다. 명 중기의 요역 개혁도 다른 대체제도를 필요로 했다. ‘지방별 조달‘(坐辦)이 ‘연례 징수‘(歲辦)로 대체되었다. 이는 수도에 물품을 제공하는 지현은 그 비용을 자체 예산으로 부담하고, 그렇지 않으면 은을 중앙정부에 보내는 것이었다. 지방의 역전(驛傳)에서 필요로 하는 의무적인 복무는 점차 사라지고 대신 ‘역은‘(驛銀)을 납부하는 일이 많아졌다. 1490년에 시작된 이런 현상은 1507년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런 개혁과 그 밖의 개혁들이 국가 세수를 점차 현금위주로 바꿔나갔다. 16세기 말에는 실제로 이갑제를 통해 징발되던 모든 요역이 일조편법에 따라 토지에 대한 부가세로 과세되어 은납으로 대체되었다. - P125


콜럼버스의 항해 후 경쟁이 붙은 서양의 제국들은 저마다 앞다투듯 개척을 위해 길을 떠났다. 16세기 초 중국에 포르투갈이 모습을 드러낸 이후 중국은 정화를 보내 해외 원정을 떠나게 한다. 

1513년 포르투갈인들은 라파엘 페레스트렐로가 지휘하는 한 척의 선박을 타고 말라카를 떠나 중국 남부에 처음 당도했다. 두 번째 대규모 원정은 1517년 광저우(廣州)에서 무역을 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포르투갈 왕이 통상관계를 맺기 위해 중국 황제에게 파견한 사절단이 동행했다. 이 외교적 접근은 실패했고, 임무를 맡은 포르투갈인들은 고초를 겪다가 결국 옥사했다. 하지만 은밀한 거래는 양쪽 모두에게 이익을 주었고 유럽의 배들이 중국 연안에 더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중국과 포르투갈의 계절무역이 1549년에 이르러 정기적으로 이루어졌고 무역상들은 마카오 반도의 남서쪽 상촨(上川, 포르투갈인은 상주앙이라 불렀음) 섬에서 접촉했다. 포르투갈인은 그곳에서 마카오로 진출하여 1557년에 합법적인 조약항을 설치했다. 이 조약항은 아주 작았지만, 유럽과 중국 사이의 무역이 장기간 이어지게 한 최초의 발판이 되었다. - P168


자본주의는 특정한 사회 구조와 시장 경제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유럽 자본주의의 진화는 유럽 역사에서만 보이는 유일한 것이다. 사회구조가 다를 경우에는 경제의 발전과정 역시 다르게 이루어진다. 이 부분에서 근세 유럽과 명대 중국사에 대한 해석은 갈라져야 한다. 엘리트 형성의 맥락이 서로 다르고 국가 권력의 영향도 다르다. 명대 후기의 중국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물론 이 말이 중국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자본주의와 다른 어떤 경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경제는 국가의 통신망을 이용하여 지역간 경제를 연결시킨 확대된 시장경제로서, 일부 지역에서는 농촌과 도시의 노동을 연속적인 생산과정으로 조직했다. 하지만 농촌가구가 그대로 기본 생산단위로 유지되었으며 생산과 소비의 완전한 분리는 일어나지 않은 채 소비패턴을 재편했다. 경제의 변화는 더뎠지만 확실하게 신사층 내부에 침투하여 상업에 대한 유교적 경멸을 불식시켰다. 이런 신사층의 변화는 엘리트의 이익이 청대에도 온존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유럽적 의미에서의 자본주의는 아니다. - P263


16세기 후반이 되면 물건을 팔아 돈을 번 부유한 상인과 기존의 지식인층 간에 거리가 무척 가까워진다. 그러나 상인은 지식인들의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 여전히 노력했다. 반대로 지식인은 사-농-공-상 중 가장 낮은 대우를 받는 상인을 더 이상 무시하기 어려워졌다. 

시대는 변했고 신사층은 시대와 함께 변하는 것을 배웠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굴욕감을 느끼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들은 위축감을 느끼지 않고 이익을 도모할 줄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질서의 주인임을 확신했고 심지어 만주에서 온 새 주인에 저항하면서조차 하나의 사회계급으로서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다. - P330


하지만 유교적 질서에 기반한 계급 사회는 명이 무너질 때까지도 존재했다. 상업은 명을 역동적인 사회로 만들어냈지만 구조적 위계는 단단했다. 1642년 만주족이 산둥성에 들어오고 1644년 만주족이 청나라를 건국하게 되지만 명 말의 상업에 기반한 사회 구조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명대는 가뭄, 메뚜기 공격 등 기후 위기와 재난이 특히 많았다. 1538년부터 10년 간 가혹한 기근이 발생하는 등 수 차례의 가뭄이 발생했다. 이런 재난도 농업의 기반을 안정적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한 원인 중 하나가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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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of the World Vol. 2: History for the Classical Child: The Middle Ages: From the Fall of Rome to the Rise of the Renaissance (Paperback, Revised Edition) The Story of the World 18
수잔 와이즈 바우어 지음 / Peace Hill Pr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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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탄자를 타고 나르며 로마의 끝에서 시작한 여행은 16세기 영국과 스페인의 해전으로 끝이 났다. 거의 10년 만에 재독한 책은 역시 초독처럼 느껴졌지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다양한 인물들과 사건을 만나는 일은 흥미로웠다. 그 중 엘리자베스 여왕의 캐릭터와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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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2-25 21: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거리의 화가 님의 성실한 독서에 깊은 응원을 보내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4-02-26 08:5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다락방님^^

미미 2024-02-25 2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완독 수고하셨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2-26 08:50   좋아요 1 | URL
미미님 덕분입니다. 함께 읽으니 그나마도 읽게 되는 것 같아요!ㅎㅎ

독서괭 2024-02-26 0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거리의화가 2024-02-26 08:51   좋아요 2 | URL
괭님 감사합니다. 남은 분량 읽기 화이팅이에요!^^
 
[eBook] 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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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까지 읽는 게 괴로워서 그만둘까 하다가 참아내고 끝내 읽었다. 욕망을 드러내는 인간들은 그러려니 하겠는데 가면을 쓴 위선자는 도무지 용납하기 힘들었다. 자본과 탐욕에 노예가 되는 일은 너무나 쉽고 편견에 맞서는 일은 어려운 일임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에는 연민과 희망이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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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2-25 21: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거 너무 궁금해서 샀는데 거리의화가 님은 벌써 읽으셨군요! 중반까지 읽는 게 괴롭다 하시니, 아 저도 읽기가 망설여지네요. 저도 괴로워할 것 같아서요 ㅠ

거리의화가 2024-02-26 08:43   좋아요 0 | URL
제가 이런 책에 취약해서 그런 것일수도 있어요. 그래도 뒷 내용이 궁금해서 계속 읽게 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