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520번의 금요일 +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 +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의 말을 이어갑니다 - 전3권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사단법인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 온다프레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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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10주년기를 맞아 지금까지의 기록, 인터뷰집, 낭독집을 담았다. 10대였던 아이들이 20대가 되었지만 ‘이미 10년이나 지난 일‘이라고 치부할 수 없음을 절감하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차별과 낙인은 여전히 계속되고, 또 다른 사회적 참사는 계속되기에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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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4-03 0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로 열해라니, 시간이 참 빨리도 가네요 다섯해 지났을 때도 벌써 그렇게 되다니 했는데...


희선

거리의화가 2024-04-03 08:56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시간이 벌써... 그런데 여전히 사건이 해결되지 않았다보니 마음이 여전히 무겁습니다.
 
[세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3 세트 - 전3권 - 제2판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페르낭 브로델 지음 / 까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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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8세기의 물질문명, 물질문명과 모순되거나 이를 보충해주는 경제문명을 일상성의 공간 속에서 살펴본다. 무엇보다 일상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역사로 간주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일상사는 반복되고 또 반복되면서 일반성 혹은 구조가 된다,‘ 다만 단순화하면서 생긴 이슈는 감안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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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3-31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산 사람이… 역쉬 역덕화가님…😭

거리의화가 2024-03-31 18:30   좋아요 0 | URL
ㅎㅎ 쟝님^^ 철학사를 읽고 있어서 연결지점이 많더라고요. 바로 읽게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세계철학사 1 - 지중해세계의 철학 세계철학사 1
이정우 지음 / 길(도서출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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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의 시대에 탄생한 철학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사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좋은 시절에 철학이 탄생하지 않은 것은 일견 이해되는 면이 있다. 불안과 혼돈, 의심과 회의적 시각에서 질문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양의 지중해 중심의 세계는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자연 철학,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그리스 철학이 이슬람으로 전달되면서 사유가 깊어졌다. 중세의 기독교적 일원론을 바탕으로 한 철학에서 르네상스로, 철학에서 자연 과학이 분리되기까지의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철학사는 ‘철학‘사이자 철학사‘이다. 철학사는 철학을 다루지만 어디까지나 역사적 지평에서 다루며, 역사에 속하지만 어디까지나 철학의 역사이다. 때문에 철학사의 서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사와 철학을 어떠헤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 P13


문학도 그렇지만 철학도 지리적, 역사적 배경과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폴리스로 구성된 그리스는 해양 세계에 위치하고 있어 다원론이 자연스러웠다. 이후 서로마가 기독교를 수용하고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중세는 '신' 중심의 철학과 사상이 등장하였다. 페스트로 유럽 전역이 황폐되었을 때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에는 새로운 사유에 대한 질문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 아닐까. 이후 가톨릭 교황과 황제의 대립에서 점차 황제 중심의 왕권 국가주의가 강해지고 자본주의의 발흥, 자연 과학의 등장으로 신 중심의 사유에서 인문주의 철학이 대세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책의 장점은 특히나 동양 철학(자)과의 비교로 사상의 개념과 이론을 더 쉽게 접근하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또한 현실의 문제를 철학자의 이론과 연계하여 설명해주는 부분도 개인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최초의 철학은 철학자 본인의 사유의 산물이겠지만 이후에는 그 철학자의 사유를 보고 고민한 끝에 본인의 의견에 그 의견을 부정하거나 반대, 보충하여 결과물을 만들며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로 흘러가고 근대의 문을 연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전대의 생각을 아예 뿌리채 뽑아내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것이 왜 문제가 되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개념이 탄생했던 조건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x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이해는 그 개념의 탄생 조건들에 대한 이해를 포함한다. 하나의 탄생은 가름/변별화이다. 거기에는 늘 어떤 대립성이 작동한다. 대립, 갈등, 부정, 모순의 장에서 무엇인가가 탄생한다. ‘philosophia‘의 탄생에도 이런 대립성들이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 P841


철학사를 읽으며 그들이 당대의 현실을 보고 고민한 것이 무엇이며, 그 지향점은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는 과정은 힘들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다. 나도 지금의 현실을 보고 미래를 걱정하는 것처럼 그들도 비슷한 고민을 한 끝에 내놓은 결과물을 엿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꽂히는 철학자를 발견하는 재미도 덤으로 챙길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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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3-30 0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은 여기에서 마음이 가는 철학자 찾았나요 이 책 모두 네권이군요 네권을 다 보고 찾을지도 모르겠네요 거리의화가 님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3-31 18:21   좋아요 1 | URL
아직 딱 마음에 들어 파고 싶은 철학자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소크라테스, 자연 철학자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주목하는 걸 보면 삶을 중요시 여기는 철학에 마음이 가는 것 같습니다^^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
이타가키 류타 지음, 고영진.임경화 옮김 / 푸른역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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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작년부터 언어, 개념, 학문 체계와 관련된 책들을 읽었다. 여러 권의 책을 읽다 보면 겹치는 영역이 생기고 그 때는 이해되지 않고 넘겼던 것들이 이해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짜릿함과 성장의 기쁨이 아닐까. 


거의 1년 만에 독서 모임을 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북한의 언어학자 김수경이라는 인물을 파헤친다. 개인의 역사이자 평전이지만 조선어학 이론을 확인할 수도 있다. 서술 방식이 독특한데 역사와 이론을 교차로 배치하여 낯선 인물과 역사, 그의 이론 중 끌리는 부분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 


두 달 전쯤 한국어 맞춤법에 대한 책을 읽었을 때 느낀 바가 있었다. 한글 맞춤법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은 했으나 생각 이상으로 훨씬 복잡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내가 잘못 써온 맞춤법을 마주하며 쉴 새 없이 머리에 돌 맞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하물며 현재 북한에서 사용 중인 조선어는 어떨까. 두음 법칙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고 봐야 했다.


'우리말' 개념은 그것을 상대화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 단어 어디에도 국가를 지시하는 요소가 없다는 점에서, '우리말'에는 분단 상황을 일단 괄호 안에 넣어 탈분단적인 개념이 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겨레말'과 달리,'우리말'에는 민족이나 국민을 나타내는 요소조차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의 설정에 따라 자유자재로 늘릴 수도, 줄일 수도 있다. 

여기에 일본에 사는 나와 같은 일본인이 이 언어를 '우리말'이라고 부르는 것의 의의가 있다. 내가 '우리말'이라고 하는 순간, 위화감을 느끼는 독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 뭔가 '이물질' 내지 '침입자'가 들어온 듯한 감각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위화감도 모두 포함하여 '우리말' 개념의 가능성에 걸고 싶다. 장뤼크 낭시는 동질성과 단일성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의 존재와 복수성에서 공동성을 사고하려 했다. 낭시에 따르면, 전혀 공통성이 없는 특이한 존재들 간에 있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이며, 동시에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특이한 존재가 형성된다. - P6~7

'우리말'과 '우리 나라'는 서로 다른 범위를 갖고 있다. '우리 나라'는 영토와 주권이 단일한 공간이라면 '우리말'은 그보다 더 다층적이고 넓은 범위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렇게 김수경이라는 낯선 인물, 낯선 이론을 만났다. 서두에서 깔기는 했지만 조선어의 이론 부분은 역시 어려웠다. 그러나 이론이 어려워서 힘들다 싶으면 그의 흥미로운 역사를 풀어 놓기 때문에 계속 읽어나갈 수 있었다.


저자인 이타가키 류타는 문화인류학자인데 전작에서 식민지 시기 한국의 상주라는 공간의 지역사를 훓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하필 김수경이라는 개인에게 꽂혔는가 궁금했다. 2009년 연구년을 맞아 보스턴 근교에 머물렀던 저자는 2010년 북미에 거주하는 한반도 북부 출신들과 인터뷰 조사를 위해 캐나다의 토론토를 방문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식사 자리에서 임혜영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그녀의 아버지가 북한에서 언어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임혜영은 당시 토론토 대학에서 외국어 교원으로 근무 중이었고 아버지는 짐작하겠지만 김수경이다. 그 때는 김수경이라는 학자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교토에 돌아왔다가 주변 연구자들에 의해 그가 북한 언어학의 기초를 닦은 학자임을 알게 된다. 이후 그를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본격적인 자료 조사를 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 이 책의 집필의 출발점이 되었다. 


김수경은 1934년 경성제대 예과를 만 15세에 입학하고 1937년 만 18세의 나이에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진학했다. 그는 법문학부에서 철학과를 선택했는데 당시 학부에 언어학 강좌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전공이었다고(그렇지만 그 와중에 순수철학을 공부했다는 게 놀랍다). 김수경은 진작부터 언어학에 관심이 있어서 고바야시 히데오(소쉬르의 이론을 번역함) 연구실을 찾아간다. 그는 일본어학, 조선어학를 넘어선 일반언어학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1940년 도쿄제대 문학부 대학원에 입학하여 4년 간 재학하면서 조선어학자인 이희승을 만나 친하게 지냈고, 또 이남재와 결혼을 한다. 1944년 자퇴를 하는데 조선어학 교수인 오구라 신페의 퇴직, 아내의 임신, 막바지에 이른 전쟁으로 학도병으로 출진해야 하는 상황 등의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 그리고 그는 언어 천재였다고 한다. 무려 9개국어를 했다고. 그가 언어학에 관심이 있었던 이유가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해방 후, 김수경은 경성대학 자치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좌파가 주도한 자치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치위원회 내부에서는 김수경을 조교수로 언어학 강좌를 맡기로 내정했으나 당연히 미군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실제로는 이희승이 맡았다고). 그는 11월 30일자로 경성대학 자치위원회 위원을 사임했다. 이처럼 그는 해방 후에도 좌파 지식인들과의 교류 속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국어국문화보급회, 조선언어학회에 참여하여 언어학 활동은 계속 이어갔다. 북한에서 김일성대학의 창립이 결정될 무렵 남한은 서울대학교 설립 계획이 추진된다. 그는 1946년 5월, 경성제대 동기생인 박시형의 보증으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했고, 김석형, 박시형과 함께 8월 17일 월북했다.


조선어의 문자체계의 터를 잡는 역할을 한 것은 김두봉이다. 김두봉은 한자의 폐지를 실시하고, 풀어쓰기를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1948년 조선어 신철자법에 그대로 반영이 되는데 여기에 김수경도 함께 참여했다. ‘조선어 신철자법’에서 핵심적인 것은 두음법칙의 폐기, 절음부의 도입, 신6자모 도입이었다. ‘토’의 개념도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접사, 의미 중 문법상 의미를 가지는 것만 따로 분류한 말이다. 나는 이 중 풀어쓰기와 두음의 고정 표기, ‘토’의 개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다만 풀어쓰기는 나중에 사용상의 문제로 버려지게 된다. 생각해보라. ‘감’을 한 글자로 표기할 수 있는 것을 ‘ㄱㅏㅁ’ 이렇게 표현하면 글자 수도 3개가 되고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등의 문제가 생긴다.) 


김수경은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20세기가 되면,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이 주류를 잡게 되고 구조주의가 유행한다. 문헌학으로 대표되는 개별화와 구조언어학으로 대표되는 일반화는 근대 언어학의 지향성이 두 축이 되었다. 김수경 언어학의 초기 업적에는 ① 구조언어학, 나아가서는 언어철학 등 좀 더 보편적인 언어 문제에 대한 지향성, ② 조선어에 관한 개별 구체적인 역사언어학에 대한 지향성, 그리고 그 양자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해방 후, 특히 월북 후에는 언어가 '이래야 한다'는 표준을 책정하려는 언어학, 즉 ③ 규범의 창출이라는 실천적인 언어학이 더해진다(P86~87). 


스탈린은 “민족이란, 언어, 지역, 경제 생활 및 문화의 공통성에 나타나는 심리 상태의 공통성을 기초로 생겨난, 역사적으로 구성된, 사람들의 견고한 공동체이다”고 할 정도로 언어의 중요성을 알았다. 이 구조를 실현한 언어학자가 니콜라이 마르와 그 학파였다. 마르학파는 스탈린이 최고지도자 지위에 있을 때 활약했는데 김수경이 여기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지향한 조선어학은 규범화, 구조화에 바탕한 것으로 국제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민족적 자주’ 개념이 강조되면서 조선어 문법에도 변화가 생겼고 관련하여 김수경은 가장 바쁜 세월을 보낸다. 1956년까지 김수경은 김일성종합대학의 ‘과학연구부장’이라는 직위에 있었다. 그는 김두봉의 사상 비판 때 활동에 제약을 받기는 했지만, 계속 교육과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나 1967~68년 김일성 유일 체제가 진행되면서 대학을 그만두고 교육 일선에서 물러나 도서관장을 맡게 된다. 다행히 1980년대 후반이 되면 복권이 되고 그의 업적이 재조명된다. 


간단하게 그의 연구와 업적과 관련하여 설명했는데 사실 개인사는 훨씬 드라마틱하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그는 교육 때문에 진도에 내려가야 했다. 전쟁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아내와 딸들은 이남으로 내려갔고 그렇게 가족은 영영 헤어지게 되었다. 교수이자 학자로 엘리트였음에도 그는 입대해야 했고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기도 한다. 김수경은 1986년에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학술토론회로 주최자였던 최응구의 도움으로 둘째 딸과 재회할 수 있었다. 1988년에 둘째 딸은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1996년 큰 아들과 재회하였고 아내였던 이남재와는 1988년에 만날 수 있었다. 김수경은 2000년 영면한다. 그의 부고가 알려지자 “20세기 남북한을 통틀어 최고의 국어학자 중 한 명”이라는 식자의 언급과 함께 신문에 보도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2006년 ‘동숭학술재단이 선정한 언어학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는데 참으로 죄송한 일이다. 


내가 지향하는 것은, 지역 연구를 포함한 오늘날의 학문 분야를 낳은 식민주의와 냉전이라는 힘에 대해, 비판적인 지역 연구로서의 '비판적 코리아 연구'라고 말하고 싶다. 월러스틴과 마찬가지로 학문 분야의 장벽을 넘어 국민국가를 초월한 분석을 시도하지만, 중요한 것은 단일한 세계체계 분석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등장했을 때의 비판적 계기를 계승하는 것, 즉 식민주의와 냉전이 남긴 틀의 재생산에 봉사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깨뜨리는 앎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작업을 추상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재외 코리안의 경험에 끝까지 접근하면서 앎을 재구축한다는 의미에서 '코리아학'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코리아학이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식민지기부터 냉전기를 거치면서 다양한 정치적 의미가 부여되었던 '조선', '남한', '북한'이라는 카테고리를 일단 괄호 안에 묶어서 다시 생각해 보기 위해서이다. - P12~13


저자는 이 책에서 김수경이라는 개인을 중심으로 한 '전체사'를 그려내려고 했다. 한정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개인의 역사를 온전히 재구성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개인사=전체사'는 당연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시도를 한 것은 한 사람의 역사가 보여주는 다채로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김수경은 20세기 대부분의 시기를 살아낸 인물이다. 그렇기에 조선의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하여 해방 전후, 북한의 현대 시기까지 개인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평전으로는 충분한 평가를 주고 싶다. 조선어학 이론의 기초도 얻을 수 있다. 다만 저자가 말한 대위법적 평전의 시도가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대중을 생각하여 가능한 쉽게 써냈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학문사다보니 개념이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내가 5별을 준 것은 저자의 노고에 감사하기 때문이었다. 자료를 모으고, 인터뷰를 하는 등 추적이 결코 쉽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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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3-26 0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러 나라 말을 잘 아는 사람은 대단해요 여러 가지를 알면 비슷한 점이나 다른 점을 알기도 하겠습니다 북한에서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았기를... 식구들과 헤어진 건 마음 아팠겠네요 나중에 만났다고 해도...


희선

거리의화가 2024-03-26 14:07   좋아요 2 | URL
진짜 천재는 괜히 천재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영어, 중국어 공부만 하는데도 허덕이는데 말이에요^^;
그래도 그 분의 지위가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회를 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돌아가시기 전까지 만나기 어렵지 않았을까 싶어서요.
 
캠브리지 중국사 10 - 하 - 청 제국 말 1800~1911, 1부 캠브리지 중국사 10
존 킹 페어뱅크 책임 편집, 김한식.김종건 외 옮김 / 새물결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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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령 내륙아시아의 이후의 역사는 한족의 정주, 한족화 그리고 전에 비중국적이었던 사회의 보다 큰 중국으로의 통합 등으로 특징지어졌다. 이런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청조가 이룩한 것도 부인해서는 안 될것이다. 내부 반란과 유럽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왕조는 살아남았고 청의 질서는 최소한의 변화만을 허용한 채 계속 유지되었다. 청조가 처해 있던 상황을 고려해볼 때 청이 이보다 더 많은 일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 P610~611


이전 권에서 1800년 경 만주, 몽골, 신장, 티베트와 청의 조정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면 이번 권에서는 1820년~1830년 무렵의 시기를 살펴본다. 특히나 청과 러시아 사이 국경을 둘러싸고 아이훈 조약이 맺어지기까지의 과정이 흥미로웠다. 시작은 다른 내륙 아시아와 마찬가지로 교역 관계의 문제였는데 1854년 크림 전쟁의 발발로 러시아가 영국을 경계하면서 청과의 접경 지역을 더욱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통제하려고 했다. 이 과정을 청은 주도적으로 끌고갈 수 없었는데 이는 태평천국운동으로 내부가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1858년 아이훈조약과 텐진조약을 차례로 맺으며 양국 간 북쪽의 국경선이 정해지고 항구를 개방하며 러시아인에 대한 자유로운 교역을 허용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로서 동북 만주 땅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몽골 유목 사회는 사원 제도가 정착하면서 출가에 따른 남성 인구가 감소하였고 한족 세력이 침투하여 몽골인의 채무가 늘어나 약탈, 걸식으로 내몰리자 일반인들은 빈민화되었다. 몽골의 방목지까지 감소하면서 먹고 살 길은 더 어려워졌고 이에 도시 지역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다. 청 조정도 처음에는 한족이 이 땅에 이주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나 관리를 파견하고 조세 수입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통해 우호적인 입장으로 변화하였다.


몽골 지역에서 청조의 목적은 중국인들의 오랜 목표, 즉 유목민들을 변화시켜 중국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이 점에서 만주족은 성공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몽골인들은 큰 대가를 치러야 했으니, 만주 지역에서 준가르 지역에 이르기까지 인구가 감소했고 가축과 영토 또한 크게 감소했다.

신장에서 만주인들이 원한 것은 평화와 공식적으로 청조 황제에게 복종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동투르키스탄인들은 중국의 영향력이 전혀 미치지 않는 지역까지 뻗어 있는 광대한 이슬람 문명의 성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세계관은 모든 권위의 정점에는 황제가 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제국 질서의 초석에 도전적이었다. 황제는 라마교도가 되지 않고도 라마교의 합법적인 후견인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슬림이 되지 않고서는 무슬림 세계에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 P701


몽골이나 신장과 달리 티베트는 자기 고유의 토착적인 중앙 정부를 갖고 있었다. 티베트의 군사력은 중국에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 결과 만주족은 이 종교 국가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권위를 약화시키기 위해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그의 권력을 강화시켜 주었다. 19세기 내내 달라이 라마 정부의 권력은 증대되었고, 베이징은 외국의 영향력을 배척하고 티베트의 고립을 유지하려는 라싸의 노력을 지지했다. - P702~703


1830년대 신장의 역사는 놀라웠다. 그 지역을 꽉 잡고 있던 세력은 코칸드 정부로 청 조정은 1840년대 난징조약 등 외국 세력과 맺은 다양한 사항을 미리 이행하는 과정을 거쳤다. 치외법권, 최혜국 대우 등의 조항이 있는데 향후 조선이 외국과 맺은 조약에서 볼 수 있는 비슷한 내용들이다. 티베트도 네팔과의  사이에서 코칸드 정부와 비슷한 협상을 거치며 1856년 조약을 맺었다. 


청조는 태평천국운동 세력들을 물리치면서 쌓여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나가야 했다. 증국번은 양쯔강 이남 지역의 농촌에 토지세와 부가세를 줄이면서 농민들이 일상에 복귀할 수 있도록 했고 조정 관료의 부패를 해결하기 위해 인재 선발을 지속적으로 시도하였다. 반면 화북 지방에는 소금 밀매업자인 염군이 활동했는데 그들은 의적을 자처하며 핍박 받는 백성을 구제하고자 일어났고 1868년 무렵이 되면 그들이 화북 전체로 집단화되어 민란이 번진다. 때문에 조정의 입장에서 민란은 태평천국 이후에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세력이었을 것 같다.


메리 클래버 라이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왕조뿐만 아니라 붕괴된 것처럼 보였던 문명 또한 1860년대 걸출한 인물들의 걸출한 노력으로 살아남아 이후 6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것이 동치중흥이다. - P808

메리 라이트의 탁견은 앞으로도 이 시기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청조의 중흥은 "중국의 전통적 제도의 타당성을 다시 한번 주장하기 위한 최후의 위대한 노력을 대변하며 "당시의 위대한 사람들은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 승리를 보았다" 는 것이 그녀의 최종적인 평가이기 때문이다. 이미 1870년대 초 장쑤 성, 산둥성, 직예성 등에서는 구질서가 분명하게 회복되었다. 쑤-쑹-타이 지역의 ‘대호들‘은 탈세를 계속했다. 아역들은 다시 산둥 성에서 활동하기 시작해 세금 징수를 독점하거나 부가세를 착복했다. 거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하층 신사들(심지어 예성의 하층 신사들조차)은 세금 징수인 혹은 말썽많은 ‘송‘ 혹은 송사가 되어 아역과 결탁하거나 경쟁했다. 대규모 반란이 다시 일어나지 않은 것은 대부분 서양식 무기를 이용할 수있게 된 여러 성의 용영, 심지어 재훈련된 녹영군 때문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한편 청조가 관료 인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게 되면서, 총독과 순무가 지방 관원 임명에 대한 역할을 확대시켜 행정적 개혁을 모색하는 것을 가능케 했던 융통성이 점차 제한되었다. - P824~825


2차례의 큰 전쟁을 치르며 청 조정의 관료들은 전통적인 유교식 덕치주의 정치에 대한 한계를 깨닫는다. 이제 과거와는 단절하고 외국 열강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함을 느낀 것이다. 특히나 전쟁에서 확인한 서양의 대포를 비롯한 화기는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이후 그들은 부국 강병책을 위해 서양 무기 수용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게 된다. 물론 새로운 환경에 맞춰 의견 갈등은 있었으나 정도의 차이일 뿐 기본적으로 대부분은 수용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전통과의 단절에 대한 압박은 서양 종교의 포교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기독교 선교회는 일찍부터 청에 들어와 포교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조직 체계를 세우고 청나라 전 지역에 대한 자유로운 이동, 경비 마련 등이 필요했다. 1860년 프랑스와의 사이에서 조약이 체결되면서 중국에서의 모든 기독교 선교가 가능해진다. 그렇지만 과거의 유산은 깊었다. 송나라 시기 이후 기독교는 유가적 세계와 충돌을 일으켰으며 기적에 의한 기독교적 신앙이 정치 전복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낙인이 찍히며 이단화된다. 결국 옹정제 때 기독교 금령이 내려지는데 결정적으로 태평천국운동 세력이 기독교에 배경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더 수용할 수 없는 배경이 되엇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서로에 대한 이해였다. 서양인들이 가진 기독교적 세계관을 청나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으며 반대로 서양인들도 청나라 사람들의 문화, 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서로 다가가지 못한 기간이 이토록 길었던 것이다. 

청나라 말기 선교가 자유화되며 기독교 세력은 확대되지만 중국 내 자리잡는데는 실패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청나라 사람들은 서양의 지식은 수용하고 종교는 거부하는 이중 전략을 펴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10권 상/하권 읽기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처음에는 잘 안 읽혀서 고생했는데 책에 대한 감을 잡고 나니 그 이후에는 읽기가 더 매끄러웠다. 책에서 특히 만주, 신장, 티베트와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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