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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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w: 새벽 세시예요. 북풍이 부나요? 굿나잇.

15분 뒤
세시 십칠분이예요. 서풍이예요. 쌀쌀하고요. 굿나잇.

 깊은 밤 깨어 있을 때가 있다. 적막하기까지 한 시각, 그럴 때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은 오직 온라인뿐이다. 카페에 접속하거나 블로그에 글을 남기기라도 하면 같은 시각 깨어 있는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그 반가움이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러나 익숙한 닉네임도 여전하게 타인이다. 타인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시점은 언제일까. 몇 번의 만남, 몇 번의 통화, 몇 번의 메일로 가능할까. 운명처럼 첫 눈에 반하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공통된 주제가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누구나 영화처럼 운명같은 사랑을 꿈꾼다.

한 통의 잘못된 메일로 사랑이 시작되다? 무엇이 그들을 사랑하게 했을까? 매일 아침 메일함을 확인하면서 스팸 메일로 분류된 낯선 메일을 확인하지 않는 내게 처음부터 끝까지 메일로 이뤄진 그들의 사랑은 설렘을 안겨주었다. 잠에서 깨어 메일을 확인하기 전 기대와 설렘은 메일의 존재 여부로 가능하며, 어떤 내용인지에 따라  설렘의 유지와 절망으로 나뉘게 된다.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일상의 작은 변화를 원했는지 모른다. 상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이름뿐, 점점 상대가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사람은 어떤 음악을 좋아할까, 체크 무늬 셔츠가 잘 어울릴까, 목소리는 어떨까. 은밀한 일탈이 아니라고, 그저 메일로 나누는 우정이라고 선을 긋기도 하지만, 레오와 에미는 서로의 메일에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것은 사랑이라 부르는 감정이었다. 사람의 감정은 사소한 것에서도 상처받기도 하지만, 그 사소함에서 다시 위로받기도 한다.  나는 이미 소설 속 에미가 되고 말았다. 


 <당신에게 메일을 쓰고 당신의 메일을 읽는 시간이 저에게는 일종의 ‘가족타임아웃’이에요. 이 시간이 일상 밖에 있는 작은 섬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그 섬에 당신과 단 둘이서만 머물고 싶어요. 당신만 괜찮다면요. p 149 에미의 메일 중에서>

 <당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상관없어요. 나는 당신의 글과 사랑에 빠졌어요. 당신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돼요. 얼마든지 딱딱하게 써도 돼요. 나는 그 모든 것을 사랑하니까요. p 153 레오의 메일 중에서>

 글에 감정이 있을까? 있다 해도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감정이 있어야 한다.  각자만의 공간은 이제 두 사람의 공간이 되버렸고, 레오와 에미는 서로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연인과 이별을 했고, 어머니를 잃은 레오와 별 문제 없어 보이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에미는 사실, 모두 외로웠던 것이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잠들지 못하는 새벽, 서로를 위한 자장가는 서로에게 보내는 메일뿐.  만나려했던 시도는 물커품처럼 사라지고, 에미가 보낸 메일은 수신자를 찾지 못한다.  그들의 사랑은 다시 서로의 메일을 확인할 수 있는 메일을 갖게 될까?  

 두 사람의 사랑이 위태로워 누군가는 불안해 할 거이며, 누군가는 안쓰러워 할 것이다.  닿을 수 없는, 아니 그럴 수 없는 그 애절함이 더 가슴 아팠다. 바람이 가을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일까, 나도 손편지는 아니더라도 스팸 메일이 아닌 누군가의 메일이 받고 싶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쓰는 글, 편지. 깊은 밤 깨어 있게 된다면, 나는 어쩜 이 책을 만나 같은 마음을 품은 이의 메일을 기다리며 받은 메일함을 클릭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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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7 2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08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화인문학 - 어울림의 무늬, 혹은 어긋남의 흔적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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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人文은 인문人紋인데, 말 그대로 ‘사람의 무늬’를 뜻한다. 그래서 인문학은 인간의 무늬를 살피고 헤아리는 공부인 셈이고, 마찬가지로 인문학의 진리란 인간의 무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설렁설렁 말하자면, 인간의 무늬 속에 진리의 조건을 두게 되면서 철학적 근대가 열린다. 그런데 인문학적 진리의 조건을 이루는 인간의 무늬는 조개껍질처럼 단순한 게 아니라 겹/층을 이루고 있다. 겉무늬가 있는가 하면 속무늬도 있는 것이다.’ p 42

 몇 번을 읽더라도 좋으니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게는 어려운 글이었다. 영화인문학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영화를 통해 김영민 교수의 철학적 해석을 들을 수 있다는 것에 기대가 컸다. 그가 선택한 한국인의 정서와 역사를 잘 살려 낸 한국 영화 27편을 만나는 시간은 얼마큼 이해했냐를 떠나서 즐거운 것이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떠올려 다시 그 감동을 느끼고, 제목은 익숙하지만 내용은 전혀 알지 못하는 앞 선 세대의 흑백 영화를 만나는 것도 생경하지만, 즐거운 경험이었다.

 인문학에 무지한 내가 인간 본연과 그 너머의 ‘어떤 것’을 알려고 하면 무리인 것을 알기에, 그저 우리 삶의 단면을 영화를 통해 만나는 것을 족해야 했다.  <여자, 정헤>로 잘 알려진 이윤기 감독의 <아주 특별한 손님>은 일본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도 만나게 되었는데, 나는 영화가 훨신 느낌이 좋았다. 주인공 보경은 명은이라는 사람과 닮았다는 이유로 명은의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고 낯선 이들과 낯선 곳으로 동행하게 된다. 그곳에서 자신을 통해 명은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보경은 타인으로 선 자신을 보게 된다.  

 보경의 등장으로 곧 장례를 준비하게 될 명은의 집은 들썩이게 되고 그 과정에서 보경은 명은이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저자 김영민은 <아주 특별한 손님>은 ‘자아는 종종 타인을 통해 바뀐다는 소식, 거꾸로 나는 영영 스스로 바뀔 수 없다는 상식을 다시 일깨운다. 타인은 템포다. 인문학 공부의 실천은 그 템포에 응하는 응접의 방식에서 시작되며, 그 템포를 놓치는 자아는 나르시스트와 에고이스트 사이를 우왕자왕하게 된다. 너무 빨리 다가서는 타자는 귀신이거나 괴수이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타자는 메시아가 된다.’p 36 라고 말했다.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를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이어졌다. 

 이병헌의 연기가 돋보였던 <달콤한 인생> 속 보스와 선우는 서로를 믿고 의지했지만, 결국 서로에게 총을 겨눈는 부분에 대해 말한다. 조폭 영화, 명령 - 복종의 수직적 관계지만, 인간대 인간으로 마주했을 때 동시에 서로를 죽여야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했지만, ‘진짜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 보스의 여인을 품었기에, 죽이려 했을까.  오히려 상대를 죽일 수 있는 힘은 ‘진짜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며, 그것을 강박적으로 찾으려는 애착 속에서 오히려 그 진짜 이유를 밀어낸다는 것이라, 설명은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호감이 관계를 구제할 수 없는 곳, 바로 그곳이 우리의 세속입니다.’p 71 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관계의 시작은 때로 아주 사소한 호감에서 시작하지만, 관계를 지속하거나 구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삶이 되버린 일상을 담담하게 그린 <8월의 크리스마스>를 글로 다시 만나니, 정원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다림이 사진관 앞에서 그를 원망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사진이 갖는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부재한 모든 것은 사진으로 담을 수 있으며, 사진 속에서 영원할 수 있다. 짧은 생을 살다가 영화처럼 떠난 영화배우 고 장진영의 환한 미소가 눈에 아른거린다.

 익숙한 제목이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영자의 전성시대>는 예상했던 유쾌한 영화가 아니었다.  1970년대 서울로 상경했던 우리 모두의 언니이자 누나였던 많은 영자들, 그들의 고달픈 삶과 사랑이 슬펐다. 식모로 버스 차장으로 결국, 강간당하고, 팔까지사고로 잃게 된 영자에게 철공소 직원인 창수의 사랑은 지고지순 그 자체였다. 그러나 두 청춘은 사랑이 주는 또 다른 모습인 상처를 보지 못햇던 것이다. 오직, 그들보다 더 앞서 삶을 살아온 김씨만이 앞날을 예견할 수 있었기에 그들의 사랑을 반대한다.   ‘상처받은 자들의 사랑은 그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져가면서 더불어 이루는 호혜의 합작合作이 아니라 그 상처를 덧나게 하고 강박적으로 반복하고 그에 대한 턱없는 비용과 대가를 요구하는 어리석음의 고독인 것이다. ’p 300   한편으로 그들의 화합을 원했지만, 저자의 말처럼 현실은 사랑이 아닌 상처가 더 부각된다는 것을 안다.

 가족에 대해 새롭게, 아니 근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가족의 탄생>이나 <바람난 가족>, 조선 시대 여인의 삶을 그린 <자녀목>도 특히 인상적이었다.  많은 영화들 중에 선택되어진 27편의 영화만이 인간의 무늬(人紋)를 가장 잘 드러낸 것은 아닐 것이다. 저자가 아쉬워했던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통해선 어떤 인간의 흔적을 말했을까, 궁금하다. 

 점점 쇠퇴하고 있다는 인문학, 어렵다는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인간을 다루는 문학,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어디서나 인문학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인문학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면,  장미와 주판 를 만나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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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독서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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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깊었던 드라마의 원작을 보면 김경욱이 많았다. 무척 독특한 소재를 그는 평범하게 풀어내곤 했다. 세련되고 깔끔한 문장과 많은 소설을 써낸 이유로 소설가 김연수와 종종 비교가 되는 것으로 안다. 무척 유려한 문장으로 기억되는 김연수의 자전적 소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와 <위험한 독서>를 나는 같은 느낌으로 읽었다. 

 독특한 상황 설정의 단편 <위험한 독서>는 책으로 책을 말한다. 책을 권하는 사회가 아니라, 직업적으로 책을 권하는 한 남자, 그는 독서치료사다.  울적하고, 의기소했던 한 여자가 독서치료사를 찾아오면서 독자는 은밀한 로맨스를 기대한다.  위험한 독서는 <베티를 만나러 가다>를 떠올렸다. 상대가 읽은 책을 통해 어떤 사람일 꺼라 짐작하려는 행위와 같다.

 그것은 일종의 관음증과 비슷했다. 남자는 자신을 찾아온 여자가 자신의 바람대로 변화하기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독서를 통해 당신이 발견해야 하는 것은 교모하게 감추어진 저자의 개인사나 메시지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니까.’ p 16 독서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라 했지만, 정말 김경욱그러길 바랄까? 

 김경욱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공동의 이야기로 이끌어 내는 재주를 가졌다.
<황홀한 사춘기>, <공중관람차 타는 여자>,<고독을 빌려 드립니다>를 차례대로 읽노라면, 70년대 출신은 모두 추억에 빠져들고 만다. 올림픽 경기가 치뤄지던 88년 재수생이었던 <황홀한 사춘기>속 주인공을 통해 88년 그 해 가을, 송편을 빚던 나를 떠올렸고, 조건을 따져 결혼했지만 행복하다고 자신할 수 없는 <공중관람차 타는 여자> 수진은 다시 한 번 성장통을 앓는 듯 하다. 


 어디, 여자뿐이겠는가. 한 가정의 가장이 된 남자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만, 뭔가 찾고 싶은 이 시대의 가장들의 외로움은 <고독을 빌려 드립니다> 에 드러난다. 그러나 김경욱은 절제하고 조율할 줄 안다. 소설을 통해서 잠시 일탈을 꿈꾸게 하지만 현실을 잊지 말라고 세월이 수진에게 남긴 건 공중관람차에서 곱씹을 추억과 추억을 떠올리며 울 수 있는 자유뿐이었다. p 164,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했다.’ p 196 과 같은 문장으로 슬그머니 압력 아닌 압력을 넣는다. 

 
김경욱만이 쓸 수 있는 섬뜩한 위트도 발견할 수 있다. <달팽이를 삼킨 사나이>,나 <천년여왕> 같은 소설이 내겐 그러했다. 무턱대고 글을 쓰겠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결정하는 남편에겐 요술 방망이라도 숨겨둔 듯한 아내의 이야기<천년여왕>.  전세 자금을 위해 대리모가 되겠다는 아내를 저지할 수 없는 실업자 남편의 삶은 달팽이를 삼킨 것 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을 그린 소설. 쌍둥이를 잉태한 아내가 변화하는 과정은 섬뜩하면서도 무척 흥미롭다.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는 대리모 문제는 놀랍게 번식하는 달팽이로 비유했다면 맞을까.

 무척 매력적인 소설집이었다. 은밀하고 매혹적인 제목의 <위험한 독서>는 김경욱이었다.  소설을 통해 자신을 읽어보라고 과감하게 말하고 있다. 자신을 드러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독자와 더 가까이 소통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니, 책을 읽는 즐거움을 많은 이가 느껴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그가 말한대로 ‘위험한 독서’인 양 은밀하게 읽었다. 또한 그가 말하는 대로 모든 게 책으로 보이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읽는다. 희망에 들뜨지 않고 절망에 굴하지 않고.’ 매일 조금씩 책을 읽으련다. 욕심내지 말고, 읽지 못한 책들이 많다고, 절망하지도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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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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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일곱이 되던 해, 엄마와 처음 단 둘이서 여관에 누웠다. 아주 작은 방이었고, 온돌이었다. 4시간을 서서 시외버스를 타고 도착한 생경한 곳에서 엄마도 나도 긴장하고 있었다.  추웠던 기억은 없고, 엄마의 깊은 한 숨 소리만 기억에 남는다. 열 일곱의 나는 좀 더 넓은 세상을 꿈꿨고, 엄마는 내 고집에 못이기는 척 져주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내게 해장국 비슷한 것을 하나만 시켜 놓고 엄마는 말했다. 자취방을 얻지 못하면 그냥 내려가는 거라고. 맛 없는 밥을 젓가락으로 헤져으며 고개만 끄덕였던가. 아니, 엄마는 말뿐이며, 꼭 자취방을 구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나이의 곱절의 시간이 훨씬 지났고, 엄마는 이제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집을 떠나야 했던 이유는 달랐지만, 외딴방 열 여섯 소녀를 만나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아니다, 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자전적 소설인 외딴방에 등장하던 엄마는 여전하게 살아 있는데,  나에게는 엄마라 부를 수 있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열 여섯, 작가가 되고 싶었던 소녀는 작가가 되었고, 그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나는 여전하게 그 무언가를 동경한다. 내게 주어진 방은 주인집 거실을 돌아 계단을 터고 옥상으로 열린 문을 열면 만나는 작은 옥탑방이었다. 우연하게 집을 구하다 처음 만난 S와 고등학교 졸업까지 3년을 살았고, 대학에 입학을 하고도 몇 달을 혼자 더 살았다. 물론 내가 살았던 시대는 소설 속 열 여섯의 소녀와는 다르다. 그 시절에도 산업체라 해서 야간 학교가 있었지만 가난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컸다.  

 그러나 소설을 통해 나를 보는 것은 감성적인 것이다. 표정이 많지 않았던 시절, 밥 물을 맞추지 못했던 나, 한꺼번에 너무 많이 밥을 해서 노랗게 색이 변할 때까지의 밥으로 도시락을 쌓고, 야간 자율학습이 끝난 밤 조심조심 설거지를 했던 시간이었다. 외사촌과 번갈아 밥을 했던 것 처럼 S와 밥을 나누어서 했다. 공부에 대한 열정도 조금씩 사그라들었고, 내 지식의 크키는 곧 바닥을 드러냈다. 꼭 학교를 가야 했던, 그래서 작가 되어야 했던 열 여섯의 소녀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웠고, 부스스한 퍼머 머리에 낡은 외출복 뿐이었던 엄마에게 참 못된 딸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외딴방은  지금 쪽방촌이라 불리는 곳이었을 것이다. 열 여섯에서 시작해 열아홉 까지 살았던 그 공간을 잊고 싶었던 것은 그 시절을 함께했던 사람들에 대한 아픔 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의 산업 현장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노조에 가입하면 가고 싶었던 학교를 가지 못했던 그 시절, 어린 소녀가 회사를 얼마나 두려워했고, 직장 동료인 노조원에게 얼마나 미안한 마음을 가졌을지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필사하며 소녀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도 짐작 할 수 없다. 유명한 소설가가 되어 그 시절의 지인들은 그저 반가운 마음에 연락을 취하고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워 또 하나의 외땅반으로 숨어버린 그 마음을 알지 못한다. 다만, 혼자이고 싶은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오로지 나 혼자만 숨쉬고 싶은 순간을 경험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녀에게 소설은 무엇 이었을까? 살아갈 수 있는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소설에서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아파하고,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나 아닌 다른 이로 살고 싶었는지 모른다. 신경숙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글쓰기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이 갖는 의미, 소설을 통해 딱지가 내려 앉지 않은 상처에 딱딱한 딱지가 들어앉아 나아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파업이 일어나고, 임금이 체불되고, 동료가 떠나고, 데모에 참여했던 오빠가 다치고, 학교를 떠날 수 밖에 없던 사람들 속에 대학이 가고 싶어 학원으로 학교로 바쁜던 자신이 때론 밉고 싫었을 것이다. 무엇이 되고 싶었던 시절, 그 무엇을 위해 자신을 다독였고, 꿈을 향한 걸음이라 여기며 참아왔던 시간들. 그러나  소설 속 소녀가 사랑했던 희재 언니의 죽음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 될 수 없고, 자신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설령, 그것이 희재 언니의 운명이고 선택이었다 해도 소녀는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그림자와 평생 함께 살아갈지도 모른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순간을 끄집어 내어 글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태어나게 하는 과정이 그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소설이니까 하며 살을 붙였다가 다시 떼어내기를 반복하며 그 시간 내내 열 여섯의 소녀로 살았을 그녀를 만나는게 아프다. 고단한 삶을 살았을 그녀가, 편안 자세로 잠들지 못하는 그녀가, 희재 언니의 목소리를 듣는 그녀가 아프다.

 그 시절, 권력이란 이름으로 약자의 삶을 농락한 그들에게 화가 난다. 그저 웃고 싶었고, 그저 공부하고 싶었고, 그저 합당한 권리를 누리고 싶었을 뿐인데. 2009년, 지금은 어떤가? 여전하게 공권력은 시민앞에 겁을 주고, 여전하게 외딴방이 존재한다. 외딴방이 아니더라도, 열 여섯의 소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 

 신경숙의 소설은 슬퍼서 때로 주저하게 된다. 눈물을 삼키케 하고 가슴에 바람의 길을 만든다. <외딴방>은 <엄마를 부탁해>와 나란하게 고백의 글이다. 해서 더 슬프다.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지만, 그녀의 삶이라서 더 슬프고, 우리들의 삶이라 더 아프다. 열 일곱, 그 겨울을 생각한다. 점점 더 희미해지는 엄마의 슬픈 표정을, 마흔을 바라보는 내가 닮아가고 있다. 내가 동경하는 그 무언가를 다시 꿈꿀 수 있는 나만의 외딴방을 향한 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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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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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껏 이렇게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소설을 시작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이 글을 소설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단지 마땅히 붙일 다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줄거리다운 줄거리도 별로 없고 결말이 죽음이나 결혼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p 9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 독자는 혼란스럽다. 이것이 계획된 도입인지, 그저 소설의 시작일 뿐인지.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의 직업은 작가이다.  저자인 동시에 소설 속 인물인 것을 소설 속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소설의 첫 문장은 ‘서머싯 몸’의 솔직한 표현이며, 소설을 설명하는 게 맞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은 1919년을 시작으로 1929년 미국 경제 공황 시기를 배경으로 미국 젊은이들의 삶을 쓰고 있다. 1차 세계 대전에 조종사로 전쟁에 참가하고 돌아온 래리, 래리의 약혼자 이사벨, 사업가의 아들 그레이, 이사벨의 친구 소피와 그들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쟁에서 죽음을 목도한 래리는 자신의 삶의 전환점을 맞는다. 평범하게 직업을 갖고 결혼을 하는 삶이 아닌 새로운 무언가를 찾으려 애쓴다.  파리에서 2년 정도 공부를 하겠다는 래리이사벨래리를 기다리기로 한다. 그러나 파리에서 다시 만난 래리이사벨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약혼자가 아닌 친구로 남기로 한다.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확실히 알고 싶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도 또 내게 불멸의 영혼이 있는지, 아니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지 알고 싶어.” “하지만 래리, 그런 질문들은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물어 온 것들이잖아. 만일 해답이 있다면 벌써 밝혀졌을 거야.”p 117

 이사벨은 파티를 즐기며 여유롭게 살아온 삶 대신 래리가 선택한 삶을 따라 갈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그레이와의 결혼을 선택한다. 현실적인 삶을 포기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방황하는 청춘들 곁엔 조언자가 있기 마련, 소설에서는 몸과 이사벨의 외삼촌이자 화자의 오랜 지인으로 등장하는 엘리엇이 있다. 엘리엇은 미국인이지만 유럽의 파리나 영국인과 어울리며 살아간다. 엘리엇은 파티를 열어 귀속과 부유 층을 초대해  그들과의 유대 관계를 지속한다. 물론 그는 대단한 경제력을 지녔다. 엘리엇은 조카인 이사벨래리보다는 그레이를 선택한 것을 지지한다. 그에게 래리는 그저 철 없는 이기적인 청년 일뿐이다. 이사벨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려 몸에게 객관적인 평가를 들고 싶어한다. 그럴 때마다 몸은 날카롭게 아사벨의 속마음을 확인시키며 당황케 한다. 

 래리는 여행을 시작한다. 책을 통사 것들이 아닌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얻기를 원한다. 탄광에서 일을 하고, 여행을 하고 인도에서 오랜 시간 머문다. 그는 삶의 본질적 의미, 선과 악에 대한 답을 찾아다닌다.  세계의 경제 공황으로 인해 그레이의 사업은 부도를 맞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엘리엇은 파리로 그들 가족들 불러들인다.  

 다시 파리에서 만난 래리이사벨래리를 보며 이사벨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래리구도자의 모습이다. 살아온 날들을 이야기 하며 자주 어울린다.그러다 우연하게 어린 시절 친구인 소피를 만나게 되고 마약과 술에 찌든 소피와 래리의 결혼 소식을 접한다. 이사벨은 자신과의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래리가 보잘 것 없고 엉망이 된 소피를 선택함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이사벨은 용의주도하게 계획을 짜 소피가 래리를 떠나게 만든다.엘리엇의 유산으로 다시 재계한 이사벨의 가족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방탕한 삶을 끝내지 못한 소피는 죽음에 이른다. 젊은 구도자 래리는 여전하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화자인 몸은 그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대신 한 발 정도 떨어진 곳에서 관찰한다. 소설은 1920년대 파리나 영국 사회의 화려한 예술과 문화를 보여준다.  가면 무도회와 멋스러운 별장, 고가의 의류와 보석으로 지창한 이사벨과 엘리엇, 왁자지걸 시끄러운 식당과 허름한 숙소의  소피와 래리의 대조된 삶은 시대을 반영한다. 소설엔 분명 놀라운 사건이 없다. 이사벨이나 래리의 삶이 특별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선택일뿐이다. 이사벨의 선택과 래리의 선택이 다를 뿐이다. 500쪽이 넘는 책은 예상외로 재미있게 읽힌다. 이것이 작가의 힘일까?  

 대부분의 고전이 그러하듯 <면도날>도 출판에 이어 1946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면도날은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떠올렸다. 전쟁과 세계 공황, 그 안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 같은 시대가 이렇게 다른 느낌으로 묘사될 수 있구나 싶었다. 살아가면서 선택해야 할 많은 것들,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까? 그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일 것이다. 면도날, 제목에서 느껴지는 그 날카로움은 날카롭게 사고하고 선택하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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