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박선경 그림 / 마음산책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소한 것들에 화가 나고 정작 화를 내야 할 일에는 무기력해진다. 아니다. 사소한 것들에도 점점 화를 내지 않는다. 사소한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면서도 말이다. 잘못된 것을 수정해 달라는 요구도 하지 않는다. 바뀔 수 없다는 한계를 경험했다고 할까. 어떤 제도에 대해 혹은 어떤 관계에 대해 열정이 식은 것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버렸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만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 그러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떠올라 화들짝 놀란다. 생각하는 대로 살고 싶어 부단히 노력하는데 자꾸만 무너지니 어떻게 해야 하나. 이기호의 짧은 소설『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속 40편의 이야기도 그랬다.

 

 심각한 사회 문제인 청년 실업을 풍자한「낮은 곳으로 임하라」속 주인공은 강원도 고향집에 같이 가자는 친구를 따라 시골에 도착한다. 맛있는 집밥을 먹여주겠다던 친구는 아버지에게 사업 자금을 부탁하며 자신의 처지가 주인공보다 낫다고 말한다. 어떻게는 취직을 하려고 발버둥 치는 자신을 백수로 전락시킨 것이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낮은 곳을 찾아 나서는 수많은 취업자가 떠올라 씁쓸하다.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과 땀에서 배우라는 말,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점점 무표정하게 변해갔고, 결국은 지금 준수가 짓고 있는 저 표정, 그것이 평상이 얼굴이 되고 말았다.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낮은 곳으로 임하라」, 27쪽)

 

 홀로 노년을 보내는 부모 세대의 쓸쓸한 자화상인 우리에겐 일 년 누군가에겐 칠 년」은 어머니 곁을 지켜주던 개(봉순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아픈 몸으로 자신을 지켜준 봉순이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을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늘어나는 수명으로 인해 노인 복지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는 「봄비」도 마음이 먹먹해진다.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가 계신 요양원에서 전화를 받고 달려가면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의 잠든 곳에 계신다. 아픈 어머니의 기억에 살아 있는 아버지.

 

 공유가 아닌 소유를 원하는 개인주의의 민낯을 보여주는 아파트먼트 세르파」는 서글프다. 고층 아파트 주민을 고객으로 하는 치킨집에 배달 알바를 하는 남자는 일을 시작하면서 높은 시급의 이유를 실감한다. 배달원은 오직 계단만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나 이런 일이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닌지. 행운으로 계단을 오르기 전 엘리베이터 앞에서 주문한 주민에게 치킨을 건네며 나눈 대화처럼 우리는 하나(나)만 생각하고 사는 게 아닐까 싶다.

 

 ‘“글쎄요. 아파트에 사니까 아파트만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아파트먼트 세르파」, 143쪽)

 

 어느 날 갑자기 방을 떠나 베란다에서 생활하던 아내가 감쪽같이 사라진 「아내의 방」과 SNS에서 멋진 남자인 척 살고 있는「남편의 이중생활」은 가족이지만 속내를 알지 못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 같다.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았던 아내와 남편의 허전한 마음을 무엇으로 채우고 달랠 수 있을까.

 

 ‘베란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것은, 바로 앞 동의 아파트의 불 켜진 주방이었습니다. 그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밥을 짓는 다른 많은 아내들……. 아내 또한 그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겠죠.’ (「아내의 방」, 49쪽)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걱정과 고민, 그리고 슬픔의 소리를 듣는 것 같아 어느 하나 그냥 넘길 수가 없다.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데 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직진하는 게 아니라 제자리걸음이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빠르게 걷고 심지어는 달려가는 것 같은데 말이다. 이기호는 그런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울고 웃는 우리네 이야기를 고스란히 들려준다. 때로 함께 웃고 때로 함께 울게 만드는 따뜻하면서도 재치 넘치는 짧은 이야기. 울고 싶은데 참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울어도 좋다고, 웃을 일 없는 사람들에게 한 번 웃으라고 웃음을 권한다. 그러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이누야마 집안에는 가훈이 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그 때를 모르니 전전긍긍하지 말고 마음껏 즐겁게 살자. 그 가훈을 자매는 각각의 방식으로 신조 삼았다. (11쪽)

 

 고민이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는 잠들기 전 아침에 출근할 때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하느라 잠들지 못하고 누군가는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어떻게 고백할까 고민하느라 다른 일에 전념할 수 없다. 타인의 시선에 나의 고민은 보잘 것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민의 당사자에게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다. 어디 고민뿐일까, 모든 일이 그러하다. 에쿠니 가오리의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속 세 자매에게도 저마다의 고민이 있고 나름의 규칙이 있다.

 

 고백하자면 제목에 의지해 나름대로 밝고 명랑한 소설이기를 기대하면서 읽었다. 복잡한 이야기가 아닌 산뜻한 구조로 들려주는 맑은 소설을 말이다. 따지고 보면 전혀 복잡하지 않다. 아빠의 외도로 이혼을 한 부모님을 존중하며 아사코, 하루코, 이쿠코 세 자매가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예상했겠지만 보편적인 그것은 아니다. 소설은 세 자매의 일상을 교차로 들려준다. 그들의 일, 사랑, 그리고 내면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첫째 아사코는 평범한 주부처럼 보인다. 남편을 내조하며 평온하게 방금 다림질이 끝난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러나 아사코의 결혼생활은 불안의 온실이었다. 결혼 2년에 접어들며 시작된 남편의 폭력에 익숙해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사코의 삶엔 생기가 없었고 낮은 자존감으로 그녀의 밑바닥엔 우울과 불안만이 존재했다.

 

 기억은 냉동된 식품 같은 것이라고 아사코는 생각한다. 오래되기는 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냥 거기에 있다. 썩는 일도 성장하는 일도 없다.’ (49쪽)

 

 둘째 하루코는 유학을 다녀와 자신의 분야에서 멋지게 성장하는 커리우먼이다. 사랑하는 남자친구와 동거 중이다. 하루코는 결혼이 아닌 사랑을 원한다. 남자친구의 청혼을 아무렇지 않게 거절하면서 현재의 상태에 만족한다. 그러나 육체에 대한 갈망으로 과거 연인을 만나기도 한다. 하루코는 종종 동생 이쿠코와 만나 술을 마신다. 동생의 연애에 대해 조언하기도 하고 이혼한 부모님과 큰언니의 소식을 듣는다.

 

 막내인 이쿠코는 운전면허학원에서 일한다. 가족에 대한 애정이 커서 엄마에게 매일 안부 전화를 하고 아빠를 정기적으로 찾아간다. 큰언니의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음을 가장 먼저 접한 것도 이쿠코다. 그러나 남자관계에서 있어서는 세 자매 중 가장 독특한 인물이다. 친구의 애인과 사랑을 나누고 다양한 연령의 남자들을 만나기도 한다. 가족조차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이쿠노는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할 뿐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사람을 만나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걸 가장 어려워한다.

 

 세 자매는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사랑에 대한 가치도 삶을 추구하는 방식도 다르다. 세 자매는 서로의 삶을 존중하지만 서로에게 조언을 멈출 수 없다. 어느 누가 언니의 불행을 방관할 수 있으며, 어느 누가 동생의 안정을 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결국 선택은 각자의 못이다. 에피소드로 끝난 가출 뒤에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찾기로 결정한 아사코, 과거 연인의 메일로 남자친구와 다툰 후 이별을 선언한 하루코,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남자친구와의 만남으로 결혼까지 생각하는 이쿠코.

 

 우리는 타인의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나의 삶을 산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 닥쳤을 때 그것과 손을 잡든 싸우든 내가 해야만 한다. 에쿠니 가오리는 세 자매의 삶을 통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캐릭터에 맞는 배경 설정과 담백하면서도 치밀한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기대했던 산뜻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내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즐겁게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때로는 하루코의 말처럼 진지함보다는 그냥이 더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

 

 “인생은 진지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사는 거야.” (3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1월이 되었다. 곧 첫눈이 내릴 것이다. 어제는 새벽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일찍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한 달에 한 번, 내게는 의식처럼 행해지는 일이다. 차가운 바람이 자꾸만 내게로 달려들었다. 적군을 향한 맹렬함이 느껴졌다. 겨울이구나, 생각했다. 하나의 기도를 계속 드린 것 같다. 아니, 다른 기도도 있었다. 무언가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만큼은 이전과는 다른 순수한 인간처럼 여겨진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주한 하늘은 밝은 잿빛이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하늘이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사진을 찍어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따뜻한 무언가를 찾는 계절이다. 장갑, 워머, 덧신. 몸을 감추는 계절이다. 마음을 감추는 계절은 아니었으면. 11월은 분주하면서도 여유가 있다. 아직은 두 달이라는 시간이 남았다는 안도감이랄까. 그 시간에 무언가를 다 채울 수도 없고 무언가를 찾을 수도 없으면서 말이다. 곁에 둔 김상혁의 시집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에는 십일월에 대한 두 편 시가 수록되었다. 같은 듯 다른 십일월을 상상하게 된다.

 

 십일월에 내리는 눈에는 비가 섞여 있어 잠을 자고 나면 꿈의 차디찬 들판을 달리던 가슴에 식은땀이 흐른다네 오늘 우산도 없이 현관문을 두드리던 사람이 내일도 꼼짝없이 눈 속에 서서 떨어야 하는 식이지 누구나 화가 앞에서 발가벗을 용기를 가진 건 아니라네. (「십일월」 ​중에서)

 

 십일월은 내년을 기대하기에도 한 해를 돌아보기에도 좀 이르다. 자동차 정비를 핑계로 부모에게 꾼 돈으로 아이를 지우거나 그런 일을 겪고 내가 개종을 해도 지인들은, 십일월은 참 조용한 달이야, 하고 낮게 중얼거리고는 차를 따뜻하게 끓이기 시작할 만큼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애인과 모텔 전기장판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아버지를 잃게 된 어머니의 나이를 생각하면서. 십일월 우기에 태어났다는 신에 대해 생각하면서. ​(「십일월」전문)

 

 11월의 빛을 생각하며 호퍼의 그림을 보기도 한다. 그림 속 여인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무엇을 바라보고 있느냐고 그곳에서 누구를 기다리는냐고. 이런 놀이 아닌 놀이는 11월과 호퍼의 그림이 있기에 가능하다.  

 

 어제를 보냈고 곧 오늘도 보내겠지. 11월의 날들에 나란하게 걷을 수 있는 이가 있기를 바란다. 손을 맞잡고 발을 맞추며 걷는 다정한 사람이길 바란다. 귀여운 강아지 혹은 도도한 고양이여도 좋겠다.​ 곧게 뻗은 은행나무라도 괜찮다. 밤이 되면 전부를 불태워 빛이 되는 가로등이어도 나쁘지 않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진 왕국의 성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상이 즐거운 건 현실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힘든 상황을 피해 다른 곳으로 마음을 보내 잠시나마 편안해질 수 있는 일. 가상공간으로의 초대인 게임에 빠져드는 이유도 같다. 이곳이 아닌 그곳에서 다른 나로 살 수 있다는 착각. 그런데 정말 그런 세계가 있다면 단 번에 거부할 수 있을까? 우연히 마주한 한 장의 그림이 다른 세계의 통로가 된다면 어떨까?

 

 고교 입시의 부담에서 벗어난 신은 심부름으로 은행에 갔다가 그림 하나를 주워 집으로 가져오고 만다. 돌려줄 기회를 놓친 신은 그림 속 아름답고 신비로운 고성에 빠져들고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손으로 그림을 만지니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림 속 고성에 한 소녀가 갇혀 있다고 확신한다. 자신의 분신을 그려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안 신은 정확하게 그림을 그려줄 사람을 찾는다. 그림을 잘 그리는 동급생 시로타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설명한다.

 

 완벽하게 그림을 그린 시로타 덕분에 둘은 함께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낯선 남자를 만난다. 그러니까 그림의 존재를 아는 다른 누군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림 밖으로 나온 신과 시로타는 그 남자가 만화를 그리는 파쿠 아저씨와 소녀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다. 과연 그림 속 성에 사는 소녀는 누구일까? 그림을 통해 시간의 이동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세 사람은 소녀의 단서를 추적하기 시작하고 10년 전 사라진 소녀였다는 걸 확인한다. 현실에서 사라진 소녀는 방임된 상태였다. 미혼모 엄마와 새아빠 사이에서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소녀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세 사람은 소녀가 스스로 그림 속 성으로 들어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 의해 갇힌 게 아니라 소녀의 선택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설은 좀 혼란스럽다.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로 통하는 그림, 그곳에는 현실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설정, 그리고 그 세계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좀 난해하다고 할까. 보통의 평범한 삶을 사는 신은 그림 속 세계가 아닌 현재를 선택하지만 아버지의 재혼으로 힘든 생활을 하는 시로타는 그림 속 세계를 원한다. 돌아가신 어머님께 성공한 만화가가 되지 못했기에 불효자라 여기는 파쿠 아저씨도 마찬가지다. 현재를 바꿀 수 있는 과거의 세계로 말이다. 그러니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세계가 존재한다면 과감히 다른 세계로 떠날 수 있다는 말이다.

 

 “세계는 많이 있어. 수많은 세계가, 수많은 사상의 선택지 앞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지. 다만 우리는 그 전부를 인식할 수 없어. 기본적으로 자신이 있는 세계에 대해서 밖에 알지 못해.” (322쪽)

 

 단순한 재미를 주는 판타지가 아닌 과거의 선택이 현재의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말하는 소설이라 할 수도 있겠다. 소설에 등장하는 신과 시토라는 고교 입시를 선택했고 파쿠 아저씨는 앞으로 자신의 만화를 그릴지 선택해야 한다.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 없으니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진부한 메시지를 전한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묘한 분위기 설정과 그림을 통한 순간 이동은 대단한 흡입력이라 인정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말에는 독감 예방주사를 맞았다. 작년보다 가격이 오른 백신과 가격이 내린 백신이 있다고 의사는 말했고,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간호사는 주사를 놓은 자리에 귀여운 캐릭터 밴드를 붙여주었다. 동그란 밴드를 보니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예방주사를 맞는 일은 돌아와서 할 일 중 하나였다. 잠시 여기가 아닌 거기에서 생활했고 돌아왔다. 여기를 떠나는 일은 쉬운 일임에도 결정을 내리는 일은 요원하다. 긴 잠에서 깨지 않았고, 짧은 잠에 빠져들었다. 수술 후 처음으로 맥주를 마셨다. 충동적이었으나 신나는 일이었다. 텔레비전의 빛을 의지해 혼자 맥주를 마시며 살짝 취기를 즐기는 일, 맥주 한 캔의 시간, 그것은 호쾌한 웃음을 불러오기도 했다.

 

 거기에서 나는 누군가를 기다렸다. 거기에 내가 있다는 이유로 나를 만나러 달려온 친구¹과 친구². 우리는 만났고, 이야기를 나눴다. 먹을거리를 잔뜩 사들고 도착한 친구였다. 친구¹과 좋아하는 책에 대해 말했고, 어느 공간에 대해 상상했고, 누군가를 떠올리기도 했다. ​어느 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건 나의 일부를 안다는 일이다. 그 일부는 우리를 지탱하는 자양분이고 격려하는 시작점이다. 우리가 말한 책은 이렇다.

 

 

 

 

 

 

 

 

 

 

 

 친구¹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며칠이 지나고 친구²가 왔다. 두 딸의 엄마가 아닌 내 친구로만 존재하는 순간, 긴 시간을 나눌 수 없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더욱 집중해야 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 속상했던 일을 나누었다. 고민과 걱정거리가 해결될 수 없더라도 조금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언제라도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 참 고맙다.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친구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만해진다.

 

 소설과 시를 좋아하고 그것에 조금 더 가까이 닿기를 바라는 독자인 내게 SNS와 언론을 통해 보도된 일들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내가 읽고 간직한 문장들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시집을 정리했다. 누군가는 시는 시일뿐이라 말하겠지만 나는 용납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설을 읽고, 시를 읽는다. 이런 문장을 흠모한다. 친한 동생이 선물한 소설(읽지 않았다)을 넘기다 발견한 문장일 뿐이다.

 

 

 그는 이렇게 두 뺨이 달아오른 채 잠에서 깨어났다. 관자놀이에서 피가 뛰고 몸에서 열이 났다. 서늘해진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자 목련나무 가지들이 마구 흔들리며 진줏빛 꽃들이 솜뭉치처럼 마당에 길게 떨어져 흩어졌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제 달은 없었다. 하늘과 땅에 똑같이 새하얀 흔적들만 남아 있었다. 은하수에서, 부드럽게 빛나는 팔 한복판에서, 참혹한 고통을 겪으며 별들이 태어났다. 꽃들이 떨어져 흩어지면서 그 화사함이 빛을 잃고 향기가 사그라졌다. 마르소는 울고 싶었다. 가차없는 비애가 그를 송두리째 사로잡았다. (『분노의 날들』, 204쪽)

 

 

 우리는 모두 분노의 날들을 살아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