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사람
최정화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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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 때문에 움직이지라는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그 대부분의 사람들에 자신이 속한다고 생각하니까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그건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돈으로 움직일 수 엇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196쪽)

 

 능동적인 삶과 수동적인 삶의 차이는 무엇일까. 누군가는 삶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삶의 주인이 누구냐는 묻는 자체는 우습지 않은가. 저마다의 삶은 주인은 바로 자신이니까. 최정화의 『없는 사람』을 읽고 우리는 모두 능동적인 삶과 수동적인 삶의 경계에 서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없다. 막연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소설은 ‘도트’라는 인물을 감시하며 그의 행적을 이부에게 보고하는 무오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트는 누구이며, 그를 감사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누가 그를 감시하라고 지시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단순하게 무오는 돈을 많이 벌고 싶어 이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신에게 말을 걸고 지켜봐 주며 돈까지 벌게 해주는 이부가 무오는 가족 같았다. 일은 아주 쉽게 여겨졌다. 도트, 그러니까 점을 따라다니는 일은 어렵지 않았고 도트란 인물에게 궁금한 게 없었다. 처음에 무오에게 도트는 하나의 점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점점 무오에게 주어진 일은 커졌고 도트는 점이 아닌 선이 되어가고 있었다.

 

 무오는 이부에게 질문하고 싶은 게 생겼다. 파업 현장에서 노동자의 지도자인 도트가 선창하는 구호를 외치면 외칠수록 도트를 향한 다른 마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시위 진압에 대한 정보를 주고 대비하라고 말하고 싶었고 자리를 이탈하며 갈등하는 도트에게 자신의 역할을 잊지 말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사측에서 고용한 용역이었던 무오는 노동자의 자리에서 그들처럼 살고 싶었던 것이다. 도트의 목소리는 무오의 가슴을 깊게 파고들었다. 함께 파업을 하는 노동자가 되고 싶었다.

 

 진짜가 되고 싶다. 그게 무오의 진심이었다. 농성장의 이들에게 신의를 지키고 싶은 것이, 지부장을 일깨워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상황이 바뀔 거라고 믿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가 되고 싶었다. 진짜로 이들 중 하나가 되는 것. 이들과 다르지 않은 농성대원이 되는 것. 여기에 속하는 것. 온전히 속하는 것. 이들과 다른 점 없이 섞이는 것. 그것을 원했다. (203~204쪽)

 

 무오는 덩그러니 혼자의 삶이 아닌 우리가 되는 삶을 살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들로 인해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삶, 능동적으로 살고 있다는 확신 같은 거 말이다. 돈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을 간절하게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도트, 이부, 그리고 농성장의 노동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떠올릴 수 있는 현장이 많다는 건 아프고 아픈 일이다.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게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소설은 우리 사회의 노동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고발한다. 그러나 결국 그 안에서 만나는 건 개인의 고통이었고 불안한 삶이었다. 불안을 껴안으면서 나로 존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들. 같은 세상을 사는 우리는 소망한다. 수많은 도트가 멈추지 않고 이동하고 있기를 바란다. 점에서 선으로 그리고 면으로 확장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있는 사람으로 존재하기를, 세상 어디에도 없는 사람은 존재하기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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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6-12-13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샀어요!

자목련 2016-12-14 07:47   좋아요 0 | URL
리스트가 겹치는 게 신나고 좋아요!!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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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한 말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대체로 그러하다. 꼭 해야 할 말이기에 고민하고 고민한 후에야 하게 된다. 누군가는 비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존 밴빌의 소설 『바다』를 읽으면서 나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중요한 말, 꼭 해야 하는 말을 하기 위한 연습과 연습을 하는 주인공 맥스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니 누군가에게는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맥스는 아내 애나가 암으로 죽고 50년 전의 어린 시절에 보냈던 시더스로 돌아온다.

 

 돌아온다는 건 맞은 말이 아닌지도 모른다. 애도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상실의 자리를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맥스를 딸 클레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도망치듯 과거로 들어가는 아빠를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시더스였을까. 시더스, 그곳은 그레이스 가족이 머물던 곳으로 맥스에게는 신들의 집이었다.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사는 그레이스 가족이 맥스에게는 신(神)의 존재였다. 맥스는 현재가 아닌 과거로 빠져가듯 소설은 그 시절, 그러니까 맥스가 쌍둥이였던 클로이와 마일스와 함께 어울리던 시절로 초대한다.

 

 ‘숨겨지고, 보호받는 것,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었다. 자궁처럼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어 거기에 웅크리는 것, 하늘의 무심한 눈길과 거친 바람의 파괴들로부터 숨는 것. 그래서 과거란 나에게 단지 그러한 은둔일 뿐이다. 나는 손을 비벼 차가운 현재와 더 차가운 미래를 털어내며 열심히 그곳으로 간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것이, 과거가 어떤 존재를 가지고 있을까? 결국 과거란 현재였던 것, 한때 그랬던 것, 지나간 현재일 뿐이다. 그 이상이 아니다. 그래도.’ (62쪽)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오며가 아내와 그레이스 가족과 보낸 시간을 차분하면서도 선명하게 들려준다. 가만히 맥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 집 앞에 서 있는 것만 같다. 맑고 투명한 여름의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바다 냄새를 상상한다. 나른한 표정을 짓고 바다를 응시하는 그레이스 부인과 새침한 표정으로 맥스를 바라보는 소녀 클로이와 목소리를 숨긴 채 바다를 유영하는 마일스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들의 풍경을 그려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잠시 머물던 하숙집에 불과했던 시더스가 생동감 있게 그려지는 것이다. 적어도 맥스에게 그곳은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아내를 잃고 힘든 시간을 위로하고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을 때까지 죽은 자를 이고 갈 뿐이다. 그런 다음에는 누군가가 우리는 잠시 이고 가고, 그런 다음에는 또 누군가가 우리를 이고 갔던 자들을 이고 가고, 이렇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먼 세대들로 이어져간다. 나는 애나를 기억하고, 우리 딸 클레어는 애나를 기억하고 나를 기억할 것이며, 그뒤에는 클레어도 사라질 것이고, 클레어를 기억하지만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최종적으로 소멸한다.’ (114쪽)

 

 애나와의 이별은 예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삶에서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는 아픔은 예정된 것보다 더 크고 깊은 통증이었다. 맥스에게 남겨진 삶은 그래서 더 힘들고 외로웠고 누군가가 그리웠고 필요했다. 그러나 맥스은 자신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건 새로운 누군가가 아닌 기억과 추억이라고 확신한다. 어쩌면 맥스의 삶은 현재가 아닌 과거를 살고 싶었던 건 아닐까. 성적 호기심에 그레이스 부인을 흠모했던 소년이 자석에 끌리듯 당돌한 클로이에게 마음을 뺏기고 사랑에 빠진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나오기도 전에 맥스는 클로이와 마일스의 죽음과 맞닿는다. 소년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에 누운 늙은 원숭이만 있을 뿐이다.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던 애나를 생각하는 밤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하나가 된다.

 

 ‘밤이다. 고즈넉하기 짝이 없다.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나 자신도 없는 것 같다. 바닷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다른 밤이면 우르렁대고 으르렁거릴 텐데, 가까워져 삐걱거리는가 하면, 멀어지며 희미해질 텐데. 나는 이렇게 혼자이고 싶지 않다. 왜 돌아와서 나를 쫓아다니지 않는 거야? 내가 당신한테 최소한 그 정도는 기대할 수 있는 거 아냐? 왜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그 끝도 없는 밤마다 이런 적막인 거야? 꼭 안개 같아, 당신의 이런 침묵은.’ (228쪽)

 

 따지고 보면 우리 삶에서 영원한 건 없듯 맥스의 삶에서도 그러했다. 삶은 친구처럼 죽음을 데려오고 남겨진 삶은 다시 그 친구를 기다리는 일이다. 잔인한 진실이다. 존 밴빌은 당연하고도 처연한 진실을 너무도 아름답게 그렸다. 아련하게 겹겹이 쌓인 기억의 자물쇠를 열어 바다에 풀어놓았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바다는 시더스를 닮았다. 그래서 나는 이토록 유려하면서도 몽롱하고 어려운 소설에 더 가까이 닿고 싶은 욕망을 키운다. 저마다의 기억에 자리한 시더스를 생각한다. 내가 잊고 있던 시절, 나를 흔든 신(神)이 누구였는지 생각한다. 그리하여 첫 문장‘그들은, 신들은 떠났다.’에 담긴 맥스의 마음을, 그 아름다운 슬픔의 무게를 감당하고 싶다. 결코 헤아릴 수 없다 하더라도, 그러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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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26일에 첫눈이 내렸다. 이곳이 아닌 그곳에 머물렀을 때 만난 눈이다. 사진은 눈이 내릴 당시 놀이터의 모습이다. 제대로 찍지 못했지만 내가 찍고 싶었던 건 눈이 아니라 노란 모과였기에 만족하는 사진이다. 첫눈이 내리고 며칠 뒤에 모과는 한 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도 경비 아저씨가 모두 딴 것 같다. 

 

 첫눈이 내릴 당시 나는 첫눈이 오고 있다는 걸 두 명에게 전했다. 한 명은 김장을 담그는 사진을 보내왔고, 다른 한 명은 늦은 시각에 촛불시위에 다녀왔노라고 말했다. 첫눈을 맞으며 김장을 담근 친구, 첫눈이 아닌 비를 맞으며 촛불을 들고 있었을 언니. 그리고 첫눈은 녹아버렸다.

 

 

 

 

 

 

 

 지난 목요일에 이곳으로 돌아오니 복도의 창문공사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공사라는 말은 거창하다. 뚫려있던 부분이 막히니 답답하면서도 안전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처럼 난간에 고개를 내밀고 밖을 바라보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비가 오거나 많은 눈이 내리면 미끄럽고 얇게 얼음이 얼었던 복도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12월은 김치냉장고를 가득 채운 김장과 함께 풍요로움으로 시작한다. 귤이나 사과 같은 과일이 식탁 위에 자주 잠을 자고 사은품으로 달력을 준다는 온라인 서점의 광고 메일을 받는다. 예쁜 탁상 달력과 함께 온 책은 아니지만 12월에는 이런 책이 함께 있다. 괜히 기분이 맑아지는 정용준의『선릉 산책』, 50명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정세랑의『피프티 피플』, 제목처럼 괜찮은 사람이란 누구일까, 궁금해지는 강화길의『괜찮은 사람』, 겨울에 만나는 윌리엄 트레버의 『여름의 끝』, 아직 도착하지 않은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이 나의 12월을 채운다. 

 

 

 

 

 

 

 

 

 

 

 

 

 

 

 내년을 말하기가 겁난다. 어떤 변화를 기대해도 괜찮을까.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는 소식, 기대해도 좋다는 답을 들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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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6-12-09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권 겹침!

자목련 2016-12-10 14:50   좋아요 1 | URL
황정은과 정용준이 겹치지 않을까, 싶어요.
좋은 소설을 보물선 님과 함께 읽는 즐거움^^
 
오늘처럼 고요히
김이설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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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을 만큼 힘들다고 말한다. 죽을 만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습관처럼 내뱉는다. 내게 주어진 삶이 가장 힘드니까 남들이 어떻게 살든 관망할 여유도 없다. 그게 산다는 일이다. 하지만 때때로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새로운 삶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설령 헛된 꿈이라도 말이다. 돌아보면 그곳의 모든 흔적은 내가 만든 것인데 왜 그렇게 살았나, 후회가 밀려온다. 김이설의 소설에는 후회라기보다는 한탄에 가까운 외침이 있다. 아니, 그것은 비명일지도 모른다. 더 비참해진 삶, 더 잔혹해진 사람들, 소설의 인물들은 지독한 세상을 닮아가듯 비루한 생을 이어간다. 그럼에도 그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간다. 어깨를 짓누르는 절망에 지지 않고 말이다. 그게 삶이니까.

 

 결국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슬픔을 대신 덜어줄 수 없다. 대신 앓을 수 없고, 대신 살아줄 수도 없듯이, 온전히 자기 혼자 버텨내야 했다. (「폭염」, 89쪽)

 

 김이설의 소설은 불편하고 힘들다. 폭행이나 폭력에 대한 묘사의 등장 때문이 아니다. 소설이라는 세계의 끝에 현실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가해자에게 대들지 못하고 자라 아버지의 폭력을 그대로 답습하는 「미끼」의 아들이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교사 아버지의 교묘한 폭언과 자신의 아들의 교육을 위해 재혼한 새어머니의 삶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부고」속 딸에게 작은 기쁨이나 바람은 존재할 수 없었다. 윤리나 도덕이 배제된 게 당연한다. 그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 남편 실직과 빚 때문에 모텔 청소를 하며 버티는 「흉몽」의 아내와 남편과의 불행했던 결혼생활과 이혼 사실을 비밀로 간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비밀들」 의 ‘나’의 부도덕한 행동을 탓할 수 없다. 판단도 그들의 몫이다. 비난의 시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들을 함부로 위로할 수도 없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삶이 타인의 그것이라 우리는 크게 안도하고 쉽게 잊는다.

 

『나쁜 피』를 시작으로 김이설이 직시하는 건 불행한 삶이다. 누구나 알고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애써 살피지 않는 삶 말이다. 이 소설집에서 주목할 점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것이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걸 말하고자 한다는 거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열심히 일하고 정당한 대우를 주장한 파업의 대가로 회사로부터 손해배상 청구를 당한 남편의 자살 후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와 어린 자녀를 둔 여자의 슬픈 독백 「아름다운 것들」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지고 답답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거대한 행복의 궁전으로 들어가기를 바란 게 아닌데.

 

 그런가 하면 아내 정미의 자살에 대해 감당할 수 없었던 남편 윤철의 조금씩 안정을 찾고 오히려 편안해하는 「복기」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집을 장만했지만 오히려 이전보다 더 불안한 일상을 이어가는 「빈집」은 인간의 욕망과 심연을 투영하는 거울과 같다. 윤철은 정미가 죽고 나자 결혼 전 자신 때문에 다리를 절게 된 정미에 대한 자책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행복으로 꾸며진 집의 일부가 될 수 없었던 수정의 슬픔이 멈추기를 바라는 건 나만의 바람일까.

 

 ‘윤철은 정미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것이 윤철이 꿈꿨던 이상적인 남편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취향의 차이, 입장의 차이, 결국 타인이기 때문에 절대 합일될 수 없는 관계의 한계일 뿐이라도 여겼다.’ (「복기」, 257쪽)

 

 ‘수정은 그 순간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행복해서가 아니라,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낀다면 바로 이 순간에 느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햇볕이 꽉 찬 실내는 따뜻했다. 집안은 깨끗했다. 그런데도 뭔가 허전했다. 무엇이 더 필요한 걸까.’ (「빈집」, 317쪽)

 

 모두에게 완벽한 삶은 어디에도 없다. 저마다 자신의 기준에 도달하려 안감힘을 쓰는 거다. 거기에 작은 격려와 응원이 더해진다면 조금이나마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러니 절망에 지지 않는다는 건 그것과의 단절과는 다른 말이어야 한다. 예측은커녕 상상하지 않았던 일들이 벌어지는 삶에서 절망을 끊어낼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우선은 절망에 지지 않고 대등해져야 한다. 설령 절망과 나란히 걷더라도 말이다. 걷고 걷다 보면 그 끝에 절망이 아닌 그 무언가(희망이면 좋을)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버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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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스퀘어에서 우리는 - 창작과비평 창간 50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 당선작
금태현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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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망을 갖는 일은 뭔가 잘 될 거라는 주문을 외는 것과 같다. 그것은 지금과는 다른 삶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은 키우지 않은 게 좋을지도 모른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는 것 같은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소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남들처럼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때때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지만 삶은 멈추지 않는다. 그렇기에 『망고스퀘어에서 우리는』속 화자인‘ 나’ (코피노 청년)가 하루하루를 용케 견디는 게 대견하게 여겨질 정도다. 그 길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도(正道)가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다.

 

 ‘세월은 우리를 대책 없이 성장시키고 있었다. 일년에 키가 10센티미터 자라기도 했다. 또 새해가 다가왔다. 새해 들어 우리는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12쪽)

 

 필리핀 세부에서 살고 있는 ‘나’는 고아는 아니지만 고아처럼 산다. 한국인 아빠는 병에 걸려 죽었고 엄마는 일본인 할아버지를 만나 일본으로 떠났다. 엄마는 아주 가끔 연락을 할 뿐이다. 지역의 특성상 세부의 삶은 관광객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부모의 돌봄 없는 코피노 청년은 공부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닥친 일을 헤쳐나가야 한다. 이제 곧 성년이 되는, 온전한 어른이라 할 수 없는 나이에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러니 세부 유흥가 망고스퀘어에서 사람들이 프러포즈를 할 때 관광객의 지갑을 훔치거나 한인 박사장의 마약 운반 심부름을 한다고 비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나에게 열 살도 훨씬 많은 한국에서 온 누나의 연락은 한편으로는 반가웠다. 엄마처럼 살갑게 아픈 나를 보살피고 연인처럼 안아주는 누나야말로 가족과 다름없었다.

 

 필리핀에서 코피노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코피노를 떠올리면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다문화가정의 아이들과 겹쳐진다. 물론 이 소설이 코피노 청년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내용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저 평범한 듯 특별한 자신의 삶을 사는 누군가의 이야기로 닿을 수 있으니까. 그건 어디에서 살든 많은 청년들이 공통적으로 가족이 아닌 이들과 살고 있으며 불확실한 내일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으니까. 어쩌면 ‘나’가 유튜브에 실패한 영상을 올리면서 돈을 벌 수 있는 건 타인의 실패에 우리가 작지 않게 위안을 받고 있다는 증거 인지도 모른다. 성공한 누군가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누군가도 나처럼 실패의 삶을 살고 있다는 위로 아닌 위로 같은 것이랄까.

 

 실패를 딛고 성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언제나 최악이다. 마약 운반의 발각으로 도망자 신세가 된 ‘나’에게 그 일을 시킨 박사장은 피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 미인대회 출신으로 박사장의 가게에서 일하던 베렌을 찾아오라는 일이다. 베렌의 고향에서 베렌의 어머니와 동생을 만났지만 베렌을 찾는 단서는 얻지 못한다. 좋아하는 여자를 박사장에게 대령해야 하다니. 박사장과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고 놀랍게도 베렌과 연락이 닿는다. 베렌을 박사장에게 인계하는 대신 ‘나’는 엄마가 있는 일본으로 함께 떠나기로 한다. 먼저 일본에 도착해 베렌을 기다리면서 ‘나’는 일본에서 이방인임을 확인한다. 일본의 유흥가에서, 호텔에서, 망고스퀘어를 떠올린다. 세부에서 코피노로 살아가는 자신과 일본인 할아버지와 살아가는 필리핀인 엄마, 박사장을 피해 고향과 가족을 떠나 일본에 온 베렌, 모두가 그러했다. 간절히 정착을 원했지만 부유하는 삶을 이어갔다.

 

 ‘나는 우리 네사람이 가족이라는 둘레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베렌과 엄마가 나란히 주방에서 밥을 짓고, 나는 고등어를 굽는다. 지금처럼 할아버지와 함께 식탁에 둘러앉는다. 음식이 식탁을 구성하는 게 아니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식탁을 규정한다. 가족 중 누군가 잔소리를 하거나 참견할지 모른다.’ (169쪽)

 

 소설은 사실 단순하면서도 평범하다.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이야기, 내가 모르는 삶의 방식, 그 안에서 산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야기에 끌리는 건 주인공의 소망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절망이 아닌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는 소망, 가족을 만들 수 있다는 소망 말이다. 한 공간에서 밥을 먹고 서로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봐 주는 일, 소소한 하루 일과를 나누고 내일을 기대하는 보통의 일상. 세부에 돌아가 망고스퀘어에서 베렌에게 프러포즈를 하는 상상으로도 행복하다.

 

 ‘시간은 느리게 느리게 잘도 갔다. (253쪽)

 

 잔인하게도 현실은 상상에 닿지 못한다.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는 소망은 소망으로 남고 말았다. 그러니 누군가는 소망을 갖는 게, 주문을 외는 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소망도 없는 삶은 황량하고 적막한 사막과도 같다. 사막을 건널 수 있는 힘이 오아시스라는 소망에 있듯 ‘나’에게는 엄마와 베렌이 있기에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어떤 시간을 보내고 어떤 소망을 키우냐에 따라 성장의 크기와 미래는 달라진다는 믿음이 있기에, 그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도 그 시간 안에 그들이 함께 있으면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삶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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