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의 진실
장 필리프 투생 지음, 박명숙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은 저마다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 어느 하나 같은 방식의 사랑이 없고 어느 하나 같은 형태의 사랑이 없다.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똑같이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사랑도 있을 수 없다. 사랑은 언제나 주관적이다. 사랑은 그렇다. 너무 사랑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사랑이 있고 사랑하기에 사랑을 말하지 않는 사랑도 있다. 이처럼 다채롭게 성장하는 유기체와 같은 사랑, 자신의 삶에 자유로운(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마리’의 사랑은 어떤가, 그런 마리를 사랑하는 ‘나’의 사랑은 어떤가.

 

 ‘마리는 지나칠 정도로 열린 창문과 열린 서랍, 열린 트렁크, 무질서, 혼돈, 아수라장, 회오리바람, 움직이는 공기 그리고 돌풍을 좋아했다.’ (13~14쪽)

 

 장 필리프 투생의 『벌거벗은 여인』에 이어 만난 『마리의 진실』속 그들의 사랑은 연약하고 위태로웠다. 무엇 하나 두려울 것 없는 이기적인 마리의 사랑은 유리 같았다. 마리와 ‘나’의 관계는 여전히 선명하지 않다. 어떻게 만나 사랑했는 헤어진 이유도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더 끌리고 그들의 사랑이 궁금하다. 마리를 향한 ‘나’의 사랑을 말이다. 소설에서 ‘나’는 끊임없이 마리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헤어진 연인을 향한 미련이 아니라, 지극한 사랑으로 보인다. 이상하게도 그렇다. 같은 공간에서 눈을 뜨고 잠을 자고 사랑을 했지만 ‘나’는 마리를 떠나 다른 공간에 있다. 운명처럼 마리(같은 이름의 마리)와 침대에 함께 있던 새벽, 마리의 연락을 받는다. 자기에게 빨리 와 달라고, 이유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거절할 수 없다. 마리의 부탁이니까. ‘나’의 마리이므로.

 

 같은 시각 마리의 공간에서 마리와 함께 있던 남자 장 크리스토프 드 G는 위급한 상황에 처한다. 어찌할 바를 모르며 마리는 ‘나’를 찾은 것이다. ‘나’와 나눴던 공간에 다른 이가 있었던 것. 그는 누구일까. 그는 왜 죽음을 맞이한 것일까. 그러나 ‘나’는 마리에게 아무것도 물을 수 없다. 그것은 ‘나’가 마리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비 내리는 밤 마리가 원하는 대로 가구를 옮길 뿐이다.


 ‘우리는 복도에서 동작을 멈추고 가구를 발밑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빛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우린 서로를 이해했고, 서로에게 이해되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랬다. 어쩌면 그녀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부정확한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보다 더 정확한 말도 없을 것이다.’ (54쪽)


 소설은 이제 마리와  장 크리스토프 드 G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어떤 사람이며 두 사람의 만남과 과정을 자세히 말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나’와 마리가 아닌 그와 마리에 관한 것이라니.  그러나‘나’는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알지 못하는 장소에서 벌어진 마리와 그의 일을 들려준다. ‘나’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마리와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장 필리프 투생은 이렇게 독자를 소설 속으로 유인한다.


 ‘나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더이상 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은 더이상 내가 아니었다. 저 남자의 존재가 보여주는 것은 내 부재의 이미지였다. 나는 눈앞에 내 부재를 나타내는 강력한 이미지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며칠 전부터 내가 마리의 삶에서 사라졌으며, 내가 없이도 그녀는 계속 살아간다는 것을, 그녀는 나의 부재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갑자기 시각적으로 깨달은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그녀를 끊임없이 생각했던 것만큼 더 강렬하게.’ (142~143쪽)

 

 『벌거벗은 여인』과 『마리의 진실』속 엘바 섬은 마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공간이다. 애도의 공간이자 치유의 공간이었다.  장 크리스토프 드 G가 죽음 후 마리와 ‘나’는 엘바섬의 저택으로 향한다. 마리와 ‘나’는 동행할 뿐 관계가 회복된 건 아니다. 적어도 마리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상관없다. 마리의 분노와 슬픔을 다 아는 나였으므로. 마리를 향한 ‘나’사랑은 그러했다. 마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나’의 곁에 있든 떠나든. 그녀의 진실을 아는 이는 ‘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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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등 스위치가 고장 났다. 미리 신호를 보낸 건 아니다. 아니 내가 그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제멋대로 불이 켜지고 리모컨은 먹통이 되었다. 건전지를 새것으로 바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관리사무소 직원이 다녀갔다. 리모컨이 아닌 일반 스위치로 교체했다. 낮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잠들기 직전이 가장 불편하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가 바로 리모컨으로 불을 끌 수 없으니 일어나서 벽까지 걸어가서 불을 끄고 돌아와야 한다. 다시 불을 켜야 할 일이 생기면 다시 어둠을 헤엄쳐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벽까지 걸어간다. 그동안 편하게 지냈던 것.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겠지만 아직은 그 과정에 있다.

 

 잠이 오지 않아 다시 불을 켤까 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생겼다. 존재하지 않았던 순간이다. 짧거나 조금 긴 시간, 나는 어둠에 스며든다. 휴대전화로 시각을 확인하고 불빛이 사라진 후 혼자 깨어있다는 생각과 함께 묘한 감정이 발생한다. 가만히 누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둠과 친해진 시간을 만난다. 그런 밤이 계속되면 조금은 외로울 것 같다. 그런 밤이 깊어지면 적막과 슬픔을 느낄 것 같다. 그런 밤을 상상한다. 쓸쓸하면서도 오묘한 밤을 말이다.

 

 어린 시절에는 밤은 무조건 무섭기만 했다. 부모님이 외출을 하셔서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집 밖에 있는 화장실에 가는 것도 정말 무서웠다. 빨리 잠들기 바랐던 시절이다. 내일이 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학창시절, 연애시절에는 영원한 밤을 꿈꾸기도 했다. 이 밤이 사라진다는 게 아쉬워서, 낮보다 아름다운 밤의 끄트머리를 꼭 잡고 싶었다. 잠들고 싶어도 잠들지 못하는 밤은 괴롭다. 이런저런 이유로 잠과 멀어지는 밤. 이상하게도 그런 밤에는 책도 들어오지 않는다. 혼자 밤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혼자가 익숙한 이라도 밤은 묘하게 다가온다. 밤은 감정이 자라는 시간이며 공간이다. ​혼자 있어도 괜찮던 낮과 다르게 많은 생각이 몰려온다. 그 밤을 누군가의 곁에서 함께 보낼 수 있다면 어떨까.

 

 ‘밤을 견뎌내는 일, 누군가와 함께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말하는 거예요.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는 걸요.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그렇죠?’ (9쪽)

 

 『축복』의 작가 켄트 하루프의 유작인 『밤에 우리 영혼은』을 읽노라면 노란 빛이 퍼지는 밤을 상상하게 된다. 각자 아내와 남편을 잃은 두 노인이 함께 나누는 밤.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루를 보내고 싶은 마음. 남편과 사별한 애디가 이웃집 노인 루이스를 찾아가 밤을 함께 보내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말 그대로 밤을 함께 보내는 일이다. 어떤 관계를 시작하자는 게 아니라, 침대에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는 일이다. 밤이 가장 힘들지 않냐는 애디의 말에 루이스는 잠옷과 칫솔을 가지고 밤마다 이웃집으로 온다. 서툴게 서로의 하루를 이야기하는 애디와 루이스. 처음에는 할 말이 없었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소한 일상을 공유한다. 지나온 삶에 대한 깊은 슬픔, 단단하게 묶여진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놓으며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위로한다. 힘든 밤은 사라지고 충만한 밤이 시작된 것이다. 혼자가 아닌 둘이 맞이하는 밤이 겹쳐질수록 외로움이 사라진 자리에 기쁨이 채워진다.

 

 ‘여기 깃든 우정이 좋아요. 함께하는 시간이 좋고요. 밤의 어둠속에서 이렇게 함께 있는 것.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잠이 깼을 때 당신이 내 옆에서 숨 쉬는 소리를 듣는 것.’ (102쪽)

 

 그저 어제와 오늘로 반복하던 하루가 특별한 하루가 되는 것이다. 내 목소리를 듣고 내 목소리에 답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 그 자체로 삶을 충만해진다. 그리고 둘 사이에 애디의 손자가 합류한다. 부모의 이혼으로 할머니 집에 온 상처받은 어린 손자는 자연스럽게 애디와 루이스의 삶에 기쁨을 안겨준다. 손자를 차에 태우고 캠핑을 가고 개를 만나러 가고 둘에서 셋으로 즐거움이 확장된다. 그러나 애디와 루이스의 생각과 행동을 모두 만족하는 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자녀들은 불쾌함을 토로한다. 손자를 맡긴 애디의 아들이 가장 크게 화를 냈고 결국 둘은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고 만다.

 

 어쩌면 애디와 루이스의 남은 생은 외로운 밤만 계속되는 건 아닐까. 환하게 빛나는 낮과 같았던 날들은 지나갔고 길고 긴 밤만이 지속되는 생. 그 밤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저무는 삶은 다른 형태로 변화할 수 있다. 애디와 루이스는 원하는 대로 능동적으로 살려고 방향을 바꿨지만 자녀들로 인해 수동적인 삶으로 복귀했다. 누구나 늙고 혼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애디와 루이스의 우정은 얼마나 고위한가. 사는 게 뭐라고, 당당하게 즐기며 살자고 말하는 사노 요코의 삶과 다르지 않다.

 

 내게는 지금 그 어떤 의무도 없다. 아들은 다 컸고 엄마도 2년 전에 죽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죽지 못할 정도로 일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남은 날이 2년이라는 말을 듣자 십수 년 동안 나를 괴롭힌 우울증이 거의 사라졌다. 인간은 신기하다. 인생이 갑자기 알차게 변했다. 매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건 자유의 획득이나 다름없다.’ (243쪽)

 

 유방암에 걸렸다고 당장 식생활을 바꾸거나 의기소침하는 게 아니라 담배를 피우고 남들 시선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한국 드라마를 열렬히 시청하고 한국을 방문하며  DVD를 모은다. 사는 게 뭐라고 남들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할까. 사는 게 뭐라고 말이다. 그들이 나의 삶을 사는 게 아닌데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인데. 사는 게 별거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무하는 게 아니라 진짜 사는 게 별거 아니니 즐겁게 신나게 살기를, 그것이 사오 요코의 인생철학인 것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삶을 사는 것, 참으로 멋진 인생이다.

 

 우리의 생은 점점 낮이 아닌 밤으로 채워진다. 낮보다 아름다운 밤을 위한 삶을 기대할 수 있다면 밤은 두렵지 않다.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밤. 그런 찬란한 밤에 우리 영혼은, 모든 것을 감싸는 웅장한 힘을 발휘한다. 당신과 연결되는 밤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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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6-28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가 오려나봐요. 날씨가 덥네요.
자목련님 시원하고 기분좋은 하루 되세요.^^

자목련 2017-06-29 11:49   좋아요 1 | URL
매일 비를 기다려요. ㅎ
서니데이 님도 청량한 하루 보내세요^^
 

 

 쌓아두는 책이 늘어나면서 조립식 책장을 들였다. 책장이라기보다는 책꽂이가 더 알맞은 크기였다. 작은 그곳에 책을 꽂아두는 일은 맛있는 사탕의 껍질을 만지작거리는 것처럼 설렜다. 그리고 제법 책장의 형태를 갖춘 책장을 구입했다. 그 이후 그곳을 채우는데 정성을 쏟았다. 같은 크기의 책장을 하나 더 채우고 나는 더 이상 책장에 대한 욕망을 키우지 않는다. 키우지 않는다고, 다짐하고 다짐한다.


 여러 경로를 통해 그곳에 방을 만든 책은 때로 긴 잠을 자다가 떠나기도 하고, 모두 떠나고 혼자 남기도 한다. 아주 가끔 출판사 별로 책을 정리한다. 이런 즐거운 이벤트에 참여하려고 말이다. 내가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출판사의 책은 무엇인지, 이름만 다르고 하나의 출판사에서 나온 열매는 무엇인지, 고유한 이미지를 지키는 출판사의 책도 찾아보고, 시리즈로 유명한 출판사의 책도 찾아본다. 


 이동진과 정혜윤의 신간이 반가운 위즈덤하우스의 책을 찾아보니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책은 바로 이 두 권이다. 임경선의 『자유로울 것과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이다. 책을 찾기 전에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가장 최근에 읽은 이승우의『사랑의 생애, 한귀은의 『그녀의 시간이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었다. 특히 한귀은의 산문을 애정한다. 전미정의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는 친구에게 선물했는데 친구가 읽고 한동안 그 책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원재훈 시인이 만난 작가들의 이야기 『오직 글쓰고 책읽는 동안만 행복했다』를 읽을 때 정말 즐거웠다. 잊고 있던 책과의 추억이다. 내용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그 책을 만났을 때의 부푼 마음이랄까. 책을 읽는 인간은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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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여인
장 필리프 투생 지음, 박명숙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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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하나의 소설을 읽는 일은 한 사람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과 닮았다. 첫인상에 끌렸지만 내내 잘못된 만남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처럼 강렬했던 첫 문장은 끝내 아쉬움으로 남기도 한다. 알고 있다고 믿었으나 알면 알수록 여전히 낯설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사람이 있듯 읽고 있어도 잘 모르겠는 그런 소설도 있다. 어쩌면 계속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만 그 사람을 깊게 알고 사랑할 수 있듯 어떤 소설은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이런 불친절한 책 같으니라고.

 

 장 필리프 투생의 『벌거벗은 여인』속 마리가 그러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여자, 당당하고 대담한 듯 보이지만 여리고 부드러운 감정의 소유자. 그 여자, 마리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마리를 사랑하는 소설 속 ‘나’ 역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그 묘한 분위기를 말이다.  사실 마리의 일생을 다 알려면 장 필리프 투생의 다른 소설을 먼저 읽어야 한다. 작가는 마리의 일생을 4권의 연작소설로 썼고 『마리의 진실』에서는 봄과 여름을, 『벌거벗은 여인』 은 가을과 겨울을 그렸다. 그러니까 나는 마리의 가을과 겨울만 먼저 만난 셈이다. 소설에서 ‘나’는 마리와 연인이다. 어떻게 만났으며 둘 사이의 연애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저 현재는 마리와 헤어졌다는 것뿐이다.

 

 마리는 도쿄에서 독특한 패션쇼를 열였다. 모델이 벌거벗은 채 몸에 꿀을 바르고 무대에 오르는 것, 그것은 꿀 드레스였다. 기이하면서도 이상한 무대. 그런 마리를 ‘나’는 몰래 훔쳐본다. 마리의 의도는 무엇일까. 파리로 돌아온 후 마리와 ‘나’는 여전히 이별한 상태. 그러다 마리는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전화를 했다. 마리는 해야 할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엘바 섬의 그녀 아버지의 저택을 관리하던 마우리치오가 죽었다고 그의 장례식에 함께 가자고 말한다. 그곳은 마리와 사랑을 나눈 공간이며 마리에게 아주 소중한 추억의 공간이다. 가족 같았던 이의 죽음을 애도하러 도착한 엘바 섬에서 그들을 맞은 건 연기였다. 초콜릿 공장에 난 불, 연기엔 초콜릿 냄새가 가득했다.

 

 ‘나’는 그저 마리의 뜻대로 마리가 이끄는 대로 따른다. 아버지의 저택에 도착했지만 스산한 분위기만 감싸고 누군가 허락 없이 공간을 사용한 흔적에 마리는 그곳을 떠나 호텔로 향한다.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는 저택, 그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마우리치오의 죽음은 마리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실감을 안겨주었는지도 모른다. 엉망이 된 마음으로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길을 나서지만 정확한 시간과 위치를 알지 못하는 마리와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창백하고 불안한 표정의 마리는 불쑥 임신 사실을 말한다. 해야 할 이야기였다. 인생은 아이러니하게 죽음과 삶이 동행한다. 마우리치오의 죽음과 마리의 임신 소식.

 

 마리가 오늘 오후 마우리치오의 무덤을 발견하지 못하고, 우리는 장례식 때문에 특별히 파리에서 왔는데도 그녀가 묘지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은, 그녀가 올바른 묘지를 찾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녀가 그것을 찾기 원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엘바 섬에서 머무르는 동안 내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기 때문이 아닐까.’(144쪽)

 

 마리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그들은 헤어진 연인이 아닌 걸까. 엘바 섬에서 사랑을 나누고 이별한 후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가만히 들려주는 마리. 호텔방의 난방설비를 수리해야 했기에 그들은 호텔을 나오고 도착한 곳은 저택이었다. 그들이 머무를 곳은 오직 그곳밖에 없는 것처럼.

 

 ‘나는 현재와 과거의 시간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마리가 새벽에 내 방으로 나를 찾아왔던 지난 8월말과, 못질한 덧문으로 창문이 막힌 이 밀폐된 방의 완전한 어둠 속에서 마리의 품속에서 흔들리는 지금을 동시에 살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에 속한 장소와 인물들과 우리의 감정은 모두 똑같았다. 오직 계절만이 달라져 있었다.’ (161쪽)

 

 나는 마리에 대해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녀가 견뎠을 상실과 슬픔을 알지 못한다. 마리와‘나’의 사랑도 그렇다. 그들을 둘러싼 계절은 흐를 것이고 삶이 계속될 거라는 분명만 사실을 기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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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덥다, 여름이니까. 그래도 더위가 너무 빨리 온 것 같다. 바람이 그립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나는 작년에 선풍기를 사용한 날이 많지 않다. 그러나 올해는 장담할 수 없다. 마트에서 할인하는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넣어두는 날이 많아졌고 국이나 찌개를 끓이지 않는다. 대충, 먹는다. 대충, 살고 있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그래도 아직까지는 아침 산책을 나가고 성경을 읽고 짧은 기도를 드린다. 나를 위한 기도, 병원에 있는 언니를 위한 기도, 누군가를 위한 기도. 기도가 참 좋다는 걸 새삼 깨달는다. 기도를 하는 동안 나는 단순해진다. 복잡한 것들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걸 느낀다. 기도는 어렵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아주 짧다. 책도 읽는다. 김영하를 만났고 젊은작가(강화길, 박민정, 최은영, 김금희, 백수린)의 소설을 읽는다.

 

 완벽한 여름을 위해 비가 필요하다. 도대체 비는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주말에 많은 비를 만나고 싶다. 아주아주 많은 비. 빗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여름밤. 완벽한 여름, 쏟아지는 비, 김애란의 소설과 박준의 산문, 김엄지의 소설도 다시 읽어도 좋겠다. 그리고 황인찬의 시를 곁들이면 그럴듯한 여름이지 않을까.



 여름 연습

 

 

 무정한 포유동물과 무심한 조류들이 이곳에는 많았는데

 무료한 식물들을 손 내밀어 만져 보면

 왠지 소름이 돋았다

 

 나는 걸었다

 

 흐르는 땀을 의식하지 못하는 채로 새인지 벌레인지 우

는 소리를 듣지 못ㅎ는 채로 숲길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 채로

 

 이 여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격발되는 것이 있다면 격발되는 것이고 죽어 가는 것이

있다면 죽기로 된 것이다 총소리가 들릴 이유가 없는데 총

소리가 들리는 것은

 

 또 어떻게 된 것일까

 

 나는 계속 걸었고 나는 계속 먹었고 나는 계속 쉬기만

했다 그러다 보면 총소리가 또 다시 들려왔는데 쓰러지는

것이 없었다

 

 무고한 벌레들이 내 눈으로 자꾸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하면 좋을까 할 수 있다면 좋을까

 정말 그럴까

 

 인간으로 있는 것이 자주 겸연쩍었다

 

 무엇인가 자꾸 내 눈 밖으로 나오려 했는데 완전히 망가

지니 이 여름 속에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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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7-06-22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 산책과 기도, 그냥 이 단어만으로도 청량감이 들어요.

자목련 2017-06-22 11:44   좋아요 0 | URL
여름이라는 계절의 옷을 입었기에, 더욱 그렇겠죠.
blanca 님, 더위와 친하게 지내는 여름이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