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섹타겟돈 - 곤충이 사라진 세계, 지구의 미래는 어디로 향할까,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올리버 밀먼 지음, 황선영 옮김 / 블랙피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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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다. 아는 사람만 알 정도로 그 속도가 느렸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조금만 주변을 둘러보고 한 번쯤 관심을 갖는다면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르고 무섭게 변하는지 알 수 있다.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는 것들,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들, 그 안에 곤충이 있었던가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손에 꼽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다. 곤충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말이다. 그렇게 많았던 곤충을 찾기란 어렵다. 언제 어디서 곤충을 보았는지 기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가디언>의 환경 전문 기자로 활동하는 올리버 밀먼의 『인섹타겟돈』은 그런 곤충에 대한 이야기다. 곤충 실태 보고서, 곤충의 미래, 더불어 인간의 미래를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곤충과 아마겟돈의 합성어인 ‘인섹타겟돈’은 ‘여섯 번째 대 멸종’을 말한다. 지구 안에서 사라지는 생물체는 많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갖는 대상은 판다나 돌고래 같은 크고 인기 있는 동물에 불과하다. 곤충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해충이라 여겨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꾸준하게 곤충을 관찰하고 번식과 생존에 대해 연구한 이들이 있다. 그들이 수집하고 기록한 것들을 통해 얼마나 심각한 위기에 놓였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이 책을 통해서 만나기 전까지는 그저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그로 인해 꽃가루를 모으고 수정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정도만 인식했다. 고백하자면 그것이 나의 일상을 위협할 정도라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읽은 『반드시 다가올 미래』와 마찬가지로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가 무척 심각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더불어 곤충의 가치나 역할에 대해도 알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 만났던 곤충, 심지어 잠자리도 최근에는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개미를 본 게 언제였던가.


책을 통해 알게 된 곤충의 역할은 너무도 크고 대단했다. 딱정벌레의 경우는 이렇다. 나무가 쓰러지면 나무를 씹어서 쉽게 분해하고 이 과정에서 곰팡이가 나무에 자리 잡을 수 있다. 그리고 나무의 질소와 인이 퍼져나가면서 숲을 나무도 다시 채우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딱정벌레는 다른 곤충을 잡아먹으면서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한다. 이런 딱정벌레가 사라진다고 하면 기후 위기를 극복하는데 어려움이 생긴다. 하나의 개체가 사라진다는 건 그 자체로 먹이사슬과 먹이그물에 영향을 미친다. 


곤충의 멸종을 앞에 두고도 100만 종 이상의 곤충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기도 쉽지 않다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신속한 대응하다. 곤충의 서식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을 때 살충제를 사용하지 않으면 일부 종의 개체 수가 증가하면서 수질이 개선되고 생태계의 다른 기능도 활성화될 것이다. 곤충이 사라지면 곤충을 잡아먹는 새도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 


곤충의 위기가 지닌 역설적인 면은 재앙이 어떤 식으로 닥치든 그 여파를 감당해야 할 존재는 곤충이 아니라는 것이다. 곤충은 종의 구성만 달라질 뿐 삶을 이어갈 것이다. 하지만 지구상에 남은 생명체 대부분은 기반이 흔들리면서 허우적거릴 것이다. 따라서 ‘곤충 보호’라는 목표를 내세우는 대신 새, 식량 공급망, 인간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돌려야 할지도 모른다. (115쪽)


곤충은 어쩌다가 이렇게 인간에게 관심 밖의 대상이 되었을까. 이름만 들어도 혐오스러운 바퀴벌레는 어떤가. 끈질긴 생명력을 인간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연구 성공률이 높아지고 있다면? 사실이 그렇다. 해로운 미생물을 막기 위한 특정 단백질을 생산하는 바퀴벌레. 이 단백질이 인간을 위한 신약을 개발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곤충은 인간과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나비, 나방, 거미, 반딧불이를 찾을 수가 없다. 빨라지는 봄으로 인해 곤충의 생활 주기도 불안정해지고 여려 생물 사이에는 상호 작용이 위험해진다. 기후변화 때문이다. 도미노처럼 차례로 흔들리는 것이다. 생태계가 균형을 잃고 무너지는 걸 예상할 수 있다.


곤충의 중요성과 그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는다. 고릴라 한 마리에는 연구자 5명이 있지만 곤충 연구자의 경우 한 명의 연구자가 5만 종의 곤충을 연구하다고 한다. 거기다 곤충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효용성을 증명해야 하는데 이에 대해 여전히 인식과 공감대가 매우 낮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나라별로 또는 개인이 보호구역을 만들고 그 안에서 보호를 하고 생태학적 혁명을 시도한다. 영국의 남동부의 ‘넵’(knepp)은 곤충과 다른 여러 동물을 죽이지 않는다. 여러 측면에서 농장이라 보기 어렵지만 인간의 개인을 최소화하고 자연이 주도적으로 땅을 이용하게 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운영자 작물을 더는 재배하지 않고 초식동물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놔두었다. 이런 환경을 이용해 넵은 내면 유기농 고기 75톤을 판매하고, 생태 관광객을 받는다. 이런 시도는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자연이라는 도구를 재도입하는 게 최선이라는 걸 알려준다. 문득 ‘자연은 사람 보호, 사람은 자연보호’라는 표어가 떠오른다. 


제왕나비 수백만 마리가 전나무를 뒤덮다 보니 나비의 주황색 날개 때문에 나무의 초록색 침엽이 가려질 정도였다. 나뭇가지에 앉은 나비도 있었고, 바위투성이 땅에서 햇볕을 쬐는 나비도 있었다. 그리고 근처에 자라는 식물을 먹으면서 영양을 보충하는 나비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마치 백일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바람이 불더니 나비 떼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나비들이 하늘을 향해 떠오르면서 나무 주변을 쏜살같이 날아다녔다. (341쪽)


저자가 방문한 나비 보호 구역의 한 장면을 묘사한 문장은 황홀하면서도 아름답다. 보호구역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모습이라는 게 슬프다.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벌과 여러 수분 매개자를 대신할 로봇 곤충의 역할을 기대해야 할까. 책은 곤충의 위기를 극복해야 일은 놀라울 만큼 간단할 수도 있다며 그저 몇 가지 행동을 그만두면 된다고 말한다. ‘행동에 나서지 않는 것, 즉 자연을 덜 다듬는 것’(351쪽)만으로도 충분할지도 모른다고. 


곤충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말하면서 인간이 함께 공존하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아쉬운 점은 사진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방대한 정보와 지식을 단번에 흡수하기는 어렵지만 나 같은 독자에게 곤충에 대한 관심을 불러오게 만든다. 더 이상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기후, 환경에 대해 배우고 알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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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1-20 1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은 책 같아요.
관심있는 분야인데 실행을 못하네요.
저희 동네에 지난 번 러브벅그인가가 갑자기 많아져서 동네주민들이 약 치라고 민원넣고 한동안 시끄러웠는데 저는 참 마음이 안좋았습니다. 피해도 안 주는데 징그럽고 보기싫다는 이유로 다 죽이라니 슬펐어요.
바퀴벌레 진짜 극도로 싫어하는데 그 징그러운 것이 단백질 생산실험에 큰 역할을 한다니 놀랍네요.
곤충이 건강해야 다른 종들도 건강하게 번식할텐데 말이죠.
곤충의 중요함을 일깨워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23-01-25 09:32   좋아요 0 | URL
쿨캣 님, 명절 잘 보내셨나요?
말씀처럼 알차고 좋은 내용이었어요. 곤충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고 현재 우리 환경의 현실에 대해서도 생각하고요. 꽃 피는 봄에 벌들이 가득 날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오늘 진짜 춥네요. 따뜻한 하루 이어가세요^^
 
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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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어젯밤에 눈이 내렸다. 많은 양은 아니고 살포시 내려앉은 정도다. 겨울이니 눈이 오는 건 당연하지만 눈에 대한 감각은 저마다 다르다. 내게 눈은 어린 시절 사춘기의 치기로 시작된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그 즈음 그 시절을 벗어나고 싶었다. 마땅히 갈 곳도 없고 가출은 생각조차 못 했는데 눈이 내리던 겨울에는 이상하게 눈을 따라 어디론가 가고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건 지금 그때의 나를 포장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십 대의 시골 촌 아이가 어디를 갈 수 있었을까. 용돈의 개념도 없이 그냥 학용품이 필요할 때마다 돈을 타 쓰던 아이. 엄마에게 참고서 가격을 부풀리는 대범함은 잃지 않았다. 혼이 난 기억은 많지 않으나 괜히 뾰로통해서 집 박을 서성이곤 했다.


막상스 페르민의 소설 『눈』 을 읽으면서 왜 과거의 나를 찾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의 부모는 내가 무엇이 되기를 바란 적이 없고 내가 되려는 것에 대해 반대한 기억도 없다. 시인이 되겠다는 유코에게 승려인 아버지는 시는 직업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며 흘러가는 강물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유코의 재능은 뛰어났고 그는 시를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시인의 생을 택했다.


눈은 시이다. 눈부신 흰빛의 시. (16쪽)


열일곱 소년이었던 유코에게 눈은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다. 그것은 시가 되었다. 시를 탐닉하던 그에게 세상은 단 하나의 시였다. 그 중심에 눈이 있었다. 그러니 겨울에만 시를 쓸 수 있었다. 그에 대한 소문은 퍼지고 원한다면 궁정시인이 될 수도 있었다. 유코는 7년 후에 왕을 뵙기로 한다. 유코는 천재였을지도 모른다. 눈을 바라보며 눈을 감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으니까.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눈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눈을 지닌 천재 소년. 그만의 감성은 모두를 감탄하게 했으니까. 그러니까 소설이 발표된 1999년이라면 이 아름다운 소설에 감탄했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나는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할 수가 없다.





눈은 현실의 더러움과 추함을 감추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이미지로 제격이다. 찰나의 아름다움, 어느 순간 사라지고 마는 환상의 빛, 백색이 주는 황홀감, 그것을 사랑의 순수로 연결 짓는 탁월함을 막상스 페르민는 알고 있었다. 미소년 유코를 통해 아름다움을 탐하는 인간의 욕망을 그는 잘 표현했다. 성장과 동시에 욕망의 크기에 따라 배움도 함께 커진다는 사실을. 


시에 색채를 더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유코 내면의 욕망을 일으켜 세웠고 동력으로 작동한다. 스승을 찾아 떠난 유코는 일본 알프스를 지날 때 눈 속의 한 여인을 마주한다. 수정처럼 투명한 관 속에 있던 죽은 여자. 눈 속에 갇힌 여자,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이 더해진 것이다. 영민한 독자는 알게 된다. 그 죽은 여인이 유코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말이다. 


유코가 만난 소세키 선생은 눈이 먼 장님이었다. 눈이 먼 사람이 색을 가르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빛은 내부에 있고 자신 속에 있다는 스승의 말은 너무도 당연하다. 파랑새가 바로 곁에 있다는 걸 모르고 평생 찾아다니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처럼. 유코는 스승의 예술이 단 하나의 사랑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유럽에서 온 줄타기 곡예사 여인 네에주(neige 눈)을 어떻게 만나 사랑했고 어떻게 잃게 되었는가를. 눈 속에 잃어버린 스승 소세키의 사랑을 제자인 유코가 찾게 되는 과정은 운명이라고 말해도 좋다. 눈으로 시작된 인연, 유코의 시에 이제 색채가 입혀질 것이다. 


“시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시쓰기라는 줄 위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일일세. 삶의 매 순간을 꿈의 높이에서 사는 일, 상상의 줄에서 한순간도 내려오지 않는 일일세. 그런 언어의 곡예사가 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일세.” (100쪽)


눈(雪)이라는 아름다운 소설을 쓰기 위해 프랑스 작가는 일본의 하이쿠를 접목시킨 시도는 훌륭하다. 막상스 페르민는 결국 사랑이라는 걸 말하기 위해 시의 형식과 눈의 이미지를 데려왔다. 사랑은 눈처럼 아름다운 한 편의 시라는 걸 짧은 소설로 각인시키기에 충분하다. 사랑을 하는 건 시를 쓰는 것처럼 어렵고 영원한 사랑은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을 위험하고 위태로운 일이라는걸. 사랑과 시에 대한 정의는 각자 다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서로 사랑했다.

줄 위에 머물러 있었다.

눈으로 지어진. (124쪽)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만 오래 갇힐 수 있는 아름다움은 아니다. 내가 메마른 감성의 독자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십 대의 순수했던 소녀 감정을 불러오기에 지금의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시선으로 눈을 바라본다. 헤어 나올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 슬프다. 너무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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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 기자의 할 일, 저널리즘 에세이
김성호 지음 / 포르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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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진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프로그램 <저널리즘 토크쇼 J>를 챙겨보던 때가 있었다. 신문을 구독하지 않고 포털에 올라온 기사를 대충 보던 나에게 <저널리즘 토크쇼 J>는 색다른 충격과 동시에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기자가 취재를 바탕으로 있는 사실 그대로 기사를 쓴다고 믿었던 나는 너무 순진했다. 우리가 읽고 있는 기사는 데스크나 광고주의 압력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되기도 하고 아예 삭제되기도 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독자의 기자에 대한 인식은 정의감 혹은 사명감 같은 걸 부여받은 직업군이라고 여기지 않을까.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는 그저 직장인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파이낸셜뉴스> 기자로 6년간 일한 김성호의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는 기자의 일상이 무엇인지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무엇인지 솔직하게 들려준다. 고백하자면 기사를 검색하거나 궁금했던 기사를 읽으면서 기자의 이름까지 읽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문학 관련된 기자의 이름과 대중문화 칼럼을 쓰는 기자의 이름만 기억한다.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는 기사가 어떻게 작성되고 어떻게 독자에게 전달되는지 그 과정을 과감 없이 들려준다. 기획하고 취재하고 진실을 보도하겠다는 기자의 마음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기사의 편집과 송고, 그에 대해 기자가 느낄 박탈감과 무기력이 서글프게 다가온다. 기자로의 신념을 지키는 일 대신 가볍게 내려놓은 일이 얼마나 쉬울까. 타사의 기사를 복사해서 그래도 기사로 내보내는 일, 광고를 교묘하게 기사(애드버토리얼)로 둔갑시키는 일, 남들이 다 쓰는 기사를 왜 쓰지 못하냐고 타박 받으면서도 자신의 글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수없이 많은 제보를 받고 그중에서도 얼굴을 꼭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제보자. 제보를 들으면서 기사가 되지 못할 거라는 알면서도 그 말을 끊지 못하는 시간. 그런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 사회에 많은 이들이 억울하고 속상한 것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이가 없다는 걸 확인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기사가 될 수는 없겠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까지 기사가 되지 않는다면 진실은 은폐되고 말 것이다. 


두려운 건 무책임함이었습니다. 저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생기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등 돌리고 도망치긴 싫었습니다. 시민의 ‘알 권리’에 기여하며 그로부터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기자의 자부심도 무적의 방패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129쪽)


저자가 가장 열심히 취재한 기자는 수술실 CCTV 사건이다. 뉴스를 통해 경악을 금치 못했던 사건, 대리 수술은 물론이고 오직 돈을 위해 수술을 감행했던 의사,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진실을 위해 모든 걸 거는 사람들을 취재하면서 저자는 세상을 변화 시키는 일에 일조했다. 법을 만드는 일의 시작은 누군가의 작은 관심에서 시작된다는 당연한 사실과 그 바탕에 언론의 힘을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최정규의 『얼굴 없는 검사들』이 떠오르고 최근 드라마 <트롤리>에서 법을 개정하기 위해 언론의 힘을 등에 업어야 한다는 주인공의 대사도 생각났다. 


‘단독’이라는 말로 독자의 클릭을 유도하고 똑같은 기사지만 다른 신문사에서 다룬 기사를 모두 다루고 수정할 원고도 수정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기자의 글은 더 이상 독자의 클릭을 얻을 수 없다. 일, 직업, 직장인이라는 개념에서 기자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기자가 아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기자 본연의 일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들에게 저널리즘이란 무엇일까 궁금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기자의 할 일과 독자가 좋은 기사를 읽고 응원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하게 만든다. 


기사는 독자에게 다가가 비로소 완성됩니다. 기자의 목표는 제가 공들인 기사가 마땅히 읽을 만한 이에게 읽혀 의미 있는 정보가 되는 겁니다. 좋은 기사와 좋은 독자의 만남이지요. 말하자면 쏟아지는 단독 기사의 홍수 속엔 언론의 절망과 희망이 모두 깃들어 있습니다. (226~227쪽)


나 역시 <단독>이란 말머리가 붙은 기사를 클릭하는 경우가 많고 기사의 제목만 보고 기사 내용을 읽지 않을 때도 많다. 포털에 구독한 언론사의 기사만 보게 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때로 그 모든 일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싶은 마음이 든다. 지난해 일어난 이태원 참사를 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진실을 향한 기자의 취재가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수없이 많은 장벽이 있더라고 그 앞에 여전히 문을 두드리는 기자가 많기를 바란다. 


일반 독자에게도 좋은 눈이 필요하다.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란 책이 그 눈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막연하게 기자라는 직업군에 대해 혹은 기자 정신에 대해 궁금한 이들에게 현장에서의 하루하루를 담담하게 들려주는 이 책은 훌륭한 교과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혹자는 겨우 6년의 기자 생활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저자의 진실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글을 읽는다면 달라질 것이다. 


기자는 남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일입니다. 언제나 풀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귀를 기울이고 함께 돌을 던질 수는 있지요. 그런 직업이 세상에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들이 멀찌감치 떨어져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차가운 세상에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직업이란 얼마나 귀한가요. (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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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1-17 14: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경계해야할 책 영업사원이 여기 또 계셨네... 이 글 읽고 보관함에 넣었습니다. 😆

자목련 2023-01-18 11:31   좋아요 0 | URL
은오 님의 눈에 영업사원으로 보이다니 영광이에요!

서니데이 2023-02-07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3-02-09 10:35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지난주 중반부터 심드렁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심드렁하다는 말에 기대고 있는 게 맞다. 의욕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저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따지고 보면 계기가 있다. 다만 그것을 모른척할 뿐이다. 이러다 말겠지 싶은 거다. 내가 나를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기겠어 하는 마음 말이다. 읽고 있는 책들이라 제목을 달았지만 이제 정신 차리고 읽어야 하는 책 들이라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몇 주째 예배 참석도 하지 않고 온라인으로도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 나의 흩어진 마음이 좀처럼 모이지 않는다. 어제는 참석을 할 수도 있었는데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가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어영부영 시간을 끌다가 결국 집 소파에 안착하고 말았다. 아무튼 요즘 내가 좀 그렇다.






그래도 책들을 읽으려고,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기 위해 포스팅을 한다. 기자의 일상에 대해 들려주는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는 거의 다 읽어가고 있고, 겨울과 잘 어울리는 『눈』은 지금 읽어야 제 맛일 것 같은데. 리뷰대회 참여도 하고, 읽을 수 있을까? 『어른 이후의 어른』이란 제목이 끌리는데 살짝 넘겨보니 저자가 글을 쓰는 나이가 나보다 한참 어려서 살짝 고개를, 그러다 어른 이후의 어른을 찾거나 만나는 건 각자 다르니 미리 편견을 갖는 거구나 싶고. 














그러나 오래전 어떤 언니와의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당시 나는 어려운 상황에 있었고 그때 내 형편을 살피고 도와준 언니였는데 우리 큰언니와 나이가 같았다. 그런데 당시 도움을 주었던 언니는 결혼을 했고 딸아이가 둘이 있었는데, 그 언니와 같은 나이의 큰언니는 결혼을 하지 않아서 큰언니를 언급할 때마다 아가씨 언니라는 말을 했었다. 이제는 연락이 끊겼고 도움을 받았던 그 언니는 나를 잊었겠지만 나는 여전히 고맙고 감사하다. 아마도 어른이라는 말 때문에 그때가 생각난 것 같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나는 큰언니라면 어떻게 할까,라고 생각한다. 내게 어른은 큰 언니였던 것일까. 심드렁한 나에게 큰언니는 뭐라고 할까. 정신 차리라고 할까,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둘까. 


큰언니 생각이 나는 건 명절이 가까워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잊어버리지 말고 큰언니 사진 액자의 먼지를 닦아야겠다. 알라딘 새로운 플랫폼 개설을 했다. 아직은 기존의 글을 옮기는 수준이다. 뭔가 새로운 걸 쓸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럴 수 있을까?

 https://tobe.aladin.co.kr/t/lilymagno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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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3-01-16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참 심드렁했어요. 지금도 다시 에너지가 올라왔다고 할 수는 없지만...그냥 사는 게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에너지 많던 과거의 내 모습이 타인처럼 느껴져요. 자목련님의 읽고 쓰는 일에 다시 생기가 더해지기를 바라봅니다.

자목련 2023-01-17 09:16   좋아요 0 | URL
단순한 즐거움을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말씀처럼 이게 다 뭐라고 싶은 마음도 들고. 생각이 많아서, 혹은 생각이 아예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좀 서글퍼요. 그래서 이런 글까지 쓰고 말았나 싶으면서도 블랑카 님의 댓글을 받으니 고맙고 감사하고요!

레삭매냐 2023-01-16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난주에는 책읽기에 좀
소홀하고 심드렁했던 것 같습
니다...

어제부터 다시 ㅋㅋㅋ 읽고
있습니다.

일단 이사벨 아옌데의 <바다의
긴 꽃잎>부터 마저 다 읽은 다
음에 새로 나온 살만 루슈디의
<무어의 마지막 한숨> 읽을 계
획입니다.

자목련 2023-01-17 09:17   좋아요 1 | URL
다시, 이게 중요합니다. 다시 읽고 다시 즐거움을 찾는 일!
심드렁은 던져버리고 책을 잡아야겠지요?

은오 2023-01-16 14: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계속 쓰고 지우고 하고있네요. 아, 그럴때 너무 힘들죠. 차라리 의욕은 넘치는데 시간이 없어서 괴로운 시기가 나을 정도로요. 계기가 있으시다니... 기운 내시라고 하기도 뭐해서 얼른 그 시기가 자목련님을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자목련 2023-01-17 09:19   좋아요 1 | URL
은오 님, 감사해요. 이런 시기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겠지요. 곧 다시 만나더라도 말이에요. 이 댓글로 말씀드리기는 이상하지만, 어제 <누울 수 없으면 실외다> 글, 참 좋았어요!
 
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들었다
김미월 외 지음 / 다람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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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태어나고 존재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사라지고 나를 부르는 이름, 사회적 위치와 역할에 충실하게 된다. 아이였을 때에도 학생이었을 때에도 나는 조금씩 사라지고 만다. 그러다 사회인이 되고 결혼이라고 하게 되면 누군의 남편, 아내, 아빠, 엄마, 며느리, 사위로 완전히 변한다. 자의가 아닌 타의 혹은 강제적으로 말이다. 누군가 선택했으니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고 할지도 모른다. 여성의 경우 아이를 낳으면 모성애까지 부여된다. 그러나 모성애는 준비땅 하면 바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 출산과 양육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고 관여할 수도 없다. 구체적인 도움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그에 맞는 도움을 주기까지, 사회적으로 제도를 마련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하는 여성에게 육아는 이전과는 다른 생의 최고 어려움이다. 조력자가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엄마라는 역할을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정확한 방법, 노하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과서나 선배가 있더라도 아이는 저마다 기질이 다르고 양육 환경도 다르니까. 그저 누군가 아이를 키우고 돌보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정신적 위안을 준다. 맘 카페의 위력을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여기 글을 쓰는 직업으로 삼은 엄마들의 이야기 『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들었다』는 전업주부 혹은 일을 하는 엄마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도 있고 반대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양육과 일을 하는 건 같지만 글을 쓰는 일의 어려움은 일하는 엄마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엄마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모두에게 공통적인 고충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도 그랬어 하고 말을 덧붙이고 지금 그 과정에 있는 여성에게 일종의 동지애를 전할 것이다. 그에 반해 글 쓰는 일이 아닌 다른 직업의 엄마에게는 다른 일에 대한 이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독자에게는 좋아하는 작가의 근황이나 한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던 이유가 출산과 양육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시간이다.


김미월, 김이설, 백은선, 안미옥, 이근화, 조혜은 여섯 여성 작가는 모두 엄마이며 글을 쓰는 작가다. 엄마와 작가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글쓰기에 대한 절박함과 작가란 정체성의 고민과 삶에 대한 이야기는 때로 눈물겹고 때로 가슴이 저리고 때로 답답하다. 이혼을 하고 혼자 아들을 키우는 백은선은 닥치는 대로 글을 쓰고 시인이지만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친다. 시를 쓰는 것만으로는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들은 전부다. 그러니 글에서도 밝힌 것처럼 좋은 엄마여야 하고 좋은 엄마로 보여야 한다. 왜냐면 아이의 아빠에게 양육권을 빼앗기면 안 되니까. 


나는 지금 잠든 아이 곁을 몰래 빠져나와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두운 새벽에 혼자 깨어 있는 이런 시간이 없다면 낮 시간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관계에서든 함께 있기 위해서는 홀로인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백은선, 15쪽)





누군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럼 글이 아닌 다른 일을 선택하라고 말이다. 쓰는 일이 아닌 다른 직업을 찾으라고. 어느 작가 가족에게 아직도 소설을 쓰냐는 질문을 받는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당시에도 유명한 작가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글을 쓰는 일은 돈벌이도 안 되고 살림과 육아를 잘 하면 그만이라는 숨겨진 의미를 독자인 나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글은(문학포함 모든 예술) 엄마보다 우위 할 수 없는 일로 치부되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기에 나는 작가들의 마음과 고뇌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전해지는 그 간절함에는 조금 다가갈 수 있었다. 아이를 낳고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면서도 소설 쓰는 일에 대한 갈망은 당연하다. 그 과정에서 순간순간 엄마로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아니가 수없이 자책하는 마음, 당사자가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 어떻게든 소설을 쓰고 싶어서 주말마다 서울에서 친정인 춘천으로 갔다는 김미월 작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전하며 그로 인한 기쁨과 함께 시를 쓸 시간이 나지 않지만 아이로 인해 배우고 성장하고 있다는 안미옥 시인.


아이가 잠들기만을 기다리며 그 이후의 시간에 무엇 쓸지 차곡차곡 새겨 넣다가 아이와 함께 잠들고 속상해하는 마음, 한 손에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아이가 유아기를 지났다고 해서 수월할까. 그건 아니다. 엄마라면 모두 알 것이다. 어린이집에 가고 학교에 들어가고 새 학년을 맞을 때마다 챙겨야 할 것들은 늘어난다. 소설 쓰는 엄마를 둔 덕에 자신의 책장까지 침범하는 엄마의 책, 소설 쓰느라, 마감에 시달리느라 아이들에게 이해를 구했던 모든 것들이 미안한 김이설 작가. 그가 두 딸들에게 전하는 말은 세상의 모든 딸과 여성에게 건네는 말 같아 이 부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큰아이 희원아. “너는 네가 되렴.” 작은아이 효명아. “너도 네가 되렴.” 나도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김이설은 ‘김이설’이 되고, 김지연은 ‘김지연’이 되렴. (김이설, 114쪽)


엄마로의 삶과 글 쓰는 삶,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없다. 그 두 가지 모두 ‘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두를 잘 해낼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엄마로도 최선을 다하고 글 쓰는 이로도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저 그들이 바라는 건 그 자신으로 살기를 바라봐 달라는 것, 어떤 강요도 어떤 책임도 전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남은 저자는 바로 시인 조혜은이다. 


나는 엄마로서도 시인으로서도 자주 실패한 하루를 산다. (조혜은, 152쪽)


두 아이를 낳고 양육하며 시를 쓰는 시인. 조금이라도 엄마가 더 같이 있기를 원하는 아이들, 엄마와 시인이 아닌 아내 역할을 해주기를 원하는 남편. 솔직하게 자신의 하루 일과를 낱낱이 드러내며 쓴 글은 뽀족한 송곳이 되어 가슴에 박힌다. 시를 쓰는 삶을 꿈꾸며 문학 안에서 만난 이와 꾸린 가정에서 어떤 순간 어떻게 자신을 잃어버리는지 들려주는 그 글에서 나는 그와 함께 절망하며 한없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쓸 거라는 걸 알기에 나는 독자로 그를 응원하고 싶다. 그리고 그의 시를 찾아 더 자주 더 꼼꼼하게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유일한 사랑을 묻는 아이에게, 온전한 사랑을 바라는 아이에게 언젠가 말해주고 싶다. 모든 사랑은 불안을 껴앉고 사는 거라고, 불안하니까 서로를 꼭 껴안는 거라고. 오늘도 아이를 꼭 껴안은 가슴으로, 당신과 잡았던 손으로, 아프고 망가진 몸으로 쓴다. 나에게도 내가 필요해서, 나는 나를 데리고 가는 중이다. (조혜은, 185쪽)


어디 글 쓰는 엄마에게만 엄마로 사는 게 어려울까. 결코 아니라는 걸 안다. 쓰지 못한 몸으로 잠든 엄마들,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고 잠든 모든 엄마들, 나만을 위한 시간이 간절한 엄마들.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해 자책하는 엄마들은 잠들어도 잠들지 못할 것이다. 엄마가 아닌 ‘나’로 살아가는 시간에 그들이 더 행복하면 좋겠다. ‘나’로 사는 일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엄마로 살아가는 일도 가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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