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리스트의 아들 - 나의 선택 테드북스 TED Books 1
잭 이브라힘.제프 자일스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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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알고 있다. 아이의 성장에 있어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이다. 가르치지 않아도 부모의 언행을 고스란히 익히고 따라서 하는 아이를 보며 놀라곤 한다. 양육자의 태도와 가치란 양분을 먹고 아이는 자란다. 스스로 판단을 할 수 없는 어린 나이에 부모는 단 하나의 거울이자 세상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일곱 살 잭에게 아버지 다정한 사람이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어머니는 자애로운 사람이다. 신앙심이 깊은 이슬람인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1990년 미국에서 유대인 랍비를 죽였다. 그랬다. 잭의 아버지 엘사이드 노사이르는 테러리스트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누명이라며 모든 걸 부인한다. 면회를 갈 때마다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기도하고 있니? 엄마한테 착하게 굴고 있니?”라고 말할 뿐이다.

 

 노사이르는 유대인 랍비 살인 혐의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범죄 목적의 무기 소지와 폭행은 유죄를 받았다. 그리고 경악할 사실은 1993년 2월 뉴욕 세계무역센터빌딩 화재 역시 테러였고 감옥에 있던 노사이르가 계획하고 도왔다는 것이다. 노사이르는 잭이 알고 있던 아버지가 아니였다. 테러리스트 노사이르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아야했고 폭언과 조롱을 온몸으로 견뎌야만 했다.

 

  ‘안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나 누군가 우리의 정체를 알아냈다. 우리가 노사이르 가족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두려움과 굴욕감이 다시 찾아왔고 우리는 또 이사했다.’(73쪽)  

 

 그럼에도 잭은 열두 살까지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감전 사고로 화상을 입은 아버지가 미국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은 이슬람을 향한 신앙이었다는 걸 알기에. 그러나 어린 잭이 알 수 없었던 사실이 있었다. 노사이르가 지하드 운동의 중심에 있다는 걸 미국인과 이스라엘인을 향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는 걸 몰랐다.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했지만 시련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새로운 가족이 생겼지만 새아버지 아메드의 폭력에 시달렸다. 미국을 떠나 이집트에 머물렀으나 행복하지 않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고통의 시간을 지낼 수 있었던 건 누나와 동생, 그리고 강한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잭에게 모스크는 언제나 옳은 존재였고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것이 가장 무서운 편견이었다는 걸 잭은 알게 되었다. 편견 없이 자신을 바라봐 준 친구가 있어 잭은 새로운 용기와 힘을 키울 수 있었다. 테러리스트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잭은 그들에게 누구의 아들이 아닌 그냥 잭이었으니. 만약, 잭에게 그런 친구가 없었다면 잭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테러리스트의 아들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폭력을 삶의 수단으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스스로 대단하게 내세울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는 저마다의 화두가 있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의 화두는 누구에게나 선택의 기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증오를 훈련받았어도 관용을 선택할 수 있다. 공감을 선택할 수 있다.’ (28쪽)

 

 담담하게 자신의 지난 삶을 들려주는 잭의 이야기를 들으며  선택이 아닌 주입식으로 스며든 모든 것들이 불러온 결과가 얼마나 끔찍한가 생각한다. 더불어 편견과 섣부른 판단이 무서운 독을 품은 화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는다. 부끄럽게도 나 역시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전체가 아닌 일부만 보고 진실인 양 믿었고 다른 방향으로 보려고 하지 않았던 적이 많았다. 우리 스스로가 공감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리는 경우는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하니 무섭다. 공감은 증오보다 힘이 세다는 잭의 말에 응원을 보낸다. 더불어 공감을 선택하고 퍼뜨리는 하나의 방법으로 많은 이들이 작은 책을 읽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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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비는 더 이상 신선한 소재가 아니다. 더불어 기피 대상도 아닌 듯하다.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잘생기고 멋진(?) 좀비를 만나왔기 때문이다. 좀비는 한국소설에서는 익숙한 존재가 아니었다. 김중혁의 장편소설 『좀비들』을 읽었지만 그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닌 그리운 존재였다. 여기 우리가 만났던 이전의 소설과는 다른 좀비 소설이라 할 수 있는 한차현의 『Z : 살아있는 시체들의 나라 』가 있다. 생존을 위해 인간을 먹고사는 좀비, 인간의 적으로 살아가는 좀비, 그런 좀비로 인해 돈을 벌고 영원한 생을 꿈꾸는 좀비 같은 인간, 인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의 이야기다. 한차현은 인간의 탐욕의 결과로 좀비를 탄생시키고 공간과 시간을 오가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번째 공간은 샤워실. 눈을 뜨니 지저분한 샤워실에 갇혔다. 목에는 개 목걸이처럼 강철 벨트가 있고 주변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누가 대체 이런 곳으로 납치했는지 알 수 없다. 곁에 있는 사람도 믿을 수 없다. 그래도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있는 여섯 뿐이다. 아니, 자세히 보니 한 명은 죽었다. 서로를 견제하며 살피는 중 좀비가 등장한다. 좀비로 인해 그들은 서로 힘을 합친다. 납치와 좀비 사이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있을까. 최초의 좀비는 누구였을까.

 두 번째는 서울 도심의 넓고 화려한 파티장. 가면으로 자신을 가리고 알몸으로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로 한국에서 명예와 부을 자랑하는 상류 사회의 최고 VIP. 한국을 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가면 무도회와는 다른 난잡하고 퇴폐적인 파티다. 그리고 그 가운데 누군가를 노리는 킬러들. 그들은 좀비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이제 좀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 의사 김건호(가네야마)의 아픈 딸 활란이 등장한다. 김건호는 딸의 치료를 위해 금기의 방법을 동원하고 활란은 좀비로 살아남는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이 암시하듯 좀비의 탄생 과정에 일본의 생체실험과 731 부대의 잔혹한 만행이 연결된다. 좀비에게 공격을 당한 이는 좀비가 되고 이 과정에서 김건호도 좀비가 되어 한국 근현대사 곳곳에 등장하여 현재의 거물로 존재한다. 여전히 40대 모습으로 말이다. 좀비 바이러스로 돈을 벌고 사람들을 납치하고 실험하며 도구로 사용한다. 그러니까 파티장에서 킬러가 노리는 인물은 바로 김건호.

​ 한차현은 좀비라는 소재를 빌려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한국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한다. 가면 뒤에 숨겨진 실체가 그러하듯 추악한 민낯을 보여준다. 실존 인물의 등장과 역사적 사건의 교묘한 배치가 흥미롭다. 이런 종류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색다른 재미가 아닐까 싶다. 납치된 사람들을 좀비로부터 구해내고 김건호와 상대하는 Z와 전문 킬러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점은 좀 아쉬웠다. 좀비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정통 좀비 소설이 아닌 한국형 좀비 소설이라 말하면 어떨까.

 세상에 놀랄 일은 없다. 뭐든 터지고 나면, 그것이 어떠한 사건이건 어느 정도 필요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고 만다. 세상을 변화시킬 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 세상의 질서다. 그것이 이 나라의 정의다. (372~3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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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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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저마다의 삶을 산다. 나는 나의 삶을 살고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산다. 두 개의 삶이 겹쳐질 때도 있다. 삶과 삶 사이에 사랑이 존재할 때, 지향점이 같을 때다. 그렇지만 두 삶이 온전히 포개어지는 건 아니다. 아니, 우리네 삶이란 결코 그럴 수 없다. 서로 같아지려고 노력해도 결국엔 어느 하나의 그늘 속에 다른 하나가 머물게 된다. 때로는 아주 작은 부분만 남겨두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기도 한다. 내 삶은 나를 위해 존재하고 당신의 삶은 당신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단순하고도 명료한 진리를 우리는 생의 전체를 걸고 찾으려 애쓴다.

 

 니나와 슈타인의 생도 특별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사랑했고 그래서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아니 하나가 되기를 포기했다. 니나와 슈타인은 극명하게 달랐던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도 달랐다. 그러니 지독한 사랑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주제로 보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현재의 사랑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때문에 시간이 지나 니나 앞에 도착한 슈타인의 일기는 애절하고 비통하다. 차마 그 사랑을 읽을 수 없어 니나는 자신을 보러 온 소설 속 화자인 ‘나’를 통해 그것을 읽게 만든다.

 

 슈타인과 니나가 다르듯 니나와 ‘나’도 다르다. 지루할 정도로 평탄한 삶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나’가 폭죽처럼 터져버리는 삶을 살아가는 니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의 그것을 대신한다. 슈타인과 ‘나’가 니나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서다. 중심에 서야 하는 삶, 절망을 이겨내야 하는 삶, 누군가가 아닌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삶 말이다. 그런 니나를 슈타인은 지지했고 사랑했고 잠시나마 결혼이라는 제도를 빌려 그녀를 소유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니나는 스프링 같았고 예측할 수없는 곳에서 튀어 올랐다. 아니다. 슈타인은 그녀의 삶을 예측할 수 있었다. 스무 살 어린 니나의 열정을 슈타인은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1930~1940대 독일에서 니나가 삶을 산다는 건 해야 할 일과 사유해야 할 것들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이다. 슈타인을 사랑했지만 니나는 스스로 사랑은 아주 미세한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절박한 상황에서 심지어 자살을 기도했을 때에도 니나가 의지하고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슈타인뿐이었다. 나치즘과 싸우는 니나의 정치적인 행보는 아주 위험했지만 그녀에게는 유일한 선택이었고 옳았다. 그 선택을 위해 얼마나 많은 내적 갈등(우리가 삶을 극복하면 좀더 높은 삶을 얻는다는 것이 사실일까?, 71쪽)의 시간을 보냈을지 누구도 짐작할 수 없지만 말이다.

 

 니나는 왜 모든 걸 혼자서 감당하고자 했을까.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유, 고독, 절망, 고통을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 답은 오직 자신의 삶 가운데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언니였던 ‘나’도 니나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느라 버거웠다. 산다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그래서 니나의 연락을 받고 동생과 짧은 시간에 대화를 나누며 슈타인의 일기를 읽는 동안 지난 삶에 대해 돌아볼게 된다. 자신이 살아온 삶은 과연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니나의 삶을 통해 생을 생각한다.

 

 ‘온갖 아름다움이란 것이 일시적이고 다만 얼마 동안 빌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 그리고 우리가 인간들 틈이나 나무와 극장과 신문 사이에 있으면서도 마치 차가운 달 표면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은 누구나 다 우울하지.’ (65쪽)

 

 ‘인생은 끝없이 펼쳐져 있는 풀밭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내가 있는 힘을 다 짜내야 하는 네 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일 뿐이야.’ (69~70쪽)

 

 니나가 읊조리듯 던지는 단호한 말들이 내게로 스며들어 박히고 만다. 슈타인의 일기를 모두 읽고  ‘나’가 흘린 눈물을 흘린 것처럼.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그녀가 보고 싶다. 더 알고 싶다. 그녀는 분명 아름다운 사람일 것이다. 빛나는 눈동자를 지녔을 것이고 내가 묻는 어떤 질문에도 흔쾌히 답을 내줄 것만 같다. 혁명가, 소설가, 인권운동가, 전사처럼 자신의 생을 소모했던 니나, 그런 니나를 18년 동안 목숨처럼 사랑했던 슈타인. 둘 가운데 누가 더 사랑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둘 가운데 누가 상대를 놓아주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사랑했다는 게 중요하다.

 

 니나는 여전히 삶의 한가운데 있다. 때때로 죽음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며 앞으로 나간다. 삶에 굴복당하지 않기 위해 살아간다. 삶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살아간다. 소설 속 니나가 아닌 세상의 모든 니나가 그럴 것이다. 저마다 삶의 한가운데를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는 생의 의미를 알려고 했어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죠. 만약 의미를 묻게 되면 그 의미는 결코 체험할 수 없게 돼요. 의미에 대해 묻지 않는 자만이 그 의미가 뭔지 알아요.’ (319~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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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6-07-05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책입니다. 다시 읽고싶어지네요. 자목련님 리뷰 읽으니까. 처음 읽었을 때가 사춘기였는데_ 중년이 되어 읽는 맛은 또 어떨까 궁금해요.

자목련 2016-07-06 15:49   좋아요 0 | URL
사춘기에 이렇게 좋은 책을 만나셨다니, 멋진 야나 님!!
 

 

 한 해의 절반이 사라졌다. 사라진 건 아니다.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아두고 싶었지만 나를 뿌리치고 떠나버렸다. 무엇을 하며 보냈는지 차마 말할 수 없다. 게으름이 게으름을 낳고 미련이 미련을 낳고 주저함이 주저함을 낳고 의미 없음이 의미 없음을 낳았다. 어제가 오늘을 낳았고 오늘은 내일을 낳았으니, 어제가 내일이 된 것이다. 이런 마음을 목사님이 아셨는지 새벽 기도에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다.

 

 한 친구는 집을 계약했고 한 친구는 가을에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했고 친한 동생은 내년에 한국을 떠나 먼 곳으로 갈 거라 말했다. 한 친구는 내게 속상함을 토로했고 한 친구는 넋두리처럼 쏟아냈고 동생은 진지한 계획을 들려주었다. 들어주는 일, 응원과 격려를 해주는 일, 마음으로 기도하는 일이 모두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말을 받아든 짧은 순간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담아두고만 말았다. 작은 언니의 말라위행은 조금씩 구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민정의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과 이장욱의 시집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이 나왔다. 시집의 소식은 언제나 반갑고 설렌다. 그런데 이상하다. 기쁨이 신선하지 않다. 누군가의 시집을 나는 기다리고 있는데 그게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은희경의 소설집 『중국식 룰렛』을 이번엔 제대로 읽고 싶다. 안대회의 『문장의 품격』,  최영옥의 『영화가 사랑한 클래식』도 마저 읽어야 한다. 선명한 슬픔의 그림자를 밟고 있는 듯했던 『9년 전의 기도』는 좋은 리뷰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비와 바람과 우산의 시간으로 채워질 7월의 책이라 할 수 있는 윌리엄 트리버의 『비 온 뒤』도 만나야지. 상자 속 가득했던 뽀얀 감자와 붉은 자두는 자취를 감추고 나는 살이 찌고 있다. 흘리는 땀보다 더 많은 살들이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인다. 빨간 여름이 시들해지는 것만 같다. 빨간 여름이 시시해지는 것만 같다. 감자를 더 들여야 하나, 고민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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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7-01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밖엔 비가 오고 있어요.
자목련님 좋은하루되세요.^^

자목련 2016-07-01 16:55   좋아요 1 | URL
이곳도 강한 바람과 함께 많은 비가 내리고 있어요.
서니데이 님도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생활이라는 생각 창비시선 392
이현승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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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이 주는 기억은 잔혹하다. 잊고 있었다고 믿었던 기억까지 소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신이 아닌 몸의 기억인지도 모른다. 모든 감각들이 다시 살아나 나를 증명한다고 해야 할까. 근처에 사시는 고모와 고모부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차는 폐차를 할 정도였는데 큰 부상은 없으셔서 긴 시간 병원 신세를 지녔다. 병원을 떠올리면 사흘에 한 번 바뀌던 주사 바늘과 함께, 끔찍했던 중환자실의 풍경이 떠오른다. 반복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불현듯 찾아오는 공포는 막강한 힘을 지녔다. 설명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통증의 모양과 형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삶을 지배하는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잠으로의 도피뿐이다. 환상통과는 다른 진짜 통증, 이겼다고 여겼지만 이기지 못했나 보다. 병실 번호와 불친절하면서도 자신의 할 일을 다했던 간호사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라 생활이다. 멈춰지고 고여있는 생각이 아니라 나아가는 생활, 살아지고 살아내야 하는 생활이다. 

 

 

 생활이라는 생각

 

 

 꿈이 현실이 되려면 상상은 얼마나 아파야 하는가.

 상상이 현실이 되려면 정말은 얼마나 깊어야 하는가.

 

 참으로 이기지 못할 것은 생활이라는 생각이다.

 그럭저럭 살아지고 그럭저럭 살아가면서

 우리는 도피 중이고, 유배 중이고, 망명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뭘 해야 한다면

 

 이런 질문,

 한날한시에 한 친구가 결혼을 하고

 다른 친구의 혈육이 돌아가셨다면,

 나는 슬픔의 손을 먼저 잡고 나중

 사과의 말로 축하를 전하는 입이 될 것이다.

 

 회복실의 얇은 잠 사이로 들치는 통증처럼

 그렇게 잠깐 현실이 보이고

 거기서 기도까지 가려면 또

 얼마나 깊이 절망해야 하는가.

 

 고독이 수면유도제밖에 안되는 이 삶에서

 정말 필요한 건 잠이겠지만

 술도 안 마셨는데 해장국이 필요한 아침처럼 다들

 그래서 버스에서 전철에서 방에서 의자에서 자고 있지만

 참으로 모자란 것은 생활이다.  (36~37쪽)

 

 

 일상으로의 복귀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주어진 하루를 온전히 소비하는 일로 시작된다. 잠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제대로 된 생활의소비가 필요하다. 겨울을 잊고 살았던 우리에게 잔인할 정도로 가혹한 추위를 몰고 오는 날들, 아이스크림과 냉면으로 더위를 달래는 여름의 시간,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하다. 쏟아지는 햇살을 부여잡고 울고 싶기도 하다. 겨울이라서 그런가 보다. 한강을 얼게 한 추위 때문에 그런가 보다. 친한 동생이 어느 시절 들려준 이런 말이 생각난다. 태어난 게 죄라는... 우리는 살면서 그 죄 값을 치루는 게 아닐까.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써 내려가는 글과 쏟아내는 말들에 대한 값도 지불해야 한다. 삶이라서 그렇다. 생활이라서 그렇다.

 

 

 인정도 사정도 없이

 

 

 누가 나를 좀 때려주었으면 좋겠다.

 누가 여기서 좀 꺼내주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재난이 이웃사촌 회갑처럼 잦은 조국이지만

 나 치매 걸리면 조용히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배우자처럼

 죄송의 말이 재앙보다 더 잔인하게 들린다.

 

 끔찍한 악몽을 꾸는 사람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빨래처럼 쥐가 나고 몸이 꼬이듯

 맞은 뺨을 어루만지면서 우리가 깨어날 때

 결국 불안을 일깨우는 것도 안도이다.

 

 왜 나빴던 기억은 영원한 걸까.

 우리는 언제라도 극복 가능하지만

 거기서 영원히 나갈 수는 없다.

 터널과 터널 사이 구간의 운전자처럼

 백일에 눈이 아프다.

 

 겉은 젖고 속은 타들어가는 이곳에서

 지금 살아 있다는 것보다 끔찍한 재앙은 없다.

 차라리 누가 나를 좀 때려주었으면 좋겠다.

 누가 용서라는 말을 없애버리면 좋겠다. (84~85쪽)

 

 

  기억해야 할 기억들이 있다. 망각을 이겨내야 할 기억들이 있다. 생활을 생활로 만들어내는 힘이 되는 기억들이 있다. 그것들이 삶을 지탱한다. 그것들이 삶을 살게 만든다. 울고 싶은 날도, 화를 내고 싶은 날도 생활의 연속이다. 내게 부족한 건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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