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부터는 오디를 먹는다. 줄지 않는다. 매년 오디를 맛볼 수 있는 건 권사님 덕분이다. 작년에 앵두를 주신 권사님이다. 크기가 오디였다. 손으로 잡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오디 물이 들었기 때문이다. 젓가락으로 집어먹다가 비닐장갑을 끼고 먹었다. 아, 나는 이런 어른이 돼버렸다. 오디나무의 열매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손으로 마구 따먹었는데 말이다.





어렸을 때 먹었던 오디의 크기는 아주 작았다. 그리고 이렇게 검붉은 쪽에 가까운 색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개량종 오디나무가 아닐까 싶다. 이상하게도 어릴 적 먹었던 오디의 맛이 그리워진다. 형언할 수 없는 단맛의 기억은 이렇게 크고 탐스러운 오디의 맛과 비교할 수 없다. 뇌가 기억하는 맛이라고 할까.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맛일지도 모른다. 잡히지 않는 맛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오디의 맛을 지울 수가 없다.


하루가 다르게 작았던 열매는 조금씩 커지고 어제보다 힘이 센 더위가 몰려온다. 작년에도 이렇게 더웠던가. 6월에 정말 더웠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더웠다는 것 정도다. 아직 선풍기는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곧 꺼낼 것 같다. 올여름에는 얼마나 많은 비가 올까 걱정이다. 친구와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습기를 하나 장만할까 싶다고 말했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제습기는 정말 좋은 기능이 많다고. 정작 제습기 상품 목록을 보내온 건 친구였다. 사용하고 있는 제습기가 있지만 하나 더 있다면 편리할 것이다.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하다.


나의 읽기 효율은 낮아지고 있다. 나이 탓을 해야 할까. 집중력이 떨어지는 게 당연하니까. 그러나 읽고 싶은 마음은 아직 충분하다. 김연수, 김기태, 비비언 고닉의 책을 샀다. 비비언 고닉의 에세이 『끝나지 않은 일』는 이 책에 대한 좋다는 평가가 가장 많은 듯하다. 그래서 기대가 크다. 천천히, 나중에 읽고 싶은 마음도 있다. 이 열기가 조금 식은 후에 말이다. 게으름을 대비한 생각이다.






정작 『디 에센셜 김연수』야말로 아주 천천히, 아주 나중에 읽지 않을까 싶다. 우선은 사 두는 마음. 소장했다는 어떤 뿌듯함으로 말이다. 이렇게 김연수의 책이 한 권 더 늘어난다. 김기태의 첫 단편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기다렸던 책이다. 두 개의 단편으로 만난 그의 소설이 좋았다. 이 한 권에 담긴 다른 단편들도 분명 그러할 거라는 기대를 감출 수 없다.


주말인 내일은 비가 올 거라고 한다. 주말마다 내리는 비는 그 간격을 줄이고 일주일 내내 비가 내릴지도 모른다. 장마를 검색한다. 코킹 공사를 한 덕분에 장마에 대한 걱정의 일부는 줄었다. 얼마나 많은 비를 품었을까. 얼마나 무섭게 쏟아질까. 미리 걱정하지 않으려 해도 걱정이 달아나지 않는다. 오디처럼 검붉은 여름의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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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4-06-07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월부터는 주말 마다 비가 오는 것 같아요. 날씨가 한여름처럼 기온이 올라가고요.
과일가게에서 오디를 본 적이 있긴 한데 물이 드는 과일인 건 몰랐어요.
자목련님 잘 읽었습니다.
좋은하루되세요.^^

얄라알라 2024-06-07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전 산에 갔다 계곡 마른 걸 봤기 때문에 비 소식은 반갑네요^^ 그런데 저도 오디가 저리 검은 색인줄 처음알았어요. 보라빛인줄..^^
 
루시 게이하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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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루시의 발걸음을 상상한다. 루시의 눈빛, 루시의 옷차림, 루시의 피아노 연주. 그 모든 것을 놓치고 싶지 않다. 좋은 소설이다.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이 빚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 우리네 인생이다. 다락방 님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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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6-05 1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말씀을요!! 🙋‍♀️

자목련 2024-06-07 15:42   좋아요 0 | URL
💕 💕
 
마지막 욕망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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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때문에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랑을 아프게 하고 영원한 고통을 주고 죽음으로 돌려주고 싶었다는 게 맞겠다. 물론 나는 죽지 않았다.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내 사랑이 보잘것없거나 특별해서가 아니다. 죽음에 골몰했던 순간이 지나니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스워졌다. 사랑은 그런 것일까. 잘 모르겠다. 알고 싶지 않다. 사랑은 알려고 할수록 단단하게 벽을 쌓는다. 소중하고 온전했다고 믿었던 사랑은 한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영혼까지 잠식했던 사랑은 아주 먼 옛날 흩어진 기억의 조각으로 남는다. 나는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가. 이게 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마지막 욕망』 때문이다.


늪처럼 빠져드는 보뱅의 문장, 읽고 있지만 나갈 수 없고 헤매게 만드는 문장, 그러나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문장.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죽음. 아니 욕망이라고 해야 맞을까. 그러니 그냥 쓴다. 잘 몰라서 여전히 보뱅의 문장에 갇혀서. 선명한 죽음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을 뭐라 말해야 적당할까. 사랑에 대한 갈구, 욕망.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어서 죽음으로 답할 수밖에 없는 간절함. 절절한 사랑일까. 천천히 죽음이 움직이는 이런 문장에 나는 반하고 만다. 그렇다고 죽음을 찬양하는 건 아니다.


블랙베리나 라즈베리의 거품처럼 솟았다가 솜털처럼 미지근하게 흘러내리는 피가 생생히 느껴졌다. 마치 첫 태양에 살짝 베인 꽃이 벌어지듯이. (10쪽)


마치 피가 땅에서 흘러나오고 그 땅이 사라져 가듯이. 몸이 가벼워지고 조금씩 비워진다. 기이하고 완전한 부드러움. 흡사하다. 당신이 나를 끌어당겨 꽉 안았을 때, 나를 숨 멎게 하고 풀어주었던 그 부드러움과 참으로 흡사하다. (11쪽)


소설 속 ‘나’는 ‘당신’이 선물해 준 철필로 나를 죽음을 실행한다. 그토록 사랑한 당신을 남겨두고 나는 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일까. 이제 둘 사이의 사랑을 만나볼 차례다. 나와 당신은 연인이다. 은밀하고 은밀한 연인, 불륜이다. 나에게는 남편이 있고 딸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죽음과 하나가 된 내가 들려주는 당신에 대한 이야기, 당신과 나눈 사랑 이야기. 당신은 호텔에 머물며 글을 쓰는 사람이다. 당신과 호흡하고 당신과 마주한 풍경들, 함께 느꼈던 모든 감정들, 그 떨리는 숨결, 그 비밀스러운 기억을 섬세한 감각으로 펼쳐놓는다.






은밀한 사랑은 둘만의 공간을 채우고 세계를 확장하지만 그 세계의 밖은 대로 고통으로 채워진다.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은 보낼 수 없는 편지가 되고 나는 그 편지처럼 접혀진다. 사랑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삶을 흔드는 것일까. 누군가 나와 당신의 사랑이 공개할 수 없는 지지 받을 수 없는 사랑이라 그렇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정녕 그런 것일까. 아닐 것이다. 설령 비난과 책망이 난무해도 사랑 안에 거한 이들은 그 사랑 안에서 저마다 특별하다.


기다림. 기다리기. 올 수 없는 것,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나요? 사랑이 저주임을 알고 있나요? 당신에게서 삶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고서는 살아 있게 남겨두고, 일상을 벼락에 맞아 불타버린 황폐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을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차라리 나을 정도입니다. (59쪽)


나는 다정함과 잔인함이 욕망의 이면에 서로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존재는 부재로 인해 성장했기에 부재를 피할 수는 없었다. 탄생은 죽음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때로는 나가는 일이 포기나 멀어짐보다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다. (74쪽)


당신에겐 나 아닌 사랑이 있었다. 당신이 사랑한 그녀. 오렌지 나무로 남은 사랑을 당신이 잊지 못하는 걸 안다. 그러니 당신이 떠날 때에도 당신을 이해한다. 이제 조금 선명해진다. 당신은 떠났다. 내가 선택한 죽음의 이유는 명확해졌다. 아름다운 은율로 흐르던 둘의 시간, 기다렸던 계절과 꽃. 당신이 없는 삶은 당신을 또렷하게 불러온다. 여기 없어서 당신은 존재한다. 여기 없어서 당신이 더 생생하다. 당신이 없어서 견딜 수 없는 삶.


사랑이 시작되는 이유도 별로 없지만, 사랑이 끝날 때는 더더구나 아무런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129쪽)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어떤 것일까. 상대를 향한 사랑이 깊을수록 나는 희미해지는 것일까. 그 사랑이 짙어갈수록 나의 형체는 사라지는 것일까. 어떤 말로도 정의내릴 수 없는 사랑. ‘나’는 사랑이 끝났음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일까. 당신이 아닌 나만이 사랑의 끝을 정할 수 있었다. 아니, 사랑의 완성을 위한 선택이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온몸에 새겨진 사랑을 간직한 채 당신에게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말이다. 우리가 될 수 있고 우리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마지막 욕망이었던 것이다. 어떤 주저함과 두려움 없이 죽음을 통해 당신에게 향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게 아니다.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나’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정성을 다한 곡진한 사랑이다. 끝나지 않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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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5-30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을때는 이해를 잘 못했는데 자목련님 리뷰를 보고 아하! 이랬습니다. 너무 어두운 보뱅에 적응을 못했는데 다시 읽어봐야 할거 같아요~!!

자목련 2024-05-31 12:01   좋아요 1 | URL
보뱅의 책 가운데 제일 읽기 어려운(?) 소설이었다고 할까요. 아름답지만 무겁고, 흐터진 상징과 언어를 줍느라 힘든. 그러나 탄성을 자아내는 보맹의 문장이란!

서니데이 2024-06-01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편안한 주말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부터 6월 시작입니다.
좋은 일들 가득한 한 달 되시고,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좋은 주말 되세요.^^

자목련 2024-06-03 13:00   좋아요 1 | URL
조금씩 더위를 실감하는 날들이에요.
서니데이 님, 즐겁고 활기찬 날들 이어가세요^^
 
당연하게도 나는 너를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이꽃님 지음 / 우리학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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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

우리가 저수지에 갔을 때 말이야. 그날 유난히도 어두웠잖아. 태어나서 내가 겪은 수많은 밤들 중에 제일 어둡고 외로웠던 밤이었어. 내가 그 밤을 잊을 수 없는 만큼, 너도 그날을 잊지 못하겠지. 그런데 그거 알아? 그날 일을 잊지 못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거. (7쪽)


이런 문장을 읽고 무엇을 상상하게 될까. 분명 그 밤의 저수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일까,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목격자일까. 섣부른 판단일지 모른다. 목격자라니, 그럼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일까. 이꽃님은 이번에도 남다르다. 내가 예상한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사라진 소년 해록, 그리고 같이 있던 소녀 해주.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경찰이 해주를 찾아온 건 당연한 일이다. 해록의 실종, 그 실마리를 해주가 잡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경찰을 향한 해주의 대답은 날카롭고 불안하다. 뭔가 감추는 것만 같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 서툰 독자는 해주를 의심한다. 나 역시 그러했다. 보기 좋게 이꽃님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말았다.


소설의 첫 문장처럼 나(해주)는 너(해록)에게 너와 나 사이의 이들을 들려준다. 그리고 해주를 찾아온 경찰이 둘에게 일어난 일을 들려준다.그러니까 사랑 이야기라고 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과 객관적인 시선. 엇갈린 두 개의 이야기, 무엇이 진짜일까. 나와 너는 사귀는 사이였다. 첫 만남을 시작으로 너무 예쁜 커플로 학교에서도 유명했다. 그런데 어쩌다 너와 나는 이런 결말을 맞았을까.


너를 만나면서 나는 모든 걸 너에게 맞췄다. 내가 좋아하는 옷이 아니라 네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네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고 친구도 만나지 않았다. 오로지 너만 바라보는 내가 되었다. 친구들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고 친구들은 떠났다. 너를 위해 나의 모든 걸 주었는데 너는 나를 멀리했다. 너를 좋아해서, 너를 사랑해서 그랬는데 너는 나를 무시했다. 너를 위해서 아빠의 명품시계까지 훔쳐 선물했는데 너는 그걸 친구에게 주었다. 그리고 미안해하기는커녕 화를 내고 나를 외면했다.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잘못된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친구들의 조언을 질투로 여긴 나. 해주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아프가 안타깝다. 해주가 사랑이라고 믿는 게 사랑이 아닌 가스라이팅이라는 게 보이기 때문이다. 정말 해록은 나쁜 아이일까. 이쯤 되면 경찰관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경찰관이 말하는 해주와 해록의 관계는 반대였다. 해록을 지배하는 건 해주였다. 해록을 가스라이팅하고 협박하고 있었다. 해록은 어떻게 해서든 해주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해주를 꿰뚫어 보는 경찰관이 들려주는 곰팡이 이야기.


“그거 아니? 곰팡이는 한번 피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거. 나주에는 피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게 곰팡이에 전염되고 말아. 그런데 무서운 건 이거여. 곰팡이가 더럽고 건강을 해친다는 걸 알면서도, 어느 순부터는 곰팡이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거든. 매일 아주 조금씩 조금씩 번져 가니까. 곰팡이가 온 집안을 점령해 옷과 가구까지 모조리 썩어 가는데도 심각한 줄 모르는 거냐. 그 집에서 꺼내 입은 옷에도 곰팡내가 진동하는데, 몰라. 늘 곰팡이랑 함께니까 모르는 거지.” (168쪽)


의사인 아빠와 대기업에 다니는 엄마가 있었지만 늘 혼자였던 해주는 외로웠고 누군가 필요했다. 그래서였을까. 그 간절함이 집착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좋아하니까, 사랑하니까 해록에게 그래도 된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티가 나고, 숨기고 싶어도 자꾸만 들통나 버리거든요. 그 반대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어도 그것이 진심으로 당신을 설레게 하는 것인지, 망설이고 주춤하게 만드는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겪고 있을 많은 사랑이 따뜻함일지 두려움일지 알 수 없습니다. 그걸 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겠지요. (「작가의 말」 중에서)


빠져드는 소설이지만 복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불안한 십 대의 감정을 잘 그려낸 이 소설을 뭐라 불러야 할까. 추리소설, 스릴러, 심리소설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해주의 말처럼 사랑 이야기라 해야 할까. 사랑이었을 것이다.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상처와 고통은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맞추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건강한 사랑이라는 걸 말이다. 사랑하니까 당연하게 나는 너를 참아주고 감당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걸. 그건 사랑이 아니라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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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프팅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21
범유진 지음 / 다산책방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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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운동회, 소풍, 수학여행, 친구, 울타리, 선생님, 공부, 야간자율학습, 점심시간, 이런 단어가 생각난다. 그러다 특정 학교로 마음이 모아진다. 내가 좋아했던 선생님을 만난 학교, 지금까지 나를 응원하는 친구를 만난 학교. 지금 아이들에게 학교란 어떤 곳일까? 아마도 내가 모르는 이미지의 학교일 것이다. 공교육의 부재, 입시지옥, 학교폭력, 부실급식 같은 게 아니더라도 말이다.


범유진의 청소년 소설 『쉬프팅』은 학교란 어떤 곳이며, 학교의 역할은 무엇인지 묻는다. 아니, 학교가 정말 필요한지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냐고 묻는다. 소설 속 ‘로아’와 ‘도율’를 통해 그 질문에 답하게 만든다.‘로아’와 ‘도율’에겐 학교가 전혀 다른 공간이다. 모범생이며 클라이밍 선수인 로아는 학교가 정말 좋다. 모두에게 친절하고 웃는 얼굴의 로아에게 아버지의 폭력과 엄마의 무관심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학교가 도피처다. 학교폭력을 당하는 도율은 학교가 정말 싫다. 수업 시간에 집중도 못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을 저주할 방법만 연구한다. 정말 그런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학교폭력 실태 조사서에 신고를 했지만 담임은 장난이라는 가해 아이의 말을 믿을 뿐이다. 분노를 참지 못한 도율은 사고를 저지르고 달아난다.


우연히 로아와 도율은 쇼핑몰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다. 그리고 도율은 로아에게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방법 쉬프팅에 대해 설명한다.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질까. 정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곳에서는 학교 따위는 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말했잖아. 평행세계에 갈 수 있다고. 그걸 쉬프팅이라고 부른대. 우리도 한번 해보자! 여기 빈 건물이니까 다른 사람은 엘리베이터 안 탈 거 아냐. 평행 세계 관심 없어?” (41쪽)


도율의 간절함이 통했던 것일까. 로아와 도율이 마주한 세계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계급이 존재하는 학교, 아니 학교가 아닌 ‘디마이’란 공간이었다. 선생님이 아닌 매니저가 있었고 디마이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일을 해야 했다. 보호는커녕 노동력 착취가 맞았다. 디마이를 벗어난 어디서든 차별, 학대가 자행되었다. 학교가 사라진 세계는 천국이 아닌 지옥과 같았다. 그러나 도율은 이 세계가 만족스러웠다.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은 디마이에 없었고 어떤 일을 저질러도 매니저가 다 해결해 주었다.


로아는 아니었다. ‘디마이’에 갈 수 없었고 아버지의 폭력은 이곳에서도 여전했다. 로아에게는 어떤 울타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로아의 상황은 방황하는 가출 청소년이나 제도권에서 벗어난 갈 곳이 없는 자퇴 학생의 모습이었다.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디마이는 무너져야 했고 디마이 밖의 아이들을 위해 장치가 필요했다. 학교가 있던 세계나 학교가 없는 이곳에서도 온전히 아이들을 위한 공간은 없었다. 로아는 이곳에서도 부모로부터 독립을 원했다. 쉬프팅을 해서 이전을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우선 쉬프팅이 가능한지 알아야 했다. 그러려면 도율이 필요했다. 하지만 도율은 이 세계가 좋았다. 로아와 도율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 선택은 행복을 위한 것일까. 로아가 깨달은 것처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공간이 학교야 할 것이다. 아니, 학교가 아닌 다른 선택지도 있어야 한다.


‘내가 머물고 싶은 곳은 학교 그 자체가 아니었어.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그들과 있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사랑했던 거야.’ (207쪽)


로아와 도율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택했을까. 잘못을 반성하고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즐거움을 발견했을까. 평행세계로의 이동이라는 익숙한 소재의 SF 소설이지만 학교의 부재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학교란 무엇이며, 지금 학교는 괜찮은가 고민하게 만든다. 과거와 다르게 다양한 홈스쿨링과 대안학교가 존재하지만 지난 코로나를 돌아보면 공교육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게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야. 누구든 옷장 안에 해골을 감추고 있어.” (157쪽)


소설 읽고 떠나지 않는 한 문장. 로아의 말이 아프다. 상처를 감추며 살아가는 게 아니라 상처를 말할 수 있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 믿고 기댈 수 있는 어른이 있는 그런 학교가 필요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이 소설은 어떻게 다가올까. 이런 소설을 읽을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게 아닐까 염려된다. 제발 그러지 말기를. 친구들과 읽고 어땠는지 자신의 생각을 나눌 시간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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