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한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어쩌면 냉장고를 가장 많은 시간 바라보는 이는 나일 수 있는데 말이다. 하루 종일 아침, 점심, 저녁 세 번 반찬을 내기 위해 냉장고를 열고 중간 중간 물을 마시거나 과일이 들어 있는 날엔 과일을 꺼내고, 냉동실에 아이스크림이나 얼려 둔 초코하임 같은 과자를 먹느라 열어보는 데도 나는 냉장고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확인하고 보니 단단하게 얼어있던 것들이 녹고 있었다. 끓여놓은 삼계탕, 종종 썰어서 락앤락 통에 담아둔 파는 흐물흐물해졌다. 우선 세기를 강으로 돌려 놓았다. 그러고 나니 언제 얼려놓은지 모르는 꽃게랑 떡들이 괜시리 안쓰럽게 여겨졌다. 살림 잘하는 주인을 만났다면, 이렇게 냉장고를 방치하지는 않았을 터.   

 어제는 오전 내내 곰국을 끓였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꼬리곰탕이다. 핏물을 빼고 한소끔 끓였다가 한 번 물을 버리고 강한 불에서 약한 불로 조절하며 끓였다. 집 안에 건강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곰탕을 끓이면서 이런 책들을 뒤적였다. 읽다 만 한차현의 소설을 다 읽었고,  조경란의 단편 <밤이 깊었네>, 정이현의 <어금니>, 박완서님의 <티타임의 모녀>란 단편을 읽었다. 조경란과 정이현의 소설은 재독이었다. 그러나 새로웠다.  


    

 

 

 

 

 

 

 

 

 세 작가들의 소설엔 모두 엄마가 등장한다. 알츠 하이머를 앓는 엄마, 젊고 세련된 엄마, 악착같은 삶을 살아온 엄마들을 차례로 읽었다.  박완서님의 <티타임의 모녀>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어머니는 스쳐 지나가듯 부엌방으로 사라졌다. 나는 가스불에다 삐삐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삐삐 소리가 나기도 전에 어머니는 옷을 갈아입고 청소기를 끌고 나왔다. 보라색 바탕에 노란 꽃 무늬가 있는 어머니의 고무줄 바지는 뭉치면 한줌밖에 안 되게 하늘하늘한 천이다. 어머니는 아마 손지갑에다 그걸 숨겨가지고 왔을 것이다. 어머니의 손지갑은 그래서 보통 지갑보다는 크고 핸드백보다는 작다. 

 뭉치면 한줌밖에 안되는 고무줄바지가 엄마들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시집간 딸의 아파트에 다니러 온 엄마는 우아한 옷 매무새가 아닌 딸을 대신해 살림을 봐주기 위해 일하기 편한 옷을 챙겨온 것이다. 엄마들은 대체로 그런 걸까.   

 점심부터 계속 곰탕을 먹고 있다. 어제 저녁과 아침엔 앓고 있는 냉장고를 옆에 두고 먹었다. 냉장고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은 오늘 서비스센터 수리 기사분이 다녀가고서 금세 사라졌다. 수리한 냉장고는 다시 얼음을 얼리고 제 할 일을 다하고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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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9-08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장고가 젊음을 되찾은 건가요? ^^
냉장고를 떠올리면 엄마가 같이 떠오르고, 맛있는 요리 생각이 떠오르는 건, 고무줄바지 같은 엄마들의 상징 때문일까요. 저 책들이 모두 궁금해집니다!

자목련 2011-09-14 11:17   좋아요 0 | URL
명절, 잘 보내셨나요?
냉장고는 젊음을 찾은 건 아니지만, 잘 돌아가요.
단편의 내용이 어머니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제겐 엄마가 먼저 보였네요.
덧글, 고맙습니다.^^*
 

 9월이 되었다. 바람은 달라졌고 내 입술은 덥다라는 말을 삼켜버렸다. 몸은 가을이라는 걸 느끼고 있으나 아직 가을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가을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 계절이 가을이다. 맛있는 바람이 불고 생명을 잉태하기 적절한 계절이라는 걸 안다. 그래도 나는 가을을 좋아하지 않는다. 9월로 시작하여 10월, 11월, 그리고 겨울까지 때때로 우울하고 때때로 쓸데없이 감정을 소모한다. 가을을 앓기 시작한 뒤로 나는 가을이 두렵다. 매년 다른 색으로 다른 속도로 다가오며 곧 사라질 가을의 정체는 불확실하다.

 애매모호한 사랑 고백같은 게 봄이라면, 사랑이 끝난 자리에서 주저하는 마음은 가을이라고 해야 할까.   

  

 

 

 

 

 

 

 

 

  

 여튼 9월과 가을은 왔고 책도 왔다. 좋아하는 동생의 선물로 창작과 비평이 여름호에 이어 가을호가 도착했다. 백가흠의 소설집 <힌트는 도련님>, 김선재의 첫 소설집 <그녀가 보인다>, 심보선의 두 번째 시집 <눈 앞에 없는 사람>, 90년대 학번을 추억에 빠지게 할 한차현의 <사랑, 그 녀석>, 섹스를 테마로 쓴 <남의 속도 모르면서>까지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걸 확인시키려는 듯 말이다. 

 작년 9월엔 곤파스의 손길로 유리가 사라진 채로 보냈다. 유리가 사라진 베란다 창틀에 기대어 같은 모양새의 여러 집들을 바라보며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올 해 9월은 아늑하다. 9월을 맞이해 내가 한 일은 방의 구조를 변경한 것이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9월이 되서 한 일은 아니다.

 내 방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방이다. 침대 옆에 있던 컴퓨터 책상을 침대 아래쪽으로 옮겼고 작은 책장의 위치도 바꿨다. 아직은 이 위치가 낯설지만 곧 익숙해질 것이다. 책들을 정리해야 한다. 소유해야 할 책들과 그렇지 않은 책들, 읽어야 할 책들과 그렇지 않은 책들, 당장 읽어야 할 책들과 조금 미뤄 읽어도 될 책들,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 리뷰를 써야 할 책들.

 9월엔 추석도 있다.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송편을 먹게 될 것이고, 마음이 분주할 것이다. 도로를 메우는 차들을 보면서 떠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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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9-08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들을 정리하실 생각이시군요. 책장 위치를 바꾸시기도 하셨구요.
가구들의 위치를 바꾸고 나서 한동안 느껴지는 낯설음이 전 왠지 좋더라구요. 그러다 또 어느날 다시 원래대로 복귀를 해놓게 되면 다시 약간의 낯설음이 느껴지기도 하구요. 원래대로 돌아왔는데도 느껴지는 그 낯설음 또한 재미난 감정이더라구요.

자목련 2011-09-14 11:18   좋아요 0 | URL
방 안에 간이 책장과 책상의 위치를 바꾸었어요.
제대로 된 책장이 없기도 하고, 공간에 비해 책이 많아서 정리해야 하는데,
여전하게 게으름을 피우고 있답니다.
바람이 좋은 오전입니다. 평온한 하루 이어가세요.^^
 

  

  

 

 허전함이 무언가를 잡았던 느낌을 기억하고 있는 손이라면, 공허함은 무언가를 잡으려고 애써보았던 손이다. 더 나아가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후회’ 같은 것이다. 휘둘렀던 무수한 손들이, 그 에너지들이, 공허함의 배후에 후광처럼 있다. 애쓴 흔적이 썰물처럼 쏴, 하고  빠져나가면서 무늬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언가를 애써 잡아보려고 마음을 크게 먹었던 모든 손아귀에는 공허함이 묻어 있다. 허탕이 되었든, 무언가 잡히긴 했으나 바라던 것은 아니었든, 원하던 걸 잡긴 잡았는데 꼭 쥔 손을 펴보았을 때에 그것이 초라해 보였든, 잡아챈 그것이 원하고 원하던 바로 그것이든, 그 모든 손 안에 공허함은 존재한다. 공허함은 휘둘러보았던 마음의 손, 그 손이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매복해 있다. 그런 점 때문에 공허함은 허전함보다는 훨씬 절대적이며, 훨씬 철학적으로 빈곤한 상태에 도달해 있다.   김소연의 <마음사전 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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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는 생일 주간이었다.(이웃님의 표현을 빌려왔다.) 그러니까 생일이었던 4월 9일을 포함한 주가 되겠다.  생일 하루 전에는  고교 선배인 J 언니가 달콤한 케익을 들고 찾아왔다. 차를 마시고 그간 나누지 못한 일상을 들려주고 들었다. 서로가 좋아하는 작가와 책에 대해 시와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전에 고운 스카프가 먼저 도착했다. 내가 사랑하는 C가 보낸 것이다. 목이 아닌 손목에 둘렀다. 맨 살에 닿는 느낌이 부드럽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말이다. 당신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야. 고마운 나의 그대, 사랑해!!    

 

  

 큰 언니가 사서 택배로 보내준 커다란 블루베리 컵은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블루베리와 딸기 두 가지다. 무척 갖고 싶던 컵이라 아주 좋다. 어떤 날은 녹차를 마시고, 어떤 날은 커피를 마시고, 어떤 날은 맥주 컵 대신 맥주도 마시고 싶은 컵이다. ㅎㅎ 과한 소비인지 모른다. 적어도 내겐 말이다.  저 컵을 구매하는 대신 책을 샀더라면 몇 권을 샀을까 생각을 했으니까. 



  

 생일 주간 내내 미역국을 먹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어찌하다 보니 그랬다. 해서, 정작 생일날 아침엔 미역국을 먹지 못했다. 날씨는 화장했고 기분도 좋았던 날이다. 저녁엔 외식을 했다. 때마침 식당에서 미역국이 나왔다. 가족들과 함께 먹는 저녁이라 더 좋았다. 생일도 365일 중의 하루일 뿐, 별반 다르지 않은 날일 수 있다. 그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없었다면 말이다. 그네들의 마음이 모아져서 나는 행복했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당신들에게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 안에 거하는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고맙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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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4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5 0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사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기어이 책을 사고 말았다. 그리고 다짐을 했다. 이제 당분간 책을 사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당분간 좋아하는 작가의 새로운 소설이 나와도 구매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과연 이 다짐을 지킬 수 있을까 의문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굳은 다짐을 하고 있다. 온라인 서점마다 남아있던 마일리지를 모아 모아서 산 책들이다.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 김연수 외 <깊은 밤, 기린의 말>, 김훈의 기행산문집 <풍경과 상처>, 고 박완서님의 <나의 가장 나종 지닌 것>, 서울 테마 두 번째 소설집 <서울, 밤의 산책자들>, 12명의 작가들의 산문과 문학에 대한 생각을 만날 수 있는 <불가능한 대화들>이 그것이다.  

 어제도 두 권의 신간이 도착했다. 구매하지 않았을 뿐, 책은 계속 오고 있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하여, 더 즐거이 책을 읽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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